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귀중성 권위성 중대성


선지자선교회 1986년 8월 15일 새벽(금)

 

본문 : 사도행전 27장 20절∼26절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뻔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말씀을 바로 듣고 바로 깨닫는 사람은 즉시 생명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러나 뒤뚱하게 듣고 깨닫는 사람은 일생 동안 노력해도 항상 어두움에서 헤매이는 것입니다.

우리 진영에서 여성도 중에는 최기주 집사님이라 하는 그분이 제일 신앙이 앞섰습니다, 우리 서부교회에 있는 권사님들도 비교 못할 만치 탁월한 앞선 신앙을 가졌었습니다. 그분은 모든 깨닫는 것이나 행하는 것이나 모든 것이 특수했습니다.

그 사람은 오랫동안 배우지 안하고 겨우 여덟 시간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때 피난 갔다가 안 믿는 사람이 자기 형제의 권면으로 와서 여덟 시간 참석하고 다시 환도해서 자기 본토로 돌아갔었습니다.

돌아가 가지고 그의 신앙 행위 한 것은 그는 참 놀랠 만치 어려운 행위를 해 가지고 그때에 자기가 세운 교회가 제천 OO교회라고 세워서 지금 큰 교회가 돼 가지고 있습니다.

어제 아침에도 말했는데. 여게 사도행전 27장으로부터 28장까지 읽어보면 우리의 신앙의 걸음에 대해서 지도하고 지도를 받고 또 어떻게 모든 순서들을 하나님이 섭리하시는가 하는 그런 것을 여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이 세상 말과 다릅니다. 세상 지식은 아무리 박식한 사람이고 아무리 경험이 많은 그런 유력한 학자라 할지라도 그의 말한 것이 언제든지 한 꺼풀, 또 그리 안 하면 그 속에 한 알맹이 그 이중 더 되는 그런 교훈이 없습니다. 대개는 한 첩뿐입니다. 일 중뿐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이중 삼중이 아니라 십중 백중도 더 됩니다 자꾸 파고 들어갈수록 예수 믿는 도리, 사람이 어떻게 살면 된다는 도리, 자꾸 파고 들어가면 모든 우주와 영계의 모든 존재에 대한 그 길과 모든 얻어지는 실상이 다 그 속에 든 것을 알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성경을 하나의 문학적으로만 연구를 하고 또 하나의 문서적으로만 연구해서 거게 있는 것이 어떤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이것만 구경하고 기억하는 사람은 외식하는 사람이요, 그 사람은 예수교를 뭐인지를 모릅니다. 반드시 '이는 우리가 살아갈 길을 가르쳤다' 그렇게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기에 무엇이든지 성경을 읽으면 껍데기는 이 문서로 기록한 이것인데 그 알맹이는 뭐이냐? 또 알맹이 속에 알맹이는 뭐이냐? 또 알맹이 속에 알맹이는 뭐이냐? 그렇게 찾아서 한 껍데기 들어간 깨달음을 가진 사람은 외식을 버리고 한 껍데기 들어갔고, 두 껍데기 들어간 깨달음을 가진 사람은 더 그만큼 진실되이 자꾸 나아가고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교훈을 껍데기로 볼 것 아니고 나에게 하나님처럼 온전하고 거룩하고 깨끗한, 참 존영한 지극히 큰 구원을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이 구원을 이루는 방편으로 우리에게 주신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방편을 배운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를 아니합니다.

여러분들이 다 경험한 있이겠지만 부모의 깨달음을 자식의 깨달음 보다 탁월합니다. 부모의 깨달음이라는 것은 많이 경험을 했고 자녀들의 깨달음이라는 것은 경험 없기 때문에 그저 아주 소박한 그 생각가지고 그저 저거 생각나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부모네들은 여러가지 경험을 해 보고 또 체험을 해 보니까 거기서 당장 깨닫는 것과 많은 경험과 체험을 가지고 깨달아 보면 좋은 게 나쁜 것도 있고 나쁜 것이 뒤에 좋아지는 것도 있고 처음과 나중이 다른 그런 것이 많이 있는 것을 부모들이 압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걸 짐작해 가지고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일시만 보고 그저 저 좋아하는 대로만, 저 좋은 대로만 할라 하는 그 아이를 부모는 `네가 이렇게 하면 그 결과가 이렇게 나빠진다 이러기 때문에 임시 좋은 것만을 교훈하지 안하고 앞으로 좋아질 거, 장래 좋아질 거 유익될 거, 이 아이가 교훈하면 그 교훈하는 것이 한 댓 살 먹을 때 교훈하면 이게 열 살 먹어서 유익될 그것도 생각하고 또 그 아이가 성년이 돼서 한 나이가 한 스무남은, 한 삼십 살 됐을 때에 그때에 좋아질, 그 아이 장래를 생각하고 지도하는 것이라 말이오.

이러니까, 아이들 쳐놓고 부모의 지도를 좋아하는 아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의식주의 모든 주권이 부모에게 달렸으니까 꼼짝 못 하고 그저 강제를 당해서 부모 시키는 대로 이래 하지 부모의 지도를 정말로 좋아하는 그런 아이들이 참 많지를 무합니다. 그는 왜 그런가! 그들은 일시만 보고 장래를 생각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부모의 지도를 받을 수 있도록 이렇게 하는 데에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늘 가정마다 싸우는 일은 그거입니다. 남편이 앞섰으면 남편이, 아내가 앞섰으면 아내, 부모가 앞섰으면 부모 이래서 앞선 사람이 뒤선 사람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가르치고 지도하고 또 지도하는 대로 안 하고 어기고 그러니까 항상 싸움 제일 많은 것이 가정입니다.

