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깨닫는 것이 은혜의 첫번째


선지자선교회 1986년 5월 5일 밤집회

 

본문 : 요한계시록 3장 1절∼6절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아야 삽니다. 사람들에게 일반 은총의 것은 다 가졌지만 이것은 첫째 아담에게 속하여 다 정죄와 사망 아래에 있는 죽은 것들입니다. 이것은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 은혜로 받아 완전과 영생과 불변에 속한 이것을 이루어 가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기에 은혜로 받은 그것으로 기독자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요 은혜로 받지 아니한 것은 구원이 되지를 못합니다.

첫째 아담에게 속하고 이 세상에 속한 것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아 그것들이 속량함을 받을 때에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이 되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할 것이 되고 더러운 것이 깨끗한 것이 되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이 되어서 속량 받아 구원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받은 은혜 가지고 그것을 다시 재구속을 받을 때에 그것이 살게 되는 것이고 은혜 받지 못하면 그것은 그대로 다 죽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오게 된 것이 다 은혜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의 은혜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기에 죽은 것이 살아나는 것도 은혜로 말미암고 또 직접 영원한 것을 우리가 받아서 내것 삼는 것도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은혜 없으면 다 멸망입니다. 우리가 여게 이렇게 여러 사람이 모인 것은 다 은혜를 받으려고 왔습니다.

그러면, 첫째로 은혜가 어떤 것이 은혜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은혜라 말은 댓가 없이 공으로 받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 중에는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신구약 성경 말씀을 읽듣지 듣든지 할 때에 깨달음이 있어야 그것이 은혜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자기가 홀로 읽든지 또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가르쳐 줌을 받든지 우리는 거게 대해서 깨달음이 없으면 은혜를 못 받은 것입니다. 자신이 아무리 유식하고 통달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깨달음이 없으면 은혜를 시작 못 한 사람입니다.

첫째로 읽고 들을 때에 깨달음이 있는 그것이 은혜입니다. 깨달음은 이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뜻이요 곧 참된 이치입니다.

그런데, 이 이치에 대해서 어떤 것이 깨달음인가?

첫째로 이 말씀은 세상에 수 없는 말들이 많이 있으나 그 말과 전혀 다른, 그런 것들을 무한히 탁월하고 초월한 크신 말씀인 것을 자기가 깨닫는 것이 초보적인 깨달음입니다. 세상에 책을 모으면 참 산더미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기록된 말은 이 말씀이 엿새 동안 창조한 그 모든 피조물들이 움틀거려서 거게서 나온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타락 이전의 것이 나온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 조물을 아담 앞에다가 갖다 놓고 이름을 지어라 할 때에 아담이 그 이름을 지은 그것이 타락 전 피조물인 아담의 말입니다. 그 말은 권위 있고 온전해서 하나님이 평가하시기를 잘 되었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후에는, 타락한 후에는 아담 하와가 많은 말을 했지만 그 말은 다 죽은 말이요 가치 없는 말이요 그후 사람들이 뱀의 유혹을 받아 그가 사람을 주권한 그 이후부터는 순전히 뱀의 말 뱀의 지식이 사람에게 다 전달되어서 나타난 지식들입니다.

다만 구속을 입은 사람이 영감을 통해서 나타난 말씀이 있으니 곧 신구약 성경 지식입니다. 예수님의 구속과 구속으로 말미암은 영감을 통하지 아니하고 나타난 그 지식은 다 뱀에게서 나온 지식입니다.

그 지식을 크게 분류하면 물질에 대한 물리적 지식이 있고 또 사람에게 대한 지식이 있습니다. 물리 지식은 그것은 바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지식은 전적 삐뚤어져 있습니다. 물리에 대한 지식도 물리 자체만은 바로 됐지만 물리와 인간과의 그 관계가 있어지고야 그것이 결말되는 것인데 그 물리와 인간과의 관계점인 그 조화가 바로 못 되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반거짓말이 됩니다. 그러기에 세상에는 온 거짓말과 반거짓말 이것이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이 지식이 일차적으로 시공한 것이 있으니 곧 없는 가운데서 물질계라는 이 우주를 만들었고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만물들을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은 명하시고 명령하신 그 말씀이요 곧 진리가 모든 존재를 다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은 명령자시요 시공자는, 시공의 존재는 진리입니다.

그러면 신구약 성경의 이 말씀은 일차 창조로 실패된 것을 이차 창조로 영원히 진동되지 안하고 변동되지 아니할 것을 창조하시기 위해서 나타난 것이 신구약 성경에 있는 구속 도리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가리켜서 복음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 자체가 진리요 또 이 말씀 안에는 영감이 내재해 계십니다. 이래서 이 성경 말씀 안에는 내재적 영감이 있습니다.

이 영감과 이 진리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우주와 모든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창조한 그 진리와 같은 능력을 가진 진리인데 조성할 것은 변동될 것보다 뛰어난 영원히 변동되지 아니할 영원하고 완전하고 불변한 이 이차 창조를 하기 위해서 나타난 진리요 또 이 창조를 하시기 위해서 나타나신 성령님이 십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대속으로 말미암아 새로 이루어지는 제이차 창조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 계약의 말씀은 천지는 없어질지라도 이 말씀은 획 하나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 말씀의 가치의 차이보다 이 말씀이 역사하실 그 역사의 가치 차이를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차 창조는 일차 창조에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그런 완전성의 가치 가진 것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든지 듣든지 할 때에 첫째로 이 깨달음이 자기에게 없으면 은혜 못 받은 것입니다. 그 사람이 뭐 신구약 성경을 통달하고 다 외우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능하게, 듣는 모든 사람들이 다 확실히 이해를 하도록 그런 능한 설득력을 가지고 한다고 해도 스스로 속는 사람이지 그 사람은 은혜를 못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에 '내가 귀신도 많이 쫓아냈고 병도 많이 나았고 또 이적과 기사도 많이 행했고 많은 선지자노릇을 하지 안했습니까' 하고 주님 앞에 말했습니다. 선지자노릇 했다 말은 신학자노릇도 많이 했고 부흥사노릇도 많이 했고 목회자노릇도 많이 하고 설교도 많이 했다 말입니다. 전도도 많이 했다 말입니다.

