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표본으로 준 신앙노선

 

1987. 10. 24. 새벽 (토)

 

본문:창세기 12장 1절∼3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이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라 이렇게 하나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은 아브라함의 혈통 자손이 아니고 신앙 자손이라 하는 말씀입니다. 자손이라면 곧 거게서 난 것인데, 개 자손은 틀림없는 개요 소 자손은 틀림없는 소입니다. 그러면 사람의 자손은 틀림없는 사람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손이라 하셨으니 아브라함의 믿음과 꼭 같은 믿음을 가진 것이 그것이 신자라는 말입니다. 기독자라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 명령과 계약에 대해서 에누리하는 요런 버릇을 완전히 우리가 고쳐야 되겠는데 이 고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지 모릅니다. 참 이 고치는 것이 전능자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로 고치게 해 주셔야 되지 고치게 해 주시지 안하면 천하 인간 중에 한 사람도 고칠 수 없는 이런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데 하나님이 고치게 해 주실 때에 고치는 것인데 우리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깨닫고 고치려고 소원하고 애를 쓰는 그것이 벌써 하나님의 은혜가 착수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무시하고 제대로 지식하고 제대로 생각하고 제대로 소원하는 그것이 막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축복을 앞으로는 받을지 몰라도 현재로서는 받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요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는다는 증거요 착수하지 안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대로 계속되면 멸망받고 맙니다.

우리의 구원은, 노아 홍수 때에 모든 사람을 멸하는데  노아 여덟 식구만이 홍수에서 구원 얻은 그와 같이 하나님이 명했고 노아는 그대로 순종함으로 그 구원에 결성이 이루어졌습니다. 노아는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서는 마음 다하고 목숨 다하고 힘 다하고 뜻 다하고 뭐 명예 다하고 자기 소욕을 다해서 하나님의 약속의 이 심판과 구원을 바라보면서 순종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우리가 궁극적으로 따질 때에 이 구원은 하나님이 은혜로 해 주셔야 되지 인간 자기 힘으로서는 한 사람도 절대 안 되는, 인간의 선에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되는 그 과정, 그 방편과 그 형태는 어찌 되느냐? 꼭 제가 해서 된 것같이 여겨질 만치 그렇게 제가 소원하고 행동하는 그 형태를 갖추지 안하면 안 된다, 그 형태를 통해서 돼진다.

그러면 그것도 궁극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그 은혜를 줘서 그 은혜의 마음을 가지고서 그와 같이 되는 것이지요. 이러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멸망시키는 자는 멸망하고 구원시키는 자는 구원하지 뭐 딴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 들을 때 ‘구원과 멸망이 하나님에게 주권돼 있으니까 인간이 노력해야 뭐 무슨 필요 있나? 그분이 멸망시키면 멸망하고 구원시키면 구원하기 때문에 나를 구원하기로 작정하시고 구원하시면 그 구원 아무도 방해하지 못할 것이고,  나도 방해하지 못할 것이고 인간도 방해하지 못할 것이고, 하기로 작정하시면 또 될 것이고, 또 멸망시키기로 그리 작정되면 안 된다.’ 요렇게 생각을 가지고 ‘힘쓸 필요가 뭐 있나?' 하는 그것도 하나님의 예정입니다.

‘이러니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내가 하는 것같이 된다고 했으니까 내가 힘쓰는 이것이, 원해지는 이것이 내게 있는 것이 벌써 하나님 은혜다, 내가 이 말씀을 듣고 소원되는 것이 벌써 하나님의 예정이요 은혜다, 또 소원되는데 내가 힘을 쓰는 것은 더 이건 예정이요 하나님의 역사다.’ 자꾸 자기는 되는 방향으로 생각을 가지고 소원을 가지고 노력을 하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예정이니까 뭐 내가 뭐 날뛰어봤자 무슨 소용 있느냐?’ 하는 방향으로 자꾸 그렇게 자기가 원하지도 안하고 노력하지도 않는 그런 방향으로 자꾸 흘러 내려가는 사람 있다 말이오. 그것도 예정입니다.

