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서 주해

2007.05.31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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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반석     번호 : 47
선지자선교회 게시일 : 2003/09/12 (금) PM 10:34:54  (수정 2006/02/19 (일) PM 11:03:17)    조회 : 197  


● 유다서 주해



■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이 종이라고 하는 것은 값에 팔린 자라. 값에 팔린 자라. 또 자유 없는 자라. 값으로 산 그 이의 주권에 속한 자라. 그런고로 순종하는 자라 하는 뜻을 여기에서 말합니다. 우리를 종으로 산 대가는 세 가지 형벌을 대신하심으로 인해서 죽으신 그것이 종으로 산 댓가입니다. 또 우리에게 세 가지 구원을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 죽음으로 이루어 놓은 그 구원으로 우리를 산 그 구원에 팔린 대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형벌의 대가를 내시고 우리를 그 형벌에서 건져냈기 때문에 그 값에 팔린 우리들이고 또 이 세 가지 구원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생명을 다 해서 이 구원을 설정해 가지고 우리에게 주신 그 대가가 우리를 종으로 산 댓가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종으로 사신 대가는 당신이 죽음으로 대신 형을 받아 가지고 우리를 그 형에서 구출해서 사신 그 대가에 우리가 팔렸고, 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모든 것을 다 희생을 해 가지고서 우리에게 없던 구원을 주신 그 구원에 우리가 팔린 종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세 가지 형을 받으신 것은
1.외부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그 형이요
2.인간이 자율과 주관대로 하는 그 형입니다.

선악과 먹는 것은
1.말씀을 어기는 형이요
2.자기네들 주장대로 한 것은 불의의 불법의 형입니다.
3.하나님과 불목된 그 형은?
있는 전부가 다 망해야 되고 또 죽음에 대한 그런 완전한 그 멸망과 죽음이 그 대가가 되기 때문에 그 대가를 주님께서 내신 그것이 종으로 산 댓가입니다.

또 세 가지 구원을 입힌 것은
1.우리에게 죄 없는 자로 세우시기 위해서 그것도 주님이 참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서 무죄자로 세웠고

2.또 의로운 자로 세우셨습니다.  의로운 자는 하나님에게만 피동 되는 그것이 의입니다.

3.또 하나님과 화친을 이루어서 하나님과 동거동행 하는 이 화친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래 가지고 화친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은 두 세력을 인하여 죽으셨습니다.

1. 하나님의 법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죄의 세력을 이기시고 거기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고

2.하나님의 지성 지공법에 그 요구에 만족을 이루시기 위해서 전부를 다 희생하여 죽으심으로 의를 우리에게 입혀 주신 것이 우리가 종에 팔린 대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상전, 우리의 주인이 이 대가를 가지고 우리를 사셨기 때문에 우리를 종으로 삼아 가지고....
그 분이 요구하시는 그 순종은 어떤 순종이며 그 분이 우리에게 시키신 일은 무슨 일이겠는가?
그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1. 그 분이 대형한 성격을 봐도 다시는 우리에게 형의 재료를 우리가 마련치 않는 그것이 우리의 상전 된 그 분의 요구인 것입니다.

2.또 자율대로 살지 않는 그것을 원하는 것이 상전의 의무입니다.

"자율대로 살지 말아라. 죽기까지 했으니까 자율대로 하지 말아라"
"그러면 어떤 피조물의 그것이라도 피조물대로 피동 되지 말아라.
피조물의 자율대로 피조물로 인해서 움직이지 말아라" 그것을 그 분이 원하는 것입니다.

3."다시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지 말아라" 하는 것이 그 분의 소원입니다.

또 종으로 삼은 그 분이 이제 원하는 것.
소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있고 적극적으로 지금 우리를 종으로....
그래서 우리에게 어떤 무엇을 시키실 것이며 그 주인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실 것인가?
시키시는 것은 이제 말한 셋의 적극성의 것입니다.

1.죄가 없는 자 되는 것
2.또 하나님에게만 이제는 피동 되는 것
3.하나님과 동행자 되는 것

이것이 우리를 산 값이며 그 분의 소원이 이것입니다. 소원이기 때문에, 종으로 된 우리들은 우리에게 그 분이 요구하시는 것이 이것이요 시키시는 것이 이것이며 우리가 그 분을 대접하는 것이 또 이것입니다.]

1.그러기에 우리가 죄를 대할 때에 그 죄에게 이끌리지 않는 것이 그를 대접하는 것이요 죄를 용납지 않는 것이 그를 대접하는 것이요 죄를 용납지 않는 것이 대접하는 것입니다.

2.자율대로 살지 않고, 피조물에 피동 되지 않는 것이 그 분에게 순종하는 것이요 하나님에게만 순종하므로 그 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종의 본분을 행하는 것입니다.

3. 이제는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동행하는 이것이 종의 직책을 다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종이라고 하는 종은 저 팔레스틴 그 지역에서는 종의 종류가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1.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종
2.말은 못하지만 움직이기는 움직이는 종
3.말도 하고 움직이기도 하는 종 세 가지 종이 있는데
그 세 가지 다 주인이 그 어떻게 처분해도 이의를 달고, 권리를 들고 달아봤자 소용이 없는 절대 그 주인이 그 종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이 팔레스타인 종의 법도라고 그렇게 합니다.

1. 움직이지 못하고 말 못하는 종은 농구나, 공구나 그런 도구. 농구나 공구나 그런 것은 뭐 주인이 내버릴라치면 내버리고 부수라면 부수고

2.움직이고 말 못하는 종은 자기 농장에 매어 놓은 소 그런 것은 움직이기는 하지마는서도 그 살아 있지마는 제게 하나도 주권이 없고 주인에게 주권이 있는 종입니다. 그래 움직이는 종

3. 사람 종. 그 사람이 성경에도 보면 종은 참 완전히 주인의 소유물 각 물질과 꼭같이 취급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종은
1.그의 것이 됐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요
2.내가 어떤 값에 팔려서 그의 것이 됐는가 아는 그것이 종이 알아야 될 일이요
3.주인이 나에게 지금 무엇을 요구하시며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가 하는 그것을 아는 것이 신실하고 진실한 종이 됩니다.

그 분에게 종이 되고.... 그 종의 대가가 각각 다릅니다. 몇 해로 정한 종도 있고 또 일생을 그 정한 종도 있고 또 생명까지 다 바친 종도 있고 이랬는데 우리는 "이 값에 팔리고 산 너희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종의 사명을 있는 것 다 해서
감당을 하여야 할. . . .
그런 아주 큰 값에 팔린. . . .
절대 자유라는 것이 없는. . . .
우리가 주님의 종인 것입니다.
종에 대해서 우리는 늘 명상을 해야 되겠습니다.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여기에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의 안에서 사랑하심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여기에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하는 것은 다른 데에 보면은 꼭 같은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요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요 같은 사람들이요 이제 우리 사람은 계급이 없고 꼭 같은 동등 가치와 권리가 위치를 가진 그것인데 이제 제가 제 가치를 마련합니다. 제가 제 가치를 마련하는 것이지 근본 가치는 꼭 같은 형제들입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
곧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은 중생은 우리가 모르게 중생 되고 부르심을 입었다는 말은 우리가 예수 믿기 시작한 것을 가르쳐 부르심을 입었다 그렇게 표현합니다.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이 말은?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입니다. 하나님 밖에 있는 사랑은 아닙니다.

그러면 이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라.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 사랑은 그리스도와 이질을 그 멸망시키는 것이 이 사랑이요 또 대립되는 것이 이 사랑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얻는 데에는 밖에 있는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을 우리가 입고 또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 이 사랑을 입을 수 있고 하나님 밖에 나가면 마치 노아 때에 그 홍수 때에 방주 안에 있어야 하나님의 혜택을 입지 방주 밖에는 혜택이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만 혜택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 아버지의 안,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 안이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무엇을 전제로 두고 하느냐하면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을 두고 말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아니면 이거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도 되지 못하고 그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못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입은 그 대속 안에서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대속 안에서 사랑 받는 이 사랑은 대속 밖에 가면 화가 됩니다.  대속 밖에 것은 죽이는 것이 사랑입니다. 대속 안에 것은 살리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만 사랑이라면 다 구별하지 않고 그러는데 새 술은 새 부대에 넣고 헌 술을 새 부대에 넣으면 안됩니다.

새 술을 헌 부대에 넣으면 그 새 술은 헌 부대를 찢어지게 하는 것이 새 술의 성격이고 새 부대에 넣으면 잘 보관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전부 깨끗, 온전, 거룩, 참됨 거기에만 하나님의 은혜를 복되고 유익 되지 그밖에 모든 죄악 된 데에는 그 소멸하는 것밖에 안됩니다. 그 소멸해 버립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입은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사랑을 얻는다 이 사랑을 얻는다 그 말은 곧 예수님의 이 대속을 점점 입어 이 대속으로 말미암아 점점 입어 또 대속으로 말미암아 이 일이 이루어 지요. 예수님의 대속을 점점 입고 예수님이 대속으로 인해서 입는 것이 또 뭡니까?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해서 입는 것은 영감과 진리입니다. 영감과 진리입니다. 그러면 영감과 진리로 우리가 충만해진다 그 말이요.

[사랑을 얻고] 사랑 얻는 것은 사죄를 얻는다 그 말이요 칭의를 얻는다 그 말이요 화친을 얻는다 그 말이요 사죄와 칭의와 화친을 얻는 것은 하나님에게 얻어서 하나님으로 부요해진다 그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 말로 하니까 알아듣기 쉽도록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요.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 하노라]
그러면 우리를 하나님이 지키시는 것이 우리를 위해 지키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지요? 예, 그 우리로 인해서 지키심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키시는 것이 우리가 좋아서 지키고 나쁘다고 안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지키시는 원인이 우리 때문에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지키심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신다 그 말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그리스도의 이 직책대로의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목적하신 그 목적을 위해서 지키신다 그 말이요 그 목적을 위해서 지키신다. 그러기에 혹 우리가 자기를 위해서 지키는 줄로 또 자기를 인해서 지키시는 줄로, 그러면 지키심이 우리에게 피동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뭐 어떻다고 해 가지고서 우리로 인해서 지키심이 시발되는 것이 아니라 말이요 또 우리를 위하여 지키는 것도 아니라 그 말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 대속의 이 구속을 위해서 우리를 지키시고 또 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우리에게 입히기 위해서 지키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지키신 것이지 내가 뭐 곱다고 잘 지켜주고 찌그러지고 잘못 지켜주고 내가 잘한다고 잘 지켜주고 못한다고 안 지켜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심은 꼭 같습니다.
그 지키시는 원인이 어떤 피조물이 되지도 안하고 우리의 행위의 선악과는 거기 원인도 되지 안하고 또 어떤 피조물 위해 지키는 것도 아니고 완전자 당신의 그 완전 그를 위해서 지키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 지키심이 변동될 수가 없습니다. 또 그 완전 그를 인해 지키기 때문에 그 완전이 변해집니까? 변해지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변해지지 않기 때문에 택한 자들이 이래 사는 데에 그 원치 안 하는 그런 일도 원함이 되고 이렇게 모두 다 하는 그것이 만일 사랑하는 자가 잘못하면 회초리로 종아리를 치는 것이 그것이 사랑이라 그 말이요.
어떤 때는 부모가 자식을 회초리로 매로 올 때도 있고 칭찬으로 올 때도 있고 또 좋은 의복을 입히는 것으로 올 때도 있고 옷을 벌거벗겨서 추운데 쫓아내는 것도 그런 것도 있고 나를 따라서 하나님이 사랑이 변동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합당하게 오기 때문에 당신이 성을 내야 사랑이 되는. . . .
사랑이 성낼 때도 있고 기뻐할 때도 있고 이래하는 것이 그 사랑 자체가 변하지 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우리의 변질로 거기에 그 감염되거나 피동되어 그런 것이 아닌. . . 우리가 알아야 되겠고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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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 강해 (:5-:12)  *유다서 전장에 대한 주해를 설교형식으로 한 것입니다.

하나라도 시작하면 뭐 되요? 아는 것 없고 모르는 것 없다. 알면 다 아는데 똑똑히 알면 아는 것 하나도 없다 말입니다. 아는 것 없고 모르는 것 없고? 모든 것 다 안다 말입니다. 그런데 또 모른다 말이요.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2.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우리가 기도 많이 했으면 여기에 대한 것을 많이 생각이 나왔을 것입니다.

5: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그럼 아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아는 것은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이고 지식으로만 알고 있으면 그 사람에게 교만이 나오지 구원이 나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지식으로 알고 있는 그것이 그 현실 현실을 만났을 때에 자기 몸밖에 현실을 만났을 때에 그 말씀이 생각나야 될 때도 있고 또 몸밖이 아니고 자기 혼자 마음 안에서 자기 안에서 무슨 작용이 나올 때에 그때 이 말씀이 생각나야 할 때도 있다 그기요.

그러니까 이 말씀이 내 몸 안에서 나를 정리 정돈 정비 모든 잘못된 것을 정리하고 이 모든 것을 이렇게 질서 있게 잘 나열하고 정비하고  그 없는 것을 더 갖추어서 구비시키는 것이니까 그렇게 하려고 이 말씀이 우리에게 역사하고 우리가 영접하는 것이라 말입니다.

이 말씀을 영접할 때는 이 말씀이 와야 우리에게 정리할 것도 정리해 주고 정돈할 것도 정돈해 주고 또 정비할 것도 정비해 줍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가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그 말씀이 하나님께서 그 말씀에 해당된 현실을 주실 때에 그 말씀이 생각나서 그 말씀을 생각하면 그 말씀이 생각나 가지고 다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이 내 안에 와 가지고 내 심신을 정리하고 정돈하고 정비하고 또 그 말씀을 생각할 때에 그 말씀이 내 몸밖에 있는 모든 내 행위. 접촉의 행위라면 대인관계인데 대인의 행위에 이 말씀이 와서 정리할 것을 정리하고 정돈할 것을 정돈하고 정비할 것을 정비하고 하는데 이것이 다 자기가 말씀을 지식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만 아니고 기억하고 있는 것이 그때 그때에 이 말씀에 도움을 구하고 이 말씀에 인도를 구해서 이 말씀이 인도하는 데에는 틀림없고 이 말씀이 도울 수 있도록만 내가 그 도움을 반대하지 아니하고 이 말씀이 도울 수 있도록만 내가 내 자체가 구하는 사람이 되면 이 말씀은 전능의 말씀이기 때문에 할 것이 염려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거기 다 생각에서 시작한다 말입니다.

1. 그 말씀을 알고
2. 아는 것 그 다음에 말씀을 생각하는 거기서 부터 시작이 되가지고
3. 그 다음에는 와서 이 말씀대로
정리하고 정돈하고 정비해야 그래서 비로소 구원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무슨 독침 모양으로 지키는 것으로 이렇게 생각을 우리가 가지는 것만큼 그렇게 말씀을 해났습니다.


[계명을 지키느니라]
이랬으나 실은 계명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 이 계명에게 지켜주심을 받는 자라 말이요

[그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는 것처럼 그럼 성질의 말입니다.