그럴 때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불법을 행하는 자야' 고게 행함을 딱 말했습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내게서 물러가라.' 주님이 '내가 그때에 밝히 이렇게 말하겠다' 이랬습니다. 그라면서 또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생한 자라야 들어간다' 처음에도 불법을 행한 자라고 말했고 또 뜻대로 행한 자라고 또 행함을 자꾸 가지고 말합니다.

이래서, 우리 구원은 '구원이면 구원이지 뭐 구원을 쪼개서 기본구원이니 건설구원이니 그렇게 구원을 나누는가?' 해서 많은 사람들의 시비와 방이 있지만 그거는 부득이 진리를 바로 구별하는 그 구별상 그렇게 나누어서 말하지 안할 수 없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필요 없는 새 말을 만들어 내는 사람은 어지럽게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진노를 받습니다. 필요가 있는데 없어서 사람들의 구원에 손해가 되는 그런 말은 새로 지어내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러기에, 기본구원은 우리의 영이 구원 얻는 구원입니다. 그것은 영육으로 된 사람인데 영이 주격인데 주격이 죽고 피소유격인 심신도 죽었기 때문에 거게는 스스로 자체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순전히 객관 능력인 하나님 편에서 은혜로 우리 죽은 영, 사람의 주격인 그 죽은 영을 살렸습니다.

살린 것은 세 가지로 살렸으니 예수님의 대속의 피공로와 피공로로 말미암은 영감과 진리 이 세 능력을 가지고 영을 살렸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 그렇게 밝혔습니다. 중생된 것은 영이 중생됐지 육이 중생된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 8장 9절 이하에 보면 영은 하나님의 의로 인하여서 산 것이나 심신은 죄로 인하여서 죽어 있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영이 영생으로 중생한 그 구원은 그것이 순전히 객관 역사로만 된, 우리의 행함이 조금도 상관없는 구원으로서 그것을 가리켜서 기본구원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기본구원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기록해 준 데에 기본구원을 몇 가지로 기록해 줬습니까? 네, 열 가지로 기본구원을 말했는데 그것은 우리 사람들은 상관도 아니하고 하나님 편에서 주신 구원입니다. 그 구원은 본인이 알고 난 다음에 구원되는. 것 아니고 알든지 모르든지 구원됩니다. 또 나고 난 다음에 구원되는 것 아니고 나기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의 대속을 이루실 때에 그때에 구원이 됐습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의 예정적 구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구원이 하나님의 예택적 구원이 예정적 구원으로 성취됐고 예정적 구원이 창조 구원으로 성진됐고 창조 구원이 대속 구원으로 성진됐고 대속구원이 중생구원으로 중생구원에서 신앙구원으로 이렇게 점점 성숙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기 전부터 이 기본구원은 벌써 얻어져 가지고 있는 구원인데 이 구원은 사도 바울의 구원이나 우리 구원이나 꼭 같습니다. 이 구원은, 기본구원은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의 구원의 차이는 뭐이 차이가 있는가? 구원의 영광이 차이가 있습니다.

그 영광의 차이는 고런도전서 15장 40절 이하에 내려보면 하나 예를 들어서 여러 가지를 들었는데 하나 예를 들어서 형체는 형체라는 이름은 같지만 다 같은 형체가 아니요 또 그 영광은 각각 다르다, 하늘의 형체가 있으니 달의 형체, 해의 형체, 별의 형체가 있고 또 땅에 속한 모든 형체들도 있다. 그런데 형체마다 그 권위도 다르고 영광도 다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활한 자의 영광도 이와 같다 그렇게 그 차이점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땅 위에 황토흙이라면 황토흙 그것은 형체가 없는 거 같지만 아마 그것도 몇십 배로 돋아 보이는 그 돋보기로 가지고 본다고 하면 황토흙도 형체가 다 있습니다. 바닷가의 모래알이라 하면 상당히 형체가 어북 큰 형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형체나 하늘의 해의 형체나 다 형체는 가지고 있지만 그 가치나 권위나 영광의 차이야 얼마나 차이 있겠습니까? 이거는 뭐 몇천 배라 할까요? 모래알이나 진흙 한 알의 그 형체나 하늘의 해의 형체와 비교하면 몇 배나 되겠습니까? 혹 억억만 배 될까요? 억억만 배가 아니라 억억억억 하루 종일 말해도 다 모자랍니다. 그렇게 차이가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활한 자의 영광 이것을 가리켜서 행위 구원이라 건설구원이라 하는데 이 건설구원과 행위구원으로서 구속받은 자와 구속받은 자의 영광의 차이는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집 짓는 비유로도 했고, 또 행한 대로 갚는다고도 말씀을 했습니다.

이래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말씀 가운데에 하나라도 버리고 가르치는 자 행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모두 다 행한 자는 하늘나라에서 크다고 일컬음을 받으리라 그렇게 차이점을 말했습니다.