처음에 며칠은 그 맘 가졌다가 그 다음에 그 맘을 그만 또 잊어버리는 그것도 예정입니다. 처음에는 구원을 무시하다가 그 다음에 중간에는 열심을 내는 것도 예정입니다.

그게 천층 만층 수많은 종류로, 이거는 구십프로 가다가 그만 떨어져 버리고 믿음이 식어져 버립니다. 또 이거는 백프로 갔습니다. 이거는 팔십구프로 갔습니다. 이게 전부 하나님의 예정이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하늘나라는 한 가지 종류의 구원 영광이 있는 게 아니라 구원 영광은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의 말로 표시하시기를 “형체는 수많은 형체가 있어 땅에 있는 형체도 있고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는데 그 형체마다 가치와 영광과 권위가 다르다” 그러면 땅위에 형체가 얼마나 많습니까? 뭐 바닷가의 모래알 그것도 하나의 형체입니다. 그러면 그 형체의 권위나 영광이나 가치와 또 하늘에 있는 태양 그것도 한 개의 형체인데 그것의 가치와 권위와 영광이 얼마나 차이 있는가? 이런 것으로써 하나님께서 부활한 자의 영광의 차이가 있는 것을 표시를 했습니다.

그러면 인간으로 표시했는데 무한한 구원이기 때문에 무한한 차이가 유한한 말로서는 그걸 표현이 안 되기 때문에 그런 걸로 표현했으나 그 표현은 그렇지 무한하다고 우리가 생각하고 믿는 것이 바른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을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라고 이렇게 하셨으니 우리의 표본 신앙이다. 말하자면 종자적 신앙이다. 종자 하나에서 쭉 뿌리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 약속하신 믿음을 아브라함이 지키고 아브라함의 그 자손으로 쭉 계속해서 지켜 가지고 자꾸 번져 나가고 퍼져 나간다. 여게 대해서도 종자적 신앙이라 이러면 이의가 많을 것입니다. 틀림이 없습니다. 종자적 신앙입니다.

거기서 다 뻗어나온 것입니다.

마치 영 문제에 대해서 여게 창조론도 있고 또 저축론도 있고 여러가지 그뭐 말할 수 있지만 그만 창조론이 맞는 것처럼 그와 같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 것은 곧 그에게서 그 표본과 그 모양 그 형태로만 아니고 거게서 마치 육체의 부모에게서 거게서 뻗어나와서 그 눈이 부모의 눈이 내 눈 됐고, 부모의 코가 내 코 됐고, 부모의 입이 내 입 됐고, 부모의 모든 수족이 내 수족 된 것처럼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된 신앙의 그 모든 형태가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돼 와 가지고 되는 것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에누리하지 말고 우리는 믿어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대한 명령이 곧 내게 대한 명령이요 아브라함이 그 명령을 순종한 그것이 곧 내가 순종할 수 있는 것이고 아브라함이 복받은 그 복이 나도 받을 수 있는 복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계약된 그 계약은 다 우리에게 계약된 계약입니다.

여게 아주 간단하나 이것을 간단하게 그만 읽어서 지내보내지 말고 아브라함에게 단지 “여호와께서” 여호와라 말은 우리에게 구원의 계약을 선포해 주신 전지 전능자의 자존자 하나님을 말합니다.

여호와라는 것은 우리에게 구원의 계약을 선포해 주시고 구원을 우리에게 주시는 전지 전능의 완전의 불변의 하나님이라는 그런 뜻을 가졌기 때문에 거게서 얼마든지 우리는 발표해서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라는 것을 뭐 백 가지로 말하면 백 가지로 말할 수 있고 천 가지로 말하면 천 가지로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얼마든지 넓히면 한없이 넓히고 좁히면 한없이 좁아지고 이러나 “여호와께서” 말은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께서, 약속을 선포하시고 약속대로 구원하시는 하나님께서 하는 말의 뜻을 가진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아브라함에게 명령했습니다.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명령하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요것이 첫 명령입니다.

