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세론


선지자선교회 1985년 8월 16일 금야 

 

본문 : 베드로후서 3장 11절∼14절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일곱 가지를 벌써 여러 날 전부터 계속 생각하고  나오고 있습니다. 첫째는 노아 홍수 때와 예수님의 재림 때의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의 행동이 같을 것이라는 것을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홍수로 모든 죄인들을 멸망시킨다고 말씀을 하셨으나 이 홍수로  그렇게 사람이 멸망받은 그런 일이, 뭐 천하에 홍수가 가득 찬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네들은 역사에 없는 일을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다 믿지를 아니하고 귀넘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모두 다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먹고 마시고 집짓다가. 멸망하는 그날을 알지 못하고  멸망하는 그날까지 그 일 계속하다가 멸망한 거와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와  같으리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노아 때의 일이 우리에게 거울이 되니까 우리가 스스로 나는 노아 때에  멸망받은 사람과 같은 사람인지 홍수 심판에서 구원을 받은 노아 와 같은  사람인지 우리가 스스로 자기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멸망받은 사람들은 그저  가정 문제 가정 재미, 가정 재미 가정 문제에 빠져 가지고 홍수 심판이 내린다  하는 데 대해서는 별 관심을 가지지 안했습니다. 또 장사하는 거, 사고 파는  것은 장사하는 걸 말하는 것인데 모든 사람들이 그 상업으로 이익을 좀 얻겠다  해 가지고 상업하는 데에만 빠져 가지고 홍수 심판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를  못했습니다. 또 의식주 이런 데에다 관심이 다 빠져서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또  어떻게 하면 좀 더 자기의 처소를 편리하고 남보다 좀 낮게 할까 이래서 그런  데에 다 마음을 기울이고 홍수 심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못했고 준비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이렇게 과거 사람들은 홍수 심판이 처음으로 만난  것이지만 우리는 홍수 심판이 우리에게 조게 거울이 되고 우리를 많이 경고해  주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가 요것을 한 번 스스로 자기가 살펴야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이 불심판,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뭐 산도 타고  하늘도 타고 들도 타고 집도 타고 도시도 타고 만물도 타고 사람도 타고 전부 다  탈, 이 불심판이 올 터인데 이 불심판은 언제 올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들도  예배보다가 닥칠런지 혹은 얼마 후에 닥칠런지 우리는, 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중대한 일이 있는데 우리는 지금 노아  때와. 노아 때의 사람들과 같은지 다른지 스스로 자기를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가정이 좋지만 노아가 가족을 생각한 것처럼 가정도 이 불심판을  면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가정이어야 되겠고, 또 어떤 사업이든지 이 불심판을  면하기 위한 사업이어야 되겠고, 어떤 또 필요한 뭐 의식주라 할지라도, 좋은  처소라 할지라도 이런 거 다 불심판을 면하기 위한 것들이어야 되지 불심판에  멸망받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바로 어느 시간이든지 매일 시간마다 '나는 불심판 앞에  설 사람들이니 나는 불심판에 멸망하지 않을 준비를 해야 되겠다' 하는 이것이,  사업에도 이 중심이 앞서 가지고 또 자기 가정에 대해서도 처소나 무슨 지위나  어떤 뭐 위치나 의식주라도 우리는 이 불심판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에녹이 그렇게 세상살이 하면서 하나님과 동행 한 것처럼 노아도 그가 방주를,  하나님 시키시는 대로 방주를 모았으나 그가 의식주를 했습니다. 의식주 못 한  것 아닙니다. 그러면, 노아와 같이 그렇게 방주 만들지 안한 사람들은 무슨  두드러진 그런 의식주를 했던가?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불심판에 대한 예고의 말씀이 우리의 전생활을 어느  정도 주장을 하고 있나 하는 요것을 지금 따져야 됩니다. 이거 모르는 사람 뭐  있습니까? 다 이제 하도 들어 쌓아서 이거는 다 압니다. 알기 때문에 말을 들을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다 압니다. 그저 이 불심판이 내 생활을 얼마나 좌우하고  있으며 내가 이 불심판에 대한 그 충격과 동요를 어느 정도 내가 받고 있는가  이것을 자기가 살펴봐야 됩니다.

 이 불심판 잊어버리고 자기는, 그때 사람들이 가정을 위해서 사업을 위해서, 뭐  먹고 입고 사는 일을 위해서, 자기네들이 더 안락하게 모두 다 처소하는 이런  처소를 위해서 그만 그거 때문에 시간 다 기울이고 물심판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  없는 그 사람들과 같이 오늘 우리는 어떠한지? 오늘 우리가 과연 이 불심판  여기에 끌려서 이 불심판 때문에 안 할 일도 하고 불심판 때문에 할 일도 못하고  이 불심판 이것이 나를 어느 정도 주장을 하고 있는지, 내가 이 불심판에게 어느  정도 내가 주장을 받고 있는 지 요거 살펴야 멸망하고 구원 얻는 것이  결정됩니다.

 참 뭐 그때와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내 온갖 이 세상 의식주의  생활, 가정 생활 사업 생활 자기의 모든 처소의 생활 이런 것보다 이 불심판에  대한 관심이 우리에게 뜨거워야 되겠고 항상 우리 머리 속에 이 것이 주장이  돼야 되겠습니다. 이 주장으로 모든 걸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거, 뭐 다  알지만 그 사람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일 이것이 안 된다면 우리 생활은 다  헛됩니다. 노아 때도 그들이 다 알았지만 노아 여덟 식구만 이 말씀하신 것이  저희들에게 감동을 주고 충격이 돼서 그들은 일편 단심 먹든지 마시든지 이것을  하든지 저것을 하든지 모두 다 홍수 심판 면하고, 홍수 심판 면할 준비하는  거기에 모두가 다 기울어졌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불심판을 면하는 데에 기울어져야 될 터인데 우리가 여기  와 지금 앉아 있지만 불심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우리의 관심이 뜨거우며 이  불심판이 내 마음을 주장하고 내 생활을 주장하고 있는지 그것을 스스로 우리가  살펴서 판단해야 속는 사람이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보면 다 '저 사람은 정신병자다 미친 자다' 과연 이렇게 불심판을  위해서 준비하는 생활하면 온 세상 사람은 그 사람을 미쳤다고 하지 안 미쳤다고  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이 불심판에 대한 경고의 말씀에  대해서 믿는 믿음의 강한 깨달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래서, 이  불심판이 우리 전 언행심사의 생활을 주관해야 됩니다. 주관 안 하면 이거  헛일입니다.

 또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지만 뭐 세계는 지금 문화 건설한다고 야단이고  이렇게 모두 다 세계에 별별 일들이 다 전개되고 있지만 하늘과 땅은 하나님이  멸망시킬 자와 구원할 자의 그 선택 구속 사업이 선택 구속 사업이 그게  완료되면 다 불태워 버립니다. 그러면 이 하늘과 땅은 주님의 구속 사업 완료  때까지 보존했다가 그것이 완료되면 이것은 다 불탄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그 완료는 오늘이 완료인지 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예수를 바로 믿어서 아주 다 성자가 되고 독실한 신자가  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올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  그 말씀하신 걸 보면 믿음이 아주 희귀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다 믿음 준비가 되지 못했으니까 아마 이 하늘과 땅은 아직까지 머물  기한이 많겠지' 그런 생각을 우리는 가질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요 상태가  하나님으로서는 구속의 판정이 난 때인지 모릅니다. 오늘 이 시간이 판정이 난  때인지 내일 판정이 날 때인지 언제 판정이 날 때인지 모르나 판정이 나는 그  시간에는 하늘과 땅은 다 불살라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그 아무리 커도 저것도 오늘인가  내일인가 다 불살라질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살아야 됩니다. 아무리 세계가  지금 자랑을 하고 뭐 20세기의 과학으로써 떠드는 어떤 거 해도 저것도 오늘  불살라질란지 내일 불살라질란지. 저것의 존재의 운명은 곧 주님이 모든 것을  불사르는 그 구속 사업이 끝나는 그 시간에는 모든 것이 다 끝장난다 하는 것을  우리는 보고 평가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런 가운데에 우리에게 큰 위로의 말씀을 줬습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대해서 구원하고 회개시키고자 하는  그 안타까운 이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에게 선포했습니다. 회개한  사람들을 보면 하루가 천년같이 지루하고 '어서. 얼른 이 세월 지나가 버리면'  그렇게 주님에게, 마음이 그렇게 답답해지고, 회개는 안 하고, 회개할 기간은,  시기는 지나가는데 회개 안 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는 어떻게 이 세월이  빨리 가는지 천 년이 하루같이 그렇게 빨리 보인다 그렇게 말씀하신 이 주님의  사랑의 심정을 우리가 바라보면서 우리는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낙심하지 말고  그렇게 일어나서 회개하고 이 구원에 착수해야 됩니다.

