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교회의 현황과 선교과제

2007.05.16 11:47

선지자 조회 수: 추천:

이름 : 중선     번호 : 24
선지자선교회 게시일 : 2006/02/05 (일) PM 05:53:53     조회 : 102  

■ 아랍교회의 현황과 선교과제 - 공일주

I. 머리말


아랍교회라고하면 우리는 아랍어 사용자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교회들을 일컫는다. 이런 아랍교회가 이슬람국가에서 공식으로 허락된 나라는 요르단,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이집트, 수단, 팔레스타인 등의 아랍교회이다. 물론 아랍교회는 아랍인들이 목회자로 세움을 받 고 있는 교회들이다. 여기서 아랍교회라 함은 전통교회(가톨릭과 정교회)와 복음주의 교회를 둘다 포함한다.

그러므로 복음주의 교회에서 교역자로 활동할 목회자 양성을 위해 중동에는 신학교들이 있는데 요르단, 레바논, 이집트, 수단, 팔레스타인에 있다. 본고는 이런 아랍교회의 현황과 아랍 신학교 현황을 살펴보고 한국교회가 중동선교에서 지향해야할 방향을 짚어 보고자 한다.

II. 전통교회와 복음주의 교회


아랍 복음주의 교회는 기존의 아랍 정교회와 가톨릭 속으로 들어가 사역하는 것이 이슬람 속으로 들어가 사역하는 것보다 더많은 열매를 보여주고 있다. 2년여전에 현지 교회 목사와 그가 이끌고 있던 가정모임을 확대하여 교회건물을 임대하였다. 한달에 100디나르 정도인데 집주인은 정교회 사람이었다. 대체로 중동에서 교회 건물로 쓰게 하는 것은 역시 기존의 기독교인들이다. 무슬림이 교회를 열도록 건물을 내 주는 일은 흔하지 않다. 결국 기존의 정교회와 가톨릭의 사람들 중에서 거듭난 그리스도인과 같이 교회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모이는 사람들은 결국 기존의 정교회와 라틴교회, 혹은 가톨릭 교회의 교인들이 거듭나서 이 교회에 모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정교회와 가톨릭의 사람들이 이슬람 정부에 개신교를 고발하여 그 목회자를 소환하여 심문하는 경우가 있다. 오히려 이슬람 사람들보나 이런 경우에는 같은 기독교인들이 더욱 심하게 대적하는 것이다.


III. 복음주의 교회의 현황과 과제


1. 에큐메니칼과 에반젤리칼

2002년 10월 28일과 29일 요르단에서 중동 신학교육 협의회(MEATE) 모임을 가졌다. 이곳에 모인 신학관계자들은 주로 수단과 요르단, 레바논 등이고 이집트 복음주의 신학대와 레바논의 NEST는 이 협의회에 가입되어 있지 않다. 중동신학교육협의회에 속한 신학기관들은 요르단 신학연장 교육(PTEE)를 비롯하여 요르단복음주의 신학교, 수단의 성서학교 (장로교) 그리고 레바논의 침례신학대와 CAIT(기독교연합신학대) 그리고 이집트의 사도교회의 중동신학교 등이다. 결국 이들은 MECC 회원 신학대와 완전히 구별되어 일하고 있다.



중동에서 자주 듣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와 에반젤리칼(Evangelical)은 정교회 교인과 가톨릭 교인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레바논에서,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은 에큐메니칼 운동과 관련되어 특히 중동 교회협의회(MECC)에 가입된 교회 그래서 이들 교회 공동체가 에큐메니칼 운동과 깊이 관여된 공동체를 말하고, 레바논에서 에반젤리칼이란 말은 에큐메니칼 운동에 적대적인 태도를 견지하지만,복음 전파와 선교의 대위임에 헌신하는 공동체를 말한다. 전자는 레바논에서 19세기에 세워진 장로교회, 성공회, 아르메니아 복음주의 교회, 민족 복음주의 교회(시리아) 등을 가리키고, 후자는 20세기에 세워진 교회들로서, 침례교회, 하나님의 교회(Church of God), 형제 교회, 하나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 기독교 연합(얼라이언스 Alliance) 교회, 영적 아르메니아 형제교회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래서 광의적으로 에반젤리칼이라고 하면, 가끔은 초기 프로테스탄트와 에반젤리칼 교인을 다 포함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일단 프로테스탄트라고 하면 오로지 초기 프로테스탄트 교인들만 가리키고 에반젤리칼이라고 하면 후자만을 가리킨다. 그리고 침례교회, 하나님의 교회, 형제교회, 기독교 연합 교회들은 MECC가 지원하는 정책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복음주의 진영이 주장하는 것처럼 에큐메니칼 교회들이 복음과 선교의 책임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2.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요르단의 5개 교단의 신앙노선을 보면 침례교단과 복음주의자유 교단은 칼빈주의를, 나사렛 교단과 하나님의 성회는 알미니안(아르메니우스) 주의를 택하고, 기독교연합교단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가 섞여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다만 요르단 복음주의 교회들이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 것만 다를 뿐 칼빈주의를 따른다고 파와즈 목사는 강조한다. 요르단의 일부 복음주의 교회에서 그 교회가 속한 교단은 알미니안 교리를 따르는데 현지 아랍인 담임목사는 칼빈주의를 따르는 것도 교단의 색깔과 다르게 목회자의 색깔이 더욱 두드러지는 것이다. 같은 하나님의 성회교단에 속하여 있으면서도 방언을 강조하는 교회(방언을 성령세례의 증거로 보는 경우)와 방언을 강조하지 않는 목회자가 있어 서로간의 차이는 목회자의 신학적태도와 그가 받은 신앙의 영향에 기인하기도 한다.

