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세관


선지자선교회 1985년 8월 13일 화새 

 

 본문 : 베드로후서 3장 6절∼8절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른다, 이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른다는 이 동일은 노아  홍수 때에 하나님께서 모든 믿지 않는 자들을 다 홍수로 심판해서 멸하신다고  말씀하신 그대로 멸하신 거와같이 남아 있는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모든 것들은  다, 경건치 못한 자는 노아 때에 하나님이 예고하신 말씀 그대로 홍수로  심판해서 멸망을 시킨 거와같이 이제는 예고하신 그대로 불로 심판해 가지고  멸망케 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 준비 할 것이 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모든 하늘과 땅을  다 불로 살라서, 불로 태워서 모든 체질이 녹아지게 될 그때에 타지 아니할  자체로 준비하는 것이 우리의 준비입니다. 그때는 그저 물질을 태우는 불만이  아니고 경건치 아니하는 것을 태우는 불이요. 경건한 것은 태우지 아니하고  보호하는 불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에 불 속에 들면 뭐 지금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다 태워지는 것, 불에 닿으면 또 불에 상함을 받고 이러니까 다  그럴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하지만 이 불은 인간의 역사로 일어나는 불  아니고 하나님의 심판의 불이기 때문에 이 불은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정죄된 것은 어떤 것으로서도 불의 해를 면하지  못합니다.

 뭐 지금은 이 과학적으로 불이 올 때에 그 불을 방어하는 그런 방어의 방편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래서 세계 각국에서는 어떤 데다 지금 중심을 두고 주력하고  있는고 하니 하나님 말씀대로 온 세상은 다 불탄다, 이렇게 하고 있는데. 그러면  불타면 뭘로 탈 건가? 지금은 뭐 원자로 타리라 이렇게 다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데, 원자로 불타는 그런 것도 방어할라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지금 첨단을  걷고 있는 미국이라든지 소련이라든지 이 런 사람들은 다 자기네들의 그 실력  대결을 하고 있는데 미국은 소련에서 암만 원자의 그런 장난을 해도 그런 것을  방어해서 미국은 소련이 발사하는 그 원자의 해를 받지 아니하도록 할라고  연구하고 있고. 또 소련은 미국에서 발사하는 그런 해를 받지 안할라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 소 안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 되는 것이 피차의  실력입니다. 지금은 사람을 죽이는 실력보다도 죽일라고 할 때에 그 죽음을  당하지 안하는 그것이 실력이기 때문에 그 실력에 지금 주력을 하고 있습니다,  온 세계가. 그래서 그것이 점점 다 방어 돼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에  소련과 미국이 제일 앞선 강한 나라로서 서로 대적하고 있는데 그 나라들이 지금  실력은 그겁니다. 저 나라에서 나를 해할라고 하는 것을 나는 방어할 수 있는데  이 나라가 해하는 것을 저 나라가 방어할 수 없으면 저 나라는 머리를 숙이고  굴하고 꼼짝을 못 합니다.

 그러기에 지금 '그 면을 가지고 지금 힘을 쓰고 있는데. 그러니까 이 모든 불의  해를 방어할 수 있다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기 쉽습니다. 이 불은 방어하지  못합니다. 인간들의 방어를 초월한 불이요, 또 인간들의 소멸도 초월한  불입니다. 다만. 마지막에 불사르는 이 불은 어디다가 거게 촛점을 두고 있는고  하니 경건입니다. 경건. 경건되어 있는 것은 어떤 그 개별 경건이라도 그 사람이  얼만 부분적으로 경건하고, 얼만 부분적으로 나쁘면 그 경건에 속하지 안한 것은  구출할 길이 없도록 하나님이 하셨고, 또 경건한 것은 멸하지 못하도록 되어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홍수도 심판의 홍수요, 또 우리가 앞으로 닥칠 불도 심판의  불입니다. 그러기에 이 불은 천하 인간들이 오만 공작을 다 해 가지고 방어를  한다고 할지라도 인류의 방어, 과학의 그 방어를, 방어를 초월한 그런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에 방어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방어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불이요. 또 하나님이 심판해서 구출하는 불이기 때문에 아무리 인간이  그것을 멸할라 해도 멸할 수 없는 그런 불로 구출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떤 사람이 돼야 되는가 하면 이 심판의 불에 타지 안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노아 때는 이 홍수로 멸하지 않는 사람이 된 그것이  지혜로와서 여덟 식구가 구출 받았지 이 노아 홍수에 멸하지 안 하는 사람이  되어진다는 그것을 생각지 안하고 다른 면을 생각한 사람들 은 다 그것은 허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불에 타지  안하고 해를 받지 안할 수 있는 그 사람이 되도록 그 일이 되도록 그 물건이  되도록 그렇게 거게다가 중심을 두고 모든 준비를 마련해야 되지 다른 엉뚱한  것을 표준해서 마련한 것은 다 헛일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노아 홍수의 심판때에 멸망받은 것은 어떻게 멸망받았으며 구출 된  것은 어떻게 구출되었던가? 그때나 지금이나 꼭 같습니다. 하나님이 하라 하시는  대로 한 것은 다 구출됐고 하나님이 하라 하신 그 방편 외에 다른 방편은 다  전멸을 당했습니다. 그때도 경건이요 지금도 경건입니다 그때도 거룩이요 지금도  거룩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거룩과 경건이 물 심판을 이기고 나왔고, 또 지금은  거룩과 경건이 불심판을 이기고 나옵니다.