[그런고로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다시]
하는 그것은 시간을 말합니다. 그 시간은 무슨 시간을 말하는 것입니까?
현실입니다. 그 현실을 대외에 대한 것. 대내에 대 한 것. 그때 그때 이 말씀이 와야 우리를 정리 정돈 정비하는데 이 말씀이 무엇이기에 이 말씀이 그 전에는 무엇을 한 말씀입니까? 없는 가운데에 모든 것을 지으신 말씀입니다. 그분이 와 가지고서 그러기에 라오디게아 교회에 말씀하시기를 창조의 근본 되신 이가 가라사대 하는 것은? 그분이 창조하고 창조한 것 그 능력 가지고 우리에게 온다 말입니다.
그런고로[이 말씀을 다시 생각나게 한다] 는 말은? 자기의 현실에 그 말씀이 와 가지고 정리, 정비, 정돈을 할 수 있는 그런 장소 그런 시기를 가르쳐서

[다시 생각나게 한다]
그럼 그 말은? 그 말씀을 이용 할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그 말씀을 지킬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그 말씀에게 지켜 보호하심을 입기 위해서 생각하는 것입니까? 지켜 보호하심을 입기 위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은 우리보다 무한히 탁월하게 계십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잘못하면 위대한 사람들처럼 대통령 직영이라 해서 지키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가 생각하기 쉽다 말입니다. 이 말씀을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을 내가 떠나지 않으면 그 말씀이 나를 지켜주십니다.

그러기에 제일 크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시지요. 그 다음에 큰 것은 무엇입니까? 진리입니다. 진리는 사람보다 무한히 탁월하게 사람보다 위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가 크냐? 사람이 크냐? 진리 위에 사람이 있느냐? 사람 위에 진리가 있느냐? 이것을 혼돈하기 쉽다 그 말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있는 것입니까? 진리를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이 말씀을 우리에게 거울로 주신 것입니다. 구원해 내심 가지고도 멸망을 다하고만 것처럼 오늘에 애굽은 무엇을 상징한 것입니까? 세상을 상징한 것입니다.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고]
이 세상에서 구원해 내시고 그럼 애굽에서 구원해 내셨다 우리를 세상에서 구원해 내셨다 하는 것을 우리가 때문에 알라고 해도 "아 주님이 날 세상에서 구원해 내셨는데  어떻게 하였다" 는 것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구원해 내실 때에 어떤 역사로 구원해
내셨는가? 그걸 생각해보면  그때 하나님께서 그 역사로 구원하심 같이 지금도 꼭 그 역사로 우리를 구원해 내십니다.

애굽에서 열 가진 재앙한 것이 거기 다 애굽이 신으로 종교로 삼아서 있든 그런 것들로 다 재앙을 내렸는데 파리 신이 있었고 개구리 신이 있었고 메뚜기 신이 있었고 또 나일강 신이 있었고 거기 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걸 다 모르지마는  이걸 볼 때에 자꾸 대조해 보라 말입니다.

"아 이런 재앙을 내렸다" 그 재앙을 내리니까 그래서 우리가 떨어져 나와 가지고 해방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세상 이런 저런 크고 작은 온갖 것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그것을 치신 것을 우리가 압니다. "뭐 어떻게 치시어 가지고 어떻게 구원하셨다." "어떻게 그걸 멸해 가지고 우리를 예수님 믿는 사람
만들었다." 그저 이스라엘을 열 가지 재앙으로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구원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 그 종류에 순서에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가 있어 가지고 이래 했지마는 서도 그렇치 않는 사람은 제가 잘나서 예수님 믿고 제가 믿고 싶어서 믿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마는 우리는 이럴 때에는 묵상하는 것을 "아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셨다"는 말씀을 했지마는 서도

[나는 너를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구원해 냈다]
그런 말씀을 10계명 초두마다 말씀하셨는데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서 인도하실  때에도" 이런 순서, 이런 방편, 이런 종류의 것들이 있었나? 하는 것을 자기가 한번 과거를 반성하면서 명상해 보면 자기가 몰라 그렇지 참 그때와 꼭 같은 그런 권능으로 모든 애굽 그 신들을 다 깨뜨리고 애굽의 신들을 다 무시하고 멸시하고 구원해서 이렇게 하신 것처럼 우리가 과거에는 보 잘 것 없는 것을 신으로 삼아 가지고 그렇게 걸려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보면 그것 무서운 일도 아무 것도 아니지마는 그 사소한 일에 우리가 걸려 가지고 있든 그런 자들이라 하는 것을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이런 저런 죽음의 사상, 죽음의 운동, 죽음의 동류들이나 세상의 이런 정실 저런 정실 그게 걸려서 떠들고 하든 그런 것들이 많이 있었다 말아요 거기서 그걸 다 끊고 갈라내어서 우리를 구출하신... 자가 세상에서 구출해 나온 거기 얼마나 어렵다는 것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권능으로 구출한 이것을  깨달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한 것이나 우리를 세상에서 구출한 것이나 꼭 같습니다.

그것이 억지로 주워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실지로 그런 것을 우리가 잊어서 그렇지
실상을 그렇다 말입니다. 그런고로 그걸 생각하면 과거를 반성해서 생각 할 때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전에 지내 올 때는 그런 일을 무의미하게 지내 보냈는데. . ." 그걸 생각해 보면  그것 전부는 우리 구원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될
그런 조건이였다는 것을 우리가 느끼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 걸음, 한 순서 닥쳐진 그 모든 것이  내 구원을 위해서 과연 하나님께서 조성하셨고 내게 다 역사 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자기가 느낄 때에는 한 토막 한 토막의 그 역사에서 감사의 눈물이 안나올 수 가 없고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렇게 역사하신 것이 깨달아 질 때에 점점 분명해지고 확고해짐으로써 자기 신앙이 든든히 서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자꾸 그걸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애굽에서 하나님께서 큰 능력으로 인도해 내셨다]
나를 세상에서 구원해 내셨다 그러기에 안 믿을 때에 이런 경험 체험하는 것이
그 모든 것이 믿고 나서 보니까 우연히가 아니라 내 구원을 위해서 조립한 것 같이  탁탁 순서를 해서 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 자기에게는 전부
주님의 사랑이요, 주님의 인도요 주님이 내 구원을 위해서 주권적으로 섭리하셔서 그 모든 것을 요렇게 물 샐틈 없이 딱딱 들어맞는 그 순서를 통해서 날 끌어 가지고서 여기까지 날 끌어 왔다하는 것을  그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지정 감격한 그 사람이면 그것만큼 미래에 대해서 하나님을 확실히 믿고 바래보는 것이 생겨집니다. 그러기에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고 ]
구원해 내신 그것을 우리가 그냥 "애굽에서 구원해 냈다" 그냥 그래 알 것이 아니라 이 성구로서는 "나를 세상에서 구원해 내셨는데 과연 내게도 장자 재앙이 있었나? 파리 재앙이 있었나?" 모두 다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것은 범실론 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이 섬기던 신들은 전부 유력하게 섬기던 신들에게 재앙을 내렸습니다.


[내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하나님께서 강제로 믿으라고 합니까? 믿을만한 그런 증거를 많이 보여주고 많이 믿을만한 자료를 줬는데 안 믿는 것을 하나님께서 책망을 하십니까? 그런 것 없이 당장 안 믿는다고 책망을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믿지 아니하므로 멸망을 시켰습니까? 안 믿는 그것을 큰 책망하시고 벌을 주신 것인데 믿지 않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믿을만한 그런 뒷받침도 해주지 아니하시고 안 믿는다고 했습니까?

뒷받침을 해준 것이 애굽에서 인도한 것이라 그기요 그런고로 우리를 하나님께서 참 뒷받침 될만한 증거가 될만한 그런 하나님의 섭리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했는데 그걸 저버리고 하기 때문에 우리가 현재로써 미래에 믿는 그 결과가 나오지를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사데교회가 왜 살았다는 이름만 있고 실상은 죽어있는 교회가 되었느냐 하면 들은 것, 받은 것 다 잊어버렸다 말이요.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련된 그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그것을 자꾸 추억하고 새김질해야 합니다. 그러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는 너를 애굽 종 되었던 데에서 인도해 낸 하나님이다." 그 말을 자꾸 거듭거듭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인도 받아 나올 때에 그때에 자기 내에 닥쳤던 그 어려움보다 더 얼마나 큰 어려움을 닥친 것을 주님으로 말미암아 다 해결 지운 것을 기억하고 그걸 기억하는 데에서 힘이 나오고  또 그걸 기억하는 데에서 믿을 마음이 나오고 또 미어지는 마음이 나오고 이렇지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과거는 그것이 뿌리와 같고 미래는 밭으로 돋아 오를 잎사귀와 같고 현재는 둥치 나무 가지 그와 같습니다.

둥치나무 잎사귀 그것이 다 윌 현실입니다. 거기서 새움이 터져 나오는 그것을...
뿌리가 실해야 둥치가 실하고 뿌리와 둥치가 실해야 그 다음에 새 움이 실하게 나오지  실하지 않으면 새움이 실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이 자기와 하나님과 과거의 그것을 찾아 가지고 "참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큰 일을 하셨다" 그것을 생각해야 감사가 나오고 눈물이 나오고 또 현재에 확실히 용기가 나오고 현실에 대해서 절대적인 소망이 굳게 나와지면 그 사람은 구원을 잘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로 청산하고 버리는 사람되면 안됩니다.

다윗이 가장 하나님 앞에 기쁨이 된 것은 자기의 죄를 모태에서 잉태되는 거기 까지 과거를 추억하고 이래가지고 과거로 인해서 자기가 언약한 자가 과거로 인해서 더 연약한 자로 알았고 과거로 인해서 자기는 더러운 자인 것을 알았고 과거로 인해서 얼마나 위험한자 이며 과거로 인해서 얼마나 망령된 자인 것을 알았고 또 과거로 인해서  얼마든지 자기에게는 유망한 승리인 것을 알았고 이래서 죄인인 것도 과거로 인하여 의인된 것도 과거로 인하여 희망 있는 것도 과거로 인하여 약한 것도 과거로 인하여 과거 그것이 현재에 와 가지고 거름같이 이용이 되어졌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과거를 참 명상하는 것이 좋아요 저도 경험으로 보면 제일 은혜가 깊이 들어갈 때가 어떤 때인고 하니? 하나님의 그 자존에서부터 생각할 때에 그때의 그 은혜가,... 그 사람을.... 자기의 옛날을, 자기의 어릴 때부터 거기서 "내가 이런 사람이 되었으면 어찌 됐겠나 저런 사람이 되었으면 어찌 됐겠나"

그러기에 모든 사람이 생각해 보면 거기 다 이리 망하고 저리 망하고 "어떻게 나에게 이렇게 인도를 베푸셨나?" 참 감사의 그 눈물 감사의 기쁨이 용솟음 안 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인도해 내시고]
우리를 인도해 내신 것이 큰 힘들어서 내신 것을 우리가 다 기억해야 합니다. 거짓말로 그래 만든 것이 아니고 인도해 내신 것을 몰랐었는데 그것을 깨닫고 기억하고 추억하고 알게되면 아는 것만큼 자기는 현재에 대해서 조심할 것이 생겨지고 과거를 아는 것만큼 현재에 대해서 조심할 것이 생겨지고 현재에 겸손한 사람이 되어지고 주님께 부르짖는 사람이 되어지고 지금까지는 내가 잡고 날뛰다가 실수했다 말이요 그러나 과거를 아는 것만큼 주님에 맡기는 사람이 되어집니다.

과거를 아는 데에서 자기의 부족을 알게 되고 자기의 더러운 것을 알게 되고 주님에게 바라봄이 더 의지하게 되고 주님에게 맡김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를 때에 한말로 말하면 자기는 부인되고 자꾸 주님은 자기에게 확고해 진다 말이요.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안 믿는 사람을 멸하셨는데 왜 안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과거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안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네들이 과거에 그것을 경험하고 체험한 일이지마는 "과거는 그랬지마는 앞으로 어찌 될지 알겠나?" 그것이 무슨 죄입니까? 그것은 시험죄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거를 자기가 안 믿을 때에 "과거에 위험한 일도 많았다" 그래서 오늘까지 구원해서 이리 저리해 가지고 주님이 나를 구원한, 세상에서 나온 이 과거를 우리가 추억하고 회고하면서 현재를 믿음으로 나갈 수 있는 거기서 우리가 됩니다. 믿음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을  과거에서 얻어야 된다 말입니다."내가 과거에 어떤 자인데, 만일 하나님이 안 계셨으면 어찌되었을까?" 뭐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고 주님 앞에 머리 숙일 것뿐이고 아무 것도 나타낼 수 없는 존재인데

[6: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 한다는 것은? 자기 할 일 아닌 일을 한다 그것이요. 자기 처소는 자기가 대우받지 아니해야 할 것을 대우받는 것이 자기 처소를 떠난 것입니다. 자기 지위가 있고 자기가 살 곳이 있습니다. 처소는 하나에 대우라고 볼 수 있고 지위는 하나 사명이라, 책임이라 일거리를 맡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큰 날의 심판까지는 언제입니까? 예수님 재림까지입니다. 그때까지 사명이라,
책임이라. 일거리를 맡은 것이고

[다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흑암에 가두셨다는 말은?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두운 것은 무엇이고 빛은 무엇입니까? 어두운 것은 삐뚤어진 것. 빛은 옳은 것. 그러기에  빛을 보지 못하니까 얼마나 저주요 영원히 옳은 것은 하나도 보지 못한다. 옳은 것을 만나 보지를 못해요. 옳은 것을 영원히 만나 보지 못하게 한다 그것이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범하는 고범죄를 안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알고는 이것이 죄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는 것은 이건 짐승 같이 미련하다 그기요 고범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결밖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흑암은? 다시는 하나님의 빛이 하나도 없는 곳. 하나님의 은택이 하나도 없는 곳. 하나님의 권세가 하나도 없는 곳.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들과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같은 모양으로 무엇을 말합니까?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하는 이것이 가만히 들어앉아 색욕거리 삼는 그것입니다. 왜 천사가 자기 지위 지키지 아니하고 그 처소를 떠나게 되었느냐 하면 저의 행복은 하나님에게 있는데 근본인 하나님은 내놓고 하나님으로 다 되어 있는 그것만 크게 여겼지 그 원인을 크게 여기지 안 했다 말이요. 그러니까 알맹이를 보지 안하고 껍데기 본 것이라 이러니 천사가 자기 지위를 안 지키고 하나님과 같은 그런 지위를 가질려고 한 그것이 천사가 자기 지위 버리고 자기 처소 떠난 것인데 하나님 대우 받을려고 하고 자기가 하나님 될라 하고 하는 것이 떠난 것인데 그것이 뭐이냐? 알맹이를 알았소 몰랐소? 몰랐습니다. 그것이 껍데기라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지금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에 번쩍거리는 그런 것을 원하는 것처럼 그도, 천사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영광스로운 그것만 봤지, 그 원인인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말이요. 외모를 중하게 여기는 것. 색욕거리 삼는 것. 또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한 것. 다 한 종류입니다. 껍데기를 귀하게 보고서 알맹이를 빼놓다가 절단 났다 그기요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으므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여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하는 다른 색이 무엇이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광채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 그것이 성도의 색인데 이제 하나님이 주시는 그것이 참 영광이요 빛이요 아름다운 미도  되고 색깔도 되고, 다 그것인데 다른 색은 무엇인가 하면 이 마귀란 놈이 내어놓은 그것이 다른 색이라 색깔이라 하는 것은? 광채라는 말이요 그러니까 이것은 껍데기 얼룽 둘룽한 그 색깔이 세상적으로 볼 때에 아름답고, 흑 한 것, 껍데기 그것에.... 원인인 하나님 이분의 영광을 따르고 이분의 광채를 따르고 이분의 아름다움을 따를 것인데 하나님과 이 진리, 이 영광, 이 참 빛 그것은 따르지 아니하고 이분을 버리고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껍데기 그것만 본다 밀이요.