싸움 제일 많은 것이 가정이고 시비 많은 것이 가정인데 어떻게 그 가정에 이렇게 싸움이 많고 시비 많은가? 그 싸움을 파악을 해 보면 조금 더 깨달은 사람 덜 깨달은 사람이 있어서 즘 낫게 깨달은 사람이 자기만치 못 깨달은 사람의 그 잘못 가면 그 실패가 자기 실패이기 때문에 자기만 못한 사람에게 자기 앞서 깨달은 것을 말해 주고, 그 말을 안 들올라 하고 또 듣는 척 해도 또 그대로 행하지 안하고 이러니까 왜 시키는 대로 안 하느냐, 말 안 듣느냐! 항상 지도와 그 지도에 불응하는 그 시비가 가정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데에 우리가 보면 애터지는 것은 요대로, 지금 시키는 대로 하면 될 터인데 어기고 요라기 때문에 안 된다. 앞서 가는 사람 그 부모의, 그래도 경험과 체험을 가지고 말하는 것인데, 지도를 받지 않는 그 아이는 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계명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허락한 땅에서 오래 살리라" 하는 것은 그 경험을, 이 세상 일로 말하면 그래도 경험한 사람이 경헙하지 못한 그 자손들에게 말을 하는데 그 말을 달게 듣는 것이 부모를 봉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잘 됩니다. 그러나 부모를 봉양하지 안하고 배척하는 것은 저희보다 앞선 사람의 지도와 저보다 나은 강한 사람의 보호를 배척하기 때문에 탈선하는 행위니까 그 아이는 망할 수밖에 없고 그 가정은 망해 수빅에 없다는 것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자녀를 양육하되 주 안에서 양육하라" 하는 말이 있고, 또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라 하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은 그 아이에게 지도를 하되 순하게 지도를 하고 네가 지도하는 것이 그 아이에게 `부모 지도대로 했더니만 이렇구먼' 네가 지도한 그 지도가 아이들이 뒤에 경험하고 체험하고 실상이 나타날 때에 하나도 그 아이들이 그 지도를 멸시할 수 있는 그런 조그만치도 잘못된 지도가 없도록 조심해라 그런 말입니다.

그러면, 가정에서도 그 아이들도 차차 차차 부모의 지도에 대해서 권위를 인정하게 되고, 또 차차 차차 부모의 권위를 인정치 안하게 되고, 인정하고 인정 안 하는 것이 차차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서는 미래사가 자꾸 과거사가 되어지기 때문에 다 실상으로 하나의 경험과 체험으로 지나가기 때문에 잘못 지도는 점점 불신을 받게 되고 바른 지도는 점점 세월이 갈수록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네가 자녀에게 마구잡이로, 그 뭐 의식주가 달렸으니까 그거야 거짓부리로도 `예 예' 하고 이래 하지만 그들의 양심, 그들의 이성 비판이라 하는 그 비판에 걸리지 않게, 나중에 그들이 지금은 이해를 못 해도 차차 차차 들으면 `과연 과연, 옳다 옳다' 그렇게 머리가 숙여져서 인정을 할 수 있는 그렇게 조심 있게 지도해야 되지 바로 지도하지 안하면 나중에 불신임 받게 되고, 또 그 자녀는 부모에게 인정받는 데 부모의 지도를 불신임하게 되면 그 아이가 사회의 어떤 지도라도 신임을 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모가 가정에서 자녀들이 신임할 수 없는 마구잡이 그런 지도를 하게 되면 부모의 그 지도를 인정치 못한 그 아이는 사회에 있는 모든 지도를 인정 못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정 교육이 제일 중요하다 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지도를 인정받은 사람은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의 지도는 다 옳다 이러기 때문에 어디든지 나이 많은 사람, 경험 많은 사람의 말을 자세히 듣고 신중히 행동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모든 뭐 가정 생활, 사회 생활이나 모든 생활이 다 그것이 바로 정상적으로 이루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바로 육으로 낳은 자기의 친자녀를 지도하려고 해도 이 지도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지도를 할 때에 안 듣는다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지도할 때 잘 안 듣는다는 걸 알고, 또 지도할 때에는 잘 듣지 안하나 옳은 지도를 했으면 안 들어도 반드시 그것이 그 미래 두고는 다 모르기 때문에 반대를 하고 속에 반항을 했지만 그것이 현실이라는 현실을 통과해서 지나가게 될 태는 반드시 그 지도가 틀렸나 바르나 하는 그것이 나타난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옳은 지도만 해 놓으면 반드시 그다음에는 그 지도 받은 사람이 깨달을 수 있는 그런 기회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도하는 사람은 당장 안 듣는다고 낙망할 것이 아니라 길이 참아야 되고 또 옳은 지도를 해 놓으면 언젠간가 안 되면 그 사람 죽을 때라도 회개합니다. `우리 부모가 이렇게 말한 말이 나는 칠십이 돼서 그걸 몰랐지만 죽을 때 생각하니까 과연 부모의 그 말을 들었더라면' 하는 그때 인정을 받아도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안 받지는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신구약 성경 말씀을 읽을 때에 첫째로 이 말씀은 도라 하는 것을 여러번 말했습니다. 도라, 길이라. 이 말씀은 길이라. 이 말씀은 길이기 때문에 어느 말씀이나 이 말씀은 나에게 길을 가르치고 있다. 내가 어떻게 마음을 가져가며 마음의 길, 내가 마음을 요래 먹고 조래 먹고, 요래 먹으면 안 되고 저래 먹으면 안 되고, 또 내가 말의 길, 말을 요새 하면 되고, 안 되고, 말의 길을 가르치는 거, 마음의 길을 가르치는 거, 사상의 길을 가르치는 거, 또 욕심의 길을 가르치는 거, 감정의 길을 가르치는 거. 태도의 길을 가르치는 거, 모든 교제의 길을 가르치는 거, 사업의 길을 가르치는 거 전부가 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하는 그 우리 삶의 바른 길과 삐뚤어진 길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신구약 성경입니다.

