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룡 박사의 인물특성

  선지자선교회

장차남(온천제일교회 원로목사)

 

들어가는 말

 

박형룡 박사는 한국 개신교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는 1930년대에 통상 평양신학교라 일컫는 조선장로회신학교 교수로서 한국 장로교회를 대변하는 신학자였고 1935년에 그가 펴낸 신학난제선평847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로서 한국인에 의해 한글로 저술된 최초의 신학서이다. 이 저서로 인해 박형룡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신학자로 부상했다. 1938년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 강요로 문닫기까지, 그후 일본으로, 만주로 떠도는 신세였으나 여전히 연구하고 가르치는 신학자로서의 길을 떠난적이 없다. 광복후 만주동북신학교, 부산고려신학교, 장로회신학교, 장로회총회신학교 교장을 차례로 역임하면서 1972년 퇴임시까지 교수하는 일을 계속했다. 은퇴후에도 1978년 별세하기까지 집필과 연구활동을 중단하지 않은, 신학자로서 외길 인생이었다. 1953년 그가 장로회 총회신학교 교장으로 취임 하였을때 기독공보는 보도와 특집기사를 실었는데(195389일과 97) 취임식 보도중에 이렇게 썼다. “70년 한국교회 사상 유례가 없던 대 식전이 지난 92일 대구 서문교회 예배당에서 개최 되었다. 장로회 총회신학교 교장을 한국인으로 하자는 총회 결의에 의하여 이사회에서 한국인 초대 교장으로 추대된 박형룡 박사와 김치선 박사와 계일승 박사를 취임케하는 동 예식은 한국교회의 신학수립에 기초를 세운것과 같은 엄숙한 식이었다. 전 평양신학교 교장 라부열 목사의 신학교 교장은 박형룡 박사로 하라는 유언에 의하여 본 의식은 남북통일장로회 총회산하 단일 신학교로서는 마포삼열 박사, 라부열 박사, 감부열 박사를 이어 제4대 의식에 해당하며 한국인 교수취임식은 초대 교장의 취임식이 되는 것이다라고(장로회신학대학교100년사 343,344). 과연 박박사는 1930년에서 1960년까지 한 세대간 한국교회 전체 판도에서 중심에 자리한 분이었다. 조선출 목사가 1931,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가서 다닐때의 평양 명망가를 열거하며 그 중에 박형룡의 이름을 말했을 만큼 그는 일찍부터 교계가 주목하는 명사였다(조선출 회고집:은발의 뒤안길23). 해방후 신설하는 고려신학교 교장엔 박형룡 박사를 모시기로 내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귀국이 지연되자 송상석 목사가 인천에서 작은 동력선을 세내어 위험을 무릅쓰고 봉천(현재는 심양)까지 가서 박박사와 그의 가족을 동반하여 왔다(허순길 지음: 고려신학대학원50년사47). 이렇게 만주에서 귀국하여 부산에 내려갔던 그가 이듬해 고신교장을 사임하자 고신이 분립했고 그가 상경하여 장신을 설립하고 총회가 직영하는 총신에 참여하자 기장이 분립했고 그가 WCC를 반대하고 선교사들과 등지자 통합이 분립했다. 그러나 통합과의 분열로 그의 영향이 절반으로 감소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최근의 예로 분열 50년인 2010년에 간행된 이성웅 지음헌법교리론에 보면 통합측의 개정판헌법해설서1’ 이라 하였으나 교리부문의 주요 내용들은 박형룡 박사의 교의신학 전7권에서 골고루 인용하고있다. 그러므로 박형룡 박사의 신학난제선평은 한국교회의 나침반이 되었고 그의 교의신학은 한국교회의 지침서가 되어 있다. 한철하 박사가 한국기독교 100년사 중 후기 반세기동안에 12백만 신도 수만 교회를 이룬것에 대하여 그 가장 큰 공로를 박형룡 박사에게 돌려야 한다. 그분이 보수신학을 한국교회에 확실하게 세워주지 않았다면 사실 한국교회가 오늘의 한국교회가 될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모든면에 흠잡을데가 없는 건실한 신학을 세워주신 일에 대하여 우리는 감사해야 하겠다.”고 한 말은 타당하고 공정한 평가이다(신학지남/통권제25243). 그동안 그가 끼쳤고 앞으로도 끼칠 그의 영향에 비해 한국교회가 박박사에 대하여 너무 무심했고 아는게 없다. 그가 자기에 대하여 자서전은 물론 신변잡기를 남긴바도 없기 때문이다. 거의 유일하게 남겨진세계견문록도 세계각국의 신학교를 돌아보고 학교 운영자 및 그 곳의 학자들을 만나 담소한 내용과 소회를 기술함이 주조를 이루는 것으로 세계 신학계의 동향과 신학교육의 현황을 한국교회 앞에 보고한 내용일뿐이다(박용규 엮음: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228,229). 그래서 신문의 취재, 주위 분들의 증언이나 기록 등 생애의 여러 편린들을 모아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뼈들이 모여 부활하되 큰 군대가 되었듯이 거인 박형룡의 진면목과 신학사상이 부활하여 새롭게 만개하기를 염원하는 뜻에서 일차적으로 그의 인물특성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박형룡은 학구적 성향의 학자형 인물이다.

우선 그는 향학열이 뛰어났다. 평북 벽동의 시골마을에서 1897년에 박기수씨의 4남중 장남으로 태어나 대주가(大酒家)인 부친의 빚으로 늘 쪼들렸고 급기야는 작은 진흙벽 초가집마저 팔고 산골 더욱 깊숙한 곳으로 이사해야 했다. 그곳에는 교회도, 예수 믿는 사람도 없었으므로 결단을 내려 기독교 계통의 중학교가 있다는 선천까지 무려 100마일의 길을 걸어서 왔다. 순전히 향학열과 신앙심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션 학당인 신성중학교를 찾아 입학을 청원하여 허락을 얻음과 더불어 사람보는 안목을 가진 교장의 배려로 작업반에서 일하며 고학으로 그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할수 있었다 (박용규 엮음: 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 168-171). 예전에는 아이가 아무리 영민해도 조건이 되지않아 공부하지 못한것이 대다수의 실정인데 박형룡 소년의 향학열은 이 현실의 벽을 뛰어 넘은 것이다. 그는 중학교 졸업에 머무르지 않고 이번에는 대도시인 평양에 진출하여 숭실대학에 입학하고 4년의 과정을 역시 우등으로 졸업하였다 (장로회신학대학교 100년사 160).

