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윤리 개요

2007.05.20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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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반석     번호 : 23
선지자선교회 게시일 : 2006/02/05 (일) PM 05:47:15  (수정 2006/02/24 (금) AM 00:47:37)    조회 : 329  


■ 기독교 윤리 개요

AN OUTLINE OF
CHRISTIAN ETHICS


김효성 목사
Pastor Hyo Sung Kim
Th.M., Ph.D.


옛신앙
Old-time Faith
2002


옛신앙 출판사(Old Faith Press)
     www.oldfaith.net
121-884 서울 마포구 합정동 3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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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제10-1225호
2002년 2월  일 (초판)



♣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正確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내용 목차

서론   7

인간의 삶의 목적   7
기독교 윤리의 개념과 기준   7
기독교 윤리의 원동력   10
기독교 윤리의 내용들   15
십계명의 서문   19
거룩   19
헌신   20
순종   22
의, 선, 진실   23
겸손   24
윤리적인 말   25

1-4계명의 요약   26
경건   27


1계명   31

1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과 금지된 죄들   31
공예배   33
찬송   35
현대 기독교 음악(CCM)   39
타종교인들에 대한 태도   41


2계명   43

2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과 금지된 죄들   43
제사, 차례, 조상 숭배   45
현대적 우상: 돈, 지식, 인간, 쾌락   46
마리아 숭배   46
우상 제물 문제   48

3계명   49

3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과 금지된 죄들   49
합법적 맹세와 서원   50


4계명   52

4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과 금지된 죄들   52
안식일과 주일   55
의식법들--절기   62
십일조   63
취미와 오락   65
5-10계명의 요약   67
이웃 사랑   67
친구   68


5계명   70

효도   72
자녀 교육   75
선생과 학생   80
직장에서의 상하 관계   80
노예 제도   81
국가에 대한 태도   82
사회 정의   84
정치 참여   85


6계명   86

6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과 금지된 죄들   86
자살   87
술과 담배   88
낙태   91
산아 제한과 피임   94
안락사   95
사형   97
전쟁   98


7계명   99

7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과 금지된 죄들   99
결혼   99
성(性)   105
이혼, 재혼, 별거   107
동성애   108
머리, 화장, 옷   110
예술적 아름다움   112
인터넷 음란싸이트와 인터넷 음란 채팅   112
인공 수정   113
대리모   113
인간 복제   114


8계명   116

8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과 금지된 죄들   116
직업, 노동, 근면   117
구제   118
경제 제도/ 사유재산 문제   119
빚 보증   120
도박, 투기, 증권   120


9계명   120

9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과 금지된 죄들   120
거짓말   122


10계명   124

10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과 금지된 죄들   124
자족하는 삶   125
절제   125
자기 부정   126
감사   126
기쁨   127
고난과 인내   128
질병   129


아디아포라   132

계명과 복음의 관계   133

결론   135

성화의 점진성과 불완전성   135
선행에 대한 상급   136

복습 문제들   137

참고 도서   139



서론

인간의 삶의 목적

인간의 제일 중요한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는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그 첫째 문답에서 인간의 제일 중요하고 가장 높은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충만하게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대답은 성경이 계시하는 가장 적절하고 합당한 대답이다. 로마서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시편 73: 24-28,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은 우리의 믿음과 행위를 다 포함한다. 그것은 교리와 윤리를 다 포함한다. 그것은 신학과 윤리학의 문제이다. 신학은 믿음의 내용이 되는 교리들을 논한다. 그러나 윤리학은 행위의 원리들을 논한다. 물론, 신앙 생활에서 이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이 둘이 완전할 때 우리는 건전한 인격자가 될 것이다.


기독교 윤리의 개념과 기준

세속적 윤리의 개념과 기준

일반적으로, 윤리(ethic) 혹은 도덕(moral)이란 사람의 올바른 행위 원리들을 말하며, 윤리학(ethics) 혹은 도덕철학(moral philosophy)이란 그러한 것들을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영어로 '윤리'라는 말(ethic)은 헬라어 에소스에서 나왔는데, 그 말은 습관이나 관습을 가리킨다.

윤리 문제는 고대로부터 철학의 주요한 세 가지 주제들인 존재, 지식, 선 중의 하나인 선(善)의 문제로서 연구되어 왔다. 역사상 윤리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행동의 가치가 어떤 목적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목적론적 이론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에피큐러스 학파는 선의 목적이 개인의 감각적 즐거움이라고 보았다. 공리주의자들은 그것이 인류 전체의 유익과 즐거움이라고 보았다. 이들은 다 넓게는 즐거움 혹은 쾌락이 최고의 선이라고 보는 쾌락주의로 분류된다. 다른 한편, 근세에 유명한 칸트는 비목적론적 입장에서 양심의 지상명령(至上命令)을 윤리의 근거와 기준으로 삼았다.

현대에 와서는 몇 가지의 흐름이 있다. 실존주의에서는, 선한 삶이란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는 모든 것이라고 본다. 분석철학(分析哲學)에서는, 어떤 이들은 윤리적 선을 사람의 욕구와 별개의 것이며 오직 사람의 직관(intuition)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다른 이들은 윤리적 선을 사람의 도덕적 감정과 기분의 표현에 불과하다고 보고 사람이 그것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고 한다. 실용주의는 도덕적 선을 사람의 욕구의 만족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이상의 여러 견해들은 대략적으로 말해 고정된 윤리 규범들을 부정하는 상황주의로 분류된다.

사실상, 하나님을 저버린 죄인들에게서 참된 윤리 개념과 기준을 기대할 수 없다. 일반 윤리는 어둡고 혼미하다. 양심에 근거하여 윤리적 선을 논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불가능한 이상(理想)에 불과하다. 참된 윤리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세계에서만 논할 수 있다.


기독교적 개념과 기준

일반 윤리의 다양하고 복잡한 개념들과 달리, 기독교 윤리란 단순히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계시하여 주신 올바른 행위와 생활의 원리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뜻과 그의 말씀은 윤리의 근거이므로 하나님 안에서만 참 윤리를 말할 수 있다. 또 하나님께서 객관적 계시의 기록으로 주신 성경을 통해서만 참된 윤리를 논할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 윤리학이란 하나님의 특별 계시의 기록인 성경에 나타난 성도들의 올바른 행위 원리들에 대한 체계적 지식이라고 정의된다.

기독교 윤리, 즉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리들의 기준은 성경이며, 오직 성경뿐이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모든 인생들에게, 그리고 특히 성도들에게, 최종적, 절대적 권위이다. 일반 윤리의 개념과 달리, 사람의 전통이나 관습도, 개인이나 사회의 유익과 즐거움과 행복도, 심지어 사회의 여론도 윤리의 기준이나 최종적 권위가 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최종적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진술하기를, "성경 즉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명칭 아래 현재 구약성경과 신약 성경의 모든 책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 . . 이 모든 책들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믿음과 생활의 법칙이다"라고 하였다(1:2).

성경은 하나님의 속성과 뜻을 계시하며 기독교 윤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속성과 의지에 기초한다. 레위기 11:45,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마태복음 5:48,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러나 여기에 즉시 성경 해석의 문제가 뒤따른다. 하나님의 속성과 '감추인 의지'는 불변적이지만(말 3:6; 약 1:17), 하나님의 '드러난 의지'는 때때로 변경되었다. 특히,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의 생활 방식의 차이에서 그러하다. 그러므로 구약의 율법들 가운데는 신약 아래서 그대로 적용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즉 의식법들과 재판법들이 그러하다. 구약의 율법들 가운데 오직 도덕법들만 영속적으로 적용된다.

근래에 세속사회의 윤리적 상대주의 혹은 상황주의의 영향을 받은 죠셉 플레처, 에밀 부룬너, 라인홀드 니버, 죤 로빈손 같은 신학자들은 성경을 절대적 윤리 규범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또 어떤 이들은 윤리적 절대주의를 표방하면서도 특수 상황에서 두 가지의 윤리적 규범들이 충돌할 경우 더 작은 악이나 더 나은 선을 행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에 모든 상황에서의 그리스도인의 행동 원리를 밝히 계시하셨다고 믿는다. 우리는 성경의 윤리 규범이 결코 애매모호하지 않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 권위를 가진다는 것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한 명령을 주셨을 때부터 분명하였다. 하나님의 명령은 온전히 지켜져야 했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그 명령을 어김으로써 범죄하였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인생의 삶의 정확무오한 규범이라는 것은 분명하였다. 신명기 4:39, 40,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하지(上天下地)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없이 오래 살리라." 신명기 5:32, 33,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道)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長久)하리라."

주 예수께서도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처음부터 증거하셨다. 마태복음 4:4, 7, 10, "기록되었으되." 마태복음 15:2-3,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遺傳)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사도 바울도 구약성경의 신적 권위와 자신들의 교훈의 불변적 권위를 증거하였다. 데살로니가후서 2:15,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전통들, 전해 들은 내용들]을 지키라." 디모데후서 3:16, 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기독교 윤리의 원동력

기독교 윤리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만일 우리가 불가능한 이상(理想)에 대하여 논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기독교 윤리는 그렇지 않다. 물론, 구약 시대에 율법을 지키라는 명령과 율법을 지키지 못한 현실을 볼 때, 성경적 윤리가 불가능한 이상(理想)이 아닌가 하고 묻게 될지도 모른다. 기독교 윤리는 가능한가? 그리스도인은 과연 윤리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가? 거기에 대하여 우리는 그렇다고 대답을 한다.



하나님의 요구

기독교 윤리는 구약 시대로부터 하나님의 속성과 요구에 근거하여 왔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거룩하고 의롭게 만드셨고 거룩하고 의로운 법을 지키도록 명령하셨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십계명은 하나님의 완전한 도덕적 속성에 근거한 윤리적 법이다.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는, 아니 모든 인생들은,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들을 본받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인격과 삶을 가져야 한다. 레위기 11:45,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마태복음 5:48,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러나 우리가 구약의 역사에서 아는 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그 의로운 도덕적 법을 지키지 못하였다. 인생의 한 근본적 문제점이 여기에 있었다. 인생이 비록 의로운 생활 원리들을 배운다 할지라도 그것을 실행할 능력이 없다는 데 인간 본성의 실상이 있는 것이다. 구약의 전 역사는 사람의 전적인 부패성과 무능력을 보여준다. 어찌할 수 없는 죄인! 그것이 구약성경의 결론이다.
그렇지만, 신약 시대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은 윤리적 원동력이 되는 한 원리를 갖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의로운 삶을 실제로 가능하게 하는 원리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과 의(義)이며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이다.


그리스도의 구속(救贖)과 의(義)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원동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과 의(義)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3:24). 의는 또한 생명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또한 새 생명을 얻은 자이다. 이 새 생명은 곧 새 생활의 씨앗이다. 그리스도인은 새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새 생명의 씨가 그 속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영혼의 성향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구원 받기 전에는 죄만을 즐거워하던 성향이 구원받은 이제는 죄를 미워하고 의를 소원하는 성향으로 바뀌었다.

옛 죄악성이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옛 죄악성이 이 새로워진 성향을 거스려 싸움을 일으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옛 죄악성은 패배할 수밖에 없다. 그 까닭은, 그리스도인이 완전한 의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은혜로 받은 그 의 때문에 항상 새 힘을 얻는다.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은 바로 이 의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얻은 이 의는 모든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킨 완전한 의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이 의 때문에 다시 죽을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승리는 이미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성도는 윤리적 새 생활을 살 수 있도록 구원함을 얻었다.

실상,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은 성도에게 주시는 윤리적 교훈의 근거요 동기이다. 구약의 도덕법도 이스라엘을 애굽의 속박에서 구속(救贖)하신 후에 주신 법이었다. 출애굽기 20: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신약 성도들의 생활의 동기와 근거는 더욱 그러하다.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고린도후서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에베소서 4:1,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성령의 내주(內住)하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원동력은 또한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자에게 법적인 의를 주시고 그 속에 새 생명을 심어주실 뿐 아니라, 그 의와 생명이 열매를 맺도록 성령으로 그 속에 거하셔서 도우시는 것이다. 이 성령의 내주하심은 신약 성도들이 누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복과 특권과 은혜이다.

이 복은 구약성경에 이미 예언되어 있었다. 에스겔 36:24-28,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방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故土)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이 예언대로 성령께서는 오순절에 강림하셨고 성도들 속에 보혜사 곧 위로자와 격려자로 영원히 거하신다.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성도들 속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그들의 윤리적 생활, 곧 육신의 죄악성을 이기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생활을 지도하시고 도우신다. 로마서 8:13, 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갈라디아서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칭의(稱義)와 율법 준수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말미암아 도덕법을 완전히 지킨 것과 똑같은 완전한 의(義)를 영원히 얻었다면,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무슨 목적 때문이며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얻기 위해서나 구원의 어떤 공로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시 말해, 성도들의 생활은 율법적 의를 이루기 위한 율법주의적 차원의 행위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의를 이미 다 이루셨다. 물론 도덕법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도덕적 속성들에 근거하고 그 속성들을 반영하는 것이므로 영속적이며 따라서 신약 아래서도 성도는 도덕법들을 다 지켜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목적은 단지 하나님께서 이미 법적으로 주신 그 의를 실제적으로 그의 삶 속에서 적용하고 실천하고 실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부도덕한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사용될 것이며,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드러내는 방편이 될 것이다.


믿음과 행위의 관계

여기에 믿음과 행위의 관계가 있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그의 행위에 있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지만(엡 2:8, 9) 회개의 행위가 없이 구원을 얻지는 못한다(마 3:10; 눅 13:3; 고전 6:9). 구원의 조건은 오직 믿음이며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자가 아무도 없지만, 선한 행위는 구원받은 자의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선한 행위가 없으면 참된 믿음도 없다.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또한 그의 믿음이 죽은 것이라면 그의 구원 확신도 헛될 것이다. 이와 같이 구원은 믿음으로만 받지만 선한 행위는 구원받은 자의 필수적 열매이다. 선한 행위는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의 증거이다.

구원받은 자의 행위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행위가 완전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루신 완전한 의에 비교하면 심히 보잘 것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는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행위에 무엇을 첨가하는 행위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한 의를 받았다. 그것은 지극히 영광스러운 사실이다. 우리의 거룩하고 선한 삶은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완전한 의에 합당하게 살아드리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행위를 원하시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성을 증거하는 것이 되며 죄악된 세상에 빛이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성실한 노력

물론 성도들의 윤리적 삶에는 그들 자신의 성실한 노력이 요구된다. 데살로니가전서 4:1,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더욱 많이 힘쓰라." 베드로후서 1:5-10,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 . .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온전함을 위해 성경을 주셨으므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가까이 함으로써 온전함에 이르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기독교 윤리의 내용들

인간의 의무

[대요리문답 91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의무는 무엇인가?  (*이하에는 '대요리문답'이라는 말을 생략함.)

[답]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의무는 그의 계시된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1)
(1) 삼상 15:22; 미 6:8; 롬 12:1, 2.
사무엘상 15: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로마서 12:1, 2 ,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행위 언약

[92문] 하나님께서 처음에 순종의 법칙으로 인간에게 무엇을 계시하셨는가?
[답] 무죄 상태에 있는 아담과 그 안에서 모든 인류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특별한 명령 외에도 계시된 순종의 법칙은 도덕법이었다.1)
(1) 창 2:17; 롬 2:14, 15; 롬 10:5.


도덕법

[93문] 도덕법이 무엇인가?
[답] 도덕법은 인류에게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신 것인데, 각 사람에게 전인(全人) 즉 영혼과 몸의 구조와 성향에 있어서1) 그리고 그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가지는 거룩과 의의 모든 의무들의 수행에 있어서2) 이 법에 대한 개인적인, 완전한, 영속적 순응과 순종을 지시하고 속박하며 그것을 다 지킬 때 생명을 약속하고 그것을 어길 때 죽음으로 위협한다.3)
(1) 신 5:1-3, 31, 33; 눅 10:26, 27; 갈 3:10; 살전 5:23. (2) 눅 1:75; 행 24:16. (3) 롬 10:5; 갈 3:10, 12.


도덕법의 역할

[94문] 타락한 후의 사람에게도 도덕법이 소용이 있는가?
[답] 비록 타락 후에는 아무도 도덕법에 의하여 의와 생명에 이를 수 없으나1); 도덕법은, 중생하지 못한 자나 중생한 자에게 특별하게 소용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크게 소용이 있다.2)

(1) 롬 8:3; 갈 2:16. (2) 딤전 1:8.
디모데전서 1:8,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줄 우리는 아노라."


모든 사람들에게

[95문] 도덕법은 모든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답] 도덕법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과 뜻, 그리고 그들이 따라서 행하여야 할 의무를 알게 하며1); 그들이 그것을 지키는데 무능함과 그들의 본성과 마음과 생활의 죄악된 더러움을 확신케 하며2);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와 불행을 느껴 겸손케 하며3), 또 이로써 그리스도와 그의 완전한 순종의 필요성을 더 분명히 알게 하는 데 소용이 있다.4)
(1) 레 11:44, 45; 레 20:7, 8; 롬 7:12; 미 6:8. (2) 시 19:11, 12; 롬 3:20. (3) 롬 3:9, 23. (4) 갈 3:21, 22; 롬 10:4.


중생치 못한 자들에게

[96문] 도덕법은 중생하지 못한 자들에게 무슨 특별한 소용이 있는가?

[답] 도덕법은 중생하지 못한 자들에게 그들의 양심을 일깨워 다가올 진노를 피하게 하며1)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거나2); 혹은 그들이 죄의 상태와 길에 계속 머물러 있을 때 그들로 하여금 핑계할 수 없고3) 그 저주 아래 있게 하는 데 소용이 있다.4)
(1) 딤전 1:9, 10. (2) 갈 3:24. (3) 롬 1:20; 롬 2:15. (4) 갈 3:10.


중생한 자들에게

[97문] 도덕법은 중생한 자들에게는 무슨 특별한 소용이 있는가?

[답] 비록 중생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행위 언약으로서의 도덕법으로부터 해방되었으며1) 따라서 그 율법에 의해 의롭다 하심을 받거나 정죄를 받지 않지만2);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그 일반적 용도 외에, 도덕법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대신하여 그리고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 법을 다 지키시고 그 저주를 견디셨으므로 그들이 얼마나 많이 그리스도에게 매여 있는지를 보여주며3); 그럼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더 많이 감사케 하고4), 그들의 순종의 법칙으로서 그 법을 따르기를 더 많이 조심함으로써 그 감사를 표시하는 데 소용이 있다.5)

(1) 롬 6:14; 롬 7:4, 6; 갈 4:4, 5. (2) 롬 3:20; 롬 8:1. (3) 롬 7:24, 25; 갈 3:13, 14; 롬 8:3, 4. (4) 눅 1:68, 69, 74, 75; 골 1:12-14. (5) 롬 12:2; 딛 2:11-14.


십계명

도덕법은 십계명에 요약되어 있다. 십계명은 성도의 생활에 대한 좋은 지침이다.

[98문] 도덕법은 어디에 요약되어 있는가?

[답] 도덕법은 십계명에 요약되어 있는데, 그것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으로 전달되었고 그에 의해 두 돌판에 쓰여졌고 출애굽기 20장에 기록되어 있다.1) 처음 네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담고 있고 나머지 여섯 계명은 사람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담고 있다.2)
(1) 신 10:4; 출 34:1-4. (2) 마 22:37-40.


십계명 해석의 규칙

십계명은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들이 진술한 대로 하나님의 율법들을 대표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십계명은 적극적 명령과 부정적 금지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계명이며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요구는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 모두에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99문] 십계명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법칙들이 지켜져야 할 것인가?

[답] 십계명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법칙들이 지켜져야 할 것이다.
1. 율법은 완전하며, 각 사람을 전인적(全人的)으로 그것의 의(義)에 완전히 순응하며 또 영원히 전적으로 순종하도록 속박하며; 따라서 각 의무의 최대한의 완수를 요구하고 가장 작은 정도의 죄도 금지한다는 것.1)

2. 율법은 영적이며, 따라서 말과 행위와 몸짓 뿐 아니라, 이해와 의지와 감정과 기타 영혼의 모든 능력들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것.2)

3. 몇 가지 계명들에서, 동일한 것이 여러 가지 면들에서 요구되거나 금지된다는 것.3)

4. 의무가 명령된 곳에는 그 반대되는 죄가 금지되고,4) 죄가 금지된 곳에는 그 반대되는 의무가 명령되듯이;5) 약속이 첨가된 곳에는 그 반대되는 위협이 포함되고,6) 위협이 첨가된 곳에는 그 반대되는 약속이 포함된다는 것.7)

5.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은 어느 때든지 행해져서는 안되며;8) 그가 명령하신 것은 언제나 우리의 의무이며;9) 그러나 모든 특정한 의무가 항상 행해져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10)

6. 한 가지 죄 또는 의무 밑에 같은 종류의 모든 것이 금지되거나 명령되며; 그것의 모든 원인들과 수단들과 기회들과 모양들, 그리고 그것을 자극하는 것들과 더불어 그러하다는 것.11)

7. 우리들 자신에게 금지되거나 명령된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위치들의 의무에 따라 피하거나 행하도록, 우리가 우리의 위치들에 따라 힘써야 한다는 것.12)

8.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된 것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지위들과 소명들에 따라 그들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며;13) 다른 사람들에게 금지된 것에 있어서는 그들과 함께 피하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14)

(1) 시 19:7; 약 2:10; 마 5:21, 22. (2) 롬 7:14; 마 22:37-39; 마 5:21, 22, 27, 28, 33, 34, 37- 39. (3) 골 3:5; 암 8:5; 잠 1:19; 딤전 6:10. (4) 사 58:13; 마 4:9, 10; 마 15:4-6. (5) 마 5:21-25; 엡 4:28. (6) 출 20:12; 잠 30:17. (7) 렘 18:7, 8; 출 20:7; 시 15:1, 4, 5; 시 24:4, 5. (8) 욥 13:7, 8; 롬 3:8; 욥 36:21; 히 11:25. (9) 신 4:8, 9. (10) 마 12:7. (11) 마 5:21, 22, 27, 28;.마 15:4-6; 히 10:24, 25; 살전 5: 22; 유 23; 갈 5:26; 골 3:21. (12) 출 20:10; 레 19:17; 창 18:19; 수 14:15; 신 6:6, 7. (13) 고후 1:24. (14) 딤전 5:22; 엡 5:11.



십계명의 서문

[101문] 십계명의 서문은 무엇인가?

[답] 십계명의 서문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라는 말씀에 들어 있다.1) 거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주권[왕권]을 나타내시되, 영원 불변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2) 즉 자신의 존재를 자기 자신 안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 가지시고3) 자신의 모든 말들과 일들을 있게 하시는 여호와로 나타내시고;4) 또한 옛날에 이스라엘과 맺으신 것과 같이 자기 모든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시며;5) 그들을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이끌어 내신 것과 같이 우리를 영적 속박으로부터 건져내신다는 것과;6) 그러므로 우리가 그를 우리의 유일한 하나님으로 모시고 그의 모든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신다.7)

(1) 출 20:2. (2) 사 44:6. (3) 출 3:14. (4) 출 6:3; 행 17:24, 28. (5) 창 17:7; 롬 3:29. (6) 눅 1:74, 75. (7) 벧전 1:15-18; 레 18:30; 19:37.