성경에 이리 하라는 것은 바른 길을 가르치고 이라면 안 된다는 것은 삐뚤어진 길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을 우리가, 주님은 성경 말씀은 영생이라고 이랬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말이 영생인 줄 안다. 영생인 것을 안다.

영생인 줄을 안다 이라니까 한국말로 이거 번역하는 사람들이 `영생인 줄을 안다' 이라니까 꼭 그 어누리가 좀 있는 거같이 좀 애매하게 돼 가지고 있습니다.

`영생인 것을 안다. 영생임을 안다.' 요랬으면 좋을 것인데 `영생인 줄을 안다' 이라니까 그 번역이 조금 애매하게 돼 가지고 사람들이 저게서 좀 흐려지고 희미해졌습니다.

영생인 줄을 안다 그 말씀은 영생임을 안다. 영생인 것을 안다. 영생이다.

영생임을 안다 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이렇게 구약 말씀이나 신약 말씀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전부가 그게 다 `네가 말을 이래 하라'했으면 그 말이 영생하는 말씀이요, 또 `네가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웃음을 이래 웃으라' 하면 웃음이 영생하는 길을 가르친 것입니다. `네가 다른 사람에게 서로 교제할 때에 이렇게 해라' 한 것이면 그 교제한 것이 멸망하지 안하고 영원히 있게 하는, 교제가 영생을 하는 것이요.

또 `네가 사람을 대할 때는 이렇게 참아라' 했으면 멸망하는 그 길을 가지 안하고 참음이라는 것이 영생하는, 전부 하는 것은, 말을 이래 하라는 것도 그 말을 영생하게 하는 말이요, 지도요, 또 말에 대한 말은 말을 영생하게 하는 것이요, 또 뜻에 대한 지도는 뜻을 영생케 하는 것이요, 성질에 대한 지도는 성질을 영생케 하는 것이요, 모든 행동에 대한 것은 행동을 영생하게 하는 것이요, 대인 관계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대인 관계를 영생하게 하는 것이요, 또 자기 욕심이나마 이 욕심이 다 가질 게 아니라 성경이 가지라는 욕심을 가지는 것은 그 욕심을 영생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전부 영생이요 생명입니다. 생명이요, 영생이요, 다 영광이요.

존귀요, 행복이요, 성공이요. 권위요 하나도 빠짐없이 이 말씀이 전부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을 천천 금은보다 낫다고 이렇게 말했지만 천천 금은 그것은 말하다 보니까 그때는 뭐 더 헤아릴 수 없으니까 천천이라 이렇게 말했지 이 말씀보다 더 귀한 거는 없습니다. 한 말씀보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은 깊이가 이렇고 이 말씀에 깊이가 이렇게 깊음이 있다.

이 말씀에 넓음이 있다. 이 말씀에 높음이 있다. 이 말씀에 세밀함이 있다. 이 말씀에 구비함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은 그저 기나갈 게 아니고, 듣고 지나가고 기억하는 거로 되는 게 아니고, 외우는 거로 되는 게 아니고, 자기가 또 이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는 거로 되는 게 아니라. 이 말씀에는 깊이가 한없어서 깊이 깊이 어느 말씀이라도 그 말씀을 파고 들어가서 깊이 깊이 들어가면 그 안에 하나님 계신다. 완전이 계시고 행복이 계시고 영생이 있다 하는 이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만홀히 여기면 안 됩니다.

그러기에, 제가 권이만 목사님을, 선교사 중에 권이만 목사님을 제가 지금 제일 존경하고 또 교리를 깨달은 교리에 대해서는 스톡 박사라 하는 그 박사를 제일 존경하고 있습니다. 이랬는데 그분은 성경을 읽을 때에 성경을 읽는 것을 보면 나는 처음에 가서 보고 `저 선교사가 우리 한국말을 모르니까 성경을 저래 읽는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이가 한국말에도 박사라 합니다.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는, 한국 사람이 참 한국에 있는 한국어 국어 박사가 따라가지 못할 만한 그런 높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지만 박사 여덟을 논문 박사를 할 수 있는데 논문 박사도 명예 박사도 안 할라 해서 안 하고 있는데 그분이 그렇게 실력 있는 분이라고, 이런데 성경을 읽으면서 그뭐 벌벌벌 떨면서, 자기도 모르게 떨면서 그렇게 참 못 읽어 나가고 뭐 못 읽어 나가는 것같이 그렇게 읽고 나갑니다. 그래 나는 `저 아마 우리 나라 말을 모르니까 저런가 보다' 이랬는데 나중에 목사님들에게 알아보니까 그분의 우리 한국말의 그 어학이 그렇게 능하답니다.