 

박형룡이 학구적 성향의 인물인 것은 여러 증언들을 통하여 알수 있다. 먼저 숭실대 1년 선배인 김경하 목사(김득렬박사선친)는 그의 회고록에서 학창시절 평양의 같은 집에 하숙할때 이야기를 대충 이렇게 썼다. 한집에 다섯명 하숙생이 샛문을 사이에 두고 두방에 살았는데 으레 저녁식사 후에는 샛문을 열어놓고 이야기 꽃을 피우는데 이럴때면 이웃에 살던 상급생 최지화 학생(30회총회장)도 몰꾼으로 참여 하였단다. 이렇게 얘기판이 벌어져도 박형룡 학생은 자기 책상에 돌아앉아 공부에만 전념할뿐 휩쓸리지 않았다. 1916년 어느날 다른 학생 모두가 외출 하였을때 박형룡의 책상 벽에 작은 글자로 써서 붙인 글귀를 보았는데 그것은 정전치백삽천심 암하세류입해의”(庭前稚柏揷天心 岩下細流入海意)로서 뜻을 새기면 뜰 앞의 잣나무는 하늘을 찌를 마음으로 자라가고 바위 밑에서 한방울 두방울 떨어져 흐르는 물은 바다에 들어갈 뜻으로 흘러 간다는 말이었다. 그때에야 김경하는 후배 박형룡이 큰 희망과 포부를 가지고 앞길을 향해 나아가노라니 한담하는 좌중에 끼어들 수 없었구나 생각하게 되었단다. 그래서 즉시 공책을 꺼내어 그 명구를 기록 하였고 이것이 자기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으며 그로부터 52년이 지난 1968년 둘째아들 영렬의 초청으로 미국에 갈 때 김학수 화백에게 휘호를 청하여 이 글귀와 성구 수24:15을 써다 주었는데 그아들은 이 두족자를 중히 여겨 고히 걸어두었으며 더욱 발분하여 컴퓨터 공학박사가 되었으므로 이 글귀가 자기집 가보가 되었다고 했다 (김경하 저: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80-82).

다음 소열도(Stanely T. Soltau) 선교사는 미국 유학시절의 박형룡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했다. 중국의 남경 금릉대학교에서 공부를 마친 박형룡이 1923년 초여름에 프린스톤 신학교에 도착해 한 식당에 일자리를 마련했는데 첫해 교과과정을 위해 히브리어 교재들을 사서 시간이 날 때 마다 독학으로 부지런히 하여 1학년 과정 히브리어 시험에 좋은 성적으로 통과하여 그 과목을 면제 받았다. 박형룡의 스승 메이천 박사는 자기에게 헨리 박(박형룡)에 대하여 그때까지 그 아래서 공부한 동양인들 중 가장 명석한 학생이었으며 메이천 자신이 그의 학업 자질에 대해 매우 기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박용규 엮음:상게서 171-172).

그다음 조선신학교 교장으로 재직중 6.25 동란때 납북된 송창근 박사는 프린스톤에서 일년 수학후 핏츠버그의 웨스턴신학교로 옮겼는데 한해 뒤에 도착한 김재준 역시 일년 수학하고 웨스턴으로 옮겼다. 이 송창근이 1928년에프리스톤 만필이란 글을 기독신문에 연재한바 있는데 그중에 박형룡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지금 신의주 제일교회에서 부목사 시무를 하는 박형룡씨 말씀을 하렵니다. (사실은 그때 박형룡전도사 였고 목사안수는 그후에 받았다.) 그는 본 신학교에서 남들은 4년에 하는 공부를 3년에 다 마치고 TH.B TH.M 학위를 받고 어떻게나 공부를 놀랍게 하였던지 그 많은 사람 가운데서 특별장학금을 받아 1년을 더 연구하고 귀국 하였습니다. 진실로 이는 우리 조선사람의 자랑입니다. 박형룡씨와 같은이를 가진것은 대단한 부행(富幸)이오며 그리고 우리 조선 기독교회의 오늘과 내두(來頭)를 염려하는 사람으로서는 누구나 한결같이 아껴야 할분으로 여깁니다” (송우혜 저: 송창근 평전-벽도 밀면 문이 된다 192-193).

 

또 그다음 평양신학교 제27회 생으로 통합교단 총회장을 역임한 최거덕 목사는 일본대학 졸업후 평양신학교를 다닌 분인데 그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그때 학생들은 대개 박형룡 교수 보다는 나이가 많은편이어서 어린사람 의 강의라고 업수이 여기는 편이었다. 그러나 내가 듣기에는 가장 내용이 충실하였다. 밤중에 지나다 보면 박교수 방에는 언제나 불이 켜 있어서 그가 얼마나 강의를 충실하게 준비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중 이 젊은 교수를 옹호 하였다. 그러나 박교수는 내가 옹호 하는줄은 몰랐다라고 (최거덕 저: 나의 인생행로 66).

그러므로 박형룡은 학구적 성향의 인물이다. 한국교회에 그동안 많은 신학자들이 등장하였으되 박형룡 박사 만큼 외길인생을 일관되게 살았고 한국교회를 위하여 공헌한 인물이 과연 누구인가? 박형룡박사 저작전집20권은 선교사시대 이후의 한국교회에 신학의 토대를 구축하고 체계를 확립하는 작업이었다. 특히 그가 살아온 시대는 일제하에 한국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만주로 옮겨 다니면서 신앙을 지키고 연구하며 교수해야 했고 해방후엔 극적인 귀환과 혼란, 전쟁의 와중에서도 부산에서 서울, 서울에서 부산, 부산에서 대구, 대구에서 서울로 옮겨 다녀야 했다. 더구나 고신, 장신, 총신에서 신학교장이란 책임을 져야했고 한국 장로교회의 중심에서 고신문제와 기장문제 그리고 WCC문제를 헤쳐 나가야 했다. 그러자니 제대로 연구하고 집필할 환경이 되었겠는지 헤아릴때 정말 그의 신학적 공헌에 경탄하지 않을수 없다.

이런 박형룡에 대하여 일찍이 한국신학대학의 김정준 박사는 신학적 칼라를떠나서 박형룡 박사는 한국 보수주의 계통의 교회와 신학형성, 그리고 그 지로에 지대한 공헌을 한것은 물론이지만 그러한 교파적인 관점을 떠나서 한국신학사 라고 하는 차원에서 교파를 초월한 하나의 봉우리를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박형룡의 신학을 평가하면서 이 봉우리가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이 너무 크기 때문에 함부로 다룰수 없다고 예찬하였다(한승홍<장신대>교수: ‘박형룡의 생애와 신학형성’).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로서 학자적 양심이라고 생각한다.

2, 박형룡은 활동적 성향의 지사형 인물이다.

대체로 박형룡 박사의 과묵, 경건, 예절 등 성자적 인품을 기억하는 분들로서는 그의 활동성향에 대하여 의외로 받아 들일수 있다. 그러나 박형룡은 활달하고 적극적 성향의 인물이다. 그가 숭실대학에 입학한 직후 마포삼열 박사를 그의 사택으로 찾아 인사하고 지면할 뜻을 가졌다. 그것은 마포 선교사가 평양신학교 창립자요 초대 교장으로서 이미 한국 장로교회의 교부격인 지위를 가진 인물이어서 크게 경모한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학교의 나이든 학생들 중에 가까이 아는 분들을 만나서 마포 박사 방문할 뜻을 말하니 그들은 중지하라고 충고 하였다. 그들의 말이 마포 박사는 상배하고 재혼하여 근일에 생남한 고로 가정에 기쁨이 넘치는 중이니 방문객을 접견할 겨를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좋은 말로 그의 행동을 만류한 것이다. 그러나 2년후인 1918년에 마포 박사가 숭대 교장으로 부임하자 대학생회는 신임교장 환영회를 개최하였는데 박형룡이 환영사를 맡아 구변의 역량을 다해 환영의 뜻을 진술 하였노라고 그로부터 40여년 뒤 마포삼열 박사 추모사에서 본인이 직접 말했다 (1957.11.15 하오 서울 남산 장로회신학교에서 박형룡 근술).