요것이 첫 명령, 이거는 첫 명령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 이제까지는 본토에 붙어 있었고, 본토에 매여 있었고, 본토에 소망 가지고 있었고, 본토 속에서 살았고, 본토를 의지했고, 본토로 말미암아 자기는 모든 게 이루어졌고, 그 본토, 순전히 물질인 그 외에는 무엇이 필요했는가? “아비 친척집” “아비” 인간, 인간으로 말미암았고, 인간에게 속했고, 인간에게 매였고, 인간을 소망했고, 인간을 의지했고, 인간으로 말미암아 얻었고, 받았고, 인간에게 피동되어서 인간을 따라서 살았고 이랬는데, 우리는 세상을 버리라 말은 역사를 버리라 말과 같은 말입니다.

세상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창조 이후에 하루 이틀, 일 년 십 년 백 년 천 년 이렇게 쌓여 나온 그 모든 계통과 그 전부를 다 말하는 것인데 우리는 거게 속했고, 거게 매였고, 거게 의지했고, 그걸 바라봤고, 그로 혜택으로 됐고, 또 그 속에 살았고, 그에게 모든 마음과 정성이 다 거게 속해서 그를 애모하고 그와 밀접하게 들어붙었고, 또 거게 따라서 교훈이나 지도나 인도나 거게 따라서 살았는데 이제 이것을 완전히 뗍니다. 하나님께서 “버리고” 주님의 명령이 먼저 버리라는 거 이것이 첫째 명령입니다.

“떠나”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떠나는 것은 요거 좀 버린다는 말과 좀 다릅니다. 자꾸 버린다는 말이 나오는데 버린다는 말이 아니요, 이거. 버린다는 말이 아니고 떠나는 거, 떠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떠나는 것이지 그뭐 떠나는 데도 거게 마음이 들어붙으려고, 소망이 들어붙으려고, 의지가 들어붙으려고, 거게 속하려고, 거게 꼭 매이려고, 거기 떨어지지 안하고 그에게 피동되려고 자꾸 이렇게 되나 하나님이 명령하시니 떠나는 것입니다.

지난밤에도, 그럴 때에 서로 뭐 울고 불고 야단스러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조금 뭐 다시 만날 수 있는 사람도 그런데 만나지 못하게 떠나는 데 대해서는 모두 울음입니다. 사람이 다시 만나지 못하게 떠나면 그거 울음이라.

그러니까 제 주관으로서 뭐 원수가 돼서 떠나는 것도 아니고, 싫어서 떠나는 것도 아니고, 필요가 없어 떠나는 것도 아니고, 필요하고 필요하지마는 그보다 더 필요한 분이 말하니 할 수 없고 또 내가 거게 매여 있는 것이 좋지마는 그보다 더 강하게 매여 있는 데가 있으니 이는 절대적인 권리입니다.

이래서 그분으로 인해서 이렇게 하기 때문에 표현을 떠날 때에는 싫어서 떠나는 게 아니라 미련과 애착이 있기 때문에 울음으로 떠났다. 그 실상이 뭐 울음으로 떠났어. 울음으로 떠나서 “이 두 가지 먼저 떠나라” 그러면 이것은 거게서 옮기라 말이오.

이제 하나님에게서, 거게서 떠나서 하나님에게 속하고 하나님에게 연결되고 하나님을 바라봐라 하는 이것이 아니고, 네가 이제 거게 속해 있었는데 거게서 떠나서 이제는 하나님에게 소속하도록 이 소속을 바꿔라, 또 연결을 바꿔라, 또 소망을 바꿔라 하는 말이 아니고 네가 이미 바뀌어졌으니 너는 내게 속했는데 네가 알지 못하고 그런 것이지 속해졌으니 그걸 버리고 따라오라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버림으로써 거게, 본토와 친척을 버림으로 하나님에게 속하고 매이고 소망하고 연결되고 거게 애정 붙는 게 아니고 하나님에게 붙었기 때문에 너는 그것을 떠나라 요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붙었기 때문에 떠나라.

고거 첫째 명령이고, 하나님이 벌써 나를 주권하시는 이 주권을 자기가 인정하고 거게 따라서 피동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네가 피동되는데 첫 피동이 뭐이냐?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그러고 둘째 피동이 뭐이냐? 내가 어데든지, 네가 여기 가면 좋겠다 저기 가면 좋겠다. 좋으면 지시 따라가고 하잖으면 안 가는 게 아니라 좋고 하잖고, 가다가 죽을런지 모른다. 어쨌든지 지시한 땅으로 가라.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지시하는 지상 생활, 세상 생활, 지시한 재세 생활에 네가 가라. 진리가 가는 데에 가라.