그런데 영어로 읽는 것도 그래요.

그분은 이 말씀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 길이, 이 권위 이것을 알기 때문에 이 한 말씀 한 말씀을 그냥 마구 훑어서 이렇게 미끄러져 지나가지를 않는다 그거요.

그러기에, 우리가 이 한 말씀이라도 보면 자꾸 껍데기로 나가기 때문에 그 말씀을 자기가 아무래도 관계없어요.

이 말씀은 로마서 12장에 보면, 네가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 이 말은 네가 살아 있지만 예수님이 네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살아 있는 그것은 다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에 너는 죽고 예수로 살라 그 말입니다.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 또 말하기를 `네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돌이켜 참된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네가 깨달을 수 있으리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에 대해서 이 말씀은 나에게 지상 명령이 아니라 이 말씀은 나에게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되는 말씀이요, 또 영원히 행복되고 불행되는 것이 결정되는 말씀이니 이 한 말씀도 허투리 볼 수는 없다. 그러기 때문에 곧 이 말씀에서 내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된다. 이 말씀에 영원히 내가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이 결정된다. 이렇게 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신중히 합니다.

이렇게 알고, 그러니까 이 말씀에서 깨달으면 자기가 깨달은 대로는 생명이고 뭐 소유고 몸이고 다 이 말씀에게 바쳐서 살아야 될 줄 알고. 몸으로 산 제사 드리라 말은 이 말씀을 깨달으면 깨달은 요대로 이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바쳐서 살아야 될 이렇게 중대한 말씀이요, 권위 있는 말씀이요, 자기에게 참을 지도하고 있는 이 말씀인 것을 깨닫고 이 세상 사람들과 같지 안하고 이 세대에 세속에 물들지 안하고, 참된 마음, 변화한 참된 마음을 가져 가지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 이 성경 가운데 있는 뜻이 무엇인가? 이렇게 찾는 사람은 다 알게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뭐 성경을 바로 알고 하는 사람은 쉬워요. 자기의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바쳐서 살아야, 행해야 될 말씀이요, 이 말씀은 자기와 자기에게 속한 자와 금생과 내세, 영과 육이 전부 이라면 망하고 이라면 흥하는 것이 망하고 흥하는 것이 여게 달렸다 말이오.

여기에 달렸다는 이 귀중성, 이 권위성, 이 중대성을 깨닫고 이 말씀을 바로 깨달을라고 하고 바로 깨닫는 데는 생명을 바치는 일이라도 `그저 깨닫게만 해 주시면 바로 깨닫는 대로 그대로 하겠습니다'하는,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는 이런 사람은 다 깨달을 수 있다 말이오.

깨닫지만 이런 말씀인데 이 말씀이 뭐 사람만치 권위가 없습니까? 천하에 있는 인간의 말 그거는 사람이 한 말이기 때문에 그까짓 거 아무 권위 없습니다.

대통령이 말해도 대통령 떨어져 버리면 그만이요. 대통령이 말해도 대통령 죽어버리면 그래. 어떤 이종교가가 말해도 그까짓 거 종교 이 세상 불타 버리면 다 없어져 버리고 그만이지 아무 소용없습니다.

이렇지만 이 말씀은 그런 게 아니라. 없는 가운데 우주와 영계를 만드셨고 또 이 나타난 말씀은 이제 일차적으로 우주와 영계를 만든 이것을 다시 부활시켜 가지고 영원히 진동되지 안하고 변동되지 안할 완전 영원한 이것을 창조하기 위해서 나타난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은 사람과 비해서 뭐 비교 못할 뭐 그거는 억억억억 그런 게 아니고 무한히 권위 있는 이 말씀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말씀은 이 우주에 몇억 하는 그걸 먼지같이 당장 일 초에 없앨 수도 있고 일 초에 또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권위 있는 말씀인데 이 말씀의 권위를 이렇게 생각지 안하고 이 말씀을 세상 인간들의 말과 같은 그런 말로 생각하는 그자는 그것을 고치기 전에는 이 성경의 진리를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 깨달음은 이 세상의 박사들이 깨닫지를 못하고 대학자들이 깨닫지를 못합니다. 또 선천적으로 아주 지혜와 총명과 명철을 가진 그런 사람들이 깨닫지 못합니다. 선천도 소용없고 후천적으로 아무리 수양하고 교양받고 뭐 광문다학 한 그런 것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단지 이 말씀은 자기와 자기 소유와 몸과 이 생명을 이 말씀에게 바쳐 가지고 이 말씀이 나보다 크고 이 말씀이 내 금생 내세 영원을 생사 화복을 주장하는 이 말씀이니 이 말씀에 따라서 죽는 길이라도 그 길이 사는 길이고 또 자기 소유가 다 절단나도 이 말씀이 인도하는 그 길이 사는 길이고, 이렇게 모든 것보다 이 말씀은 초월하고 자기의 생사 화복, 금생 내세의 모든 것을 바로 주권하고 계실 뿐 아니라 또 바로 지도하고 계신다는 이 말씀의 권위성을 깨닫고 이 말씀 앞에 자기를 다 바치는 사람은 누구든지 깨달을 수 있어요. 아무리 무식해도 깨닫고 병신이라도 깨달을 수 있고 뭐 글 하나 몰라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개명교회 있을 때에, 집사로 있을 때인데 제가 교회를 맡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남선 목사님이 올라와 가지고 그때 학습 세례 문답을 하는데 아 말을 물어야 모릅니다. 말을 물어야 대답을 못 해요. 하나도 대답을 못 해요. 이러니까 주 목사님이 생각하기를 `이거 백 집사가 아주 유명하다 하는데, 유명한데 이거 가르쳐 놓은 거는 보니까 허무하게 가르쳐 놨다. 이거 학습 하나도 세울 사람이 없다. 문답해 보니까 다 문답이 안 되어 안 되겠다.' 그라면서 나한테 걱정하며 그래요.