 이 불에 탄 것은 영원히 타 버립니다. 이 불에 탄 것은 영원히 타 버리는데  다만 그때에 하나님의 공로로 인해 가지고 구출함을 받을 수 았는 그런 것들은  타지 안하고. 그때의 기능들은 다 타 버립니다. 그러기에 그 때 타는 불은  영원히 탄다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때 불 타 가지고 또 구출 받는 게  아니고, 그때 불 탄 것은 영원히 타 버립니다. 그러면 우리 믿는 택함을 입은  자들은 그 불에 탈 때에 어떻게 되는가? 그 탈 때에 자기 소유가 다 탈 수 있고  자기의 심신의 기능이 다 탈 수 있고 또 그 몸뚱이는 어떻게 될 건가? 이거는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공로로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남아  있습니다. 남아 있으면 어찌 될 건가? 남아 있으면 그때에 모든. 아마겟돈  전쟁에 그때, 악으로 인해 가지고 그때에 곤욕을 당하고 곤욕을 당해서도 신앙을  가진 것은 구출되고. 그때에 곤욕에 빠지고 회개치 아니한 것은 마지막 불신자  심판할 때 그때 다 타 버리고 맙니다. 그때에 다 멸망을 받고 맙니다. 이래서 이  불심판에는 타지 않을 것을 준비하는 것이 우리의 준비입니다.

 그러면 그 준비는 뭐 다른 것으로서는 암만 준비해도 소용이 없고 다만 그때의  준비는 거룩과 경건으로만 준비됩니다.

 노아 홍수 때와 꼭 같이 거룩과 경건으로만 준비되는데. 거룩은 뭐이 거 룩인고  하니 거룩은 옳다 아니다 하는 그것이 거룩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말씀에서 옳다  하는 것만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명령하시기를 안 했고 '이것은 틀렸다' 하고  '옳다' 하고 그 둘을 지키는 것이 그것이 거룩입니다. 의와 거룩이 다릅니다.

진실과 거룩이 다릅니다. 진실은 바로 옳게 깨끗하게 되어 가지고 있는 것이  진실이요 의입니다. 그러나 거룩은 이것은 진실하게 의롭게 돼 가지고 있는 것을  거룩이라 하지 안하고, 거룩은 의가 이루어지는 진실이 이루어지는 그 과정을,  과정을 말한 것이 거룩입니다 그러면 이거는 틀렸다. 이게 옳다하고 가진  것이라야 거룩이 되는 것이지 옳은 것만 가지는 것이 거룩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요 구하시는 것이  뭐인고 하니 틀린 것을 알고 옳 은 것을 아는 그것을 하나님이 요구하십니다.