 우리가 자기 생활을 이래 보다 보면 너무도 참 허무하게 빠질 때도 많고 아주  뭐 희망 없다고 생각할 만치 그렇게 모든 면으로 어려워지는 그런 때도  있습니다. 아무리 그런 때 닥쳐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너희들이 잊어버리지 말아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고 계시는 이 한 가지를 잊어버리지 말고 그저  강퍅을 부리지 말고 즉시 우리는 회개를 해야 됩니다. 오늘 만일 이 시간에  하늘과 땅이, 다 불이 탄다면, 저 바다도 다 불이 붙어 타고 산도 불이 붙어  타고 뭐 시가가 불이 붙어 다 불이 붙어 탄다며 우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때에 타지 안 할 수 있는 이 구원의 길이 있기 때문에 타지 안 할 수 있는  이것을 마련하기 위해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쩌면 부자가 될까. 어쩌면 남보다 좀 앞설까? 이런 경쟁을  하고 가치를 거게다 두고, 가치를 거게다 두고, 돈에 가치 둔 사람 권세에 가치  둔 사람, 호의 호식에 가치 둔 사람, 아주 달콤한 깨소금 같은 아주 가정 재미에  가치를 둔 사람, 이런 거 저런 거 자기 처소를 아주 누구보다도 뛰어나게 만드는  그런 데에 가치를 뒀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 거게다가 가치를 두고 거게  분망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거게 가치 두지 안했습니다. 그저 홍수 이 심판을  면하느냐 홍수 심판에 멸망 받느냐 거게다가 전 가치를 두고 기울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두고 있는지? 참 허망한 것입니다. 네? 우리가  땅위에서 어떻게 좋은 걸 봐도 저것도 오늘 불타서 없어질란지 내일 불타서 없어  질란지 모른다, 그렇게 보면, 그러면, 세상을 그렇게 다해서 다 염세주의인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거게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모든 것을 조절해서  살아야만 하는 우리들입니다. 뭐 땅 위에 이 불심판에 멸망받을 이것을 버려  두고 이것을 무시하고 가치를 취할 만한 것이 뭐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불심판이 와도 이거는 좋다 할 갓이 뭐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바라보고 잊어버리지 안해야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것은 갑자기 오신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말하기를  '아이 밴 여인에게 해산 날이 오는 거와 같다' 아무리, '아. 인제 해산 날이  돼서 배가 불러지고 그저 열 달이 다 돼 가니까 곧 해산되겠다 되겠다' 하지만  해산되는 그날을 그 시간을 누가 압니까? 갑자기 배 아프다고 해산 기미가  있다고 고통을 하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걸로 비유했습니다.

벌써 죄악이 관영하고. 하나님이 말씀했으니까 불심판이 오기는 오는데 어느 날  올란지 그거는 우리 모릅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누가복음에는 그물같이 이른다 이랬습니다. 고기가 빙빙 돌며  좋다고 노는데 위에서 투망을 턱 던져 버리면. 벌써 투망 떡 던졌으면 그 속에  있는 거는 벌써 홀껴 들어오고 그만 잡힙니다. 그러면 그 고기는 그만 자유가 다  없어져 버리고 생명도 다 없어지게 됐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불심판으로  오는 날이 그물같이 갑자기 이른다 그랬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제 마음대로 뭐  나는 돈이 제일이다 뭐 제일이다 이래 쌓아며 떠들어 쌓아면서 모든 인간들이 제  마음대로 제 욕심대로 제 의견대로 어리석은 제 취미대로 날뛰지만 이제 심판의  불이 그물같이 탁 던져 버리면 그 다음에는 그만 인간 제 마음대로 한 것은 다  절단나 버리고 불타 버리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여게 대해서도 어느 정도 우리가 지금 진실되게  생각하고 있는지, '아, 주님이 오늘 오실란지도 모른다' 여게 대해서 어느 정도  그렇게 우리가 진실되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것을 자기가 하루 몇 번이든지  '오늘도 주님이 오실란지 모른다' 몇 번이든지 말을 해 보는지, 참 오늘인지  내일인지 언제 오실지 모른다 하는 이 사실이 자기 마음을 재촉을 하고 자기  마음이 조급해져서, 이 불심판의 준비라면 안심하고 뭐이든지 할 수 있지만  불심판의 준비에 관련 없는 일이라면 아무것도 가치를 둘 것이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의인이 되어지고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자도 성녀도  되어지고 또 세상을 이기는 사람도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하늘도 불에 타서 다 풀어진다고 했습니다. 하늘이 풀어진다는  말은 이 우주가. 물질계 우주가 풀어진다는 말이요 그 가운데 모든 체질들이 다  불에 타서 녹아진다 말은 달도 녹아지고 별도 녹아지고 별별 모든 지구  땅덩어리와 같은, 그런 것들은 다 물체입니다. 그런 것들은 다 체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체질을 가지고 있는 거는 불에 타서 다 녹아지고, 이  공간으로서 이렇게 큰 우주로 되어 있는 이런 것은 다 불에 타서 다, 풀어진다는  말은 그게 정상이 다 해체된다 말입니다. 이래서 이 것을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간다 이렇게 말했고 여게는 풀어진다고 말했고,  그때에, 요한 계시 6장에는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 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지금은 예수님이 그렇게 사랑과 자비와  긍휼의 주님이시지만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실 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그  진노의 얼굴이 바위에 치여서 죽는 것보다 더 두렵기 때문에 그들은 더 가벼운,  바위에 치여 달라고 말하고 어린 양의 그 진노의 낯을 보지 안할라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다 풀어집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보니, 이렇게 불에 타서 풀어지지만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땅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의는 타지 않습니다. 의는 멸하지  않습니다. 의는 진리화된 것을 말하고 영감화된 것을 말하기 때문에 영감화  진리화된 것은 이 심판의 불이 태우지 못합니다. 노아의 홍수가 하나님의 뜻대로  된 의인은 이 홍수가 도왔지 해는 조금도 주지를 못했습니다. 이 심판의 불도  의인들은 돕지 조금도 해를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기억합시다.