말하자면 풀의 꽃 같고, 꽃은 영광 같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는데 영감과 진리는 떠나고 모든 육체, 풀과 꽃과 같은 것 그것만 보고 가는 거기 다른 색을 따라가는 것이라 예수 믿는 사람이 따를 색깔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색깔 하나님의 영광 그걸 따라가야 되는데 다른 색은 성도의 광채가 아니고 다른 색은 성도의 영광이 아니고 다른 색은 자랑거리가 아니고 다른 색은 미가 아니고 성도의 미는 누구의 미입니까? 하나님의 미, 진리의 미, 이것이 성도의 미(美)인데 이 성도의 미는 취하지 아니하고 엉뚱한 타락한 천사로 말미암은 그걸 보고 따라간다 말이요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으므로 거울이 되었느리라]
그럼 우리에게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망한다는 것이요. 거울을 주었다 그 말은? 그와 같이 하면 너희도 망한다 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울을 보면 자기의 용모가 나오지 않해요! 그러니까 거울과 자기 얼굴과 꼭 같습니다. 그들이 멸망할 것이면 너도 멸망한다 그 말이요 그들의 멸망을 우리도 그와 같이 하면 멸망 받을 것이고 이러니까 그들을 보면 우리가 알 수가 있다  그들과 같이 된다 말입니다.
자기 용모나 거울 용모나 꼭 같지 않습니까? 그때 그것에 대한 그것이나 내가 꼭 같이 될 것이라 그 말이요. 영광 될 것, 망할 것. 우리가 듣고 목상하고 또 사람이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7: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같은 모양이란 어떤 모양을 말합니까?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색욕거리로, 하는 말입니다.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다른 색은 또 무엇입니까? 색욕거리라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다른 색이란? 바른 색이 아니란 말입니다.

[바른 색을 뿌리치고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다른 색을 또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 축복 그것을 빛으로 알고, 영광으로 알고, 가치로 아는 것으로 사는데 그것이 아닌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그것을 가치로 삼아 나가니까 그것이 다른 색이라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기독자들의 광채, 기독자들의 가치 이것이 있는데 기독자들의 가치는, 그 빛깔은? 그것은 하나님으로 가치로 한 것이요, 또 진리로 가치로 삼는 것이요. 주님의 형상으로 가치로 삼는 것이고 진리의 행위로 가치로 삼는 것인데 이런데 교회가 꼭 가치관이나 대우나 그것이 세상과 꼭 같은 가치관, 권위관, 그런 것 이 다른 색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 속해서 세상을 떠날 때에 가져가지 못할 것 내버리면 그것으로 끝나버리고 마는 땅에 속한 것 런 것을 보물로 삼고, 일로 삼고, 바탕으로 삼고 그런 것이 다 다른 색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서 아주 이렇게 지식하기 쉽습니다. 다른 색을 따라가는 소돔과 고모라성은 간음을 하였습니다. 간음이 어떻게 다른 색이 되겠습니까? 이 색깔이라는 것은 아주 미를 말합니다. 아주 간음한 것. 남자의 미나 용모의 미나 젊음의 미나 그런 것이 기독교의 미가 되겠습니까? 하늘나라의 미가 되겠습니까?
그리 안 됩니다. 그런데 하늘나라 미를 이렇게 미로 삼지 안 하면 그 모든 것 중에 이 간음이라는 것도 하나 거기 포함 되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가치관을 성경의 가치관과 세상 가치관과 다르고, 성경의 존귀관과 세상 존귀관이 다르고 성경의 행복이라는 행복관과 세상 행복관이 다릅니다.

아주 다른 요것을 우리가 똑똑히 기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이것은 참 하나님처럼 온전하고 거룩하고 깨끗하고 하늘나라에 속한 그 모든 그것을 건설하는 사람들이 이 교회들이 색욕꺼리 삼는다. 색욕거리 삼는다 그 말은? 다른 말로 성경에 말하는 것이 있습니까? 외모를 중하게 여긴다. 사람들이 외모를 취급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죄로 정하였습니다. 이것도 아주 어려운 말입니다. 교역자들이 전부 다른 색깔 따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광채,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가치 하나님의 이것으로서 삼지 않고 성경이 외모라고 하는, 없어질 것, 그런 번쩍거리는 것, 그렇게 광채 나는 것, 그렇게 모두 다 행복이라는 것, 그것을 다 위주로 해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옛적부터 그것을 근본으로 삼아 가지고 그렇게 살 자들은 따로 있었는데

[가만히 들어온 자들이 옛적부터]
예정부터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인데 가만히 들어온 그 자를 보고서 그 자를 따라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것이 다른 색을 따라간다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선택하는 것이 모자라는 자들이 다른 색이라 하는 것이 저거 미혹 받아 가지고 성도들이 지금 다른 색을 따라간다.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세상보고 살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으므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이래가지고 이 앞에도 다 그러하고 전부 다 그렇지만은 소돔 고모라성이 그렇게 외모를 따라가다가 기독자의 본색이 아닌 멸망할 자들에 본색인 그런 색깔로 가지고서 따라가다가 유황불 구덩이에 멸망 받은 그것이 우리의 거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거울을 안보면 모르지마는 거울을 보므로 자기를 아는 것처럼 거울을 보므로 자기와 꼭 같은 것이 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이 어떻게 당한 것과 같은 그들이 축복 받은 것이 내게도 있으면 나도 축복 받고 저주받은 것이 내게도 있으면 나도 저주받고 그들과 나와 꼭 같은 것이니까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 하나님이 처리하는 그들과 같이 되어지기 때문에 그와 같이 나는 되어지기 때문에 그들의 봐서 멸망할 그런 행위가 나도 있으면 멸망 받고 그들이 칭찬 받은 행위가 내게도 있으면 나도 칭찬 받고 그들과 나와 같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서 거울이 되었느니라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이와 같이]
그러한데 하는 말은? 벌서 사람이 두 가지 종자가 있어 가지고 세상 지위 가진 사람이 있고 하늘나라 지위 가진 사람이 있고 택한자가 있고 불택자가 있고 이런데 이 불택자들이 택한자 중에 들어와 가지고 택한자들을 미혹시키기 위해서 이와 같이 들어온 자들인데 그는 남의 생활이요 딴 생활이요 그 사람들이 가치 있게 여기는 그것은 딴 세계의 가치요 영원무궁의 가치는 아니라 말이요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꿈꾸는 사람들 이거는 불택자입니까? 꿈꾼다는 것은 지금 죽은 자와 꼭 같이 하고 있기는 있지마는 속에 생명이 있으니까 그거는 일어나면 된다 이겁니다. 꿈꾸는 자들이란 말은? 택한 자를 말합니다.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러니까 꿈꾸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꿈꾸는 사람들이 무엇보고 산다 말이요?
시체 죽은 송장 말이요.

[꿈꾸는 사람들도]
꿈꾸는 사람들도 하는 것은 사람들이 생명 없이 송장이 썩어져가고 있는 이 잠자는 자들도 그와 같이, 지금 아무 기능 작용 없이 잠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지금 죽은 자들 같이 하고 있다 그 말이요.

[꿈꾸는 자들도]
그 미혹을 받아 가지고 불택자의 미혹을 받아 가지고 불택자와 같이 살고 있는 자들도 하는 그 말입니다.

[꿈꾸는 자들도]
불택자의 미혹을 받아 가지고 택자가 불택자와 같이 중생 되지 안하고 멸망으로 가는 자들을 이 사람들에게 미혹 받아 가지고 중생된 자가 중생 되지 안한 불택자가 지금 멸망 받으러 멸망으로 자꾸 걸어가고 있는 그들과 같이 그 말입니다.

[육체를 더럽히며]
자기에게는 영이 제일 귀하고 이제는 하나님 외에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귀하신데 하나님 다음에는 자기 영이 제일 귀하고 그 다음에는 무엇인줄 압니까? 육입니다. 육은 심신을 말합니다. 몸과 마음을 말합니다.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제일 귀한 것이 영이고 그 다음에 육체가 귀한 것인데

[육체를 더럽히며]
육체를 무엇을 가지고 더럽힙니까? 다른 색깔 그놈을 가지고 육체를 더럽힙니다. 또 다른 색에 욕심이 나가지고 육체를 더럽힙니다. 그 색에 욕심을 내가지고 그 색깔을 취할려고 그 색깔에 부요하게 만들라고 애를 써니까 그 육체는 더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육체가 깨끗해지는 것은 어떻게 하면 됩니까? 영감화 되면 진리화 되면 깨끗해지는 것인데 다른 색을 따라가니까 영감의 반대요 진리의 반대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육체를 더럽히지요

[육체를 더럽힌다]
그럼 영감화 안된고 진리화 안되고 자연히 이 세상위주로 세상본위로 이래 살아 갈려고 하니까 진리와 영감에는 반대될 수밖에 없습니다.

[보물 있는 곳에는 내 마음도 있다]
그 사람 소망하는 것이 소원하는 것이 땅에 있으면 뭐 화(化) 됩니까? 땅화 됩니다.
세상화 된다 말입니다. 그 사람이 하늘에 소망, 하나님만 소망하고, 소욕 하고 있으면 그 사람의 마음이 무엇과 같이 됩니까? 하나님과 같이 되어지지요 영감과 진리와 같이 되어지지요 그러기 때문에

[보물 있는 곳에는 너 마음이 있다]
제일 좋게 평가하고 소원하는 거기는 제 마음도 다 있기 때문에 그거와 같이 되어진다 말입니다.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러니까 꿈꾸는 이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아니고 깨어날 수 있는 사람들인데
지금 죽은 자 같이 자고 있으니 꿈꾸는 자들이라 말입니다.

[꿈꾸는 이 사람들도]
이 사람들도 하니까 이 사람 아닌 자도 있소. 없소? 이 사람 아닌 자들도 있습니다. 이 사람 아닌 자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가만히 들어 온 자들입니다. 불택자들이요. 그런데 이 사람들도 그 사람들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그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을 향해서 자기 육체를 팔아 가지고 그걸 삽니다.
자기의 육체를 팔아 가지고 그걸 사는데 우리는 그것 팔아 가지고 그걸 삽니다.
자기의 육체를 예수님 구속으로 주신 것은? 하나님처럼 온전하고 거룩하고 깨끗한 것인데  이것이 세상 것 얻기 위해서 팔아 가지고서 다른 색깔만 주어 모으고
자기 육체는 더럽혔다. 그러니까

[꿈꾸는 자들은]
온 천하 것이라도 자기의 심신이 더 귀합니다. 심신이 귀한 것은? 심신 그것이 다 그게 있습니다. 또 심신 속에는 하나님과 진리로 가득 채우고 하는 그러기에 이것이 우리 목적인데 그것 안하고 다른 색을 따라가니까 자기를 더럽혀졌다는 것이요 더럽힌다 그기요 그러기에 교역자들도 보면 다른 색을 따라가는 사람 있습니다. 또 이 세상색 그 욕심으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욕심을 가지고 다른 색을 좋아해서 그 색깔에 욕심을 내고 그 색깔을 얻기 위해서 하는 사람은
자기의 심신은 더럽혀진다 심신이 더럽혀진다 말은? 어찌 더럽혀지는냐? 진리와 멀어진 것이 더럽혀지는 것이요. 영감과 멀어진 것이 더럽혀지는 것이요.
심신이 깨끗해지는 것은 어떻게 하면?
진리와 가까워지고 영감과 가까워지는 것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귄위를 업신 여기며]
이 권위는 어떻습니까? 다른 색의 귄위입니까? 본색의 권위입니까? 본색의 권위입니다. 그럼 우리의 권위는 무엇입니까? 진리와 영감의 귄위입니다. 우리의 귄위는 사람의 권위요, 진실의 권위요, 의의 권위입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권위는 따로 있습니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설교를 들어보면 목적도 여기 두었다가 저기 두었다가 크게 말하면 하나님에게 목적을 두는 것과 인간에게 목적을 두는 것 그럼 쪽 발로 걸어가라 하는 그걸 말씀했는데 둘로만 구별하면 될터인데 둘로만 구별하지 않고 그 다음에 셋 넷이 나와 가지고 혼합해서 사람들이 절단 나버리고 맙니다. 목적이 하나님이냐, 사람이냐? 천국이냐, 세상이냐?
어떻게 구별하면......

[권위를 업신 여기고]
우리 목회자들 중에서 자꾸 유니온 신학교가 권위가 둘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본 귄위요, 하나는 가짜 권위입니다. 가짜 권위를 귀중히 여기고 본 권위를 업신여기다가 타락해 가지고 거기서 나온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옳은 본색을 찾고, 옳은 권위를 찾고, 옳은 소망을 찾고, 옳은 것을 찾자, 이래가지고 나왔는데 또 나오다 보니까 잡탱이들이 와 가지고서 물이 든다 그기요.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주는 것이 썩었다 그 말이요 그 만침 속화 되버리요

세상 권위가 있으면 그 권위를 의지하는 것만큼 실권을 업신여긴다 말입니다.
이 권위 가지고 억만분의 일이라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학자들이 다 말 잘하고 하는 것이 세상 권위가지고 하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세상 권위가 있으면 어깨가 쭉 펴이고 그 권위를 의지하는 것만큼 이 실권을 자기가 업신여기게 된다 말입니다. 그 권위를 가지고 있으면 실권에 대해서는 자기가 무시하고 자기의 그 권위가지고서 다소라도 보충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 권위가지고 이 실권의 억만분의 일이라도 소용될 수 있습니까?

[고린도전서]에는 모든 지식은 다 없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학자가 되었지마는 그것이 들어서 말 잘하고 그러니까 그 속에 권위가 없다 말이요

[권위를 업신여긴다]
다른 색깔의 권위를 말하요 다른 색깔의 권위를 위하면 본 권위는 없앤다 말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권위, 진리의 권위 진리의 권위는? 우주를 창조한 권위요 재창조할 수 있는 권위입니다. 영감은 무엇인고 하니 이제 우주를 진리에게 창조하라고 호령 칠 수 있는 그 권위가 영감의 권위입니다 그럼 영감은 어디서 나왔나? 하나님에게서 나왔다 말입니다.  이러니까 이 권위가 참 권위인데,  

[이 사람들도 육체를 더럽히며]
그럼 육체를 더럽힌다는 것이 정상이란 말입니까?  비정상이란 말입니까?