옳은 것만 아는 그런 일방적 인 그런 지식이나 행위를 원치 안하시고 이  쌍방적인 지식과 행위를 말합니다. 틀린 것은 방어하고, 틀린 것을 대적하고  옳은 것을 행하고 하는 그 것을 가리켜서 거룩이라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믿는 사람들은 뭐 나만 옳게만 하면 되지 이렇게 생각 하지만  자기의 개인에게만 해당된 그것은 옳은 것만 이렇게 하면 된다 할지라도 만일  단체적인. 전체적인 이런 면에서는 틀린 걸 틀렸다고 하고 그걸 정죄하고 옳은  것을 옳게 이렇게 자기가 인정해서 수락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대화적인 이런 면에는 그거 구별되지만 자기 혼자 개별 생활에 대해서는 거룩을  가지지 못하기 쉽습니다. 그러기에 노아 홍수에, 말하기를 히브리 11장에는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온 세상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후사가 됐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노아는 온 세상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후사가 됐다. 온 세상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후사가 됐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온 세상은 틀렸다, 세상이  틀린 것을 정죄하고 옳은 길을 걸어갔기 때문에 노아의 그 준비는 거룩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만 뭐 바로 하면 되지' 이 생각을 가지고 사람들이 오해를  가지고 '나만 바르면 되지 남에게 대해서 간섭 할 게 뭐 있느냐' 아주 신사적인  이런 것으로서 잘못된 유풍들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 같은 나라는 그런  면이 많습니다. 많아서,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됐든지 그것은 간섭할 필요가  없고 나만 바로 하면 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그걸 가지기 때문에  대단히 신사적인 것 같지만 실은 거룩은 되지 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기를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라 하라 이랬습니다.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 라 해야 그것이 거룩이 되는 것이지 옳다만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은 거룩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뭣 때문에 이렇게 천사의 타락을 또 에덴 동산 인류 타락을 이렇게  하셨는가? 지금 온 세계는 그런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시다. 죄를 만들지 안하셨다. 하나님은 죄를 멸하시고 죄를 창조한 죄를  있게 하는 그것은 하나님이 있게 하지 안했다, 이렇게 그만 사람들이 그걸  도매금으로 해 가지고, 하나는, 죄는 없으시다는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죄는  하나님이 만드신 게 아니라 그말은 틀렸습니다. 그러기에 죄를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천사의 타락이 그것이 하나님의 예정에 벌써 타락으로 예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요 또 에덴 동산에 타락을 예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죄도 만드셨고 의도 만드셨고 하나님에게 순종도 만드셨고  하나님을 범하는 불순종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것을 이번 집회에도 어떤 목사님이 오셔 가지고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서  이렇게 잠깐 묻는 가운데에서 내가 묻기를 '그러면 죄는 어떻다고 생각합니까?'  이라니까 그분도 어디 아마 자주 다니며 듣기는 들은 모양이 라. '죄는  하나님이, 죄도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그말 하기 때문에 그 예정에 대해서  좀, '그러면 왜 하나님이 범죄케 해 놓고 범죄한 것을 하나님이 노하시고 분히  여기시고 한 그것은 하나님의 그라면 당신이 그렇게 만들어 놓고 또 노하시고  분히 여기시고 거게다가 벌을 하시고 그렇게 하는 그것은 하나님이 그러면  연극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말해. 그렇게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내가 거게 대해서 '그러면 죄를 만드셨다고 했는데 그런 것도 다 거게 속한  것들인데 이원론을 믿느냐 일원론을 믿느냐?' 이라니까. 일원론을 믿는다고.

그러면 이원론은 틀렸다고 정죄를 하느냐?' 틀렸다고 정죄를 한다고. '그러면  일원론을 믿으면 하나님의 예정을 믿고. 일원론을 믿고, 하나님의 또 주권  창조를 믿고 이것을 믿으면 그 사이에 다리만 놓으면 다 해석될 터이니까 집에  가 가지고 좀 기도하면서 생각해 보라. 그 암만 들어도 안 되니까 생각해 보라.'  그러고 나뉘었습니다.

 이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죄를 만드시고 의를 만드시고 한 그것은 목적이  뭐인가? 목적이 당신과 같은 온전한 자를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그 목적 안에서 예정이 되고 목적 안에서 예정된 대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렇게 목적을 정하신 그 목적이 뭐인고 하니  하나님을,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나타내려 하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인데 하나님을 나타내는 데에 제일 정확히 나타내는  것이 어떤 것이냐 교회가 정확히 나타내도록, 제일 정확히 하나님을 나타내도록  이렇게 하기 위해서 교회를 하나님의 목적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를  목적으로 삼으셨으면 교회는 뭘하는 건가? 교회는 하나님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타내면. 어떤 걸 나타내는가?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또  죄와 의를 만드신 하나님. 하나님은 의만 만드신 일방적이 아니고 죄와 의를  만드셔서 죄는 미워하고, 죄는 멸해진다. 또 의는 하나님이 사랑해서 보호하시고  보존하신다 하는 이런 하나님으로 나 타내서 모든 피조물들이 '아, 이거는 죽는  것이고 이거는 사는 것이다 이 거는 하나님이 노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다, 이거는 하나님이 보존하시고 이거는 하나님이 멸하신다'  하는 그 쌍방을 알아서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갖추어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땅위에 있는 모든 죄 그런 것은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고 죄는 멸망한다 하는 것을 인식시키시기 위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목적이 그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의만 알리는 것이 아니고 죄도 알리고 의만 있게 하는 것 이  아니고 죄를 멸하는 의로, 죄를 타협하지 않는 그 의로 이렇게 이 거룩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의만  총총하는 일방적인 그런 걸 기뻐하지 안 하시고 그 쌍방, 죄를 정죄하고  미워하시고 의를 사랑하는 그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가 나타내서 그 형상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근본 목적이 그러하고. 예정이 그러하고 창조 가  그러하고 모든 섭리가 쌍방적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옳은 길에 섰으면  하나님이 그걸 인정하지 안하고 옳은 길에 섰을 때에 하나님이 기다리십니다.

