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아는 것과 바로 행하는 것

 

1986. 6. 19. 목새벽

 

본문:사도행전 1장 4절∼8절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선지자선교회 우리가 성경에 말씀으로만 우리에게 교훈해 주는 것도 있고 또 어떤 역사가 지나간 것을 우리에게 기록해 가지고 가르쳐 주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이 다 하나님의 특별 계시입니다.

계시라 말은 열 계자 보일 시자, 열어 보이신다, 우리가 모르는 것을 하나님께서 열어 보여서 알게 해 주신다 하는 그 말인데 신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특별 계시라,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자들에게 열어 보이신다 하는 뜻으로 특별 계시라 그렇게 하고, 또 특별 계시가 오기 전에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가지고서 우리에게 열어 보여 주신 거 있으니 그것을 가리켜서 자연 계시라 그렇게 말들을 합니다. 우리 모든 교계에서 신학계에서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면, 자연 계시에는 하나님의 그 모든 창조와 또 하나님이 이렇게 저렇게 여러 모양으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또 지음을 받은 만물 중에도 인간들의 그 수많은 변태의 그 각종의 마음의 구조 그런 것을 가지고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의 그 구원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열어 보여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자연 계시라 이렇게 말합니다.

자연 계시는 간추려 말하면 이래 한 서너 가지 이런 것이 자연 계시인데 세 가지는 말하면 모든 피조물 전부가 다 이 안에 다 포함돼 있습니다.

또, 특별 계시는 이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계시인데 그 특별 계시는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문서 계시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문서로 기록해 가지고 우리에게 열어 보여 주신 일이 있고, 또 하나는 형식 계시라. 그러면 이런저런 역사의 형식, 이런 역사가 있고 저런 역사가 있고 그런 역사의 형식 그런 것을 가리켜서 형식 계시라 이라는데, 지금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할 때에, 예루살렘에 일어난 그 광경 그것을 우리에게 문서로 기록해 가지고 주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광경과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그 말씀과 또 그들이 말씀하신 대로 열흘 동안을 예루살렘에 그 무서운 박해 속에서 믿음을 가지고 일백 이십 명이 열흘 동안 모여서 하나님에게 전혀 기도했다 이랬습니다.

그때 그 환난 가운데서는 뭐 다른 것을 하지 안하고, 저들이 뭐 죽느냐 사느냐 어떻게 하면은 피신을 하느냐 하는 그런 것은 하나도 생각지 아니하고 그저 성령이 와야 성령 세례도 받고 또 성령이 와야 권능을 얻어서 증인도 된다 하는 이것이 그들에게 유일한 소망이 돼 가지고 이렇게 전혀 기도에 힘썼다 이렇게 성경에 말씀을 해 놨습니다.

그렇게 힘쓰는 중 열흘되는 날이 오순절인데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오순절은 과거에 역사한 그런 형식 역사가 있습니다. 과거에 오순절이란 그 오순절이 생겨난 것은 언제 오순절이 생겨났는고 하니 하나님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돼 가지고 나온 지 오십 일 되는 그 날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줬습니다. 그래서, 오십 일 만에 십계명 받았기 때문에 오십 일이라 하는 그것을, 오순절이라 말하는 것은 오순절이라는 것은 순자는 열흘 순자인데 다섯 열흘을 지냈다. 그러니까, 오십 일이라 말입니다. 그래서 한 달을 삼순이라 이랍니다. 한달을 셋 열흘을 지낸다 그래서, 하루, 열 하루, 스무 하루 이래서 오순절이라 하는 거은 오십 일 절기라 하는 그런 말입니다.

오십 일 절기라는 말인데 그때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십계명을 이스라엘에게 줘 가지고 이스라엘이 간추려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하는,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며 어떻게 인인 관계를 가지며 사물 관계를 가져야 되느냐 하는 것을 그때 간단하게 가르쳐 주신 것이 십계명입니다.

그러면, 그때에 오순절에 십계명 주셨고, 이스라엘이 또 주욱 오순절을 기념해서 지켜 나왔습니다. 유월절이 먼저고, 그다음에는 오순절이고, 그다음에는 장막절이고 이런데 우리들도 추수 감사절로 이렇게 지키는 것은, 그때에 그들은 오순절은 맥추절로 지켰고, 또 장막절은 수장절로 지켰고 이랬는데 우리는 그만 그 춘추로 감사 주일이라 하면서 이래 지키면서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이 셋 절기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해 주신 이 은혜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그 절기를 지켜서 절기 때마다 거게 관한 설교를 한 적이 많이 있습니다.

이래서, 옛날 오순절날 계명 준 것이나 또 오순절날 성령 강림한 것이나 꼭 같은 역사입니다. 그러면 십계명 준 것이 내나 사람들의 모든 심령을 밝게 해 가지고 바른 길을 걸어가도록 그렇게 십계명을 준 것이 신령한 눈이요 마음의 지혜요 또 우리 신앙 걸음을 걸어가는 그 법칙으로 줬습니다. 그러면 그와 마찬가지로 또 사도행전 2장에 오순절에 성령 강림한 것도 그 성령이 온 것은 우리의 심령을 밝게 하고 우리 갈길을 바로 인도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신구약 성경은 사람들에게 배우지마는서도 그 어떻게 행할 것은 사람들에게 배우지 안해야 된다, 사람들은 가르쳐 줄 수도 없고 또 사람들에게는 배울 수도 없다, 너희 안에 기름 부음이 너희들에게 옳고 바르게 가르쳐 주나니 그대로 너희들은 행하면 된다 하는 그 기름 부음이 곧 성령님입니다.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님입니다.