또, 금과 은과 보석과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짓는 그 건축 비유할 때에 그 공력이 불타지 안하고 있으면 상을 받고 공력이 불타면 해를 보리니 저는 구원을 얻으나 불 가운데 얻은 거와 같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구원 얻은 거는 뭐인가? 구원 얻은 그거는 기본구원을 말합니다. 기본구원은 얻었지만 행위구원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하늘에서는, 불 가운데 구원 얻었으니까 뭐 그거야 해석하는 대로 뜨겁기도 할 것이고 부끄럽기도 할 것이고 고통스럽기도 할 것일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늘나라는 모두가 다 기쁘고 즐겁기만 하다 이렇게 했는데 크고 작은 것을 주님이 말씀하셨고 또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는다고 밝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공의 나라요 지성의 나라입니다. 지극히 거룩한 나라요 지극히 공변된 나라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막 먹을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이적도 선지자 노릇도 귀신 쫓아내는 것도 그런 것도 했지만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꼭 행한 것으로만 들어간다 하는 그것을 밝혀서 불법을 행한 자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자라야 들어간다 말했습니다.

그것은 행한 자라야 들어간다는 말은 그것은 기본구원인 그 영이 하늘나라 들어가고 못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기본구원을 얻은 중생된 영은 암만 죄 지어도 하늘나라 안 갈 수가 없습니다. 하늘나라 안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중생되지 못한 사람이 천국갈 수 없는 거와같이 중생된 자가 지옥은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것도 절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은혜 받는 게 뭐이 은혜 받는 것이냐? 첫째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에 있는 많은 말들과 이 가치와 권위의 차이 있는 요 점을 깨달아야 되지 요거 깨닫지 못하는 자는 그 자는 구원은 하나도 받지 못합니다.

사람이 비록 존귀한 데 처하나 깨닫지 못하면 멸망할 짐승과 같다 말은 사람이, 일반인을 말하는 게 아니고, 일반인이야 뭐 짐승이나 뭐 다를 게 뭐 있습니까? 오히려 짐승보다 아마 가치로도 또 상은 가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존귀한 데 처하나 그 말은 이 오묘하고 무한하신 구속의 도리를 깨달아서 구속받은 자로 있으나 네가 깨닫지 못하면 내나 멸망받을 짐승과 같다, 그렇게 가치 없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사는데 첫째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의 말과 무한히 차이가 있는 그것을,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에 말씀하시기를 길가 밭에 뿌린 씨는 새들이 주워 먹어서 다 헛일이라 그렇게 했습니다. 그 길가라고 비유한 그 길바닥이 땅 위에 인간들의 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들의 말 그 많은 말에 밟힌 사람들 말합니다. 수많은 말들을 읽고 듣고 공부하고 머리 속에다 많이 집어넣어 놓은 사람들 말합니다.

그런 지식에게 그 심령이 짓밟혀서 하나님의 말씀이나 어떤 철학자의 말이나 어떤 대정치가의 말이나 위인의 말이나 이말과 같은 말로 여기는 그것 때문에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말과 비교 안 되는 이 수많은 존재를 창조한 이 전지 전능의 말씀인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멸망 받습니다.

그러므로, 지혜 있고 통달한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이 말씀했습니다. 하늘나라를 이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는 그 말씀 속에는 범위가 넓은데 어린 아이가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솔직하게 들어서 그대로 가지는데 사람들은 그 에누리를 하고 인간 말과 다 이래 같이 해서 오히려 대학자들은 인간의 말을 주체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은 거기에 비판과 평가를 받아야 되는 것으로서 하기 때문에 주객이 전도됐습니다. 이것이 역사에 있는 모든 고등 비평가들이 자멸하는 행위를 한 그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첫시간에 우리가 은혜를 받는 데는 하나님의 말씀과 이 인간의 말이 권위와 가치가 차이 있다는 이거부터 여러분들이 알라고 애를 쓰고 그 강퍅한 마음을 없애서 '이 말씀이 차이 있다'하는 그것을 먼저 깨달을라고 자꾸 애를 써야 됩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다 헛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것을 찬조했을 뿐만 아니라 열방과 열국을 파괴도 시키고 파멸도 시키고 뽑기도 하고 심으기도 한다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전하는 하나님 말씀인데 이 말씀과 인간 말을 같이 생각해서 오히려 성경 말씀은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성경 말씀은 해야 그거는 일반인이 다 알기 때문에 그렇게 가치가 적고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어떤 깊은, 불경 속에 있는 말 어떤 철학 속에 있는 말 어떤 도덕가 사상가의 속에 있는 말 그런 말을 한 마디 내 쓰면 이거는 정말로 성경에, 신구약 성경에 모든 말씀보다 가치가 있다 이렇게 여기는 자들이 학자들입니다. 이걸 가지고 행상을 뚜드리고 고함을 지르기 때문에 학자들이 목회를 못 해. 양들이 그런 말 듣고 살지를 못 해.

이러기 때문에 이 첫시간에 이거부터 회개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땅 위에 있는 인간의 말과 가치와 권위가 사람이 측량할 수 없게 차이 있고 또 세상에 있는 말을 가리켜서 속이고 속는 말이라고 말했습니다.