그러니까 다니엘은 하나님의 명령이 가라는 대로, 하나님의 명령이 사자굴에 가기 때문에, 왜? 하나님 명령 저버리지 안하면 사자굴에 들어가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이 사자굴에 가라는 것입니다. 가라 했기 때문에 갔습니다.

그러면 불이나 물이나 맹수나 혹독이나 고독이나 감옥이나 네가 사형장이나 어데든지 하나님의 명령 따라가라. 요것이 둘째 당신의 소원이십니다. 당신이 우리를 구원하신 이 구원이 지극히 크기 때문에 이런 것이 문제가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는 것을 또 요걸 조브랍게 생각하면, 그러면 아무 땅에, 아무 땅에가 아니라 여게는 보니까 가나안 땅으로 갔지만 그게 아니고 넓히면 “땅으로 가라” 하기 때문에 땅 생활, 땅 생활에 가라 그말이오. 세상 형편에 가라 그말이오. 세상 형편이 땅 생활 아닙니까? 요런 걸, 어제 ○○○목사님이 겨자씨 비유, 마태 13장 겨자씨 비유에 대해서 ‘거게 어째 마귀가 속할 수가 있느냐?’ 새떼라는 것은 깊이 말하면 마귀에게 충동받은 사람들인데 그 새떼라는 것은 정처 없이 기회주의로 날아다니는 그런 뿌리박히지 않은 그 인간들을 말합니다. 신앙 생활에 새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걸 꼭닥스럽게 ‘그 생명을 말했는데 생명에 어떻게 마귀가 들어붙을 수 있느냐?’ 그러면 너무 거리가 멀어서 그저 배워서 자기가 짐작할 거 있습니다. ‘세상에서 깨닫는 것이 이렇게 저렇게 깨닫는 것이 많이 있으니까 어느 깨달음이 옳은가?’ 내가 잡기를 늘 ‘교리와 신조는 생명보다 중량이 무거워야 된다. 중량이 무거워야 되지 생명에 속한 교리와 신조라고 생각하는 자는 교리와 신조를 참으로 저는 잡지를 못한다. 자기 생명에 교리와 신조가 속한 게 아니라 자기 생명과 몸은 교리와 신조에 따라서 움직일, 거게 피동될, 거게 소속한 것들이다. 근원은 교리와 신조다.’ 이거 교리관과 신조관의 그 가치관을 요렇게 똑똑히 알지 못하는 자는 절대로 그는 모릅니다.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기 때문에 그 신앙은 그저 칠팔월 수수닢 모양으로, 바람에 불리는 갈대 모양으로 형편 기회 따라가지 절대로 하나님에게 일관으로 당신을 따라서 뿍뿍 가는 그런 신앙은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과거에 왜정 말년에 신사참배 문제 된 그걸 예사롭게 생각하면 헛일입니다. 그게 뭐이냐? 그게 영 구원은 있지만 하늘에 부활의 영광이 되는 구원은, 영광은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있을 수가 있습니까? 믿음으로 있는데 믿음이 종자도 없는데 어떻게 있겠습니까?

시간 없는데, 이러면 이것을 하면 그 셋째가 약속이 뭐이냐 하면 “지시할 땅으로 가라” 요 1절이고 그러고 나면 2절에는 “내가 너로” 요거 둘을 지킬 때에 “내가 너로 큰 민족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이름이 창대케 되고” 둘째 “이름이 창대하게 되고” 또 “복의 근원이 되고” 또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하고 축복하는 자는 축복한다”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은 아브라함 네게 모든 것을 소속시키겠다 그말이오. 네게 모든 것을 소속시켜서 너로 인하여 모든 것은 취급하겠다 그말이오. 너로 인하여 취급하겠다. 너로 인해서, 너로 인해서 멸망도 시키고 너로 인해서 구원도 시키고, 뭐 많은 인간 인류가 있지만 너로 인하여 취급하겠다. 네가 인류의 주인공이요 근본이다.