거룩

성도의 기본적 생활 원리는 거룩이다. 거룩은 하나님의 기본적 속성이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다. 물론,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피조 세계를 초월해 계시는 그의 초월성을 내포하지만, 그것은 또한 모든 도덕적 불결로부터 떠나 계심, 곧 도덕적 성결을 의미한다. 이 점에 있어서 모든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의 속성을 본받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반복하여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셨다(레 11:44, 45; 19:2; 20:26 등). 베드로 사도도 교훈하기를,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하였다(벧전 1:14, 15).

거룩의 반대는 불결이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의 모든 더러운 죄악들과 그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인생의 삶이 어떻게 거룩해야 할 것을 너무 명백히 증거한다. 레위기 18:24, 25,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을 인하여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거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성경은 성도가 버려야 할 죄악의 목록을 여러 곳에서 언급하였다. 그 대표적인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마태복음 15:19, 20,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로마서 1:29-31, 불의, 음란(전통 사본),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능욕, 교만, 자랑, 악을 도모, 부모 거역, 우매, 배약(背約), 무정, 원통함을 풀지 않음(전통 사본), 무자비. 갈라디아서 5:19-21,"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간음과(전통 사본)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살인과(전통 사본)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요한계시록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성도는 이 모든 더러운 죄악들로부터 자신을 깨끗케 하여야 한다. 고린도후서 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죄를 떠난 깨끗하고 거룩한 인격이 이상적 인격이다. 에베소서 4:22-24, (직역) "[받았으니, 곧]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이라." 새 사람 곧 구원받은 새 인격, 새 자아의 특성은 거룩과 의이다.


헌신

헌신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매우 기본적인 원리이다. 참된 헌신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의 모든 바른 도덕적 삶이 나온다. 로마서 12:1, 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헌신(獻身)은 말 그대로 '몸을 드리는 것'이다. 몸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삶의 일부분이 아니라 삶 전체의 문제이다. 몸이라는 말 속에는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이 포함된다. 우리의 힘, 우리의 건강, 우리의 재능, 우리의 목소리, 우리의 생명, 심지어 우리의 노력과 수고, 우리의 시간, 우리의 돈까지 포함된다. 우리의 몸이 없다면, 이런 것들은 다 우리에게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며 마치 없는 것과 같다.
성도들의 헌신의 동기는 하나님의 긍휼과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받은 구원이다.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고린도후서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와 같이, 성도들의 헌신은 이방 종교의 금욕적 헌신과 같이 구원의 공로를 이루는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구원의 결과요 열매이다. 이제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주의 피값으로 사신 바 된 것이다. 고린도전서 6:19, 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헌신은 하나님의 이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의 응답인 것이다.

헌신(獻身)의 방법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 몸을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께 몸을 드리려면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자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한다. 로마서 12:2,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되, 그 한 부분만이 아니라 그 전체를, 즉 그의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도록 힘써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책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고 배우고 묵상하며 성경에 정통함으로써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분별할 수 있고 그 뜻에 일치하게 사는 참된 헌신자가 될 수 있다. 디모데후서 3:16, 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순종

순종은 성도의 삶의 매우 근본적 원리이다. 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순종이며 의(義)는 순종이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함으로 타락하였고 그로 인해 아담의 후손된 인류는 다 불순종의 상태에 있었다. 선민(選民) 이스라엘의 역사는 결론적으로 불순종의 역사이었다. 민수기에 기록된 광야 생활의 역사, 사사기에 증거된 반복된 실패의 역사, 열왕기와 역대기에 기록된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국의 패망의 역사,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증거된 포로 귀환 후 부패의 역사가 그러하였다. 인류는 한마디로 부패되어 있었다.

비록 사람이 율법을 온전히 순종치 못하므로 순종이 사람에게 구원의 조건이 되지 못하지만,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순종은 당연한 일이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도덕적 의지에 순종하는 것은 영속적으로 우리의 기본적 의무이다. 신명기 4:40,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신명기 5:32, 33,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로마서 6:17, 18,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구약 시대의 경건한 의인들은 다 순종의 사람이었다. 창세기 6: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세기 22:12, "(아브라함에게)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출애굽기 40:16, "모세가 그 같이 행하되 곧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행하였더라." 민수기 14:24,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우리 주 예수께서 친히 완전한 순종의 사람이셨고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에게 모범이 되신다. 마태복음 26:39,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로마서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빌립보서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히브리서 5:8, 9,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의, 선, 진실

그리스도인의 윤리적인 삶은 또한 의와 선과 진실의 삶이다. 의와 선과 진실이라는 세 마디 속에 구약 율법의 모든 내용이 포함된다. 의(義)는 도덕적 표준에 일치하는 것을 뜻한다. 선(善)은 긍휼, 자비, 사랑 등을 포함한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선하시고 진실하시다. 성도도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성경은 이러한 윤리적 요소들을 강조한다.

창세기 6:9,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욥기 1:1,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예수께서는 산상 설교 중 팔복(八福)의 말씀에서 온유, 의, 긍휼, 청결, 화평 등을 강조하셨다(마 5:3-12). 사도들도 의와 선과 진실을 강조하였다. 에베소서 5:8, 9,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었)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고린도전서 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갈라디아서 5:22, 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친절]와 양선[선함]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야고보서 3:17, 18,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겸손

겸손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매우 고상한 덕으로 인정된다. 겸손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피조물 됨과 더욱이 죄인 됨을 깨닫고 자신을 낮추는 태도이다. 그것은 참 신앙과 순종으로 향하는 첫걸음이다. 인간 본성의 부패성의 대표적 요소는 교만이다. 교만은 우주적 악의 근원인 마귀의 범죄의 내용이었다. 마귀는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항하였다. 디모데전서 3: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인간의 교만도 하나님을 대항하고 거역하는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나아간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후 광야 생활에서 하나님을 항상 거역하였고 그를 속히 떠났고 목이 곧았는데(신 9장), 그것이 곧 교만이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며 범죄하는 죄인들은 한마디로 교만한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만을 미워하신다. 잠언 6:16, 17,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6, 7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교만은 다툼과 분열을 낳는다. 잠언 13:10,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고린도전서 4:6, 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그리스도인의 덕은 겸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겸손한 분이셨으며 또 우리들에게 겸손할 것을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주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겸손히 섬기는 자가 되시고 자신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서이셨다. 마태복음 20:26-28,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또한 예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요 13:4-15)은 서로 용서할 것을 교훈하신 것이지만, 그 속에는 겸손과 섬김에 대한 교훈도 포함되어 있다. 빌립보서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는 겸손으로 일치 단합해야 한다. 에베소서 4:1-3,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빌립보서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윤리적인 말

성도의 윤리적 생활은 말과 행실로 나타난다. 특히, 말은 사람의 인격의 표현이다. 비록 표리부동한 위선적인 말이나 거짓되고 아첨하는 말도 있으나, 대체로 그의 인격은 그의 말로 표현된다고 할 수 있다. 야고보서 3:2,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또 주께서는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2:36). 성경은 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

1. 진실한 말을 하고 거짓된 말을 버리라

출애굽기 23:1, "너는 허망한 풍설[헛 소문]을 전파하지 말라." 잠언 6:19,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 6, 7가지 중에]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잠언 14:25, "진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여도." 잠언 20:10, "한결같지 않은 저울 추와 말은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에베소서 4:15,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디모데전서 3:8,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하지 아니하고."
2. 깨끗한 말을 하고 더러운 말을 버리라

에베소서 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에베소서 5: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3. 유익한 말을 하고 그릇된 비난과 저주의 말을 버리라

잠언 12:18,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잠언 10:20, 21, "의인의 혀는 천은(天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마태복음 5:22, "형제에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에베소서 4:29,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야고보서 4:11, "피차 비방치 말라." 베드로전서 2:1,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

4. 유순한 말을 하고 과격한 말을 버리라

잠언 15:1,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잠언 25:15, "오래 참으면 관원이 그 말을 용납하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골로새서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5. 그러나 권면과 책망의 말도 때때로 필요하다

잠언 27:5,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잠언 27:9,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 잠언 28:23, "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느니라."

6. 신중한 말을 하고 경솔한 말을 버리라

잠언 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잠언 18:2,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하느니라." 잠언 18:13,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잠언 25:11,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 사과니라."

7. 일반적으로는 말을 절제하라

잠언 10:19,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언 11:12, "지혜 없는 자는 그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 잠언 11:13,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잠언 16:28, "패려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장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 잠언 17:8,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잠언 17:27,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 잠언 20:19,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잠언 26:20,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야고보서 1:19,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1-4계명의 요약
우리는 기독교 윤리를 십계명의 순서를 따라 정리하려고 한다.

[102문]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담은 네 계명의 요지는 무엇인가?

[답]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담은 네 계명의 요지는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우리의 영혼을 다하고 우리의 힘을 다하고 우리의 생각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1)
(1) 신 6:5; 마 22:37.


경건

하나님께 대해 성도들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태도는 경건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을 말한다. 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전도서 12 :12, 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콜, whole)이니라." 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요한복음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프뉴마; 영)과 진정(알레데이아)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한복음 6:27, 29,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 . .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디모데전서 4:7, "망녕되고[속되고] 허탄한[늙은 여자들이 말하는]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이스라엘과 유다의 열왕들의 역사를 보면, 그들은 여러 가지 우상숭배에 떨어져 하나님의 큰 진노를 일으켰다. 우상숭배의 죄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죄이며, 참된 경건과 정반대가 된다. 그러나 의인들은 경건하였다. 창세기 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세기 5:22,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창세기 6:9; 8:20, "노아는 . . .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 . . .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후]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창세기 12:8; 21:33, (아브라함은)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 . .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단(미즈베아크)은 짐승을 죽여(자바크) 제사드린 곳을 암시한다.

경건의 필수적 요소는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다. 욥기 23: 12, "일정한 음식보다 [하나님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다." 시편 1:2, (복 있는 자는 악한 자들과 동류가 되지 않으며)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편 119:97, 103, 105, 127, 147-148,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 . .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 . .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 . .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을 금 곧 정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 . .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경건의 또 하나의 필수적 요소는 기도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다니엘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마가복음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마태복음 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누가복음 6: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밤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기도의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그러나 보통 성부 하나님께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한다. 기도의 내용들은 감사와 찬양, 죄의 고백, 간구 등이다. 우리의 간구의 내용은 먼저 영적인 것이고 그 다음에 육신적인 것, 물질적인 것이어야 한다. 또한 먼저 자신의 영적 생활을 위해 기도하고 그 후에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친히 기도의 주요 내용들을 가르쳐 주셨다(마 6:9-13): ①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② 주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이 기도의 내용은 주의 재림으로 말미암은 영광의 천국이 오기를 구하는 것인 동시에, 하나님의 복음이 힘있게 전파되어 택한 백성들이 다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일, 즉 전도와 교회의 설립과 확장을 구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데살로니가전서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③ 주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뜻은 일차적으로 우리 개인과 온 인류의 구원에 관한 것이다. 요한복음 6:39, 40,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④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⑥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기도의 방법에 관하여는, 우선 개인적 경건의 시간을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안식일 계명과 절기들의 규례들을 주신 근본적 이유들의 하나이다. 사람은 어리석은 짐승과 같아서 경건의 시간을 구별하지 않으면 세속적 일들에 분주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한국 교회의 전통인 새벽기도회에 관하여, 비록 옛날과 달리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부득이한 사정으로 밤늦게 자기 때문에 새벽 일찍 일어나기 어렵거나 기도회에 참석한 후 다시 자게 되어 생활 리듬이 깨어지는 일이 있지만, 그러나 새벽기도의 생활은 규칙적인 경건 생활과 기도 생활을 위해 유익이 많다. 새벽기도회에는 말씀을 간단히 전하고 개인적으로 많이 기도하게 하는 것이 좋다.

기도의 장소는 어느 특정한 장소(예컨대, 어떤 기도원이나 혹은 예배당)에 국한시킬 수 없다. 어디서든지 조용한 장소가 있으면 그 곳이 곧 기도의 골방이 될 수 있다. 기도의 소리에 관하여는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묵상 기도는 졸음이나 잡념의 침해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공적 집회시에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자신만 들을 수 있는 정도의 작은 소리로 해야 한다.

경건 생활은 성도 자신에게 현실적으로도 큰 복을 가져온다. 첫째로, 성도는 경건 생활 곧 말씀과 기도의 생활로 그의 신앙 인격과 삶이 더욱 거룩해지고 성숙해진다. 성도에게 있어서 신앙 인격의 거룩과 성장, 삶의 성숙과 온전함은 지상 생활에서 가장 큰 복이다. 디모데후서 3:16, 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둘째로, 성도는 경건 생활을 통해 영적인 힘과 형통함과 평강의 복을 받는다. 역대하 17: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시편 1:3에는 죄를 떠나고 하나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곧 경건한 자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입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고 말씀했다. 시편 119:165,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잠언 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의[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 마가복음 9:29, "기도와 금식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1계명

1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과 금지된 죄들

[103문] 제일계명은 무엇인가?

[답] 제일계명은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너는 내 앞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1)

(1) 출 20:3.

[104문] 제일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은 무엇인가?

[답] 제일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은, 하나님을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요 우리의 하나님이신줄 알고 인정하는 것과;1) 따라서 그에게 예배하고 그를 영화롭게 하되,2) 그를 생각하고,3) 묵상하고,4) 기억하고,5) 높이 여기고,6) 공경하고,7) 찬양하고,8) 선택하고,9) 사랑하고,10) 사모하고,11) 경외하고;12) 그를 믿고;13) 그를 의지하고,14) 소망하고,15) 기뻐하고,16) 즐거워하고;17) 그를 위하여 열심을 품고;18) 그의 이름을 부르고, 모든 찬송과 감사를 드리고,19) 전인적(全人的)으로 그에게 모든 순종과 복종을 드리고;20) 범사에 그를 기쁘시게 하기를 조심하고,21) 무슨 일에든지 그가 노하실 때에는 슬퍼하고;22) 겸손히 그와 동행함으로써 하는 것이다.23)

(1) 대상 28:9; 신 26:7; 사 43:10; 렘 14:22. (2) 시 95:6, 7; 마 4:10; 시 29:2. (3) 말 3:16. (4) 시 63:6. (5) 전 12:1. (6) 시 71:19. (7) 말 1:6. (8) 사 45:23. (9) 수 24:15, 22. (10) 신 6:5. (11) 시 73:25. (12) 사 8:13. (13) 출 14:31. (14) 사 26:4. (15) 시 130:7. (16) 시 37:4. (17) 시 32:11. (18) 롬 12:11; 민 25:11. (19) 빌 4:6. (20) 렘 7:23; 롬 12:1; 약 4:7. (21) 요일 3:22. (22) 렘 31:18; 시 119:136. (23) 미 6:8.


[105문] 제일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무엇인가?

[답] 제일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모시지 않는 무신론;1) 하나 이상의 신들이나, 혹은 참 하나님과 더불어 혹은 대신하여 어떤 신을 두거나 예배하는 우상숭배;2) 그를 하나님으로 그리고 우리 하나님으로 모시고 고백하지 않는 것;3) 이 계명에서 요구된 그에게 합당한 무엇을 빠뜨리거나 소홀히 하는 것;4) 그에 대한 무시,5) 잊어버림,6) 오해들,7) 잘못된 견해들,8) 합당치 않고 악한 생각들;9) 그의 은밀한 일들에 대한 대담하고 호기심을 가진 탐구;10) 하나님께 대한 모든 불경(不敬),11) 미움;12) 자기 사랑,13) 자기 추구,14) 그리고 그 밖에 전적으로나 부분적으로 우리의 생각이나 의지나 감정을 과도하고 무절제하게 두며 그것들로 하여금 그를 떠나게 하는 모든 것;15) 헛된 경박한 믿음,16) 불신앙,17) 이단,18) 그릇된 믿음,19) 불신,20) 절망,21) 고칠 수 없음,22) 심판들 아래서의 무감각,23) 마음의 완고함,24) 교만,25) 뻔뻔스러움,26) 육신적 안심,27)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28) 불법적 수단을 사용함과29) 불법적 수단을 의지하는 것;30) 육신적 기쁨들과 즐거움들;31) 부패하고 맹목적이며 무분별한 열심;32) 하나님의 일들에 있어서 미지근함과33) 죽어 있음;34) 하나님에게서 멀어짐과 배교(背敎);35) 성도들이나 천사들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들에게 기도하거나 어떤 종교적 예배를 드리는 것;36) 마귀와의 모든 약속들과 의논,37) 그리고 그의 제안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38) 사람들을 우리의 신앙과 양심의 주인이 되게 하는 것;39) 하나님과 그의 명령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것;40) 그의 영을 대적하고 근심시키는 것,41) 그의 처분들에 대해 불만하고 조급한 것, 그가 우리에게 내리신 재앙들에 대해 어리석게 그를 비난하는 것;42) 그리고 우리 자신이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선에 대한 칭찬을 운명이나43) 우상들이나44) 우리 자신이나45)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 돌리는 것이다.46)

(1) 시 14:1; 엡 2:12. (2) 렘 2:27, 28; 살전 1:9. (3) 시 81:11. (4) 사 43:22-24. (5) 렘 4:22; 호 4: 1, 6. (6) 시 50:22; 렘 2:32. (7) 행 17:23, 29. (8) 사 40:18. (9) 시 50:21. (10) 신 29:29. (11) 딛 1:16; 히 12:16. (12) 롬 1:30. (13) 딤후 3:2. (14) 빌 2:21. (15) 요일 2:15, 16; 삼상 2:29; 골 3:2, 5. (16) 요일 4:1. (17) 히 3:12. (18) 갈 5:20; 딛 3:10. (19) 행 26:9. (20) 시 78:22. (21) 창 4:13. (22) 렘 5:3. (23) 사 42:25. (24) 롬 2:5. (25) 렘 13:15. (26) 시 10:13. (27) 습 1:12. (28) 마 4:7. (29) 롬 3:8. (30) 렘 17:5. (31) 딤후 3:4. (32) 갈 4:17; 요 16:2; 롬 10:2; 눅 9:54, 55. (33) 계 3:16. (34) 계 3:1. (35) 겔 14:5; 사 1:4, 5. (36) 롬 10:13, 14; 호 4:12; 행 10:25, 26; 계 19:10; 마 4:10; 골 2:18; 롬 1:25. (37) 레 20:6; 삼상 28:7, 11; 대상 10:13, 14. (38) 행 5:3. (39) 고후 1:24; 마 23:9. (40) 신 32:15; 삼하 12:9; 잠 13:13. (41) 행 7: 51; 엡 4:30. (42) 시 73:2, 3, 13-15, 22; 욥 1:22. (43) 삼상 6:7-9. (44) 단 5:23. (45) 신 8:17; 단 4:30. (46) 합 1:16.


[106문] 제일계명의 '나 외에는'라는 말씀에 의해서 우리는 특히 어떤 가르침을 받는가?

[답] 제일계명의 '나 외에는' 혹은 '내 앞에서'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모든 것들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어떤 다른 신을 두는 죄를 특별히 주목하시고 대단히 불쾌히 여기신다는 것과; 따라서 그것이 그 죄를 단념시키고 그것을 지극히 뻔뻔스럽게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매우 악한 일이 되게 하며,1) 또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그를 섬기면서 하는 무슨 일이든지 그의 앞에서처럼 하도록 설득하는 주장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2)
(1) 겔 8:5, 6; 시 44:20, 21. (2) 대상 28:9.


공예배

성도들의 가장 기본적 의무는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그리고 단체적으로 예배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자시요 구속자이시므로 성도들은 마땅히 그에게 찬송과 경배를 올려야 한다. 에베소서 1:6, 12, 14, "(이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요한계시록 4: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신약 아래서의 공예배는 구약 시대의 성전 제사의 대치물이 아니다. 구약 시대의 성전 제사는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예표이며 또한 성도들의 신앙 생활의 상징이었다. 비록 넓은 의미에서 공예배도 하나의 제사이지만, 구약 제사와 같이 예배만이 제사라는 관념은 비성경적이다. 신약 시대에는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제사이며 그런 의미에서 예배도 제사일 뿐이다. 로마서 12: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히브리서 13:15, 16,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공예배의 일차적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다. 공예배가 성도에게 영적 유익을 주는 것은 단지 부차적일 뿐이다. 찬송과 기도도 그러하다. 우리는 예배가 우리에게 주는 은혜를 생각하기 전에 하나님께 단체적 경배를 드리는 데 촛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러므로 공예배의 의식은 회중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예배시 설교에서까지도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해야 하고, 그 다음에 우리 자신의 유익을 생각하여야 한다.

공예배의 요소들은 찬송, 기도, 말씀 선포 혹은 강론, 헌금 등이다. 고린도전서 14:26,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고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사도행전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히브리서 13:15,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고린도전서 16:1-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利, 이익)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빌립보서 4: 18, "에바브로디도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예배의 바른 방식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요 제사장이시다. 그를 통해서만 죄인이 구원을 받고, 그를 통해서만 성도가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그를 섬기며 예배할 수 있다. 에베소서 5: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골로새서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히브리서 13: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와 의를 힘입지 않고서 드려지는 예배는 다 인본주의요, 윤리 종교에 불과하다.
둘째로 예배는 신령(spirit, 심령)과 진정(truth, 혹은 진리)으로 드려져야 한다. 요한복음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신약 시대의 예배는 어떤 장소, 어떤 시간, 어떤 형식에 구속되지 않고, 두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으며 어떤 외형적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인간의 부패성은 종교를 형식화, 의식화(儀式化) 하려는 경향이 있으나 우리는 그러한 잘못을 경계해야 한다.


찬송

찬송의 의미

찬송이란 하나님을 높이어 노래하는 것, 곧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속성들과 그가 하신 일들을 인정하고 높이어 노래하는 것이다. 찬송가 19장, "내 영혼아 찬양하라, 주님 앞에 엎드려; 구속하신 넓은 은혜 높이 찬양하여라." 우리 찬송가 책에서 직접 하나님을 높이어 찬송하는 가사들은 55장 이전에 '찬양과 경배'라는 주제의 가사들과 73장부터 203장까지의 가사들 중의 다수이다.

