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교장로회 총공회의 [백영희 목사님]
선지자선교회
예수교장로회 공회는 백영희 목사님이 중심이 되셔서 세운 진영입니다. 백영희 목사님은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이기시고, 6,25 전란의 공산치하에서도 하루에 세 번씩 종을 치고 예배를 드리며 환란을 이겼습니다. 이렇게 순생 순교의 신앙을 가진 신실한 주님의 종이셨습니다.

백영희 목사님께서 공회 진영을 세우시기 전에는 예수교장로회 고신 진영에 계셨습니다. 고려신학교를 1회 입학하였다가 8회 졸업하셨습니다. 백영희 목사님께서는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이미 3교회를 맡아서 목회하셨습니다.

신구약 성경 육십육권을 거의 외우셨고 또 그 말씀대로 사신 진리의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의 구원도리는 깊이 있게 깨달아서 특별히 신학교에서 배울 것은 없었으나 안수문제가 있어서 목회와 부흥사로 바쁜 시간 속에서 별과생으로 졸업하셨습니다. 1950년도 설교록을 보면 목회 초기부터 성경을 깊이 깨닫고 계셨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신학생 시절 조사님 때부터 고신의 부흥사로 계셨는데 그것은 일제 신사참배를 이기고, 6,25 환란을 이긴 후의 신앙이기에 성령 충만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고신에 계실 때에 신앙노선을 같이 하신 분을 대표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주남선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주남선 목사님께서 임종 직전에 목회 시 늘 함께 했던 성경을 백영희목사님께 물려 주셨으니 그 의미가 크다 하겠습니다.

고신이 신사참배 회개문제로 총회에서 나와 고신 진영을 세울 때에는 신앙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 예배당 소송문제가 있을 때에 성경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세상법정에 나서는 일이 있었고 또 유엔군이 철수하면 북침 한다고 온 세상이 유엔군 철수 반대 성명서를 발표할 때에 고신도 교회의 이름으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백영희목사님이 고신 지도자들께 이것은 비성경적이며 비신앙적이라고 강력히 항의 하다가 1959년 6월 상회 불복종으로 제명을 당합니다.

그 후 경기 보류 노회(고신)에 가입 청원하였으나 보류 노회도 I.C.C.C.에 가입하므로 청원을 다시 철회하고 잠시 독립교회로 나섰다가 공회 진영을 세우게 됩니다.

이 때가 변질되기 이전의 고신을 공회가 보수 계대한 시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계에서는 예수교장로회 공회를 고신 중의 고신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