그러면 네게 거리끼면 다 때려 없애버리고 네게 필요하면 다 갖추겠다, 이러면 그것은 아브라함을 인류의 중심으로 삼겠다 그말입니다.

또 “너로 인하여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 이 복은 곧 이 구원의 복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이게 최고의 복입니다.

그러면 이 다섯 가지 축복인데 이 다섯 가지 축복을 우리가 그냥 지나가서 입에 줄줄 외워도 소용 없습니다. 이 다섯 가지 축복의 넓이가 어찌 되며, 깊이가 어찌 되며, 길이와 높이가 어찌 되며, 그 가치가 어찌 되며, 이 축복은 그 범위가 어데까지인가? 깊기가 어데까지인가? 높이가 어데까지인가? 하나님 속에 뿌리박았습니다. 하나님 속에 뿌리박았어. 그러면 뻗치기는 얼마나 뻗쳤는가? 영계와 물질계의 모든 피조물에게 꽉 충만하게 뻗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것을 좀 생각해서, 그러면 이는 단지 조건입니다. 하나님에게 속하여 일명령 이명령 이 명령을 순종하는 그 조건에 따라서 이 다섯 가지 축복이 있는 것이지 그 명령을 거게 순종하지 않는 거게 맺혀나지 않습니다. 이 순종하는 그 믿음의 나무에, 그 믿음의 나무에 이 다섯 가지 축복은 맺어지는 것입니다.

이랬는데 시간 없으니까, 거게 자꾸 생각해서 연구를 해서 자기와 아브라함과의 대조해 가지고 일치를 만들어야 합니다. 일치 만드는 그것이 뭐이냐? 제가 만드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치 만들어 놓은 것인데 이 모두 악령 악성 악습 첫째 아담의 이 모든 원죄 본죄 이 모든 악령 이것으로 말미암아 가리워 있기 때문에 하나씩 자꾸 벗겨서, 이러기 때문에 드라크마를 잊어버렸는데 이제 그걸 자꾸 쓸고 쓸고 하니까 찾았습니다. 그거 모양으로 이제 우리가 자꾸 그런 것을 생각하고 생각하는 가운데에 자꾸 벗겨져 나갑니다.

자꾸 이런 것이 벗겨져 나가는데 아브라함과 롯이 지금 같이 출발했습니다.

출발했는데 아브라함은 여게서 이 명령을 받아 가지고 이 명령 순종했습니다.

일호 순종했고 이호 순종했는데 삼호에 가 가지고서 실패를 했습니다.

삼호에 가 실패를 해서 우리에게 그 실패의 위로를 주시고 그 실패의 과정이라는 어려운 과정을 우리에게 말하고 아브라함은 그 실패에서 실패한 결과가 어찌 됐는가? 아브라함이 그 셋째 명령 순종에 실패해 가지고 어찌 됐습니까? 순종 안 해 가지고 아브라함이 살아 있지만 아브라함은 죽었습니다. 알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완전히 자살했습니다. 자살했고 완전히 자멸을 했고 완전히 희망 없습니다. 가정도 깨졌고 마누라도 다 뺏겼고 죄투성이 됐고 목숨은 끊어지고 이랬는데, 하나님이 둬 두면 그럴 건데 하나님이 약속하시기를 그렇게 일호 이호 순종하면 복 주시마고 하셨기 때문에 삼호에 거게 하나님이 지시한 땅에 참고 견디라는 걸 참고 견디지 못해도 일호 이호에 약속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약속을 지켜서 아브라함의 성결을 지켜서, 사라를 바로가 데리고 가기는 데리고 갔지만 ㅡ 약속하신 그 약속을 지키는 그것을 우리가 믿음으로서ㅡ동침은 제가 못 했습니다. 못 했다고 우리가 확실히 추측할 수 있고 추론할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복 주고 그렇게 자손을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말했는데 아브라함을 죽여서는 안 될 터이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켜서 아브라함을 살려냈습니다.