다 무책임한 말이요 그 말대로 된 것이 마지막에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다 불타고 죽을 때에 다 없어지고 마는 것이지 죽음 초월한 인간의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온 만물이 불탈 때 그때 불심판을 초월해서 불심판을 발아래 밟고 뛰어오를 그런 말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신구약 성경 말씀은 불심판을 다 밟고 그 위에 뛰어 오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다 옮겨져 갑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 말은 무한히 차이 있고 비교할 수 없다. 이 말씀은 다 생명이요 영생이요 불변이요 다 평강입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은혜받는 것이지, 뭐 지금은 좀 시짐합니다. 제가 그전에 금정산에 가보면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하는 그걸 찬송을 막 돌아앉아 가지고 뚝딱뚝딱 이라면 막 어깨가 이랍니다. 내나 춤추러 가 춤 추는 거와 꼭 갚은 것이지 그게 딴거 없어. 춤추는 데 가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이 그거 못 추고 또 저 무부들 그라는 데 가 가지고 신명 타령 못 하니까 그것이 하는 것이지 거게 하나님의 성령 오지 않습니다. 마음을 기울여야 정성을 기울이지 저거 좋다고 저거 신명끼리 저거만 좋아서 신명 풀이 다 하는데 거기 하나님이 뭐 하러 오겠소, 오기를? 그러기 때문에 지진에도 없고 불에도 없고 바람에도 없고 세미한 음성에 있다고 하지 안했습니까? 그런 거 다 은혜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은혜를 받으면 배꼽 있는 데가 막 뜨끈 뜨끈하다 나는 여기 가슴있는 데가 뜨끈뜨끈하더라, 물론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자기 심령이 변화가 될 때에, 병낫는 것도 보면 그 아파 가지고 뜨거워 가지고 병낫는 거 있습니다. 그거는 하나님의 역사요 자기 또 심리 역사요 자기 모든 체질과 이래 합해 가지고 일어나는 역사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표준 은혜는 아닙니다.

혹 그것은 따라서 자동차가 지나가면 먼지 일어나는 것처럼 따라 일어나는 여파이지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이 이렇게 차이 있다, 하나님 말씀은 천지는 변해도 한 말씀도 변하지 않다, 하나님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다.

요 말씀 듣고 요대로 내가 순종하면 하나님 말씀을 써먹어야 됩니까 지켜야 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됩니까 서이 중에 어느 겁니까? 지켜야 됩니까 써먹어야 됩니까 순종해야 됩니까? 마지막에 삼호라고 생각하는 분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삼호라고 생각하는 분? 순종해야 되는 줄 아는 사람? 써먹어야 되는 줄 아는 분들 손들어 보십시오. 써먹어야 되는 줄 아는 분들? 지켜야 되는 줄 아는 분들 손들어 보십시오. 모르는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이러니까, 예수 믿어야 구별 없이 믿으면 안 돼요. 지킨다는 말도 우리말로 하기에 하나님이 이 계명을 지켜라 이렇게 말했지만 사람은 지킬 권리 없어.

하나님 말씀은 지극히 무한하신 그 능력을 가졌는데 인간이 뭘 지킨다 말이요, 지키기를? 사람들이 알도록 말하기 위해서 표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지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 말씀을 지켰습니까 다니엘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하니까 하나님 말씀이 지켰습니까 누가 지켰습니까? 하나님이 지켰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하는 것은 인간 말로 말하는 겁니다. 성령을 받아라 말은 성령에게 붙들려라, 성령의 것이 되라, 성령에 붙들려 매이라 성령님에게 사로잡혀서 꼼짝 못 하는 자가 되어져라, 성령님에게 완전히 자유를 박탈당해라 그런 것을 가리켜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의 이렇게 비교 못 할 이것을 먼저 알아야 됩니다. 목사가 될라면 하나님 말씀과 인간들이 말한 그 말과 이 가치와 권위 가치가 무한히 있으니 내가 못 하면 그냥 신구약 성경을 줄줄 읽어 주지 인간의 말 가지고 꾸며서 이 세상 연극하듯이 그래 가지고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고 암만 해 봤자 소용없습니다. 뒤에 하나님 앞에 벌이나 받을까 아무것도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이 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이렇게 혹 깨닫기 쉽도록 혹 하나님 말씀을 쉬운 말로 이렇게 해서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살리는 능력이 있고 산 말씀이지만 인간의 말은 다 죽은 말이요 죽이는 말이지 살리는 생명력은 하나도 없다는 이 사실을 먼저 알아야 자기가 목회자가 됩니다.

이거 분별하지 못하면 자기 딴에는 선지자노릇을 많이 한 줄 알지만 불법을 행한 자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내게서 떠나가라 하면서 쫓아냈습니다.

둘째로는 '이 말씀은 너희를 능히 지켜 든든히 세워서 거룩한 자들 가운데에 업이 있게 하시리라' 사도행전 20장에 말씀하신 대로 이 말씀은 내가 이 말씀을 떠나지 안하면 이 말씀은 나를 지킨다. 독침 앞에서도 이 말씀은 나를 지키고도 남음이 있다. 공산주의의 첩첩 포위 속에서도 이 말씀은 나를 지키고 무한한 능력이 있다. 폭탄 속에서도 원수들의 첩첩 포위 속에서도, 내가 이 말씀을 버리고 떠나면 노아 방주 안에 있는 자가 방주 밖으로 뛰어나서는 거와 마찬가지로 자살 행위이고 이 말씀 슬하에서 이 말씀을 모시고 이 말씀 나래 아래, 이 말씀 슬하에, 이 말씀 품안에, 이 말씀이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이 말씀이 가자 하면 가고 오자 하면 오고, 이 말씀이 감옥에 가자 하면 감옥에 가고, 이 말씀이 사형장에 가자면 사형장에 가고, 이 말씀이 가자 하는 대로 오자 하는 대로 이 말씀을 따라서 동하고 정하는 여기에는 모든 피조물들이 협조와 옹호만 했지 어떤 피조물도 이 말씀 모시고 있는 자를 해하는 피조물은 하나도 없다 하는 요 사실을 또 믿어야 합니다. 요것을 믿어야 됩니다. 이게 은혜 받는 겁니다.

