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과 교만

 

1980. 2. 26. 화요일 새벽

 

본문 : 베드로전서 5: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이 사람들 보면 꼭 몽둥이 밑에서 살아야 될 사람들은 몽둥이 밑에 살아야 되지  몽둥이가 그만 하루만 멈춰져도 아주 아무짝도 몹쓸 사람이 되어져 가고, 또 아주  배가 고파 살아야 될 사람은 배가 고파 살아야지 하루만 배가 불러도 사고가 나고,  밧줄에 꽁꽁 묶여서 자유하지 못하게 속박을 당해 살아야 되지 잠시만 끌러놔도  그만 재를 저지른단 말이요.

사람을 취급하고 연구하면 그 사람은 그 사람에게 합당하게 하나님이 다 주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연 섭리에게 단속을 안 받을려면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단속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평안하고 좋기를 원하지마는 좋기야 좋은 것이지마는 평안하고  좋으므로 자기 망하는 것보다는 불안하고 고통스런데서라도 자기 구원되는 것이  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그라면 때가 되면 높이시리라"  겸손은 자기를 바로 알아서 자기 정체 정색 정질 정가 정능 이대로 나타나고  움직이는 것을 가라쳐서 겸손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자기를 잘못 알아서 너무 허무하게 적게 이렇게 과소 평가하는 이것도 겸손  아닙니다. 이것도 죄입니다. 교만이나 꼭 같은 죄요 이것도 교만 중에 일부입니다.

또 자기를 지나치게 평가하는 이것도 교만 중에 일부입니다. 그러므로 교만은  하나님에게만 대적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지음 받은 모든 것으로 더불어  대적이 됩니다.

다만 변질된 악령과 타락한 인간 하나님의 지으신 본질대로 되어있지 아니하고  변질 변성된 하나님에 원수와 대립이 되어있는 이것만이 교만한 자에게 한편이  되지 희망 있고 접해서 다소라도 유익 있을 것들은 이 교만에 대해서는 다 대적이  되는 것입니다. 겸손은 모든 것에게 환영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만, 교만하면 빠짐없이 전체가 다 멸망입니다. 그 멸망이 당장에는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관계의 것은 그것이 당장에  없어질 것도 있고 10년 가야 없어질 것도 있고 몇 십 년 가야 절단 날 것도 있고  종류들이 많이 있습니다. 당장 절단날 것은 당장 절단 나고, 몇 십 년 가야 절단  날 수 있는 그런 성질을 가진 것들은 몇 십 년 가야 절단 나고, 어쨌건 교만으로  인해서는 전체가 멸망입니다.

 겸손은 전면이 유익이요. 인간이 내가 하면 된다 하는 고것이 제가 하면 되거든  저는 늙지 아니하면 그런 소리할 수 있습니다. 죽지 아니하면 그런 소리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만든 것 가지고 살 수 있으면 그런 소리할 수 있습니다. 다  냅두고 공기만 잠깐만 안 먹어도 저는 죽어야합니다. 아주 인생을 연구하면 굉장히  미약한 것입니다. 인생은 굉장히 미약한 것이요. 만물 중에 가장 미약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하나님으로 인하여서는 모든 피조물 중에 극상의 것이 되게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떨어지면 이렇게 피조물 중에 가장 미약하고, 천하고,  허무하고 무가치 한 것일 뿐 아니라 아주 가치보다도 큰 것을 해치는 그런 해  덩어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의 때와 같은 인생이라' '만물을 멸망케  하는 인생이라' 그것을 성경이 말합니다.

 그런고로 중요한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만 해도 안되고 자기를 미워하고 또  사랑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옛 사람은 아주 미워해야 됩니다. 새 사람은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가 어떻게 과거 현재를 행동적으로 행동했으며, 미래에는 어떤 행동이 될  것인가? 자기 행동을 냉정스럽게, 냉정스럽게 조사하는 것이 깨어있는 것인데 자기  행동을 냉정스럽게 조사하는 요것이 양심입니다. 사를 편들지 아니하고 냉정스럽게  자기 행동을 조사하는 것이 요 깨어있는 것이요 냉정스럽게 하는 요것이  양심입니다. 양심 외에는 악심인데 냉정스럽지를 못하고 자기이기 때문에 거기에  사를 붙이는 그것을 가르쳐서 악심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자기 행동을 조사하고 자기라는 사람이 어떻게 과거 현재에 요동되는가 변해지는가  그대론가 이것을 또 조사하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날뛰고 움직여  살았으면 그 산 것에 이 해가 어찌되었으며 이로운 것이 얼마며 해로운 것이  얼마며 "이라, 해라" 그 말은 자기에게 유익이 얼마며 남에게 유익이 얼마며 해가  얼마냐? 하는 이것인데 이것은 아는 법이 남에게 해한 것이 얼마며 남에게 이익을  입힌 것이 얼만가 남에게 해를 가한 것이 얼마며 남에게 이익을 가한 것이 얼만가?  이것이 막바로 자기에게 이해를 가한 것입니다.