여게서 오늘 여러분들이 하나 깨달을 것은 하나님은 한번 말씀한 것도 그대로 그 말씀한 것이 차차차차 더 견고해지고 더 온전해지고 강해지지 한번 말씀한 것이라도 그것이 취소되거나 없어지거나 그런 일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때에 오순절에 십계명 주신 것이나 또 오순절에 성령 강림한 것이나 꼭 같은 역사로구나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창조하실 때에 에덴 동산에서나 에덴 동산에 들기 전에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이나 그때 역사하신 것이나 지금이나 날짜되는 것은 날짜도 변동 없고 성질도 변동 없고 또 모든 종류도 변동 없고 꼭 고대로의 역사가 계속되어 나오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모든 이종교들은 그 모든 지식이 이렇게 갈 지자 걸음으로 이렇게 했다 저렇게 했다가 그 시대를 따라서 변해졌지마는서도 하나님의 도는 변하지 않고 그때나 지금이나 꼭 같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 역사하신 것보다도 지금은 더 정확하고 더 구비하다 이래 가지고 기독교를 비평하면서 훼방하는 그 고등 비평가들, 고등 비평가라 하면은 대학자들이 기독교를 비평하는 그 비평을 고등 비평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이러면 그들이 비평을 할 때에 기독교도 진화적 종교다, 모든 세계에 있는 종교는 다 진화 종교인 동시에 기독교도 진화 종교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진화라 말은 차차차차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서 점점 변화가 되어지고 또 점점 개량화되어지고 개정화되어지고 그렇게 온전화되어져 간다. 그러기에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차차차차 또 사람이 생각을 가하고 가하고 해 가지고서 차차차차 모든 그 종교를 온전하게 그렇게 자꾸 이렇게 조직을 하고 또 발표를 하고 이렇게 사람들이 자꾸 신앙에 나가고 있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진화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도 진화의 종교라.

기독교도 진화의 종교가 아니다. 그 아닌 것은, 보라, 예를 들면 신약으로 말하더란대도 제일 처음에는 마가복음을 짤막하게 기록했고 마가복음 기록 다음에는 이제 마태복음을 기록하기를 조금 더 구비하게 기록했고 또 마태복음보다는 누가복음은 좀 더 구비하게 기록했고 누가복음보다는 요한복음이 더 구비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이거 진화가 아니냐? 그들이 그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발표하신 것은 보면 그 질이나 그 성이나 본질이나 본성이나 그런 것은 변하지 안하고 고대로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셨습니다. 계시해 주셨는데 다만 양이 다르고, 양이 다른 것은 하나 말했다가 둘 말한 것 있고 또 처음에 말할 때는 사람들의 지식에 따라서 좀 쉽게 말해 주고 또 그 다음에는 좀 더 구비하게 어렵게 말해 줘서 마치 국민학교 일학년 교과서와 또 대학 교과서가 다른 거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지식 정도와 그들이 성장돼 가는 데 따라서 하나님이 계시해 주셔서 그러한 것이지 당신이 없는 것을 새로 또 연구하고 연구하고 내고 내고 해 가지고서 그런 것이 아닌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고 세상은 그렇게 우리를 자꾸 흐트러지게 이렇게 만들라고 애를 씁니다.

그러면, 창세기 1장에 타락이 에덴 동산에부터 타락했는데 타락 시작은 에덴 동산인데 에덴 동산에 그때에 타락한 그 방편이나 성질이나 오늘 타락하는 방편이나 성질이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을 아는 사람은 그때 것이나 지금 것이나 꼭 타락도 같고 또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시는 그 방편도 그때 방편이나 지금 방편이나 알고 보면은 꼭 같습니다.

이러니까, 지금도 신앙에 그 사람의 장성함에 따라서 깨달음이 다릅니다. 장성함에 따라서 깨달음이 다른 것은 지금도 신앙에 장성한 사람들은 이 신약을 봐 가지고는 만족이 없고 구약에서 그 신약을 말해 놓은 것을 봅니다. 그러면 구약에 보면은 구약 때 벌써 신약을 다 말해 놨는데 그것을 찾아 봐야 양식이 되고 또 구약 때도 구약 때에 장성한 사람들은 구약 때에 이 신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그때 그들이 보고 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사람들의 그 성장 차이에 따라서 하나님이 계시하는 것이 달라졌지 근본이 달라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 기록은 그 여러 시대에 기록했습니다. 이 세상은 시대마다 변해지는데, 여러 시대에 기록했는데 이 신구약 육십 육 권의 도리는 여러 시대를 걸쳐서 기록했지마는서도 시대에 그 영향이 하나도 거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떤 시대라고 시대에 그런 무슨 조그마치라도 자극이나 거게 무슨 충격이나 거게 무슨 색채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시대에, 변하는 시대의 색채는 하나도 없습니다.

또, 여러 지방에 그때는 서로 통할 때가 아닌데, 통할 때가 아니고 뭐 가지도 못하고 오지도 못하고 여러 지방에서 사람들이 기록했기 때문에 그때는, 요새는 뭐 미국이라면 우리 나라 가깝지마는서도 그때는 아주 옛날이기 때문에 어데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고 하는 그런 때입니다.

