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참배 강요와 남북교회의 가교 역할 (7)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 가운데 어떤 분은 신사(神社)는 일본의 종교인데 왜 기독교 신앙의 잣대로 한 시대적 상황이었던 신사참배를 문제시하며 지역신문에서 굳이 이것을 다루느냐고 의아해 하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논()하는 신사참배와 그것에 반대하는 이인재, 그리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우리 민족 운명에 관한 문제였다. 당시 우리 조선은 국권(國權)을 잃은 상태였고 신사라는 우상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기독교 교리에 반()하는 것뿐 만 아니라 국권의 회복은커녕 영원한 국권단절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목숨을 걸고서라도 신사참배로 대표되는 태양신 숭배에 반기(反旗)를 들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태양신과 맞서 싸웠던 한 용기 있는 신앙인을 향해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선지자선교회

1.일제하에서의 신사참배 강요와 저항

한국은 거듭된 일제의 침략을 받아 오다 1905'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고 1910년에는 '한일합방'이라는 강압에 의해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한국을 강점한 후 무단통치를 단행하였고 경찰과 헌병대를 일원화한 '헌병 경찰제도'를 만들어 조선인을 혹독하게 통치하였다. 1910년에는 '범죄 즉결법'이라는 무서운 법을 제정하여 한국인의 집회, 결사,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고 교육의 기회를 제한하였다. 그리고는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한국사 연구의 일환으로 조선반도사를 편찬. 식민사관(植民史觀)을 정립하였고, 조선통치를 이념적으로 합리화하려고 시도하였다. 후일에는 한국어의 사용 금지는 물론 한국인 고유의 성()마저 쓸 수 없도록 강요하는 소위 창씨개명을 강요함으로 조선은 일대 수난(受難)을 맞게 되었다.

 

일제 통치 기간 많은 한국인이 전쟁터로, 탄광촌으로 징발(徵發)되어 자유와 인권이 유린된 채 이국(異國)의 하늘에서 죽어갔고 초등학생에 지나지 않은 12살 아이에서 50대 여인에 이르기까지 수십만의 부녀자들이 정신대란 이름으로 전장에 끌려갔다.

 

이 기간의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심각한 것이었다. 일제의 조선통치와 기독교 정책은 일관되게 '분할을 통한 다스림'(Devide and Control)이었다. 특히 1925년 이래로 신사(神社)를 건립하고 1935년 이후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는데 이것은 한국인 특히 한국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일대 탄압과 수난의 역사를 엮어 갔다. 신사참배 강요는 1935년 평양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를 분열, 무력화시키고 식민 통치 방해가 되는 기독교를 탄압할 목적으로 시행된 일제의 정책이었다. 1937년으로 접어들자 시국은 더욱 암울해지기 시작하였다. 7월에는 중. 일 전쟁이 발발하였고, 96일이 애국일로 정해지면서 일본국기 게양, 동방요배가 신사 참배와 함께 요구되었다. 그해 10월에는 황국신민서사가 제정되어 모든 모임에서 암송토록 요구되었다. 그리고 '일면일신사(一面一神社)'정책을 수립하여 곳곳에 신사를 세웠다.

 

이와 같은 일제의 정책에 대하여 한국교회는 처음에는 강하게 저항하였으나 탄압과 회유에 못이겨 다수의 교계 지도자들이 마지못해 친일적 배교의 길을 갔다. 그러나 주기철, 고흥봉, 이기선, 이인재, 한상동, 주남선, 최덕지, 조수옥 등은 신사참배에 끝까지 반대하고 저항하였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천주교(1936. 5. 25), 감리교(1938. 9)는 이에 굴복하였고. 당시 대표적인 교단이었던 장로교도 19389, 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종교적인 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 라고 하며 이를 가결하는 큰 수치를 범하게 되었다.

 

1938년 총회가 일제의 압력에 의해 불법적으로 신사참배를 가결함과 동시에 전국 곳곳에서는 이에 맞서는 신사 참배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신사불참배운동'이라고 불리는 이 운동은 생활의 순결과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고된 싸움이었다. 그러던, 1940, 이일을 묵과할리 없는 일제의 검거령에 의해 신사참배반대운동가들은 투옥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투옥된 신자는 약 2,000여명으로 추산되는데 그중 50명 정도는 옥사(獄死)했고 해방 후 30여명이 출옥(出獄)하였다. 이때 출옥한 인사가 고흥봉, 김린희, 김형락, 김화준, 박신근, 방계성, 서정환, 손명복, 안이숙, 양대륙, 오윤선, 이광록, 이기선, 이인재, 이현속, 장두희, 조수옥, 주남선, 최덕지, 채정민, 한상동 등이었다.

 

2. 지하 신학교의 개강

19399. 밀양 마산교회를 한상동 목사에게 맡기고 가족들과 함께 평양으로 갔던 이인재 전도사는 시국이 점점 더 험악해지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신자들을 규합하는 일에 우선하였다. 이미 교회들도 일제의 조종 하에 들어간 상태였기 때문에 지하 가정교회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 중단한 신학공부도 계속해야 했기에 김지성이란 친구와 함께 권세열 선교사를 찾아갔다. 평양신학교가 폐교되고 교수들은 더러 미국으로 떠난 상태였다. 그러나 아직 남은 교수들이 몇몇 있었다(구례인 박사(J. C. Crane), 함일돈 교수(Rev. F. Hamilton) ). 이인재 전도사는 권세열 선교사(F. Kinsler, 1904~1992,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하고 192810월 내한하여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사역, 19329월 불우 청소년 6명을 발견하고 평양 광문서림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1938년에는 13개의 성경구락부에서 5천여명의 학생들을 가르침. 이 일로 인해 일본 경찰로부터 사회주의 운동가라는 의심까지 받게 됨.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면서 일본 경찰에 의해 추방명령을 받고 1940, 미국 플로리다로 귀향하게 됨. 해방 후 1949년에 대시 내한(來韓)하여 성경구락부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고 1965, 대통령으로부터 교육문화공로 훈장을 받게 됨)에게 말하였다.