그래 내가 있다가 `목사님 그 방편 한번 달리 해 보십시오. 이분들이 국민학교도 가지 안했지 다 모두 세상에서 둔하지 찌끄러기 그런 사람들안 예수 믿게 됐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리 속에 뭐 있어도 발표를 못 합니다. 발표를 못 해서 그렇지 알고는 다 알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목사님이 생각해서 제일 어려운 난제들을 자, 이런 길이 있으니까, 이리 갈 수도 있고 이리 갈 수도 있으니까 이 사건에는 이리 해야 되느냐, 이리 가야 되느냐? 그래 가지고 그런 것으로 물어보십시오. 그걸 이 목사님이 이 목사님도 구별 못해 가지고 팍팍 넘어지는 그런 일들을 말하니까 `네, 이리 해야 됩니다.' 몇 가지 물으면 이라니까 그때 주 목사님이 `이 사람들은 현실에 닥쳤을 때에 이 일 닥치고 저 일 닥치면 이 옳고 바른 길을 바로 깨달아 가지고 바른 길을 갈 수 있겠구나. 거기서 주 목사님이 깜짝 놀랬습니다. `이들이 이렇기 때문에 현실을 닥쳤을 때에 다 걸어가니까 산 순교자라 하는 그런 모두 유명한 소문이 나 가지고 있구나 하는 그런 것을 깨닫고 아주 놀랬습니다.

그분들이 저 있을 때에 이 하나님 말씀에는 뭐 생명이고 뭐이고 아낌없고 주저 없이 요대로 바쳐서 살면 된다 하는 그것을 그들이 다 확신하고 말씀이라면 소유와 몸과 생명을 아끼지 안하고 살 수 있는 그 각오를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 깨달아져서 그분들이 걸어갈 것이 다 가보면 잠 놀랠 만치.

모르는 은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다 그 뜻대로 다 취해서 나아갔고. 또 그분들이 다 예언을 했고. 그분들이 다 영감으로 지시를 받았고, 뭐 그분들이 또 가면서 밤에 길을 가다가 되게 어두워서 갈 때는 하나님께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빚을 보여 줘서 자기 갈 때까지 다 가고 그런 뭐 이적과 기사를 많이 봤습니다.

이러니까. 이 말씀의 가치와 권위와 필요성의 중대성,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내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는 이 중요성의 이 가치성을 바로 깨닫는 사람들은 다 이 성경을 깨닫게 되는테 이 성경을 그냥 이 세상 무슨 학문처럼. 이런 것처럼, 한 이야기처럼 이렇게 보는 사람들은 이 말씀이 가리워져서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주님이 말씀을 그라지 안했습니까! 지혜 있고 통달한 자에게는 숨기시고' 지혜 있다 그말은 선천적으로 아주 명철하게 잘났다 그말이오. 통달한 자라 말은 이 세상에서 많은 학문 다 구경하고 체험하고 배웠기 때문에 아주 그 사람들은 세상에서 제일 지혜자로서 유력한 권위 가진 사람이라 그말이오.

지혜 있고 통달한 자에게는 숨기시고 그 사람들은 하나도 모른다 말이오.

'숨기시고 어린 아이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어린 아이들이 다 깨달아요.

이러니까, 하나님 말씀을 헛투리 보지 많고, 이렇게 공과 해 놓은 것도 그 사람들의 말로써는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공과 말한 그 공과를 제가 자기를 다 기울여 가지고 `이 가운데 정금 같은 보배가 여기 있다. 죽고 사는 게 여기에 있다. 망하고 흥하는 게 여기에 있다.' 그 안에 보배가 있는 줄 알고 달라들어 가지고 자꾸 이렇게 해서 한 달 연구하고 두 달 연구하고 또 일주일 동안 가르칠 것이면 또 월요일날 연구하고, 화요일날 연구하고, 수요일날 연구하고, 또 목요일날 연구하고, 밤에 연구하고, 아침에 연구하고 전부 이 말씀은 자꾸 생각하고 생각하면 그 공과 속에서 굉장한 게 나올 거라 많이요, 굉장한 것이. 굉장한 것이 나오면 이제 자기 살고, 나온 그걸 학생들에게 가르치면 그 학생들도 살아난다 그거요, 껍데기로 하지말고.