그런데, 이 지구상 저쪽 끄트머리에서 받아 기록한 사람 또 이 끄트머리에서 받아 기록한 사람, 알지도 못하는 모든 각각 다른 사람들이 받아 가지고 기록했지마는서도 고 내용이 꼭 같습니다.

고 내용이 꼭 같은 그것이 이제 한 성령님이 사람들을 통해서 기록했기 때문에 그 내용이 꼭 같습니다. 시대에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안했고 모든 각인에 제재를 아무것도 받지 안했고 오직 성령님이 사람을 통해서 그렇게 기록해 주신 것이기 때문에 꼭 같은 신관, 같은 인생관, 같은 만물관을 다 그렇게 가졌고 또 금생과 내세와 영원 무궁에 대해서도 꼭 같은 일관된 지식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더 알고 덜 알고 넓게 알고 깊이 아는 사람들은 어떤 데서 차이가 있느냐 하면은 구약에 거게서 가르친 모든 존재관이나, 존재관이라면 창조주도 들었고 피조물도 다 들었습니다. 모든 존재관이나 또 지금 마지막에, 요한계시록은 제일 마지막 기록한 것인데 요한계시록에 모든 만 존재관이나 꼭 같습니다.

하나도 변하지 않은, 여게서 모순된 것이 있으나 조금 들어가면은 하나되고 이제 신구약 성경에서 가르치는 이 계시가 서로 상충되고 모순되는 거 같으나 그 모순을 통과해 보면은 그 안에는 꼭 한 분이 같은 지식을 우리에게 줬다는 것을 발견하는 거게에 들어 갈 때에 그 사람들의 지식이 원만하고 고것이 정확한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 시간에도 많이 말했지마는 바로 아는 것은 바로 행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뭐라고 쌓아도 아는 대로 행하지 모르는 대로 행하지 않습니다.

아는 대로 행한다 말은 자기가 아는 대로는 이 생애 본능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곤충이나 만물이 다 생애 본능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아는 대로는 제일 좋고 행복되고 평안한 것을 택해서 갈라 하는 것이 그것이 생애 본능입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아는 대로 행하게 됩니다. 그러면 아는 대로, 자기가 아는 대로 제일 좋은 것을 행하게 된다 그거요.

자기가 아는 대로에 제일 좋은 것을 행하는 그것은 본능 행위요 그거는 자유 행위요 자원 행위이지마는서도 아는 것은 이래 가야 되겠는데 강제를 당해 가지고 저리 가는 것은 그것은 자유가 아니고 강제고 다 억행이지 그렇게 스스로 자기 행위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그러면, 아는 대로 행합니다.

사람들이 안다고 해도 아는 대로 행치 아니하는 그것은, 그라면 제가 아는 대로 행할라고 하는데 강제를 당해서 아는 대로 행하지 안하는 것이든지 그리 아니면 안다고 하는 그것이 껍데기로 거짓부리로 알고 참 아는 것이 아니든지 둘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면, 아는 대로 행치 안하는 것은 안다는 그것이 참 속속들이 알지 안하고 껍데기 거짓말로 인정하고 하는 그것이든지 또 아는 거와 행하는 것이 같지 안하는 그런 것은 그 행함이 제가 자원적으로 주관적 행위가 아니고 강제 억제를 당해 가지고 행하는 게 돼서든지, 지행이 하나가 안 되는 것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하나가 되지 안하는 것은 앎이 거짓이든지 행함이 그것이 거짓이든지 둘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행함이 거짓이라 말은 뭐인고 하니 행함은 자기는 그렇게 행하기 싫은데 강제를 당해 가지고 행한다 말이오. 그러면 이 세상에는 강제당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게 없으면 인간이나 만물은 다 안 대로 행한다 그것입니다. 아는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알면은 바로 행하게 되고 삐뚤어지게 알면 삐뚤어지게 행하게 되고, 이래서 성경에 죄를 회개하라. 죄의 값은 사망이라 하는, 죄 값은 사망이라는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삐뚤어지게 행한 값은 사망이라 그 말입니다.

죄란 말은 삐뚤어진 것이라 그런 뜻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뭐 죄라는 것이 무슨 다른 게 아니라 죄라는 것은 삐뚤어진 것을 말합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

삐뚤어진 것은 사망이라.

그러면, 삐뚤어진 것은 무엇을 표준해 가지고서 삐뚤어진 것이냐? 그러면, 우리 한국법을 표준해 가지고냐 또 무슨 재래 동양이냐 무슨 구미냐, 어떤 법을, 불교법을, 유교법을, 또 무슨 어떤 그 종교법을, 어떤 단체들이 하고 있는 무슨 뭐 미신법 어떤 법을 표준해 가지고 그 법에 틀린 것을 틀렸다고 하느냐? 이것은 땅위에 있는 수많은 사상과 주장과 종교들이 있지마는 그게 아니고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없는 가운데서 모든 것을 예정하시고 창조하신 하나님 주권하시는 하나님, 대주재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요 주권 개별 섭리하시는 하나님 이분, 이분의 법칙에 삐뚤어진 것을 삐뚤어졌다 그렇게 말합니다. 이분의 법칙만이 바른데 이 바른 이분의 법칙에 삐뚤어진 것은 다 잘못된 것이라, 잘못된 것이라. 그러면 잘못된 것은 사망하게 됩니다.