안타까와 기다리시는 것은 옳은 길에 있으면서 '이게 틀린 길이라 내가 이 옳은  길에 섭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이 만족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거룩이라는 것을 잘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우리들이 하는 행동, 거룩은 우리가 행동하는 행동이, 경건은  목표를 가진 것입니다. 경건은 목표요 거룩은 행동인데, 행동은 두 가지 행동이  아니면 하나님은 인정하지 안하십니다. 두 가지 행동이 라야 그 행동이 불타지  않습니다. 두 가지 행동, 뭐이 거룩인가? 거룩은 두 가지입니다. 이것은 틀렸다,  이거는 옳다. 틀렸다 하고 이거 옳다 해야 그것이 거룩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거룩은 둘이 양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요, 경건은 그것은 단일성의  것입니다.

 경건은 뭐이 경건인고 하니, 경건은 하나님을 위하는 것 하나님을 위해서 모든  걸 하는 것이 경건입니다. 그러기에, 은밀히 말하면 경건도 그것도 하나를  배격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 위하는 일방적인 그런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안하시고 하나님을 위하면서 하나님만 이 위하는 것만 그것이 되어지는  것보다도 다른 것이 있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은 경건은  가졌지만 성도들이 가진 경건은 가지지 못했습니다. 성도들이 가진 경건은 이  타락하나 거쳤기 때문에 성도들이 가진 경건은 이것은, 크게 말하면 피조물  중심이다, 피조물 위주다. 이 피조물 위주, 피조물 중심, 자기 위주, 자기 중심  이것을 배격하고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 된 그것을 하나님께서 용납하십니다.

그것이 경건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아침에 증거하는 것은 둘을 증거할라고 합니다. 하나는 뭐인고  하니 우리는 오늘 예수님이 재림 하셔도 불타지 않을 수 있는 그것이라야, 이  심판의 불에 타지 않을 그것이라야 무궁세계에 가 있지 이 세상에서 불탈 것은  무궁세계에 가서 있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불타지 않는 이 세상에  심판의 불을 이긴 그런 것들만 거게 가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심판의 불을 면해서 심판의 불을 당하지 안했으면 좋을 거라 하는 것이  아니고 심판의 불이 오든지 말든지 타지 안 할 그것만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모든 체질이 녹아지고. 뜨거운 불에 녹아지고 이 모든 하늘이 다  불에 타서 풀어지는데, 이거 지금 이거 뭐 별이니 달이니, 이거는 뭐 무슨  별이니 무슨 별이니 하지만 그때는 다 풀어져서 원소가 돼버립니다. 원소가 돼  버리고 이리 되는 그렇게 아주 뜨거운 불인데, 그런 뜨거운 불이' 거석 할 때에  그 불에 타지 안할 것이 있을까 이렇게 생각을 가지는데 그것이 타지 안할 것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그게 믿음입니다. 이렇게 모든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모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는 데 그때 안 탈 수가 있겠느냐 하는  그것이 인간의 주관 지식이요. 인간이 불신의 주관이, 모든 것이 불에 타지만  의는 불타지 안하고 새하 늘과 새 땅을 소망하게 된다 하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믿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이 불타고 모든 체질들이 다 불타고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전부 불탈 때에 불타지 아니할 것을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면 불타지  아니할 것이 있다. 불타지 아니할 그것을 우리 사람들이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어서 마련할 수 있다. 예수님의 사죄, 칭의, 화친 그거 셋은 다 불을 초월해  가지고 그런 심판을 이겨서 하나님의 지성과 지공의 심판을 다 초월한 거 심판을  이기고 난 것들입니다.

 이기고 난 것들인데, 이것을 재훈련 연습으로서 그리스도의 이 심판을 이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연습적으로 훈련적으로 다시, 재조성을 하기 위해서 해 놓은  것인데. 그것이 자기 현실에서 되는 것인데, 현실에서 안 되는 것은 다 불타  버리고 현실에서는 타지 안할 것을 만들어야 된다. 우리는 현실에서 내 행위도  타지 안할 것을 만들어야 되겠고, 내 마음이나 몸의 기능도 타지 안할 것을  만들어야 되겠고, 영은 타지 아니할 그 실력을 양성해야 됩니다. 타지 안할  실력을 양성하는데 그 실력은 어디 있는고 하니 심신의 기능에 있습니다. 심신의  기능에 주격의 권위, 주격의 권위 또 주격 책임에 이행 그것이 영의 권위입니다.

영병이라고 말하는 것은 영이 주격되어 있으면서 주격의 주격 노력을 못하는  그것이 영의 병이요. 주격 노릇을 잘 감당하는 그것이 영의 실력입니다. 영의  실력은 어디서 자라느냐? 영의 실력은 심신을 잘 통치하고 잘 화합하는 거기에  기능이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현실에서 현실에서 타지  아니할 것을 마련하는 것이 현실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불에 타지 안할 것을  마련하는 것이 이 현실이다.