박형룡은 뛰어난 연설가이다. 그가 처음 예배당을 찾은것은 연설을 견학하기 위함이었다. 후일 그는 기독신보와의 회견에서(19671118) “필자는 어렸을때에 서당 선생님의 인솔아래 교회에 연설(강도) 배우러 다닌것이 도화선이 되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회고 하였다(장동민 저:박형룡의 신학연구 20). 또 숭실대학 재학중엔 앞서 언급하였듯이 신임교장 마포 박사 환영회에서 학생대표로 환영사를 하였고 19204월에는 목포 양동교회에서 숭실대학 전도대의 일원으로 그해 갖 졸업한 박형룡이 천의 검이란 제목으로 전도강연을 하였다. 이때 회집한 사람은 13백여명 이었고 세시간 동안 그가 설교하니 많은 사람들이 감격하여 슬퍼한 자가 다수였고 백여원의 헌금과 금지환. 은지환. 비녀를 기부한 사람이 5,6명에 달하였다고 한다(장동민: 상게서 54). 하지만 이날 그의 설교가 불온하고 과격한 언사가 있었다고 하여 피검되어 그해 6월에 징역 8개월의 언도를 받아 실제로는 10개월간 감옥생활 했다(동아일보:1920.4.14, 6.8, 6.12, 기독신보:1921.2.23). 그리고 박형룡은 그의 뛰어난 강연 때문에 결혼까지 하였다. 그가 청년 전도대를 조직하여 전국의 주요 도시들을 순회할 때 그는 강사로서의 명성이 높았다. 평양 장대현 교회의 여신도인 평남 대동군수를 지낸 부호 박기석씨의 부인이 박형룡의 전도강연에 감동을 받고 슬하의 4녀 중 3녀인 박순도 양과 혼인하게 하였을 정도이다(김경하 저: 상게서 82).

 

박형룡은 애국심과 신앙심이 철저했다. 그는 3,1운동 당시 숭실대학 상급생이었다. 평양의 3.1 만세 시위는 숭실대학을 중심으로 행해졌으며 정일선(7)과 박인관이 독립선언서 배포에 책임지고 정일선은 시위군중 앞에서 낭독하였다. 그때 숭실대 재학생 중 주동학생은 이보식(10), 박형룡(11), 김태술(12), 이겸호 등이었다(숭실대학 100년사<평양숭실>260). 참고로 유원삼은 교사들에 대한 교섭 책임자가 되었고 안세환은 학생들에 대한 교섭 책임자가 되었는데 105인 사건의 연루자인 안세환이 숭실대학생 이보식, 박형룡 등을 설복시켜 찬동을 얻었다. 이 때문인지 박형룡은 배위량 (베어드)선교사 댁에 은신 하던중 여러 선교사 사택에 숨어있던 다른 학생들과 같이 수색하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갔다(숭실대학 100년사 218, 박형룡의 마포삼열 박사를 추모함에 자술).

박형룡은 일제치하에서 세차례나 체포, 혹은 구금되었다. 우선 3.1 만세 운동때 그는 숭실대 학생으로 이보식과 더불어 숭실대 내에서 학생들에 대한 교섭 책임자 안세환에게 설복된 주도급 인물로 추정되며 배위량 선교사 댁에서 일경에 체포 되어 경찰서에 끌려 갔다. 다음 숭실대를 졸업하던 해에 그는 숭실대 전도단원 겸 강연자로 남한 일대에서 전도코자 16명 일행이 약 일개월간 순회 하는중 4월 초순 목포 양동교회에서 설교한 내용이 불온하다 하여 그날 연사인 박형룡이 목포 감옥에 구금되고 10개월을 감옥생활 했다. 이듬해 그가 출감하였을때 1921223일자 기독신보박형룡씨 출감 귀평(歸平)’ 이란 제하에 "평양 숭실학교 전도단원 박형룡씨는 목포교회에서 천의 검(天劍)’ 이란 문제로 전도한것이 목포경찰서 형사 박상은 손에 얼겨서 십여개월 철창속에서 신음하다가 211일에 출옥하여 경성으로 올라와서 관철동 평양여관에 일박하고 16일 밤차에 평양에 내려 갔다더라고 썼다. 박형룡은 체포되기 전 부산에서 목포를 향하여 남해를 통과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조를 지었다. ”진도섬 여기더냐 충무공이 그리워라/ 거북선 어디가고 빈물결만 출렁출렁/ 물있고 그 배 없으니 눈물겨워 하노라이 시조에는 박형룡의 애국심이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19501013일 새벽, 역시 목포근해를 지나는 군용선상에서 또 한절을 지어 짝을 맞추었다. ”충무공 가신 뒤에 유수광음 3백여년/ 거북선 뜨던 물에 만국수군 모였구나/ 오늘에 거북선 없어도 만국함대 여기있네.“ 박박사는 당일 저녁 환도하는 피난교우들의 선상 예배회 설교에서 30년전 일제때와 30년후 동란중의 소회를 피력했다(박형룡박사저작전집18143,144). 비록 1절과 2절 사이에 30년 간격이 있으나 나라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박박사의 애국심은 동일했다. 그다음 평양신학생 장홍련이 신사참배를 가결한 평북노회장 김일선의 식수를 베어버린 사건에 10여명이 연행되어 갔는데 평양신학교 교수로는 유일하게 박형룡이 들어 있다. 아마도 배후인물로 여겼던것 같다. 다른 학교 인물로는 평양 여자신학원의 김인준 교수가 포함되었다. 박형룡은 신사참배를 초지일관 반대 하였기 때문에 일본 당국에 찍힌 인물이었다. 안광국 목사는 당시 신사참배에 대한 평양신학교 동향에 대하여 신학교 교수 중에서는 강경하던 남궁혁 박사의 태도가 부드러워 졌고 이성휘 박사의 태도도 분명치 않게 보였다. 다만 박형룡 박사만이 완강히 거부 하였으므로 한인교수 3인의 의견이 제 각기 다른 것이었다라고 평했다 (안광국목사유고집: 한국교회 선교100년비화227). 당시의 실정과 박형룡, 주기철 등의 태도를 알기 위하여 숭실대학의 경우를 참고 하고자 한다. ”1936116일 평남지사 안무(安 武 )는 숭실전문 및 숭실중학 교장 윤산온과 동교 전교장 마포삼열을 도청으로 초치하여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회답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학교 이사회와 협의할 필요가 있어 재차 유예를 요구 하였던바 도지사는 동월 18일까지 태도를 결정할 것이며 불참배의 경우에는 사표를 제출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교장 윤산온(매큔선교사)은 신사참배에 보내는 대표자가 반드시 교장이라야 하는것도 아니고 한국인 학감이나 과장중의 한 사람이 학교 대표자가 되어 희생함으로써 학교를 유지해 나가게 된다면 숭실학교의 폐쇄를 모면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여 학교 대표자의 신사참배를 실행하겠다는 답서를 도지사에게 보내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답서를 제출하기 직전에 신사참배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평양신학교 교수 박형룡과 평양 산정현교회 목사 주기철에게 그 찬부를 문의 하였던바, 그들은 대표자의 파견 역시 기독교 학교 전체의 굴종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불가하다는 의견을 강하게 내세웠다. 교장 윤산온은 드디어 그들의 의견에 동조하였고, 도지사에게 보낼 답서를 난로속에 던져 태워버린 뒤에 신사참배를 거부할뿐 아니라 교장직의 사면도 불사하며 이를 불응한다는 답서를 동월 18일 오후 2시 평남지사에게 제출하였다”(숭실대학 100년사 489,490).