그러면, 잘못된 것을 사망하게 하는 것은 뭣이 들어서 사망하게 하느냐? 잘못된 것을 사망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올바른 이치가 사망케 합니다. 올바른 이치에 삐뚤어졌기 때문에 그 올바른 이치만이 살지 올바른 이치에 삐뚤어졌으니까 그것은 올바른 이치로 생겨진 것이 올바른 이치에 도움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사망된다.

이래서 고린도전서 15장에는 말하기를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그러면 사망이 뭐 때문에 죽게 되느냐? 죄 그거 때문에 죽는다. 삐뚤어진 거 때문에 죽는다.

죄의 권능은 뭐라 했습니까? 죄의 권능은? 이거 성경에 안 해 놨소?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니? 죄 그거는 무슨, 뭣을 배경을 삼아 가지고 죄 그게 그렇게 세력을 부리느냐? 율법을 배경을 삼아 가지고 세력을 부립니다. 그 율법은 무엇입니까? 그 율법은 영원 자존하신 그분의 뜻인 진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는 어떤 게 죄냐? 불교에서 말하는 죄가 다르고 한국 정부에서 말하는 죄가 다르고, 한국 정부에서 말하는 것은 한국 정부의 헌법과 행정법, 헌법과 행정법에 위반됐으면은 한국에서는 죄라고 말하지마는서도 이 성경에 말하는 죄는 뭐 한국 행정법 헌법, 또 이북의 헌법 행정법, 또 이런 어떤 영국이나 미국에 그런 데 또 헌법과 행정법 그것은 나라마다 다릅니다. 종교마다 다릅니다.

그런 법은 사망을 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고 경내에 있으면서 고 정권이 권세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고 정권법을 어겼으면 그들이 죽일 수 있지마는서도 죽여도 몸을 죽이지 영혼은 죽이지는 못합니다. 왜? 그거는 몸만 관계하지 영혼은 관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영혼을 관계하고 있기 때문에 이 몸만 죽일 뿐만 아니라 그 몸과 영혼을 영원한 지옥 불에 던진다고서 마태복음 10장에 말씀하신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가리켜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죄라고 하는 것과 이 세상이 죄라고 하는 것은 아주 다릅니다. 세상이 죄라고 하는 것은 저거가 세워 놓은 그 법을 어긴 것을 죄라고 말하고 성경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 법 어기는 것을 죄라고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죄와 죄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죄와 죄가 다르다. 그러면 이 법에서 죄로 정해도 저 법에서는 그것을 의로 정합니다. 이남에서 가장 큰 죄로 정하는 용공 정책, 공산주의와 협동하는 것을 제일 큰 죄로 이남에서는 정하고 있는데 이북에서는 공산주의와 일치된 것을 큰 의로 하고서 민주주의를 멸하는 것을 거게서는 제일 의로 삼습니다.

그러니까, 고것은 다 국부적이요 다 개별 사욕적이요 주관적이요 개체적입니다.

전체적이 아니고 절대 주권적이 아니고 대주재적이 아니고 전능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까짓 놈의 법이야 있거나 말거나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왜정 말년에 그때에는 이차대전 때에 그때 일본 나라가 전쟁하기 위해서 우리는 일본 나라에 식민지로서 그들의 통치 아래에 있었는데 그들의 전쟁하는 정치에서 뭐 법을 많이 내놓은 게 있었습니다. 물가에 대해서도 그렇게 억제해 가지고서 내놓은 게 있었고 또 양식에 대해서도 이거는 다 사매를 하면은 그들의 법에서는 그만 징역을 해 가지고서 그뭐 아주 참 사형을 시킬 만침 그런 엄한 법이었습니다.

꼭 곡식이라 하는 것은 저거가 먹고 남는 거 주는 게 아니라 농사 지어 가지고 공출해서 나라에 얼마 바치는 공출을 내고 나머지기 있으면 먹고 없으면 못 먹습니다. 공출이라는 것이 그때 있었습니다. 있어서, 한 평에 얼마씩을 공출을 해라 이랬으면 농사를 잘 지어 가지고서 일반적으로 한 평에 얼마 해당되는 그대로 공출 내야 되는데 농사가 잘 됐으면 공출 내고도 저거 먹을 것이 있고 만일 나락을 농사를 잘못 지었으면은 공출 내면은 그 배당된 그거 내고 나면은 저거 먹을 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래서 그때에 인제 곡식이 참 어려웠습니다.

이북에서는 지금도 조금 들어 보니까, 뭐 들어 보나 안 들어 보나 알아요. 안 들어 봐도 그들이 어떤 형편에 있다 하는 것을 사람들의 말이나 신문 보고 아는 게 아니고, 신문 보지 안하고 사람은 영물이 돼 놔서 이상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아는 것보다 마음으로 보고 아는 게 밝고 가까운 데서 보는 거보다 먼 데서 보는 게 더 정확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영물이라서 그 이상한 그런 지각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북에서는 공출을 정해 놓기를 아주 특별히 농사를 잘 지으면 공출 내고 좀 남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공출에 다, 충당하지 못할 만침 그렇게 양을 정해 놨기 때문에, 이북에서는 공출받고 나면은 개인에게는 양식이라 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도 없애고 그다음에는 배급을 줘 가지고서 이렇게 살리게 됩니다.