‘아브라함이 죽다니? 멀거니 살아 있는 사람이 죽어?’ 그것은 하나님이 바로에게 그렇게 나타나셔 가지고 바로를 조아대지 안했으면 바로가 지금 그거 모르면 좋다고 얼마나 결혼의 첫사랑으로 사랑하고 들어붙을 것입니까? 이렇지마는 사라는 또 속에 가책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다 들어붙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니까 마음에 불만스럽게 이래 하고 있으면 불만스럽게 한다고 ‘네가 내게 대해 불만스러워하는 것 보니까 뭐 좋은 게 있다’ 의심날 게 아닙니까? 그거는 뭐 다 우리가 겪은 거 아니오. 자, 결혼해 가지고 그 아내가 자기에게 만족하지 안하면 ‘뭐이 있지?’ 해서 그게 제일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뭐 이혼이니 하는 사람들 내가 수십 명 봤습니다.

그러니까 ‘뭐 있지?’ 하고, 그런 사람이 얼마나 명철하겠소? 조사해서 보면 이 사라하고 아브라함하고 둘이 꼭 지내는 것이 보니까 부부지 그거는 딴 사람 아니라. 그러면 어찌 되겠어? 이미 결혼되고 난 다음에 그러면 어찌 되겠어? ‘이걸 죽여버려야 되겠다’ 당장 죽이지 않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죽을 수밖에 없는 거라. 조금만 생각해 봐도 죽을 수밖에 없는 거라.

이렇게 하나님이 지시한 땅에 여게 있으라 자기 형편 하나님이 주신 현실이라는 형편 그것이 주님이 인도하신 것인데, 고게서 만족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지 않는 거, 지시한 땅에 참고 견디고 있지 않는 거, 셋째의 시험은 말하자면 참고 견디는 거라. 이것이 어려운데 아브라함은 어려워서, 어려움 때문에 가기야 갔지요. 굶어 죽지 않기 위해 갔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믿음이 없는 거라.

만일 아브라함이 안 갔으면 하나님이 거기서 굶겨 죽일 건가? 굶겨 죽이면 어떻게 자손이 큰 민족을 이룰 수가 있겠는가? 그러면 하나님을 그리 믿어야 될 터인데 믿지 못하고 실패해서 그렇게 실패해서 간 걸음, 자기가 하나님이 지시한 땅 요게 살아라 요 현실에 살아라 하는 자기 형편을 불만하고 그 자리를 제 욕심대로 떠나는 걸음은 요렇게 멸망받는 길이라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놨습니다. 우리는 이러면 멸망 받습니다. 가면 멸망받소.

이랬는데 아브라함은 그 다음에, 지난밤에 말한 거와 같이 물질로 인하여 인간으로 인하여서는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순종이 조금도 거리끼지 안했습니다.

뭐 모든 무슨 물질 인해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 조금도 털끝만치도 거리끼지 안했고 인간으로 말하면 최고 절정이, 아내보다도 백 세에 얻은 이삭 얼마나 믿음으로 자라니까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같은 자식이라도 믿음으로 자라는 거는 귀하고 믿음으로 안 자라는 것은 항상 걱정이고 고통거리입니다.

이랬는데 이삭에 그렇츰 애착했지마는 번제로 드리라 하니까 조금도 지체 안 하고 그만 즉시 그날밤에, 듣는 그 시간부터 좋아서, 그 좋아서, 자식을 죽이는 게 뭐이 좋아? 좋은 것은 하나님이 큰 민족 이룬다고 했기 때문에 요 계약을 믿으니 이 죽는 것은 뭐 백 번 죽어도 당신이 살려낼 수 있는 그 능력이 있는 자시기 때문에 그저 구경만 하고 기이한 것 볼 것뿐이지, 그러기에 믿음은 능력입니다.

이랬는데, 아브라함은 요것을 그래 가지고 그 뒤에 시험을 이겼지만 롯은 아브라함이 시험 받을 때에 받은 시험을 안 받았습니다. 롯은 그 다음에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시험받아 가지고 아브라함과 롯이 둘이 갈라지게 되는 그 문제가 생길 때에 그때에는 롯에게는 뭐이냐? “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게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 하는 것이 그때 롯에게는 봉착됐습니다. 이런데 롯은 본토를 떠나지 못했어. 이제까지 본토는 제가 이 물질에 대해서 애착 붙은 거 이거 모두 짐승은 많이 있고 짐승에 아름답게 짐승에 정붙은 거 모두 다, 그것을 떠나지 못해. 거게 붙들려서, 거게 붙들려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 그게 지연이 되고 방황이 되고, 또 사람을,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했는데 이걸 해결하지 못했어.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은 사람에게 붙들렸어.