성도의 노래에는 이렇게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찬송하는 것뿐 아니라, '영적인 노래들'도 있다. 에베소서 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성도의 기도들과 간증들, 그리고 위로와 격려와 권면의 말들이 거기에 속한다. 찬송가 책의 많은 노래들은 이런 부류의 것이다. 예를 들어, 204장,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보혈과 신으로 거듭나니." 278장, "사랑하는 주님 앞에 형제 자매 한 자리에 크신 은혜 생각하여 즐거운 찬송부르네. 내 주 예수 본을 받아 모든 사람 내 몸같이 환란 근심 위로하고 진심으로 사랑하세." 이렇게 보면, 찬송가 책 이름은 '찬송가'라고 하기보다는 '찬송들과 영적 노래들'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성도들의 찬송들과 영적인 노래들은 서로에게 영적 교훈과 유익을 준다. 골로새서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이 말씀을 원문대로 번역해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며 모든 지혜로, 시와 찬미와 영적인 노래들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마음에 감사함으로 주께 찬양하라"이다. 이것은 찬송들과 영적 노래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회중에게 교훈을 주는 의미도 있음을 증거한다. 신명기 3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노래를 가르치게 하셨는데, 그 목적은 이스라엘의 패역함을 깨우치시기 위함이었다. 찬송과 영적 노래에는 이렇게 성도에게 교훈과 유익을 주는 목적도 있는 것이다.


찬송의 이유

우리는 왜 찬송해야 하는가?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므로 우리는 그를 찬송해야 한다. 피조물인 우리는 창조주의 이름과 그 영광을, 그의 지혜와 그의 능력의 무한하심과 그의 선하심과 그의 인자하심의 풍성하심을 마땅히 찬송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4:10, 11,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시므로 우리는 그를 찬양해야 한다. 시편 96:2,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파할지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도 여기에 있다. 에베소서 1: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우리의 죄와 영원한 지옥의 형벌로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해야 한다. 사실 구원의 경험과 지식과 감격이 없는 자는 하나님과 주 예수께 진정으로 찬송을 드릴 수 없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는 그를 높이고 자랑하고 찬송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5:9,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 . .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요한계시록 7:9, 10,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요한계시록 14:1, 3,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14만 4천이 섰는데 . . .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14만 4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찬송의 방식

우리는 어떻게 찬송해야 하는가? 첫째로, 우리는 바른 가사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세상 음악은 단지 육신적 감정과 갈망을 토로하는 것이지만, 성도의 찬송과 영적 노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거나 하나님 앞에서 간증하고 감사하고 고백하며 간구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아무 가사나 찬송이 될 수 없다. 찬송에 있어서 가사는 곡보다 더 중요하다. 따라서 찬송가책의 찬송과 노래들이 다 똑같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가사의 내용에 따라 더 가치 있는 것도 있고 덜 가치 있는 것도 있다.

우선, 찬송의 가사는 복음 진리에 일치해야 한다. 찬송의 가사는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가사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특히 우리의 죄악들과 영원한 지옥의 형벌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하고 찬송하는 가사이어야 한다. 속죄는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며 진수이므로 속죄의 찬송들은 가장 귀한 찬송들이다(예를 들어, 28장, 145장, 147장, 186장, 188장, 189장, 196장, 200장, 210장, 403장 등).

뿐만 아니라, 찬송 가사는 또한 성경의 교리 체계에도 일치해야 한다. 성경의 교리 체계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잘 요약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국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쓰여진 어떤 노래들은 찬송이나 영적인 노래가 되기에 부적합하다(예를 들어, 261장, "어둔 밤 마음에 잠겨." 272장, "인류는 하나되게 지음 받은 한 가족"). 자유주의 교단들과의 연합 활동은 이런 오류의 포용을 초래했다. 신성한 찬송가 책 안에 찬송답지 않은 가사들이 포함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근심시키거나 노엽게 할 일이다. 우리가 쓰는 통일찬송가는 한국교회의 영적인 퇴보의 산물이다. 한국 교회가 여러 해 동안 썼던 새찬송가의 서문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1959년 예장 총회가 WCC를 탈퇴하고 에규메니칼 운동 반대를 결의한 후 그 때까지의 '합동찬송가' 출판 사업도 에큐메니칼 계획의 하나라는 것을 선언하고 그와 인연을 끊음과 동시에 . . . (중략) 이것은 영구히 한국 기독교계 보수 진영 전체의 찬송가책이 되기를 기원하고 끝이는 바이다." 이것은 바른 정신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의 보수적 교회들은 이런 정신에서 퇴보하였다.

이런 문제뿐 아니라, 또한 성령에 대한 어떤 찬송들은 성령의 오심을 간구함에 있어서 성경적 교리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된다(예를 들어, 172장, "빈들의 마른 풀같이." 173장, "불길 같은 성신여 간구하는 우리게 지금 강림하셔서." 177장, "성령이여 강림하사"). 성령께서는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 이미 오셨고 그들 안에 영원히 거하시기 때문에 이 사실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표현의 가사는 옳지 않다. 우리는 성령의 오심을 간구할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 속에 오신 성령께서 우리의 인격 전체를 주장하시고 감동하시고 인도하시기를 구하여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경건하고 아름다운 곡으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시편 96:9,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행위이다. 히브리서 13:15,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그러므로 예배와 찬송은 가장 좋은 방식으로 드려져야 한다. 빌립보서 1:10,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라." 우리는 찬송과 영적 노래에 있어서 얼마큼 세속적일 수 있는가를 생각하지 말고 가능한 세속적 풍조를 배격하고, 어떻게 하면 가장 경건하고 가장 아름다운 곡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세상 음악은 육신의 만족을 위한 것이지만, 성도의 찬송과 영적 노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에베소서 5:19,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아름다운 목소리도, 공교한 악기 연주도 진실한 믿음과 마음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사람의 아름다운 목소리나 악기 소리를 원하시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나 악기 연주를 원하신다. 찬송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이다(히 13:15). 그러므로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을 원하신다. 때때로 외적으로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진실한 믿음과 마음으로 부르는 찬송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다른 이들에게 감동을 줄 것이다.

이와 같이 찬송은 성도의 영적 생활의 표현이므로 우리는 진실한 속죄 신앙을 가지고 늘 말씀과 기도로 은혜 충만함을 누리는 성도에게서 은혜의 찬송을 기대할 수 있다. 난 지 몇 개월이 안되어 시력을 잃어버렸던 파니 크로스비가 평생 약 8천개의 은혜로운 찬송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어릴 때부터 할머니를 통해 성경을 많이 배웠고 주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충만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늘 보는 첫번째 얼굴이 나의 구주 그리스도의 얼굴이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라.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렇게 눈이 멀어 그를 더 잘 찬송할 수 있게 하기를 원하셨다고 나는 믿는다. 만일 시력이 있었다면 나는 결코 나의 찬송시들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현대 기독교 음악(Contemporary Christian Music=CCM)

음악은 옛날부터 이방 종교들이나 우상 숭배들과도 관계가 깊었다(출 32:17-19; 단 3:5). 하나님께서는 경건하고 아름다운 노래를 요구하시고(시 96:8, 9)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것을 정죄하시고 또 헛된 노래를 금하셨지만(출 20:7; 암 6:5), 이방 종교들이나 우상 숭배들은 육신적인 음악, 즉 무질서하고 광란적인 음악을 사용하였다.

현대 기독교 음악 혹은 복음송들의 다수는 록 형태의 음악이다. 그것을 흔히 크리스챤 록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록 음악이란 무엇인가? 록 음악은 1950년대에 생긴 것으로서 50년대에 엘비스 프레슬리와 60년대에 비틀즈로부터 80년대 마이클 잭슨까지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음악 형태를 가리킨다. 록 음악은 록컨롤(rock and roll, 흔들고 굴리라)이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그것은 성관계를 돌려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스펜스(O. Talmadge Spence) 박사는 록 음악이 성적 문란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록 음악은, 곡에 있어서, 큰 소리를 사용하여 사람의 혼을 빼어놓고, 엇박자(싱코페이션)를 많이 사용함으로써 사람의 감정을 어지럽히고, 또 불협화음이나 단조를 많이 사용하여 사람의 감정을 흥분 혹은 격화시킨다. 또 그것은 반복적 리듬을 사용함으로써 최면 효과를 가진다. 또한 록 음악은, 가사에 있어서, 폭력, 반항, 자살 권면, 마약, 음란, 그리고 사탄 숭배 등의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록 음악에 오랫 동안 빠졌던 리차드 펙은 우리가 부드러운 록 음악(soft rock)이라도 배격해야 하는 까닭은, ① 부드러운 록 음악도 메시지가 항상 부드러운 것이 아니며, ② 연주자가 그것을 흔히 온건하게만 연주하지 않으며, ③ 그것은 여하튼 록 음악의 맛을 들게 만드며, ④ 좋고 나쁜 것을 구별하기 위해 우리는 결국 록 음악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 연구자는 우리 나라 교회들 속에도 청소년들이나 청년들 집회들에서 록 음악의 영향이 크다고 지적하였다

우리는 세속적 록 음악의 영향을 받고 있는 현대 기독교 음악(CCM), 크리스챤 록 음악, 혹은 록 스타일의 복음송들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현대 기독교 음악 혹은 크리스챤 록 음악은, 리듬이나 화성에 있어서, 세상의 록 음악과 매우 비슷하다. 그것의 작곡 형식은 전통적이지 않고 세속적 록 음악과 같다. 그것은 불협화음을 자유로이 사용한다. 그것은 전통적 음악이 가지는 질서와 안정과 아름다움을 중시하지 않는다. 또 그것은, 리듬에 있어서, 엇박자(싱코페이션)를 많이 사용한다. 그 결과, 그 음악은 육감적 기분을 준다. 가사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곡에 있어서 현대 기독교 음악은 세속적 음악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스펜스 박사는, 거의 모든 복음송들에 록 형식이 들어가 있으며 그것들은 대부분 은사주의자들이 만들며 주로 사람의 감상적인 체험과 느낌에 근거한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소위 가스펠 록(gospel rock)은 육신적 음악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또 말하기를, "현대 기독교 음악(CCM)에 젖으면 몇 년 후에 록 음악으로 간다"고 하였다.

덧붙여, 오늘날 현대 기독교 음악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보다 사람을 높이는 경향이 있다. 또 크리스챤 록 콘서트와 음반 사업은 상업적이게 되고 있다. 이것은 신앙과 성경 원리에 맞지 않는다.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고 존귀하시다. 그는 무질서와 혼돈의 하나님이 아니고 질서의 하나님이시다(고전 14:33). 그러므로 육감적 리듬이나 템포의 록 스타일의 노래들은 육신적 즐거움과 만족을 줄 지는 모르나, 성도의 찬송이나 영적 노래들로는 부적합하다. 현대 기독교 음악(CCM)과 복음송들은 그 가사와 그 곡에 있어서 정선되어야 한다. 성도의 찬송과 영적 노래들은 아름답고 경건해야 한다.


타종교인들에 대한 태도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대함

세속 사회는 종교적, 사상적으로 다원화 사회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회 속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은 타종교인들에 대하여 사랑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타종교인들의 사상이 잘못된 것이지만, 실상 그들의 것만 그러한 것이 아니고 무종교인들을 포함하여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모든 사람들의 사상이 그러하다.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이 다 어두움과 무지 아래, 허무 아래,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 그들은 우리가 전도하고 구원해야 할 대상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움이나 정죄의 닫힌 마음으로 그들에게 접근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며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사랑과 긍휼의 열린 마음으로 접근해야 한다.


종교적 포용주의는 잘못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은 이방 종교들을 포함하려는 종교적 포용주의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1983년 세계교회협의회(WCC)의 뱅쿠버 총회는 세계교회협의회 35년 역사상 최초로 힌두교, 불교, 유대교, 이슬람교, 시크교 등 다섯 개 세계종교들의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공식적으로 연설케 했다. 세계교회협의회는 타종교들과의 대화의 방식을 강조하며, 그들에 대한 비판을 회피하고 오히려 그들로부터 진리의 통찰력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세계교회협의회의 지도자들 중에는 기독교의 절대성을 명백히 부정하는 자들이 있다. 세계교회협의회 종교간의 대화 위원회 의장인 더크 멀더는 "당신은 불교인이나 힌두교인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느끼십니까?"라는 한 기자의 질문에 대해 "물론이죠, 물론이죠"라고 대답하였다

세계교회협의회의 타종교들과 이념들과의 대화 위원회 의장인 웨슬리 아리아라자는 세계교회협의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출판한 성경과 타종교인들이라는 그의 책에서 기독교의 절대성을 명백히 부정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절대적 의미에서의 진리는 어느 누구도 파악할 수 없고, 우리는 예수에 관한 기독교의 주장들이 성 요한, 성 바울, 그리고 성경이 그렇게 주장하기 때문에 절대적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그가 기독교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이유는 성경이 명확한 기독론을 가지고 있지 않고, 서로 다르고 모순된 기독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성경의 언어는 신앙의 언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이교도들도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회개해야 할 자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기독교의 신, 힌두교의 신, 이슬람교의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힌두교적 이해, 이슬람교적 이해가 있을 뿐이다. . . . 타종교인도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우리는 형제 자매요, 순례자이지 이방인이 아니다. 우리는 한 창조주 하나님께 속한다. . . . 힌두교인은 회개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동료 순례자이다." 심지어, 그는 기독교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은 전도에 가장 큰 방해거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종교적 포용주의를 용납하지 않는다. 성경적 전도 방법은 대화가 아니고 일차적으로 선포와 가르침이다(딤후 4:2). 또 성경은 우리가 이방신들을 탐구하거나 그들의 길을 배우지 말라고 가르쳤다(신 12:30; 렘 10:2).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간에 교회가 속화되고 부패될 때마다 우상숭배적 혼합주의가 유행했다. 오늘날 종교적 포용주의는 성경의 기본 교리를 저버린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자연스런 결과이다.

성경은 종교적 포용주의를 명백히 정죄한다. 출애굽기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신명기 4:39,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 하지(上天下地)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라." 이사야 43:10, ". . .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이사야 45:6,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시편 96:5, "만방의 모든 신은 헛 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이방 종교들은 마귀적이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엡 2:2, 3). 또 여기에 전도의 필요성이 있다. 예수께서는 그를 믿지 않는 유대교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요 8:24). 유대교인들이 그러하다면 그 외의 다른 이방교인들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2계명

2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과 금지된 죄들

[107문] 제이계명은 무엇인가?

[답] 제이계명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수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신 것이다.1)

(1) 출 20:4-6.

[108문] 제이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은 무엇인가?

[답] 제이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에서 제정하신 모든 종교적 예배와 규례들을 받아들이고 준행하고 순수하고 온전하게 지키는 것;1) 특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와 감사;2) 말씀 읽는 것과 전파하는 것과 듣는 것;3) 성례들을 거행하고 받는 것;4) 교회 정치와 권징;5) 교회의 목회와 유지;6) 종교적 금식;7)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8) 그리고 그에게 서원하는 것;9) 또한 모든 거짓된 예배를 부인하고 미워하며 반대하는 것;10) 그리고 각자의 지위와 부르심에 따라서 그것과 모든 우상숭배의 기념물들을 제거하는 것이다.11)

(1) 신 32:46, 47; 마 28:20; 행 2:42; 딤전 6:13, 14. (2) 빌 4:6; 엡 5:20. (3) 신 17:18, 19; 행 15:21; 딤후 4:2; 약 1:21, 22; 행 10:33. (4) 마 28:19; 고전 11:23-30. (5) 마 18:15-17; 마 16:19; 고전 5장; 고전 12:28. (6) 엡 4:11, 12; 딤전 5:17, 18; 고전 9:7-15. (7) 욜 2:12, 13; 고전 7:5. (8) 신 6:13. (9) 시 76:11. (10) 행 17:16, 17; 시 16:4. (11) 신 7:5; 사 30:22.


[109문] 제이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무엇인가 ?

[답] 제이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지 않으신 어떤 종교적 예배를 고안하고,1) 의논하고,2) 명령하고,3) 사용하고,4) 어떤 모양으로든지 승인하는 모든 것;5) 하나님 즉 삼위의 전체든지 그 중 어느 하나든지 간에, 내적으로 우리 마음으로나 혹은 외적으로 어떤 피조물의 어떤 형상이나 모양으로나 표현하는 것;6) 그것을 경배하거나,7) 혹은 그것 안에서나 그것에 의해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것;8) 거짓된 신들에 대한 모든 표현과,9) 그것들에 대한 모든 경배나 그것들에 속하는 섬김,10) 우리 자신에게서 발명되고 채택되었든지,11) 혹은 비록 고대성(古代性),12) 관습,13) 헌신,14) 선의(善意), 혹은 다른 어떤 구실의 이름 아래서이지만15)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전통에 의해서 받은 것이든지 간에,16)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부패시키거나17) 그것에 더하거나 그것에서 빼는18) 모든 미신적 고안물들;19) 성직 매매;20) 신성 모독;21) 하나님께서 정하신 예배와 규례들에 대한 모든 태만과22) 경멸과23) 방해와24) 반대이다.25)

(1) 민 15:39. (2) 신 13:6-8. (3) 호 5:11; 미 6:16. (4) 왕상 11:33; 12:33. (5) 신 12:30-32. (6) 신 4:15-19; 행 17: 29; 롬 1:21-23, 25. (7) 단 3:18; 갈 4:8. (8) 출 32:5. (9) 출 32:8. (10) 왕상 18:26, 28; 사 65:11. (11) 신 4:2. (12) 벧전 1:18. (13) 렘 44:17. (14) 사 65:3-5; 갈 1:13, 14. (15) 삼상 13:11, 12; 삼상 15:21. (16) 마 15:9. (17) 말 1:7, 8, 14. (18) 신 4:2. (19) 행 17:22; 골 2:21-23. (20) 행 8:18. (21) 롬 2:22; 말 3:8. (22) 출 4:24-26. (23) 마 22:5; 말 1:7. (24) 마 23:13. (25) 행 13:44, 45; 살전 2:15.


[110문] 제이계명을 더 강화하려고 거기에 부가된 이유들은 무엇인가?

[답]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하신 말씀 속에 담긴, 제이계명을 더 강조하기 위해 첨가된 이유들은;1)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에 대한 정당하심 외에,2) 자신의 예배에 대한 그의 뜨거운 열심과,3) 영적 간음으로 여기시는 모든 거짓된 예배에 대한 그의 보복적 분노;4) 이 계명을 어긴 자들을 자기를 미워하는 자들로 여기시고 그들에게 여러 세대에 이르도록 벌하시겠다고 위협하시는 것과;5) 그것을 준행하는 자들을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계명들을 지키는 자들로 여기시고 그들에게 많은 세대들에 이르도록 긍휼을 약속하시는 것이다.6)


제사, 차례, 조상숭배

우리 나라의 추석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명절이 되고 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제사하면 안된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으리라 본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믿음이 약해서 제사에 동참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첫째로, 돌아가신 조상들에게 제사한다고 그들의 영이 와서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상숭배의 제사는 실상 조상숭배가 아니다. 효도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가 제사를 드리면, 조상들의 영이 오는 것이 아니고 그 대신 귀신들이 와서 숭배를 받는다. 고린도전서 10:20,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그러므로 제사나 차례는 귀신에게 하는 행위요 귀신과 교제하는 행위이다. 성도는 귀신을 섬기거나 귀신과 교제해서는 안된다.

셋째로, 제사나 차례는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일이다. 인척 관계에서 어른들이나 친지들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제사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이다. 그 때 사람의 마음은 상하지 않게 되겠지만, 하나님은 심히 노여워하신다. 하나님이 노하실 때 우리에게 무슨 복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제사는 복이 아니고 화다.

그러나 우리가 선친들이나 사랑하는 이들의 묘에 가서 절하거나 묘를 섬기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묘지를 둘러보고 풀을 깍고 깨끗하게 돌보는 것은 좋은 일이다.

또, 명절을 당해 가족들이나 친척들이 한 자리에 모여 교제하며, 하나님께 예배드리거나 음식을 같이 먹는 것은 좋은 일이다. 어느 때든지 가족들이 모여 교제하고 예배드리는 것은 좋다. 그런 경우 특별한 이름을 부칠 필요가 없고 부치지 않는 것이 좋다.


현대적 우상: 돈, 지식, 인간, 쾌락

오늘날에는 돈이나 인간 자신이나 인간의 지식이나 육신적 쾌락 등이 우상이 되고 있다. 이것은 성경에 경고된 바이기도 하다. 골로새서 3:5,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디모데후서 3:1-5,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 . .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마리아 숭배

천주교회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와 승천을 주장한다. 1854년 교황 피우스 9세는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를 선언했고, 1950년 피우스 12세는 마리아의 승천을 선언했다. 제2 바티칸 회의도 똑같이 선언하기를, "마침내 원죄의 모든 더러움 없이 보존된 그 순결한 동정녀는 . . . 그의 지상생애가 끝났을 때 몸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 속으로 들리움을 받았다"고 하였다.

또한, 천주교회는 신도들에게 마리아에게 기도할 것을 가르친다. 카톨릭 교리서에 보면,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는 항상 우리를 돌보아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리아에게 신뢰하는 마음으로 각별한 공경과 기도를 드리고 모든 위험과 어려움에서 도와주시기를 청해야 한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천주교회는 마리아에게 부당한 많은 칭호들을 돌린다. 제2 바티칸 회의는 선언하기를, "[마리아는] 그의 지상 생애가 끝났을 때 몸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 속으로 들리움을 받았고 주님에 의해 만물 위의 여왕으로 존귀케 되었다"고 했다. 제2 바티칸 회의는 또 선언하기를, "하늘로 올리움을 받은 후 그[마리아]는 이 구원하는 직책을 버리지 않으셨고 여러 가지 중보사역에 의해 계속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선물들을 가져다 주신다. . . . 그러므로 그 복된 동정녀에게 우리는 교회에서 변호자[보혜사], 돕는 자, 은혜 베푸는 자, 그리고 중보자의 명칭들로 빈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밝히 가르치는 대로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기도해야 하며,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신적 경배와 기도를 올려서는 안된다(출 20:3; 요 14:6; 행 4:12; 딤전 2:5). 마리아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한 죄인에 불과하다. 누가복음 1:38, "마리아가 가로되 [천사에게]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우리는 성경에서 마리아에 대한 특별한 높임을 볼 수 없다. 무리 중 한 사람이 '당신을 밴 태와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고 예수께 말하였을 때, 그는 말씀하시기를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하셨다(눅 11:27, 28). 또 그의 모친과 형제들이 그를 찾아왔을 때 그는 그의 모친을 다른 제자들보다 달리 특별히 높이지 않으셨다. 그는 오히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2:46).

그러므로 천주교회의 마리아 교리는 확실히 비성경적이며 우상숭배적이다. 우리가 그것을 우상숭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피조물에게 신적 명칭과 속성 그리고 영광을 돌리기 때문이다. 그에게 기도하고 그를 보혜사, 중보자, 천국의 문, 구원의 길, 혹은 천상 천하의 어머니와 여왕이라고 부르는 행위가 그러하다.


우상 제물 문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에서 우상 제물에 대해 증거하였다.