남에게 해를 가한 그것이 결단코 그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습니다. 되는 것 같으나  잠시 후에는 그것이 다시 복구가 됩니다. 온전히 됩니다. 그러면 남에게 해를 가한  그 손해 배상은 어디에서 도취되는가 자기에게서 도취됩니다. 그래 인생이 남을  해하는 그것으로서 다 자기를 해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남을 유익 되게  하는 그것으로서 당신을 유익 되게 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지혜가  이래서 마지막에는 만물이 다 하나님의 하시는 것이 너무도 공평 되다고 하나님의  공의를 찬양했습니다.

 자기를 계산할 것 날뛰지마는 반드시 그 행동에는 언행심사의 행동에는 자기라는  자체에는 점점 어제는 어제의 결과는 오늘이요 오늘의 결과는 내일이요 금생의  결과는 내세요 젊음의 결과는 늙음이니까 그 결과가 나오는 것이니까 그 결과가  어찌 됐는가 계산할 줄 알아야 됩니다. 계산을 해서 정확한 계산을 하지 못하면  전체는 자기 멸망입니다.

  자기는 비유컨덴 기본 수와 같고 모든 자기 밖에 것은 가수와 같기 때문에  기본수가 틀려놓으면 가수 어떤 걸 가했든지 전체는 다 틀립니다. 하나를 둘로  알아놨소 둘을 하나로 알아놨습니다. 하나를 둘로 알았으면 그게 보태는 것을  어떻게 정확하게 보탰더라고 하나를 둘로 알았기 때문에 언제든지 하나는  틀립니다. 셋을 둘로 하나로 알았다면 언제든지 둘은 틀립니다.

 그러기에 먼저 자기에게는 자기가 근본인데 기본 이것이 바로 되어야지 자기가  바로 되어야지 자기 삐뚤어지면 보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듣는 것도 계산하는 것도  비판하는 것도 평가하는 것도 경영하는 것도 전체가 멸망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계산하고 자기를 계산하기 위해서 남을 계산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을 정죄 하기 위해서 계산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 자기 할 일이  아니지마는 자기를 계산하기 위해서 남을 계산합니다. 남을 계산해서 그 계산을  정확히 해 가지고 자기 계산과 합해야되지 남의 계산도 잊어버렸으면 시험은  낙제입니다. 자기 계산도 잊어 버렸으면 시험은 낙제입니다. 계산했으면 계산한  숫자를 언제든지 기억하고 해야되지 그 숫자를 기억치 못하고 계산하면 전체는  틀립니다.

어떤 면은 우리가 자기에게 대한 계산을 정확하게 하나 다른 사람에게 대한 계산을  정확하게 하지 못해 가지고 건설이 파괴됩니다. 건설이 지장이 됩니다.

헛일합니다. 또 자타에 대해서 계산을 잘한 사람도 그 계산의 숫자를 잊어  버렸습니다. 또 헛일입니다. 얼마나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외부에 껍데기로 날뛰고 강하고 뭐 때리고 부수는 그런 것은 다 사망  깊은 속에 파묻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생명세계에 비취지도 안 하요. 자기를  바로 조사해서 정확한 평가를 해 놓고 관련된 다른 사람을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할 것이 아니라 아는 대로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접촉한 그 하는 대로 폭넓게  조사하고 계산해서 이것을 항상 가지고 사는 것이 깨어있는 것이요 이렇게 하면서  사는 것이 깨어있는 것이요 잊어버리지 안 하는 것이 깨어있는 것입니다.

또 자기를 챙겨야 합니다. 자기를 챙겨야 합니다. 인간은 작심삼일이 아니라 작심  한시간이요 한시간도 그 마음이라는 것이 그대로 가지를 안 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아무리 옳은 궤도에 섰다 할지라도 출발했다 할지라도 챙기기 안 하면 헛일입니다.

자기를 챙길 줄 알고 자기에게 관련된 것을 챙기지 못하고 늘어놓기만 늘어놓고  시작하기만 시작하고 하는 사람은 삐아레(경사진 밭) 곡식 종자 뿌려놓고 가꾸지  안 하는 그자는 뒤에 기다리고 있어 봤자 추수 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비용으로 손해만 갔소.