오늘날 세론은 김재준 교수의 민주화 투쟁을 많이들 평가하나 사실은 그보다 더높은 단계가 일제때의 애국운동이요 신앙투쟁인 것을 망각해서 안된다. 박형룡이 일제때 감옥가고 망명하여 해외로 전전할 때 그들은 과연 어디에 있었으며 어떤 모습으로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느가? 그때도 저항하고 투쟁 하였는가?

박형룡은 이단, 신신학과 맞서 싸운 진리의 투사이다. 1933년 주기철 목사가 경남노회장으로 있을때 최태용과 백남용의 집회로 인하여 비롯된 이른바 7조사(助師) 사건을 다룰때에 박형룡 박사를 초빙하여 그들의 이단성을 드러낸 일이 있다. 1934년 제23회 총회에 제소된 김영주 목사의 창세기 저자문제와 김춘배 목사의 여권문제는 문제의 장본인인 두 김목사가 총회의 견해에 추종하여 곧 소론의 취소성명을 발표하였으므로 일단락 하였다. 그때 라부열 위원장(평신교장) 이름으로 보고된 총회의 답안내용은 박형룡 박사가 작성한 것이었다. 1935년 제24회 총회에 길선주 목사와 황해노회의 헌의에 의해서 제기된 아빙돈 단권주석의 시비에 대하여는 감리교의 류형기 목사가 편집인이나 번역진에 장로교의 채필근, 송창근, 김재준, 한경직 등 장로교 제목사가 끼어있어 논란이 되었다. 박형룡 박사는 이 주석이 성경의 파괴적인 고등비평의 원칙으로 해석하며 계시의 역사를 종교의 진화라는 편견으로 분석하고 있다고 단정한 까닭에 총회는 여기따라 그것이 장로교인의 교리에 위배되는 점이 많으므로 교회로서는 구독치 않을 것이며 집필자들 에게는 공개사과를 결정하였다’(민경배 저:한국기독교회사332,333). 해방후 1947년 조선신학생 51명의 진정으로 제33회 총회에서 전권위원 8인이 선정 되었으나 위원들도 둘로 나뉘어 미묘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총회내 양측 세력이 백중지세였다. 안광국 목사는 그때의 세력판도를 좀 자유적인 조신파가 있었고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일제때 감옥생활을 한 고신파가 있었으나 당시세력은 조선신학측이 제일 컸기 때문에 총회측이 고신측과 합해야 수효가 많지 오히려 약세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총회와 고신이 아직 분열되지 않았고 또 박형룡 박사가 만주에서 송상석 목사의 안내로 목선을 타고 황해바다를 건너 서울에 돌아 오므로 총회세력이 상당히 커지게 되었다고 분석했다(안광국목사 유고집: 상게서 185,186). 과연 박형룡은 귀국후 자유신학과의 대결과 투쟁에서 총회진영의 선봉장 겸 수문장이 되어 장신설립으로 교두보를 마련하고 총회신학의 출범에 조타수가 되어 정통적 개혁신학의 승리를 쟁취했다.

 

정규오 목사는 교계 전체를 보는 박박사의 교정가적 통찰력을 높게 평가하여 이렇게 말했다. “대 학자로서 학자적 향기는 풍기고 계시지만 외견상으로만 보면 박박사님은 교정가(敎政家)는 아닌듯이 보인다. 그러나 박사님을 가까이서 받들며 본것은 교계 전체를 보시는 탁월한 통찰력과 조직력과 판단력과 지도력을 가지신 선견지명의 정견(政見)을 가지고 계셨다. 그 분은 바울사도, 칼빈, 카이퍼와 같이 신학자이면서 활동적인 어른은 아니었지만 보수신학과 신앙을 위하여 한 시대를 이끌고 나가신 보이지 않는 진리의 투사시오 교정의 지도자이셨다. 그랬기에 나와 몇몇 동지들은 일이 있을때마다 그 어른의 자문과 지도를 받곤 했다(박용규 엮음:상게서191,192). 이런 까닭에 박형룡은 한국교회의 중심에서 계속 향방을 좌우해온 활동성향의 인물이다.

 

3, 박형룡은 경건적 성향의 성자형 인물이다.

 

박형룡 박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협소하고 투사적인 인물로만 생각하여 경건한 인물임을 간과하고 잘 안다는 사람들은 그를 과묵하고 모범적인 인물로만 생각하여 활동적 인물임을 간과한다. 하지만 박형룡은 외유내강형으로 양면을 겸비 하였으되 신앙수련을 통한 인격연마와 신학교수로서의 목사성직이 활동성을 지사형으로, 경건성을 성자형으로 변화 시킨것 같다.

 