[권위를 업신여긴다]
이 권위는 무슨 권위이지요? 하나님의 권위, 진리의 권위, 영감의 권위, 그러니까 전부 하나님에게 속한 의에 속한 권위 이러기에 이 권위로만 가지고 일 할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이 권위를 가지고 일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권위를 업신여기며] 이것도 명상을 해야 합니다.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힌다. '그와 같이'라는 말은 그 위 이단자들을 말했지요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이 권위는 무슨 권위지요? 영감과 진리의 권위지요.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는도다]
그러면 이 영광도 하나님의 영광인데 하나님의 영광을 그것을 자기가 자기로 통한 영광이 아니라도 하나님의 영광이면 그런 영광을 아주 대립적으로 그렇게 하기 쉽습니다. '사람이 의를 행할 때에 자기가 주(主)를 보면서 의를 행했습니다 행했으면 자기 의를 행한 것은 좋지마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가 행한 그런 의를 행할 때에 자기 마음에 기쁘지 아니하고 세상 사람이 자기 부자 되는 것은 좋지만 다른 사람이 자기와 부자 되니까 말로는 좋아도 속으로는 께끄름하여 좋지 않은 것 모양으로, 그런 것처럼 그 의를 행할 때에 자기는 귀중히 여기지만은 다른 사람이 행한 의는 좀 마음에 기뻐하지 안 한다면 그 사람은 그 때에 시험든 사람입니까?  딴 사람 됐습니까?

그 사람을 가리켜서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친다 그렇게 말합니다. 이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러기에 선은 하나요. 의는 하나요. 옳은 것은 하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 다 주님의 것이요 그러기에 어떤 성도가 의를 행한 그것은 바로 주님의 것이요 또 누구 것입니까? 또 그의 것이요 또 의를 행한 그 사람의 것 또 우리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 위에 하나 틀리니 쭉 밑에 다 틀려 갑니다.

이 이단자를 나타내는 건데 이 모든 것이 왜 틀려나갑니까? 제일 원인이 뭐지요? 다른 색 따라가는 것 그 결과요 왜 다른 색 따라갑니까? 가만히 들어왔기 때문에 그렇다 가만히 들어왔기 때문에 가만히 들어온 것이 뭐하는 사람이지요? 그 선택받지 않은 사람, 중생 되지 않은 사람, 그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고 들어온 사람이 가만히 들어온 사람이데 그러면 전부 거듭난 행위를 하지 안한 사람은 가만히 들어온 사람인데 가만히 들어온 사람에게 미혹을 받아 가지고서 근본적으로 약속도 구원도 얻은 사람이 그렇게 그 없는 사람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미혹 받은 사람이라

[권위를 업신여긴다]
이 권위는 무슨 권위라 했습니까? 누구 권위? 하나님의 권위, 진리 권위인데 이것이 막바로 성도의 권위지요 이 권위를 업신여긴다는 것, 가서 명상해서 내가 그러면 이렇게 언제 업신여겼느냐? 그냥 "권위를 내가 업신여겼습니다."하는 그런 기도는 하나님이 안 듣습니다."나는 죄인입니다."하는 그런 기도 하나님이 듣지 안 해요. "너희들의 그래 부르짖는데 귀가 아프다" 고 했어 "나는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이랬습니다"구체적으로 이렇게 할 때에 영감이 와서 위로해 주시고 또 사해 주시고 자기에게 새로운 힘이 나옵니다.

[영광을 훼방하는도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말로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느니라]
이 모세의 시체를 가지고서 시비한다. 그럼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니까 모세의 시체를 참 마귀는 제것이라고 제게 속한 것이라고 말하고 또 천사장 미가엘은 하나님에게 속했다고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시비할 때에 미가엘이 '네가 하나님에게 속해서 하나님의 사람인데 네가 거기에서 그렇게 하느냐' 이래 좀 진노해서 무슨 악으로 대항하기를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다] 그 말은? 그냥 "하나님께서 틀렸고 모세의 시체는 하늘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하늘나라로 인해서 하나님의 것 되는 것이 옳은 일인데 네가 그렇게 하는 것 잘못 됐다" 그렇게 각박하게 하지를 안하고 아주 유유하게 해서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를 그 심령을 영과 함께 영혼을 영과 혼 함께 하늘나라로 가고 그 몸은 땅에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 재림 때에 부활하는데 그 때까지 사람들의 시체를 이는 마귀가 제것이라고 또 미가엘은 하나님의 사자인데 하나님에게 속한 것으로 이렇게 시비를 했습니다.
그러면 모세는 하나님의 종으로 그렇게 충성하고 이랬는데 왜 그렇게 시비를 와 시비했겠습니까? 시비할 만한 무슨 조건이 있습니까? 모세가 가나안 들어가지 못한 것은? 그가 므리바에서 반석을 칠 때에 "그 일이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지 안 했다 그래서 네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렇게 말씀을 했고 또 돌비에 깨트릴 때에 거기에 대해서 말썽이 없기는 없지마는서도 돌비 깬 그것을 나중에 가서 하나님께서 기록해 주실 때에 암만 해 주고 싶지마는 그것이 비뚤어진 것이 되기 때문에 못한다 이기요 공평되게 하지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하실 수 있는 그런 조건이 있어야 축복을 해 주시지 저주할 수 있는 그런 조건이 있으면 안 된다 말입니다. 안되니까 그 저주 받을라는 그런 조건은 얼른 또 예수님의 피에 고하면 된다 말입니다. 고하기 전에는 안돼요

밤낮 참소자, 송사자 자꾸 이렇게 한다 그 말이요 "저렇습니다 저렇습니다" "욥도 자꾸 부자를 시켜주고 모든 것이 형통해지니 그래 하나님 섬겼지 조그매만 어려움이 오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밤낮 참소합니다

그러기에 모세의 시체를 가지고서 미가엘과 또 마귀가 이렇게 시비해서 밀고 당기고 "내 것이다. 아니라 내 것이다" 하는 이것을 봐서 오늘 우리 생활에 "이것은 봐라 이것은 내 것 아니냐, 이건 하나님 것 아니냐?"  이렇게 아주 하나님 다음으로 지혜 있는 자가 우리 하는 일을 보고서 지금 고소를 할라고 기다리고 있다 그기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만 해 주시면 문제는 없는데 그 축복해 주시는 데에는 조건이 밑에 있으니까 선포해 놓은 그 법규에 맞아야 되지 그 법규를 어겨서는 당신이 해 줄래야 해 줄 수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해 주면 마귀가 뭐라 하겠습니까?  "이는 왜 잘못 되도 해 줍니까? 나도 그러면 잘못된 거 용서해 줘야 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꼼짝못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잘못한 것을 예수님의 대속의 피공로에 제가 고해 사함을 받았으면 "이 사람은 지금 이렇게 잘못 됐는데 어떻게 해줍니까?"

"그 잘못이 뭐 있느냐?"  "이런 것 잘못 있지 않습니까?" "잘못 있는 데에는 한 번 형벌 받으면 되지 두 번 받아? 잘못을 형벌 받았는데 또 정죄 받는다 말인가?"  "누가 형벌 받았습니까?" "독생자가 형벌 받았다." 이러니 고한 죄는 사함 받는다 말은? 마귀가 거머쥐고 시비를 못한다 그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송사자가 있는데 하나님을 지공과 지성의 법이 없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그런 하나님으로 생각지 말고 법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법을 어겨서 우리에게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기도도 합법적으로 기도를 해야 하나님이 들어줄 수가 있고 우리가 행동 법적으로 해야 하나님이 씩씩하게 할 수가 있지마는 그 법을 어겨 놓으면은 이것을 하나님도 못 합니다. 이 송사자가 있어서 모세 같은 사람이야 뭐 잘못한 거 있습니까? 없는데 약간의 그런 일 한 것 그거 있었는데 마귀가 "이거는 이 모세의 시체는 우리 것입니다." 자기 것이라고 자기가 가져 갈라고 애를 쓰고 천사는 "이것은 하나님의 것이라" 고 우리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가 갈라하고 이렇게 시비를 합니다. 시비하는 이것 기억하고 그럴 때에 미가엘은 정죄 하는 일 하지 아니했고 그저 거기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그러면 그저 심판적인 말은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라 이래서 네 한 것이 틀렸다고 하나님이 판단해 주시기를 원한다"그렇게 했지 자기가 정죄 하는 그런 것을 하지 안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항상 그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주여 나는 자긍 하는 말 하지 않게 해 주옵소서. 하는 기도해야 되겠고 자긍은 뭐이 자긍인고 하니? 제 자랑하는 것이 자긍입니다. 하나님 자랑하는 것은? 그거는 증거고 자기 자랑하는 그것은 자긍인데 다 거짓입니다. 자긍하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또 다른 사람을 심판하고 정죄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해 달라고 우리가 기도해야 됩니다.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이거 틀렸다 이래만 할 일이지 그 이상의 것은 죄니까 "이제 죄의 어떤 감을 받는다" 그렇게 못합니다. 자기가 책임 맡은 수하에 있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말할 수 있지요.

[원하노라 하였거늘]
이렇게 의례히 말할 수 있는 그것도 미가엘이 단정지워 심판적으로 말하지 안 했는데

[이 사람들은] 이 사람들은 무슨 사람들입니까? 이 사람들은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자기 지위를 떠난 사람들 자기 처소를 떠난 사람들 다른 색보고 따라가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도다] 훼방이라는 말은 빗고 깍는다 말입니다. 깍는다 말인데 확실히 이렇게 잘못된 것을 확실히 알아도 그 정죄는 하지를 안하고 "하나님께서 너 잘못됐다고 하는 것을 지적해 주기를 바란다 잘못된 것을 지적하기를 바란다" 고서 이렇게 하나님의 판단을 기다리고 했지 제가 그 사람에게 대해서 정죄하거나 심판해서 판단하거나 저주하거나 그런 일을 하지 안 했습니다.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은 무엇이 듣지 알지 못하는 것을 회방하는 도다]
알지 도 못하고 훼방하는 것 훼방이라 말은 무슨 말이지요? 훼방이라 말은 빗고 깍는다 그 말입니다. 훼방이라 말은 점점 사람을 헐고 뜯는다 말이요.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 도다] 다른 사람이 한 것은 무조건 훼방하고 저 하는 것은 전부 무조건 잘했다고서 칭찬하고 다른 사람은 무조건 틀렸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한 것은 무조건 잘됐다고 하는 것은 무슨 죄지요? 알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 하는 것은 무조건 틀리기를 원하고 원하는 중심을 가지고 있고 또 그거 틀렸다고 주장하고 자기 주장이 옳다고 주장하는 그것이 인간에게 무슨 죄입니까? 원죄 그것이 원죄성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미가엘 천사에게 배운다고 하면은 잘못한 것을 똑똑히 아는 것. 잘못을 똑똑히 아는 것도 "하나님께서 그거 잘못됐다 그래 꾸중하시기를 원한다" 는 거기에서 말한 것은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이니까 아니라 하는 그 말이 되겠습니다. 거기에서 더 지나가서 그만 "너 이렇고 하니까 너는 어떤 정죄를 받는다 너는 저주받는다 너는 하나님 앞에 큰 저주와 진노 받을 거리가 됐다" 이렇게 우리가 말하는 일은 혹 있습니다.

말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서 하는 그런 말 있지마는 중심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잘못됐다 할지라도 잘못됐으면 잘못된 것을 저가 잘못됐다고 이리 말하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잘못된 것을 잘못된 줄 알게 해달라고 하는 그것만해야지 저거 잘못됐으니까 어떻게 심판할라 하는 그런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별로 입을 열어서는 안됩니다.

또[저희는 이성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 같다. 짐승에도 이성이라는 그것이 저급이라 그렇지 있어요. 저급인 이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성경에는 없다 했나? 성경에는 없다고 한 것은 이성은 뭘 가르쳤나? 이성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 피조물을 아는 그 수준 높은 데에 "옳다 그르다" 하는 걸 판단하는 것을 가리켜서 이치를 따지는 이치의 성품이라 해서 이성이라 했지만은 짐승은 하나님을 따지고 자기가 뭘 가지고 자기 아닌 그 무엇을 비판해 가지고 이렇게 하는 것보다도 그저 자기중심의 자기중심 자기위주로만 하는 그것 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켜서 이성이 없는 본능적이라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본능이라는 것은 자기에게 속한 것이요. 이성은 자기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인간 이성은 하나님을 위주로 중심 해 가지고서 따지는 그것이 이성이라 말이요 짐승은 그것이 없어 그럼 지금 불신자들에게 이성이 있소 없소? 없습니다. 이성이 없습니다. 그것은 이성이 아니라 그것은 뭐 입니까? 본능입니다. 자기중심 자기 위주로 하기 때문에 그 본능이라 말이요.

그러기에 칼빈도 이성은 고급으로 이렇게 인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갈빈이 영에 대해서 말하기를 영은 이성적 존재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성적 존재라? 이성적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것이 그것이 영이라 그러면 영에는 이성이 있다. 그렇게 영이 이성이라 말은 안하고 이성적 존재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성 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그러면 본능은 무엇인가? 자기를 근본으로 삼아 가지고 하는 것이 본능인데 본능으로 아는 것은 인간들로 아는 것입니다. 본능으로 아는 것은 인간으로 말미암아 알아지는 것이 그것이 다 본능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이 진리와 영감은 인간으로 말미암아 아는 것입니까? 하나님으로 인해서 아는 것입니까? 하나님으로 인해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성 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본능으로 산다는 말은? 자기가 목마르니까 물 마시고 싶다 추우니까 따뜻한데 가고 싶고 또 더우니까 또 서늘한데 가고 싶고 하는 그거 자기 자체를 위주로 해 가지고서 움직이는 것이 그것이 본능입니다. 그러기에 어린 아이들이 날 때부터 뭘 입에다 되면 줄줄줄 빱니다. 빠는 그기 뭐이요? 그기 이성입니까? 본능입니까? 그기 본능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우리가 이성적으로 사느냐 본능적으로 사느냐? 본능이라는 그것을 죄의 이름으로 말하면 본능이 무슨 죄입니까? 원죄입니다.

본능적인 원죄. 그래 우리는 현실에 살아 나갈 때에 그라면 본능으로 사느냐? 이성으로 사느냐? 이성으로 사는 것은 자기 중심이 아니고 전 인류를 중심 해 가지고서 이렇게 사는 그것이 이성에 나아가는 것인데 거기에서 피조물이라는 한계 안에서만 살지 안하고 이 조물주에게  까지 이 범위를 널리 잡아 가지고서 이렇게 살아나가는 그런 중에 있는 것은 이성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이성 그것보다 좀 위에 있는 것은 뭐입니까? 이성보다 위에 있는 것은 뭐입니까? 이성보다 위에 있는 것은 양심인데 양심은 이성 위에 있습니다.