이러니까, ○○○목사님이 ○○○교회 집회 할 때에 '뭘 가르치렵니까?' 이래서 내가 말하기를 네가 자꾸 여러 가지를 가르칠라고 많고 꼭 한 가지만 가르치고 오너라' 요 말했어요. `꼭 한 가지만 가르치고 오라. 여러 가지 가르치지 말고 한 가지만 가르치고 오라.' 이라니까 '한 가지를 가르치라 해, 한 가지만.' 여러 가지를 가르치라면 열 가지를 가르치라 했으면 일주일 동안 집회 할라 하면 찍해야 한 열두 시간인가 몇 시간 되니까 월요일날부터 금요일날 아침까지 우리 집회는 대개 마치니까 열 한 시간인가 열 두 시간밖에 안 되니까 열 한 그 설교만 하면, 열 한 가지를 가르치라 하면 수월하겠는데 한 가지만, 그 열 한 시간을 한 가지만 가르치라 하니까 이 사람이 가지고 얼마 동안 기도하며 `요 한 가지를 가르치는데 뭘 가르칠까? 그러면 어느 설교 하나를 가르치라는 말인데 그라면 공과 하나를 가르치자. 공과 하나를 가르친다 한다고 일주간 내내 공과 가르쳤어. 공과 하나만 가르쳤어. 이라니까 나중에 다른 것을 말하니까 `어제 가르쳐 준 그저 좀 가르쳐 주십시오.' 해서 내나 그 공과는 딴 거 안 가르치고 내나 그거라 말이오.

이래 가지고 ○○○목사님이 그때 와 가지고 여기 설교하면서 아주 그분이 교만한 사람이고, 그분이 억센 사람이고, 그분이 신학을 몇이나 하고 23살 먹어서인가 두 살 먹어서 목사된 사람입니다, ○○○목사님이 아마 우리 진영에 안 왔으면 지금 세계에 나운몽 장로나 뭐 박태선 저런 사람보다 더 뛰어난 단체를 모았고 문선명이만치 모았을지 몰라. 굉장히 수단도 지혜도 많은 사람이요 어학도 여러 나라 어학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데, OO목사 집회할 때에 자기가 감동을 받아서 그 받은 바의 내나 설교 그것을 갖다 하면서 `이렇게 공과 속에 이렇게 보배가 들은 줄 몰랐다.' 이러기 때문에, `이 공과 하나 만들라 하면 며칠이나 기름을 짜고 목사님이 한다 하는데 그 공과에 뭐 있어 그럴까 이랬는데 이제 이번에 이 공과를 보니까 이 공과 속에 이렇츰, 자꾸 뚫고 들어가 보니까 그 순서도 그게 깊이 뚫고 보니까 요 순서가 맞았고 또 진리가 맞아서 그 공과의 깊이를 알고 공과의 넓이를 알고 공과의 그 권위를 알고 높음을 알고 그 공과의 절대성이라는 것을 자기가 깨닫고 그때에 와서 느끼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모든 공과가 거의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다 이 하나님 말씀도 업수이 보고 하기 때문에, 이 말씀에 죽고 사는 것이 있는 줄 알고 자꾸 달라들라 말이오.

내가 어제도 어떤 사람을, 어떤 사람이 전화하면서 내가 말했어, 다른 말 아니고.

네가 요번에 거창 집회한 그 설교의 테이프를 가지고 네가 사람 있는 데서 짜드라 그래 하지 말고 네가 집 구석에 어떤 보배로운 일 있다 해도 그거 다 내비 두고 밤중이면 밤중 그래 가지고 어느 산이든지 아무도 없는 데 고요히 네 마음과 성품과 뜻을 다해 가지고 이 테이프에 나오는 그 설교한 말씀을 새기고 새기고 재독하고 되풀이 해 가지고 그 말씀과 너와 하나되면 당장 성녀되고 성자되고 다 되는 거라. 다 권위 있어. 우리는 어짜든지 구원 이루기 쉽도록 해 놨습니다.

이러나 이 말씀을 업신여기는 데서 안 돼. 업신여기는 데서. 길가 밭이 어느 것이 길가 밭입니까! 이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 말, 인간의 말들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인간의 말들과 하나님 말씀과 같이 여기는 그자는 항상 길가 발입니다.

그뭐 암만 들어 봐야 지혜 있고 통달한 사람은 하나님의 도를 모릅니다. 어린 아이가 잘 압니다.

돌짝 밭은 무엇입니까! 돌짝 발은 자기를 부인하기 전에는 안 된다 그말이오.

자기를 부인해야 되지. 또 그다음에 가시덤불은 뭐이냐? 세상을 부인하는 자, 세상을 부인하는 것을 가리켜서 가시덤불을 말하는 것이고 돌짝 발은 자기 부인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길가 발을 말하는 것은 땅 위에 수많은 말 들은 그 말과 이 말씀이 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거 아니면 예수를 못 믿어요.

벌써 시간이 갔는데 여러분돌이 27장과 28장에 있는 말씀을 가서 자세히 읽어 보십시오. 여게는 사람이 껍데기만 보고 이렇게 지도하는 것과 하나님의 성신의 감동을 받아서 지도하는 것, 이 바울이 그들에게 지도한 것은 성경에 그게 있습니까? 그 미항이라는, 그레데 해안이라는 그 해안에 미항이라는 그 항구가 있는데 `미항에서 떠나지 말고 여기서 과동을 했으면 좋겠다, 여기서 겨울을 지냈으면 좋겠다. 하는 그것이 무슨 성경에 있습니까? 성경에 있는 게 아니라.

성경에 있는 거 아니고 하나님이 성령으로 그에게 감동시켜서 `너희들이 여기 미항이라는 이 항구에서 떠나지 말고 여기 있는 것이 좋다. 여기서 만일 떠나게 되면 너희들이 물건도 다 없앨 뿐 아니라 배도 없애고 그뿐 아니라 너희들의 생명도 다 위험하다,' 이것을 말했다 말이오.