일찍이 박형룡은 두 동생과 함께 예수를 믿고 매주일 산고개 너머에 있는 예배당에 다녔다. 날이 가고 달이 가면서 마음을 깨끗하게 가지고 주님과 참된 교제를 가지기 위하여 가능한 한 무슨 일이든 하겠노라고 정했다. 그래서 친하게 알고 지내던 세사람의 스님들이 이전에 일러준대로 악을 듣지말라, 악을 말하지 말라, 악을보지 말라는 세가지 삶의 원리를 실천키로 작정했다. 먼저 귀속에 낡은 천조각을 틀어막고서 이웃들의 악한 말을 듣지 않기로 했다. 열흘 동안 했으나 쓸데없는 짓이었다. 다음은 하루에 스무마디로 말을 제한하고 매번 말할 때 마다 소매속에 넣어둔 작은 종이조각에 표시를 했다. 역시 열흘간 했으나 효험이 없었다. 그다음엔 마음에 나쁜 생각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아무것도 보지않기로 정하고 걸어다닐때 눈앞에 단 한걸음만 보이도록 아예 낡은 수건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것도 열흘간 하였지만 소용이 없어 크게 낙심 하였다. 그러나 선천의 신성중학교에 입학하고 그곳서 주일예배후 목사님에게 자기의 고충을 털어놓으니 학구적인 그 목사님이 일러주되 형룡군, 만유의 주께서 능으로도 힘으로도 안되고 오직 나의 영으로만 할수있다 하셨네. 마음을 깨끗하게 하기위한 모든 노력은 무익할거네. 자네는 기도 가운데 모든 문제를 주님께 맡기고 그가 자네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도록 간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하네. 오직 하나님만이 성령의 권능으로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순결을 유지시킬수 있기 때문이네라고 하였다. 그래서 박형룡 소년은 그 말씀을 음미한 끝에 자기 마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수 있도록 주께서 불가능한 그일을 이루시어 마음을 깨끗하게 해달라는 하나의 짤막한 기도문을 써서 외운후 매일 시간이 나면 계속 되풀이하여 암송했다. 가장 적게 한 때가 1백번이요 주일날, 때로는1천번이나 되풀이 했다. 그랬더니 생활 전체가 바뀌었는데 전에는 도무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기쁨과 평화가 가슴속에 들어와 태도와 생각을 완전히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소열도 선교사가 시골의 작은 교회들을 둘러보고자 2,3일간 동행했던 박형룡 소년에게 직접 들은 증언이다 (박용규 엮음: 상계서 168-171). 여기서 박형룡이 어려서부터 얼마나 바르고 깨끗하게 살며 주님과 참된 교제의 세계에 들고자 했던지를 살필수 있다.

박형룡은 일제치하의 모진 수난시대를 살때에도 배교하거나 실행,실덕하지 않았다. 그는 평양신학교가 문닫으면 교수인 자기가 하루아침에 정처없이 될것을 잘 알면서도 신사참배를 완강히 반대했다. 그리고 학교가 문을 닫자 그와 가족들은 일제의 강압이 덜한 일본으로, 만주로 떠돌아야 했다. 당시엔 한국의 기라성 같은 교계 지도자들이 창씨개명했고 머리를 빡빡 깎고 일본국민복 차림이었고 동방요배와 신사참배를 했다. 한국교회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고 중심적 역할을 했던 인물들중 한경직 목사는 오랜 침묵 끝에 1992618일 템플턴 상을 받고 수상기념 축하예배 인사말에서 자신이 일제시대에 신사참배 했음을 고백했고, 박윤선 목사는 만주 봉천신학교에 재직할 때 한번 신사참배 했음을 1950년 한 목회자 수련회에서 고백했고, 1984년 한 학생과의 인터뷰에서 다시 고백했고 1992년 저서에서도 한마디 언급했다. 물론 송창근 목사도 신사참배를 했고 김재준 목사도 신사참배를 했다. 김재준 목사는 조선신학원을 운영하고 있었으므로 더욱이나 정해진 기일마다 학생들을 인솔하고 경성신사에 참배하러 다녀야 했다. 당시 그를 따라 남산의 경성신사에 가서 신사참배를 했던 제자들이 그 일을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도 유독 김목사는 신사참배를 죄로 여긴다거나 참회의 고백은 커녕 신사참배를 거부한 자들의 항거동기가 율법주의에 근거한 것이었기 때문에 남이 못하는 것을 내가 했다는 의미에서 자기 의()를 내세우고 못한 사람들을 정죄하여 스스로 소외된 것으로 본다며 출옥성도들을 폄하했다(송우혜지음:송창근평전-벽도 밀면 문이된다 358-360, 서영일지음:박윤선의 개혁신학연구181,182, 박윤선저:성경과 나의생애89, 안광국 유고집:상게서267, 김재준전집7398). 물론 시류에 편승하여 적극적으로 영합한 분들이 있고 끌려가 취조받고 감옥갈 용기가 없어서 머리숙인 분들이 있다. 심지어 출옥성도 중에도 동방요배를 한 경우는 있다고 한다. 조선예수교 장로회총회 제28회 회록에 회기중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결성식을 거행한바 식순 첫머리에 궁성요배와 국가봉창이 들어있다. 29회와 제30회총회 개회예배엔 회장지도로 국가의식을 거행한후 찬송, 기도, 성경, 찬양, 강도, 기도 순으로 되어있다. 심지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는 무효로 하고 교역자들이 서울에서는 한강에서, 부산에서는 송도 앞 바다에서 일본신 천조대신의 이름으로 미소기 바라이 의식을 강제로 받도록 하였다. 이렇게 교역자들 가운데는 강제로 일본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다시 받았다(이상규.최수경 편집: 한상동목사 그의생애와신앙 182,183쪽 오병세;진리의 파수자로서의 한상동 중). 총회가 이러하니 개교회도 주일예배시에 일제 정보원이 상주하고 있어 황국신민서사동방요배가 선행되어야 했다(새문안교회100년사297,298). 그러므로 그시대의 교계인물 거의가 본의든 아니든 창씨개명과 일본국민복착용, 동방요배와 신사참배를 해야했다. 그런데도 과문의 탓일지 모르겠으나 박형룡 박사는 창씨개명 한바 없고 항상 양복정장에 넥타이를 단정히 매었으며, 동방요배와 신사참배를 했다는 기록이나 흔적을 찾아볼수 없다. 오히려 만주 봉천신학교에서 서무과장 겸 사감, 그리고 강사로 봉직했던 안광국 목사는 평양신학교 스승인 박형룡의 그 시절에 대하여 그는 신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는 성심성의로 지도 하였고 정치나 행정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신사참배는 고사하고 동방요배도 하지 않았다. 일본의 경축일이 되면 일체 신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라고 했다. 박형룡은 신사참배를 피하기 위하여 강사 명의로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다 보니 해방이 되던 1945년 신학생들과 함께 혼하 만융둔에 가서 벼심는 봉사도 하였고 때로는 가정을 위하여 필수품 배급타는 일도 하였다는 것이다(안광국 유고집:상게서156,160). 이렇게 만주에서의 현실이 일제 막바지에 무척 고달팠어도 신앙양심을 지킬수 있었기에 박형룡은 해방후 한부선(브루스 헌트)선교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1942년 이후로 여기서 가르치고 있지만 신앙의 자유를 구가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박형룡이 봉천신학교에서 가르칠때에 강제로 신사참배 하게하지 않겠다는 학교의 약조를 받았고 그래서 박형룡은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다고 서영일이 그의 학위논문에서 적시했다(서영일지음:박윤선의 개혁신학연구175).