그 왜정 말년에도 일본 사람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했는데 그때에 곡식이라 하는 것은 사사로 주고 받고 파는 것은 이것은 죄로 정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다 전매를 해서 공출 내고 난 나머지기는 제가 먹지마는서도 제가 먹고 남은 게 있으면은 또 다시 공출할 일이지 사적으로 매매하는 일은 없습니다.

사적으로 매매 하면은 뭐 사형을 줄 만치 그렇게 어려웠습니다.

어려운데, 그때에 하나님이 저를 축복해서 제게는 곡식이 많이 있었습니다. 제게 곡식이 많이 있었었는데 그때에 모두 목사들이 해석을 하기를 이거 곡식을 사사로 파는 사매하는 것은 죄라 이렇게, 이거는 나라의 국법을 어기고 나라의 법에 어긴 죄는, 나라의 법에 범죄는 내나 성경 범죄요 이렇게 동일시했습니다.

나라에서 죄라 하면은 교회서도 죄라고 해야 되고 나라에서 의라고 하면은 교회서 의라고 봐야 된다 이렇게 동일시하는 그것을 해서 그때 잘 믿는 사람들하고 그 거짓부리 믿는 사람들 하고 충돌이 많이 됐습니다.

그때, 저는 다른 데보다 거게서 먼저 깨달아서 그 나라에서 하는 그것은, 말한 것은 저희들이 사람 죽이기 위해서 불법으로 했기 때문에 인간 법이기 때문에 그거 상관없다. 자기에게 곡식이 있으면은 저거 사람 죽이는데 군량할라고만 자꾸, 그렇게 사람 죽이는 데에 하는 것보다도 공출은 될 수 있으면 안 내는 게 좋고 또 있는 곡식이 있으면 자기 근근히 먹고 나머지기는 다른 사람에게 나눠 줘서 어려움을 면하고 사는 게 좋다 이래 가지고서 거게 대한 해석이 그때 현 교역자들과 저와 달라 가지고서 충돌이 많이 됐지만 제가 깨달은 것이 아주 완전합니다. 고것이 그때는 완전한 깨달음이오. 그들은 다 틀린 말이오.

이래 가지고서 신사 참배 난 것도 로마인서 13장에 보면은 ‘권세는 위로부터 나지 안한 것이 없기 때문에 권세에게 복종하지 안한 것은 심판받는다’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총독이 한국을 책임지고 있는 권세자인데 한국을 책임진 권세자가 신사 참배 하라 하니까 거게 복종하는 것이 그것이 그 권세에게 복종하는 것이지 거게 복종하지 안하는 것은 심판받는다. 로마서 13장을 가지고서 해석을 하고 달라들었습니다.

그것은, 권세는 하나님께 왔는데 하나님께 온 권세를 하나님의 뜻대로 써야 될 터인데 권세 받은 것을 하나님께 받아 가지고서 쓰기는 제맘대로 권세 악용 남용을 하기 때문에 그거는 역적이다. 하나님 말씀에 위반되게 하는 그거 정치가들은 다 역적이기 때문에 역적에 복종하면은 역적 동참자가 돼 가지고 죄가 된다 하는 것을 그렇게 그 로마인서 13장을 해석을 하고 왜정 말년에 해석하는 것이 달랐습니다.

그 해석을 그렇게 하는 해석가들이 좀 신사 참배를 이긴 사람들은 그렇게 해석했고 진 사람들은 다 그 그렇게 해석을 해서 여기 송도 앞바다에서 천조대신 이름으로 세례를 새로 받았습니다. 목사 장로들 전부 세례를 다 새로 받고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일체의 세례받은 것을 면하고 새로 받았습니다. 왜 그짓 했을까? 안 하면 죽을 터이니까, 영생보다 육신의 생명을 귀중히 여긴 사람들은 다 거게 굴복했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믿는 것이 차이가 있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대로 믿지 않습니까? 아는 대로 믿고 믿는 대로 행하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아는 것이나 믿는 것이나 행하는 것의 그 중량을 뭣보다도 중량을 크게 봐야 됩니까? 생명보다 중량을 크게 봐야 된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뭐 ‘이래 알아도 된다. 저래 알아도 된다.’ 보면 어떤 사람들은 ‘이 교리도 뭐 다 이것도 바른 해석이다. 저 교리도.’ 그 한마디에서 그 사람의 신앙이 죽었다 그말이오. 생명은 없다 그말입니다.

김현봉목사님이, 내가 그 이름은 대지 안합니다. 그분의 저서를 보고서 ‘이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 생명은 없는 사람이다. 생명은 없는 사람이다.’ 이라니까 그때 한국 교회가 ‘그분이 생명 없다니? 그러기 때문에 저놈의 영감탱이는 켸켸 묵어서 저거는 다 괴물이지 저거는 진리가 아니다.’ 욕을 했습니다.

그말이 맞습니다. 왜? 뭘 보고 그렇게 죽었다 하느냐? ‘이 사람의 말도 옳다. 저 사람의 말도 옳다. 이 학자는 이렇게 말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한다. 이거 다 정통이요 이거 다 옳은 말이다. 옳은 해석이다.’ ‘너는?' 자기 해석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죽었다 그말이오. 그 죽었다 말이 맞소. 생명이 없기 때문에, 움직이기는 움직이고 하지마는서도 생명 역사는 못한다 그거요. 여러분들이 똑똑히 알아야 돼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여게 대한 해석을 했는데 ‘그때 예루살렘에 상관있는 것이지 예루살렘은, 그때 예루살렘이 지금 어데 우리 한국에 예루살렘이 있느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성경은 뭘 말한 것입니까?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알아야 되며 어떻게 믿어야 되며 어떻게 행해야 되며 어떻게 건설해 나가야 되느냐 하는 그 이치를 가르쳐 놓은 것이 신구약 성경입니다.