이러기 때문에, 왜정 말년에도 그들이 신사참배 말하지만 요대로 믿는 사람들은 그들이 와야 그들에게 대해서 두려움은 털끝만치도 없습니다. 공산주의 속에도 두려움은 털끝만치도 없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거룩한 성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에 똑똑히 말해 놨습니다. 이걸 안 믿고야 두려움 없을 수 있습니까? 왜정 말년에 신사참배한 그거는 그때 왜정 말년 것은 지금 앞으로 있을 이 공산주의의 박해에 비하면 그거는 참 어린 아이 박해입니다. 어린 아이 박해라, 어린 아이 박해. 이런데 거게서도 두려워서 못 견뎌서 그들이 하라 하는 대로 다 하고 하는 그것이 이렇게 믿음에 병이 들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과 인간 말을 구별하지 안한 그 병이 들었소. 하나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하나님 말씀이 너를 지켜 능히 든든히 세워 가지고 거룩한 자들 가운데서 업이 있게 하시리라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그 병이 들어 그렇습니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삼 년을 복음을 전하고 아시아를 떠날 때에 한 말입니다.

내가 떠나고 난 다음에는 악한 이리가 와 가지고 너희들을 삼킬 것이고 너희들 가운데서도 너희들을 제게로 붙여서 저를 지지하도록, 저를 딿도록 제 사람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너희들을 삐뚤어진 길로 인도하는 그런 자가 을 터인데 내가 너거를 누구에게 맡기겠느냐?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한다. 이 말씀이 너희들 지켜 능히, 능히 든든히 세워 거룩한 자들의 받는 그 업에 참가하도록 그렇게 할 것이다 말씀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말씀의 무한히 크심, 말씀의 이 크심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아심을 믿지 않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크심을 믿지 않는 자는 이 말씀의 큼도 믿지 안하고 하나님의 크심을 믿지 않는 자는 그 사람은 하나님보다 큰 거 있으면, 인간은 사대주의를 조롱하지만 아니오. 인간은 다 사대주의요. 큰 것을 섬기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길러도 집집마다 가보면 어머니가 세력이 있으면 어머니로 붙고 아버지가 세력이 있으면 아버지에게로 붙습니다. 사람은 그거 본능입니다. 타락 후에 본능이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보다 큰 게 있으면 그거 따라가지 하나님 따라갑니까? 하나님이 제일 큰 것을 깨달은 사람은 작은 거 그거 따라가지 않고 하나님 따라갑니다.

이래서, 둘째로는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능히 든든히 지키신다. 이 말씀만 내가 배반하고 도망치지 안하면, 이 말씀만 모시고 있으면 모든 피조물이 옹호했지 이 말씀 모시고 있는 자에게 이 말씀에게 지음 받은 자가 결단코 해하지 않는다.

이 말씀 모시고 있을 때에 칼이 와 가지고 그 사람을 찔러서 죽었습니다.

죽였으면 해쳤습니까? 아니오. 그 칼은 그 사람을 영광스럽게 만들었지 해하지 못합니다. 이 말씀을 모시고 이 말씀을 떠나지 안한 자는 절대해하지 못한다는 이 사실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이래서, '여호와로 피난처를 삼은 자' '지존자로 은신처를 삼은 자' 그것이 뭐입니까? 하나님 말씀 모시고 있으면 아무것도 해하지 못 한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모신 것은 어떤 게 모신 건가? 그 말씀이 가자 하면 가야 모신 것이지요.

오자 하면 와야 모신 것이지. 그 말씀이야 가든지 말든지 나는 여기 있을랍니다.

하면 하나님 떨어졌지 뭐 있습니까? 하나님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만 모시고 있으면 이 말씀이 우리를 지켜서 어디 가든지 우리의 피난처됩니다. 우리의 구원됩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 셋째로 깨달을 것은 이 말씀의 계약은 호리도 가감이나 변동이 없다 또 이거 깨달아야 뵙니다.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이제 것과 장래 것과 사망과 생명과 모든 것이 너희 것이라' 에이고, 그 모두 다 보면 사업가들과 떠들어 쌓아도 그 찍해야 가지고 있는 거 보면 뭐 부동산 몇만 평 또 무슨 큰 빌딩 그리 아니면 이 지구에서 보면 똑 손톱만한, 우리 남한은 지구로 말하면 온 지구덩어리로 말하면 새끼 손톱만 할까요? 그것도 좋다고 이라는데, 좋다고 이래 쌓는데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이제 것과 장래 것과 모든 거 다 너만 그리스도의 것이 되면 이 모든 것 다 네것 된다 그 말에 거짓말 섞였습니까? 이걸 믿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약해 주신 것이, 이 신구약 성경은 계약인데 이 계약은 가감이 없다. 이 계약은 정확 무오한 절대다. 요 계약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이걸 깨달아야 돼요. 이 계약은 참되다, 그래서 모든 소망을 이 계약에다 둬야 됩니다.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고난이나 부끄러움, 십자가는 고난이고 부끄러움 둘 아닙니까? 둘인데 뭣 때문에 그 고난과 부끄러움을 견뎠습니까? 그 앞에 소망, 그 앞에 있은 즐거움. 이러기 때문에 소망을 우리의 투구라 했어, 투구 이 두부를 강직하는 제일 중요한 거.