 

박형룡은 신앙뿐 아니라 인격이 훌륭하였다. 그는 신학적 이견에 대하여는 강도높게 비판하고 논쟁해도 사사롭게 누구를 험담하거나 적의를 표출한 일이 없었다. 통합,합동의 분열후 김린서 목사가 한국교회는 왜 싸우는가라는 팸플릿을 만들어 박박사를 거칠게 비난하며 사정없이 몰아세울때 수업시간에 한 신학생이 흥분하여 그것을 말하며 김목사에게 적개심을 표출하니 박박사는 담담하게, 그래요할뿐 일절 다른말이 없었다. 또한 그는 대단히 겸손하신 분이다. 예컨대 필자의 경우 총신에서 그분에게 교의신학과 변증학을 배웠고 대학원에서는 박박사님을 지도교수로 하여 조직신학 논문을 썼다. 그러므로 사제지간이면서 무려 43년 연상이신 어른인데도 1976년 필자의 첫 설교집 한 생명의 가치를 우송으로 증정하였더니 이내 격려의 편지를 보내셨는데 그 말미에 교하 박형룡 돈수(敎下 朴亨龍 頓首),장차남 목사 좌하(張次男 牧師 座下) 라고 적으시어 정말 황송하여 몸둘바를 몰랐었다(장차남지음:한국교회목회현장을말한다211). 뿐만아니라 그는 어질고 순하신 분이다. 일본 동경에서 망명생활 할때의 박박사에 대하여 김동화 여사(동경신숙중앙교회를 목회했던 김치선 목사의 차녀)는 이렇게 증언했다. ”박박사님은 사모님 말씀에 따르셨다. 나는 늘 어머니와 같이 시장을 가면 그 시장에서 종종 박박사님께서 혼자서 시장 보시는것을 목격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어질고 순하신 분이었다. 사모님의 부모님은 지체 높으신 갑부셨다고 한다“ (김동화 지음:나에게 있어 영원한것80). 정문호 목사는 자기가 현장에서 목격한바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로 충무로 소재 충현교회에서 목사 장로 기도회(1976.5.4-7)때 오전 강의가 마친후 광고시간에 그 당시 총회총무였던 모 목사님께서 광고하시기를 박형룡 박사님의 교의신학 7권이 완간되었으니 여러분들은 모두 구입하시기를 바랍니다하고 책을 들고 소개하였다. 이 광고가 교회안에서 끝나자마자 그 교회 당회장께서 급히 강단 앞으로 다가오더니 그 책들을 집어 던지면서 거룩한 성전에서 매매할수 없소소리지르며 마침 저자되신 박형룡 박사님 앞에 다가와서 책으로 삿대질을 하며 당신이 이렇게 시켰소 회개하시오라고 소리를 지를때 박형룡 박사님은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모습으로 말씀하시기를 나는 죄인입니다. 용서하세요하는 그 말씀을 저는 앞에서 직접 듣고 바로 저분이 우리에게 위대한 사표가 되시는 성자 목사님이구나라고 더 큰 감화를 받게 되었고 나의 일평생 그 때의 그 모습을 잊을수 없었다“(박용규엮음:상게서198).

 

물론 박형룡에게도 실수가 있고 허점이 있다. 그중 한가지가 신학 기금 유용에 연루된 일이다. 노진현 목사는 이 일에 대하여 당시 신학교 이사장이었던 관계로 자기가 제일 정확히 알고 있다면서 이렇게 증언했다. ”이 사건의 내용은 당시 신학교 총무로 있던 박내승 목사가 신학교 공금 3천만환을 교제비 명목으로 사용한 데에서 비롯된다. 이 일로 박형룡 박사는 교장이었던 관계로 도의적인 책임을 진데에 불과하다. 박형룡 박사는 경제문제에 관계하는 분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가 자꾸 커져서 교장이 사임하는게 좋겠다고 하여 이사회에서 박형룡 박사에게 권면 하였다. 그때 권면위원으로 간 사람이 나와 김윤찬, 이환수, 이권찬 목사와 한두사람이 더 있었던것 같다. 우리가 가서 얘기를 하니 박형룡 박사는 기꺼이 사직하였다(노진현목사회고록:진실과 증언65). 사실 이것은 서울에 있는 천리교 재산들에 대한 임대차 계약을 맺고자 김재준, 한경직 목사 등이 미 군정 책임부서를 찾아다녀 이미 조선인 천리교도들에게 명의가 이전되었고 그들 이름으로 재단법인을 만들고 그 재단으로 학교 인가까지 맡아 버젓하게 학교 간판 붙인것을 강압적으로 접수하고 불하받은 부도덕에 비하면 약과이다(김재준자서전:범용기184-188). 그렇더라도 신학교 행정 책임자로서 3천만환 사건은 중대한 실책임에 틀림없다. 또한 박형룡에게 분열의 책임을 돌리는 일이다. 해방후 뒤늦게 귀국한 그의 행보는 그의 영향력과 기대치 만큼 긍정과 부정의 소지가 있다. 긍정적면은 한국장로교회를 정통개혁신학으로 되돌리고 교회의 주도권을 확보한 일이며 부정적면은 분열의 현장에 항상 그가 중심적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고신분열에는 한상동 목사가, 기장분열에는 김재준 목사가, 통합분열에는 한경직 목사가 역시 책임을 모면할수 없다. 교단이 나누어 질때 어느 한쪽의 중심인물은 그책임을 피할수 없기 때문이다. 한경직 목사의 경우 통합측의 중심인물로서 대전총회시 총회가 맡긴 증경총회장 회의 결과를 한경직 목사가 부르고 명신홍 목사가 기록하여 총회장을 통해 총회에 제출하였고 가결을 얻어 정회를 선언 하였건만 여기에 불복한 편에 가담하였고 1968215일 양측 합동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하여 동년 31일 대전에서 속회총회를 열어 합동안을 통과하고 노회 수의를 거쳐 430일에 서울에서 회집하기로 한 합동안을 만장일치로 통과할 때 한목사 자신이 좋다고 언명하여 놓고 뒤에서는 합동이 이루어 지면 영락교회는 탈퇴한다는 성명까지 내고 반대운동 하여 통합측 속회총회를 개회불능케 한 사실에서 그렇다.(정규오 저:한국장로교회사218,387). 그러므로 매번 총회측의 중심인물이었던 박형룡에게 분열의 책임을 몽땅 전가코자 함은 무리이다. 뿐만아니라 박형룡의 주위에 아첨배들이 있어 과잉충성 으로 그를 오도했다는 사실이다. 강신명 목사는 안광국 목사 유고집 서문에서 안목사가 만주 봉천신학교에서 박형룡 박사를 지극정성으로 보필했다며 이렇게 은사(恩師)의 신변 보호를 위하여 말갈 때 소갈 때 가리지 않고 뛰어다닌 안목사가 그처럼 간곡하게 직언을 하고 조언을 하였으나 박박사는 분열주의자들의 책동에 휩싸여 벗어나지를 못하시고 1959년에 교단을 떠나셨을 때 강목사나 내가 아첨할줄 모르기 때문에 결국 박박사가 우리 말을 믿어주지 않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라고 탄식하던 일이 생각난다고 썼다(안광국 유고집19). 물론 교단분열시 그들과의 결별에 대한 아쉬움이겠으나 무릇 영향력이 큰 인물 주위에는 항상 사람이 모이고 자칫 인의 장막을 치게된다. 박박사에게도 측근들이 있어 그를 둘러싸고 이권 때문에 아첨하고, 존숭하여 충성하되 도가 넘는 분들이 있었다고 봐야한다. 그예로 총회신학교가 대학인가 났을때 첫 번째 학장은 박 박사가 되어야 한다면서 현직의 명신홍 박사가 임기중 사임케 한 경우이다. 여타 교단의 경우도 이와 유사한 일들이 생겨났고, 생겨날 소지가 있으나 이는 극히 경계할 일이다.