 그러기에, 오늘에 우리가 뭐 세상에서 돈이니 권세니 지위니 그런 것은 우리의  소망이 아닙니다. 우리는 의를 만들어야 되겠는데, 불타지 안하는 의를 만들어야  되겠는데, 그러면. 우리 의를 어디서 만듭니까? 우리 의는 자기 현실에서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시 다른 말로 하면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하는  데서 의를 만들 수 있지 다른 데서는 만들 수가 없다는 말이고, 또 공무원  생활하는 사람은 공무원에서 의를 만들지 다른 데서는 의를 만들 수가 없다는  말이고. 또 그 사람이 무슨 가정에 무슨 주부 노릇하면 주부 노릇 하는 사람은  주부 노릇에서 의를 만들지 다른 데서는 만들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가정부로  가서 수고를 한다면 가정부는 가정부 하는 거게서 불타지 않을 의를 마련할 수  있고, 학생은 학생 생활에서 불타지 않을 의를 마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런, 처지 형편 모두 각각 사람들은 다른  그런 분야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걸, 그런 형편을 우리가 만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만들어 주시는 것인데, 그 형편이 저주되지 안하는 형편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안 어기고 살라고 하니까 요 직장이 내게 닥쳤다.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죄를 짓지 안할라고 하니까 나는 요런 지금 천한 직분을  가지게 됐다.' 요새 사오 년 공부를 거게 전공을 해 가지고 시험치면 지금  가족들도 큰 지금 아주 생계에 이제 광명이 오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하필  그 치는 것이 주일날 시험을 칩니다. 그러면 자기도 여러 해 동안을 전공한 것이  주일날 시험치니까, 헛일이지, 칠 수 없지, 가족들 기대도 다 어긋나지. 심히  어려운 일이지만 자기는, 주일날 시험을 치다 보니까, 넉넉히 합격될 만한  자격이 있지만 주일날 시험 쳐 가지고 가서 살 그 직장에는 자기가 가서 일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일하지 못하게 되고.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우리의 현실이라고 하는 그 현실을 자기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하면 현실이 이런 현실 저런 현실 각각 그 현실들이 다르게  닥쳐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죄를 지어서라도 닥쳐온 현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쨌든지 자기 현실이 이런 현실 저런 현실, 죄를 지어서 닥친 현실은 그 현실은  자기에게 하나의 시험이 더 돼 가지고 있고. 의롭게 해서 닥친 그 현실은 또  자기에게 구원 이루기에 아주 많은 도움이 돼 가지고 있는 그런 현실인데, 어떤  현실이든지, 어떤 각종의 분야든지 그것은 우리의 소망이 아닙니다. 요걸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자기가 어떤 큰 회사를 경영하는 그런 사장이 되어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 사장 위치는 그거는 자기 할 일이 아닙니다. 또 회사 그것도 자기  할 일은 아닙니다. 그게 또 자기 수입도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은 뭐이냐? 그것은 자기 의를 만들 수 있는 공장이요. 의를 만들  수 있는 장소요, 의를 만들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천한  생활이나 귀한 생활이나 부한 생활이나 가난한 생활이나 천태만상의 모든 그  생활을 우리는 그것이 나 할 일이요, 그것이 내 기업이요, 그것이 내 수입이요  내 소망이라 이렇게 생각하면 헛일입니다. 그것은 우리 할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거게서 뭐 하느냐? 거게서 영원히 불타지 아니할 것을 마련하는 것이  우리 할 일입니다. 요거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서부 교회 백 목사도 목회하는 이것이 나 할 일 아닙니다. 목회하는 이것이 내  수입 아닙니다. 목회하는 이것이 나 할 일 아니요 내 수입 아닙니다. 나는 나 할  일은 뭐이냐? 목회하는 이 목회 속에 영원히 불타지 아니할 그 의를 마련하는  그것이 나 할 일이요 내 수입입니다. 내가 여기서 지금 설교한다고 설교하는  이것이 내 수입 아닙니다. 이 설교하는 가운데에 나는 불타지 안 할 의를  마련합니다. 의를 어떻게 마련하는가? 거룩한 행실과 경건으로 마련하는데 내가  이 시간 이 설교를 하면서 불타지 아니할 의를 내가 마련했으면 나는 수입을  봤습니다. 만일 의를 마련하지 못했으면 이것은 아무 수입 없습니다.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디든지 그것은 내 의를 만들 수 있는 장소요, 의를 만들 수  있는 공장이요 의를 만들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이 구비돼 가지고 있는 나의 의를  만드는 처소지 그것이 나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것을 우리가 다 착오해 가지고  그런 것이니까 바로 깨달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오늘밤에 하나만 증거할라고 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아직까지 하나  증거할라 하는 그것은 지금 증거하지 않습니다. 얻는데, 여게 거룩한 행실이라  요렇게 말했는데, 요 거룩한 행실 요것이, 거룩한 행실이라고 요것이 불타지  않는 것 아닌 것입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으로 불타지 아니할 의가  마련됩니다. 여기서 불타지 아니할 행동이 마련되고, 불타지 아니할 일이  마련되고. 불타지 아니할 언행심사가 마련되고, 불타지 아니할 희로애락이  마련되고, 불타지 아니할 사람이 마련됩니다. 요래서 요 거룩이라는 요것을  우리가 잘 알고 요것을 이용하도록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이 거룩이라 하는 이것이 어떻게 이용하기가 어렵고 또 이 거룩을 계속 하기가  어려운지. 거룩이라는 것은 '이거냐 저 거냐, 이거냐 저거냐' 이 둘을 두고  이거냐 저거냐 그렇게 둘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 이것은 해야 될  일이냐 안 해야 될 일이냐 그걸로 판단하겠습니다. 그러면 둘로 판단했습니다.

하여야 할 일을 했으면 그것도 의가 됩니다. 안 하여야 할 일을 안 하면 그것도  의가 됩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도 의요 안 해야 될 일을 안 하는 것도  의입니다. 그러면, 모든 일을 둘로 갈라서 해야 할 일 안 해야 할 일 그것을  둘로 갈라 가지고 우리는 먼저 판정하고 선정을 해야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둘로 갈랐는데 또 둘이 됩니다. 둘이 둘 돼서 이이는 사, 사가 되겠습니다.

그러면, 의로운 일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 하는 그 일을 하면 되는 게 아니라,  '하라'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 하는 그 일에 내가 할라고, 하면, 하는 데에,  하는 데에, 이렇게 하지만, 하지만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이렇게 해야 된다'  반드시 거게 두 갈래가 있습니다. 그것이 거룩입니다.

 처음에는 해야 될 일 안 해야 될 일 둘로 갈랐으면 그것이 일차 거룩이  됐습니다. 또 해야 될 일을 가렸습니다. 해야 될 일을 가렸는데 이 해야 하는 이  일을 이렇게 해야 되느냐, 하기는 하는데 이렇게 해야 되느냐 이렇게 해야  되느냐 반드시 두 길이 있습니다 하되 이렇게 하면 바로 됐고 하되 이렇게 하면  틀렸다 거게서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그 일을 하되 거게서 구별을 해 가지고 안  된 것이 섞여 있으니까 안 된 것을 반드시 제거하고 할 것을 하라 하는 요것을  우리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저 뭣이든지 처음에 선택해서 '아 이것은 옳은 일이다. 이거는 틀린 일이다'  이러면, '아, 옳은 일이니까 그만 이 일 하면 됐다' 그랬는데. 요 거룩이라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요것이 옳은 일이니까 옳은 일 하면 됐다.' 옳은 일을  하는 데 거게서 네가 삐뚤어진 걸 찾으라 그말입니다. 옳은 일을 하는데. 옳은  일을 하되 그 일 한 것이 헛일될 수 있는 자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옳은 일을  하되 삐뚤어진 거, 옳은 일을 하되 의가 되지 못하고 심판 받을 것이 거게  찌끼가 들어 있으니까 그 찌끼를 제거하라 말입니다. 또 네가 '이것은 불의한  일이기 때문에 하지 안해야 된다' 불의한 일이기 때문에 하지 안하는데 불의한  일이라서 하지 안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게 아니라 하지 안하는데. 안 하는 데도.

안 하는 데도, 그거 안 하는 것도 불의가 되는 것도 있고 안 하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하지 말라는 거 안 했으니까 그것도 의가 됩니다. 의가 되는 것도  있으니까. 안 하는 데에 도 불타지 안할 수 있는 의가 되는 것도 있고. 거게도  찌끼. 말하자면 금을 연단하면 잡철이 들어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잡것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제하고 하라. 이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거룩에서 또 거룩을  해서 그렇게 해 가지고 하면 그라는 가운데에서 그 사람의 언행심사가 점점  깨끗하게 수정되고 그 사람의 희로애락이 수정되고 그 사람의 이목구비 수족이  점점 깨끗하게 수정되고 이래서, 이 거룩한 행실이라는 것과 경건이라 하는 것은  우리 행위를, 행위를 이것을 먼저 고치면 그 다음에는 행위 고친거 만치  희로애락이 고쳐지고, 행위와 희로애락이 고쳐진 거만치 그다 음에는 사람이  고쳐지는 이 고치는 방편을 가리켜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이 하라는 일하면 그것도 의가 됩니다. 일차 의가  됩니다. 하지 말라는 일 안 하면 그것도 일차 의가 됩니다. 그런데 일차 의가 된  그것을 또 그대로, 하지 말라는 것 안 했고 하라는 것 했으니까 됐다 할 게  아니라 하라는 것을 한 거기에 네가 또 선별해라, 하라는 것을 했는데, 하라는  것을 했는데 그 하는 데에도, 거게는 동기도 있고 목적도 있고 도덕도 있고  거게는 윤리도 있고 자타도 있고 오만 것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자꾸,  무엇이든지 할 때에 아닌 것을 자꾸 가려서 아닌 것은 태워서 제하고 옳은 것을  하고 하는 요것을 네가 계속 하면 불타지 안 할 수 있는 그 의가 마련된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것을 좀 여러분들이 단단히 잡지 안하면  안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키시는 그 심부름을 합니다. 심부름을 했으니까  자기는 심부름을 하는 데에, 이제 비유컨대는 '아. 시장에 가서 생선을 한 마리  사 가지고 오라' 했으니까 생선 한 마리 사 가지고 왔으면 되는 게 아니라 생선  한 마리 사 가지고 왔으니까. '네가 무슨 과일을 사지말고 생선을 사라' 그것은  판정이 났습니다. 그러면, 생선을 사는 데에는. 생선을 사는 데에는 네가 거기서  또 구별해라. 생선을 사는 데는 썩은 것을 사도 안 되고 또 비싸게 사도 안 되고  또 종류가 못 쓸 종류를 사도 안 되고, 생선을 사는데 자꾸 구별해 가지고.