멀건데 그말 하니까 다른 사람 듣겠습니까? 안 듣고 다 부인했다 말이오.

그러니까 모두 다 조롱을 했어. 선주, 선주는 배 주인이요 또 사공은 배 부리는 기술자인데 그들이 그들 말 듣지 다른 사람들이 바울 말 듣습니까? 조롱하고 멸시를 했다 말이오. 멸시를 했지만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했으니까 가르친 하나님이 그대로 또 이루신다 말이오. 이렇게 해라' 한 대로 사람이 고렇게 하면 고게 복되도록 하나님이 섭리를 하시고, 또 `이렇게 안 하면 요라면 망한다' 했으면 망한다고 말해 놓은 고대로 망하도록 모두 섭리를 한다 말이오. 당신이 말해 놓고 당신이 그대로 다 역사해서 이루시는데 그걸 누가 변동을 하겠소? 이랬지만 조금 있으니까 인간 그들 말을 지도 받은 그 말과 하나님의 영감받아 지도하는 것은 멸시를 당했지만 얼마 안 가니까 큰 대풍이 일어 가지고 요동할 수 없어서, 중간에 가 가지고 한 가운데 가 가지고 대풍이 일어서 그들이 다 이제 생명까지 다 버릴 형편이고 물건도. 배에 있는 기계도 다, 배 부리는 기계도 다 떼내 버리고 얼마나 급했던지 가볍게 해야 되겠다 해서 그래 가지고 지금 살 기망이 도무지 없는 그런 때에 바울이 또 말했습니다. 또 말했어. `보라, 너희들이 그레데 해안에 있는 미항에서 거기서 과동을 했으면 물건도 손해 안 보고 고생도 안 하고 배의 기계도 배도 다 상하지 안하고 우리 생명도 다 평안했을 터인데 말 안 듣고 이래 가지고 있다가 이렇지 안했느냐?' 그 권위 있는 말 하고 보니까 그다음에 권위 있는 말의 지도가 뒤에 아멘이 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준다 그말이오. 이 무슨 말인지 여러분들은 몰라. 이러기 때문에 성경 깨달음이 참 말이라.

우리가 성신의 감동을 받아 가지고 사람을 지도하는 것은 그 감동의 지도는 내가 이 영감 받았나 악신의 감화를 받았나? 그걸 뭘로 구별 하겠느냐? 영감 받았느냐 악신의 감화 받았느냐 하는 그것은 하나님의 기식을 가지고 맞춰 보면 맞으면, 하나님의 지식에 맞으면 영감받은 것이고 하나님의 지식에는 맞지 안하고 이 세상 지식에 과학에는 딱딱 들어 맞으면 마귀의 감화를 받았다, 마귀의 영감 받았다 그말이오. 악령의 감화를 받았고 성령의 감화 받은 것을 거기서 나타납니다.

이래서, 옳은 지도만 해 놓으면, 반드시 영감대로 지도해 놓으면 나중에 그 사람이 순종하면 `아. 과연 내가 순종하니까 이리 이리 됐습니다.' `이런 참 영광스러운 성공과 행복과 평강을 만났습니다.' 이걸 만나게 되고 또 그걸 어겼으면 `봐라, 네가 이렇게 이렇게 지도하는데 어겨 놓으니까 네가 이런 낭파와 절단을 만나지 안했느냐?' 그런 것을 반드시 만나게 해 주십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지도자는 자기가 자꾸 지도를 이래 하는 것이 영감대로 이래 지도하면 몇 해 안 가서 그 지도대로 하면 성공이요 안 하면 망한다는 것을 자기 지도를 받는 사람이 환하이 다 알고 있어야 됩니다. 그게 다 알고 난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문제가 없어. 그라면 뭐이든지 시키는 대로 콩이면 콩 팥이나 뭐이나 시키는 대로 한다 말이오. 암만 콩을 팥이라 해도 아 시키는 대로 틀림 없다, 이렇게 해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지도권이 그거 권위가 있어져야 되지, 아무나 지도를 잘 못 지도하는 그거는 세월이 지나가면 그 지도가 오늘 지도는 미래를 말하지만 미래가 현재가 되고 현재가 지내 가 과거가 되지 않습니까! 과거가 되면 다 알 수 있다 그말이오.

이러면, 지도를 바로 하니까 바른 지도를 듣지 안한 사람이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바른 지도를 받은 사람이 `과연 감사합니다.' 감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그러면 지도하고 난 다음에 그때 그라고 난 다음에 말았으면 바울의 지도는 멸시만 받았지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 풍랑 일 때 또 가운데 나서 말해. `보라 너희들이 그레데 해 안에서 과동하라 할 때 과동올, 내 말을 들었으면 좋았을 터인데 안 들었기에 이렇지 않느냐?' 또 지도를 했다 말이오. 그 옳은 지도를 또 했어. 또 그들 또 지도한 그 다음에는 그러니까 아 그거 참 그렇다고 목을 끄떡거리면서 다소 긍정하는데 긍정하고 난 다음에는 또 그 다음에 또 지도를 했습니다. 이제는 너희들이 안심하라 그레데 이 사공이 그 육지와 가까운 상 바르니까 아마도 이 풍랑 만나면 다 죽겠고 이 사람 다 구원할라면 안 되겠고 이러니까, 그 거루라 하는 거 조그마한 쪼가리 배입니다. 그 큰 배 옆에 조그만한 배 달아 놓은 거 없습니까 배마다 쪼그만한 달아 놓은 거 있어, 급하면 고거 타 가지고 이래 피난하라 하는 건데 그걸 내리니까 바울이 있다 말하기를, `아, 너희들이 이 사공들이 여기 있어야 살지 우리가 이리 안 하면 못 사는데 이들이 지금 거루를 내리는 것은 우리를 구원할라는 것이 아니고 피해서 도망갈라고 지금 하는 것이니까 너희들이 이거 도망가지 못하도록 해야 된다. 이러니까 그들이 그때는 야 와 달라 들어 가지고 거릇줄 막 끊고 막 끊고 못 가구로 붙들어 놨다 말이오.