 

끝으로 박박사의 학문과 신앙과 인격을 가늠할수 있도록 몇분 지인들의 인물평을 옮겨 보고자 한다.

 

박윤선 박사는 스승 박형룡의 평양신학교때 모습을 이렇게 말했다. “그당시 한국인 교수로 박형룡 박사는 특기할만 하다. 그는 한국인교수로는 (남궁혁, 이성휘 교수보다)늦게 교수직을 맡으셨는데 그의 인격적 감화가 큰동시에 신학자로서 인상깊은 교수였다. 그는 여러 변증학 방면의 과목을 담당하셨는데 학구적으로 일찍이 보지 못했던 유익을 많이 주었다. 그는 교수직에도 능하셨지만 진리를 수호하는데 많은 공적을 남기셨다” (박윤선,나의 생애와 신학, 서영일:상게서97,98).

 

노진현 목사는 박박사를 신학과 삶이 일치하신 분이라며 이렇게 평했다. “그분의 순수하고 깨끗한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은 언제나 나를 감동케 하였으며 또한 그의 숭고하고 경건한 인격을 존경하지 아니할수 없었다. 나는 오랫동안 박박사님과 상종하는 동안 한번도 농담하는 것을 들은적이 없고 흩어진 자세를 본적도 없다. 그분은 전 생애를 칼빈주의, 개혁주의 신학으로 목회할수 있는 목회자 양성을 위하여 바쳤다. 그러므로 박박사님이 있었기에 우리 한국 장로교회가 오늘날 칼빈주의 개혁신학을 유지하고 있다고 믿는다”(박용규엮음:상게서180,181).

 

정규오 목사는 박박사를 일컬어 나의 신학, 신앙, 인격의 모델이라며 이렇게 증언했다. “몇달동안 침식을 같이 하면서 그분의 일상생활을 수종 들었을때 언제나 바른 자세이셨다. 아침에 기상하시어 세면을 하시고 나면 결코 자세를 흩트리는 법이 없다. 저녁에 주무시되 침상에 들어 가실때까지 항상 단정히 정좌하시고 계시면서 독서도 하시고 기도도 하시고 원고를 쓰셨다. 또 박사님은 상대방의 신분, 계급, 유무식의 고하를 막론하시고 누구에게나 존대어를 쓰시고 결코 희롱의 말이나 경망스런 태도를 가지지 아니하셨다. 연령으로 20여세 연하이요 당신의 제자인 나에게도 서신이나 말씀에 최고 경어를 사용하셨다. 황송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어른은 두 번 다시 뵈올수 없는 어른이시다”(박용규엮음:상게서193).

한병기 목사는 박박사를 탁월한 개혁주의 신학자이시라며 이렇게 평가했다. “박박사님의 저서가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교의신학 일곱권은 참으로 귀중한 작품이다. 화고한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교의신학 전체를 이와같이 계통적이고 조직적으로 논술한 저서는 찾아보기 힘들것 같다. 그 용어와 문장이 좀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만큼 깊이있는 책도 없다. 총회신학교의 표어 신자가 되라, 학자가 되라, 성자가 되라, 전도자가 되라, 목자가 되라는 말씀도 박박사님이 친히 정하신 것이다”(박용규 엮음:상게서184,185).

 

신복윤 목사는 잊을수 없는 한분을 소개해 주시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제가 평생 잊지 못할분은 제게 조직신학을 가르쳐 주시고 격려해 주셨던 고 박형룡 박사님입니다. 제 결혼 주례를 서 주시고 외국유학의 길을 열어주시고 저의 처음 번역서인 기독교신학개론에 분에 넘치는 추천사 까지도 써 주셨습니다. 그분은 매우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였으며 생활이 깨끗하고 눈물이있고 시가 있었습니다. 그의 조직신학 책에는 군데군데 시가 개재되어 있지요. 키가 작은 탓에 작은 거인이라고하였습니다. 100년만에 한번 만날까 말까할 정도의 위대한 지도자요 성도였습니다“(합동소식제1145,2001630일 신복윤 명예총장 인터뷰).

홍정이 목사는 박형룡 박사 가정예배 365을 펴내면서 머리말 중에 이렇게 말했다. “저는 그분에게서 3년동안 학문을 배우며 또 가정에서 교의신학책 출판을 위한 원고정리 등의 일로 3년여 동안 친히 숙식을 함께하며 지낼수 있었는데 이를 하나님의 축복이요 자랑이요 큰 재산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존경하는 박형룡 박사님의 학문과 경건, 예절, 그리고 겸손, 검소하심에 머리를 숙이는 바입니다. 흔히 존경하는 사람도 가깝게 지내면 흠이 많이 발견되어 실망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학교에서 박박사님을 뵈올때 마다 가정에서의 그분의 삶을 보면서 더욱 그분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분은 성자이셨습니다. 그리고 박형룡 박사님의 그러한 학문과 경건생활이 있게된것은 내조하시는 사모님의 공이라 생각합니다.”

많은분들이 이렇게 존경하고 평가하는데도 정작 박형룡 자신은 한일이 없고 이룬것이 없음을 한탄했다. 세상을 떠나기 한해전 만80세 생일인 1977515(음력328)에 자작 시조에서 이렇게 읊었으니 말이다.

“80평생 회고하니 한탄할일 한()이없다

집에서는 불고(不顧)했고 나라일도 한것없네

교회위해 무엇했나 허송세월(虛送歲月) 뿐이로다

 

산곡(山谷)에 생긴몸이 바다건너 학()을닦고

신사성직(神賜聖職) 받은것은 천은막대(天恩莫大) 하건만도

이룬것은 유야무야(有耶無耶) 신전인전(神前人前) 부끄러워

(한승홍:‘박형룡의 생애와 신학형성중 생애부분말미)

무엇보다도 박형룡은 마지막 죽음이 성도다웠다. 박형룡박사저작전집출판위원장 정문호 목사는 그분의 최후모습을 이렇게 전했다. “19781024일 밤 9시까지 저와 출판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며 보고를 드리고 저는 집으로 돌아왔다. 목사님은 11시까지 원고정리를 하시다가 침실에 드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왠 일인가? 1025810분에 박목사님의 사모님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 목사님이 세상을 떠났어요 빨리 집으로 오세요급히 달려가 흰 이불로 덮어 놓으신 것을 열고 서거하신 목사님의 모습을 보는 순간 깜짝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이요 예수님과 같은 거룩한 모습이었다. 저는 그 얼굴에 나의 얼굴을 파묻고 한참동안 눈물을 흘리지 않을수 없었다. ‘과연 위대한 스승 박형룡 박사님이요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평상시에는 6시전에 기상하시어 기도하시는데 그날 따라 일어나지 않으시는 것을 보니 피곤하신 것이구나 생각하고 사모님께서 깨우지 않고 계속 주무시도록 하셨던 것인데 8시쯤 되어서도 목사님이 깨시지 않아서 목사님, 그만 주무시고 깨세요하며 몸을 흔들어도 대답이 없었다. 그때 깜짝 놀라 자세히 보니 목사님은 이미 천국으로 가셨던 것이었다” (박용규 엮음:상게서203). 잠드신채로 승천하신 것이다.