 그러면 거룩한 행실이라 말은 우리는 자꾸 거게서 구별해서 아닌 것을 자꾸  제거하고 이렇게 하는 요것을 네가 힘을 써야, 이거 지금, 불에 타지 않기  위해서 이것을 힘을 써야 불타지 안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주의 피의 능력이  있고 성령의 능력이 있고 진리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니 너는 구별해서  자꾸, 하나는 제거하고 하나는 취하고, 또 취한 것을. 취한 것을 '이만하면.'  취한 것을 또 구별 하니까 또 거기에 잡것이 또 있고. 이래서, 그것을 다른  성경에는 말씀하시기를 네 믿음을 금을 연단하는 거와 같이 네가 연단을 해라  그러면 금이 연단돼서 아주 순금이 되는 것보다 네 믿음이 더욱 더 깨끗하게  순진한 믿음이 되어지리라 하는 것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지금으로부터 한 40년 전에 저거 마을에, 제가 가는 교회 근방에 금광이  있었습니다. 금광이 있는데, 그래 모두 지금 금을 사고 판다 하기 때문에 내가  가 봤습니다. 보니까 주먹덩이만한 것도 있고 이런 것도 있고 뭐 그런 것이 많이  있습디다. 있는데, '저게 금이냐?' 금이라고. 금이라 하는데 보니까, 금인데  그걸, '저게 금이냐' 이라니까 저걸 불에다가 태우면 처음에는 흙과 돌이 타고  그 다음에는 쇠가 타고 그 다음에는 구리가 타고 그 다음에는 은이 타고 그  다음에는 이제 금만 남는다 그렇게 말합니다. 자꾸, 그걸 가리켜서 연단이라.

그러기에, 우리 믿음을 연단이라 그 말은 의를 연단한다,  여기 거룩이란 말은 자꾸 연단한다 말입니다. 제가 어디까지 됐든지 '이만하면  됐다' 하는 그것은 심판받고 멸망을 받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4장에  바울이 말하기를 내 양심에 자책할 것이 없으나 하나님은 알지 못하심이 없기  때문에. 내게는 성경 말씀대로 다 됐고 내 신앙양심대로 됐고 내대로는 흠 없이  됐지만 이것이 됐다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항상 '여게 또 잡것이 섞여 있나, 여게  뭐 또 제거할 게 섞였나' 항상 제거할 것하고 잡것이 들어 있는가 염려와 근심  그것을 가지고 계속해서 사는 그것이 사도 바울의 마음인데 그 사도 바울의  마음은 곧 성신의 마음을 사도 바울의 마음으로 그렇게 나타낸 것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성경을 기록했지만 기록한 이는 성령이시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거룩이라는 이것을 잊어 버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어쩌든지 게을합니다. 우리는 심령이 게을해서 뭣이든지 보면, 사람들은 그만  게을해 가지고 움직이기를 싫어합니다. 싫어해서. 한 번 선택하면 그 다음에  재선하지 않습니다. 또 선택하고 또 재선하고 삼선하고 사선하고 오선하고  육선하고 십선하고 네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자꾸 선 선선선 선 해서 그렇게  선별하는 요 생활이 네 생활이 되어져야 불타지 안 할 수 있는 의가 마련된다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언행심사가 자꾸 거룩과 경건. 경건은 하나님을  위하는 것인데, 언행심사를 거룩으로 따지고 경건으로 따져서 '이것이  언행심사가 하나님 말씀대로 됐느냐? 됐다' 가렸는데 또 여기서 또 잡것이  생겨납니다. 또 거기 잡것이 또 있습니다. 또 선별했으니까. '이제는 잡것  없겠지.' 또 보니까 또 잡것이 있습니다. 자꾸. 주님 앞에 설 때까지는 모든  것을 네가 안심하지 말고 가리고 가리고 이렇게 가릴라고 하면 주님의 피의  공로가 있고 성신의 감화 감동이 있고 진리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구별하는 자에게는 온전함에 이르도록 해 주신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야고보서 1장 12절에도 보면 '너희들이 여러가지 어려움을  당하거든 참아라 또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겨라' 왜?  어려움을 당할 때에 거게서, 자꾸 어려움을 당할 때에 자기가 참고 견디는  사람이 복이 있다. 그러면. 제가 어떤 옳은 일을 할라고 하면 방해가 오는 것은  자꾸 자기의 잡것을 제하는 것이오. 옳은 일을 내가 할라고 할 때에 방해가 오는  것은 그 옳은 일에게 잡것이 있기 때문에 잡것이 섞였기 때문에 그 잡것을  태우기 위해서 방해가 옵니다. 방해가 와도 그때 옳게 그대로 그것을 계속할라고  하다 보니까 그 잡것이 태워집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주인을 지킬 때 주일  지키지 못하게 하는 그 런 어려움이 오는데 주일을 지키다가 보면 주일을 지키는  것이 다 깨끗해지고 온전해지고 잡것이 자꾸 제거가 됩니다. 이래서, '이에  대해서 무엇이든지 그것에 대해서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하나님께서  '인제 됐다'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리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행실이라 하는 것은 뭐 당장에 거룩이 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선별할라고 하면 그 선별하는 것이 그렇게 쉽게 되는 거 아닌 것입니다.

그것을 또 선별하고 선별하고 자꾸 이렇게. 선별하는 그것이 네 생활이 되고. 또  경건, 하나님을 위하는 그것이 자꾸 네 생활이 돼서 그렇게 거룩과 경건 이 두  가지에만 네가 전심 전력을 기울이면 하나님께서 너를 불타지 안 할 수 있는  의로운 자를 만들어 주신다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도 다, 말 많이  말했는데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밤에 하나 말할라고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시면  공중 재림을 하십니다. 공중 재림하시면 그때에 먼저. 예수 믿다가 죽은  사람들이 다 살아나 가지고 홀연히 신령한 몸으로 변화돼 가지고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해 가지고 궁중에서 같이 머물고 있습니다. 거게서 주와 함께 산다  이랬습니다. 살고, 땅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남아 있고 또 안 믿는 사람들이  남아 있고 신불신자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있는데, 고때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아마겟돈 전쟁이라는 이 전쟁이 지금 이 세계로서는 끝나는 전쟁입니다.

 그러면 그 전쟁이 있는데 그 전쟁이 일어나면 그 전쟁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는 전쟁입니다. 그 전쟁은 뭐 자기네들끼리, 보기에는 영토를 두고 싸우는  것도 같고 또 민족의 인권을 위해서 싸우는 것도 같고, 또 여러 가지 자기네들의  뭐 경제권이나 문화나 이런 거 위해서 싸우는 거 같지만 성경에는 그 속에 아주  골심을 딱 들어서 말씀하시기를 이거는 다 어린양으로 더불어 싸우는 싸움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에. 뭘로 하든지 그것은 예수 믿는 신앙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중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이긴다 그 말은 예수님은 그런 것들이 시험할 수 없는  벌써 탁월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벌써 육체를 가지고 있을 때에 그들과 싸워  가지고 그들이 아무 리 해도 예수님을 굴복시키지 못하고 예수님은 그대로  지성과 지공을 지켰기 때문에 예수님은 승리하고 사탄은 패전을 해서 이제는  사탄은 예수님 의 것이 됐습니다. 이러니까,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시기 때문에 그들의 이 전투에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운다는 말은 예수님을  대항하지만 예수님을 대항해도 그들은 대항할 수도 없고 대항할 그 수준에 있지  안하기 때문에 고차원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하고는 대전이 되지를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이기실 터이요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심을 입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진실한 자가 이긴다 그 말은 그들과 싸우는데 안 죽고 산다 그 말  아닙니다. 여게 성경에 이긴다는 그 말씀은, 그들은 우리를 죽일라고 하지만  그들이 우리 죽일라고 하는 게 죽이는 것이 목적 아닙니다. 그들도 우리를  박해해 가지고 죽일라고 하는 것은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그들의 목적은  우리의 신앙 신조와 교리를 뺏들어서 우리 신앙을 뺏들라고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입니다. 그럴 때에도 자기의 신조와 교리를 양보하면 그들이 저거 편이라고  환영을 하고 대우를 하지 대항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도 우리로  더불어 싸우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뺏들라고 하는 것이니까, 신앙 세 가지를  뺏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성경 말씀을 어기도록 하려는 것, 또 신앙  양심에서 영접한 영감 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영감 자유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  신앙 자유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 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그들의 전투의 목적인 것입니다.