신학교를 개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학생들이 모여 계속 공부할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권세열 선교사는 한참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합니다. 지금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학교를 하자면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교수가 있고 학생이 있으면 어디서든지 가능합니다.

이렇게 해서 지하신학교가 개강되었다. 학생은 10명이 넘었다. 그러나 이 신학교도 오래가지 못하였다. 끈질긴 고등계 형사들의 추적과 방해 때문이었다.

 

3. 평북 선천에서

김인희 전도사에게서 편지가 왔다.

이 전도사님 한 번 다녀가십시오. 평북 선천은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입니다.

이인재 전도사는 평북 선천으로 김인희 전도사를 찾아갔다. 그때가 193911월이었다.

 

김인희 전도사집으로 갔더니 박신근 집사가 와 있었다. 박신근 집사는 김인희 전도사보다 한 살 아래로서 농사를 업()으로 하고 있었다. 철산에서 용산교회를 출석하며 집사로 봉사하였는데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앞장서게 되자 이일로 인해 교회에서 집사직을 면직 당하게 되었고 교회 출석까지 불가능해지게 되자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며 신앙을 지켜온 사람이었다. 뒷날 평양 형무소까지 가게 되고 6년간 옥중 투쟁을 하다가 해방과 함께 출옥하게 된 투철한 신앙인이었다.

 

세 사람은 더욱 결심을 굳히고 합심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다음날 선천을 떠나올 때 김인희 전도사는 이인재 전도사에게 돈 4백원을 건네주었다.

이 전도사. 이 돈을 신사참배 반대운동 하는데 사용하십시오. 경남에 가서 한상동 목사를 만나거든 이쪽 사정을 이야기하고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십시오. 우리도 경남의 동지를 위하여 기도하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이인재 전도사는 작별 인사를 하고 선천을 떠나면서 앞으로 얼마나 자유롭게 다닐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더욱 힘을 기울여야겠다고 결심하였다.

 

4. 경남으로

평양으로 다시 돌아온 이인재 전도사는 부산으로 내려가기로 마음을 정하고 19391228, 평양역에서 부산행 기차를 탄다. 먼저 삼랑진역에서 내려 밀양 마산리로 갔다. 한상동 목사(밀양마산교회 제9대 담임목사, 1939년 부임. 시무 중 194073, 신사참배 반대운동 주동자 체포됨)를 만난 것은 1229일 오후였다.

밀양 마산교회도 평안한 안식처는 못되었다. 수시로 고등계 형사가 찾아와 괴롭힌다는 것이었다.

 

이인재 전도사는 평북지방 성도들의 신앙생활 모습을 소상히 설명하였다. 교회들은 이미 신사참배의 시험에 빠졌기 때문에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불참하기로 작정한 교인들은 자신의 가정에서 예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였다. 그리고 활발히 산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5개항의 표준을 세워서 그것에 따르고 있다는 소식 또한 전달하였다.

1) 신사참배를 긍정하는 노회원을 노회 내의 각종 부서에 참석시키지 못하게 하고 각 교회로 하여금 노회 부담금을 내지 못하게 한다.

 

2) 신사참배 불참자들로 새로운 노회를 조직한다.

 

3) 신사참배를 긍정하는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는다.

 

4) 신사참배 불참배 동지들의 상호협조를 도모한다.

 

5) 가정예배 또는 가정 기도회를 개최하여 일인 면담, 개인전도 등을 수단으로 신사불참배 성도들이 앞장서서 신사참배 교인들을 설득한다.

이상의 내용을 전하고 이인재 전도사는 한상동 목사에게 돈 2백원을 전하였다.

 

저녁무렵 한상동 목사와 함께 이인재 전도사는 이웃에 있는 밀양 상남면의 예림교회에 윤술용 목사(밀양마산교회 제7대 담임 교역자, 1935~1938년 시무)를 찾아갔다. 한상동 목사가 윤술용 목사에게 말하였다.

여기서 이야기하기 곤란하니 부산으로 내려갑시다.

 

한상동 목사, 윤술용 목사, 이인재 전도사 세 사람은 이날 저녁 부산 동래로 갔다. 동래 온천에 있는 화성여관에 들어갔다. 이날 밤 세 사람은 밤이 기울도록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위한 계획을 세웠다.

다음 날인 1230, 날씨가 몹시 추웠다. 셋은 부산 초읍리에 있는 조수옥 전도사 집을 찾아갔다. 그 곳에는 백영옥 전도사도 있었다.

함께 예배를 드렸다. 이날 한상동 목사는 가정예배를 인도하면서 이렇게 권면하였다.

지금 당국에서는 기독교인들에게 신사참배를 하면서 마음대로 예배하고 종교생활을 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일입니다. 신사참배는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아주 악한 일입니다. 신사참배를 시행하는 교회는 마치 무너져 가는 건물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들은 여하한 고난에 당면하더라도 죽음을 각오하고 바른 진리를 위한 활동해 나가야 합니다. 두 분 전도사님은 여성들이지만 이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협력을 다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날 이후 이들은 순회를 다니며 만나는 교인들에게 신사참배 불참을 이야기하였고 밀양지방과 동래지방을 순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