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8 20:04
제 2 장 풍랑이 불기 시작하던 그 때
조수옥: 1935년이 되면서부터 교회도 신사참배를 강요받기 시작한 것이죠. 제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때였는데. 일본총독부는 조선인의 정신을 말살시킴으로써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는데는 신사참배가 가장 효과적인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지요.
그러나 어떠했습니까? 일본의 항복과 관계없이 한국에 세워진 신사는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신사참배를 행했던 조선인들도 신사를 보존하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진심으로 신사참배를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신사에 의한 동화정책은 한국인들이 싫어하는 것을 통해서 이들의 공순을 실험한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총독부의 강압에 대한 반감만 커졌을 뿐 완전한 실패였습니다. 일본이 조선에 만들어 놓은 것 가운데 남아 있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신사는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와타나베: 사실, 일본에서도 만주사변이 시작하면서부터 신사참배가 점차 강제화되었습니다. 문제는 한국인들에게는 절대로 일상화되어질 수 없었던 이 신사참배가 일본국민들에게는 일상화되어져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정부의 태도에 대한 반감은 있었지만 표면적인 반항은 하지 못하고 내면적으로 희석되고 말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항의식마저도 일시적인 것이 되어 결국은 자신을 ‘황국신민’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한국에서는 선교사가 그리스도교적 학교정신을 수호하기 위하여 흔들리지 않는 아주 단호한 자세를 취했다는 것, 그리고 일본 정부에 대하여 자신들의 신앙을 지킨 국민들에 대한 지지가 있었다는 것도 일본의 사정과는 다른 요소입니다. 일본내륙에서, 일본의 군국주의에 명확하게 반대하였던 선교사는 아주 적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들의 발언권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패전 직후 일본에도 신사참배가 상당히 약화되었지만, 신사 자체를 파괴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신사에 절하기를 싫어하긴 했지만 그렇게 강요당한 일본인들도 신사에 대하여 깊은 증오심을 갖지는 않았다는 것이죠. 신사는 그 후에 다시 인기를 회복했습니다. 관습이기 때문에 위험한 요소는 없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위험이 수반되죠. 이전엔 ‘신사참배는 국가의례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탄압하는 것이 될 수 없다’라고 말했던 것과 결국은 동일한 위험한 논리인 것입니다.
일본 교회 내에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반성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1960년 이후의 야스꾸니 투쟁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일본이 지난날의 일본 제국주의와 같은 나라로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사실에 통감하면서, 내적으로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야스쿠니적인 요소들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일본교회가 한국 교회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배워야 한다며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수옥: 아니오. 그렇게 쉽게 신사참배가 시작될 수는 없지요. 경찰이 위협을 가해 오기 시작했고, 그해 10월이 되면서 삼천포에 있는 세 개의 교파 교회에 공문이 왔습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경찰서로 집합하라는 명령이었죠. 성결교와 안식일 재림교회 그리고 장로교회였지요. 그래서 우리는 모두 경찰서 유도장에 모였습니다. 그 때 경찰서장이 말하기를 “오늘 당신들은 신사참배 하러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자는 국가에 대하여 반역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경찰서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곧이어 우리들은 신사를 향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오 성령이시니라(막 13:11).’ 이 말씀 그대로라고 믿습니다.
제 경우를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신사참배강요에 대한 소용돌이가 점점 악화되어, 숨이 막힐 정도로 거세어져 갔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저는 제 자신에게 묻기 시작했죠. ‘나는 정말로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온갖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을까?’ 사실 자신이 없었습니다. 정말로 힘들었습니다. 여태껏 일본정부에 반대되는 것을 피하여 온 저였습니다. 더럭 겁이 났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지금도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신앙체험을 한 적도 없었던 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더 겁이 났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한번 결혼에 실패하여 여자로서는 죽었다고 생각하여 이번에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의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했지만, 고문이나 학살 등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 할머니와 40대의 집사님 한 분, 그리고 전 새벽에 산에 올랐습니다. 토요일에 내려올 것으로 작정하고 침구 등을 챙겨서 떠났습니다. 할머니는 중간쯤에서 다른 곳으로 가시고, 저와 집사님은 산 정상까지 올라갔습니다. 산 위에는 덩치 큰 까만 바위만 있을 뿐 바람막이가 될 만한 바위는 물론, 몸을 기댈만한 나무조차 없었습니다. 움직일만한 여유조차 없었기 때문에 저는 일단 바위 위에 앉았습니다.
밤이 자꾸 깊어 갔습니다. 칠흑 같은 흑암은 저에게 공포로 다가왔습니다. 바람이 차가워지면서 몸은 다시 소름이 끼쳐왔습니다. 벌레소리가 음산하게 들려오면서 얼굴주위를 맴돌았습니다. 마침 초승달이 떠 있었습니다. 달이 구름과 함께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쪽의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이 산짐승들처럼 포효하며 내게 덤벼 오는 것 같았고 사방의 어둠은 몸서리치는 공포로 나를 에워싸 무서운 냉기가 감돌았습니다. ‘주여, 주여’ 목이 터져라 외치며 주를 불러봤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아직 하나님을 내 마음에 모시지 못한 내 모습은 이렇게 초라했습니다. 나는 완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보는 모든 것과 들려오는 모든 것들이 걷잡을 수 없도록 나를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끌고 들어가 전신이 마비되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라는 성경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 말씀이 저에게 주어진 것이죠. 이 말씀을 마음에 생각하게 됐다는 말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저에게 주어진 이 말씀에 이제 다시금 의지하여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곧 “하나님, 나의 이름을 불러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이상, 저에게 용기와 힘을 주셔서 이러한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소서”라고 절실히 기도하였습니다.
다음날 밤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호랑이 바위도 곰 바위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보이는 것 모두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은사를 주실 것이라는 확신에 가득 차서 저는 토요일에 산을 내려왔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제 마음은 평안해졌습니다. 신사에 가지 않고 혼자 경찰서에서 교회로 돌아오는 길도 예전만큼 두렵지 않았습니다.
조수옥: 아니나 다를까 그 다음날, 경찰서에서 호출이 있었습니다. 경찰서장은 자신의 방으로 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아주 격하고 엄한 목소리로 “너는 왜 신사에 가지 않았지?”라고 심문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그곳에 가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지요. 서장은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지 묵묵히 있다가 “장로교회 총회에서 신사참배에 대하여 가결했고, 각 교회는 그 결정에 따라서 참배해야만 하는데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것은 정당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 너 같은 자에게 하나 하나 설명할 여유가 없다. 나의 관할구역에서 떠나라!”라고 말했습니다. 삼천포에서의 추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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