 전투의 목적인데, 그러면 진실한 자는 이긴다 그 말은 그들을 육박전으로 해  가지고 그들을 이기고 육체가 살아서 남아 있다는 말 아닙니다. 육체야 살아  남아 있든지 말든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이긴다는 말씀은 그들은 진리를  빼앗을라고 했는데 진리를 뺏기지 안했기 때문에 이겼습니다. 영감을 빼앗을라고  했는데 영감을 뺏기지 안했기 때문에 이겼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  모시고 사는 일을 못하게 할라고 했는데 하나님 모시고 사는 일 뺏기지 안했기  때문에 이긴 것입니다. 이 승리를 말합니다. 이긴다 말은 이 승리를 가리켜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때에 땅에 있는 모든, 이 아마겟돈 전쟁이라는 이 전쟁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는 전쟁이기 때문에. 물론 이런 저런 전쟁을 저들이 구실은  내세우기를 뭐 이 민족과 저 민족도 싸우고 이 나라와 저 나라도 싸우고  싸우기는 싸우지만 성경에 보면 뿌럭지는 한 짐승인데 한 짐승에게 일곱 머리와  열 뿔이 돋아 가지고 그러니까. 한 짐승 내나 같은 짐승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싸우는 그 싸움의 목적은 어디 있느냐? 우리의 신앙을 삼킬라고 하는 그  전쟁이요 우리의 신조와 교리를 삼킬려고 하는 그 전쟁이요 우리의 구원을  삼킬라고 하는 그 전쟁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불심판에 타지 아니할 그 의, 의  그것을 삼킬라고 하는 그 전쟁입니다.

 그러면, 그 전쟁인데, 어떤 사람은 이 의를 뺏기지 안할라고 하니까,  여게서부터 지금 오늘 밤에 증거할라고 하는 목적입니다. 의를 빼앗기지 안  할라고 하니까 그만 순교를 당합니다. 의를 뺏기지 안할라고 하니까 총 놔  죽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뭐 불에 태워 죽이는 것도 있을 것이고, 가죽을  벗겨 죽이는 것도 있을 것이고, 눈을 빼고 곤봉으로 때려서 다 전부 그만 피,  피떡과 같이 돼 가지고 그만 그래 가지고 죽이는 것도 있을 것이 그 뭐 여러  가지, 몸을 찢어 가지고 죽이는 것도 있을 것이고 별별 방편을 가지고 고문과  고행을 해서 자기 의를 내놓으라고. 이 불타지 안할 의를 내놓으라고 그렇게  여러 가지 고문과 고행이 있을 것입니다.

 있는데, 요때부터 잘 들으십시오. 의를 그들이 빼앗을라고 할 때에 의를 내주면  그만 그들은 모든 박해 대신에. 의 내준 그 사람을 환영을 하고 그 사람을  대우를 하고 아주 그 사람에게 얼마든지 좋은 대우를 해 줄 것입니다. 그러나,  의를 빼앗기지 안하는 사람은. '아. 암만 내가 살기 위해서 의를 뺏겨 봤자 의를  내주고 산 이 생명은 조만간에 이것은 다 죽고 말 것이니까 내가 죽어도 의는  내주지 안하겠다. 내가 어떻게 고문과 그 행을 당해도 의는 내주지 안하겠다. 내  사업을 뺏겨도 의를 내주지 않겠다' 이래 가지고 의를 내주지 안할라고 함으로써  여러 가지 곤욕이 있지만 서도 최고의 곤욕은 뭐이냐 하면 죽음인 것입니다.

죽는 것입니다. 죽임 당한 사람은 의를 내주지 않기 위해서 죽임 받았습니다.

의를 내주지 않기 위해서 눈을 빼였으니까 그 눈은 의의 것이 됐고, 의를 내주지  않기 위해서 손을 잘랐으니까 그 손은 의의 손이 되겠고, 의를 자기가 내주지  않기 위해서 온 전신이 다 마구 가죽을 벗기고 이와 같이 했으면 그 가죽은 의의  것이 됐고. 의를 내주지 않기 위해서 옥 베임을 당했으면 그이의 생명과 그이의  전신 전체 안팎은 다 의의 것이 됐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의의 것이 되지  안했습니까? 의를 쥐고 놓지 안할라고 했으니까 의의 것이 안 됐습니까? 의의  것이 됐고, 그 사람은 의의 것이 됐고 의는 저의 것이 됐고 의와 그 사람과  하나가 됐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죽임을 받았는데 즉시 부활해 가지고 공중에  주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것을 가리켜서 고린도전서 15장에도 홀연히 변화한다 했습니다.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사람들은 홀연히 변화한다' 하는 것은 홀연 변화라 말은  안 죽고 변화하는 것으로, 그전에 저도 처음에 예수 믿을 때에는 그것을 그렇게  깨달았습니다. 다른 사람들한테 배운 것도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깨달았는데 그  후 왜정 말년 신사 참배를 지낸 뒤에 그 때부터는 좀 깨달음이 달라졌습니다.

달라져서, 요한 계시 20장에 보면 '첫째 부활에 참여한 사람이 복이 있고' 첫째  부활에 참여 안한 사람들은 다 복이 없습니다. 그러면, 부활이 몇 번 있느냐?  부활이 똑 세번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 부활이 있었고, 또 하나는 성도의 부활  이것을 가리켜서 생명의 부활이라고 말했고. 그 다음에 나머지기 부활은  이방인의 부활인데 그 부활을 가리켜서 심판의 부활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첫째 부활에 참여한 사람들이 다 구원을 얻는다 이랬기 때문에  '홀연히 변화한다' 라는 것이 그것이 죽어 가지고 몇 십 년이나 몇 백 년이나 땅  속에 묻혀 썪어 가지고 원소가 돼 가지고 있다가서 부활하는 게 아니고 즉시.

이래 죽든지 저래 죽든지 즉시, 그 의를 내주지 안할라고 함으로써 즉시 죽음을  당하니까, 죽임당하니 죽임당하는 그 시간에 동시에 신령한 몸으로 변화가 돼  가지고 가니까 죽은 시체는 없지, 죽은 시체는 없지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니까  변화된 거는 눈에 보이지 안하지. 변화된 거는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변화되고 난 다음에는 제자들이 볼라 해도 보지  못하다가, 이제 볼 수 있을 때는 같이 봤고 또 같이 음식을 먹을 때는 먹었고  같이 동행할 때는 동행했고 내 옆구리를 만져 보라 할 때는 만져 봤고 또 안  보일 때는 안 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홀연히 변화하니까, 죽어 가지고 즉시 변화를 받으니까 그 몸은  부활했기 때문에, 신령한 몸으로 부활했기 때문에 시체는 보이지 안하지 부활한  거는 보이지 안하지. 이러니까, 금방 사람들이 죽임 당한 것만 보고 모두  생각하기를 '아마 죽여 가지고 저 시체를 물에 갖다 넣었나 저 시체를 어디 갖다  묻었나?' 죽임을 당한 사람을, 성도들은 옆에서 보고 '저래 죽였으니까 아마.

그놈들이 저래 죽여 놓고 저 시체를 어디 물에 갖다 띄웠는가? 어디 구덩이 가서  묻었는 갑다, 그랬는가 보다' 이렇게 생각할 것이고. 또 죽인 그 자들은 죽여  버렸으니까. 죽였으니까 죽여 버렸으니까, 죽여 버렸으니까. 죽여 버렸으니까.

그 뒤에 보니까 시체가 없습니다. 시체가 없으니까 '아, 이 자들이 지금 그  시체를 다 가져갔구나. 그거는 일 추었다. 가져갔으니까, 그거 여기 썩고 그라면  안 됐을 터인데. 추었다' 인제 그들은 믿는 사람들이 그 시체를 가져간 줄 알 그  또 믿는 사람들은 그들이 그 시체를 지금 어디로 처리한 줄로 그렇게 알고  이러니까 그 시체는 모릅니다.