 '아, 그 사람은 뒷고리가 무르다 그 사람은 뒷고리가 맵다' 그 말은 챙기는 일을  잘한다 그 말이요. 그 사람은 뒷고리가 무르다 챙기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챙기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자기를 조사하고 관련된 사람을 조사하고  조사에 어두워지면 자기와 자기에 관련된 사람을 계산을 내보고 계산을 내봤으면  이제는 그것을 가꾸어야 하니까 챙겨야 하고 이래 가지고 모든 것을 경영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가리켜서 자기 연구라 자기 연구라 자기 사회 연구라 다시 말하면  자기와 관련된 인간들 연구라 하면 다 정확한 답안이 나옵니다.

 그러기에 이렇게 사는 것을 악령이 두려워하고 순바람 땡이 이렇게 저렇게 마구  울렁거려고 이 사람을 정신 차리지 못하게 하는 모든 풍조 이런 것들이 바윗돌에  암만 바람이 불어 봤자 그까짓 것이 와서 상관없는 것처럼 이렇게 사는 자에게는  풍조 그런 것들이 상관이 없습니다. 뭐 이런 시국 이런 시대 이런 풍조 이런 운동  저런 사상 해 봤자 그런 것들이 왔다가는 되돌아가지 아무런 거기에 효과를 내지를  못합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에게 대한 유식한 것이 자기에게 대해서 바로 아는 것이 이것이  보배입니다. 인간이 자기를 연구하고 조사하고 계산하고 계산하란 말은 정비하란  말입니다. 정리하란 말입니다. 해보니까 마지막에 결론 나온 것이 죄인이라  삐뚤어진 것 뿐이라. 이래서 성도가 살 위치는 죄인이 있는 죄인 그것이 자기  위치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를 알고 보니  모두가 다 죄요 허무요 절망이요 악에게 속한 것만  강하여 있는 자기인 것을 먼저 발견한 자가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이 발견한  자에게 무리를 온전케 하고 깨끗케 하여 흠과 점이 없는 자가 되게 하시려고  십자기의 대속의 공로를 베푸셨고 또 진리와 성령이 보증이 되어있는 이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합니다.

이 구속을 찾아 이 구속을 힘입어 살라는 죄인이 예수님으로서만 소망을 가지려는  이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 모든 것을 대속해 놓으시고 구비해  놓으시고 은혜로 주시려고 기다리고 서서 계시는 창조의 근본이신 이 주님을  소망해라 하는 말입니다. 의인이 예수님이 무슨 필요 있습니까 실력 있는 자에게  예수님이 무슨 필요 있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제일 불쌍한 사람은 부요한 자입니다. 제일 불쌍한 사람은 실력  있는 자입니다. 그 자에게는 예수님이 상관없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쓸데없다' 했습니다. 그 자는 정말로 고칠 것이 없느냐 찾아보면 기형입니다. 중우  벗고 돈 닷 돈 찼소 아랫도리 발가벗고, 돈 백 원 짜리 하나 지화 하나 불끈  싸매어서 차고 그것 하나만 보고 나 백 원 있다 하지마는 아랫도리 벗고 우에도  벗도 다 벗었어, 그 배후에 재산이 하나도 없어, 꺼리도 없소, 이러니까 그들은  이런 자 가리켜서 이래 가지고 돈 백 원 돈 백 원 있다고 하는 그걸 가리켜서 중우  벗고 돈 닷 돈 찼다.

 전면은 다 절단인데 악인이라 자기만 사랑하고 자기만 위주하고 자기만 인정하는  그 악심에서 자기의 장점하나 고것만 보고 모든 것을 고것 하나만 대조해 가지고  이면이 나만 못 하니까 아무 것도 아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를 멸망시키는 것이  대개는 세상에 가난한 자 보다 부자가 불행스럽다고 성경에 많이 말한 부자입니다.

전체가 다 구비해 부요한 것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는데 와 해롭겠습니까  그것보다도 더 기막히는 것은 사망에 속한 그 사망되도록 크고 강하고 높은 그것을  생명 세계의 것인가 착각하고 그 장점을 가지고서 하늘나라의 장점인줄 알고 그것  자랑하고 그것 써먹고 그것 인정 안 해 주고 대우 안 해 주면 삐꾸고 가증스럽고  불쌍합니다. 얼마나 불쌍하고 가련한지 '죽고 또 죽고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라고 말씀한 그대로 어떻게 불쌍하고 가련한지 세상은 그런 세상입니다.