첫째로,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다. 우상은 어떤 신적 존재, 어떤 초인간적 존재가 결코 아니다. 세상에 오직 우리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 시편 96:5, "만방의 모든 신은 헛 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둘째로,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상의 생각을 가지고 우상의 제물을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으면 양심이 더러워진다.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다는 것은 우상을 어떤 신적 존재로 인정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우상숭배이다. 그것은 마귀가 주는 헛되고 거짓된 사상이며,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참된 경건에서 떠나게 하는 것이다.

셋째로, 우상에 대한 우리의 지식으로 약한 형제를 범죄케 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했다(고전 8:9). '자유함'이라는 원어(엑수시아)는 '권리'라는 뜻이다. 우상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지식을 가지고 그것을 먹을 자유와 권리가 성도에게 있을지라도, 그 행위가 약한 자들에게 거리낌을 주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리의 지식으로 약한 형제를 넘어지게 하는 행동을 삼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 약한 형제를 위해서도 죽으셨으므로 그를 넘어지게 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3계명

3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과 금지된 죄들

[111문] 제삼계명은 무엇인가?

[답] 제삼계명은 "너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없다 하지 아니 하리라" 하신 것이다.


[112문] 제삼계명에서 요구된 것은 무엇인가?

[답] 제삼계명에서 요구된 것은 하나님의 이름, 그의 칭호, 속성, 규례, 말씀, 성례, 기도, 맹세, 서약, 추첨, 그 역사(役事)와 그 외에 자기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들 자신과 남들의 선을 위하여 거룩한 고백과 책임 있는 담화로써 거룩하게 또는 경외함으로 생각하고, 명상하고, 말하며, 글을 써야 한다.

[113문] 제삼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무엇인가?

[답] 제삼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명한 대로 사용하지 않음과 무지하게, 헛되이, 불경하게, 모독적으로, 미신적으로 혹은 사악하게 언급하든지 그의 칭호, 속성, 규례 혹은 사역을 모독하여 위증함으로, 또는 모든 죄악한 저주, 맹세, 서원과 추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함이며, 합법적인 경우에 우리 맹세와 서원을 위반함과 불법적인 경우에 그것을 지킴이며,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에 대하여 불평함과 다툼, 이를 호기심으로 파고들거나, 오용함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나 그것의 어느 부분을 잘못 해석하거나 잘못 응용하거나 어떤 방식으로 곡해하여 신성을 모독하는 농담, 호기심이 강하거나 무익한 의문, 헛된 말다툼 혹은 그릇된 교리를 지지하는 데 쓰이는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피조물 혹은 하나님의 이름 밑에 내포되어 있는 무엇이든지 진언이나 죄악한 정욕과 행사에 악용함이며,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 및 방법을 훼방하고 경멸하고 욕설하고 혹은 어떻게든지 반항함이며 외식과 사악한 목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끄러워하거나 불안한, 지혜 없는, 결실 없는, 해로운 행위에 의해서 그 이름에 수치를 돌리거나 그 이름을 배반함이다.


[114문] 제삼계명에 어떠한 이유들이 첨부되었는가 ?

[답] "너희 하나님 여호와"와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하신 이 말씀에 나타나 있는 제삼계명에 첨부된 이유들은 하나님은 주와 우리 하나님 여호와시므로 우리는 그의 이름을 훼방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지 악용할 수 없기 때문이며, 특히 비록 많은 이 계명 위반자들이 사람들의 비난과 형벌은 피할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 계명의 위반자를 방면케 하여 구해 주시기는커녕 그들로 하여금 그의 의의 심판을 결단코 피하지 못하게 하실 것이라 함이다.


합법적 맹세와 서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진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2장에는 합법적 맹세와 서원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진술이 있다.
1. [맹세의 의미] 합법적 맹세(oath)는 종교적 예배의 한 부분이니, 그것에서 정당한 기회에 엄숙히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을 불러 그가 주장하거나 약속하는 것을 증거하시고, 그가 맹세하는 것의 진실됨 혹은 거짓됨에 따라 그를 판단하시기를 구한다.1)

(1) 신 6:13; 마 26:63, 64; 롬 1:9; 고후 1:23; 히 6:13-18.

2. [맹세에 사용되는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만이 사람이 맹세해야 할 이름이며, 맹세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모든 거룩한 두려움과 존경심을 가지고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영광스럽고 두려운 하나님의 이름으로 헛되이 혹은 경솔히 맹세하는 것이나 어떤 다른 것으로 맹세하는 것은 죄악되며 매우 미워해야 한다. 하지만 중대한 일들에서 맹세는 구약 아래서 뿐만 아니라 또한 신약 아래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보증되므로, 합법적 맹세는 합법적  권위에 의해 부과될 때 그러한 일들에서 행해져야 한다.

3. [맹세의 내용들] 맹세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러한 엄숙한 행위의 중대함을 마땅히 생각하고 그가 참되다고 완전히 확신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거기에서 공언해서는 안된다. 또한 누구든지 선하고 옳은 것과, 그가 그렇다고 믿는 것과, 그가 행할 수 있고 행하기로 결심한 것 외에는 어떤 것에도 맹세로 자신을 구속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합법적 권위에 의해 부과되었을 때 선하고 옳은 어떤 것에 관한 맹세를 거절하는 것은 죄이다.

4. [맹세의 말과 구속력] 맹세는 명백하고 일상적인 의미의 말로 해야 하고, 애매함이나 생각의 보류(保留)가 없어야 한다. 그것이 죄를 짓도록 구속할 수는 없지만, 죄악되지 않은 어떤 것에 맹세했으면 비록 사람 자신에게 해가 될지라도 이행할 의무가 있고, 비록 이단자들이나 불신자들에게 맹세했을지라도 그것은 깨뜨려질 수 없다.

5. [서원] 서원(誓願, vow)은 약속적 맹세와 같은 성질의 것이고 같은 종교적 조심성을 가지고 해야 하며 같은 신실성을 가지고 이행해야 한다.

6. [서원의 대상과 방법] 서원은 어떤 피조물에게 해서는 안되고 오직 하나님께만 해야 하고, 서원이 받아들여지도록 그것은 자원함으로, 믿음과, 의무의 양심으로, 받은 자비에 대해서나 우리가 원하는 바를 얻을 것에 대한 감사의 방식으로 해야 하며, 그것에 의해 우리는 필요한 의무들에나 혹은 적절히 그것에 도움이 되는 한 다른 일들에 우리 자신들을 더 엄격히 속박한다.

7. [서원해서는 안되는 것들]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에 금하신 어떤 것이나, 거기에서 명령된 어떤 의무를 방해할 것이나, 그의 능력 안에 있지 않고, 그것의 이행을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능력의 어떤 약속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행하기로 서원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점들에서 평생의 독신 생활과, 공언(公言)된 가난과, 규칙적 순종에 대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수도원 서원들은 더 높은 완전함의 수준들이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므로 그리스도인이 걸려서는 안될 미신적이며 죄악된 올무들이다.

위의 진술에 대한 해설

성경은 우리에게 참 하나님으로 맹세하라고 가르친다. 이사야 45:23,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맹세]하리라." 이사야 65:16,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신명기 6:13,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맹세는 구약성경에 하나의 인정된 종교적 규례로 명령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맹세하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마 26:63, 64). 또 바울도 자신의 말의 진실함을 위해 하나님께 자주 호소하였다(롬 1:9; 고후 1:23).

그러나 주 예수께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는가? 마태복음 5:34, 35,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위의 구절에 대하여 칼빈이나 매튜 풀(Matthew Poole)은 주석하기를, 주께서 모든 종류의 맹세를 정죄하신 것이 아니고 당시 바리새인들이 하늘이나 땅이나 예루살렘이나 자기 머리 등으로 맹세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것이 아니므로 죄가 안된다고 한 잘못된 가르침을 반대하신 것이라고 하였다. 주께서 당시 바리새인들의 그러한 맹세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는 방식들이므로 금해야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라는 말이다. 에이 에이 핫지도 설명하기를, "그러므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는 우리 주님의 말씀은 정당한 경우들에 참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을 금하시려고 의도된 것일 수 없고, 일상적 대화와 사소한 경우들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맹세하는 것을 금하시려고 의도된 것이 틀림 없다고 하였다.


4계명
4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과 금지된 죄들

[115문] 제사계명은 무엇인가?

[답] 제사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하신 것이다.1)

(1) 출 20:8-11.


[116문] 제사계명에서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답] 제사계명이 모든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에 지정하신 시간, 특히 칠일 중에 하루 온종일을 하나님께 거룩하게 지키는 것인데, 그것은 세상의 시작 때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 때까지 주간의 일곱째 날이었고 그 후부터는 그 첫째날이며 세상 끝날까지 계속 그러하다. 이것이 기독교의 안식일이며1) 신약 성경에서 주의 날[주일]이라고 불리운다.2)

(1) 신 5:12-14; 창 2:2, 3; 고전 16:1, 2; 행 20:7; 마 5:17, 18; 사 56:2, 4, 6, 7. (2) 계 1:10.

[117문] 안식일 혹은 주일은 어떻게 거룩하게 지켜져야 하는가?

[답] 안식일 혹은 주일은, 단지 언제나 죄악된 일들로부터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다른 날들에 합법적인 세상적 직업들과 오락들로부터도 온종일 거룩하게 안식하며1) (부득이함과 긍휼의 일들에 사용되는 것 외에는) 모든 시간을 하나님께 대한 공적인 그리고 개인적인 예배에 사용하는 것을 우리의 기쁨으로 여김으로써 거룩하게 지켜져야 하며,2) 이를 위하여 우리는 그 날의 의무들을 위하여 더 자유롭고 적당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준비하고 미리 부지런히 절제있게 우리의 세상 일을 배치하고 적절히 처리해야 할 것이다.3)

(1) 출 20:8; 출 16:25-28; 느 13:15-22; 렘 17: 21, 22. (2) 마 12:1-13; 사 58:13; 눅 4:16; 행 20:7; 고전 16:1, 2; 시 92편; 사 66:23; 레 23:3. (3) 출 20:8; 눅 23:54, 56; 출 16:22, 25, 26, 29; 느 13:19.


[118문]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왜 더욱 특별히 가장들과 기타 윗사람들에게 주어지는가?

[답]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더욱 특별히 가장들과 기타 윗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까닭은, 그들 자신이 그것을 지켜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그들의 통솔 아래 모든 사람들에 의해 지켜지는지 보아야 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들이 때때로 그들 자신의 일들로 저들을 방해하기 쉽기 때문이다.1)
(1) 출 20:10; 수 24:15; 느 13:15, 17; 렘 17:20-22; 출 23:12.


[119문] 제사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무엇인가?

[답] 제사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요구된 의무들 가운데서 모든 빠뜨린 것들1)과 그것들에 대한 모든 부주의하고 소홀하고 무익한 수행과 그것들을 피곤해 하는 것,2) 그리고 게으름에 의해서와 그 자체가 죄악된 일을 행함으로써3) 그리고 우리의 세속적 일들과 오락들에 관하여 모든 불필요한 일들과 말들과 생각들에 의해서 그 날을 더럽히는 모든 것이다.4)

(1) 겔 22:26. (2) 행 20:7, 9; 겔 33:30-32; 암 8:5; 말 1:13. (3) 겔 23:38. (4) 렘 17:24, 27; 사 58:13.


[120문] 제사계명을 더 강화시키려고 거기에 붙여진 이유들은 무엇인가?

[답] 제사계명을 더 강화시키려고 거기에 붙여진 이유들은,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라는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의 일들을 위하여 칠일 중 육일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그 자신을 위해서는 오직 하루를 남겨두신 그 계명의 공평성으로부터,1)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이라는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그 날의 특별한 타당성을 강조하심으로부터,2)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제칠일에 쉬신 하나님의 모범으로부터,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날을 그의 예배를 위한 날이 되도록 거룩하게 하심으로써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거룩하게 지킴으로써 그것이 우리에게 복의 수단이 되도록 정하심으로써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그가 그 날에 주신 복으로부터 생각된다.3)

(1) 출 20:9. (2) 출 20:10. (3) 출 20:11.


[121문] 왜 제사계명의 시작에 기억하라는 말씀이 있는가?

[답] 제사계명의 시작에 기억하라는 말씀이 있는 것은1) 부분적으로는 그것을 기억함으로써 얻는 큰 유익 때문인데, 그것을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지키고2) 그것을 지킴으로써 그 밖의 모든 계명들을 더 잘 지키고3) 또한 신앙의 간략한 요지인 창조와 구속(救贖)의 큰 두 가지 혜택을 계속 감사한 마음으로 기억하도록 준비하는데 도움을 얻고,4) 또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그것을 잊어버리기가 매우 쉽기 때문인데,5) 왜냐하면 그것에 대한 본성의 빛이 더 적지만6) 그 빛이 우리의 본성적 자유를 다른 때들에 합법적인 것들에 속박하기 때문이며,7) 그것이 단지 칠일 중 한번만 오며 많은 세속적 일들이 그 사이에 오고 또 너무 빈번히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그것을 준비하거나 그것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며,8) 또한 사탄이 그의 수단들을 사용하여 그것의 영광과 심지어 그것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모든 무신앙(無信仰)과 불경건을 들여오려고 많이 노력하기 때문이다.9)

(1) 출 20:8. (2) 출 16:23; 눅 23:54, 56; 막 15:42; 느 13:19. (3) 시 92:13, 14; 겔 20:12, 19, 20. (4) 창 2:2, 3; 시 118:22, 24; 행 4:10, 11; 계 1:10. (5) 겔 22:26. (6) 느 9:14. (7) 출 34:21. (8) 신 5:14, 15; 암 8:5. (9) 애 1:7; 렘 17:21-23; 느 13:15-22.



안식일과 주일

성수 주일(聖守主日)이란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을 말한다. 백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 장로교회는 전통적으로 일요일을 주일 곧 주님의 날로 구별하여 온종일 거룩하게 지켜왔다. 오늘날 이 선한 전통이 깨어지고 있다. 그러나 선한 전통은 지켜져야 한다.

구약의 안식일 계명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은 구약시대의 안식일 성수(聖守)를 따른 것이므로, 구약의 안식일 성수의 교훈은 어떠하였는지 먼저 생각해보자. 안식일 성수는 십계명에 명시된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출애굽기 20:8, (제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그 내용을 좀더 정리해보면,

첫째로, 시간은 제7일 하루 종일이었다. 출애굽기 20:9, 10,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7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 . .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둘째로, 대상은 집안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었다. 출애굽기 20:10,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셋째로, 이유는 하나님이 천지창조시 제7일에 쉬셨고 그 날을 구별하여 복 주셨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20: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7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넷째로, 방법은 온전한 휴식과 성회로 모이는 것이었다. 안식일은 온전한 휴식의 날이었다. 이것은 세속적 일을 중단하고 매매나 오락을 금하는 것을 포함하였다. 출애굽기 23:12, "너는 육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칠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 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출애굽기 34:21, "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 제7일에는 쉴지니 밭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쉴지며." 출애굽기 35:3,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 느헤미야 13:15-22에 보면, 안식일에 노동이나 매매하는 일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므로 금지되었다. 이사야 58:13, 14,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여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안식일은 또한 성회로 모이는 날이었다. 레위기 23:3,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라. 너희는 무슨 일이든지 하지 말라." 성회(聖會)는 하나님께 예배하며 찬송과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기 위해 모이는 모임을 가리킨다. 이 모임은 이스라엘의 영적 성장과 종교적 훈련을 위해 꼭 필요하였다.

다섯째로, 벌칙은 사형이었다. 안식일에 일하면 죽임을 당해야 했다. 출애굽기 31:14, 15,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7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민수기 15:32-36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거할 때 안식일에 나무하던 한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돌로 쳐 죽임을 당했다. 이것이 구약성경에 나타난 안식일 성수 교훈의 내용이다.

여섯째로, 중요성은 언약의 표이었다. 안식일 성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인정하는 언약 백성으로서의 표이었다. 출애굽기 31:16, 17,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에스겔 20:12, 13에 지적된 이스라엘의 죄는 안식일이 언약의 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더럽힌 것이었다.
일곱째로, 예표적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안식이다. 안식일 계명은 사실상 하나님 안에 있는 완전하고 영원한 안식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참 안식은 하나님 안에만 있다. 이것은 뒤에 주일 개념에서 언급할 것이다.


성수 주일(聖守主日)은 왜?

그러면 오늘 우리는 왜 주일을 성수하는가? 신약성경은 주일 성수에 대해 무엇을 교훈하는가?


구약의 모범을 따라서

성수 주일은 구약의 규례를 모범으로 따른다. 구약의 안식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참된 안식을 예표하였다. 이 예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땅의 저주와 인생의 수고는 죄의 결과이었다(창 3:17).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사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심으로 참 안식을 주셨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러므로 구약 안식일의 의식적(儀式的) 요소는 신약 아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골로새서 2:16, 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마가복음 2: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그러나 구약 안식일의 도덕적 요소는 지속되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공적 예배의 날의 구별이다. 안식일 계명의 성취는 위축된 경건생활로가 아니고 풍성한 경건생활로 성취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신약 성도는 구약 성도보다 더욱 자원적으로 하루 이상을 구별하여 지킬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신약교회에 주일을 공적 모임의 날로 주셨으므로, 우리는 이 날을 거룩히 구별하여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우리는 억지로가 아니고 즐거이 자원적으로 주일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루터나 칼빈은 안식일 계명이 의식법이지만 그 안에 도덕법적 의미도 있다고 보았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초기 교부들은 관례적으로 이 계명을 예표라고 불렀는데 그 까닭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지된 한 날의 외적 준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 계명의 의식적 부분이 폐지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 . . 말하자면 그는 안식일의 참된 성취이시다. . . .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미신적인 날들의 준수를 완전히 피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비록 안식일 계명의 의식적 부분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지되었으나 교회의 공적 모임과 휴식을 위한 필요성은 오늘날도 유효하며 따라서 신약교회는 열심히 주일을 공적 모임의 날로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1618-19년의 개혁교회의 정통적 도르트 대회는 제4계명의 의식적 요소와 도덕적 요소를 구별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의 제4계명에는 의식적 요소와 도덕적 요소가 있다. 의식적 요소는 창조 이후 제7일에의 휴식과,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부과된 그 날의 엄격한 준수이었다. 도덕적 요소는 어떤 특정한 날이 종교를 위해 사용된다는 사실과, 그 목적을 위해 종교와 그것의 거룩한 명상을 위해 필요한 만큼의 휴식이 요구된다는 사실에 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주일[주의 날]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엄숙히 성별되어야 한다. 그 날은 사도들의 시대 이후 원시 카톨릭 교회에 의해 이미 준수되어 왔다."


교회의 공예배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성수 주일의 실제적 필요성은 교회의 공적 예배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이다. 구약 안식일은 성회의 날이었다. 그런데 신약성경도 거룩한 모임의 필요성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또한 6일 간의 육체적 노동과 수고로부터의 휴식도 여전히 필요하다.

초대 제자들과 예루살렘교회는 모이는 교회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사도행전 1:13-15,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 . .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모인 무리의 수가 한 120명이나 되더라." 2: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교회는 모이는데 의미가 있고 모일 때 힘이 있다. 모이지 않는 교회는 무의미하고 무기력하다. 교회가 왜 모여야 하는가? 교회는 모여야 함께 기도하고, 모여야 함께 교제하고, 모여야 말씀을 배울 수 있다. 교회는 모일 때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 성령의 감동의 역사가 일어난다. 마귀는 교회의 모임을 두려워하며 그것을 폐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참된 교회는 모여야 한다.

히브리서 10:22-25,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교회는 공적 예배의 모임을 위해 날이 필요하다. 주일은 하나님이 신약교회에 주신 그 날이다. 교회는 아주 초기로부터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제7일 대신 첫째날 곧 주일에 모이기를 시작하였다. 사도행전 20:7에 보면, 드로아의 성도들은 안식일 후 첫날 곧 주일에 떡을 떼려고 모였다. 또 고린도전서 16:2에 보면,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게 매 주일 첫날 곧 주일에 각 사람이 이익을 얻은대로 헌금하라고 교훈하였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일을 구별하셨다는 몇 가지 다른 증거들도 있다. 예를 들어,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셨는데, 그 날은 주일이라고 판단된다(행 2:1-4; 레 23:16). 또 이날에 요한 사도는 요한계시록의 내용인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요한계시록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사도시대 직후의 교부(敎父)들도 주일 집회를 언급하였다. 바나바의 서신의 저자는 말하기를, "그러므로 또한 우리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제8일을 기뻐하기 때문에 그날을 지킨다"고 했고, 익나시우스는 말하기를, "만일 옛 습관들로 살았던 자들이 새로운 소망에 이르러, 더 이상 안식일들을 지키지 않고 주의 날(주일)을 따라 그들의 삶을 형성한다면 . . . 만일 그러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를 떠나 살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순교자 저스틴도 말하기를, "일요일에 모든 도시의 사람들은 한 곳에 모여 사도들의 글을 읽으라. 이 날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수 주일은 교회의 공적 예배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하다. 주일 성수가 식으면 교회는 쇠잔해질 수밖에 없다. 대체로 주일 없이 사는 자는 하나님 없이 사는 자리로 나아간다. 주일을 구별할 줄 모르는 사회는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사회로 타락하고 말 것이다. 청교도 신학자 죤 라일은, "영국 기독교의 번성과 부패는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의 보존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말이 아니다. . . . 당신의 안식일을 제거해 보라. 그러면 당신의 종교는 곧 없어지게 될 것이다. 일반적 규칙으로, 사람의 걸음은 안식일 없는 데(No Sabbath)로부터 하나님 없는 데(No God)로 나아간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교회를 위해, 교회의 모임을 위해 주일 하루를 구별해야 한다. 예수 믿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교회로 모이는 주일 하루의 시간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주일 모임들에 열심으로 참석해야 한다.


성수 주일은 어떤 방법으로?

그러면 우리는 오늘날 어떤 방식으로 주일을 성수해야 하는가?

첫째로, 우리는 주일을 온종일 지켜야 하겠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약의 토요 안식일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신약성도는 이제 주일을 그리스도인의 예배의 날로 지키게 되었다.

장로교 헌법 예배모범 제1장에 보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에 대하여 "미리 육신의 모든 사업을 정돈하고 속히 준비하여 성경에 가르친 대로 그날을 거룩히 함에 구애가 없게 하라. 이 날은 주일인즉 종일토록 거룩히 지킬지니"라고 서술하였다.

둘째로, 우리는 온 가족이 다 주일을 성수하게 해야 한다. 출애굽기 20:10, "너와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부모는 교회에 나와 주일을 지키지만, 자녀가 학교와 학원에 가거나 집에서 텔레비젼을 보고 놀거나 학교운동장에서 공치기를 하고 논다면, 그것은 부모에게도 성수 주일이 아니다. 또 자신은 주일을 지키지만, 자신의 가게나 사업체를 주일에도 열고 일하게 한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성수 주일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 그리고 내가 관장하는 사업체와 직원들을 주일에 다 쉬게 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 날 세속적인 일들을 중단해야 한다. 이사야 58:13, 14,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우리는 주일에 세상의 직업의 일을 중지해야 한다. 직업상 의사나 경찰이나 공무원의 비상근무 등 부득이한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대로, 우리는 주일을 지킬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또 부득이한 경우는 그 처지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주부들은 부득이한 것 외에는 빨래나 대청소를 하지 말고 학생들은 학교나 학원에 나가지 말고 시험공부도 중단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주일에 가게에서 물건을 사거나 음식점에 들어가 음식을 사먹는 일 등도 피해야 한다. 청년들은 주일에 카페에 출입하는 일을 피해야 한다. 또 우리는 이날 오락적인 일들을 중단해야 한다. 테니스, 운동, 등산, 낚시, 영화나 스포츠 관람, 텔레비젼 시청 등을 중단해야 한다.