 그런데, '거게서 인제 그 사람이 보고 벌써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에 자기가  깨달은 사람들은 '아, 이것이 벌써 마지막으로 환난과 핍박이 이와 같이 심하게  돼지고 이라는 거 보니까 아마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 때다.' 재림은 안  보입니다. 재림은 공중 재림이기 때문에 땅에서는 모릅니다. 벌 써 아마갰돈  전쟁이라는 전쟁만 시작돼 가지고 그 전쟁이 점점 맹렬해져 서 믿는 사람들은  하나도 빠짐 없이 전부, 이것을 가려서 다 신앙을 대적 해 가지고 의를 다  빼앗을라고 그들이 하는 이것이 점점 이래 '심해져가는 것뿐이지 예수님의  재림은 모릅니다.

 그러기에 성도에 박해가 있습니다. 박해를 보고 여러분들이 이 성경을 배웠기  때문에, 이제 보니까 '사람이 죽임을 받았는데 그 시체가 없다' 그럴 때에 일반  사람들은, 성경 모르는 사람들은. 성경을 모르는 무식한 신자들은 그때에 볼  때에 '아, 시체는 그들이 아마 어디로 간수했는가 보다' 이래 알 것이고, 성경을  아는 사람들은 '아 그들이 사람들이 이렇게 여러 사람들을 박해해서 죽였는데 그  죽이는 것을 언제 그들이 그 시체를 간수했겠느냐? 이는 분명히 이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해서 이 시체가 없어진 것이다.' 알 수가 있다 말이오. 알 수  있으니까 '아, 이러니까 나도 나도 이재 순교당해 가지고 나도 이제 첫째 부활에  참여할란다' 그 잠깐 동안 주를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 영감을 위해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위해서 자기가 순교 당하면 순교 당한 그 심신의 기능, 과거에,  과거에 구원시키지 못한 기능은 그거는 할 수 없지만 현재에 남아 있는 심신의  기능 속은 다 구원이 된다 말이오. 그런 때에. 노인들은 남아 있는 심신의  기능이 얼마 됩니까? 그거 구원 뭐 돼 봤자 이렇지만 젊은 아이들은 그때 심신의  기능이 다 구원 얻으니까 이제 마지막에 홀빡, 몽땅 몽땅 이거 심신의 기능  구원을 다 얻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럴 때는 우리가 볼 때에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곧 예수님의 재림은  가까왔습니다. 벌써 아마겟돈 전쟁이라는 전쟁은 세계전입니다. 세계전이 일어날  때에 그 전쟁이 일어나면 그저 영토를 위해서 전쟁하고 사상을 위해서 전쟁하고  모든 이런 전쟁이 일어나지만 이번에 아마겟돈 전쟁은 어린 양의 구속을 완전히  빼앗을라고 하는 그런 전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의 불에 타지 안할 수 있는 그 의를 빼앗을라고  하는 전쟁이기 때문에 이 전쟁이 일어나면 믿는 사람의 신조와 교리를 뺏들고  신앙생활을 꺾을라고 하는 것이 그들의 주 목적으로,  물론,-이것도 그만 하나 알면 알아야 되지, 아느냐 그거 뭐 모르는 자는 이래도  모르고 저래도 몰라. 암만 가르쳐 줘도 몰라요. 그때에. 물론 그들이 주일날은,  '오늘일랑 주일에 나와 가지고 지금 우리가 단합하자. 너거 주일날을 다른 날은  다 잘 지켜라. 다 잘 지켜라. 우리가 주일날을 범하도록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오늘 천상 총 국민이 모여 '가지고 이와 같이 지금 무슨 일 행사를 하기  때문에 오늘은 천상 나와야 되고, 오늘 나오고 그 다음에는 주일 잘 지켜라'  다른 걸 다 핑게한다 말이오. 다른 걸 핑게하기 때문에 신앙을 뺏들라고, 의를  뺏들라고. 하는 그런 줄을 모르고 착각하기 쉽다 말이오. 그럴 때 그런  여러분들이 어두운 노릇을 하지 말라 그말이오.

 그들이 뭐 여러 가지 박해를 줍니다. '예수를 잘 믿으십시오. 잘 믿고. 하는데  이거 오늘은 천상 이렇다' 오늘은 이렇다 이번은 이렇다 해 가지고 어쨌든지  우리 신앙을 뺏들라고 할 때에. 그들은 말을 그래 하지만 그들도 모릅니다. 그  속에 마귀란 놈은 지금 목적하기를 뭐이냐 하면 우리 의를 뺏들기 위해서  역사하는 것이라 그말이오. 그럴 때에 우리는 '아. 이렇게 이 세계 전쟁이  일어나. 이제 이 전쟁에서 여게 저게서 말 들으면 모든 신앙을 다 삼키는  역사들이 일어나, 이러니까 마지막인가 보다 지금도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공중  재림이 돼 가지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지금 얼마  전에 월남이니 캄보디아니 하는 데 그런 데서 거석한 거 전부, 성경 가지고 보면  그들이 다 신앙 팔고 안 파는 데에서 그것으로써 승패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이런 일이 될 때에 그때에 자기가 소유나 몸이나 생명이 나 그런  것을 다 빼앗겨도 의를 뺏기지 안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의를 뺏기지  안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의를 뺏기지 안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 ○○○교회 조사님, 의를 뺏기지 안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  의를 뺏기지 안할라 하는 사람들은 그때 어찌 되겠습니까? 네, 의를 뺏기지  안할라 하는 사람들은 죽습니다. 그 때 의를 뺏기지 안할라 하면 목숨도 내놔야  되고 몸뚱이도 내놔야 되고 뭐 세상 모든 거 다 내놔야 됩니다. 다 내 놓아도  의를 뺏기지 안하는 사람은 죽임 받습니다. 죽임 받으면 그때 그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심신의 기능은 다 영원한 영생으로. 영생하는 기능으로 완전히  옮겨집니다. 영생하는 기능이 됩니다. 의의 기능이 됩니다. 영생하는 기능이  됐습니다. 그러면, 영생하는 기능이 됐으니까 그 사람은 즉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합니다. 부활해 가지고 공중에 가서 주님을 영접하고,  그때에 자기가 죽지 일기 위해서, 그때라도 또 뭐 좀 땅에 있는 거 이것을  아까와서 이거 뺏기지 않기 위해서 이것을 가지기 위해서 의를 판 사람들 은  어찌됩니까? 의를 판 사람들은 죽습니까 안 죽습니까? 네? 의를 판 사람들은  죽습니까 안 죽습니까? 안 죽습니다. 의를 판 사람들은 안 죽습니다. 의를 판  사람들은 안 죽는데 그 사람들은 어찌 되느냐? 마지막에 심판의 불에서 다 타서  멸망받고 맙니다. 심판의 불에서 타고 죽습니다.

 그러면, 택함을 입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의를 가짐으로, 의를  가짐으로 그들의 손에 죽는 사람 있고. 의를 가짐으로 그들의 손에 죽는 사람  있고 의를 가지고 내주지 안함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고 그 기능이 다 영생하는 기능으로 완전히 홀연히 변화돼  버립니다. 그 순간에 변화돼 버립니다. 그래 가지고 공중에 주를 영접하고, 의를  판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죽지 안하고 의를 판 사람들은 심판의 불에 죽습니다.