나가는 말

 

박형룡은 한국교회의 진정한 거인이었다. 그는 선교사가 주도하던 시대의 유산을 승계하면서 한국인이 주도하는 시대의 주역으로 준비된 인물이었다. ‘실로 초대 선교사들의 보수신앙에 기초하여 설립된 한국교회는 제1희년에 이르러서는 한인 보수주의 신학자(박형룡)에 의하여 지도되고 있음이 역연하게 되었다고 김양선 목사가 밝힌 대로다. 감리교의 유동식 교수도 초대 선교사들은 한국에 보수주의 신학의 씨를 뿌렸고 박형룡은 이를 가꾸어서 한국의 보수주의 신학의 토대를 세운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유동식:한국신학의 광맥187). 여기 박형룡의 신학은 자신의 주장대로 새로운 신학체계를 창작하려는 것보다 사도적 바른 신앙의 입장을 종합, 체계화하여 한국교회에 전수, 계도하며 계속 그것을 수호, 유지하려는 입장이었다. 또한 그의 신학엔 교의신학자로서 칼빈주의 신학의 교리적 측면의 종합과 표준성경주석위원회 편집자로서 주경적 측면의 종합시도란 양면균형을 보게된다. 이런 그 분의 신학엔 한국교회의 초기신앙을 신학적으로 종합, 체계화하여 그 시대의 지로적 사명을 감당하는 동시에 후대에 그대로 전승코자 하는 선각자, 계도자로서의 사명과 의지가 작용했다고 본다(박용규 엮음:상게서223, 224). 박형룡은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란 그의 논문에서 자신의 신학적 전통을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말했다. 이는 유럽대륙의 개혁주의에 영미의 청교도주의를 가미하여 가진 장로교회가 우리의 뿌리요 전통인것을 강조함인 것이다. 임직식 서약문에 들어있는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 및 대,소 요리문답이 한국장로교회 신앙의 근간인 사실을 주지시키고자 함이었다. 더불어 그의 신학을 사변적이 아닌 생동적이고 활력있게 하는것은 주요 다섯가지 기조가 1)성경의 신성한 권위에 대한 신념, 2)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확신, 3)주일성수와 경건생활 치중, 4)확신있는 복음전도, 5)천년왕국전 예수재림신앙(전천년론)으로 곧 청교도적 개혁주의면서 순정(純正)한 복음신앙인 까닭이다. 과연 박형룡의 신학은 개혁파 전통의 다양한 유산을 도입하고 소개하면서 한국형 정통신학을 창출한 것으로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이정표요 견인차였다(신학지남:19649월 제1, 최덕성:박형룡의 개혁파 정통신학).

실제로 그동안 한국교회는 박형룡의 신학적 역할에 크게 의지해 왔다. 동갑이요 동지인 주기철 목사는 학자인 박형룡을 신사참배의 위해로부터 보호코자 그가 일본으로 떠날때 만류하기 보다 눈물로 전송했고(김린서편집;주기철목사의 순교사와 설교집49,50) 만주 안동제일교회의 권연호 목사는 연보를 거두어 박형룡과 김린서를 각각 돕고 박박사는 봉천신학교에, 김린서는 안동성경학원에 초청하여 신사참배의 핍박을 피하게 하였다(김린서편집:신앙생활지19547,8월호). 박윤선 목사는 신학교라 할때 박박사가 계셔야만 되는 것으로 모든사람이 인식하고 있었던 까닭에’(합동신학교출판부 편:박윤선의생애와신학32) 194612월 초에 이제 한국에 나온지 한달밖에 되지않는 한부선 선교사에게 만주에 가서 박형룡 박사를 모셔올수 있는지 가능성을 타진하였고(허순길저:고려신학대학원50년사46) 송상석 목사는 블레셋 군대와 충돌하면서 사선을 넘어 베들레헴 우물에서 샘물을 길어오는 세 용사처럼 만주까지 가서 박박사와 그가족들을 모셔내 왔으며(송상석:‘법정소송과 종교재판’69,70, 허순길지음:상게서47) 한상동 목사는 박박사가 귀국하여 부산에 내려와 고려신학교 초대 교장에 취임하자 자신이 목회하던 초량교회의 목사관을 박박사 가족에게 내어주고 자신은 사찰집사의 집에서 기거할만큼 최선을 다해 받들었다(박아론저:세월따라,신학따라165). 또 서울의 주요 목사들이 수도 서울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우기로 한것도 박박사를 옹립하여 바른신학을 확립하므로 한국교회를 살리고자 함이었고 한국교회의 원로 채정민 목사(평신3)가 임종 3일전 김치선 박사를 부르사 김목사는 조선교회에 신사참배 죄와 미소기 바라이 죄를 회개하도록 외쳐주오부탁하고 박형룡 박사를 부르사 박목사는 조선교회가 정통신앙과 신성(神聖)을 보수하도록 힘써주오유언을 남기시고 수일간 영열(靈悅)이 충만하사 찬송중에 입천(入天) 하시었음도 한국교회의 순결과 정통신앙의 보수를 당부함이었다(신앙생활지 19535,6월호). 이는 한국교회와 신학의 진로에 박형룡의 존재가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해방후 한국장로교회와 신학의 판도에 박형룡은 결정적 변수였던 까닭이다.

이제 마감하는 말을 하고자 한다. 박형룡박사가 위대한 역사의 인물이 된데에는 그의 학구적 성향과 활동적 성향 그리고, 경건적 성향이 학자형, 지사형, 성자형으로 훈련, 승화되어 지난 세기의 장장 50년간 한국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의 장중에서 사용 된 까닭이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복이었다. 필자는1978년 그가 세상을 떠나시기 두달여전 부산에 오셨을때 전화를 받고 숙소로 찾아 뵈었는데 주로 부산과 경남교계의 신앙과 신학적 동향을 물으시면서 한국교회의 장래를 염려하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므로 이때의 대화가 그분의 유지라고 생각하여 이 땅에 제2,3의 박형룡이 끊임없이 배출되어 모든면에 흠잡을데 없는 건실한 신학을 세워주신 그의 유산을 바로 승계하고 창조적으로 꽃피워 한국교회를 수호하는 든든한 마병들이 되었으면 하고 기원한다. 2010612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