장로교 예배모범도 "[이 날은] 종일토록 거룩히 안식하고 위급한 일 밖에 모든 사무와 육신적 쾌락의 일을 폐할찌니, 세상 염려와 속된 말도 금함이 옳다"고 서술하였다.

넷째로, 우리는 이 날 교회의 공적 모임들로 모여야 한다. 구약 안식일은 성회로 모이는 날이었다(레 23:3). 주일은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다. 이 날 우리는 교회의 공예배회들로 모인다. 교회는 오전에 뿐만 아니라 할 수 있는 대로 오후에도 모여야 한다. 우리는 교회의 공적인 모임들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이 시간들은 하나님께 경배하는 시간이며, 이 시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우리의 영적 생활이 자라고 새로워지는 시간이다. 이 시간을 귀중히 여기며 지키는 자는 영적으로 성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간을 소홀히 여기며 자주 빠뜨리는 자는 영적으로 성장치 못하며 영적 손해가 클 것이다.
앞에서 인용했던 장로교 예배모범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이 날은 주일인즉 종일토록 거룩히 지킬찌니 공동회집으로나 개체로 예배하는 일에 씀이 옳으며 . . . 주일 아침에는 개인으로나 혹 권속으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되 특히 저희 목사가 그 봉직하는 가운데서 복 받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며 묵상함으로 공동예배에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준비하라. 이와 같이 엄숙한 태도로 공식예배를 마친 후에는 이 날 남은 시간은 기도하며 영적 수양서를 읽되 특별히 성경을 공부하며 묵상하며 성경문답을 교수하며 종교상 담화를 하며 시편과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를 것이요, 병자를 방문하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며 무식한 자를 가르치며 불신자에게 전도하며 경건하고 사랑하며 은혜로운 일을 행함이 옳다."

성수 주일은 그리스도인의 순종의, 그리고 성공과 실패의, 시험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니요 특권이다. 신약의 성도들은 구약성도들보다 더 큰 은혜를 받은 자들이므로, 하나님께서 여러 날들을 지키라고 명령하실지라도 지켜야 하고 또 지킬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겐 주일을 지키면서 버는 돈이 참으로 버는 돈이다. 그 돈은 복되다. 그러나 주일 없이 번 돈은 어느날 날라가 버리고 만다. 우리가 열심히 일한다고 행복한 삶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일주일 내내 일하여 돈을 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불어버리시면 그것이 하루 아침에 날라가 버린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복되게 하시는 돈이 복되다.


의식법들--절기

구약의 율법에는 의식법(儀式法)이 있는데, 그것들은 할례, 성막의 제도, 제사들, 절기들, 정(淨)·부정(不淨)의 법들, 십일조 등의 법을 포함한다. 그것들은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특히 그의 속죄사역을 모형적으로 보이며, 도덕법에 의해 드러난 죄를 씻는 길을 예시한다. 그것들은 또한 도덕적 교훈도 준다. 할례는 성결을 암시하며, 제사들은 이차적으로 순종, 헌신, 감사 및 교제를 상징한다. 절기들은 모든 시간이 하나님의 것임을, 십일조는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것임을, 그리고 정 부정의 법은 성결을 가르친다.

구약의 이 의식법들은, 비록 그것들에 내포된 기본 정신과 원리들은 영속적이며 따라서 오늘날도 적용될 수 있을지라도, 그 자체로는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다. 히브리서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골로새서 2:16, 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로마서 14:5, 6, "혹은 이날을 저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날을 중히 여기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지 아니하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3, ". . . 하나님께서는 미성년의 교회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몇 가지 모형적 규례들을 담고 있는 의식법(儀式法)들을 주시기를 기뻐하셨는데; 그것들은 부분적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들, 행위들, 고난들, 은택들을 예시(豫示)하는 예배에 관한 것들과; 부분적으로 도덕적 의무들에 대한 여러 가지 교훈들을 제시하는 것들이다. 이 모든 의식법들은 이제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다."


십일조

십일조는 십분의 일이라는 뜻이다. 십일조(十一條)의 '조'(條)는 '세금'이라는 뜻이 아니고 '가지'라는 뜻이다. 십일조라는 말은 단순히 열 개 중의 하나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헌금의 표준으로 소득의 십일조를 드릴 것을 명령하셨다.

레위기 27:30-33,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사람이 그 십분 일을 속하려면 그것에 그 오분 일을 더할 것이요 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그 우열을 교계하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속하지 못하리라."

신명기 14:22-23, 28-29,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 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말라기 3:8-10,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십일조는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들이나 소나 양의 새끼들 등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말라기 선지자는 말하기를,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의 집에 드려야 한다고 강조하였다(말 3:8-10). 이 십일조는 레위 사람들에게 주어서 생활비로 쓰게 하였고, 레위 사람들의 십일조는 제사장들에게 주어서 생활비로 쓰게 하였다. 또 매 3년 끝에는 그 십일조를 저축하여 두어서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들로 먹게 하라고 말씀했다(신 14:28, 29). 십일조나 첫열매의 헌금은 하나님의 풍성한 복이 약속되어 있다(말 3:10; 잠 3:9, 10).

구약의 의식법들은 신약 아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고 따라서 폐지되었다. 그러나 그 명령에 담긴 원리는 신약 아래서도 우리의 생활의 지침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안식일이나 십일조의 규례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지만, 우리의 시간 생활이나 물질 생활이 구약보다 못한 방향으로가 아니라 더 풍성한 방향으로 성취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 성도들은 7일 중 하루뿐 아니라 그 이상을, 또 소득의 십일조뿐 아니라 그 이상을 하나님 앞에서 구별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고린도후서 8: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취미와 오락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위하여 자연 만물을 주셨고 그 속에서 사람이 그것을 즐기며 살게 하셨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며 휴식과 즐거움의 시간들을 필요로 하는 정서적 존재이다. 밤은 하나님이 주신 복된 휴식의 시간이다. 자연을 즐기는 것은 사람에게 주신 기본적 행복이다.

성경은 모든 종류의 오락과 생의 즐거움을 정죄하거나 배격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너무 쾌락에 빠져 하나님 없이 산다면 그것은 문제이지만, 적절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복이다. 그러므로 역사상 볼 수 있는 금욕주의는 분명히 치우친 인생관이다.

전도서 5:18,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전도서 9: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사람이 여가 혹은 자유시간을 이용하여 피곤한 일상생활에 기분 전환이 되는 취미생활을 즐기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본다. 건전한 미술과 음악과 조각, 운동과 등산과 여행, 낚시나 께임이나 스포츠 관람 등은 건전한 취미생활의 예들일 것이다. 물론 우리는 자신의 일상적 의무들에 충실하면서 그렇게 해야 한다.

운동 중에서 권투, 미식축구, 자동차 경주 등과 같이 생명에 위험한 것들은 제외시켜야 할 것 같다. 1970년대의 한 글에 의하면, 1945년 영국에서의 시합 이후 적어도 6명의 직업 권투선수들이 죽었고, 미국에선 고등학교와 대학교 미식축구에 관련하여 매년 약 26명이 죽는다고 한다.

T.V., 비디오, 영화, 연극 등도 그 자체가 죄악되지는 않다. 그것들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건전하게 창작되고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분야의 작품들의 다수가 그 내용에 음란, 난폭 등의 부도덕한 부분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들은 사회에 매우 악한 영향을 미친다.

미국의 한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T.V.를 주관하는 자들 가운데 59%가 유대인이며, 25%가 개신교, 12%가 카톨릭이고, 93%는 교회에 거의 혹은 전혀 출석치 않으며, 97%는 낙태 찬성론자이며, 95%는 동성연애에 대해 괜찮다는 입장을 취한다고 했다.

그러나, 취미생활이나 건전한 오락들이 너무 많은 시간과 돈과 정력을 소모하게 될 때, 그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그리스도인의 기본적 삶의 목적에 위배된다. 무슨 일이든지 지나치면 좋지 못하며 죄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들은 T.V. 프로그램, 비디오, 영화, 연극 등을 선별하여 보아야 하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일에 무관심하고 안일하면서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는" 이스라엘을 정죄하였다(암 6:5).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는 "이 생의 염려와 재리[부]와 일락[쾌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심치 못하는 자"를 가리킨다고 말씀하셨다(눅 8:14).

춤, 특히 다른 남녀와 어울려 추는 춤은 그리스도인에게 합당치 않다. 옛날의 무도회로부터 오늘날 디스코장까지 춤은 남녀의 육신적 자극을 일으키며 음란의 죄로 나아간다. 더욱이 오늘날의 춤곡인 록음악은 광란적이므로 성도에게 합당치 않다.

장기, 바둑, 당구 등은 머리와 기술을 요하며 건전한 께임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본다. 카드 놀이나 화투 등도 돈을 걸고 하는 께임이 아니라면 소박한 오락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박이나 노름, 혹은 요행에 의한 돈 벌이의 성격을 가진 카드 놀이, 화투, 마작, 경마, 당구, 슬롯머신 등은 성도에게 합당치 않다.

청소년들의 오락실 출입도 유익보다도 해가 더 많은 것 같다. 오락실이 대체로 청소년들에게 시력 장애, 두뇌 피로, 시간 낭비, 돈 낭비, 중독성, 학습 지장 등을 가져옴으로 출입을 절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내용적으로 난폭하거나 음란한 것들이 없지 않기 때문에 청소년들의 도덕성을 위해서도 조심시켜야 한다. 노래방이나 비디오방도 그 도덕성에 비추어 판단되어야 한다.



5-10계명의 요약

[122문] 사람에 대한 우리 의무를 포함하는 나머지 여섯 가지 계명의 대강령은 무엇인가?
[답] 사람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포함하는 나머지 여섯 가지 계명의 대강령은 우리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우리도 남을 대접하는 것이다.


이웃 사랑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은 다른 말로 사랑의 삶이다. 사랑은 인간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이다. 마태복음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성도는 교인들만 사랑할 것이 아니라, 불신자들도, 심지어 원수들까지도 사랑해야 한다.

누가복음 10:25-37,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비용]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 . . .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사람이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여 그 선행으로 영생을 얻을 수는 없다. 어떻게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는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이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예수께서 하신 것은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더욱 강화하시며 우리가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인가를 깨우치기를 원하셨음이 틀림 없다. 이웃 사랑의 행위로 영생을 얻을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영생을 얻은 모든 성도는 사마리아인이 한 것처럼 어려움 당한 이웃을 내 몸같이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구원 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가장 큰 사랑은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전도이다. 무지와 죄로 인하여 영원한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그들을 지옥 형벌로부터 건져내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전도는 가장 큰 이웃 사랑의 행위이다. 물론 직접 나가 말로 전도하지 못해도 일선에 나가 활동하는 전도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헌금으로 후원하는 것은 전도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웃 사랑은 또한 그 밖에 이웃을 돕는 여러 가지 봉사와 구제의 행위로 표현될 수 있다. 성도는 기회 있는 대로 그러한 봉사와 구제에 힘써야 할 것이다. 갈라디아서 6: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친구

인간에게 있어서 친구 관계는 매우 중요한 영역이다. 이것은 철부지 어린 시절로부터 결혼 전까지의 학생시절 뿐만 아니라 결혼 이후에도 그러하다. 참된 친구는 많은 유익이 되지만, 나쁜 친구는 큰 해를 끼친다.

성경은 악한 친구를 삼갈 것을 교훈한다. 잠언 13:20,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고린도전서 15: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고린도후서 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하와와 뱀은 친구 관계는 아니나 나쁜 친구가 어떤 악 영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좋은 예가 된다. 나쁜 말은 아예 듣지 않는 것이 낫다. 사무엘하 13장에 보면, 다윗의 아들 암논은 간교한 친구 요나답의 조언을 들음으로 범죄했고 결국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유다왕 여호사밧은 경건한 왕이었으나 악한 이스라엘 왕 아합과 그 아들 아하시야와 교제하는 잘못을 범했다. 역대하 19:2,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가로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서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 또한 그 교제로 인하여 그 가문은 신앙적으로 부패하게 되었다.

한편, 성경은 좋은 친구에 대해서도 말한다. 다윗과 요나단은 진실한 사랑의 친구이었다. 사무엘상 18:1,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다윗은 말하기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고 하였다(삼하 1:26).

전도서 4:9-12,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 . .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성도들이 좋은 친구, 참으로 영적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친구를 갖기 어려운 시대도 있다. 엘리야나 미가야 같은 구약의 선지자들은 친구를 가지지 못했던 것 같다. 신약의 바울 사도도 말년에 외로운 사역의 걸음을 걸었던 것 같다. 악한 친구를 많이 가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친구가 없는 것이 더 낫다.
우리가 친절을 베푸는 모든 이웃이 다 친구이지만, 그들이 다 정신적으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대상자는 아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으셨으나 그들과 정신적으로 교제를 나누신 것은 아니다. 악한 자들을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사람이 친구가 될 수 있으나 영적 교제의 대상은 진실한 성도들뿐이다. 세상 친구는 참된 교제의 대상이 아니고 전도의 대상일 뿐이다.


5계명

5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과 금지된 죄들

[123문] 제오계명은 무엇인가?

[답] 제오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는 것이다.

[124문] 제오계명에 있는 부모는 누구를 뜻하는가 ?

[답] 제오계명에 있는 부모는 혈육의 부모뿐 아니라 연령, 은사의 모든 윗사람과 특히 하나님의 규례에 의하여 가정, 교회, 국가를 막론하고 우리 위에 권위의 자리에 있는 자들을 뜻한다.

[125문] 왜 윗사람들을 부모라 칭하여야 하는가?

[답] 윗사람들을 부모라 칭함은 아랫사람들에 대한 모든 의무를 가르쳐 육신의 부모같이 그 몇몇 관계에 따라 아랫사람들을 사랑으로 부드럽게 대하게 하고 아랫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그들 자신의 부모에게 하듯 자기 윗사람들에 대한 의무를 더욱더 기꺼이 유쾌하게 행하게 하려 함이다.

[126문] 제오계명의 일반적 범위는 무엇인가?

[답] 제오계명에 일반적 범위는 아랫사람 윗사람 혹은 동등자들로서 몇몇 상호 관계에 있어서 우리가 서로 지고 있는 의무들을 행하는 것이다.

[127문] 아랫사람들이 윗사람들에게 어떻게 존경을 표시해야 할 것인가?

[답] 아랫사람들이 윗사람들에게 표시해야 할 존경은 언행 심사간에 모든 합당한 경의와 그들을 위한 기도와 감사, 그들의 덕행을 본받음과 그들의 합법적인 명령과 권고에 즐거이 순종함과, 그들의 징계에 당연히 굴복함과 그들의 여러 등급 및 그들의 지위의 성질에 따라 윗사람들의 인물과 권위에 충성하고, 옹호하며 지지함과 그들의 연약성을 참고, 이를 사랑으로 덮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그들과 그들의 정부에게 영예가 되게 함이다.

[128문] 아랫사람들이 윗사람들에게 대하여 범하는 죄들은 무엇인가?

[답] 아랫사람들이 윗사람들에게 짓는 죄들은 그들에게 요구된 의무를 소흘히 함과, 합법적인 권포와 명령, 징계에 그들의 인물과 지위를 시기하고 경멸하고 반역함과 그들과 그들의 정부에 치욕과 불명예로 판명되는 그런 모든 다루기 힘든 수치스러운 태도 등이다.

[129문] 아랫사람들에 대하여 윗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가?

[답] 윗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권세와 그들이 가진 관계에 따라서 그들의 아랫사람들을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하며, 그들을 가르치고, 권고하고, 훈계하며, 잘하는 자들을 격려하고, 칭찬하고, 포상하며, 잘못하는 자들을 반대하고 책망하고 징벌하며, 영혼과 몸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들을 위하여 보호하고 예비하며, 정중하고 지혜롭고 거룩하고 모범적인 태도로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자신들에게 영예가 있게 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권위를 보존하는 것이다.

[130문] 윗사람들의 죄들이란 무엇인가?

[답] 윗사람들이 짓는 죄들은 요구된 의무를 소홀히 하는 일 외에 자기 자신들, 자기 자신들의 명예, 평안함, 유익 혹은 쾌락을 과도히 추구함과 불법하거나 아랫사람들의 권한에 있지 않는 일을 하라고 명령함이며, 악한 일을 권고하고 격려하거나 찬성함이며, 선한 일을 못하게 말리며 낙심시키거나 반대함이며, 그들을 부당하게 징계함이며, 부주의하여 잘못된 일, 시험, 위험에 그들을 폭로하거나 내버려둠이며, 그들을 격동하여 격분케 함이며 혹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들 자신을 욕되게 하거나, 불공평, 무분별, 가혹하거나, 태만한 행동으로 그들의 권위를 삭감함이다.

[131문] 동등자들의 의무는 무엇인가?

[답] 동등자들의 의무는 피차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여 서로서로 경의를 표하며, 피차 받은 바 은사 및 높아짐을 자기 자신의 것처럼 기뻐하는 것이다.

[132문] 동등자들끼리의 죄는 무엇인가?

[답] 동등자들끼리의 죄는 명령받은 의무를 소홀히 하는 일 외에 피차의 가치를 과소평가하고, 피차의 은사를 질투하고, 피차의 높아짐과 번영함을 기뻐하지 않고, 다른 사람보다 우수해지고자 횡포하는 것 등이다.

[133문] 제오계명을 더욱 강화하도록 부가된 이유는 무엇인가 ?

[답]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는 말씀에 나타나 있는 제오계명에 부가된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들 자신의 선을 이룰 수 있는 한에 있어서 이 계명을 지키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려는 장수와 번영의 분명한 약속이다.


효도

부모에 대한 효도는 성경에 명시된 하나님의 명령이요 자식을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님의 노고(勞苦)에 대한 자식편에서의 마땅한 보답이다. 성경은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며 그들에게 순종하고 그들을 기쁘시게 해야 할 것을 밝히 가르친다. 출애굽기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잠언 23:25,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에베소서 6: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주 안에서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말씀은, 첫째로,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할 근거를 보여준다. 모든 도덕 질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은 주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역하는 일이다.

둘째로, 그 말씀은 또한 자녀들의 부모에 대한 순종의 한계를 보여준다. 육신의 부모 위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자이시므로 육신의 부모보다 더 높으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를 순종하되 주 안에서 순종해야 한다. 즉 주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리면서 육신의 부모에게 순종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이다. 이런 뜻에서 주께서는 우리의 집안 식구들이 우리의 원수가 된다고 말씀하셨고 우리가 저들을 미워하지 않으면 주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0:34-37,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누가복음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불효(不孝)의 일들

부모님께 불효가 되는 일들이 있다. 첫째로, 부모를 근심시키는 것이 불효이다. 잠언 10:1,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로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

둘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그러한 자녀들을 죽이라고 명하였다. 신명기 21:18-21,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부모가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셋째로, 부모를 멸시하는 것이 불효이다. 성경은 이런 자를 저주하였다. 잠언 23:22,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잠언 30:17,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넷째로, 부모를 저주하는 것이 불효이다. 성경은 이것도 사형에 해당하는 악이라고 증거한다. 레위기 20:9, "무릇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였은즉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다섯째로, 부모를 구타하는 것이 불효이다. 출애굽기 21:15,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여섯째로, 부모를 돌보지 않고 의식주를 공급하지 않은 것이 불효이다. 디모데전서 5:4,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심지어 어떤 자녀들은 부모를 탁아모나 파출부로 이용하기만 하고 마음으로 감사하지도 않고 물질로 공급하지도 않고 또 어떤 이들은 부모의 유산에만 관심을 둔다.

효도의 일들

부모님께 대한 효도의 일들은 무엇인가? 첫째로, 효도는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계명이니"라고 말씀했다(엡 6:2).

둘째로, 효도는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잠언 1:8, 9,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 골로새서 3: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셋째로, 효도는 부모에게 보답하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5:4,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부모님께 대한 보답은 무엇보다 위로하는 말과 행위로 표현된다. 자녀들은 자주 부모님을 방문하고 정신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그들을 돌아보아야 한다. 자녀들이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방문치 못할 경우라도 전화로 부모님께 문안해야 한다. 자녀들은 평생 부모의 의식주 문제에 대한 책임을 가져야 한다.

자녀가 부모님을 모시는 경우, 며느리는 시어머님을 자기 어머니같이 생각하고 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룻기 1: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시어머니는 남이 아니고 나의 사랑하는 남편의 어머니요 이제 나의 어머니라고 생각해야 한다.

물론, 경건한 시어머니들은 며느리들을 딸같이 생각하고 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룻 1:8, 9, 11). 그들은 집에 들어온 식모나 일군이나 남이 아니고 한 식구임이다. 또한 남편은 아내의 정신적, 육체적 수고와 피곤을 이해하고 위로하고, 어머니와 아내 앞에서 처신을 잘 해야 한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는 어느 한 쪽도 희생되어서는 안되지만, 현세대의 변천 과정에서 젊은이들은 노부모님들의 사고 방식과 감정을 이해해야 한다.


자녀 교육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주신 자녀들을 어떻게 하면 잘 키울 것인가 하는 생각은 부모들의 공통적 관심사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지 백여년의 세월밖에 안되었으므로 환경적으로 우리는 기독교 가정의 좋은 모범을 보지 못했고 경험하지 못했다. 오히려 우리는 세속문화 속에서 자랐으므로 우리의 자녀들을 믿음 안에서 말씀으로 잘 키운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려운 일들처럼 보인다.

교육의 주체

자녀는 부모가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셨다. 시편 127:3,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그러나 이렇게 복된 자녀가 때때로 부모의 근심거리가 된다. 잠언 10:1,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로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자녀를 주실 때 성숙한 인격자가 아니고 미성숙한 자로 주셨고 부모에게 자녀 교육의 책임을 맡겨주셨다. 신명기 6:6, 7,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에베소서 6:4,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교육의 내용

잠언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마땅히 행할 길이란 인생의 본분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게 사는 것이다. 그것은 다 성경에 교훈되어 있다. 자녀 교육의 내용은 한마디로 성경이다. 성경을 성실히 가르치면 그 속에 다 들어 있다.

