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8 00:01
● 이인재의 유년시절과 학문의 길 (2)
1. 그의 출생
일제 말엽(1940년 5월 13일)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투쟁하다가 검속 되어 평양형무소에서 5년 4개월 동안 옥고(獄苦)를 치루고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출옥(出獄)하게된(8월 17일 출옥) 이인재 목사.
그는 조선(朝鮮)이 국권(國權)을 잃어가던 1906년 1월 4일, 경남 밀양군 상남면 마산리 779번지에서 출생하였다. 이씨(李氏) 문중의 6남 4녀 중 아들로는 맏이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경주 최씨이며 현처효부(賢妻孝婦)로 동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모범 여성이었다. 인재(仁宰)를 잉태할 때 어머니는 하늘에서 용마(龍馬)가 내려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첫 아들이기도 하지만 그런 연고도 있고 하여 어머니는 아들에 대해 관심이 지극하였다. 필시 하늘의 뜻이 있을 것으로 여겼던 것이었다. 인재는 유독 할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할아버지는 인재를 늘 가까이 하였다.
2. 조부의 이야기
인재가 말을 하고 자신의 의사를 표시할 때쯤 할아버지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민담(民譚)을 들려주신 것이 아니라 역사(歷史)를 이야기하셨다. 그 역사란 집안 이야기였다. 자신의 조상들의 이야기였다.
할아버지는 한 학자로서 동네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분이셨다. 마을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접장님이라고 불렀다. 이접장(接長)님, 이 접장님! 하고 마을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우대하였다.
할아버지는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 박식(博識)하였다. 할아버지는 인재를 향하여 자주 이런 말을 하였다. 인재야, 너는 효령대군의 손자이니라. 그러니 다른 아이들과는 신분이 다르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은 태종대왕(太宗大王)의 둘째 아들로 세종대왕의 형이며 양녕대군의 아우가 되는 분이었다. 그 효령대군의 후손 가운데 한 분이 뒷날 경남 밀양으로 낙향하여 살았는데 그분은 나라에서 낙주제란 칭호를 받은분이라 하였다. 그 분의 자손들이 밀양을 중심하여 김해 등지로 이주하며 살았다. 그리하여 지금의 밀양과 김해 등지에 그 후손들이 늘어나 이씨(李氏) 성이 많아진 것이었다. 지금도 낙주제의 무덤이 김해군 상동면에 있어 해마다 그 후손들이 한차례 모여 묘사(墓祀)를 지낸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인재에게 가문(家門)의 긍지를 심어 주었다. 인재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면
서 자신은 왕족의 후예라는 자부심을 갖고 자라나게 되었다.
3. 한문공부
인재가 다섯 살이 될 무렵부터 할아버지는 집에서 한문 공부를 시켰다. 천자문(千字文)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도덕군자인 할아버지로 통하여 인재는 한자 뿐 아니라 인간수업을 받았다. 천자문을 다 배우고는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배웠다. 동몽선습이란 조선 중종때 학자 박세무(朴世茂)가 엮은 책으로 《천자문》을 익히고 난 후의 학동들이 배우는 초급교재였다.
먼저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오륜(五倫)이 나와 있고, 이어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부터 명나라까지의 역대사실(歷代史實)과 한국의 단군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역사를 간단히 요약한 책이었다.
인재는 할아버지를 통해서 서당에 가기 전 어린 시절에 이것을 배웠다. 머리가 총명하여 어린 나이인데도 잘 이해하고 암기하였다. 7살 때 사칙통편(四則通編)을 통달(通達)하였다. 사칙통편이란 수학에 관한것으로 더하기와 빼기 곱하기 나누기의 셈하는 법칙을 말한다.
4. 서당시절
1914년 봄. 인재는서당에 들어갔다. 서당이름은 죽림제(竹林薺)였다. 여기에서 더욱 체계적인 한문교육을 받았다. 중국 역사책인 통감(痛鑑)을 1권에서부터 7권까지 모두 통달하였다. 대학, 중용, 논어를 막힘이 없이 다 익혔다. 그러나 이때는 일제가 들어선 때이고 나라는 일제가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공부를 하였지만 그 학문이 소용이 없었다. 일제가 들어서지 않았다면 과거에 나갈 수도 있었고 급제가 되면 진사가 되고 벼슬길이 열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시국(時局)이 달라졌기 때문에 한문공부만으로는 별 쓰일 곳이 없었다. 청운(靑雲)의 꿈이 무산되고 실의에 빠지게 되었다.
5. 신학문의 길
이인재는 좋지 못한 시대에 태어났기에 어려서 많은 학문을 접하였지만 출세의 길을 얻지 못하였다. 책을 손에서 놓고 가사를 도우며 이리저리 방황하였다. 그러던 중 신학문을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마침 이웃 면소재지에 공립 보통학교가 서게 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6년제 소학교였다.1922년 3월. 그 소학교를 찾아가 입학원서를 내었다. 하지만 입학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연령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당시 인재의 나이는 16세였다. 8세에 1학년에 입학이 되는데 16세니 입학이 될 리 없었다. 인재는 여러 차례 교장을 찾아가 입학을 허락해 달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일본사람인 교장은 원리원칙만 따졌다. 그러니 보통소학교 입학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사람인 교장을 대하면서 너무나 조선 사람을 멸시하고 천시하는 것을 실감하였다.
1923년, 기산에 시립강습소가 생겼다. 6년 학제였다. 이곳에는 나이를 상관하지 않았다. 인재는 입학을 하였다. 수업을 하다 보니 너무 쉬워서 노는 것 같았다. 다 아는 것이었고 너무나 수준 이하였다. 월반제도가 있어서 응하였다. 월반에 월반을 해서 그는 6년 과정을 1년 6개월 만에 마쳐 졸업을 하였다. 이것은 그가 이미 배운 여러 가지 학문이 그를 월반하게 하였겠지만 그보다는 그의 머리가 명석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집에서 강습소까지의 거리는 십오리 길이었다. 1년 6개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도보로 다니며 졸업을 하였다. 진학을 해야 하겠다고 다짐하고 중학교 응시를 위한 검정고시를 치루었다. 합격이 되었다. 밀양고등농잠 중학교에 입학을 하였다(제1회생, 1924년 5월 6일 개교).
밀양은 그의 집이 있는 마산리에서 삼십리가 되었다. 세 시간이 소요되는 먼 길을 걸어서 통학을 하였다. 왕복 60리길은 결코 가까운 길이 아니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백성들은 찌든 가난으로 배불리 밥을 먹는 것은 물론 끼니를 이어가기 힘든 상황이므로 인재 역시 배고픈 가운데 학교를 오가야했다. 그러나 갈 때는 괜찮은데 올 때는 길에 쓰러져 아사(餓死)직전까지 가게 되었고 길손의 도움으로 구사일생한 것이 몇 번이나 되었다. 1926년 이인재는 농잠학교를 졸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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