알겠습니까? 이치를 가르쳐 놓은 것이 신구약 성경이기 때문에 이 시대는 이것들에게 그 이치가 해당되고 후 시대는 후 세대에게 이치가 해당돼서 그 어떻게 하느냐 하는 이치는 예루살렘에서 떠나지 말라는 그 이치나 오늘에 우리에게서 해당된 그 이치나 고 이치는 꼭 같습니다. 이거 이해가 돼요? 이거 모르면 안 돼요. 이거 모르면 안 돼.

그러기 때문에, 좀 애가 터지는 것이 우리 목사들도 여게 대해서 앵무새 모양으로 말만 하지마는서도 말은 하는데 그걸 알았으면 알 건데 이 각도로 물으면 그만 몰라. 내나 이렇게는 아는 척 하고서 막 설교하고 야단인데 내나 그것을 이 각도로 물으면 대답을 못 한다 말이오. 또 저 각도로 물어도 대답을 못 해. 그걸 알았으면 이 각도로 묻든지 저 각도로 묻든지 그걸 다 보고알았으면은 어느 각도로 물어도 알 것인데 다른 각도로 물으면 모른다 그거요. 그러니까 그게 아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니라 그말이오.

그게 뭐이냐? 왜? 진실을 가지고, 내가 오늘 잘못 알면 필연적으로 잘못 행하게 된다. 잘못 행하면은 멸망을 받는다. 바로 알아야 바로 행하고 바로 행해야 구원 얻는다.

그러기 때문에, 바로 아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그다음에는 바로 행하는 것이 중요하니 바로 알고 바로 행했으면은 그것은 죽어도 산다. 그거 없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잘못 알고 잘못 행하면 오늘에 그 잘못 알고 잘못 행함으로써 큰 돈뭉텅이가 왔고 죽음에서 피난돼 나왔다 할지라도 잘못 알고 잘못 행함으로 죽음에서 나왔으면 더 큰 죽음으로 들어갔지 살지는 못한다. 더 큰 가난으로 멸망받지 거게서 구원 얻지 못한다. 이제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에 여러분들이 성경을 배울 때에, 그 배우면 그거 깨달음 아닙니까? 사람에게 배워 가지고 깨달았든지 성령님에게 직접 받아 가지고 깨달았든지 바로 깨달아 가지고 알았으면 꼭 같습니다. 성령이 직접 가르쳐 준 것도 하나님이 가르쳐 줘서 안 것이요,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가르쳐 준 것도 가르쳐 준 거는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것이오. 그러니까 뭐 ‘나는 직접 배웠는데 저 사람은 내게 배워 가지고 배웠다.’ 내게 배워 배운 것도 내가 가르친 게 아니라 나를 통해서 가르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기 때문에, 배웠으면 어데서 배웠든지 꼭 같은 것인데 이 배운 데서 자기가 바로 배웠으면 바로 알게 되고 또 삐뚤어지게 배웠으면 삐뚤어지게 알게 되는 것이니까 우리가 배울 때에 이거는 바른 지식이다, 바른 지식이다 삐뚤어진 지식이다 하는 이것을 구별하기를 얼마나 힘을 써야 됩니까? 뭣만침 힘을 써야 됩니까? 생사만침 힘을 써야 됩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만치 힘을 써야 됩니다.

왜? 바로 배우면 살고 잘못 배우면 죽기 때문에 이 우리의 생명과 영원이 거게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에 육신의 생명은 한 번 죽고 다 죽을 것들이지마는서도 이 바로 알고 잘못 아는 것은 영원의 그 생명과 행복이 좌우되는 것이기 때문에 온 세상보다 더 크다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이 배울 때 ‘이거는 삐뚤어지나 바르나?’ 이것은 생각지 않고 뭐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고’ 자꾸 많이 주 웅변을 들이 써 가지고서 이렇게 해서 하면은 시원하니 들으며 바른지 틀렸는지 여게 대해서는 생각지 아니하고, 그게 바로 내가 죽고 사는 그 중대한 문제인데 여게 대해서는 생각지 안하고 재미만 있으면 된답니다. 재미만 있으면 된대요. 죽고 사는 게 거게 있는데.

이번에 내가 양성원 학생들에게 교학실장을 통해서 그것을 물어 봤습니다. 그들이 지금 배우는 가운데에 고쳐 주면 좋겠다는 것이 무엇인지, 또 바꿔 주면 좋겠다 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느 강사를 바꿔 달라 하는지, 교수를 바꿔 달라 하는지 또 자기네들이 은혜가 어느 강사는 제일 은혜가 되고 은혜 순서를 기록해라. 이래 그렇게 해 가지고 무기명으로 투표를 해서 가져 오라 했는데 안 낸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그거 다 내라 해라’ 다 내 가지고서 왔는데 그거 스물 두 명입니까? 녜, 스물 두 장이 나왔읍디다.