아랍교회에서는 여성 장로, 여성 목회자, 여집사는 성경에 언급이 없으므로 그런 직분은 교회내 있을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성경을 너무 문자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요르단의 침례교단은 성경 해석을 너무 문자적으로 적용한 나머지 숨이 막힐 지경이다. 딤전 3:11절의 "여자들"을 교회 안의 여성으로 국한하고 "여집사"라는 말이 아니므로 절대로 교회 내에 여집사가 있어서는 안된다고 못박았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헬라어가 갖는 언어의 한계성을 파악하지 못한 해석이다. 바울 당시 헬라어는 집사에 해당하는 디아코노스라는 단어는 남성과 여성을 다 가리키는 단어이었다. 그래서 여성만을 가리키는 단어가 필요하였을 것이다. 칼빈주의라고 해서 모두 똑같이 성경해석을 하는 것이 아니다.


3. 전천년주의자와 세대주의자

무천년주의자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들이 성취되어왔다고 보지만, 전천년주의자들은 이런 약속들이 미래에 성취될 것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첫 번째 질문은 성취의 내용은 도대체 무엇인가가 등장한다. 두 번째 질문은 천년 그 자체가 무엇을 가리키는가하는 점이다. 전천년주의자들 간에도 천년기간 중 이스라엘의 역할 혹은 이방인이나 유대인 중 구속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에 대해 서로 의견이 다르다. 세 번째 질문은 이 두 개의 종말론에 대한 견해가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이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dispensational premillennialism)는 자주 친시온주의자(pro-Zionist)로 불리워질 정도로 이스라엘의 현 국가가 반드시 존재하여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루이스 하마다는 현대 국가로서의 이스라엘과 선택된 하나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을 구분한다. 그런데 유진 미럴(Eugene H. Merrill)은 하마다의 생각을 '매우 기대에 어긋나는 것'으로 치부하고 하마다가 아랍 이스라엘 관계의 복합성에 동정을 보낸 것으로 간주하였다. 유진은 덧붙여서 하마다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하신 지속적인 역할을 빠뜨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유진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의 약속들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아랍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를 원하는 이들 사람들 사이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마드 샤하다는 하마다를 유대 민족을 대항한 깊은 편견을 노출시킨 아랍인의 예라고 하였다. 이런 증오심은 유대인들에 대한 모든 아랍 기독교인들 사이에 일반적으로 널리 퍼져있다. 이런 감정은 성경을 읽을 때 영향을 끼치고, 그 결과 종말론적 견해에도 영향을 준다. 결국 양극단간에 다양한 요소들이 즉 신학적, 성경적 , 종교적 요인과 정치적 요인이 결합되어 있어 우리가 분별력있게 살펴 볼 수밖에 없다.


4. 신학교육과 교회개척

그렇다면 중동에서는 신학교육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가? 첫째 중동의 신학이 서구의 신학을 그대로 복사하고 있다. 신학과 목회는 서로 떼어 놓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오늘날 서구 교회가 처하고 있는 문제는 곧 중동의 교회와 신학교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아랍교회의 신학이 정립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서구의 복사판이 아닌 아랍 상황에 필요한 신학 교과 과정이 마련되어야 한다. 두 번째는 서로 다른 교단 배경에서 각기 소속된 교단에 맞는 신학교육을 강화할 수 있도록 세계의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중동은 파송된 서구 선교사의 교단 배경에 따라 한 나라의 교회가 여러 교단으로 분리되어 왔다.