이성도 자기를 떠나서 그게 대한 사실에 대해서만 옳은 판단할라 하는 그것이 양심입니다. 양심은 자기 것이지마는 자기를 자기에게 붙들지 아니한 것이 양심입니다. 자기에게 사정 두지 않는 것이 양심입니다. 자기에게 붙들렸으면 그것은 양심이 못됩니다. 이성도 자기만이 생각하는 기 아니라 자기와 모든 자기 밖에 있는 만물과 같이 한꺼번에 이래 가지고서 거기에서 옳은 것을 찾아서 할라 하는 것이 이성이요.

본능이라 하는 것은 자기 밖에 무엇이든지 생각하지 안하고 저 추우니까 따뜻하게 해야 되겠고 더우니까 서늘하게 해야 되겠고 배고프니까 먹어야 되겠고 그라면 본능이 활동 범위가 넓습니까? 이성이 활동이 범위가 넓습니까? 이성이 활동 범위가 넓지요.
이성 활동 범위와 양심 활동 범위를 말하면 무엇이 넓습니까? 양심 활동 범위가 넓습니다.

그러면 양심 활동 그 범위보다 이제 진리 활동 범위는 어떻습니까? 더 넓습니다. 하나님과 존재 모두 다 들었습니다. 또 영감도 이 진리의 활동 범위보다 영감은 자존자에게부터 나왔기 때문에 그 범위가 더 넓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육체가 됐다 그랬는데 사람이 육체가 됐다 하는 그런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무슨 말인고 하니? 이성 없는 인간이 됐다. 육체가 됐다 그 말은? 이성 없는 인간이 됐다. 한 동물과 같이 돼 버렸다. 또 말하기를 그 사람은 이성은 있는 사람 이성적으로는 살지마는 양심 없는 사람이라 또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좀 경계가 됩니까?

이성으로만 살지, 그 사람에게는 이성뿐이지 양심 없는 사람이라 이성이라면 자기와 모든 존재가 이래 따져 가지고서 무슨 이해나 수지 계산이나 그런 걸 맞출 수 있는 그런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 그러니까 이성은 가졌지마는 양심은 없다 말이요 옳고 바른 것을 찾아 가질라니 양심은 없어 양심은 없는 사람이라.

또 양심은 그 사람이 양심대로 할라고 양심은 가진 사람이라 양심은 쓰기는 쓰는 사람인데 진리가 없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양심은 쓰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진리는 없다 그렇게 말할 수 있소? 양심을 쓰는데 어찌 진리가 없습니까? 네, 양심은 지식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양심은 그 사람이 쓰기는 쓰지만은 불교적인 양심이나 유교적인 양심이나 다른 이종교적인 양심 또 일반 그 사회적인 양심. 그런 것은 양심은 가졌지만은 진리는 없을 수 있습니다.

양심은 있어도 공산주의도 양심 있고 이 종교들도 양심 있고 도덕가들도 양심 있고 다 양심있지만은 그 진리는 거기에 없을 수 있다 그기요.

진리가 그 양심에 밑바탕이 되어 가지고 있을 때에는 그 양심을 가리켜서 무슨 양심이라 말합니까? 신앙양심이라, 착한 양심이라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진리는 있지만은 영감은 없다 그럴 수 있소? 그렇게 할 수 있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진리 영감은 나누어지지 안하지만은 사람이 제가 진리를 이용하니까 이용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 진리가 이용을 당합니까? 안 당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는 진리는 있지만은 영감은 없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영감은 있지만은 하나님은 안 계신다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또 저희는 이성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망하느니라]
그러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이 인간의 본능이 뭐지요? 원죄. 부패성 원죄그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중심이라 말이지요. 그 본능이 진리도 아니라 진리는 하늘에서 내려온 객관 율법 아닙니까? 객관 법칙도 없고 성신의 감화도 없고 찍해야 있다 해봤자 인간의 지식, 인간의 마음, 인간의 생각, 인간의 중심 그것으로 하기 때문에 본능으로 아는 것으로 그 사람은 망하고 만다. 아는 것으로 망하느니라.

우리는 이 생활할 때에 제일 먼저 우리가 취할 것은 뭐입니까? 입학생으로서 우리 생활에 제일 먼저 취급할 기 뭐이지요? 이성으로 해야 됩니다. 우리가 이성을 잃으면 안됩니다. "아 그 사람이 지금 이성을 잃고 있다."
사람에게 감정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제 어떤 시기에 가서는 이놈이 전신을 거머쥐고 움직입니다.

또 욕심 그놈이 들어서 그 사람을 마음대로 거머쥐고 움직입니다. 정욕도 육체의 정욕과 또 하나 정욕은 뭐이라고 했지요? 안목의 정욕. 안목의 정욕은 자기의 몸에서 나는 욕심이 있고 눈으로 보는 눈으로 들어오는 욕심 그걸 가리켜서 안목의 욕심인데 안목의 욕심도 있겠고 귀 정욕도 있습니다. 귀 정욕. 그래서 귀는 들어도 뭐라 했습니까? 차지 안 해, 귀는 암만 들어도 차지 않는다 말이요. 암만 그래 보와 끝이 없는 것인데 거기 가서 붙어 가지고 날 뛰면 속는다 말이요.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어. 이러니까 우리는 이성을 잃으면 안됩니다. 이성 잃으면 뭣 되지? 네. 본능 되니까 본능 되면 그 뭐입니까? 짐승 된다 말이요. 이러니까 자 따라합시다. 이성을 잃으면 이성을 잃으면 짐승 된다!

<이성을 잃으면 짐승된다>
이성을 잃으면 짐승된다 <이성을 잃으면 짐승된다> 그만 이성 잃으면 짐승입니다. 그것으로서 멸망한다 그 말이지요. 하나 했으면 그거 멸망이고 둘 멸망이고 그래 가지고 인간 제 신세를 제가 망치지 다른 사람이 망치는 사람 없습니다. 전부 제 신세를 제가 망쳐. 그러니까 망하는 길이니 우리는 본능으로 살아서 안됩니다. 그 본능도 좋은 것이지만은 이성의 지배를 받는 본능이라야 되고 이성도 좋은 것이지만은 하나님의 진리의 지배를 받는 그 양심이라야 되고 또 진리도 영감된 진리라야 되지 영감에 떨어진 진리는 안 된다 그기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짐승으로 돌아가면 안됩니다. 그 이성을 잃게 되는데 이성을 잃게되는 것은 이성을 잊어버리게 하는 것은 무엇이 이성을 잊어버리게 하지요? 본능, 본능 그것이 이성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 본능이 이성보다 강하면 이성이 쳐 박혀 버리니까 본능 이놈이 주장을 해요 본능 그것이 뭔데? 원죄인데 자기 중심 그것이 정욕 사욕 그것이 본능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본능에게 이성이 매몰되면 안됩니다.

[멸망하느니라]
위에 죽 내려온 사람이 지금 이런 사람입니다. 이걸 여러분들이 딱 그려 가지고서 짐에 가서 공부를 하면서 "아! 보자 옛적부터 멸망 받기로 그 기록되어 있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불택자다 그런데 거기에 아닌 이 사람들도 거기에 가담해 가지고 지금 그런 꼴하고 있구나" 그 사람 어찌 되느냐 쭉 내려오면 그 사람의 행위는 어떻다 하는 것이 여기 쭉 나와 기록했으니까 이것만 알아도 여러분들이 당회든지 노회든지 총회든지 제직회든지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 학생회라도 모여 가지고 떡 보면 이 유다서에 있는 이단을 가르치는 이 진리를 안경으로 딱 쓰고 보니까 그 사람에는 "아! 저 말은 뭐이다. 저 말은 뭐이다" 다 알 수가 있다 그 말이요.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그 다음에부터는 가인의 길은 행하였으며]
가인의 길을 행했다 그 가인은 자기 길을 걸어간 가인의 길을 대표적으로 한마디로 말하면 어떤 사람입니까? 그것이 본능적으로 믿은 사람이라 그 말이요. 본능적으로 믿는 사람 그러면 가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섬기지마는 서도 제 마음대로 섬겼습니다. 그 사람이 제 마음대로 섬겼는데 보니까 하나님 앞에 제사 지낼 때에 농사를 짓기 때문에 농사 농작물을 가지고 섬겼지요. 아벨은 목축을 하니까 짐승 잡아서 섬겼고 이러니까 다 자기 산업에서 산출된 것을 가지고서 하나님을 섬겼다 그렇게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가인은 농자 짓기 때문에 농작물로 섬겼고 아벨을 양치기 때문에 양 가지고 섬겼으니까 다 자기 기업을 가지고 섬겼으니까 같은 사람이 아니겠소? 아벨은 하나님이 그 선조 들에게 말한 양의 껍질을 잡아 가지고서 가죽옷을 입혀 주시면서 여인의 후손 뱀의 후손이 적이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짐승으로 여인의 후손으로 대속될 것을 말씀하신 그 계시의 지식을 받아 가지고 양을 잡아서 섬겼습니다. 계시의 지식을 받아 가지고. 그러나, 가인은 계시의 지식을 다 같이 받았는데 계시의 지식을 버리고 자기 농작물에 그만 농작물화 되어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다 말이요 환경에 피동 되어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고 아벨은 하나님에게 피동 되어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지를 안 했습니다. 그럼 우리가 이 가인에게서 하나님을 섬기되 자기의 그 환경에 피동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느냐? 환경에 피동 되지 안하고 하나님의 그 계시에 피동 되어서 하나님의 명령에 피동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느냐? 둘 중에 하나라 입니다.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을 행하였으며]
이것을 보면은 말이요. 여러분들이 가만히 지금 이래 공부해도 잘 모르지 만은 집에 가서 가만히 자꾸 읽어보면 그 사람이면 그 일하고, 그 사람이면 그 일하고, 그 사람이면 그 말하고, 그 사람이면 그 말하고 항상 그렇습니다. 이것 뭐 모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그렇게 계속해서 쭉 다해요. 그러니까 볼 줄 아는 사람은 어디 봐도 나타난다 그기요. 지금 우리가 자기가 무슨 공직을 이래 할 때에 공직생활을 하는데도 가인도 될 수 있고 아벨도 될 수 있습니다.

공직 생활에서 하나님에게 피동 되어서 공직 생활하는 사람 있고 공직에게 피동 되어서 그 신앙 생활하는 사람 있으니까 하나는 가인 되고 하나는 아벨 된다 하는 말입니다.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이 발람이 사람들을 보내 가지고 그렇게 할 때에 그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저희를 축복해 달라'고 그런 요청으로 청했는데 그것이 틀린 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발람이 벌써 그 일 나기 전에 벌써 알았습니다. 또 발락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찬성하지시 안 하시고, 그걸 멸하신다는 그것도 알았습니다. 알았는데 자기가 그 신앙양심으로 알았고 영감으로 알기는 알았지만은 눈에 보이는 돈과 권세 그것이 자기를 미혹시켜 그래 끌려서
이 발람이 그 때에 안 것은 이성으로 몰랐을지 몰라도 양심으로 알았습니다. 또 영감으로 의례히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아는 것이 말이요 옳다 그르다 아는 것이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 있겠고, 그거는 따라가야 됩니까 안 따라가야 됩니까? 그것은 본능적으로 아는 것은 안 따라가고 거부해야 됩니다. 저가 죽을 만큼 하고싶고 어떤 사람은 부화가 나 가지고 그만 뭐 내가 죽어도 한 번 해본다 이래도 그 본능으로 움직이는 것은 해서 안 된다 말이요. 본능보다 그 위에는 이성으로 아는 것이 있다 그 말이요. 본능대로 알면은 멸망 받고 이성대로 알면은 땅의 것을 위주로 하게 되고, 이성 위에 진리대로 하게 되면은 땅에서 지혜 있는 걸음을 걸을 수가 있고 진리대로 걸으면 그러나 완전 아닙니다. 또 영감으로 알게 할 때에 영감으로 아는 대로했으면 생명과 평강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일 알기 쉬운 것이 바로 알든지 삐뚤게 알았든지 제일 자기가 거기 대해서 판정되어서 알기 쉬운 것이 뭘로 아는 것이 제일 쉽습니까?  본능으로 아는 것이 제일 쉽소. 그놈은 원수라 말이요 본능으로 아는 그대로 주장하면 그 통에 사람이 다 망합니다. 망하는 것은 본능으로 아는 그놈 때문에 주장하기 때문에 망해. 그놈대로 하면 안 돼고 그보다 좀 신사적이요 좀 슬기롭게 아는 것은 뭘로 가지고 압니까? 이성비판. 자기에게 있는 이성비판 그것을 이치를 따져 가지고 이와 같이 하는데 그 이치를 따지되 그 이성이라 하는 것은 자기를 위주로 중심 해 가지고 이치를 따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또 좁습니다.

그러면 이성도 지식의 지배를 받지요. 그런데 그거보다 양심으로 아는 것은 좀 어렵습니다. 그것은 이성이 아는 것보다 더 탁월해서 훨씬 범위가 넓고 그러는데 아는데는 왜 양심으로 아는 것은 어렵습니까? 자기를 떠나야 되기 때문에 양심으로 알기 어려워, 자기를 떠나야 되기 때문에 자기에게 무슨 자기를 사정 두고, 자기 두고, 자기를 본위 두면, 양심이 아닙니다. 그거 무슨 마음입니까? 양심 아닌 마음이 본능적 사람 양심이 아닌 사람은 그것이 바로 원죄요 악심입니다. 악심은 자기 중심이고 양심은 판사가 모든 죄수를 갖다 놓고서 판단할 때에 하후 하박하면 그 옳은 판사가 아닙니다. 그러면 양심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그 세계 다 놔두고 하나님의 신적요소를 다 놔두고 인적요소만 있는 데에는 최고의 재판관이 양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양심으로 아는 것은 알기 어려운 것이 왜 알기 어려우냐 그것은 자기를 떠나야 되기 때문에. 자기를 떠나야 모든 것을 공평 되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떠나기가 쉽다. 때문에 양심이 다 못된다 그 말이요.

자기를 사정 두지 않고 자기나 다른 사람이나 상관없이 뭐 다 공평 되게 이라면 양심이 되겠는데 자기에게 사적(私的)을 둔다면 그 마음은 양심입니까? 뭐입니까? 악심입니다. 그래서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간다]
마음이 정결한 자는 하나님을 본다. 정결한 마음은 무슨 마음을 말하지요? 양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성을 잃으면 완전히 짐승노릇 합니다. 또 이성만 가지고 양심을 잊어버리면 그 사람은 사기꾼 되요. 사기 협작꾼 됩니다. 이제 이성에서 장성해서 양심으로 하면은 그러면 그 사람은 도덕가 됩니다.  신앙 양심은 하면은 그 사람은 성도가 됩니다. 영감으로 하면 그 사람이 의인이요 완전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가인의 길로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다 그러면 발람은 이 사람이 그리 가면 안 된다는 걸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무엇이 알았습니까? 이성이 알고 양심에는 아직까지 나가지 못했습니다. 와 못나갔습니까? 자기를 돌보지 안하고 자기를 부인치 못했기 때문에 양심의 것을 듣지를 못했습니다. 양심의 것을 듣는다고 해 가지고서 됩니까? 옳은 길 걸어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왜 양심보다 강한 자가 있기 때문에 안 된다 말이요 양심에서 인도함을 받고 영감의 인도함을 받아 가지는 것이 기름 준비하는 것입니다.