스물 두 장이 나왔는데, 그것을 보고서 제가 좀 마음에 기뻤습니다. 왜 기뻤느냐 하면은 거게 말한 것이 허투른 말 하지 안하고 다 진실된 그 소감을 기록했고 또 그들이 알고 벌소리를 하지 안하고서 바로 알고 기록해 냈기 때문에 고게 대해서 소망이 생겼습니다.

고대로 지금 이 강사들과 교수들에게 보이면 이 글씨를 보고 누가 썼다 누가 썼다 하는 고걸 알 것이기 때문에 고거 나만 알고 고걸 복사를 해 가지고서, 지금 낸 원본은 없애 버리고 복사 낸 고것을 한데 편집 해 가지고서 고것을 이 교수들마다 한 벌씩 줄 생각입니다.

강사들일랑 줘서, ‘이들이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이 교수님들과 강사님들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가 욕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비판하는 것이 정평이요 정가가 아니냐? 이러니까 이 면에 대해서 좀 힘을 써라.’ 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베껴 줄라고 생각합니다.

이런데, 왜? 가르치면, 배울 때에 ‘기분 좋은 거’ 하는데 기분 좋은 게 소용 없어. 여러분들 기분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실은 성경에 말하기를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 했어. 감정 없는 사람들이 되라 했어. 감정 없는 사람들이 되라. 인정없는 사람들이 되라. 동정 또, 성경에 동정을 말했지만 동정 없는 사람들이 되라.

이거 과거에 옛사람적인 그런 것은 다 죽여 버리라 말이오. 죽여 버리고 완전히, 악령과 악령의 감동으로 악성된 모든 인간의 감정 정서, 또 그것으로 말미암아, 악성으로 말미암아 생겨진 거 그런 건 다 없애 버리고 이제는 예수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로 새로운 감정이 돼야 되겠고 새로운 정서가 돼야 되겠고 새로운 동정이 돼야 되겠고 새로운 욕심이 돼야 되겠고, 완전히 옛날 것은 없어지고 새로 창조함을 받은, 새 피조물 새로운 피조물이라야 된다 그말입니다. 이렇게 바꿔져야 됩니다. 새 창조물, 새로 지은 새로운 피조물이 돼야 된다는 그 말씀이 성경 어데 있습니까? 고린도후서 5장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래 알아도 되고 저래 알아도 된다 그걸 죽여야 됩니다.

바로 모르면 내가 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로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문제인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 말 들으니까 자기가 거게서 배우는 것이 마음에 고민스럽고 번민스러웠는데 어떤 교회 가서 보니까 가르치는 것이 옳기 때문에 당장에 신학을 옮겼다, 교회를 옮겼다, 또 자기가 진영을 옮겼다 그런 사람들이 다른 거는 양보하지마는서도 옳고 그른 데 대해서, 옳고 그른 데 대해서는 이 영원한 생사 문제이기 때문에 이거 뭐 인간 체면을 볼 것이 아니고 위신을 볼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옳은 것인 줄 알면 그 옳은 것을 찬성하고 거게 속하고 그리, 거게 속하고 그 한편이 되어져야 되지 옳은 것인 줄 알면서 자기와 대립을 하는 그것이 성령 훼방죄입니다. 성령 훼방죄는 옳은 것을 옳은 줄 알고 반대하는 것이 성령 훼방죄요. 옳은 것을 옳은 줄 알고 거게 딿지 않는 것이 그것이 성령 훼방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뭐 눈에 보이는 교회는 이리저리 안 옮기고 또 교파는 옮기지 안한다 할지라도 지식은 빨리 옮겨야 됩니다. 만일 옳고 틀린 게 있으면은 틀린 건 다 집어 던져 버리고 옳은 걸로 속해 가지고서 어느 교회 가서도 옳은 걸 속한 그 사람의 저서가 있으면은 저서를 보든지 가서 배우든지 해 가지고서 ‘옳은 것이 내 육의 생명을 지금 옳은 데로 바칠터이니까 내 육의 생명을 어떻게 지금 사용하고 가야 되겠느냐? 내 전신 전체를 내 일생을 어떻게 사용하고 가야 되겠느냐?’ 그 사용하는 방편을 바로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알면 바로 사용할 수 있지만 바로 모르면 잘못 사용하게 되니까 우리 영만 살아 있지 몸과 마음과 이 모든 소유는 다 죽이는 것이라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바로 아느냐 모르느냐 여게 대해서 이렇게 중대한 가치성을 둬야 될 터인데 이까짓 거 뭐 예사롭게, 금방 돈 아마 천만 원이 손해간다 하면 눈이 휘뜩해 이거 뭐 좀 정신을 차릴 건데 삐뚤어진 그 지식을 속에 넣어 놓으면 그놈이 들어서, 지금은 삐뚤어진 줄 알지마는서도, 삐뚤어진 지식이 내 속에 들어 있으면 환난을 딱 당해 죽느냐 사느냐 할 때는 삐뚤어진 지식 그놈을, 그놈이라도 안 것은 ‘이것도 다른 사람이 이래 가르치던데 뭐. 학자들이 다 이렇게 하는데 하는데 꼭 요거 고집할 게 뭐 있으냐? 이 쉬운 길 가지.’ 그런 두 가지 깨달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절대 승리는 못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도 그렇고 뭐 다른 구미 저런 데는 벌써 그게 박해가 달라졌어요. 여기 한국과 달라요. 그런 데는 여게 뭐 6 5 때에나 여기 모두 왜정 말년 때에 신사 참배 때 어려움 받은 거 그것을 책에 기록해 놓은 것을 보고서 저 구미에서 읽어 보고 ‘지금 이런 사람이 있느냐? 그 사람 한번 보기를 원한다.’ 보기를 원해 가지고서 그 사람 보기를 원하고 하도 보내면서 그 사람 한번 보여 줬으면 좋겠다고서 그 나라에서 원해 쌓아서 그때 ○○○ 목사님이 거게를 갔습니다. ○○○목사님 전기를 보고 그들이 참 실물이 있느냐? 실물 보겠다고 해 가지고서 가 가지고 거기에서 돈을 많이 얻어 가지고 왔습니다.