이것은 앞으로 한국인 선교사들이 중동에서 어떻게 사역할 것인가에 대하여 새로운 시야를 주는 것이다. 우선 소속된 교단이 현지 아랍교회에 있을 경우 같은 교단 안에서 사역하는 것이 좋겠다. 만일 소속된 교단 신학교가 없을 경우 초교파 신학교에서 사역할 수도 있는데 현재 중동은 초교파 신학교라고 표명한 신학교마저도 설립자에 따라 해당 교단 신학만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교단 간의 차이는 에큐메니칼 교회와 에반젤리칼 교회 그리고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등 신학 노선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세 번째 중동에서 세대주의는 시온주의와 결부되고 있어서 아랍인들에게 적합하지 않다. 세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스라엘과 오늘의 이스라엘 간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성경에서의 이스라엘이 오늘의 이스라엘의 정치와 전혀 관계없다고 주장하지만 자주 무슬림신문에서는 이들을 친시온주의자라고 주장한다. 특히, 세대주의 전천년설은 오늘날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성전을 다시 짓고 그곳에서 양의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기 때문에 아랍 무슬림들은 이들을 친시온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아랍 팔레스타인과 싸우고 있는 오늘날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친시온주의자들이 미국의 정계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랍 무슬림들은 미 제국주의와 시온주의를 성토하고 있는 것이다. 아랍무슬림들은 언젠가는 이 성전자리를 포함하여 예루살렘 전부를 자신들이 해방시켜야 된다고 믿는 것이다.

네 번째 중동의 신학교육은 대체적으로 열악하다. 우선 아랍 신학자들이 충분히 양성되지 않아서 쉽게 아랍 목회자들이 색다른 신학에 물들어 가고 있다. 그것은 목회자들 스스로 신학을 튼튼히 받지 못했다는 것과 아랍 신학교에서 가르칠 만한 신학자들을 양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가령, 중동의 어느 신학교는 박사학위 소지자 3명과 아직 신학 석사 과정에 있는 학생이 신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 특히 수단의 신학교들은 자격을 갖춘 교수들이 태부족하다. 아랍 교회의 목회자들은 전반적으로 신학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했고 소속 교단 신학교에 신학석사과정이 없어서 타교단 신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속한 교단의 신학과 다른 타교단 신학교에서 만족스런 공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섯 번 째 영성과 인성을 겸비한 출중한 아랍청년들이 신학교에 몰리지 않고 대부분 중동 신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은 현지 목회자나 혹은 뚜렷한 비젼이 없는 학생들이 많다. 이것은 아랍 교회가 청년들을 전도하고 교회 리더로 육성하지 못한 데 기인한다. 여섯 번째 신학 관련 아랍 도서들이 너무 부족하다. 중동의 신학교 도서관에는 십분의 칠이 영문도서이고 나머지 십분의 삼이 아랍어로 되어 있다. 우선 아랍어 신학 용어들이 정립되어 있지 않고 가르치는 교수마다 다른 아랍어 용어를 쓰고 있어 여러 가지 혼란을 주고 있다. 더구나 영어로 된 신학관련 도서들이 아랍어로 번역되면서 번역사의 자질에 따라 원저자의 책이 잘못 번역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일곱 번 째 일부 아랍 신학교에서는 아랍 여성의 역할을 제한하는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여성도 남자와 동등하지만 가정과 교회에서 남자와 서로 다른 사역과 할 일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은 남성들을 가르쳐서도 안되고 남성들을 다스려서도 안된다고 하였다. (딤전 2장 12절-15절). 그러나 일부 아랍 여성들은 여성의 역할을 이와같이 제한하는 것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적용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반발한다. 여덟 번 째 중동의 신학교육은 신학의 학문적 수준이 아직도 대체로 빈약하다. 그것은 신학생들이 연구할 만한 아랍어 신학 서적이 부족하고 아랍인 자신들에 의해서 아랍 교회 역사와 신학을 연구한 논문들이 부족하다. 그 원인은 이러한 학술 논문을 쓸만한 신학도들을 잘 훈련하지 못한 것도 있고 자신들의 문화 유산에 대한 보존과 발전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다. 더구나 이런 학술 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표준 아랍어를 잘 해야 하는데 대부분 아랍 기독교인들은 표준 아랍어 실력이 월등히 낮다. 어느 아랍 신학교에는 표준아랍어(격식아랍어)를 제대로 하는 분이 한 두 사람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학문적인 결과를 상당히 높은 수준의 아랍어로 써낼 수 있는 신학도가 거의 없는 것이다.