 그러면. 이 심판의 불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입구인데 입구에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심사, 하나님이 한번 검사를 하면 들어가게 하는 이.

검사하는 검사가 하나님의 심판의 불인데, 검사에 의례히 들어갈 수 있는 그런  것이라야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하늘나라에 들어 가 가지쳐서 거게서 더  중요하게 쓰여질 것, 중요하게 쓰여질 것은 이 심판의 불을 겨우 통과만 할 게  아니라 그런 불과 상관이 없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러면 그런 것은 어떤 것인가?  다 하나님처럼 완전하고 거룩한 것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완전하고 거룩한  것들이 우리 현실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현실에서  하나님처럼 완전하고 거룩하고 깨끗한 것이 현실에서 만들어지고 하나님의  심판의 불을 다 이기고 남을 수 있는 것이 현실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현실에 그런 것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할 때에 믿음 이  어리면 그렇츰 어려운 것이, 그렇츰 권위 있는 것이 어떻게 만들어질까?  만들어질까? 그것은 노아 홍수 때에도 그렇게 온 세상이 다 물의 넘침으로 다  멸망받았는데, 인간들의 모든 지식과 준비가 다 멸망받았는데 노아가 배 모은  그까짓 거야 뭐 그때 볼 것이 없습니다. 그때에도 강대국들이 있었고, 그때도  모두 다 나라의 세력도 있었는데 그저 해변에서 모았는지 강가에서 모았는지  어떤 빈들판에서 모았는지 영감타구 하나가 그저 마련해서, 나무 쪼가리 하나  마련할려면 그거 마련하느라고 또 얼마나 돌아다니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준비해 가지고 나무 쪼가리 하나 만들어서 또 끊어 대고. 또 붙이고 뭐 이렇게  칠을 하고 이래 하는 것이 다른 사람 보기에는 미친 일 하는 것 같았지만,  그것이 아주 보잘 것 없고 허무했지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대로 만들어겼기  때문에 인도하신 그분에게 능력이 있고, 인도하신 대로 만들어진 그것만을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거기에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천하 모든 사람의  준비는 다 헛일 됐지만 노아의 준비는 헛일되지를 안했습니다.

 그러면. 노아의 방주 만든 그것이 어디 필요했느냐? 그거 뭐 아무 그 배가 다른  데는 필요가 없었습니다. 무슨 운반선에도 필요가 없었고 상선에도 필요가  없었고 무슨, 전쟁하는 데에 전선에도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무데도  무용지물입니다. 무용지물인데 다만 하나님께서 불순종을 멸망시키고 순종을  구원하려는 고때 한 때만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물론 신앙생활을 하면 거게서 세상에 빛을 보이기 위해서 신앙생활 하니까  이렇게 세상에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된다 말씀했지만 민족 위에 뛰어나는  것이 그것이 이 세상 빛이 되기 위해서 하시는 것이지 그것이 우리에게는 적극  최종적인 소망은 아닌 것입니다. 아무 필요가 없는 것이오. 민족 위에 뛰어나면  뭐할 겁니까? 그거 다른 사람에게 증거해서 세상 사람들을 구출하는 데에 도움이  된 세상 빛 이 되는 것이지 우리의 이 모든 신앙생활하는 것은 목적이 어디  있는고 하니 천하가 불탈 때에 불타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하가 불탈 때에 불타지 않는 그것은 뭐할라고? 불타지 않는 것은  그것은 하늘과 땅의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무궁세계에 그 나라에 가  가지고 쓸모 있고, 그 나라에 가 가지고 하나님에게 쓰여지고 그 나라에 가  가지고 모든 피조물들에게 필요 있는 중보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가 홍수에서, 홍수 심판에서 심판받지 안하고 홍수 심판을 이기고  난 것이 뭐 할라고 그런가? 홍수 심판을 이기고 난 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이  우주는 다 노아의 우주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주는 다 노아의 우주가 되고  노아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보여 주는 하나의  형식 계시입니다. 형식 계시인데 그것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최종적인 불심판을  우리에게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불에 타지 않는 것은 그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심판에  정죄받지 안하고 통과하기 위한 것이요. 그러면 불에 타지 않는 그것이라야  그리스도의 심판에 정죄받지 안하고 통과할 수 있는 실력 있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심판에 심판받지 안하고 통과할 수 있는 실력있는 것이라야 영원한  불멸의 것들이요, 완전의 것들이요, 다 영생의 것들이요.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는 것들이오,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는 것들이요, 하늘과 땅의 것이 통일될  때에 그 모든 것은 발등상이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몸이 되고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되는 그만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만물들에게 하나님의 것으로 충만케 해  줄 수 있는 그런 직책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불타지 않을 거 이런 것을 우리가 마련을 해야 됩니다.