우리의 지식 가운데는 제일 소망이 중요하다 그 말입니다.

이러니까, 이 소망을 하나님의 계약의 말씀에다가 소망을 두는 이 깨달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거 안 가지면 소용없어. 이거 깨닫고 '아멘' 이 사람이 되고 요 믿으면 암병이고 여기 다 나아. 무슨 병이든지 다 나아. 그거 뭐 다 나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빛으로 들어왔는데 어두움이 견뎌 배깁니까? 빛 앞으로 가면 병마의 모든 어두움은 다 녹아져. 그거 녹아져'. 그거, 그거 낫우는 게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빛 앞으로 가서 하나님하고 나하고 한덩어리가 되면 그 모든 거는 저절로 녹아져 버려요.

여기 와서 혹 병든 사람 왔는지 모르겠는데 지난번에도 칠백 몇 명이 나았어.

칠백 뭐 삼십 명이던가? 뒤에 신고 들어온 거 보니까 '병도 괴상도 안 한 병이 많이 있어요. 이런데 병 나을라고 하는 사람은 병 안 나아요.

병 나을라고 생각지 말고 이제 말씀에 오늘 저녁에 몇 가지가 깨달으라 했습니까 손가락으로 가리켜 봐요. 몇 가지 깨달으라 했소? 세 가지 깨달아요. 세 가지 깨닫는 거. 이 세 가지 깨달으면 병이고 뭐이고 이거 세 가지 거기 다 있는데 이거 세 가지 깨닫다 보면 병 나은 줄 몰랐는데 다 나아. 나온 줄 모르는데 다 나았다 말이오.

내가 여기 들어 보니까 어떤 사람은 여기 오지도 안하고 여기 집회 올라고 준비하니까 다 나아 버렸어. 준비하니까 주님하고 가까워졌거든. 주님하고 가까워지면 병마가 없어진다는 이걸 알아야 됩니다. 주님과 가까워지면 근심도 없어지고 걱정도 없어지고 주님과 가까워지면 두려움도 없어지고 주님과 가까워지면 못된 욕심도 없어지고 주님과 가까워지면 전부 영생할 옳고 참된 바른 것만 자꾸 우리에게 가득 차게 됩니다. 이러니까 평강과 기쁨이지.

이래서, 주님 말씀하시기를 내 기쁨이 너희 기쁨으로 충만케 하기 위해서 내가 말한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들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있으리라. 지킨다 말은 우리말로 하는 말이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모시고 촌보도 떠나지 안했어. 주님은 아버지의 계명을 모시고 그 계명 가는 대로 따라다녔지 혼자 떨어지지를 안했어요. 너희들은 내 계명을 모시고 내 계명 떨어지지 안하면 너희 안에 내 승리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충만케 되리라. 내가 승리하고 아버지의 보좌 우편에 앉은 거와같이 너희들도 승리하면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시리라 말씀했습니다. 이 계약의 소망.

이 계약의 소망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무한히, 세상 말과 무한히 탁월해서 세상 말은 다 죽은 말이요 죽이는 말이요 하나님 말씀은 산 말이요 살리는 말씀이라. 하나님 말씀은 없는 가운데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는 말씀인데 우리에게 나타난 말씀은 이차 창조 영원히 진동치 아니할 것들을 창조할라고 나타났습니다. 히브리서에 말씀해 놨습니다.

이 말씀을 깨닫고 내가 이제까지 이 책 저 책 들춰보고 지식 자랑하느라고 이 책에 이 말 저 책에 저 말, 어떤 사람은 또 지식 자랑하느라고 원서 이 무슨 원서 원어 한 마디 떡 한 마디 떡 읽어 놓고, 모르는 사람들에게 뭐 원어 읽을 필요가 있어야지? 이래 턱 한번 지식 자랑, 원어 떡 이래 하나 떡 읽어 놓고 그거 또 뒤에 해석을 하고저 이래 하는데 물론 거게도 하나님 말씀이 있겠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을 구별하지 못하는 그거 가지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 합니다. 요거 제일 중요한 거 오늘 저녁에 말했습니다. 제일 중요한 거 둘째로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지켜 주신다. 말씀을 떠나지 아니하고 이 말씀 모시고 이 말씀 가자 하는 대로 졸졸 따라만 다니면 다 생명이요 평강이요 승리뿐이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의 말씀은 다 영생인 것을 나는 믿는다 이랬습니다. 이 말씀의 능력 이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되겠고, 셋째로는 이 계약은 천지는 변해도 이 획 하나도 변함이 없습니다. 요 계약은 요 계약대로 됩니다. 이 계약대로 된다면 이 계약보다도 더 큰 무슨 소망이 있으며 뭐 큰, 믿는 거 냅두고 이 말씀보다도 그라면 더 큰 게 뭐 어디 뭐 기록된 게 있습니까? 이 세상에 더 큰 게 기록된 게 있습니까? 없어. 없어. 이 말씀보다 더 큰 것을 기록한 것이 세상에 없어요. 인간들이 아무리 말해도 이 말씀의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어.