 자기를 연구하지 못한 자는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무식하게 됩니다. 자기를  조사한 자는 다른 사람을 조사할 실력이 있소. 자기를 계산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계산할 실력이 있습니다. 자기를 챙겨 본 자는 다른 사람도 챙길 수 있습니다.

자기를 연구해서 올바른 지식을 올바른 기본을 자본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도  연구할 수 있습니다.

이래서 자기를 아는 것 만치 남을 알 수 있소. 자기를 아는 것 만치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을 아는 것 만치 하나님은 온전하시고 완전하신  분이시요 자기는 아는 거 만치 허무한 자입니다.

 자기를 알아 가룟 유다와 같이 낙심만 하는 자도 이것은 생명에 속하지 못하지  못한 자고 자기를 연구하지 안 하여 자기에게 소망만 가지는 자도 다 사망에 속한  자들입니다. 먼저 자기에게 절망을 가지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소망을 가지는 자   율법으로 자기가 완전히 정죄 되어 죽은 것 만치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합니다.

율법 없는 자에게는 구속이 없습니다.

사랑은 미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요 생명은 사망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선물로 받는 것이요 자기를 모르고 모든 것을 상대하는데 모든 것이  망할려고 상대해 줘요 자기를 모르고 모든 걸 상대하면 모든 것이 모르는 것은  같이 망하지요. 모르는 것은 상대해 봤자 만을 상대해도 같이 썩을 것이 모이면 더  힘있게 썩지 별 수 없소.

그런고로 자기를 살필 수 아는 사람 살필 줄 아는 사람 살펴야 되겠다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조사하는 사람 자기를 계산하는 사람 자기를 연구하는  사람 자기에게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진 사람 자기를 아는 것 만치 하나님도 알게  되고 자기를 아는 것 만치 남도 알게 되지 자기 모르는 자는 전체를 모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사망에 속한 것 가지고서 날뛰는 그 사람을 위대하다 부럽다  두려워하는 자도 여전히 사망에 속한 자입니다. 사망에 속한 자가 아니면 정  대립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좀 살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에서 여게서 겸손이 나옵니다. 여게서 겸손이 나옵니다.

그기야 세상살이야 어떤 기형이라도 그것 하나 가지고 삽니다. 집게는 집는 거  하나 가지고 사요 풀쐐기는 쏘는 것 쏘는 것 그것 하나가지고 지금 유지합니다.

아, 세상에 귀가 한발 되는 사람이 만일 한국에 왔다고 하면 암만 입장권을 한  오백 원 되면 다 들여다 볼 것입니다. 정말로 귀가 한발 되는 사람이 있는가 그것  팔아먹고 사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세상에 악의 힘이 하나 저 하나 가지고서 밥 먹고사나 그기  인생입니까? 이런 거짓 저런 거짓 이런 외식 저런 외식가지고 그날그날 먹고  사지요 그것이 우리가 바라보는 완전한 세계에 갈 완전 요소로 성장되어 나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어리석지를 말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차든지' 그 말은 안 된 것은 안 된 줄 알란 그 말이요. '더웁든지' 된  줄 알라거든 참 되라 그 말이요. 그러면 주님이 받아 주십니다. 참 된 것이야  주님이 받아 주시지요 참 안된 것은 안 된 줄 알면 주님이 받아서 고쳐 주지요  안된 것이 된 줄 알고 되지 못한 것이 된 줄 알기 때문에 차지도 더웁지도  아니하고 미적지근해서 토하여 내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에서 자무식의 사람을 삼가 해야 됩니다. 사람을 접할 때에 자기를  모르는 자무식의 사람을 제일 삼가야 되고 또 자무식의 이 사망을 피해야 됩니다.

언제 그 박대통령이 무식한 것이 제일 무섭다 이렇게 말했는데 그 큰 말을 했다  제가 그것을 보고 큰 말을 했다 이랬는데 그분이 참 알고 그 말을 한 것인지 그저  이 학문 과학 지식이나 이런 자기 밖에 있는 이런 모든 지식을 그것을 말한  지식인지 자기에게 대한 지식인지 그것을 판정 못했으나 어쨌든지 무식이 제일  무섭다 하는 그 말은 좀 드문 말인데 좀 드문 말입니다.

무식은 깔 보인다 하지 무식은 무섭다 하는 그런 말은 좀 하게 드문 말이란  말이요. 그런데 드문 말을 했는데 그 어떤 것인지 모르긴 모르지마는 자기를  모르는 사람 그 사람이 불행스럽고 또 자기 모르는 사람 이것을 상대할 때에 제일  조심 있게 상대해야 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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