05 한을 남기고 간 27회 총회 (손문준 목사의 증언에 따름)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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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란 일본 천황을 우상화하고 현재의 권력을 절대적인 세력으로 기정사실화하려는 일종의 망동으로서, 일본 제국주의 정책의 일환이었다. 신사참배의 불응은 천황신성 모독죄로 적용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절대 신으로 믿는 것처럼 일본 역시 천황을 절대 신으로 받들게 했다. 하나님께 가장 불경스런 일이 바로 인간을 우상화하는 일인데 일본은 상대적으로 우수한 총과 칼의 위력만 믿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했던 것이다.

 

온 국민이 하나님보다 일본을 더 무서워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이 폭압은 해방의 그 날까지 줄기차게 뻗어갔다. 결국 한국 교회는 어리석게도 일본의 물리적인 압력에 굴복하고 말았다. 신사참배는 종교 의식이 아니라 국민 의식이기 때문에 기독교 교리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억지로 합리화시켜 일본의 불경스런 정책에 아부하는 교회가 늘어갔다.

193899일 저녁 8시에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예수교장로회 총회 27회 회의가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열렸다. 이날 임원 선거가 있었는데 이때 일본 경관 97명이 회의 진행을 감시하느라고 여기저기 끼여 앉아 눈들을 번뜩거리고 있어서 분위기는 삼엄하기 짝이 없었다.

 

총회장엔 평북노회 홍택기 목사, 부회장엔 경남노회 김길창 목사가 각각 당선됐다.

총회에서는 신사참배는 애국적 국가의식이라고 하며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정했고, 신사참배하는 것은 불경이 아니라며 교회 지도자들 90%이상이 신사에 찾아가서 절하며 직접 시범을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사람들은 일본 제국주의 비호 아래 호의호식하며 편히 지낼 수 있었다. 지도층에 있는 자들도 성경을 고쳐라, 찬송도 빼라고 강요했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오점을 남기고 마침내 탄식소리와 함께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막을 내렸다.

 

당연히 신사참배에 저항하는 일은 교단 총회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고 몇몇 뜻이 통하는 사람들의 희생에 의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니 많은 어려움과 희생이 뒤따랐다. 1945년에 이르기까지 보배 같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2천명이나 일경에 붙잡혀 갖은 고문을 당했고 2백 개의 교회가 폐쇄되었고 또 50명의 순교자도 생겨났다.

 

나중에 나라가 해방되자, 총회에서는 다시 회의를 열어 신사참배가 하나님의 제1,2계명을 범하는 죄임을 확인했다. 그런데 해방 후에도 신사참배에 찬성한 목사들 중 더러는 오히려 순교자를 향해 앞뒤가 꽉 막힌 보수주의자라고 매도하는 이들이 있었다. 융통성 없는 성격 탓으로 스스로 제 무덤을 팠다는 것이다. 만약 그때 교회 천체가 일본의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나섰다면 오늘날 한국의 복음은 누가 책임졌겠느냐는 논리였다. 우리는 신사참배를 해가면서 이 나라 교회를 이끌어왔다고 오히려 큰소리쳤다. 보다 먼 장래에 이 나라를 하나님의 왕국으로 만들기 위해 때를 기다리며 일본의 정책을 묵묵히 따랐다는 식이다.

 

죄를 지은 자들이 더욱 당당해져서 옥중에서 온갖 고초를 다 겪고 나온 성도와 아침 이슬처럼 깨끗이 살다 쓰러져 간 순교자들을 향해 왜곡된 가치관으로 판단하며 교만하다느니, 어리석다느니 하며 여지없이 매장하려 들었다. 내가 회개했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냐 신사참배는 각자의 양심문제이니 회개할 것 없다 하며 회개하기는커녕 낯 뜨거운 논리로 자기들의 과오를 합리화하고 다녔다.

 

그러나 신사참배에 응한 목사들이 모두 그렇게 이기적이고 비양심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줄 뻔히 알면서 가족들, 특히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신사참배를 결심한 목사도 여럿이다. 배모 목사도 그런 목사 중의 한 분이다. 처음에 그분도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면회 온 부인이 당신 고집 때문에 자식들과 나는 죽게 된다며 애걸복걸 사정하는 바람에 의지가 꺾여 신사참배를 하고 감옥 문을 나왔다고 한다. 허약한 신앙, 허약한 내조의 슬픈 결과다.

 

믿음의 일꾼을 길러내던 평양신학교 역시 신사참배가 몰고 온 회오리바람 속에서 폐교를 당했다. 그 바람에 아버지는 1938316일에 받았어야 할 졸업장(33)을 한참 지난 37세 때 우편으로 받았다.

 

그 즈음 아버지는 자주 산에 올라가 기도를 하곤 했다. 산에는 아버지의 지정 기도석이 있었는데, 한번 올라가면 여러 날 동안 내려오지 않고 기도에 힘썼다. 쌀을 가지고 가서 물에 불렸다가 한 주먹씩 씹어 먹으면서 지냈다. 밤중에 기도를 시작하면 이튿날 해가 뜰 때까지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법이 없었다. 비가와도 눈이 와도 개의치 않았다. 아버지가 산에서 소리 질러 기도할 때면 그 기도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산 아래 동네 사람들은 아이고, 그 여우가 또 나왔구먼 하곤 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아버지가 산에서 기도를 하던 중 한밤중에 태풍이 몰아치고 홍수가 터졌다. 온 사방은 새카맣게 어둠에 잠겨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나무 덩굴, 풀뿌리 등 닥치는 대로 휘어잡고 온 문이 진흙으로 범벅이 되어 떠내려가다가 저 멀리 유일하게 보이는 불빛 하나를 발견하곤 죽을힘을 다해 간신히 그리로 갔는데, 그것은 절이었다.

여보시오하고 부르니 스님이 나왔다. 스님은 아버지를 빤히 쳐다보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사람이면 들어오고 귀신이면 썩 물러가라.

나는 사람이오.

아버지는 안으로 들어갔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참 지독한 분이다. 그래서 아버지에겐 손불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아버지는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외지 전도사로 일하면서 밀양에 있는 수산교회, 울산에 방어진교회, 남창교회, 부산의 남부민동교회, 양산에 원동교회 등을 개척했다.

 

우편으로 졸업장을 받은 후 아버지는 부산 지방의 선교사 대리가 되어 순회 전도를 다녔다. 신사참배 반대 운동이 그 목적이었다. 아버지보다 5세 위인 주기철 목사는 아버지와 한상동 목사를 향해 나는 북에서 싸울 터이니 제군들은 남에서 싸우라고 말씀 하셨다. 이들은 남쪽과 북쪽을 맡아 신앙투쟁하자며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러므로 이들을 체포하려는 일경의 손길 또한 늘 가까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미리 말을 하지만, 그 세 분은 1년 후 모두 검거되었다. 검거되기 전에 아버지가 애양원으로 가게 된 것은 그런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필연적 귀결이었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