그러기 때문에, 우리 한국에 제일 큰 참선자인데 그 중이 참선 중인데 아주 뚜양 제일 갑부, 제일 부자 그 아들인데 그분은 자기 집에서 나서면 삼십 리까지는 자기 땅을 밟고 남의 땅 안 밟고 다니요. 그렇게 막 점령 많이 해 놨어. 되게 많이 해 놨지. 그거 번다고 욕 많이 봤어. 그렇지만 인제 죽었으니까 뭐 소용 있어야지. 그거 다 던져 버리고 불교에 들어가 가지고 그랬는데 그분하고 한번 나하고 애기를 하는데 불교에 좋은 걸 좀 한번 말해 보이소. 불교에 이게 쫓고 이게 좋고 이게 좋은데, 막 좋은 거 많이 말해요.

많이 말하는데, 그래 내가 있다가서 성경에는 그 다음에 요게 있는데 어떻습니까 이게 큽니까 그게 큽니까? 그까짓 거는 먼지 같고 이거 성경에 말한 거는 막 이거 우주 같거든, 너무 크기가. 몇 번 그라니까 그만 아이고 나는 바빠 갈랍니다.

그만 도망을 뻐 버려요. 한 서너 번 그랬어.

이랬는데, 그래도 하나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이라. 좌우에 날선 검이라.

찌르면 들어가요. 하나님 말씀은 찌르면 들어가요. 들어가면 죽어.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살아나와요.

마지막에, 나는 보지는 못했어. 죽을 때 우리 서부교회에 자기 생질이 있는데 거게 와 가지고 내가 아무래도 세상 뜰 때가 됐으니까 내가 여기 와서 죽는데 좀 부디 나를 교회 묘지에다가 장사를 해 달라. 그러고 나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지 말아라. 소식 전하면 막 중들이 다 올 터인데 내가 이제까지 그래 놔서 많은 사람들이 이 대가리 중이니까 이런데 그래 놓으면 여기 장례도 못 하고 야단날 터이니까 소리하지 말아라. 아무데도 기별하지 말라 하고 교회서 뭐 두 주일인가 한 주일 나오고 난 다음에 세상을 떴어요. 자기가 원청 참선해 불교를 많이 선전해 놨으니까 자기가 지금 이렇다 하기는, 할 용기가 없고 말아요. 그렇지는 못하고 자기만 살며시 돌아와서 예수 믿고 구원 얻었어.

그런 데는 큰 말인 줄 알지만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 큰 게 있지 성경을, 이 계약을 믿는 사람은 상 위에 이 성경 두고 갈 그 귀한 게 없어. 성경 버리고 갈 것이 없어. 성경보다 귀한 게 없고 성경보다 더 큰 소망이 없어. 또 성경 말씀보다 더 의지할 피난처가 없어. 이 성경 말씀보다 더 권위 있는 것이 없어 없는 가운데 천지를 창조했는데 그걸 모르거들랑은 저 좀 배나 타고 그리 안 하면 어디 뭐 태평양 가운데 가서 그 바다가 넓은 거 저거 다 주님이 지었다.

그것도 저것도 주님이 지었다. 그거 지었으면 그거 지은 능력이 얼마나 큰지 좀 생각해 보라요. 그리 아니면 높은 산에 가서 저 모든 산을 한번 좀 보라고요. 뭐 천문학자들이 말해 쌓는 항성만 해도 십억만 항성이라 하는데 이 우주가 얼마나 큰데 그것도 주님이 지으신 걸 가만히 눈감고 한번 생각을 해 보라요. 그분이 얼마나 크신가.

그러므로, 우리는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말씀과 세상 인간 말과는 이거는 다르다. 이 말씀을 모신 자는 절대로 피해가 없다. 천인 만인이 옆에서 꺼꾸러져도 이 말씀 모신 자에게는 해가 네 근방에 가까이 오지도 못한다 신구약에 계약해 놓은 이 계약의 이 계약은 호리도 틀리지 안하고, 여호와라 말은 이 계약 선포해 놓고 요 계약대로 딱딱 이행해라.

그러기 때문에 이 계약을 믿고 계약대로 이행하는 자는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다 보상으로 갚아 주시고 이 계약을. 업신여기는 자는 그대로 다 갚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라 말은 선포해 놓은 계약대로 호리도 틀리지 않게 절대 고대로 이행하신다 하는, 이행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그 말입니다.

계약을 믿고 그 다음에는 이 계약을, 계약되어 있는 이 계약을, 계약의 소망 이 계약된 소망, 소망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우리에게 모든 해로운 것을 다 도말해 버리는 방편이 이 계약에 쓰였어. 도말해 버리는 방편. 우리에게 금생과 내세 영원 무궁토록 우리에게 좋고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는 방법이 이 계약에 다 기록돼 있어. 모든 사망에 속한 것을 다 피하고 생명과 평강에 속한 것을 다 달성시키는 그 방편이 이 계약에 있어. 이 계약은 이 방편을 기록해 주신 법규입니다. 이 방편을 기록해 주신 법칙이오.

이러니까 이렇게 사망을 피하고 생명과 평강을 취하는 이 실질적인 구체적인 달성 방편이 기록되어 있는 이것이 신구약 성경 말씀이라 이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몇 깨달았습니까? 넷 깨달았어. 하나만 더 깨달으면 돼. 그만.