표준아랍어는 아랍 무슬림들이 상당히 우세하게 잘하는데 이들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그들의 언어에 맞게 아랍 기독교인들도 표준 아랍어를 배워야 한다. 게다가 아랍 신학교 강의를 현지 방언으로 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아랍어 실력이 향상되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중동의 신학교는 대부분 이슬람에 관한 전문가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아랍 교회가 이슬람을 배타시 하면서 어려서부터 자녀들에게 이슬람을 배우지 않도록 권면하고 커서는 이슬람 사람들이 쓰는 표준 아랍어에 대한 실력이 부족하여 이슬람에 대한 책들을 읽어 내지 못한다. 더구나 아랍교회들은 이슬람 사회에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고, 아랍교인들은 무슬림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특히 아랍 교회와 신학교는 서구의 재정 후원에 기대고 있어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후원하는 기관의 요청에 따라 신학 교육을 시키고 있어서 이것 역시 큰 병폐 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여기에 서구의 자유주의 신학과 세대주의 신학이 중동을 강타하고 있어서 아랍 교회의 영성에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IV. 결론: 한국 교회의 아랍 선교


한국인 선교사는 결국 선교사 훈련을 본국과 중동에서 잘 마친 사람으로서 비전이 뚜렷하고 말씀 연구와 기도 생활에 충실한 선교사이다. 말씀 연구는 혼자 성경 본문을 주석할 수 있을 정도로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에 평신도로서 신학 훈련을 마쳤거나 신대원을 졸업한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말 성경이나 아랍어 성경으로 정확하게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워 우리는 좀더 원어 성경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아랍교회와 아랍의 신학교육에 있어서 올바른 성경읽기가 이뤄지지 못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랍 교회 개척이 아닌 복음 전도자로서 중동 선교사로 나올 경우에는 위와 다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아랍 현지에 와서 첫 2년간 현지 방언을 익히고 그 뒤 3년간 표준말을 익힌 사람으로서 아랍어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러면 아랍어 성경을 읽고 아랍어 성경 용어에 익숙하여야 하고 아랍어로 기도하고 아랍어 찬양과 아랍어 설교에도 어려움이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아랍교회의 리더와 목회자 없는 이슬람 국가에서는 아랍교회가 있는 7개 나라에서 얼마간 아랍어 성경을 배우는 게 좋다. 아랍어 성경에 나오는 어휘 하나하나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선교사 본인이 직접 아랍어 설교를 기도하면서 작성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즉, 모든 선교사가 아랍어 성경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가르칠 수 있으려면 현지 방언은 물론 표준말에 능숙해야 한다. 결국 현지 아랍어 방언과 표준말로 기도하고 찬송하고 아랍어 성경을 가르칠 수 있으면 셀그룹을 이끌어가며 제자훈련을 시킬 수 있다. 아랍 교회가 없는 중동국가 에서는 셀그룹을 계속 불려 나가면서 가정교회를 이루게 된다.

아랍교회가 있는 나라에서는 정교회와 가톨릭에 다니는 사람들을 교회로 모시고 오는 경우는 이슬람 정부에 별 문제가 없고 그들 간에서 교회를 세우는 것은 문제가 안되는데 문제는 기존의 정교회와 가톨릭의 책임자들이 개신교를 걸고 이슬람 정부에 고발을하여 다소 어려움을 갖게 된다. 그러나 대체로 이런 문제도 이슬람 정부가 어찌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아랍국가의 모든 계층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 첫째는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 사역하는 일인데 그곳에서 복음을 전할 영적 리더를 양성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정교회와 가톨릭 교인 안에서 사역하는 것인데 이들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이 무슬림보다 상대적으로 접근하기 쉬워 그래도 중동 선교가 열매가 있었던 것은 이들 명목상 교인들이 복음주의 교회로 왔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여야 하는데. 이들 무슬림들을 접근하는데는 시간과 전략이 필요하다. 오랜 세월 중동에 산다고 해서 이슬람 사람들에게 복음을 잘 전하는 게 아니므로 현지 한국인 선교사들도 계속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고 이슬람권 선교 접근 방안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중동의 아랍 기독교인들은 "그동안 무슬림들을 소수의 사람들이 다니는 복음주의 교회로 초청하는데 효과적이지 못하였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무슬림공동체 속으로 들어가 소그룹(small group)을 중심으로 가정교회를 세워나가는 전략이다. 물론 한국인 선교사도 아랍 개신교회 사역, 정교회와 가톨릭에서의 사역, 무슬림권 사역 그리고 신학교육과 소그룹 사역 등을 현지 필요와 초청에 따라 협력하고 동역하며 선교에 참여하고 있다.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하다가 온 라비브라는 요르단 청년이 그곳의 소식을 전하여 주었다. 2년전부터 사우디정부가 기독교인들이 예배를 드리도록 한정적으로 허락을 하여 지금은 상당히 많은 모임들이 있다고 하였다. 사우디 젯다가 리야드에서보다 더 자유롭게 모임을 갖고 있는데 이집트인, 레바논인, 요르단인, 시리아인들과 외국인들이 여러 곳에서 찬양을 드리고 있다고 하였다. 자신이 볼 수 있는 성경책도 공항을 통해 반입할 수 있다고 하였지만 역시 예배는 제한적으로 드릴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런 곳과 비교하면 요르단은 기독교인들이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이처럼 아랍국가마다 상황이 달라 중동 각국에 해당하는 선교적 접근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