그러기 때문에 물질과 사람에게 붙들려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제가 알지요. 그때 무슨 성경이 있습니까? 그 양심을 통해 다 알 수가 있다 말이오. 삼촌하고 따랐으니까 삼촌이 좋은 곳으로 가야지 암만 제 마음에 욕심이 나도 ‘삼촌이 좋은 거 가져야지 내가 그 다음으로 가야 되지 그렇느냐? 그러면 삼촌이 좋은 것 다 차지하고 나는 그래도 나는 할 수 없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다문 삼분지 일이든지 사분지 오분지 일이라도 주면 그저 감사히 받지 내가 그럴 수 없다.’ 하는 그것이 자기로서 양심에 정확한 판단일 것이라 말이오.

이랬는데 거게서 뿍뿍 세워 가지고서, ‘좌하면 내가 우 할 터이니까 네 좋은 것 차지해라’ 이러니까 보니 소돔 들이 좋으니까 그리 택한 것이 그것이 벌써 하나님께 속하지 안하고 물질에 속하고 모든 가족들이 다 그러니까 사람에게 속했다 말이오.

물질과 사람에게 속하고, 거게 매여 있고, 그걸 바라보고, 그거 의지하고, 거게 애착하고, 그걸 사모하고, 거게 따라서 피동되는 그 피동을 롯은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뒤가 자기 자체도 망했고, 가까운 가족도 망했고, 자녀도 망했고, 교육이고 뭐 다 안 됐어. 다 전멸되고 말았어. 전멸됐다 말이오. 요것을 우리에게 꼭 보여서 신앙의 노선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냥 지내보내지 말고 생각하고 생각해서 얼마든지 생각해서 거게 대한 지식을 충분히 가져야 되겠고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안하면 언제든지, 롯이 만일 그때 “아비 친척집을 떠나라” 하는 요 아브라함 명령 같은 요것을 해결하고 완전히 하나님에게 속했더라면 고거는 됐을 건데 하나님께 속하지 안했기 때문에 안 됐다 그말이오. 그거 택한 자인지 불택자인지 그거는 나는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으나 그의 행위구원에 있어서는 완전히 실패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구원은 있으나 영광구원 행위구원은 없는 자 있고 있는 자 있으니까 우리가 여게서 요걸 우리에게 믿음의 표본으로 신앙 노선으로 주셨기 때문에 요 문제를 생각해서 해결짓지 안하면 저는 항상 고통이오.

그 해결 안 짓고 있으면 좋을 줄 알아도 속에서는 일치가 안 되니까, 속에서 신앙 양심에는 고통이고 영감은 고통이기 때문에 자기를 살린 영감과 진리와 피의 공로는 대적이 되니까 고통, 예수 믿는 사람이 요 두 문제를 해결하고 어데든지 주님 지시한 땅에 거게서 죽어도 거게서 죽고 살아도 거게서 살고 요 세 가지 문제가 해결된 자는 어데서든지 항상 평안입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지족함을 배웠다는 것은 요걸 배웠기 때문에 문제가 없어.

그런고로 이걸 갖추어 가지기 전에는 언제든지 마귀는 그를 노리고 아주 시뻐 보고 있습니다. 해결지우지 못한 것은 그것만 하면 다 되니까.

이라니까 뭐 그때, 아따 그 목사가 ○목사라는 목사인데 왜정 말년에 감옥에 가서 육 년 동안 있었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항복하고 나서 오 개월인가 육 개월인가 지나고 난 다음에 해방됐습니다. 그때까지 이래 지키고 있지마는 마귀란 놈은 ‘네까짓 거는 내것이기 때문에 네 승리 그까짓 거야 내 주머니 안에 들었다’ 이거 다래끼 속에 들었다 이랬어.