그라면 오늘 이거 다 깨달으면 이것만 깨달으면, 요것만 깨닫고, 요것만 깨닫자 하면 뭐 앉았을 것도 없어. 가도 돼요, 그만. 하나만 더 깨달으면 돼. 하나는 뭐이냐? 내가 요 법칙을 보고, 요 법칙을 기록한 것을 가리켜서 이름을 뭐라 했습니까? 복음이라 이랬어. 요 법칙을 기록한 것을 복음이라 이랬어요. 요 법칙대로 내가 내게 해로운 것은 다 치료해서 내게 해로운 것은 다 벗어 버릴라고 벗어 버리는 방편대로 하고 내게 필요한 것은 다 갖출라고 갖추는 방편대로, 하고 요렇게 할라고 나만 달라들어 하면 요 일이 이루어진다 그거요.

요거 인제 깨달아야 돼요, 요거. 다섯째로 요거. 성경에는 사망의 해가 내게 오지 못하게 하는, 사망을 방어하는 그 법칙이 있고 생명과 평강을 자꾸 건설해 나가는 요 법칙이 있으니까 요 법칙대로 행할라고 하면 다 돼요. 행할라고 하면 다 돼요.

그러면, 행할라고 하면, 행할라고 하면 돈벌이하는 것만치 행 할라고 하면 될까요? 누워서 노는 것만치 하면 될까요? 이 행할라고 하기를 어느 정도 행할라고 하면 됩니까? 성경에 뭐라고 해 놨소. 또? 뭐? 마음 다하고, 또? 목숨 다하고, 또? 힘 다하고, 또? 뜻 다하고, 이거 다해야 돼.

이렇게 내게 있는 거 뭐 병신도 좋습니다. 앉은뱅이도 좋습니다. 누운뱅이도 좋습니다. 인간 중에 제일 못난 자라도, 잘난 자, 생명 힘센 자 생명, 또 유식한 자의 뜻, 그게 아니라. 앉은뱅이도 좋다 누운뱅이도 좋다 등신도 좋다 바보도 좋다 네게 있는 거, 네게 있는 대로, 있는 것만 다해. 있는 것만 다하면, 마음 다하고 목숨 다하고 힘 다하고 뜻 다해서 있는 것만 다 하면 됩니다. 있는 것만 다하면 돼.

있는 것만 다하면 그까짓 거 무능한 인간이 다해 봤자 그까짓 거 뭐 누운뱅이 갚은 거는 쌀 한 말도 못 지고 갈 건데 뭐 다해 봤자 몇닢푼치 됩니까? 이렇기 때문에 좋아. 있는 것만 다하면,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그 방편을 다하니까 그 사람은 믿는 사람이라. 믿기 때문에 제게 있는 대로 다하지. 그거 믿는 증거라.

다하는 것이 믿는 증거. 다하는 것이 믿는 증거라, 다하는 것이. 아무리 많아도 반밖에 안 들이는 자는 안 믿기 때문이라. 이 좋은 게 있는데 믿으면 제 힘대로 다하지 안 할 리가 있는가? 힘대로 다하는 것은 다 믿는다는 증거라.

다하면, 제 있는 힘대로 다해서 한 치 만든 자도 있고 있는 대로 다해 가지고 한 자 만든 자도 있고 있는 대로 다해 가지고 열 자 만든 자도 있고 사람의 그 지금 선천 후천의 실력에 따라서 그 가진 것대로 하니까? 제일 낮은 인간은 한 치밖에 못 만들거라. 한 치밖에 못 만 들었는데 요거는 있는 걸 다 했어. 있는 걸 다했고.

저 사람은 백 자를 가지고 있어. 그런데 그 백 자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인데, 백 자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인데 아흔 아홉 자를 만들었다 말이오.

아흔 아홉 자. 아흔 아홉 자 만들었으면 아흔 아홉 자 만든 사람은 백점 안 주고 구십 구점 줬는데 한치 만든 사람은 백점을 줘. 이거 무슨 말인지 알아요? 한 치 만든 사람은 너는 완전이라 하고 아주 만점을 주는데 아흔아홉 자 만든 사람은 백점을, 힘을 다 들이면 백점을 만들 수 있는데 아흔아홉 자밖에는 못 만들었어.

그러면 그 사람은 구십 구점이지 백점 안 줘요. 이런 구원입니다.

그라면 그 나머지기는 누가 합니까? 그 나머지기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나님의 의 예수님의 피 때문에 그래. 예수님의 피 때문에.

다하면 그 나머지기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다 믿으니까, 그 사람에게 대해서 예수님께서 다해 줄 수밖에 없어. 이러기 때문에, 영생을 어떻게 하면 얻으리이까? 이거 다하면 영생 얻는다 주님이 말씀하셨어 이러니까, 많든지 적든지 내가 두 냥중 가졌든지 닷 냥중 가졌든지 내게 있는 대로만 다해서 이 말씀대로 모든 사망을 방어하고 생명을 이것을 보수해 나가는 이 일을 내게 있는 힘만 다하면 나머지기는 하나님이 다 보충해 가지고 완성을 이루어 주신다 하는 요것을 또 깨닫고 믿어야 돼요.

그라면, 몇 가지 오늘 저녁에 배웠어요? 다섯 가지 배웠어요. 다섯 가지 깨닫고, 깨닫고 요걸 믿어야 돼요. 깨닫고. 사실 그러하다, 요걸 믿어야 돼요. 깨닫고 믿고, 그 다음에는? 행하면 돼요. 이라면 이 천물로 안 살아. 천물로. 이래 살지 안해요.

이번에는 좀 천물이 되지 말고 좀 확 하늘로 뛰어올라가자고, 좀. 다섯 가지 단단히 요거 결심해요. 여게서 이제까지 안 믿던 걸 다 회개하고 요 자리서 믿기로 확정을 지워요.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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