이랬는데 실은 ○○○ 목사님의 전기로 비교도 할 수 없는 그런 신앙 걸음을 걸은 사람들이 또 많이 있습니다. 최 덕지 선생 그런 이 고난으로 말하면 그런 이는 뭐, 동방 요배 안 할라 함으로써 고랑을 나올 때까지 끌러 놓지 못하고 나왔습니다. 고랑을 채워 놓으니까 여름에는 여기 구더기가 여게 버글버글해 가지고 구더기가 벅실벅실해 가지고 자꾸 파 먹고 이라지마는서도 이 매어 놓으니까 그 한번 그래도 이렇게 한번 꺾지도 못한다 말이오. 딱 요래 매어 놔 가지고. 그래 가지고 있다가서 나왔고 동방 요배 한 사람들은 거기서 뭐 그래도 먹고 마시고 이라고 지내다가서 나왔습니다.

주를 위해서 고난 받은 것이 그 차이가 얼마나 차이 있습니까? 그런 것은 기록돼 가지고 가지를 안했습니다. 그런 걸 기록돼 갔으면 뭐 또 그거 보고 이거와 비교하면은 이거는 아무것도 아니로구나? 그 최 덕지 선생을 뭐 청하고 굉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숨겨 놔서 거게 대해서 뉘가 저서를 써 가지고 글을 써 가지고 다른 데에 이렇게 선포하지 안하니까 모른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참 위대한 것은 시대가 모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은밀히 일하신다 그렇게 말합니다.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바로 알고 바로 모르는 것은 이렇게 내 생명보다 귀중하다는 것을 이렇게 평가를 두고서 여러분들이 배워야 되고 연구해야 됩니다.

아무나따나, 설교하는 사람이 일시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기 위해서, 그저 그 사람들의 인기만 끌어서 사람들이 좋아하도록, 그 사람들에게 환영하고 인기 끌기 위해서, 심판도 생각지 안하고 설교하고 부흥회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그 사람은 하나님 심판을 모르는 사람이오. 하나님의 심판을 모르는 사람이 그 사람이 무슨 가는 길이 바른 길을 갈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양성원 학생 여러분들도, 스승된 자는 받을 심판이 크다고, 목회자가 됨으로 말미암아 심판이 더 클 수 있고 상급이 더 클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웅변 안 써도 좋소. 바로 알고 바로 안 것을 말해 주십시오. 바로 안 걸 말해 주고, 자꾸 말 구경시키지 마. 바로 안 걸 말했으면 또 한번 말해서 안 하면 또 하고 평생 바른 것을 하지 안할 때는 그것만 자꾸 하라고 해도 하나님이 책망하지를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설교는 두 번 해서 안 된다. 한 번만 하고 지나가야 한다.’그러면 그 사람이 실행을 시킬라 하는 사람이요 또 그 사람이 무슨 말 구경을 시킬라 하는 사람이요? 말 구경을 시킬라 하는 사람이라. 그러기 때문에 그래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들 양성원 학생들은 따져서 ‘요게 바르냐?’ 어떤 데 보니까 그렇게 말해 놓은 거 있어. ‘교의학에서 가르치는데 백 목사님이 가르치는 그 교의와ㅡ교의라 말은 교리라 말입니다, 교리. 교리라 말인데ㅡ그 교리와 일치되지 안한 것이 더러 있고 또 그 교리를 일반 교리에다가 그 교리를 넣어 가지고 그 교리를 넣어서 그 교리를 세워 가지고 이래 했으면 좋겠는데 그뭐 이거나 저거나 동등으로 이래 보고 그 교리를 하지 안하고 그 옛날에 있는 교리대로만 말하니까 아무런 생명 역사가 적다.’ 그렇게 말하는 고런 사람은 조금 깨달음이 있는 거 같애요.

그래 가지고, 보다 보다, 요거보다 요게 낫다, 요거보다 요게 낫다, 요거보다 요게 낫다, 요거는 완전이다, 요거보다는 없다, 요것이 바로 옳다 고것이 뭐이지요? 고게 뭐입니까? 진실입니까 거룩입니까? 고게 거룩이오. 고거는 거룩이라 말입니다. 고거는 거룩이오.

진실은 벌써 선별 과정은 떼어 버렸고 완전히 진실된 고 자체만 말할 때에 진실되다, 거룩하고 진실되다. 거룩이 진실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 좀 나와서 알아야 되지 모르면 안 됩니다.

오늘 아침에도 자꾸 이거, 이거, 아주 중요한 것을 여러분들이 배워서 이 지식의 상식을 넓혀서 이 세상 외에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다 가르치는 거기에 조금 거리 먼 그런 것을 지금 말하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들으면 그 속에서 역사해 가지고 구원을 이루어 갑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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