그 마련하는, 그렇츰 그런게 어떻게 마련될까? 그 마련되는 것이 노아가 천하가  멸망받는 홍수를 이길 수 있는 그 마련이 그때 뭐 별스럽게 어렵게 마련한 것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요래라 조래라 하니 그까짓 거 나무 쪼가리 붙인 거,  성경에 기록된 대로 노아의 만든 배를 말하면 그렇게 큰배가 아닙니다. 큰배가  아닌데 그 속에 또 들어간 거는 보면 또 굉장한 것이 들어갔습니다. 작은 배인데  그 배에 안에 알맹이 채운 것은 그거는 뭐 요새 어떤 큰배로서도 채우지 못할  만한 그런 양이 들어갔습니다. 그거 다 전부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이랬는데  그렇게 그것 만든 것이 누가 그 배를 만들라 하면 못 만들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그 시대에 다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참되다, 이대로 해야 된다  이대로 하는 것이 생명이요 이대로 하지 않는 거는 다 사망이다.' 이것만 알고  할라 했으면 그때 뭐 노아보다도 그때 십 배 잘 만들 사람 꽉 찼습니다. 그거  다, 뭐 쉽습니다. 그렇게 뭐 만들기 어렵지 안했습니다. 요 나무를 몇 자로  끊어라, 요 뭐 창을 내라, 어쩌라 하는 것 그 재료도 다 낱낱이 다 말해 주셨지,  또 그래 한 거 그거 어렵지 안했습니다. 어렵지를 안했는데 다 믿지 않기 때문에  못했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천하가 불탈 때에 불타지 안 할 수 있는 것, 또 그리스도의  심판에 통과할 수 있는 것 무궁세계의 하늘과 땅의 있는 것을 통치할 수 있는  그런 완전하고 온전하고 거룩한 것이 어떻게 만들어지겠느냐? 알면 다 만들 수  있습니다. 알면 다 만들 수 있는데, 그 만든다는게 별게 아니고 우리 현실에서  세 가지로 살면 생명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겨자씨가 생명이 있어서 그  모든 지기를 다 먹고 살았지 지기에게, 지기를 따라서 부패해지지 않은 거와 꼭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현실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벗지 안하고 그때 에  진리대로 하면 진리대로 하고 이것으로써 다다. 하나님의 진리라는 것은 신구약  성경 말씀이 진리인데, 이 진리는 하나님의 뜻인데. 이 신구약 성경 문서가  진리요. 문서로 나타난 문서 계시를 우리가 행하고 이만하면 다 됐다 하면 그거  자기가 믿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완성을 이루지 못합니다. 문서 계시대로  하면서. 사도 바울이 내 양심에 자책할 것이 없으나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내가 항상 두려워하고 염려가 된다  그랬습니다. 양심에 자책할 게 없다 말은 문서 계시대로는 다 했다 그 말입니다.

문서 계시대로는 다 했는데 이제 하나님이 인을 쳐야 될 터인데 영감 계시의  계시에 맞았느냐 안 맞았느냐 하는 것을 갈급을 가진 그 상태를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문서 계시대로 하고 이만하면 다 됐다 하면 그것은 영감  계시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문서 계시대로 하고 영감 계시를 자기가 소망하고  갈망할 때에 성령이 오셔 가지고 '여게까지 온 과정은 네가 옳다' 인을  쳐주십니다.

 그러면 인쳐 주시고 난 다음에 영감 계시면 다 됐다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영감 계시가 뭣 때문에 있으며 문서 계시가 뭣 때문에 있느냐? 예수님의 그  무한하신 대형. 대행, 대화친의 예수님의 대속을 우리에게 알리 기 위해서  대속을 받은 대속의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대속을 우리의 것을 만들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 이 오셨고 진리가 왔습니다.

그러기에 성령과 진리와 예수님의 대속을 혹 생각할 때에 예수님의 대속은 적게,  성령은 제일 크게. 진리는 그 다음으로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우리에게 성령이  온 것이, 영감이 온 것이 예수님의 대속이 아니면 못 옵니다. 대속을 위해서  왔고 대속으로 인해서 왔습니다. 대속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올 수 있지 대속이  아니면 우리에게 오지 못합니다. 또 대속을 위해서 왔습니다. 그러면 이 영감은  대속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우리에게 전해 가지고 대속을 입도록 하고 진리도  대속을 입도록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문서 계시에 순종하고 거게서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안하고,'이만  하면 됐다'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안하고 거게서 겸손히 갈급을 가졌을 때에 영감  계시에 도달하고, 영감 계시에 도달해 거게서 예수님의 대속의 피를 참, 내 피와  살을 먹는 것 피와 살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그 대형이 어느 정도의 대형을  했으며 어느 정도의 그 범위가 넓으며 어느 정도의 구비하며 대행이 어느 정도의  그 구비하며 광대하며 어떤 것을 대행했는가? 그 무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무한은 아니지만 무한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이 어디까지 나를  대신 했는가 어디까지 대신했는가 그것을 자꾸 성령이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자꾸 그렇게 나가는 그 행위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할라면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돈을 보고 사는 사람이 돈을 보고  사는 사람이 돈을 사랑하는 것 같지만 사랑하면 다 할 수 있습니다. 뭐 그보다  더 힘들지 않습니다. 또 이 세상에서 권세를 사랑하는 사람이 권세에 대해서  욕망을 가지고 노력하는 거와 같이 노력하면 다 쉽게 합니다. 그보다 쉽습니다.