진리와 영감의 인도를 받으면 진리와 영감은 전지자요, 전능자요, 완전자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아무도 해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신앙 생활이 저 안에 지금 들어 있는데 껍데기만 가지고 지금 신앙 생활한다고 하니까 너무 감감하다는 말입니다. 믿는 사람은 영감으로 살아야 되는 건데 전부 본능으로 살아요. 본능으로 사는 사람은 일반인들이 볼 때에 "답답하다 꽉 막혀서, 그 사람은 참 상대 못하겠다" 하는 사람입니다.

그보다 좀 낫다고 해도 보니까 이성적인 사람이지 양심적인 사람이 아니라. 그 말은 무슨 말입니까? 이성적인 사람이고 양심적인 사람은 아니라 그 말은 무슨 말이지요? 자기를 초월 못했다 자기에게 사정 두는 것을 떠나지 못했다. 자기에게 사정 두고서 자기나 다른 사람이나 공평된 판사가 돼 가지고서 이걸 자타에 상관없이 판정하는 그것이 내게 속한 양심이지마는 그 양심이 바로 자기나 다른 사람이나 그것을 공평 되게 판단하는 것이 양심이요 인간끼리만 판단할 것이 아니라 인간 위에 창조주 조물주와 연결시켜 가지고서 바로 판단하는 것을 가리켜서 그 사람 마음을 뭐라고 말하지요? 신앙 양심이라.

신앙양심은? 진리지식에 따라서 피동 되는 판단을 가지는 사람을 가리켜서 신앙 양심의 사람이라. 불교 양심가가 있습니다. 또 살인 강도들에게 양심이 있습니까? 공산주의 양심가가 있습니다. 또 살인 강도들에게 양심이 있습니까? 살인 강도도 저희 법칙을 지키는 그것이 양심이라 말이요. 그러니까 이제 본능에서 이성으로 올라가 이성에서 양심으로 올라가 양심에서 진리로 올라가 진리에서 영감으로 나아가야 비로소 자유 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기를 내 말에 거하면 네가 참 내 제자가 되고] 하는 그것은 자체 변화를 말합니다. 그러고 나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아는 대로 실행하게 된다. 그 말입니다.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갔으며]
발람이 자기가 양심에까지 가지 안하고 이성으로 이성 비판에서 그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알았는데 그 이성 비판에서 자기가 양심 비판으로 나아갔으면 그 시험에 들지 안 했을 터인데 그만 이성 비판이 자기의 본능에게 져버렸습니다.

'오늘밤에 여기에서 그대로 머물러 봐라 하나님의 무슨 뜻을 생각해 보자' 하는 그것이 하나님께 대해서는 시험하는 죄가 된 것입니다. 시험하는 죄. 우리가 참 양심으로 아는 것은 더 세밀하게 좀 고급이지마는 이성 비판으로 아는 것은 뚜렷한 일입니다. 영감으로 아는 것이 양심으로 앎에 나갔으면 더 똑똑한 것이요. 양심으로 아는 것이 이성 비판이 알았으면 그거는 뚜렷한 것이요.

그런데 그것을 자기의 그 본능에게 그만 이성이 이겨야 할 터인데 이성이 본능에게 저 버리고 본능적인 사람이 돼 가지고 "하나님을 시험해서 보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나 보자" 하고서 그 하나님이 자기에게 대해서 '가라고 하지 않느냐.'하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그런 일을 발람이 했습니다. 그러니까 발람은 점점 아래로 타락하는 그런 길을 걸어 가지고 그 날 밤에 그 사람들을 자게 한 것이요 자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 물으니까 하나님께서 '가지 말아라.' 고 이렇게 말씀을 하실 때에 자기는 '가지 않겠다.' 고 그렇게 '나는 하나님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추호도 어기지 안하고 그렇게 한다.' 고 자기는 장담을 하고 그렇게 하기는 했지마는 발람이 자기 안에 있는 본능 그걸 원수인 줄 모르고 본능을 죽이지 못하고 그랬기 때문에 그 다음에 두 번째 왔을 때에는 또 그렇게 '오늘밤에 유숙하라.' 하는 그것을 할 때에는 처음에는 하나님을 시험했고 두 번째 그렇게 할 때에는 본능이 이성을 이겨 가지고 그래 한 것인데 발람은 거기에 두 번째 유숙해서 머물 때에 하나님께서 '가라 네가 가 가지고 하되 이리 이리 하고 이스라엘 저주는 하지 말아라 .'하면서 가라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것은 발람이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자기에게 복종을 시킨 것입니까? 그 둘 중에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을 자기에게 복종시켰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자기에게 복종을 시켰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가되 네가 이스라엘 저주하지는 말아라. 그렇게 그 발람에게 말을 해서 보낸 것은? 하나님이 발람을 구원 하실려고 그렇게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하나님 당신은 하시지마는서도 발람으로 말하면 그 때에 버림을 받은 것입니까? 네 버림을 받았습니다. 발람은 그 때에 버림을 받았고 또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자유성을 줬기 때문에 발람이 자유성을 가지고 있는 고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큰 손해 갈 것을 아시지마는 그것을 강조하지 아니하시고 그저 그렇게 말하고 보냈습니다.

그 때 그 발람이 가다가 그 나귀에게도 그렇게 징계를 받았고 그 권면을 받았고 또 제가 환상 가운데에서도 봤고 이랬는데 나중에 가 가지고 제사드릴 때에는 아주 강하게 굳세게 그렇게 해서 참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발락을 저주하고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그런 일을 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는 결론은 발람이 그 이스라엘에게 저 혼자 말로써 발락에게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을 수 있는 그런 하나의 복술을 줬습니다. 그래 가지고 이스라엘도 거기에 대한 상당한 그 해를 받았고 발람 자신도 또 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자유성이나 또 권위나 그런 것을 강제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발람이 그러면 그 때에 두 번째 가서 거기에서 그래 가 가지고는 '내가 하나님을 어기지 않는다 내가 하나님 말씀하신 것을 내가 어길 수가 있나, 나는 죽어도 안 어긴다.' 이렇게 말을 하고 그 사람이 굳세게 나갔는데 나중에 발람은 결과적으로 자기도 망하고 다른 사람도 망치는, 선지자 노릇을 바로 하지 못했고 선지의 직책을 가지고서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을 죽이는 일을 했습니다. 살리는 일 하지 못하고 죽이는 일 했습니다.

그러면 발람 속에 발람이 무엇으로 인해서 그렇게 됐습니까? 발람이 자기 속에 이 본능으로 더불어 싸워야 되는 본능을 적으로 삼아야 대내전(對內戰)을 하지 안 해 가지고 결국은 망치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이 큰 소리를 하고 이렇게 하기는 했지마는서도 자기 속에 적이있는 자기가 자기로 더불어 싸우는 그 싸움을 자기는 중대한 줄 모르고 그것을 무시하고서 그저 대외적으로만 이렇게 날뛰는 사람입니다. 대외적으로 이렇게 선포하고 한다 이랬지 자기 속에 이성 비판이 있었는데 이성 비판이 있는 그 이성 비판이 그것을 누구에게 고해야 되느냐 하면은 양심 비판에 고해야 되고 양심 비판은 진리에 고해야 되고 진리는 영감에게 고해서 자꾸 상관으로 올라가야 될 터인데 이성 비판한 그것이 거꾸로 내려가 가지고서 본능의 그 비판으로 타락해 내려갔습니다.

본능의 비판으로 타락해 내려가 가지고 머물게 했고 또 하나님이 '가지 말라.' 하니까 그 때는 아주 이성 비판과 의지가 강하게 해 가지고서 '나는 못 가겠다, 안 간다.' 이렇게 했어도 자기가 그 사람들 떠나고 난 다음에는 섭섭하게 은연중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들이 와 가지고 또 말하니까 '오늘밤에도 머물러 보라.' 하는 그 작용이 전부 무슨 작용인고 하니? 본능이 작용한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가라.' 이러니까 가라 할 때에 그 때에 이성이 동행하지 안 했습니다. 이성이 동행하지 안하고 본능만 동행했습니다. 본능만 동행했기 때문에 나귀가 경계하는 말 할 때에 순전히 행동한 것이 그것이 전부 발람의 본능이 행동했지 이성을 완전히 저버리고 본능적인 발람이 됐습니다.

그래 가지고, 가서 발락을 만나 가지고 제단을 쌓을 그 때는 이성이 그 제단을 쌓은 것이 아니고 본능이 쌓습니다. 그 비판이 쌓은 것이 아니라 본능이 그 제단을 쌓아 가지고서 일곱 제단 다 그렇게 강하게 주장한 그것이 뭐이냐 그것이 이성 비판에서 한 것이 아니고 본능 제가 그대로 했습니다. 그대로 하다가 제사를 끝내고 나니까 "이제 너는 네 대로 가라" 이렇게 했는데 그 다음에 본능이 다시 발람을 붙들고서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는 그런 일을 하면은 이스라엘이 망할 수 있다 하는 그것을 그래 했기 때문에 발람이 처음에 들었을 때에 깨닫게 한 것은 이성이 깨닫게 했고, 양심 생활은 안 했고, 이성이 깨닫게 했고 이성 깨닫게 한 것이 본능 깨달음으로 이제 저락(低落)해서 내려갔고 본능이 들어서 '가지 말라.' 한다 하니까 가지 말라 큰 장담한 것이 바로 본능이 한 것이라. 순전히 무슨 비판이 없이 자기들은 그대로 본능 그대로 말을 했고 또 가 가지고 거기에서 계명 지킨 것도 시킨 대로 한 그것도 본능 그대로 했으니까 본능 그것이 자기 원수인 줄을 몰랐기 때문에 결국은 본능이 마지막에는 발람을 거머쥐고 이렇게 저렇게 한 것은 하나님이 발람의 본능을 잡고 꼼짝 못하게 이러니까 그 본능이 이렇게 했지마는서도 하나님이 다 할 일 하고 나서 본능 오니까 그 발람의 본능이 이스라엘에게 올무를 내주고 그래 가지고 이스라엘도 죽고 자기도 망쳐지고 말았습니다.

여기에서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갔으며] 하는 이 말씀은? 자기가 삯을 위하는 권세나, 지위나, 삯을 위하는 그것이 뭐입니까? 그것이 본능입니다. 그것이 본능이요.
이러니까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가는 것은 본능대로 가는 길이라 그렇게 우리가 결론을 지으면 안됩니다.

그러기에, 발람의 교훈에서는 본능이 이성에게 상고(上告)해 가지고 이성의 판단을 받고 또 이성이 양심의 판단을 받고 자꾸 높은 데에다가 고해 가지고서 점점 거기 영감까지 이렇게 올라갔으면 되는 것인데 그렇지 안하고 이 본능 이것이 늘 주장을 해 가지고 본능이 하나님 계명 지키고 본능이 하나님에게 뭐 문답하고 도무지 이성을 쓰지 안하고 본능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자기 망하고 다른 사람 망하고 자기 직책을 인해서 영광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직책을 인해서 큰 화를 마련한 사람이 됐습니다.  

그러기에, 발람은 삯을 위해서 어그러진 길로 갔다 하는 이 교훈은 발람은 본능으로 가다가 망했다 그 위에 말하기를 [이성 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그 아는 것으로 멸망하느니라] 그래 놓고 그 사람이 화 있다 했는데 그 다음에 처음에 말한 것이 누구를 말했습니까? 가인을 말했는데 가인도 이 사람이 무엇으로 살았습니까? 가인도 본능으로 살았어.

그러니까 가인도 본능으로 사니까 처음에는 본능이 주장하니까 처음에는 예수 믿는 생활하는 척하고 이랬지마는 결국은 본능 그 놈이니까 본능 그 놈 소원대로 주장하고 마니까 마지막에는 멸망을 받고 맙니다. 가인도 본능 또 바람도 본능 그랬습니다.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느니라] 고라의 패역 그것은 그 고라가 옳은 것을 안 사람이요. 모세 밑에 그 부하 중에는 아주 명철하고 뛰어난 사람입니다. 고라라는 사람이, 이래서 무엇을 판단하는 그것도 잘 알고 이성 비판도 잘하고 이래 모든 것이 능숙한 사람인데 그러나 그 사람이 자기를 통한 선이라야 알아주지 자기 것이 아니면 안 알아주고 무슨 중심입니까? 자기 중심  그것이 뭐입니까? 그것이 악심입니다.

그것이 악심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도모하는 것이 번연히 모세 자리에 앉혀 놓으면 인간적으로는 모세가 할 그런 일을 대리 할만한 사람입니다. 넉넉히 대리할 만한 사람이지마는 하나님이 같이 하지 안한 그것이 문제지 인적 요소로는 모세를 대리할 만한 그만한 요소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님이 일해야 되지 하나님이 일하지 안하고 인간끼리는 일 할 수 없다"는 그것을 모르고 인간이 하면 된다는 그것을 가졌기 때문에 그것도 여전히 인본이요 그래가지고 거기에서 반대 운동을 한 그것이 내나 본능 운동입니다. 고라는 옳은 것을 알았지마는 그 사람은 고급이라서 옳은 것이라도 제가 한 것이라야 좋지 제가 하지 안한 것은 안됐다 이 말이요. 그러기 때문에 이 고라는 일종의 그 시기심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이성도 능하고 모든 것이 진리 지식도 능하고 다 능한 사람이었지마는서도 그 이성 비판을 가지지 안한 사람이입니다. 또 자기 본능이 적(敵)이라는 것을 몰랐어. 그러기 때문에 위에 말한 대로 전부 이성 없는 본능으로 멸망 받은 사람들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가인도 이성 비판을 할려고 해보지 안하고 그만 본능 하는 대로 하다가 망했고, 고라도 이성 비판 보다 본능이 강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본능으로 망했고, 고라도 껍데기로 이성 비판 그런 것으로 망했습니다.