(1)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첫째로 중요한 내용은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고 사랑하고 섬기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경건이요 그것이 믿음의 생활이다.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전도서 12:1,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신명기 6:6, 7,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신앙 교육의 기본적 요소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성경 말씀을 읽고 가르치는 것이다. 부모는 아이의 출생때부터 그를 안고 기도하며 찬송가를 들려주고 6개월부터는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하며, 2살부터는 쉬운 성경구절을 암송시키고 5살부터는 자신이 성경을 직접 읽게 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7살부터는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게 하고 기도하게 한다. 부모는 가정예배를 통해 성경의 모든 말씀과 자녀에게 필요한 모든 내용들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2)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

경건의 중심적 요소는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이 구원과 영생의 길이다. 요한복음 3:5, 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사도 바울은 어디에서든지 회개와 믿음을 전파하였다. 사도행전 20: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디모데후서 3:15,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3) 의롭게 사는 것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은 우리가 죄를 버리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에베소서 6:4,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디모데전서 3:4, "[감독은]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이상적 인격의 요소에는 예를 들어 선한 말씨, 예절, 양보심, 참는 마음, 겸손, 단정함, 성실함 등이 포함된다. 덧붙여, 부모는 자녀들의 지정의의 건전한 발달을 위해서도 노력해야 한다. 예를 들면, 자녀들에게 좋은 책 읽는 습관, 좋은 음악 듣기, 양치질, 손 씻기, 옷입기, 식사태도, 규칙적 생활, 적당히 운동하기 등도 가르칠 필요가 있다.


교육의 방법

(1) 부모의 모범을 통해

모범은 가장 좋은 교육 방법일 것이다. 주께서는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바울도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자주 말했다(고전 4:16; 11:1; 빌 3:17). 또 교인들이 자신을 본받음에 대해 증거하였다(살전1:6). 바울은 디도에게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이라'고 말했다(딛 2:7).

아이들은 비교적 백지 상태와 같아서 선악간에 흉내를 잘 낸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부모의 좋은 모범을 많이 보면 볼수록 좋은 습관을 가지고 좋은 인격을 형성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범된 삶을 살아야 한다. 예를 들어, 그들은 먼저 경건하고 깨끗하고 선하고 온유하고 겸손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또 자기 감정을 다스리는 자제력을 인내력에 있어서도 모범을 보여야 한다. 아이들 앞에서 부부 싸움이나 남의 욕을 하거나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부당하고 무리하게 훈계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온다. 교훈과 책망은 항상 정당해야 하고 자녀도 그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에베소서 6:4,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골로새서 3: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또 부모 자신이 잘못했을 때는 자녀 앞에서 그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 부모는 자신도 완전한 자가 아니며 단지 하나님 앞에서 성실히 노력하는 자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2) 부지런하게

신명기 6:6, 7,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자녀 교육은 처음 가르칠 때 바르게 가르치고 그것을 반복적으로 가르쳐 그 마음에 새겨지고 습관이 되게 해야 한다. 사람은 생각보다 미련하여 반복적 교육과 책망을 통하여 인격이 형성된다. 자녀와 계속적 대화는 매우 필요한 요소이다. 자녀의 잘못은 즉시 즉시 고쳐주어야 하고 잘한 것은 칭찬하고 격려해주어야 한다. 또 아이들을 쉽게 그리고 자주 남의 손에 맡기지 말아야 한다. 자녀들은 부모 자신이 가장 잘 교육할 수 있다. 아이들은 나쁜 본을 쉽게 배울 수 있고 짧은 시간에라도 나쁜 것들을 많이 배울 수 있다. 부모에게 있어서 자녀의 교육은 그 어떤 일보다 소중하다.

(3) 구체적으로

잠언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부모는 자녀에게 성경의 모든 내용을 쉬운 것부터 점차 모든 것을 다 구체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사도행전 20: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부모는 구체적으로 가르칠 뿐만 아니라, 또한 자녀들의 실제적 생활을 잘 주목하고 감시해야 한다. 예를 들어, 그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 친구, 노는 장소, 장난감, 그림, 책, 취미 생활, 텔레비젼 시청, 컴퓨터 게임이나 싸이트, 남녀 관계 등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지도해야 한다.

(4) 필요할 때는 체벌도 할 것

부모는 필요할 때 자녀를 책망하고 벌을 주고 매도 때려야 한다. 잠언 13: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부지런히, 늦기 전에] 징계하느니라." 잠언 20:30,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 하나니 매는 사람의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 잠언 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잠언 23:13, 14,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지옥]에서 구원하리라." 잠언 29:15,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체벌이 없이 자녀들을 자유로이 내버려두는 것은 바른 교육이 아니다. 그것은 자녀 사랑이 아니고 오히려 자녀를 망하게 하는 길이다. 그러나 체벌할 때 주의할 점들이 있다:

① 부모는 단순히 권위 의식을 가지고 자녀에게 위압적으로 대해서는 안된다. ② 자기 감정과 기분에 따라 큰 소리로 야단 치거나 손으로 머리를 때리는 등의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손을 대지 말고 매를 드는 것이 옳다. ③ 아이들은 뒤로 미루면 잊어버리므로,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도 아이를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나가 즉시 체벌해야 효과가 있다. ④ 벌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즉 잘못에 대해서는 항상 벌을 주어야 한다. ⑤ 매는 엄하고 아프게 때려야 한다. ⑥ 체벌할 때는 부모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 ⑦ 반복적 잘못은 더 엄하게 벌해야 한다. ⑧ 실수와 고의적 잘못은 구별해야 한다. 잘못인 경우도 그것이 왜 잘못인지에 대해 먼저 설명하여 아이로 하여금 이해하게 해야 한다. ⑨ 체벌할 때도 사랑과 침착한 심령을 가지고 해야 한다. ⑩ 체벌 후에는 함께 기도하고 아픈 곳을 싸매주어야 한다.

실상, 자녀 교육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며 인간 편에서는 궁극적으로 기도밖에 없다. 경건한 히스기야에게서 악한 므낫세가 날 줄을 누가 알았으며, 악한 므낫세에게서 경건한 요시야가 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사람이 교육은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그 교육이 다 소용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온전한 인격이 된다.

교육의 결과

참된 교육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교훈과 징계는 아이들에게 지혜를 주며 악을 없애고 그 영혼을 지옥에서 건져낸다. 잠언 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잠언 29:15,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잠언 20:30,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 하나니 매는 사람의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 잠언 23:13, 14,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지옥]에서 구원하리라."

또 교육의 효과는 지속적이다. 어릴 때 바로 배운 바는 커서도 사람 속에 역사한다. 잠언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시편 71:17,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사를 전하였나이다." 그러므로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하는 것은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크고 귀한 유산이다.


선생과 학생

학교는 인간의 생활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실제적으로, 초보적인 언어와 수 등의 교육으로부터 시작하여 정신적, 도덕적 교육을 거쳐 실생활에 활용할 기술연마에 이르기까지 인간 생활에 있어서 학교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부정할 자는 없을 것이다. 사실, 천지 창조시 "땅을 정복하라"(창 1:28)는 하나님의 명령 속에 다양한 주제들의 학교 교육의 필요성과 정당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자녀들이 반드시 세속학교에서 공부해야 할 당위성은 없다. 단지 기독교 학교가 없기 때문에 세속 학교에 들어가는 것뿐이다. 교육은 단순히 세상 지식과 기술을 배우는 것만이 아니고 일차적으로 정신적, 도덕적 교육이므로, 그리스도인 자녀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교사들에게 무엇을 배우게 하는 것은 실상 최선의 길이 아니다. 여기에 기독교 학교의 필요성이 있고, 기독교인 학자들과 교사들의 필요성이 있다. 우리의 자녀들을 세속 학교에, 세속주의의 영향 아래 방치해 두어도 좋은 것은 아니다.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기독교 학교를 건립해야 한다.

학교에서 선생과 학생과의 관계는 존경과 사랑의 관계이어야 한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뿐만 아니라, 선생과 학생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학교에서 선생은 학생들을 진실과 의와 사랑으로 대해야 하며 자기 감정을 성급하게 혹은 옳지 않게 쏟아 그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한다(엡 6:4; 골 3:21). 또한 학생들은 선생에게 마땅히 가져야 할 존경심과 예절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


직장에서의 상하 관계

성경에서 주인과 종에게 주신 교훈은 직장 생활에서 윗 사람과 아랫 사람이 갖추어야 할 태도에 적용된다. 성경은 아랫 사람에게 교훈하기를, 윗 사람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순종하되 주 예수 그리스도께 하듯 성실한 마음으로 그리고 단 마음으로 하라고 한다. 에베소서 6:5-8, "종들아, 두려워 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골로새서 3:22-25,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또한 성경은 윗 사람에게 교훈하기를, 아랫 사람을 위협하지 말고 그에게 의롭고 공평하게 행하라고 한다. 에베소서 6:9,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동일하게] 하고 공갈[위협하기]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골로새서 4:1,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노예 제도

성경은 노예 제도를 인정한다. 구약의 율법은 노예 제도를 인정한다. 출애굽기 21:2,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가 6년 동안 섬길 것이요 제7년에는 값없이 나가 자유할 것이며." 출애굽기 21:20, 21, "사람이 매로 그 남종이나 여종을 쳐서 당장에 죽으면 반드시 형벌을 받으려니와 그가 1일이나 2일을 연명하면 형벌을 면하리니 그는 상전의 금전임이니라." 신약성경도 노예 제도를 인정한다. 에베소서 6: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옛 시대에 노예들 혹은 종들은 전쟁 포로로 인한 자들이거나 가난하여 팔린 자들이었다. 옛 시대의 노예 제도는 사회 제도의 발전 혹은 변화의 과정에서 극복되어야 할 폐해들을 가진 제도이었다. 특히 주인과 종들 간의 비인간적 관계가 그러하였다.

실상, 정치적, 사회적 제도들은 급격하게 변화되기 어려운 것들이다. 어떤 제도에서든지 한편에 변화를 원치 않는 기득권 계층이 있고 다른 한편에 변화를 원하는 계층이 있다. 그래서 역사상 인류는 정치적, 사회적 제도의 변화를 위해 많이 싸워왔고 지구의 어떤 부분에서는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그러나 오늘날 어떤 의미에서 직장 구조는, 비록 그것이 노예 제도는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일종의 주종(主從)관계를 형성한다. 물론 그것은 상호 계약에 의한 비강제적 주종 관계이다. 그것은 한 쪽에서 원하지 않을 때 언제나 그 관계를 해제할 수 있는 관계이다. 그러나 과거의 노예 제도에서의 비인간적 폐해들이 현사회의 직장이라는 새로운 구조 안에서도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는 것이 현실이다. 금력(金力) 앞에 사람의 인격이 짓밟히는 일들은 드물지 않다.

성경은 어떤 사회 제도 아래서든지 사랑과 존중에 입각한 인격적 인간관계를 가르친다. 성경은 비록 노예 제도를 인정하는 가운데서도 주인과 종의 관계가 사랑과 존중의 인격적 관계이어야 함을 가르친다. 에베소서 6:5-8,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에베소서 6:9,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국가에 대한 태도

국가의 의미와 필요성

국가는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자신의 개인적 선택과 관계 없이 이미 정해진, 상당히 통제력을 지닌 사회 단위이다. 물론 오늘날 자유 선택에 의해 원하는 국가로 이민하는 것이 제한적으로 가능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국가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강제된 사회이며, 그들은 날 때부터 주어진 국가적 환경을 회피할 수 없다.

세속 국가는 사회의 도덕적 질서와 평안을 위하여 필요하다. 안정된 사회 환경 속에서만 그리스도인의 안정된 신앙 생활도 가능하다. 디모데전서 2: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이상적 국가 형태

성경이 예언하는 미래의 이상적 국가 형태는 무엇인가? 그것은 독재적, 전횡적 왕정국가나, 하나님 없는 인본주의적 민주국가나 사회주의적 국가가 아니다. 성경이 예언하는, 하나님이 허락하실 미래의 이상적 국가형태는 하나님의 왕권 아래서 모든 성도들이 자율적으로 통치에 참여하는 형태라고 생각된다. 요한계시록 11:15,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 요한계시록 22:5,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국가 위정자들에 대한 의무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 된 그리스도인들이 세속 국가에 대해 가지는 의무는 무엇인가?
첫째로, 그리스도인은 국가 위정자들이, 비록 하나님을 경외치 않는 자들일지라도, 하나님께로부터 권세를 받은 '하나님의 사자들'임을 인식하고 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로마서 13:1, 2,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로마서 13:4,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 . .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로마서 13:6,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로마서 13:7,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베드로전서 2:13-17,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칭찬]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 . . 뭇 사람을 공경[존중]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둘째로, 그러나 정부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법령을 공포하거나 죄악된 일을 강요할 때는 복종치 말고 저항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우상을 숭배하라는 바벨론 왕의 명령에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복종치 않았다(단 3:5-30). 또 복음 전파를 중지하라는 공회의 명령에 사도들은 복종치 않았다(행 4:18-20). 그러나 정부의 잘못된 명령에 저항할 때 혁명적 방법은 옳지 않다. 잠언 24:21,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오직 비폭력적 저항만이 성도가 택할 옳은 방법이다. 또 성도가 정부의 불의한 명령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피할 수 있으면 그것도 한 좋은 방법이다.

셋째로, 그리스도인은 국가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디모데전서 2:1, 2,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넷째로, 그리스도인은 국가를 위해 규정된 세금들을 내야 한다. 로마서 13: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를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불법적인 탈세는 그리스도인에게 옳지 않은 일이다.


사회 정의

우리가 사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시민이 당연히 바라는 바이며 그리스도이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사실상 주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까지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주께서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악인들을 제거하시고 의인들의 세계를 만드시기 전까지 이 세상의 악은 완전히 뿌리뽑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심령이 악하기 때문에 세상에는 불의와 불법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속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를 바라며 그것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길이다. 마태복음 5:13, 14,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그러면 사회 정의를 위한 실제적 방법은 무엇인가? 우선, 인류의 역사가 증명한 대로 인간성의 개선은 어떤 강압적 법규나 최선의 교육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인간의 본성은 심히 부패되어 있다.

성경이 보이는 사회 개선의 방법은 근본적으로 심령의 구원을 통해서이다. 사람의 죄악성의 극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거듭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사회 개선에 대한 최상의 성경적 대답은 전도이다. 구원도 지상에서 법적으로는 완전할지라도 실제적으로는 불완전하여 구원받은 성도 개인이나 단체 속에 연약과 부족이 없지 않다. 그렇다면 하물며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또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말과 행위를 통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의와 거룩과 선과 진실의 본을 보여야 한다. 효력있는 전도는 성도들의 바른 인격과 삶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전도의 효력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기독교가 과연 진리 운동이고 새 생명 운동이라면, 기독교인들은 그 증거로서 세속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와 같이, 전도와 성도의 모범적 생활은 사회 정의를 위한 성경적 처방이다.

물론, 사회의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사회의 구조적 악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그러나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는 혁명이나 과격한 폭력적 방법은 인정될 수 없다. 또 인간성의 개조가 없이는 사회 정의가 실현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인내와 여유를 가져야 할 것이다. 구원받은 자들의 공동체인 교회 속에도 불완전이 있다면 세속 사회 속에서 어떻게 완전한 정의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정치 참여

국가와 교회는 그 존재 목적과 성격상 엄격히 분리된다. 비록 그 구성원이 서로 중첩되지만, 그 둘은 엄격히 구별되고 그 기능도 전혀 다르다. 요한복음 18:36,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의 모임이며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구성원들의 영적 성장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향한 전도의 임무를 가지고 있다. 마태복음 28:19,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정교(政敎)의 분리는 국가가 교회의 활동들에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교회가 국가의 활동들에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의미한다. 교회가 단체적으로 세속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바일 뿐 아니라, 또한 주께서 성경에서 가르치신 교회의 본분에서 이탈하는 행위가 된다.

비록 단체로서의 교회가 세속 정치에 관여하거나 개입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그리스도인 개인이 세속적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또는 특히 소명감을 가진 정치인으로서 그리스도인 개인은 세속 사회나 국가의 그리고 더나아가 세계의 정의와 평화를 증진시키기 위해 정당하게 활동할 수 있다.


6계명

6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과 금지된 죄들

[134문] 제육계명은 무엇인가?

[답] 제육계명은 "살인하지 말지니라" 함이다.

[135문] 제육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은 무엇인가?

[답] 제육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은 우리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주의 깊은 연구와 합법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이니 누구의 생명이든지 불법하게 빼앗아 가려는 모든 사상과 목적에 대항하고 모든 격분을 억제하고, 그런 모든 경우와 시험과 습관을 피함으로, 폭력에 대한 정당 방위, 하나님의 손길을 참아 견디는 것, 마음의 조용, 영의 유쾌와 고기, 음료, 의약, 수면, 노동 및 오락의 온당한 사용으로, 자비로운 생각, 사랑, 민망, 온유, 우아함과, 친절, 화평, 부드럽고 예의 있는 언행과, 관용, 화해되기 쉬움, 상해의 관용 및 용서, 또한 악을 선으로 갚음과, 곤궁에 빠진 자들을 위로하고 구제함, 죄 없는 자를 보호하고 옹호함으로 할 것이다.

[136문] 제육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무엇인가 ?

[답] 제육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공적 재판, 합법적인 전쟁 혹은 정당 방위 외에 우리 자신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박탈하는 모든 것, 합법적이며 필요한 생명 보존의 방편을 소홀히 하거나 철회하는 것, 죄악한 분노, 증오심, 질투, 복수하려는 욕망을 가지는 것, 모든 과도한 격분, 산란케 하는 염려와, 육류와 음료, 노동 및 오락을 무절제하게 사용함과, 격동시키는 말과, 압박, 다툼, 구타, 상해, 다른 무엇이든지 사람의 생명을 파멸하기 쉬운 것이다.


자살

오늘 시대는 정신적으로 매우 복잡한 시대이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자살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1985년 미국의 한 보도에 의하면, 미국에서 자살은 청소년 사망 원인들 중 제3위이며, 매년 약 7천명이 자살하고, 약 40만명이 자살을 기도한다고 한다. 그러나 자살은 허용되어서는 안될 악이다.

성경에 자살의 예들은 사울(삼상 31:4; 대상 10:4)과 아히도벨(삼하 17:23)과 시므리(왕상 16:18)와 가룟 유다(마 27:5)의 경우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악인들이지 참된 성도들이 아니었다.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 받은 자이었고, 아히도벨은 압살롬과 악하게 결탁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왕 다윗을 반역한 자이었으며, 가룟 유다는 주께서 친히 '이 세상에 나지 아니하였으면 좋을 뻔한 자' 라고 증거하신 자이었다.

성경에서 성도들이 자살한 예는 없다. 삼손의 경우(삿 16:28-30)는 자신을 바쳐 블레셋을 패망케 한 것으로서 자살이라고 볼 수 없다. 자살이란 일반적으로 어떤 외적으로 불가피한 상황이 아닌 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자기 목숨을 고의적으로 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원수들과의 싸움에서 자신을 바쳐 죽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살이 죄악이라는 것은 '살인하지 말라' 는 하나님의 계명에 의하여 증거된다. 사람의 육신의 생명 혹은 목숨은 타인의 것이나 자신의 것이나 간에 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귀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살인의 죄가 사형의 벌로 엄하게 보응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창 9:6).

사람은 남의 생명을 존중해야 하듯이 자신의 생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매우 귀한 선물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마땅히 자신의 생명을 잘 보존하고 지켜야 한다. 사람에게는 자신의 목숨을 끊을 권리가 없다. 하나님이 주신 선한 것을 고의적으로 파괴하는 것은 분명히 죄악이다.

더욱이, 구원받은 성도의 목숨은 자신의 것이 아니고 주의 피값으로 사신 것이다. 고린도전서 6:19, 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러므로 성도는 주의 것을 가지고 주의 영광을 위하여 바르게 사용해야지 자기 맘대로 그것을 파괴할 수 없다. 참으로 자살은 죄악이다. 따라서 애국자들의 활복자살도 성도에겐 합당치 않다.



술과 담배

성경에서 술은 대체로 포도주이었다. 성경에서 술 혹은 포
도주를 위해 가장 빈번히 사용된 히브리어는 야인이다(141회). 그 다음으로 많이 쓰인 단어는 티로쉬인데, 그것의 본래의 뜻은 '신선한 포도 쥬스'이다. 포도쥬스를 위해서는 미쉬레라는 단어도 있다(민 6:3, '포도즙').

그러나 옛 시대에는 포도쥬스가 발효되지 않도록 잘 보관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티로쉬('신선한 포도쥬스')라는 말이 '완전히 발효되지는 않은,' 즉 '약간 발효된' 포도주도 의미하게 되었다. 구약성경의 그리스역 성경인 칠십인경(LXX)에는, 히브리어 티로쉬가 야인과 구별 없이 둘 다 헬라어 오이노스로 번역되었다.

술 혹은 포도주는 성경에서 때때로 좋은 음식물로 언급되기도 하였다. 살렘 왕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야인)를 가지고' 아브라함에게 나왔다(창 14:18). 이삭은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티로쉬)로' 그에게 주시기를 축복하였다(창 27:28). 야곱은 12아들 중 유다에게 '그 옷을 포도주(야인)에 빨며'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다'고 예언하였다(창 49:11, 12).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 그것도 '좋은 포도주'를 만드셨다(요 2:3, 9-10).

그 외에, 포도주는 제사의 재료로도 사용되었다. 출애굽기 29:40, "전제(奠祭)로 포도주 힌의 4분 1을 더할지며." 또한 포도주는 아름다운 사랑에 비교되기도 하였다. 아가 1:2,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또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의 말씀을 포도주에 비교하였다. 이사야 55:1,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이에 더하여, 포도주는 옛 시대에 약용으로도 사용되었다. 누가복음 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디모데전서 5:23, "네 비위와 자주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그러나 성경은 또한 포도주와 술이 사람을 취하게 하고 그래서 실수와 방탕과 범죄의 원인이 됨을 증거한다. 예를 들어, 노아의 실수의 원인은 술 취함이었다. 창세기 9:20-22,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또 롯의 딸들은 근친상간적 행위를 위해 술을 사용되었다. 창세기 19:32,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동침하여."

그러므로 성경은 금주(禁酒)를 교훈하였다. 잠언 20:1, "포도주는 거만케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무릇 이에 미혹되는 자에게는 지혜가 없느니라." 잠언 23:20, "술을 즐겨하는 자와 고기를 탐하는 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잠언 23:31,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특히 제사장들은 실수하지 않기 위하여 성막봉사에서 술을 마셔서는 안되었다. 레위기 10:9,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특히 신약성경은 술취함이 육체의 일이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죄악이라고 밝히 증거하였다. 갈라디아서 5: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술취함과 방탕함." 고린도전서 5:11, "(어떤 형제가 술취하거든 그런 자와는)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고린도전서 6:10, "(술 취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그러므로 감독(장로)이나 집사는 술을 즐기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고 성경은 규정하였다. 디모데전서 3:3, "(감독은)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디모데전서 3:8, "(집사는)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결론적으로, 포도쥬스는 좋은 음료수이지만, 발효된 술은 유익보다 해가 된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알코홀 성분이 매우 높아 조금만 마셔도 취할 수 있는 술은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그러므로 루터, 칼빈, 웨슬리 등 경건한 신앙선배들은 금주(禁酒)를 역설하였다.