심판의 불에 죽는 사람들은 어쩌냐?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죽기는 죽습니다'  택한 자들이 먼저. 죽고 그 다음에 불택자들을 죽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사람의  손에 죽지 아니한 사람은 이 심판의 불에 죽습니다. 심판의 불에 죽고, 또  그들에게 죽되 이제는 의 때문에 죽는 게 아니고 의 때문에 죽는 게 아니고,  전쟁에서 죽든지 혹은 심판의 불에 죽든지 이제 그거는 의 때문에 죽는 게  아니고 죽습니다. 의 때문에 죽는 죽음이 있고 의 때문에 죽는 죽음이 아니고  의는 다 내줬지만 그때 그렇게 동원돼 가지고 전쟁하다가 전쟁에서 죽임을  당할런지, 의 때문에 죽임당하는 사람이 있고, 택자로서의 때문에 죽임당하지  안하는 사람들은 전쟁에서 죽든지 전쟁에서 안 죽으면 심판의 불에 죽든지  죽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재림 때에 기독자들은 두 가지 죽음을 하는데 의 때문에  사람에게 죽임당하는 사람이 있고, 또 의를 팔고, 의는 팔아 버렸지만 혹은  심판의 불에 타서 죽든지 그렇지 않으면 전쟁에 죽든지 그 죽는 두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 전쟁에 죽는 죽음을 가리켜서 '곡식을 먼저 거두고 그 다음에는  포도송이를 거두는데 포도송이를 거둬서 포도즙 짜는 틀에다 갖다 넣고 밟으니까  그 피가 일천 육백 스다디온이 흐른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것은 심판의 불로  태우는 것이 아니고 전쟁으로 죽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전쟁으로 죽고, 이제  심판의 불로 태워 죽고 이라는데, 믿는 사람들이 의를 인해서 죽는 죽음이 하나  있고, 의를 돤 사람은 의를 판 사람은 의를 팔면 살 줄 알아도. 의를 팔면 살 줄  알아도 의는 팔았지만 이제 전쟁에서 죽는 죽음을 죽든지, 의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 전쟁에 죽는 죽음을 죽든지 그렇지 않으면 심판의 불에 타 가지고 죽든지  신자의 죽음이 이렇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의 때문에 죽은 죽음이  있고 의를 팔고 죽은 죽음이 있으니 그 죽음은 전쟁에 죽었든지 불에 죽었든지  두 가지 죽음이 있다 이것이 마지막에 예수님의 재림 때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택자들이 전쟁에 죽었든지 또는 심판의 불에 타서 죽었든지 죽으면  그거는 어찌 되느냐? 그거는 죽으면 예수님이 우리의 형체. 이 형체 말이오 이  형체는 그 사람의 행위 여하에 따라서 부활하는 것이 아니고 그 형체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부활하기 때문에 그 부활은 택한 자들 이 죽는 날까지 하나님을  배반하는 무신론자의 노릇을 한다 할지라도 그 몸뚱이는 부활합니다. 왜? 이거는  그 행위로 말미암아 부활하는 게 아니 그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부활하기  때문에 그 부활은 꼭 같은 부활을 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 기능은. 기능은  그것은 만일 심판의 불로 탔으면 그 기능은 완전히 죽어 버렸습니다. 죽고 그저  형체만 부활합니다. 또 전쟁으로 죽어도 죽었으면 그 형체만, 부활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세에 예수님의 재림 때는 의로 인해서 죽은 죽음이 있고 의를  팔고 죽는 죽음이 있어 두 가지 죽음이 있으니. 의를 팔고 죽은 죽음도 부활할  때에 그 형체는 부활하나 그 기능은 다 영원한 사망으로 죽어 버리고 만다, 또  의로 죽은 자는 그때에 어린 아이가 죽었든지 누가 죽었든지 의로 죽은 자는  죽을 때에 자기의 가진 그 심신의 기능은 영원한 생명으로 다 완전히 구원을  얻게 된다 하는 그것을 우리들이 기억하고 있어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때에 우리가 의 때문에 죽임을 받아 가지고 즉시 홀연히 변화돼 버리는 그  변화를 받으니까 그 시체가 보이지 안할 때에 그때에 그들이 어디로 그 시체를  치웠는가 그렇게 생각지 말고, 홀연히 변화됐다는 것을 알고 '이미 때는 됐다'  하는 그것을 깨닫고 이래도 저래도 죽기는 죽는 것이니까 이제 예수님의 대속의  이 의를 벗지 안하고 이 의를 가지고 의를 내주지 안하고 내가 죽어서 내게 있는  심신의 기능을 완전히 영생으로 다 부활시키겠다 하는 요것을 여러분들이 단단히  가지고 놓지 안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미 죽기는 죽습니다. 죽기는 죽는데  의로 죽으면 영광의 구원이 다 되고 심신의 기능이 영원히 구원 얻어 가지고  자기의 영원한 자기 기능이 되어지고, 의를 팔고 죽으면 심신의 기능은 완전히  멸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의를 가지고 의 때문에 죽은 성도와 의를  팔고 죽은 성도와 그 두 성도의 같은 것이 뭐이며 다른 것이 뭐입니까? 자 같은  것이 무엇이며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내가 말할 터이니까 여러분들이  속으로 각각 대답을 해 놓고 내 대답이 맞았는가 자기 대답이 맞았는가 안  맞았는가 그걸 좀 살펴보십시오. 그때에 예수님이 공중 재림하시고 땅에서는 칠  년 대환난의 아마겟돈 전쟁이 일고 그 전쟁 끝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모든  것을 다 사를 터인데 그때 사르면서 그 두 가지로 나타냅니다. 의와 불의를  나타냅니다. 그러기에 '땅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와 불의로 나타나는데 그때 불의한 것은 다 타 버립니다. 시체도 탈 것이요 다  탈 것이요 다만 의로운 거만 남아 있을 터인데 그때에 성도의 죽음이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의를 안 내주고 의를 제가 가지고 의를 뺏기지 않기 위해서 의  때문에 죽임 받은 성도가 있고. 의는 다 뺏길 대로 다 뺏기고 전쟁으로 죽든지  심판의 불로 죽든지 죽는 죽음이 있으니 성도의 죽음이 두 가지라. 택한 자들의  죽는 죽음이 두 가지인데, 두 가지 죽음에 대해서 뒤에 얻는 구원이 같은 거  있고 다른 거 있는데 두 가지 죽음을 죽은 그 성도들이 같은 구원은 무엇입니까?  요걸 지금 대답해 보십시오. 같은 구원은 무엇입니까?  같은 구원은 이 고기덩어리의 이 형체 부활은 꼭 같습니다. 형체 부활은 꼭  같습니다. 그러면, 의로 죽은 자나 의를 팔고 죽은 자나 형체 구원은 꼭 같고  기능 구원은 다릅니다. 기능 구원은 의로 인해서 죽은 자는 그 기능이 다  영생으로 완전히 변화돼 버렸고 의를 팔고 죽은 자와 기능은 그 기능이 다  영원한 사망을 받았기 때문에 부활은 부활하지만 기능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그  사람은 꼭 같이 이목구비 수족이 꼭 같이 있는 사람이요 체중이 다 같이, 한  만일 십오 관이면 십오 관, 십육 관이면 십육 관 되는데, 다 같이 십오 관이  되는데, 십오 관이 되는데 그 몸뚱이는 다 같이 십오 관이 되지만 한 사람은  십오 관 되는데 그저 고기덩어리가 질질 구부는 거와 같이 슬슬 구불러 다니고  이렇게. 그리 안 하면 겨우 걸음발이나 해 가지고 돌아다니지만 그 속에는 무슨  아무 기능이 없습니다. 아무 기능이 없어. 이 세상에서 보면 그렇게 체중은 꼭  같은 사람이지만 글자도 하나도 몰라, 기술도 하나도 없어 재산도 없어. 영광도  없어. 권세도 없어. 뭐 활동력도 없어 총명도 없어 지혜도 없어 바보가 돼  가지고 있는 그런 그것이. 기능이 다, 기능이 아주 저능 기능이 저능이라,  기능이 아주 낮다, 기능이 그거는 완전히 없다. 기능이 완전히 무능하게 됐다 또  기능적으로는 완전히 죽은 자와 같이 됐다 하는 그말입니다.

 그거 모양으로 부활할 때에 그 두 가지 죽음에 같은 것은 외형이 부활하는 것은  인간의 공로로 부활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공짜 배기로  부활하기 때문에 그 공짜배기 부활, 외형 부활은 꼭 같고, 자기 행하는 그  행함의 공로를 따라서 구원 얻는 그것은 기능 구원이기 때문에 기능 구원은  다르다 요렇게 깨닫고 답을 가져. 쏴 바로 답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정직하게 손을 들어 보십시오. 자기 답이 내가 말한 대로 맞은 사람은 맞았다고  하고 안 맞은 사람은 안 맞았다고 서 그렇게 손을 들 어 주십시오. 그러면. 두  가지. 택한 자들의 죽음은 두 가지 죽음인데, 같은 외형 부활은 같다 요렇게  자기가 답안을 생각한 사람은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거의  다입니다. 또 죽음은 두 가지 죽음이 있는데 두 가지 죽음한 사람의 다른 구원은  뭐이냐? 기능 구원은 다르다, 하나는 기능이 다 죽었고 하나는 기능이 다  영생으로 살아났다, 기능 구원은 다르다 요렇게 자기가 혼자 생각해서 답을 낸  사람은 손 한번 들어 봅시다. 네, 그라면 여러분들이 잘 알았으니까 앞으로 이런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때는 가까왔습니다. 뭐 없습니다. 이러니까 그저. 그럴 때도, 사람은  미혹이 많습니다. 이 생명의 미혹. 생의 애착욕의 미혹이라 하는 것 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제가 6.25 때에 봤습니다. 사람들을 야전 전화줄 야전 전화  줄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봤는가 몰라도 실라끈 같이 새카만데 그 새카만  그것이 속에 구리 쇠가 들지 안했고 새카만데 강철이 들었습니다. 새카만데  강철이 들었기 때문에 어떻게 질긴지 모릅니다. 그 전기줄 쪼그만한 그게  쪼그만하지만 장골 셋이고 넷이고 달려도 달립니다. 그만치 질깁니다.