처음에 선입 진리 지식 다 있었지마는 서도 그 사람도 본능이 강해서 주장되기 때문에 망했다. 그러니까 이단자들은 어떤 것이 이단자이냐 하면은 이단자 되는 것이 다 본능이 주장을 하면은 그만 이단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단자 되는 요소는 어떤 것이 이단자 되는 요소인고 하니? 자기 인기 끌라 하는 그것이 이단자 되는 제일 요소입니다. 그것이 뭐이냐 하면은 본능 중에는 최고의 사령 장관이라 그 말이요. 본능 중에는 최고의 위치를 가지고 있는 그것입니다. 자기 인기를 끌라 하는 그것, 그러기 때문에 설교를 하면서도 인기 설교하는 사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인기 설교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뒤에 가서 이단자가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이단자로 내던져 버리면 이단자 됩니다. 이단자라는 것은 처음에는 자기가 이단과 진리를 알지마는 자기 속에 자기를 위주로 하는 자기 위주 자기 중심이라는 그 놈이 강해있기 때문에 어느 한계를 지나가면 하나님께서 [로마인서 1장에 말씀하시기를 저를 버려 어두운데 내어 던져 버려서 그 자기 욕심대로 방탕한 사람이 되어지게] 만들어 버리니까 어두워지니까 정식 이단자가 될 때에는 자기가 틀린 것을 옳다고 주장하는 자는 이단자가 아니고 그 사람은 무엇이 그렇게 하고 있는고 하니 본능이 그리하고 있고 내가 그 본능이 시기심이라는 것이 그렇게 하고 있고 인기 중심이라는 것이 그와 같이 하고 있습니다.

있지마는 나중에는 하나님이 버려 버리면 옳은 것을 모릅니다. 옳은 것을 모르고 틀린 것을 옳다고 주장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들과 바리새교인들 그 사람이 마지막에는 이단자들인데 그들이 처음에는 옳고 그른 것을 이렇게 알았지만은 자꾸 자기네들 중심으로 인기 중심 대우 중심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인정해 주는 그 중심으로 이렇게 나가서 거기 자꾸 쌓여서 켜지다 보니까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는 벌써 그 때에는 벌써 그 때에 장성해서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옳다고 인정을 못했습니다.

옳다고 인정 못한 것은 그들이 몰라서 인정을 못했습니까? 자기들에게 있는 것,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는 것, 인기가 끌리고 있는 것, 인정받고 있는 것, 그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을 대항했습니다. 그러면 자기 지위, 인기, 그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대항했는데 그 뒤에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는 이제는 확실히 알았는데 왜 그들이 또 군대들을 시켜서 돈을 뇌물로 주면서 시체를 도둑 했다 그렇게 말은 하고서 그렇게 했습니까?

그 때는 뭣 때문에 그랬습니까? 그때는 생명이 아까워서 그랬습니다. 생명이 아까워서. 그러면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가 가지고는 지금 생명이 아까워서 그렇게 한 것, 또 인기 아까워서 그렇게 한 것 그것이 후회되겠습니까? 안되겠습니까? 후회되지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는 이것 때문에 한 그것은 후회가 됐겠소? 안됐겠소? 그 때 후회 됐습니다.

그러기에 자기를 부인치 않고는 주님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주관 그 놈을 원수인 줄 알고 싸워야 이겨야지 원수인 줄 알고 싸우지 안 하면 헛일이라
이 주관이라 하는 그놈이 굉장한 껍데기를 입고 모양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몇 가지 그 새 옷을 입고 나오는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자기 본능, 가인도 본능으로 말미암아 망했고, 발람도 본능으로 망했고, 또 고라도 본능으로 망했고, 이런데 이 사람이 본능이 원수라는 것을 전연히 인정하지 못하고 본능하고 싸우는 그런 싸움이 없었기 때문에 다 망했습니다. 위에 이렇게 내려 나오면은 이단자 이기는 이단자인데 여기 유다서를 기록해 주신 것은 [단번에 주신 도리를 위해서 힘써 싸워라] 현실에 지면은 다시 안 된다. 현실뿐이다. 현실로 다 지나가 버린다. 이런데 현실을 놓치면 다시는 못하는데 현실을 그것을 참 값있게 이용을 하도록 이렇게 못하는 그것이 어떤 자가 들어와 가지고서 그런 운동하고 있습니까?

가만히 들어온 자가 와서 그러고 있다 가만히 들어온 자는 불택자요? 택한자요? 택한자가 들어와서 그라는데 그 불택자에게 미혹 받아 가지고서 하는 자들도 있고 불택자에게 이렇게 교회 와 가지고 나는 이렇게 예수 믿는다 나는 이렇게 예수 믿어도 잘 되는 것 봐라. 그 사람들은 세상 분깃을 받았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잘 된다 이것이요. 이런데 그 사람들이 택한자인 줄 알고 그 사람들의 불택자 생활을 본받아 가지고 하기 때문에 이 택한 자들은 거기 하늘에 기업이 있고 그 사람들은 불택자들이기 때문에 땅의 것이 기업이기 때문에 그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데 이 다른 것을 모르고 그 사람들을 본받아서 하는 것을 본문에 어디에 말해 놨습니까? 네? 택자들이 불택자들에게 미혹 받은 것 어디 말해 놨지요? 8절에 말해 놨습니다.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이 꿈꾼다는 것은? 생명은 붙어 있지마는 죽은 자와 꼭 같다 그 말이요. 영감과 진리로 살아나기는 살아났지마는 영감과 진리로 중생되지 않은 불신자와 꼭 같다 그 말이요. 꿈꾸니까. [꿈꾸는 사람들도 그와 같이 이 사람들도] 이 사람들이라 하니까 이거는 택자입니까? 불택자입니까? 이 택자라 말이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하는 그는 누구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불택자와 택자는 다른데 이제 택자들이 이 불택자 생활도 구별하지 못하고 그들은 땅에 분깃을 받았고 우리는 하늘에 분깃을 받았는데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그러니까 구별하지 못하고 살다가 멸망 받았는데 구별하지 못하고 살다가 멸망 받은 그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살다가 멸망 받았습니까? 본능으로 살다가 멸망 받아!. 그래 본능이 원수라 이 때문에 설교를 해도 본능이 합니다.

가인은 하나님 섬기는 것 아니요? 또 발람은 선지자 아니요? 또 고라는 사람을 인도하는 이 인도자들이라 그 말이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 가지 종류의 생활이 우리 신앙 생활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본능으로 하느냐? 본능이 이성에게 가 가지고 물어서 이성이 상관이기 때문에 이성에게 고해 가지고서 이성의 지도를 받느냐? 이성 상관(上官)은 뭐 입니까? 양심, 양심에게 고해서 지도를 받느냐? 양심 상관은 뭐입니까? 진리, 진리 상관은 뭐입니까? 영감,  거기까지 올라갔으면 그만 그 지도만 받으면 문제가 없는데 자꾸 그러는 통에 그 탈이라 그 말이요.

누가 말하는데 그 사람이 고려 신학교 가니까 고려신학교 교수가 말하기를 요사이는 옳으니, 그르니, '그런 것을 너무 구별하면 교회가 잘 안됩니다.' 그래 말하더라고. 그분이 여기 좀 있다가 갔으니까 그 말 듣고서 "아!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지 않으면 어떻게 교인들이 그 회개를 하면서 바른 길 걸어갈 수 가 있습니까?" "그래도 그렇다"고 요사이는 그것이 신사다. 요사이는 옳은 것이 옳다, 아닌 것이 아니다. 그런 소리를 하은 그만 좁은 사람이고, 미개인이고, 못난 사람이고, 이러기 때문에 정죄를 받는다 그 말이요.

그러나 기독교는 '옳다 그르다' 이걸 구별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그 말이요. 여러분들도 자기 안에 그 거룩이 있어야 되겠고 자기 밖에 대외(對外)를 당할 때에 거룩이 있어야 되지 거룩 없으면 죽어 버립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둔해도 말이요 둔해도 이것 보니까 무슨 구별 없이 막 잘합니다. 닥치면 휘덕휘덕 암만 잘해도 이거 구별이 없으면 희망이 없소. 그것이 못나고 등신이라도 무엇이 번쩍 해도 구별이 있어 가지고 '이것이 이러냐 저러냐' 그 본능대로 하지 안하고 이성으로 구별하고 또 이성으로 구별하다가는 자기가 양심으로 구별해 보고 또 양심으로 구별하다가 이 성경 진리로 구별하고 그러고 나니 다음에 어찌 됐던 간에 무엇인가 그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해 주는 위에 상관에 나를 탁월한 그런 어떤 지혜가 나를 구별해 주기를 바라는 그것을 기다리는 것이 영감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영감은 거룩을 찾을라 하는 사람에게 영감이 와서 영감 시켜 주지 거룩을 찾고 난 다음에 거룩해 가지고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해 달고 난 다음에는 그런 것을 이길라 할 때에 성령이 와서 도와주고 옳은 것을 행할 라고 할 때에 도와주시지 그거 없으면 그 사람은 아무 생명 없는 사람이라. 물 없는 구름이라.

그 다음에 보면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그러면 여러분 이것을 알면 우리 진영에서도 지금 나간 사람들이 몇 사람 있지 않습니까? 나간 사람이 몇 사람 있는데 그런 사람들을 이 성경을 환하게 알기 때문에 환하게 알고 그 사람에게 대해서 한 마디라도 말하면 그 사람을 살릴 수가 있지만은 그걸 모르고 이걸 근본적으로 구별이 없어서 확실히 구별을 못하고 말면 헛일이라 그 말이요. 구별을 똑똑히 하고서 살아야 되지.

그러기에, 믿는 사람은 안팎에 눈이 있어야 됩니다. 자기 보는 눈도 있고 다른 사람 보는 눈도 있고 과거 보는 눈도 있고 미래 보는 눈도 있고 그것이 있어야 되지 그것이 없으면 안됩니다. 이번에 유다서를 좀 다할까 했는데 이제 뭐 이만큼 했으니까 그 다음에는 다 알아질 것입니다. 네 이라면 거의 다 알아지는데 또 이것만 알면은 이래만 배워도 이것만 똑똑히 여러분들이 통달하면은 성경에 대한 해석이 거의 다 되요. 잣대로 재면 되지 않습니까. 잣대로 가지고 어떻게 하든지 그 잣대로 자꾸 재면 무엇이 나옵니다.

주께서 환상보다, 형식 계시보다 더 확실한 문서 계시가 있고 문서 계시 안에 내재하시는 영감이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오니 이대로 행하는 자는 결단코 실족하지 아니하고 어두움이 그를 해할 수가 없는 줄을 압니다. 그러나 저들이 깨어 있지 안하고 잠자기 때문에 진리와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진리 활동이 성령 활동이 없이 순전히 불신자와 같이 살기 때문에 다 도적 맞고 실패하는 줄 압니다.  

기도합시다.
저희들 안에 큰 적이 들어 있어 가인도 그런 참 패망의 조상이 되었고 발람도 불쌍하고 가련한 자타를 해치는 그런 선지자 되었고 고라도 이 구원 운동을 하는 자 중에 자기 주관을 버리지 안 하기 때문에 그는 더군다나 더 비참한 일을 했는데 결국은 남 망하고 자기 망하는 이런 길을 우리들이 걷기 쉽사오니 자기 안에 대내전과 대외전을 하되 대내전부터 먼저하고 대외전을 해서 언제든지 이 싸움에 익숙한 자들 허리에 다 칼을 차고 있는 자들이 어두움에 해할 자들이 올 때에 이것을 이 칼로 다 무찔러 다 치고 이길 수 있는 자들로서 만들어내 주시옵소서 이럴 때에는 한 사람이 그 무수한 것을 다 당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을 압니다. 소수(小數)이지만은 저희들이 참 이 세상 지식으로 단장하지 못하고 까딱하면 단장하는 그것이 오히려 천국에 가는데 거리낌이 되는 그 부요가 되지마는 진리와 영감으로 충성으로 단장한 것은 아무도 해할 자가 없는 줄로 압니다. 진실한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이 말씀을 이렇게 성경 공부하면서 영감에서 "아! 내 본능은 내 원수다, 이젠 본능을 나는 원수로 삼아 가지고서 여생을 살겠다." 자기의 본능이 강할수록 이 본능 그 놈을 잡으면 고기 많습니다. 본능 강한 사람이 그 본능 그걸 잡으면 고기가 많아요 또 세상 지식 이것이 참 본능 뭉텅이인데 세상 지식이 그것이 본능 뭉텅이요. 세상 지식이 아주 모든 사람들의 본능이 주어 모아 가지고서 된 것이 세상지식인데 그 본능 뭉텅이인데 본능 그 놈을 많은 지식을 잡아 놓으면 아주 고기가 흐뭇하이 참 먹을 것이 있고 아주 쓸 것이 있고 뭐 수많은 사람들에게 먹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본능 그것을 그만 그것은 잡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12절 [저희는] 하는 이 저희는? 가만히 들어온 자들이요. 또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자들이요 신의를 지키지 못하는 모든 이단자들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그러면 이 이단자 가운데에는 택한 자도 있고 불택자도 있는데 택자든지 불택자든지 이단자의 행위는 이단인 줄 알고 우리는 취급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이 아니고 돌아오면 또 돌아온 것으로 대우 대접하고 회개하기 전 까지는 이단으로 취급을 해야 되지요.

[저희는] 또 지금 이단자의 행위를 보입니다 . 저희는 [기탄없이] 기탄 없다 말은? 아무 거리낌이 없이 말이요 그만 자기가 늘 익혀 놓은 길 가듯이 아무런 주저하지 안하고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와 함께 먹는다 말은? 같이 은혜를 받는다 말이요. 같이 은혜
장소에서 같이 교인 노릇 할 수 있고 같이 양성원에 공부를 할 수 있고 또 교역자 노릇도 할 수도 있고 모두 다 같은 그 은혜 생활하는 것을 가리켜서 [너희와 함께 먹으니] 먹는다는 것은 성경에 인격의 양심입니다. 인격의 양식은 행하는 것이 인격의 양심이요 또 들어 배우는 것이 인격의 양식입니다.  

그러니까 같이 교인 노릇 한다 말이요, 같이 동역자 노릇 한다 말이요, 지금 양성원이나 신학교나 같이 공부한다는 말입니다.

[너희 애연의 암초요] 애연이라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그 모든 은혜의 모임은 다 그것이 사랑의 잔치입니다. 애연이라 말은? 사랑 "애"자, 잔치 "연"자, 사랑의 잔치인데 그거 사랑의 잔치입니다.

애연의 [암초요] 같이 이렇게 은혜 안에 있지마는 암초는 그 특징이 뭐인고 하니? 보이지는 아니하는데 물을 이용하는 선박들 그 선박들이 항로할 때에 물 속에 보이지 안 하는 바위에 그만 부딪히면 그 배는 파선되어 버립니다. 그것이 [애연의 암초라]

신앙 생활 하는 것 같고, 교역자 노릇을 하는 것 같고, 이렇게 교인 노릇 하는 것, 같지마는 은혜도 받고 교인 노릇도 하는 것 같은데, [애연의 암초라] 이렇게 은혜를 받기는 받는데 사람만 부딪치면 절단 내 버립니다. 사람 부딪치면 그 사람에게 은혜를 잘 안보(安保)해 주지 아니하고 믿음을 떨어뜨리고 그 사람에게 이간을 붙이든지 거짓말을 하든지 어짜든지 그 사람의 그만 신앙의 방주를 파선시켜버립니다.  그 사람의 신앙을 깨뜨려 버린다 그기요.