또 명예를 위해서 하는 사람도 그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정욕을 위해서  밤낮 생각하는 것같이 정욕 위해 하는 사람은 정욕 위해서 하는 것만치만 하면  넉넉히 하고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넉넉히 할 수 있는  그것이 있는데 그것을 사람들이 믿지 안하고' 무시하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루어지는 것이 인간 요소로만 다 이루어지는가? 아, 인적 요소만  돈을 탐하듯이. 돈을 사랑하듯이, 권세와 지위를 사랑하듯이 자기 가족을  사랑하듯이, 뭐 인간끼리 남녀 이성끼리 사랑하듯이, 명예를 사랑하듯이 그만치  사랑하는 것만치만 힘을 쓰면 그 나머지기는 하나님의 그 무한하심이 와 가지고  해 줄 수 있는 것을 받는 믿음이 됩니다. 우리의 이 불타지 안 할 요소와  영원토록 있을 그 요소를 우리가 이루어 나가는 것은 인적 요소가 하는 것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순전히 하나님의 그 역사와 그 능력으로 가지고  만드는 것인데 그 만드는 것을 하나님이 내게 주실 수 있고 나는 그 만드는  것을, 만들어 주시는 것을 받아서 감당할 수 있는 그 인적 요소가 뭐이냐 하면  그것을 가리켜서 믿음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알고 인정하고  그대로 행하면 되는 것인데 알 그 인정하고 행함으로 말미암아 불타지 안할 것이  이루어지는 것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다만 하나님이 불타지 안 할 것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받는 방편에 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오늘 아침에는 불타지 아니할 것을 우리가 현실에서  마련해야 된다. 그런데에는 그 노아와 같이 우리도 넉넉히 마련할 수 있다.

마련할 수 있는 것은 인적 힘으로 마련하는 게 아니고 인간의 인적 요소는 신적  요소를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그 믿음이 되기 때문에 믿음을 통해서 주신다.

 그런데, 그라고 나서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 주님은 우리에게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안타까운 그 사랑의  심정을 가지고 긍휼을 가지고 우리를 향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만 할라 하면 된다  하는 그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래서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마라. 잊어버리지 말아라 이랬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가다가, 모든 게 하나님의 예정대로 돼 가는 것인데 가다가 자기가 참  억장이 무너질 만한 그런 타락이 왔을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하고 낙망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이 한 가지를 기억해야 됩니다.

 또. 자기가 무엇이 잘 됐을 때에는, 그러면 교만의 시험에 들어 가지고 서  오만한 자리에 앉기 때문에 그것이 또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겨자씨 믿음에  밭을 갈고 양을 치다가 돌아왔으면 앉아서 먹으라 하겠느냐? 자기 공로를 자기가  보는 것이 실패요, 자기 공로를 자기가 보는 것이 실패요 자기 공로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이 그것이 실패요 자기 공로의 대우를 받을라 하는 그것이  실패라 그 세 가지가 우리에게 우리를 삼킬라고 하는 악령의, 미혹의 적이라.

그러기 때문에 그 세 가지를 보지 안하고 주인의 먹을 것을 예비한다는 말은  주님이 나를 통해서 할 게 뭐인가? 주님이여 내가 또 할 일이 뭐입니까? 나 할  일이 뭐입니까? 그것을 자기가 찾 그 모든 거 하고 난 다음에 자기 할 것은  공로니 그런 거는 다 없어져 버리고 나 할 일이 뭐입니까 하는 거, 나 할 일이  뭐입니까 하는 거 그것을 생각하는 그것이 할 일이라.

 그러면. 나 할 일을 하는데 나 할 일이 뭐입니까 하고 나 할 일을 할 라 할  때에 제가 제 할 일을 할 수가 있느냐? '나 할 일이 무엇입니까?' 발견하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이 이 일을 해 주셔야 됩니다' 하고 띠 띠고 섬기는 것은,  하나님이 잡수시는 것은 하나님에게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다  주신다고 했기 때문에 이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 이 기도해서 자기의 마음에  확신이 됐을 때에 '주인이 먹고 난 다음에' 하는 그 말은 '주님이 이거는 내게  이루어 주신다' 하는 그걸 우리의 믿음으로 가지게 됩니다.