 그 야전줄로 가지고 다 사람들을 볼끈, 허리 볼끈 묶고 또 여기 팔 볼끈 요래  저 둬져침해서 묶으고. 뒷져침해서 팔 묶으고 허리 묶으고 요래 다 묶어 가지고  가는데 묶어 가지고 저 지금 구덩이에다 묻어야 될 터인데 이걸 구덩이에다 넣어  놓고 죽여야 뒤에 이거 쉽지. 이러니까, 거게서 묶여 있는 사람에게 봐서 힘 좀  쓸 만한 사람에게 '너 이 팔 끌러 줄 터이니까 이거 구덩이 팔래?' '예' 서로  팔라 합니다. 거기 묶여 왔으니까 그거 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생의 애착욕은  이렇게 사람들을 유혹시킵니다. 이래 가지고 그래 몸뚱이는 묶여 가지고 있고,  몸뚱이는 묶여 가지고 있고 팔만 풀어 놓으면 마구 힘대로 이거 구덩이를  팝니다. 구덩이를 안 파면 몽둥이로 두드리면 막 힘대로 팝니다.

 힘대로 파면, 힘대로 파 놓고, 그걸 묻어야 될 터이니까 또 그 안에 먼저 묶인  걸 다 그대로 집어넣습니다. '들어가거라.' 들어가라 하면 거기서 뭐 들어갈  거야 뭐 있습니까? 죽어도 밖에서 죽지 뭐. '안 들어가면 죽인다' 죽일라고  들어가라 하는데 안 들어가면 죽인다 하고 이라면 들어갑니다. 이렇게 인간들은  연약합니다. 여러분들, 죽음 앞에는 정신 없습니다. 들어가 봤자 죽을 거  아닙니까? 뭐 그때 그거까지 다 뭐 순종할 게 뭐 있겠소? '안 들어가면 죽인다.'  꾸벅꾸벅 그 속으로 들어갑니다. 들어갑니다. 안 들어간다 하면 죽을 터이니까,  거게서 '너거 뭐 들어간다고 안 죽일 것이가?' 말이라도 한 마디 하면 그런데  말한 마디도 못 합니다. 행여나 살까 싶어서. 말 한 마디도 못 하고 들어가라  하면 들어갑니다. 그래 가지고 죽입니다.

 죽였으니까 나머지기 남은 사람 또 죽일 줄 알지 않습니까? 그라고 난 다음에  또 거게 하나 힘 센 사람 하나를 이제 풀어 주면서 '너 이거 묻을 래 안 묻을래?  손 끌러 줄 터이니까 묻겠나 안 묻겠나?' '예, 묻겠습니다. 예 묻겠습니다.'  아무 정신 없습니다. 막 시키는 대로 그래 합니다. 그래, 그걸 다 끌러 주면,  몸뚱이만 묶고 끌러 주면 거기서 제가 묻습니다. 제가 파묻고 난 다음에 한 치  묻었으니까 또 위에 묻힐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 이제, 구덩이 있으니까  '들어가거라. 안 들어가면 죽인다' 하면 또 들어갑니다. 다 들어가고 난 다음에  마지막에 하나 있는 거, 있는 거를 '너 이거 손 끌러 줄 터이니까 묻을래?' 저는  살릴 줄, 알고 '예 묻겠습니다.' 다 묻고 난 다음에는 나머지기 하나 그거는  죽여 버리고 그만 묻지 안하고 가 버립니다. 이렇게 사람은 죽음에 대해서는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입니다.

 제가 안의 함양읍 교회에 그때 집회 인도하러 갔었는데 가니까 신문 기자가  하나 집사라고 하나 있는데 그 사람이 참 아주 은혜를 받으면서 눈물도 흘리고  그랬습니다. 제가, 와서 간증을 하면서, 그때 제가, 그때 저는 조사입니다.

'조사님, 이 손을 보시이소.' 손에 보니까, 손에 보니까 새파라이, 요 양쪽 손이  새파라이 요래 가지고 새파래 가지고 있어요. 이게, 묶여 갔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너 지금이라도 예수 안 믿는다 하면 싸 줄 터이니까 예수 안 믿는다  할래?' 다른 사람은 안 믿는다고 다 하고, 예수 안 믿는다고 하고-그 사람들은  다 죽었는데 요 사람은 그래도, 집사인데, 내가 죽었으면 죽었지 몇 해나 살라고  내가 안 믿는다고 할 수 있겠느냐? '나는 그래도 예수 안 믿는다 소리는 못  하겠습니다.' '네 이놈, 그라면 묶여라.' 딱 잡아 묶어 놨다 말이오.

 묶어 가지고 가는데 가면서 기도했더랍니다 기도하면서 '주여, 어쩌든지 내가  죽기는 죽는데 내 영혼을, 내가 죄만 짓고 더럽게 믿었지만 날 구원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말하면서 '그래도 내가 거기서 주님을 팔지 안하고 믿는다고  증거하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어쩌든지 주님 날 구원해 달라고. 그라면서도  기도를 했대요. '주님, 여기서라도 주님은 날 구원할 수가 있지 않습니까?'  이라면서, 이래 팔을, 이래 이라면서 '구원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라니까  부시부시하게 이상히 손이 풀려 지더래요. 풀려지고, 손이 풀어졌어. 또 이래.

풀어졌는데, 또 이래 가면서 허리 맨 걸 또 이리 또 이래 가지고 이래 슬그머니  이래 또 벗으니까 쑥 풀리더래요. 이래도 이제 그걸 그 사람들은 못 봤지.

이러는데. '자, 여기서 뛰어 가면 당장 총으로 쏠 터이니까 이제 죽기는 죽을  터인데 뭐 가다가 죽으나 그만 여기서 묶여 가지고 죽으나 양 판 쳐놓고 한번  달려보자' 이래 가지고 훅 튀어서 달아났다 말이오. 달아나니까 뒤에서 따바리  총으로 데데데데데 놓는데 놔도 안 맞더래요. '그래 가지고 도망쳐 가지고 내가  나왔습니다.' 그래 가지고 간증을 합디다. 거게서도 하나님은 믿음을 보십니다.

주를 위해서 생명을 버린 자는 살았는데 살기 위해서 주님 버린 자는 다 죽었어.

6.25때 그때 참 너무 기적들이 많았습니다.

 이래서 오늘도 여러분들이, 왜 이 말을 하느냐 하면 생명의 애착욕. 살고자  하는 욕심, 생명의 애착욕이라고 하는 것은 상상도 못 하게 굉장한 것입니다.

그거 보십시오. 그런 가운데서도 거게서 애착욕 가지고 그란거 십자가에 달린 그  한편 강도도 십자가 못 박혀 죽었으니까. 피 다 흐르니까 죽는 거 아닙니까?  죽는 것이면서도 예수님을 욕한 거는 뭐 때문에 욕했습니까? 예수님을 그 밑에  있는 못 박은 자들이 욕을 하니까 그와 같이 예수님 욕하면 행여나 그들에게  동정받아 가지고 살까 그런 생각 가지고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욕을 하고  죽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평소에 얼마나 준비하지 안하면 마지막 그럴 때에  생명의 애착욕이 들어서 이제 의를 팔고 갑니다. 의를 팔고. 이러니까 평소에  기도를 많이 하고 뭐 아주 거기 대해서. 밤낮 거게 대해서 기도하고 내가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바칠지라도, 장기간의 고문과 고형이 와도 어떻게 된다 할지라도  내가, 의는 내가 팔지 안하고 의를 내가 가지고 있지 이렇게 평소에 의를  만들라고 거룩한 행실과 경건을 이렇게딴 이 준비하고 기도해서 이 의가  자기에게 쌓여지고 하나님 보실 때에 '됐다' 인정함을 받는 그 사람이라야 죽음  앞에서 의를 자기가 보존하고 의로 인해서 자기 기능이 한꺼번에 죽고, 한꺼번에  죽는 것은. 한꺼번에 죽는 것은 죽음에 속한 것이. 죽음에 속한 것이 의 때문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죽음에 속한 것이 의 때문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죽음에 속한  것을 벗고 의에 속한 것이 돼 버리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것을 단단히  기억하고 우리가 기도하고 준비합시다. 지금은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 때입니다.

아주 말세지 말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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