금주해야 할 이유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술은 신체에 해롭다. 술은 마취 혹은 진통의 효과가 있으나 효력이 더디고 배설시간이 오래며 마신 양의 10분의 1만 배출되기 때문에, 위와 내장과 혈액순환기에 크게 해롭다고 한다. 술은 혈관을 통하여 뇌신경을 파괴하여 판단력을 상실케 하며, 성세포를 파괴하여 후손에게 악영향을 미치고, 산소공급에 지장을 주어 심장병, 위궤양, 간경화, 중추신경마비 등의 해를 준다고 한다. 한마디로, 술은 해독이 효력보다 더 크다.

(2) 술은 경제적 낭비이다. 과거부터 술에 중독되어 경제적 낭비를 한 경우들이 많았고 지금도 그러하다. 1986년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1년간 마신 술의 양은 237만여 킬로리터이며 술값은 1조 3,720억원 이상이었다.

(3) 술은 실수와 방탕과 범죄의 원인이 된다. 오늘날의 술은 알코홀 농도가 매우 높기 때문에 약간만 마셔도 술취함에 이르기 쉽다. 술취함은 부도덕한 일들을 저지르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사람은 범죄하기 전에 술을 마시는 것이 상례이다. 또 오늘날 교통사고의 많은 경우가 음주운전에 기인한다. 더욱이 술은 중독성을 가지므로 끊기가 어렵다.

담배도 술과 같이 몸에 해롭고 경제적 낭비이다. 특히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사실은 여러 자료들에 의하여 증거되었다. 에이엠에이 잡지에 의하면 1990년 미국에서 담배는 약 40만명의 죽음을 초래하였다. 1998년 세계보건기구(WHO)는 전세계 흡연자가 5명중 1명꼴인 11억명에 달하며, 이 중 5억명 이상이 담배로 인해 죽을 것이며 매년 350만명이 흡연 관련 질병으로 죽는다고 발표하였다. 1994년 10월 '제9차 담배와 건강에 관한 세계회의'는 "질병 자살 등을 포함, 모두 54종류의 사망원인 가운데 흡연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질병이 25가지나 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질병 중 암으로 분류된 것이 17종이며, 이러한 암에 걸릴 확률은 흡연자가 비흡연자보다 무려 14배나 높았다. 옥스퍼드 대학 공중보건과 마틴 베세이 박사는 "통상 성인이 된 후 흡연기간을 35년 정도로 계산했을 때 흡연자의 사망률이 비흡연자보다 2배이상 높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고 말했다. 대한결핵 및 호흡기학회는 1997년 폐암 환자 10명 중 8명이 흡연자이었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므로 금주, 금연은 성도가 지켜야 할 바른 생활방식이요 건전한 전통이다.

낙태

국내에서 낙태 혹은 임신중절 건수가 비공식 통계로 한 해 100만건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또 보건사회연구원(1998년) 조사에 따르면, 15-44세 기혼 여성의 44퍼센트가 한번 이상 낙태 경험을 한 것으로도 조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낙태 혹은 인공 임신중절은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을 범하는 죄, 즉 살인죄이다.

출산 이전의 인간 태아는 인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성경은 태아를 '아이'로 부른다. 누가복음 1: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또 성경은 태아를 가리킬 때 인칭대명사를 사용한다. 예레미야 1: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또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출생하기 전에 그를 택하시고 부르신다. 갈라디아서 1:15,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더욱이, 성경은 낙태를 살인이라고 간주한다. 출애굽기 21:22-25은 이 사실을 확실히 증거한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 낼 것이니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 . 갚을지니라." 앞의 구절에서 '낙태케 하였다'는 원어는 단순히 '그의 아이가 나온다'라는 뜻이다(흠정역 영어성경은 그렇게 번역함). 이것은 단지 조산(早産)을 가리키며, 반드시 낙태 혹은 유산(流産)을 의미하지 않는다. 낙태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히브리어는 솨칼 혹은 네펠이다. '다른 해가 없으면'이라는 말은 엄마에게나 아기에게나 다 적용된다. 이 말씀은, 만일 조산된 아기가 죽었으면 살인죄가 적용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태아도 인간 생명으로 간주된다. 낙태는 분명히 살인죄이다.

유전학적으로도, 수정란은 정상적 인간의 특징을 가진다. 남성의 정자와 여성의 난자는 각각 23개씩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고 임신이 된 수정란은 46개의 염색체를 가진다. 이것은 정상적 성인의 염색체 수와 같다고 한다. 의학적으로도, 인간 생명은 임신되는 순간 시작된다. 임신 3주째면 벌써 심장 근육이 움직이고 머리, 팔, 다리가 나타나기 시작하며, 40일에서 42일이면 뇌파가 감지되고, 2개월이면 코, 눈, 귀, 발가락이 나타나며, 심장이 뛰며 혈액이 흐르고 뼈가 형성되고 모든 육체 기관들이 존재하며 활동한다고 한다. 3개월이면 곁눈질하고 주먹을 쥐고 혀를 움직이며 손가락을 빨 수 있고 육체적 고통을 느낄 수 있으며, 4개월이면 몸무게는 6배로 늘어나 출산시 몸무게의 약 2분의 1이 되고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5개월이면 피부, 머리털, 손톱이 생기고 꿈을 꿀 수 있고 공기가 존재한다면 울 수 있고 자궁 밖에서도 생존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적으로 그리고 의학적으로 낙태 혹은 인공 임신중절은 허용될 수 없다. 강간이나 근친상간의 경우도 낙태를 정당화 할 수 없다. 그것은 태아 살해이기 때문이다. 낙태를 위한 불가피한 경우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심지어 모체가 태아로 인하여 생명의 심각한 위험을 받을 경우에도 그것은 정당한 일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시작된 생명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은 어머니에게도, 의사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없다. 낙태는 살인이다.

오늘날 낙태는 대단히 큰 사회 악이다. 또한 이것은 성적 부도덕과 맞물려 유행하는 악이다. 낙태로 죽어가는 어린 생명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한 보도에 의하면, 미국에서 1980년 합법적으로 행해진 낙태는 150만명이었고 그 중 79%는 미혼자들에 의한 것이고 30%는 청소년들에 의한 것이며 심지어 1%는 15세 이하의 경우이었다.

미국의 남북전쟁시 사망한 군인들의 수는 약 50만명이었고, 1차 세계대전의 미군의 사망자수는 약 12만명, 2차 세계대전의 미군의 사망자수는 약 41만명, 한국의 6·25전쟁시 사망자수는 약 5만명, 베드남 전쟁시 사망자수는 약 6만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낙태가 합법화 된 1973년 이후 1985년까지 미국에서 낙태된 어린 아기들의 수는 약 15,00만명이라고 하니 심히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낙태를 용납하고 있다. 지금부터 25년전 미국의 역사적 로(Roe) 대 웨이드(Wade) 대법원 판결 이전, 이미 미국 연합감리교회는 낙태가 더 이상 범죄가 아니며 여성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문제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와 함께 일부 목사와 성도들은 낙태 여성을 위해 체포까지도 감수했었다. 미국 연합감리교회는 1972년 총회에서 발표된 사회신조를 통해 낙태를 범죄 목록에서 제거하고, 그 대신 기초적 의료 행위 과정과 연관되는 법률로 다루어야 한다며 낙태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1972년 통과된 책임 있는 부모에 대한 결의는 1968년 총회 때 확정된 결의로부터의 아주 중요한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1968년 결의는, 사랑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아이들이 계속적으로 태어나는 것을 경고하면서 낙태를 찬성하는가 아니면 반대하는가에 대한 단순한 논쟁을 거부하는 것이다. 또한 강간이나 근친상간, 그리고 다른 극도로 나쁜 환경의 경우 의사들에 의해 승인된 낙태만을 찬성했다. 그러나 1972년 결의는 낙태에 대한 개인적이고 도덕적인 문제와 관련, 여성들이 자유롭게 결정하도록 하는 것으로 더욱 진보했다.

1986년 미합중국 장로교 총회는 낙태에 관하여 281대 266으로 '각자의 자유 의사에 맡긴다'(pro-choice)는 입장을 재확인하였다. 미국 연합그리스도의 교회의 공식적 진술들도 낙태를 지지한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그리고 의학적으로 낙태 혹은 인공유산은 허용될 수 없다. 강간이나 근친상간의 경우도 태아 살해를 정당화할 수 없다. 낙태를 위한 불가피한 경우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심지어 모체가 태아로 인하여 생명의 심각한 위험을 받을 경우에도 그것은 정당한 일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시작된 생명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은 의사에게도 엄마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없다. 낙태는 살인이다.


산아 제한과 피임

결혼의 목적의 하나는 자녀의 출산을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결혼을 통하여 자녀 출산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따라서 자녀를 많이 가질수록 선하고 복되다. 창세기 1:28,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세기 9: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시편 127:4, 5,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오늘날 인구 폭발을 염려하여 산아 제한을 부르짖는 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고, 인간 중심적인 염려에서 나온 생각이다. 우주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완전하시고 선하신 계획과 섭리를 알지 못하고 지구의 장래를 오직 인간들 스스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보는 것은 기독교와 상관없는 생각이다. 지구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손 안에서 그의 정하신 종말을 향하여 진행하고 있다. 역사의 시초에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변경하심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최초의 명령에 충실해야 한다.

성경이 산아 제한을 금하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 때문이다(창 1:27, 28). 산아 제한은 이 명령에 대한 불순종이다. ② 자녀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며, 더 많을수록 더 낫기 때문이다(시 127:3-5). ③ 자녀가 없는 것은 불행한 일이기 때문이다(출 23:25, 26; 신 7:13, 14; 호 9:11, 14). ④ 거세하는 것은 흠이기 때문이다(레 21:17-20). 정관수술 같은 것은 자신을 상해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촬스 프루반은 말하기를, 루터는 산아 제한을 동성애와 같다고 했고 칼빈은 그것을 미래의 인격들에 대한 살인이라고 주장했으며 도르트 회의는 피임이 낙태와 동일한 것이라고 진술한 성경 주석을 출간했고 웨슬리는 피임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그것을 행하는 자들의 영혼들을 파괴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증거했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들 예를 들어 ① 부모의 건강이 매우 나쁘다거나, ② 그들의 경제 형편이 매우 어렵다든지, ③ 그들이 특별한 사명의 길을 가는 경우, 자녀를 많이 가질 수 없다고 판단되어 피임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본다.

그렇지만, 이 경우 '사후 피임약'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후 피임약'은 '응급 피임약' 혹은 '경구 피임약'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수정란의 자궁 착상을 방해하여 피임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피임의 방법은 일종의 낙태와 같고 그것은 잉태된 생명을 죽이는 행위이다.


안락사(Euthanasia)

오늘날 세속사회에는 안락사를 허용하는 움직임이 있다. 안락사(安樂死, euthanasia)는 '행복한 죽음'이라는 뜻인데, 오늘날 이 말은 고통 중에 있는, 생존불가능한 혹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생명을 고의적으로 끝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안락사에는 두 종류가 있다. 적극적 안락사는 적극적인 방법으로 고통 중에 있는 자의 생명을 빼앗는 것을 의미하며, 소극적 안락사는 생명유지 수단(음식, 물 등)을 공급하지 않거나 합당한 치료를 중단함으로써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안락사의 개념은 점점더 확대된다. 네델란드는 가망 없는 환자를 위한 안락사로부터 만성적 환자를 위한 안락사로, 신체적 질병을 위한 안락사로부터 심리적 고통을 위한 안락사로, 그리고 자발적 안락사로부터 비자발적 안락사로 움직여왔다고 지적된다. 1999년 네델란드에서는 매년 7천명 이상이 안락사로 죽어간다고 한다. 1999년의 한 보고서는 네델란드에서 남의 도움을 받은 자살의 다섯 사건 중 하나는 환자의 동의 없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 조사는 또한 1995년에 네델란드의 안락사(安樂死)의 거의 3분의 2가 법이 요구하는 대로 보고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또 미국에서 '죽음 박사'라는 별명이 있는 잭 케보키안은 적어도 45건의 '자살'을 도왔으며 그 중 많은 이들은 최종적으로 아픈 상태가 아니었고 몇 경우는 질병의 아무런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안락사를 허용하는 생각이 교회 안에도 들어오고 있다. 1991년 미국 연합그리스도의 교회는 적극적 안락사를 지지하고 자살을 허용하는 최초의 대교단이 되게 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999년 미국의 프린스톤 대학교의 생명 윤리학 분야의 교수직에 임명된 피터 싱어에 의하면, 갓난 아기는 돼지와 소와 개보다 더 큰 생명의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는 척추 장애나 혈우병(血友病) 등을 가진 자들을 죽일 권리를 환자들이나 의사들에게 주기를 원한다. 리더스 다이제스트 1999년 10월호에 의하면, 싱어는 "불구가 된 어린 아기를 죽이는 것은 한 인간을 죽이는 것과 도덕적으로 똑같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안락사는 일종의 살인 행위이다. 인간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 그것은 자신이나 타인에 의해 고의적으로 손상되어서는 안된다. 남의 생명에 대한 고의적 손상은 분명히 살인의 죄에 해당한다. 단지, 의학적으로 치유 불가능한 경우 본인의 의사에 의해서나 혹은 본인이 무의식 상태라면 가족들의 동의에 의해 무의미한 생명연장의 의학적 조치를 중단할 수 있다고 보며, 이 경우를 안락사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할 지는 불확실해보인다.


사형

구약의 율법은 중대한 죄를 범한 자들에 대한 사형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은 사형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없다. 왜냐하면 구약 율법 자체가 사형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형의 폐지를 주장하는 자들의 논거는 대략 다음과 같다: 1) 사형은 인간의 기본적 존엄과 가치를 박탈하는 야만적 형벌수단이다. 2) 국가는 사람의 생명을 죽일 권리가 없다. 3) 사형은 범죄한 자의 개선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4) 사형은 범죄 억제에 효과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형을 명하시는 이유가 바로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가치 때문이었다. 창세기 9: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또 하나님께서는 극악한 죄인에 대해 사형을 시행할 권리를 국가에 주셨다. 이것은 구약 율법에서 밝히 증거되어 있다(예를 들어, 레 20장). 또 사형은 다른 징벌과 달리 범죄자의 개선에 목적이 있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에 목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사형 제도를 규정하신 것은 그것이 극악한 범죄의 합당한 보응이라는 것을 보인다. 또 사형이 범죄 억제에 효과적이지 않다는 반론도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경고가 범죄 억제에 최선의 방책이라는 것은 상식적이라고 생각된다. 신명기 17:12, 13, "사람이 만일 천자히 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재판장을 듣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여 버리라. 그리하면 온 백성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천자히 행치 아니하리라." 물론, 사형은 극히 신중한 심사와 판결을 통해서 시행되어야 한다.


전쟁

웨스트민스터 23:2,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의 위정자의 직분에 부름을 받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며 수행하는 것은 합법적이며, 그것을 수행함에 있어서 그들은 각 국가의 건전한 법들에 따라 특히 경건과 의와 평화를 유지해야 하므로, 그 목적을 위해 지금 신약 아래서도 정당하고 필요한 경우들에는 합법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

전쟁은 항상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평화주의는 성경적이지 않다고 본다. 구약성경에서 개인의 정당방위는 합법적이다. 출애굽기 22:2, "도적이 뚫고 들어옴을 보고 그를 쳐 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이와 같이 외부로부터의 침략에 대한 국가적 정당방위도 합법적이다. 구약의 많은 전쟁들이 그 예들이다(창 14장 등). 오늘날 정당한 전쟁은 국민을 지키기 위해서나 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정부가 정당한 방법으로 수행하는 전쟁을 가리킬 것이다. 물론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직접적 지시로 인한 전쟁들도 있었다. 가나안 일곱 족속들을 멸하신 것과 같이, 그것들은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마태복음 5장의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교훈은 악을 행하는 자에게 개인적 보복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 자신이나 스데반의 마지막 기도에서 볼 수 있듯이 영혼 사랑의 동기 때문이요, 좀더 나아가 말하면 상대방의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내가 손해를 보고 고통을 당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말씀이 세속사회의 평안을 유지하기 위한 합법적 전쟁을 부정하거나 반대하는 것이라고 적용되어서는 안된다.



7계명

7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과 금지된 죄들

[137문] 제칠계명은 무엇인가?

[답] 제칠계명은 "간음하지 말지니라" 함이다.

[138문] 제칠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는 무엇인가 ?

[답] 제칠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는 몸, 마음, 애정, 말, 행위상의 정절과 우리들 자신들 및 다른 사람들 안에 정절을 보존하는 것, 눈과 기타 모든 감관(感官)들에 대하여 방심치 않고 주의를 깊이 하는 것, 절제, 정절 있는 친구와 사귀며 온당한 의복 차림, 금욕의 은사 없는 자들의 결혼, 부부의 사랑과 동거, 우리의 사명에 근실한 노력, 모든 경우의 부정을 피함과 그것에 향하는 시험을 저항하는 것이다.

[139문] 제칠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무엇인가?

[답] 제칠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요구된 의무들을 소홀히 하는 외에 간통과 사통, 강간, 근친 상간, 남색, 모든 부자연스러운 정욕, 모든 부정한 상상과 생각, 목적 및 애정이며, 부패하거나 더러운 모든 서신 왕래, 혹은 그것에 귀를 기울임이며, 음탕한 표정, 뻔뻔스럽고 가벼운 행동, 근신치 않는 무례한 옷차림을 하는 것, 또한 합법한 결혼을 금지하고, 불법한 결혼을 시행함이며, 매음을 허락 관용 보존하며 그들에게 종종 가는 것이며, 독신생활의 서약에 휩쓸어 넣는 것, 결혼을 부당하게 지연시키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 이상의 아내나 남편을 가지는 것이며, 불의의 이혼 혹은 유기(遺棄)이며, 그리고 게으름, 폭식, 술취함, 음란한 친구 사귐이며, 음탕한 노래와 서적, 춤, 연극, 우리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음란을 자극시키는 것이나 음란의 행위 자체들이다.


결혼

결혼의 의미

결혼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세우신 신성하고 복된 제도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를 창조하셔서 가정을 이루게 하셨다. 두 사람을 따로 만드신 것이 아니고 한 사람 아담을 먼저 만드시고 그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고 그 둘을 부부가 되게 하셨다. 창세기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라는 말은 남자가 부모로부터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결혼은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다. 결혼 관계는 이 세상의 인간 관계 중 가장 밀접한 관계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매우 가깝지만 부부 관계처럼 가깝지는 않다. 부모와 자식은 한 몸이 아니지만, 부부는 한 몸이다. 결혼은 남녀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는 신비한 일이다.

일부일처(一夫一妻) 제도

결혼은 일부일처(一夫一妻)가 성경적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셨고 그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셨다. 이것이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디모데전서 3: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4:1,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이루어져야 한다. 어떤 남자이든지 동시에 한 아내 이상을 가지거나, 어떤 여자든지 동시에 한 남편 이상을 가지는 것은 합법적이지 않다."

성경에 보면, 야곱, 솔로몬, 르호보암(대하 11:21), 그의 아들들(대하 11:23), 아비야(대하 13:21), 요아스(대하 24:3) 등이 여러 아내들을 취하였다. 그러나 성경이 그것을 기록한 것은 역사적 사실을 증거한 것이지 하나님이 일부다처를 인정하신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특히 야곱의 경우는 본인의 의사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솔로몬의 경우는 많은 아내들로 인하여 결국 신앙의 실패를 맛보았다.

결혼의 필요성 혹은 이유

사람이 결혼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교제의 필요 때문에. 사람은 서로 돕고 위로하고 충고하고 격려하는 교제가 필요한 존재이다. 즉 사람은 다른 이들과 함께 사는 사회적 존재인 것이다. 사람에게는 좋은 친구가 필요하다. 창세기 2:18,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돕는 자]을 지으리라." 아내는 하나님이 주신 좋은 친구이다. 가정은 피곤한 세상생활에서 휴식과 위로의 보금자리이다.

② 자녀의 출산을 위해서. 성경은 결혼의 중요한 목적을 출산이라고 증거하며 많은 자녀들의 출산 즉 다산(多産)을 하나님의 복이라고 증거한다.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세기 9: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시편 127:4, 5,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화살통에 화살이 가득한 전사와 같이, 자녀들이 많은 가정은 복되다. 그러므로 건강이 매우 나쁘거나 경제 형편이 매우 어려운 경우는 예외가 될 수 있겠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자녀의 수는 많은 것이 좋다.

역사상 위대한 어떤 인물들은 부모의 다산의 결과이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요 경건했던 요한 웨슬리는 그 부모의 15번째 아들이었다. 오늘날도 경건한 가정들이 많은 자녀들을 둔 예들을 볼 수 있다. 미국의 보수적 루터파 신문인 크리스챤 뉴스(Christian News)의 편집자 헤르만 오톤 목사는 6-7명의 자녀를 두었고, 밥 죤스 대학교 음악교수인 멀핑거 교수는 11명의 자녀를 두었다.

③ 음행을 피하기 위해서. 고린도전서 7:2,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사람에게는 성적 감정과 요구가 있고 그 감정은 결혼관계를 통해 해소된다. 악하고 음란한 세상 속에서 정당한 부부관계가 없다면, 사람은 음행의 죄에 떨어지기 쉬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서로 분방하지 말라[서로 거절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가르쳤다(고전 7:5).

그러나 성경은 주를 위해 독신(獨身)으로 사는 것도 가능하며, 때때로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7:8,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고린도전서 7:38, "처녀딸을 시집 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주시는 특별한 은혜가 필요하다.

결혼의 대상

성도의 결혼 대상은 반드시 믿는 사람이어야 한다. 성도는 불신자와 결혼해서는 안된다. 신명기 7:3, "너는 가나안 족속들과 혼인하지 말라." 고린도전서 7:39,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고린도후서 6:13-18,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창세기 6:2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은 것)"은 경건한 셋의 아들들이 불경건한 가인의 딸들과 결혼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 결혼은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다. 또한 유다의 역사에서 유다 왕들은 믿음 없는 아내들로 인하여 범죄한 일이 많았다. 역대하 21:6, "저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 아내가 되었음이라."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는 것은 영적으로 죽은 자과 결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신자나 이방 종교인이나 천주교인이나 이단 종파에 속한 자나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자와 결혼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 자와 결혼하는 자에게는 영적 고통이 뒤따른다. 그런 자에게는 성수주일, 십일조, 술 담배, 제사, 장례식 등의 실제적 문제들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다.

또한 친족간의 결혼은 합당치 않다. 레위기 18장은 근친상간뿐 아니라 또한 친족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으로 이해된다. 거기에 금지된 대상은 어머니, 계모, 자매, 손녀와 외손녀, 고모, 백숙모, 자부, 형제의 아내 등이다.