 믿음으로 가지고 난 다음에는 '이제 네가 먹어라' 하는 거는, 그라고 난 다음에  제가 행합니다. 네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것이 주님 먹을 것을  준비하고. 발견하고 난 다음에는 주인이 자시도록 띠 띠고 섬기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일차적으로 이루시도록 노력해서, 그거는 뭐이냐? 우리의 간절한 소원과  기도인 것입니다 이루시도록 노력하고, 이제 하나님이 이루시고 난 다음에는  내가 할 일은 뭐이냐 하면 내가 실제로 이제 그것을 시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해 놓으신 그것을, 하나님이 해 놓으신 그것을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발포하시기 때문에 하기는 하나님이 하셨고 했다고  칭찬이나 영광과 상급은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가 한 것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나라 가 보니까 면류관을 들어서 다,  승리한 것인데 면류관을 벗어서 하나님의 발 앞에, 갖다 바치지를 못하고 가까이  가지를 못해서 멀리서 던졌다 이랬습니다.

 그러기에 불타지 아니할 것을 우리가 마련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 마련이  인간으로 할 수 있는 가능성 있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할 것. 불타지 아니할 것을 현실에서 마련해야 되고 또 불타지  아니할 것을 마련할 수 있는 이 가능성이 있습니다. 할라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것을 기억하고,  한 가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이렇게 그치지 안하고 우리를 향하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까지 떨어졌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고 일어서야 되고, 또  우리는 어디까지 높아지든지 자기는 자기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한 거는  하나님이 다 하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서 한 것은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깨달아 영광을 하나님에게 돌리고 또 하지 못한 것은 자기가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할 수 있다는 말은 이 사실을 믿음으로 가지고 다  해결을 지워야 하는 것입니다.

 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오늘 중간반 반사들이 그동안 수고를 많이 하고 이래서 오늘 해수욕 하도록 좀  오늘 하루를 좀 휴가를 내 달라 해서 참 그것도 좋은 소리라서 허락을 했습니다.

허락을 했는데. 그러나 우리 교회서 하나도 부담은 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서  뭐 비용이나 그런 거 담당은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또 차도 자기네들이 다  자기네들 힘으로 대절해 가지고 그래 갑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왜 그런고 하니  대접하고도 남음이 있지만 뭐 해수욕을 며칠을 비용을 들여 시켜도 시킬만한  그런 참 수고한 분들이지만 너무 수고한 분들이 많아서 주일학교 반사  선생님들도 다 그런 수고를 다 하셨기 때문에 수고했으면 다 같이 이래 같이 좀  해야 되겠는데 그렇게 다 같이 할 힘이 없어서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이 잘 살면 돈이 부자가 돼서 연보를 많이 할 것입니다. 연보를 많이  하면 또 재정이 넉넉하면 이제 그때는 우리가 다 주일학교 반사까지도 전부 교회  비용으로 해수욕도 한번 시킬 수 있는 그런 때가 올란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저하고 이야기하는 가운데에서 '이렇게 돈이 필요한데 항상 돈이  모자라서 쩔쩔매는 것은 뭣 때문이냐?' 하는 것을 물었습니다. 돈이 모자라고  쩔쩔 매는 것은 사람이 복 받은 사람은 적고 구원의 전도를 받은 사람은 많기  때문에 이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복 받은 사람이 천 명이었는데 천  명 복 받은 그 사람만 있고 전도되는 사람이 없으면 거게는 재정이 넉넉합니다.

재정이 넉넉하겠는데 자꾸 복 받은 사람보다도 새로 전도받은 사람이 많게 되면,  만일 백 명이 아니고 억만 명이, 예를 들면 억만 명이, 복을 받아서 억만 명이  다 부자가 됐는데 거게 새로 전도되는 사람이 억억억억만 명이 된다고 하면 항상  돈은 모자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가 재정이 모자라는 것이 좋지,  모자라고 자꾸 전도돼서 발전되어 그래 가는 것이 좋지, 돈은 많고 전도는 없는  거, 그러면 교회가 예배당이 모자라서 자꾸 또 달아내고 달아내고 하는 것이  좋지 예배당은 크단하게 지어 놨는데 있을 곳은 많고 사람 없는 그것이 하나님이  섭섭하고 우리에게는 참 근심할 일이고 걱정 할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경제가 복음이 역사할 때는 경제가 뒤따라가지를 못 하고 왜?  경제는 그만침 회개하고 그래야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에 미리 주시지 안하고 그  사람의 신앙 행위를 따라 주시기 때문에 항상, 먼저 구원을 이룬 사람은 항상  뒤에 전 복음을 위해서 다 바쳐야 되고. 또 다 바쳐도 모자라고 그렇게 되는  것이 오늘까지의 생명 있는 복음이 살아 나오는 그 형태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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