이런 것도 여러분들이 알고 있으면 '지금 저 사람 누구든지 만나면 참 암초네' 표를 찍어나요' 저 사람은 누구든지 만나면 믿음의 손해를 보이네.' 우리 여기 총공회도 암초들이 많이 지나갔소. 암초들이 많이 지나갔어요. 암초 의례히 그러면 그런 말할 때에 그 말할 필요가 없어 그 사람이 그래 말한다고 말 안하나. 그것이 다 암초인데 그것이야 언제나 저 할 노릇이 암초인데 겉은 우리 총공회 좋다고 하고 속으로 사람 만나면 그 사람, 총공회 헐고 또 위원회 좋다고 해 놓고 속으로 헐어서 사람들을 이 진영 노선 관념을 그 사람에게 파선해 버려서 노선 관념을 파선을 시키고 그 사람의 교리와 신조를 파선을 시키고 또 그 사람의 소망을 그만 파선을 시키고 그 사람의 열심 있는 그 모든 신앙 행위를 그만 파선 시켜 버린다 그기요.

목회자 되면은 이런 사람을 잘 봐야 됩니다.  '보자 우리 교회는 암초가 없느냐' 그것을 잘 살펴 가지고서, 암초를 말이요 암초를 처리할라면 어떻게 처리해야 됩니까? 한번 대답해 봐요 암초는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지? 암초를 피해갈 것이 아니라 한번 크게 한번 부딪혀 싸워보지. 어때?  암초는 피해가야 되지 둘러가야 되지 암초하고 싸우면 안 돼. 싸우면 파선돼 버려 그만 그런 것은 그저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하나님에게 맡겨 놓고 거기에 피해를 당하지 안 하도록 서서히 이래 둘러 가야 됩니다. 그러나, 거기 암초인 줄 알아야 되지 암초인 줄 모르면 그만 박살나 버리요. 우리 진영에도 그 전에는 암초들이 더러 있었어. 만나기만 하면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 말이요.

그건 또 제가 벌써 암초 거기 등대가 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야 암초가 암초를 면하지를 못합니다. 그것은 어디 가도 사람에게 이간 붙이고 간교하게 또 그 유혹해서 사람을 어떻게 하든지 꼬아 가지고서 무엇이든지 숨어 먹는 것을 좀 "맛있다 맛있다." 하는 것 모양으로 그렇게 그런 노릇을 해야 맛이 있고 재미가 있지 그 무엇이든지 원형적으로 진리대로 원리대로 하는 데는 맛이 없어 못살겠다 그기요. 그런 인물들 여러분들이 조심해야 됩니다.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목자는 양을 길러야 되는데 양을 안 기르면 자기 곁을 떠나 살이 찌면 좋겠는데 아니면 자기가 기르면 될것인데 [자기 몸만 기른다 자기 몸만 기른다] 그 말은 무슨 말입니까? 양을 안 기른다 말 아니요? 자기 몸만 기른다 그 말은 양을 기르지 않는다는 말 아닙니까? 또 자기 몸만 기른다고 하니까 그 사람은 항상 육신주의로서 자기 육신의 유익 될 것만 자꾸 도모해. 육신에 유익 될 것만 도모해. 육신 좋은 것 육신에 유익 될 것 육신에 필요한 것 항상 육신 생활 그러면 육신 생활이 커지면 뭣 됩니까?

가정 생활이지. 항상 그것만 계획을 합니다. "교인들의 이 믿음이 어찌 되나? 이들의 영이 어찌 되나? 하늘의 소망이 어찌 되나? 죄와 의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이 세 가지 대속 하나님과는 어찌 되나 또 자기 마음대로 사는 자율과 어찌되나 또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어찌 되나" 하는 그런 것은 지금 살펴 가지고서 그것을 치료를 해서 따뜻하게 하고 배불리고 잘 관리해서 이렇게 살찌게 하지 안하고 목회 한다 하는 것이 만날 저를 길러도 제 영이나 기르면 하지마는 항상 육신주의로 제 육신의 것만 생각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것은 대충 살펴보면 압니다. 이런 것은 살펴보면 고만 알아.
어떤 목사, 우리 진영에 왔었는데 와 가지고서 뭐 어쩌고 하는데 그것이 항상 빼딱하게...   그것이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라 이래 보여지는데 그 때 한 번 대폭적으로 이동을 할라 했어 "전부 다 이동을 한 번 하기로 하자" 이러니까 그만 이동하자 하니까 이동을 못 한다고서 뭐 그 때는 찰떡같이 붙었는데 이동을 못한다.

왜 이동을 못하느냐 이라니까 이거 뭐 교인들에게 요리 빼고 저리 빼고 암만 하는 것이 교회가 어찌 되나 그것이 아니고 이래서 얼마 있다가 자기가 수입을 보고 요래서 얼마 수입보고 이리하고 저리 해 가지고 자기 주머니 계산만 하는 것이라 주머니 계산만 되어 가지고서 이동하면 주머니 계산 안 맞다는 것이라 거기다 교회로 하나님 삼는 사람이며 자기 몸만 기른 목자라 말입니다.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라 이것 보면 환하게 알아요.

이게 있는 이단 하나를 버리면 그만큼 권위가 있어집니다. 둘을 버리면 권위 있어 그래도 거기 '저기 행위 보면 그런데 어째 저래도 목회를 한다.' 하는 것 보면은 이 이단 요소를 그래도 그것이 한 개나 두 개나 몇 개를 버렸다 그 말이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 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바람에 불려 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그저 환경 주위 시대 형편 사정에 따라서 어떻게 하든지 거기에만 맞추어 가지고 거기에 피동 되는 하나님께 피동 되지는 안하고 환경에 피동 되고 주위에 피동 되고 시대에 피동 되고 이 모든 정치에 피동 되고 교회에 피동 되고 교회에 그 모든 브로커들에게 피동 되고 교회 정치나 이런 정치 그런데나 피동 돼 가지고 그런 것에나 맞추어 가지고서 이래 돌아다니지 속에 물은 없다 그 말이요.

속에 농작물에 필요한 물은 없어. 곡식이 자라는데 물은 없어. 양떼가 자랄 수 있는 무슨 신령한 그런 영감이나 진리나 그런 것을 여는 것은 없고 그저 사람만 아듬고 돌아다니면서 자꾸 이 사람 거머쥐고 또 교재하고 저 사람 거머쥐고 가지고 교제하고 이래 가지고서 마치 이런데 꼭 부로커 모양으로 그렇게 목회 하는 자들이 있다. 이리저리 교제해.

보면은 '보자 대세가 어느 것이 대세인가 봐서 그만 여기가 좀 대세인 것 같으면 거기 가 똑 들어붙고 그러니 창기라는 그것에 무슨 정조가 있습니까? 오늘 저녁 이 남자하고 또 이래 교제하다가 또 이튿날 또 다른 남자하고 이렇게 교제하고 이래서 뭐 그 목적이 뭐이냐 하면은 돈이 목적이라. 정조는 상관이 없고 이것 모양으로

그저 [물 없는 구름이라]
양떼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이 은혜가 어찌 되느냐 하는 은혜는 생각지 안하고 사람들만 거머쥐고 돌아가지고 사람들한테 인정받고 자기 당파가 되면은 목사나 몇 끼고 하면은 고만 당회장이나 끼고 사찰장이나 끼고 노회장이나 끼고 그만 몇 순회 목사님들이나 거머쥐고 이 교제하고 그러면 그들이 알아주면 그만 힘있고 그만 그들에게 인정을 받고 또 옹호하고 하지마는 그 속 생명에 양식은 없다 그 말이요. 하도 이래 말하니까 우리 진영에는 그런 것을 못하니까 발을 못 붙이지 못하지만은 그래도 그런 것 많아요 인화주의(人和主義) 못 씁니다. 사람들로 더불어는 화평을 하고 하나님과 화평을 생각지 안하고 인화주의, 인화주의자는 둥굴둥굴 하고 사람이 좋아하지만은 하나님은 싫어합니다.

또 인화주의는 사람들은 좋아하지만은 얼마 안가서는 그 사람하고 사귀는 것은 권태가 나서 사귀지 안 해 그걸 노리개나 삼고 흐리멍텅하게 방탕하지 거기 대해 취미를 가지지 안 합니다.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그 말은 바람에 불려 가는 말은 환경에 피동 된다 말이요. 환경에 피동만 잘 받고, 양떼 먹이는 것은 하나님과 진리와의 관계되는 그것이라야 양떼의 양식이 되는데 그거는 없다 이기요. 자꾸 밀리고 그런 사람은 목회해도 저희 마누라한테 옹호나 받고 마누라가 좋아서 인정하면... 가정에서는 아무 일 없이 가정에는 인정하고 교인들 몇 사람이나 그 제 사람 만들어 가지고 교인들 몇이나 좋아하면은 그걸로 다 된 줄 아는데 교인들이 처음에는 무슨 목자인 줄 알고 그렇지만은 나중에 얼마 지나가고 난 다음에는 꿀도 안나오지 젖도 안나오지 물도 없어 농작물에 목이 말라죽을 지경인데 아무 물도 안나오지 비도 안나온다 말이요. 이러니까 그걸 그 뭐 웃는 낯에 침 못 뱉기로 이래 하지마는 서도 멸시와 천대를 얼마나 합니까? 그런 사람들이 다 [바람에 불러 가는 물 없는 구름이라] 물 없는 구름 그 날 다방(茶房)에서 하루종일 이야기하고 저희 사람 의지해 놨는데 기도할라 하면 깜깜하지 뭐 기도가 나올 것입니까? 참 불쌍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버림당한 교역자 버림받은 사울 왕 그 때 하야(下野)를 해 가지고서 왕 치워 버리고 그냥 농민으로 갔으면 따뜻이 살다 죽을 것인데 왕이기 때문에 그 때 비참하게 죽고 참 안 할 고생 안 할 근심 많이 했습니다.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 [죽고 또 죽어] 이거는 처음 죽은 것은 뭐이냐 하면은 원죄로 말미암마 첫째 아담으로 말미암마 죽은 죽음인데 그 뒤에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마 살아났었는데 이거 현실마다 살아난 것으로 살지 아니하고 또 살아난 것을 벗어버리든지 이것을 가르쳐서 두 번째 죽은 것입니다.

[죽고 또 죽어] 옛날 사람으로 살면서 현실에서 예수님의 구속까지 벗었기 때문에 죽고 또 죽었다 그기요.

[뿌리까지 뽑힌] 우리 뿌리는 어디다가 박아야 되느냐 하면은? 진리에 뿌리를 박고, 영감에 뿌리를 박고 이제 하나님의 속성의 뿌리를 박는데 영감과 진리의 뿌리를 박아야 되는데 거기에 뿌리박는 반대로 거기에서 뽑혔으니까 그 뭐이냐? 뿌리가 뽑혔으니까 하나님과 연결  되어야 할 터인데 하남과 연결에서 뽑혔으니까 누구하고 연결이 됩니다. 하나님하고 연결이 없어지면 어찌되느냐? 사람하고 연결됩니다. 사람하고 연결.

그러니까 뿌리가 뽑혔다 말은 외식자라 그 말입니다. 외식하는 자. 그러면 외식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자꾸 겉만 꾸미고 단속하고 겉만 두려워하지 사람의 이목만 두려워하지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인정만 받을려고 하지 하나님의 인정은 생각지 아니하고 세상적으로만 그 일을 물 샐 틈 없이 하지 하나님과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 상관이 없는 그런 사람이 돼 버린다 이기요

[뿌리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라] 그러니 열매가 있을 수가 있겠소? 여기 열매는 무슨 열매겠습니까? 내나 성령의 열매요 진리의 열매라 이 열매가 없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라] 가을이면 시기가 지나갔습니까? 안 지나갔습니까? 가을에 열매맺는가? 시기가 다 지나갔지. 가을에 무슨 열매 맺습니까? 열매 맺는 시기가 지나가지 아니했소? 항상 미래적 영감도 가지지 못하고 현실적 영감도 가지지 못하고 그저 다 지나가고 난 다음에 '잘못됐다, 뭐 봐라.' '아! 잘못됐습니다.' 후회도 따가운 후회도 아니고 그저 뒤에서 잘못됐다는 말 한마디로 그만 전부라. 자극도 받지 아니하는 그런 썩은 사람되면 안됩니다. 이래 '이거 잘 못됐다.' 이라면 '예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소

그 소리를 잘하는 사람도 두 종류가 있는데
1. 잘못됐다 하는 그 속에는 참 간이 녹는 그런 뜨거움이 있는 잘못이라는 그놈이 미워서 자꾸 잘못됐다 이렇게 하는 것이 있고

2. 그저 잘못됐다 하는 데에는 잘못에 대해서 아무 느낌이 없고 자극도 받지 아니하고 수치감도 느끼지 아니하고 잘못됐다 하기를 예사로 하고 아무런 그런 마음에 원통하고 모욕감을 가지지도 아니하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가을나무라. 가을나무.

그러니까, 기회를 지내 보냈다 그 말이요. 기회는 언제입니까? 우리는 미래에 준비를 해야 되겠고 현재의 일을 줄 때에 현재 할 수 있는 일은 현재에는 다 지내 버리고 과거로 회고적으로 뒤로 돌아보면서 후회만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 그 말이요.

가을나무라 그래 가을나무니까 그 사람에게 언제나 주의가 후회주의이고 준비주의도 아니고, 후회 주의이고, 현재에 해야 되는 현실주의도 아니고 후회주의고 그거는 소용이 없는 것이라 말이요. 열매 없는 가을 나무라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혀] 뿌리가 뽑혔으니까 뭐요? 하나님과 진리와 연결이 없고 인간하고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외식자라 그 말이요.
열매가 있을 수가 없지 가을나무라 그러니까 다 시기는 다 놓친 자라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품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자기 수치의 거품을 품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라 말이요. 자기 수치를 품는 이것이 무엇이지요? 자긍 제 자랑쟁이 가만히 들으면 제 자랑이나 하고 제 딴에는 그것을 자랑하는 것이 무엇을 좀 매꿀 줄로 알고 또 이렇게 저렇게 수단을 부려 가지고서 이런 지혜 쓰고 저런 지혜를 쓰고 이렇게 저렇게 수단과 방편을 쓰고있는 것이 제 딴에는 그 일을 좀 자기에게 수치가 덜 되도록 자기를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도록 하고 자기가 수치를 덜 당하고 인정을 받아 자기 모든 위신이나 좀 올리라고 하기는 하는데, 그것이 전부 자기를 자기가 천하게 만들고 제 창피 제가 하고, 제 수치 제가 만들고 자꾸 이렇게 하는 사람이 된다 이기요. 이리 되면 그 불쌍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꾸 올려줄라 하고 자기는 안 올라갈라고 애를 쓰고 다른 사람은 자꾸 칭찬을 하고 부러워하는데 자기는 자꾸 부족하고 죄인 된 그것이나 자꾸 찾는데 다른 사람은 인정하고 그러나 자기는 자꾸 무엇을 나타낼라고 이래 쌓는데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을 정반대로 자꾸 낮추어 보는 그 인물이 되어지는 것이 이제 기독자가 잡힐 때 잡히지 안 하면 그만 그 꼴이 되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