이러니까, 반드시 옳은 지도를 하면 처음에는 부인을 당하지만 그 다음에는 긍정 당할 수 있는 그 현실을 하나님이 만들어 줘 긍정을 당하고 난 다음에는 그 다음에 또 지도를 합니다. 또 하나님의 영감대로 또 지도하요. 또 지도같이 되면, 나중에 맞으면 마지막에는 바울이 죽으라하면 죽고 살라하면 살 수 있는 요 사람들이 되어져야만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지 그냥 말로 해 가지고 안 된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우리가 지도하는 사람이 그때 바울을 욕한다고 바울이 뭐 반항을 했습니까? 두고 보자 두고 보자 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옳은 지도는 두고 보니까 그게 바로 되지를 않습니까? 그러니까 나중에 우리가 교훈하는 것은 다 지도하는 것인데 그 교훈하는 것이 바른 교훈이 돼서 그들이 뒤에 회개할 수 있는 기회, 바른 지도가 되기 때문에 그들이 뒤에 감사할 수 있는,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지도 이것을 바로해야 되지 이 지도를 바로하지 안하면 헛일입니다.

말만 가지고 내가 언제 보니까 말만 주 대. 내가 어느 권찰 둘이 길 가면서 보니까 자기 교인을 만나 교인을 만나니까 뭣을 말을 자꾸 해야 되는 줄 알고 뭐 이라고 저라고 말하는데 말 한마디도 쓸 말이 없어. 그래 내가 탄식이 나서 가면서 그 사람 지나고 난 다음에 `여보 권찰님 그 무슨 말 그말해 자기가 어떻게 이말 이말 했지 그 말 전부 뒤에 가서 다 자기 말을 부인 할 수밖에 없는 그말이다. 그말이 앞으로 실상이 이루어져야 될 터인데 전부 헛된 말 하고 있지 않느냐!' 헛된 말로 사람을 지도하면 멸시를 당합니다.

김현봉 목사님이 아현교회가 우리 전국에서 제일 큰 교회였는데 그 교인들은 김현봉 목사님이 죽으라면 죽고 살라하면 살고 그저 일동 일정이 그 시키는 대로 복종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말하기 거기는 등신들만 모여 있다.

등신들만 모여 있는 게 아니라 오랫 동안 경험해서 그의 말한 대로 지도하니까 딱딱 들어 맞으니까 그들이 복종하지 안 맞은데 복종했습니까? 이러니까, 여게 지금 수십 가지가 여기 들어 있습니다. 이러니까 여분들도 27장 28장 이것을 똑똑히 알아 가지고 우리의 걸어가는 길도 다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요 성경에 있는대로 요대로 다 딱딱 들어 맞는 것이니까 요걸 좀 더 27장 28장을 외울 만치 자꾸 읽어 보십시오. 읽어 보고, 성경을 읽을 때는 요게는 내 구원 이치를 어떻게 가르쳤느냐? 요 성경은 내 구원 이치 어떻게 가르치고 있느냐? 하는 이게 다 있다 말이오. 그러니까 성경을 가리켜서 뭐라 말했습니까 성경을 뭐이라 말했지요? 성경을 뭐이라 말했어? 거울이라 했어, 거울. 거울은 자기를 환하게 비춰 보이는 것이 거울 아닙니까? 자기가 자기 얼굴 못 보지만 거울 보연 환하게 볼 수 있지 안해요? 성경은 우리의 금생과 내세 현재와 과거 모든 언행심사의 전부를 똑똑히 보이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이 성경 파고 들어 가면 내가 이리 가면 망한다 이리 가면 흥한다 이리 가면 죽는다 이리 가면 산다 이리 가면 영광스러워 진다 이리 가면 천해진다 하는 것을 환하이 다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얼마나 보배입니까? 그러니까, 성경에서 내가 어떻게 말을 하며 어떻게 행동하여 어떻게 살아가야 되나 하는 것을 정확하게 우리를 바로 지도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지도를 모르면 자기는 깜깜한 어두움에서 지척을 분별 못 하고 날 뛰는 사람이니까 떨어 죽지 빠져 죽지 할 수 있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은 말하기를 우리의 발걸음의 등불이라 우리 발의 등불이라. 우리 발을 환하게 하는 발의 등불이라 했어. 이러니까 말씀을 그냥 보고 지나갈 것이 아니고 이 말씀이 내 생사 화복이 여기 있다 하는 걸 아십시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앞으로 하나님이 심판은 이 말씀을 참되다고 요 말씀에 호리도 틀리지 안하고 요 말씀대로 해야 살고 죽고하는 것이 결정된다는 이것을 믿는 그 사람들이 다 성공하고 그 사람들의 세계요 그 사람들의 영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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