마지막에 자기 가족들이 가 가지고 ‘교회서 이렇게 압박을 하고 천대를 하고 이렇게 경제에 타격을 당하고 이렇게 뭐’ 천대당한 것을 그걸 다 말하니까 거게 피동됐어. 고거 말하니까.

‘그래? 그래도 내가 이렇게 저거 위해서 이래 내가 신앙 지켜 이래 가지고 있으면 내게 대해서 이렇게 할 수가 있나? 그 장로가 그게 들어서 그랬어? 그러면 내가 나가지.’ 그만 거게 따라서 분개한 맘 가지고서 따라 나와 가지고 나온 지 육 개월 지날 때야 얼마나 잘 먹었겠습니까? 그까짓 거 잘 먹으면 뭐합니까? 그때 굴복하고 그만 신앙 패전해. 그는 패전자라. 그와 같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는 그때 시험을 닥쳤지만 롯은 따라나왔지 제게 아무 관계 없어. 아무것도 없는데 삼촌이 가자 하니까 뭐 좋았지. 이런데 롯에게 대해서는 아브라함과 둘이 갈라질 때에 그때에 물질 문제 인간 문제가 봉착될 때에 그는 그리 끌려가고 하나님을 떠났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늘 심사해서 내가 하나님께 과연 속해 있나? 또 내가 어데 피동되나? 어느 줄이 크냐? 뭐 아주 예수 믿는듯이 그래 쌓아도 보면 이걸 생각지도 못하고, 이러니까 모두 다 ‘행정이 틀렸다’ 행정 틀렸다는 것은 저거와 같이 이거 지금 아브라함의 길을 걷지 안하고 롯의 걸음을 걷지 안하니까 그래 하는 것입니다.

요거 해결지우지 안하면 신앙은 안 됩니다.

이러니까 모두 대적이 돼 가지고 지금 마구 원수가 돼지고 이래. 원수가 돼도, 원수가 돼도 요래 걷는 자에게는 그 사람들이야 어찌 됐든지 아브라함을 인해서 자손에게 그렇게 축복해 준다 했습니다.

기독교는 자기 한 사람만 잘되면 자기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은 다 잘되는, 그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잘되도록 하는 그것보다도 나만 잘되면 나 잘됨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거게 피동돼서 결과가 이루어지는 것을 했기 때문에, 요게서 다섯 가지 축복 받으면 안 될 것 뭐 있습니까? 이 축복 받으면 가정을 버리는 게 아니라. 그게 가정을 구원하는 거라.

이렇게 하는 것이 가정을 구원하는 것이요, 이렇게 하는 것이 자기 소유를 구원하는 것이요, 자기 모든 관련된 모든 인간을 다 구원하는 것이라. 인간을 버려야 구원해. 소유를 버려야 구원해. 주를 위해서 버려야 주님이 주시지 거게 매여 가지고서 주님보다 그걸 낫게 여기는 그자에게 줄 수가 있습니까? 요것을 똑똑히 알아서 깨닫고 믿어야 됩니다.

주일학교 반사 선생님들은 공과를 꼭 외워야 됩니다. 지하철 위해 기도하고 하루 삼십 분 기도 이거 어짜든지 여러분들이 잃지 마십시오. 자기 미래의 환난을 위해서 이 기도를 잃지 안해야 됩니다. 잃으면 망합니다. 앞으로 못 이겨.

왜정 말년 때 보니까 간 크고 잘나고 배짱 좋은 사람들은 전부 다 패전했어.

자기는 두려워 떨려 못 견디는 사람 아주 겁쟁이들이 다 승리했습니다 왜? 겁쟁이는 하나님에게 기도하거든.

나는 아픈 걸 견디지 못하는 자는 잘 이겼습니다. 나는 두려운 거 견디지 못하는 자는 잘 이겼습니다. 나는 간이 작다 하는 사람은 다 이겼습니다. 간이 작으니까 기도했지. 기도한 사람들은 다 이겼어. ‘내야 간이 크고 배짱 있기 때문에 그까짓 거 문제가 없다’ 하는 그자들은 다 실패했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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