결혼을 위한 준비 사항들

결혼을 위한 준비 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① 가장 중요한 결혼 준비는 믿음 준비이다. 이를 위해 신랑과 신부는 결혼 전에 성경읽기와 기도생활에 힘써야 한다. 자녀들이 생기고 힘들고 바쁜 시간이 오기 전에 그렇게 하여야 한다. 잠언 19:14,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잠언 31:10,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잠언 31:30,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이상적 결혼 관계와 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워주셔야 세워진다(시 127편).

② 인격적인 성숙을 갖추도록 힘써야 한다. 인격적 성숙은 참된 믿음에서 나온다. 이상적 결혼은 사랑과 순종의 인격적 관계이다. 인격적으로 사랑, 이해심, 관용, 인내, 명랑함 등을 갖도록 힘써야 한다. 잠언 12:4, "어진 여인은 그 남편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남편으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 잠언 14:1, "무릇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 잠언 15:16-17,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언 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언 21:9,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잠언 21:19,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③ 건강을 준비해야 한다. 육신의 건강은 이 세상의 삶을 위해 매우 필요하다. 그러므로 적절한 운동과 영양 섭취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특히, 여자가 시집에 들어가 시부모님을 모시게 되는 경우, 건강은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가사의 일을 잘 감당할 수 없다.

④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이것은 결혼의 시기와도 관계된다. 잠언 24:27, "네 일을 밖에서 다스리며 밭에서 예비하고, 그 후에 네 집을 세울지니라." 학생은 학교 졸업 후, 직장을 가진 후에 결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예외도 있을 수 있다. 같이 고생을 나눌 각오가 되어 있다면 가능하며 더 친밀해지는 유익도 있다. 그러나 많은 고생이 따른다.

결혼 전 교제시 주의할 점

결혼을 위한 교제시 주의할 점은 무엇보다 범죄치 않는 것이다. 남녀의 친근한 교제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항상 공개적이어야 한다. 방에서나 차를 타서나 단 둘만의 은밀한 교제는 삼가야 한다. 또한 결혼전 남녀교제는 인격적이어야 하고 육감적이어서는 안된다. 즉 춤, 수영, 음란한 말, 영화, T.V. 및 그림, 손을 잡거나 포옹하는 것 등을 삼가야 한다.

부부의 의무

부부 관계는 사랑과 순종의 관계이다. 진실과 신뢰성을 동반하는 참된 사랑과 순종은 주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부부 관계는 신앙 안에서의 관계, 신앙을 중심한 관계이어야 한다. 함께 기도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하는 관계이어야 한다. 이때 희생적 사랑과 온전한 순종이 가능하다.

남편의 의무

남편은 자기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에베소서 5:25, 28,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 . .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골로새서 3: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아내에 대한 사랑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우선, 남편은 아내에게 정신적 평안과 기쁨을 주어야 한다. 정신적 부담과 슬픔을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남편은 따뜻한 한마디의 말, 한마디의 칭찬과 감사의 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이나 욕설을 해서는 안된다. 신명기 24:5,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취하였거든 그를 군대로 내어보내지 말 것이요 무슨 직무든지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1년 동안 집에 한가히 거하여 그 취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

남편은 또한 아내를 인격적으로 존중해야 한다. 중대한 일을 결정할 때, 남편은 아내의 의견을 듣고 그와 의논하고 하나님께 함께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아내를 인격적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의 취미나 관심 분야가 있으면 그것을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라도 남편은 아내를 구타하거나 학대해서는 안된다. 또한 가사의 일들이 무미건조하고 피곤한 일임을 인정하고 시간과 힘이 있으면 설겆이, 청소, 빨래 등 집안일을 도와주어야 한다.
남편은 가정의 경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려면 그는 부지런해야 한다. 시편 128:2,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물질의 복은 근면한 남자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남편이 혼자 관리하며 아내를 가난하게 해서는 안된다. 아내가 매우 불성실하고 낭비적이지 않다면, 재정 관리를 아내에게 맡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내의 의무

아내는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에베소서 5:22-24,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골로새서 3: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아내는 자기 남편을 주님과 같이 생각하며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남편을 아내의 머리가 되게 하셨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질서이다. 그러므로 아내는 자기 남편을 존중하고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 혹 남편이 잘못을 범했을 때라도 면전에서 즉시 비판하지 말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기회를 봐서 그에게 조용히 충고해주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지혜로운 여자는 남편을 존중하고 자기 집을 세우지만, 어리석은 여자는 사사건건 남편과 다투며 자기 집을 허문다.
아내는 하나님 외에는 자기 남편만을 사모하고 사랑해야 한다. 아내는 자기 남편 외에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해서는 안된다. 심지어 부모나 자녀들이라 할지라도, 자기 남편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된다.
또한 사랑은 봉사, 희생, 수고를 동반한다. 그러므로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는 가정의 의무에 충실한 주부가 되어야 한다. 그는 가정적이어야 한다. 특히 식사 준비는 아내에게 맡겨진 중요한 책임이다. 시편 128:3,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 디도서 2:4, 5,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잠언 31:10-31에는, 현숙한 여인이 그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밤이 새기 전에 부지런히 일어나며, 궁핍한 자를 위하며, 그 집안 일을 보살핀다고 말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 아내는 검소하고 절약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디모데전서 2:9, 10, "아담한 옷을 입으며 . . .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베드로전서 3:3,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여자의 아름다움과 참된 단장은 온유함과 조용함이다. 디모데전서 2:9,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베드로전서 3:4, "(너희 단장은)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부드럽고 조용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성(性)

부부의 성관계는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도구요 표현이다. 그것은 아름답고 복된 것이다. 잠언 5:18, 19,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 전도서 9: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라.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분복이라."

성경은 부부 관계 외의 성행위를 음란 혹은 간음으로 정죄하지만, 성 그 자체를 죄악시 하지는 않는다. 부부관계에서 성은 정당하게 사용된다. 고린도전서 7:2-5,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서로 거절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금욕(禁慾)과 절제는 구별되어야 한다. 금욕은 어떤 경우에서라도 성행위를 완전히 끊는 것을 의미하지만, 절제는 어떤 조건 아래서 부부관계의 성행위를 끊으며 또 결혼 관계 외에서는 성행위를 완전히 끊는 것을 의미한다. 금욕은 금욕의 은사를 받은 자에게만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금욕의 은사를 받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결혼은 성적 욕구의 합법적 해소 수단이다.

물론,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첫째이고, 하나님이 주신 부부의 사랑은 둘째이므로, 성도가 너무 육신의 즐거움에 빠져서 영적 생활이나 봉사의 생활에 지장을 가져서는 안된다. 무엇이든지 과도한 행위는 죄가 된다. 성도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6:12, 13,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이혼, 재혼, 별거

이혼은 결혼이라는 연합의 끈을 끊는 행위이다. 결혼은 하나님이 정하신 신성한 제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신다. 말라기 2:16,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그러나 성경이 예외적으로 이혼을 허용하는 단 한 가지의 경우는 상대방이 간음을 행했을 때이다. 마태복음 5: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 . ." 마태복음 19:6, 9, ". . .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 . .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또한 성경은 재혼에 대하여 두 가지 경우만을 인정한다. 하나는 결혼한 상대가 죽었을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합법적 이혼이 이루어졌을 경우이다. 로마서 7:3, ". . .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고린도전서 7:39,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마태복음 5: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이 말씀은 불법적 이혼의 경우에 재혼은 간음의 죄가 되며, 합법적 이혼의 경우엔 재혼이 죄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4:5, "약혼 후에 범한 간음이나 음행은, 결혼 전에 발견될 때, 순결한 편에서 약혼을 취소할 정당한 이유가 된다. 결혼 후 간음의 경우에는, 순결한 편이 이혼 소송을 제기하는 것과, 이혼 후, 범죄한 편이 죽었다는 듯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정당하다." 물론 이혼과 재혼은 사사로이 이루어져서는 안되고, 반드시 합법적인 절차를 따라야 한다.

부부가 별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합법적 이혼이 아닌 경우, 부득이 하게 별거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잠언 21:9,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잠언 21:19,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고린도전서 7:10, 11,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동성애

동성애(同性愛)는 동성간의 성행위를 말한다. 성경에서 처음 동성애를 말한 것은 소돔 고모라의 사건에서이다. 창세기 19:4-8, "그들의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는 말(웨네드아 오담)은 직역하면 '우리가 그들을 알도록'이라는 말이다. '안다'(야다)는 히브리어는 때때로 성관계를 의미하였다. 롯이 처녀 딸들을 내어주겠다고 제안한 사실은 그것을 증거한다. 소돔 사람들은 동성애를 원한 것이었다. 오늘날도 동성애자들은 '소돔 사람들'(sodomites)이라고 불리운다.

사사 시대에도 소돔 시대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사사기 19장에 나오는 기브아의 죄악이 그것이다. 기브아의 불량배들도 거기 우거하는 노인의 집에 유숙하기 위해 들어온 레위인을 내어놓으라고 외쳤다. 22절,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비류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를 상관하리라(웨네다엔누)."
동성애는 죄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셔서 연합케 하신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넓게는 '간음하지 말라'는 제7계명에 정죄된 음란에 포함된다. 그것은 음란한 변태적 성행위이다. 하나님은 죄악되고 음란했던 소돔 고모라를 유황불로 심판하셨다. 사사 시대에 음란했던 기브아와 베냐민 지파 전체는 그 죄로 인하여 거의 전멸되었었다.

성경은 부부관계를 벗어난 결혼전 혹은 결혼외의 성행위를 음란한 죄로 정죄하며, 특히 동성간의 혹은 심지어 짐승과의 성행위를 가증한 죄악으로 정죄한다. 레위기 18:22, 23, "너는 여자와 교합함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너는 짐승과 교합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말며 여자가 된 자는 짐승 앞에 서서 그것과 교접하지 말라. 이는 문란한 일(perversion, 변태적 행위)이니라." 그 외에도 구약은 미동(美童)과 남색(男色)하는 자들을 정죄했다. 신명기 23:17, 18, "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미동이 있지 못할지니." 열왕기상 14:24; 15:12; 22:46; 열왕기하 23:7.

신약성경도 동성애를 중요한 죄로 간주하며 그 죄를 짓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였다. 로마서 1:26-27,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고린도전서 6:9, 10,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말라코스, 남창, 남자 동성애자)나 남색(아르세노코이테스, 동성애자)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디모데전서 1:10,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아르세노코이테스)며."

오늘날 교회들 안에는 동성애를 용납하려는 경향이 많이 있다. 그것은 현대교회들의 배교의 증거이다. 하나님께서는 동성애를 가증한 죄로 여기신다. 특히, 오늘날 동성애를 통하여 AIDS 전염병이 많이 퍼지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징벌로 받아들여야 한다. 한 보도에 의하면, 동성애 남자들이 AIDS로 죽는 평균연령은 39세요, 다른 원인으로 죽는 평균연령이 41세요, 오직 2% 미만이 늙도록 산다. 또한 동성애자들은 25배나 더 자살율이 높고 14배나 더 매독 감염 가능성이 높고, 수천배 더 AIDS 감염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다.


머리, 화장, 옷

성경은 머리와 옷 등의 외적 단장에 대해서도 교훈한다. 성경이 이 문제에 대해 특히 여자들을 두고 교훈하지만, 남자들에게도 비슷한 원리가 적용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대표적 두 구절은 다음과 같다:
디모데전서 2:9-10,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3:3, 4, "(아내들에게)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이 말씀들은 머리 단장이나 금은보석 치장, 그리고 값비싼 옷 착용을 성도답지 못한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베드로전서 3:3의 '머리를 꾸민다'는 말은 디모데전서 2:9의 '머리를 땋는다'는 말과 비슷한 뜻을 가진 단어이다. 화장문제도 같은 원리라고 본다.

물론 성도에게도 적절한 외적 단장은 필요하다고 본다. 성도는 밤새 잠자다 일어난 자처럼 산발된 머리로 생활해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적절히 머리 손질을 하는 것은 기본적이다. 적절한 화장도 그러하다고 본다. 여성들의 20세 안팎 때의 고운 피부가 30대, 40대에도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남자들이 매일 면도하고 애프터 쉐이브와 스킨 로숀을 바르는 것이 좋듯이, 여자들도 꺼치르하고 초췌해 보이는 피부를 위해 적절히 기초화장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나친 외모 단장은 하나님 없는 불경건한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악한 아합 왕의 아내이며 열렬한 바알 숭배자이었던 이세벨은 예후가 이스르엘로 진격했을 때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있다가 마침내 죽임을 당하였다(왕하 9:30). 에스겔 23:40에는 창녀들은 "눈썹을 그리며 스스로 단장한다"고 표현하였다. 세상 사람들에겐 외모 단장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이겠지만,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장차 올 영광스런 세상을 바라며 사는 성도는 달라야 한다.

그러므로 지나친 외모의 단장, 예를 들어 값비싼 파마와 고대를 위해 미장원에 자주 드나드는 것, 값비싼 화장품을 사용하여 얼굴을 화장하는 것, 금이나 다이아몬드나 값비싼 보석 등의 악세사리들로 치장하는 것, 그리고 값비싼 옷들을 입는 것 등은 성도다운 일이 아니라고 본다. 특히 얼굴에 파운데이션을 많이 쓰거나 눈썹이나 아이 쉐도우를 긋거나 손톱에 매니규어를 칠하는 것 등은 지나친 외모단장이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작품을 존중해야 한다.

옷에 대해서도, 처음에 인용한 대로 성경은 성도가 아담한 옷을 입을 것을 교훈한다. 디모데전서 2:9의 '아담한'이라는 헬라어 원어 코스미오스는 '품위 있는, 단정한, 수수한'이라는 뜻을 가진다. 옛날 영어성경은 "단정한 의복(modest apparel)으로 단장하라"고 번역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아담한 옷, 단정한 옷, 품위 있는 옷을 입기를 원하신다.

또한 성경은 여자는 여자다운 옷을, 남자는 남자다운 옷을 입으라고 가르친다. 신명기 22:5,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아직도 우리 모두들에게는 여자의 전형적인 복장은 치마라는 관념이 있다. 이것이 잘못된 고정관념만은 아닐 것이다. 여자는 바지보다는 치마를 입는 것이 여성답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여성도는 치마를 입는 것이 좋다고 본다.

성경은 또한 창녀의 복장에 대해 언급한다. 잠언 7:10, 11에 보면, 기생 즉 창녀는 그의 특유의 옷을 입고 있으며 떠들며 억세고 그 발이 집에 머물지 않는다고 묘사하였다. 창녀의 특유의 복장이란 한 마디로 음란한 복장이다. 남자들을 유혹하고 그들에게 자극을 주는 복장이다. 악하고 음란한 세상은 노출이 심하고 자극적인 복장을 항상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복장은 아니다.

그러므로 시대의 풍조인 어깨 파인 옷, 미니 스커트, 딱들어붙는 바지류 등은 성도다운 복장이 아니다. 이러한 시대적 풍조들이 우리 사회를 더욱 부패시키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나쁜 시대적 풍조를 대항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여성도들은 치마기장이 무릎 밑으로 내려가는 단정한 치마를 입어야 한다.

성도의 단장은 무엇보다 내면적이어야 한다. 여성들에게 염치와 정절, 온유와 안정된 심령, 그리고 선행은 아름다운 단장이다. '염치'라는 말은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고, '정절'이라는 말은 조심하는 마음이다. 여자의 여자다움은 단정함에 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언행이나 조심성 없는 언행은 여성답지 못하다.

'마음에 숨은 사람'이라는 말도 내면적 인격성을 가리킨다. 그것은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내면성이다. '안정한'이라는 말은 '고요한,' '조용한'이라는 뜻이다. 부드럽고 고요한 심령--이것이 그리스도인 여성도들이 갖추어야 할 덕이다. 이 단장은 썩지 아니할 단장이다.

세상은 이러한 단장을 이해하지 못한다. 세상의 표준은 외적인 것, 육체적인 것, 물질적인 것에 있다. 좋은 옷을 입고, 외모가 아름답고, 호화로운 악세사리를 걸치고, 좋은 차, 좋은 집에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부러워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적 표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표준은 다르다. 잠언 31:30,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우리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고 있다면, 우리가 이 세상이 어느날 불타 없어질 '장망성(將亡城)'임을 정말 믿고 있다면, 우리가 이 세상의 허무함을 참으로 알고 있다면, 우리는 외적 단장보다 내면적 단장에 힘쓰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예술적 아름다움

문화라는 개념 속에는 학문, 예술, 종교, 도덕 등이 포함된다. 이 중 예술은 상당히 종교적, 도덕적으로 중성적 요소들도 있으나, 또한 죄악된 요소들도 없지 않다. 특히 오늘날 영화와 연극, 음악 등은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움을 떠나 음란하고 죄악된 점들이 너무 많다. 그리스도인은 음란성을 배제하지 않는 예술 작품들을 배격해야 한다.


인터넷 음란 싸이트와 인터넷 음란 채팅

오늘날 컴퓨터와 인터넷이 급속히 보급됨으로써 인터넷 음란 싸이트(성인 방송, 성인 영화 싸이트들)의 악영향과 인터넷 음란 채팅(일대일 대화)의 유혹이 세계적으로 심각해지고 있고 많은 성도들에게도 큰 시험이 되고 있다. 인터넷 음란 싸이트들은 음란물들을 개인의 방과 책상에 가져다 준다. 또 인터넷 채팅은 남녀 교제를 문란케 하고 음란한 대화의 장이 되게 하고 심지어 원조 교제의 유혹들을 일으키고 있다. 이런 일들에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청년들, 청소년들, 심지어 기혼자들)도 관계되어 있다고 한다.

비록 컴퓨터와 인터넷이 유용한 도구이지만, 성도들은 오늘날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한 음란한 풍조를 극히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 상당한 필요성이 없는 경우, 성도들은 오히려 컴퓨터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나 상당한 필요성이 있는 경우, 성도들은 인터넷을 사용하되 가능하면 공개적인 공간에서 사용함으로써 음란의 유혹을 피해야 할 것이다. 특히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컴퓨터 사용에 있어서 주의할 점들을 바르게 교훈해 주어야 하고 또 그들의 행위를 항상 점검하고 확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자녀들을 사탄이 주관하는 세상의 음란 풍조에 넘어지게 하고 말 것이다.


인공 수정

인공 수정은 부부의 관계가 아닌 다른 인위적 방법으로 임신케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인공 수정에는 체내 수정과 체외 수정이 있다. 체내 수정은 남편의 정자를 채취하여 의료기구를 사용하여 아내의 자궁에 집어 넣는 것이며, 체외 수정은 남편의 정자와 아내의 난자를 채취하여 시험관에서 결합시켜 수정란을 만든 후 아내의 자궁에 넣어 착상토록 하는 것이다. 후자를 시험관 수정이라고도 말한다. 비록 인공 수정이 하나님이 주신 정상적 방법은 아니지만, 남편과 아내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허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편 이외의 기증자의 정자를 사용하는 것은 일종의 간음에 해당하는 잘못이다. 또한 오늘날 흔히 행해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듯이, 여러 개의 수정란을 만들고 그 중에 몇 개를 사용하고 나머지는 폐기하거나 다른 용도로 쓰는 것은 일종의 살인에 해당하는 큰 죄악이다.


대리모(代理母)

대리모(代理母) 출산이란 여성의 자궁이 임신이 불가능한 경우 타인의 자궁을 빌려 아이를 갖는 것을 말한다. 대체로 체외 수정을 통해 남편과 아내의 유전자가 다 있는 수정란을 대리모의 자궁에 이식해 출산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대리모를 허용하는 국가는 이스라엘, 영국, 미국의 일부 주 등 10여개국이며 모권(母權)에 대한 개념에 있어서는 나라마다 판결이 다르다고 한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1993년 캘리포니아 주 대법원이 난자제공자의 모권을 인정하였으나, 프랑스에서는 대리모의 모권을 인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대리모 개념은 지극히 부자연스럽고 성경적으로 용납되기 어려워 보인다.


인간 복제(human cloning)

인간 복제란 체세포 핵이식 기술을 이용한 생명 복제 기술을 인간에게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학자들은 인간 복제를 배아 복제와 개체 복제로 구분하며, 전자는 수정란의 자궁 착상 전까지의 전배아의 복제이며 후자는 배아를 자궁에 착상시켜 하나의 완전한 개체가 출생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학자들은 유전자 복제와 개체성 복제를 구분하며, 인간 복제라는 것이 복제된 인간의 유전자가 핵 제공자의 유전자와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지 핵 제공자 개체의 복제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 학자들은 치료용 인간 복제와 생식용 인간 복제를 구분하는데, 전자는 단순히 질병 치료를 위해 하는 복제이며 후자는 출산을 목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라고 한다.

1998년 미국의 감리교인이며 물리학자이고 불임치료 연구가인 리차드 시드는 인간 복제를 실현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인간 복제술은 과연 윤리적으로 중립적인 것인가? 또는 그것이 인간의 자유 선택에 맡겨질 수 있는 보조 생식술인가? 또 그것은 심지어 유전적 질병의 예방, 최적의 아기 출산, 선천적 능력의 향상 등을 가져오는 사회 개선을 위해 필수적으로 선한 방법인가? 이러한 윤리적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전적으로 인간의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되기 전 배아이든지 착상된 후 배아이든지 간에, 인간 존재로 간주될 것인가라는 문제에 달려 있다.

성경은 어머니의 배 속에 잉태된 태아를 인간 존재로 간주한다. 창세기 25:22, "[이삭의] 아이들이 그의[리브가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예레미야 1:4, 5,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갈라디아서 1:15,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 또한 인간 수정란의 전배아나 착상된 배아의 본질적 구분은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며 단지 점진적인 성장이 있을 뿐이며 어떤 명확한 구분선이 없다. 성경에는 출산 전의 태아와 출산 후의 아기에 대한 본질적 차이가 없으며, 또 착상 전의 태아와 착상 후의 태아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인간 복제란 단순히 비인간적인 태아 혹은 전태아의 복제가 아니고 인간의 복제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크게 위배된다. 복제된 인간은 부모도 없을 것이며, 원본 인간과의 구별의 어려움으로 그 개체성 혹은 정체성의 혼란이 일어날 것이며, 복제라는 개념이 출산보다 제조의 개념에 가깝기 때문에 비인간화의 문제를 낳게 될 것이다.



8계명

8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과 금지된 죄들

[140문] 제팔계명은 무엇인가?

[답] 제팔계명은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함이다.

[141문] 제팔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는 무엇인가?

[답] 제팔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계약들과 거래에 진실, 신실, 공의로움이니 매 사람에게 당연히 줄 것을 주는 것이며, 바른 소유주에게서 불법 점유된 물건을 배상함이며, 우리들의 능력과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아낌없이 주며 빌리는 것이며 이 세상 물건에 대한 우리의 판단, 의지, 애정의 절제이며, 우리의 성질의 유지에 필요하고 편리하며 우리의 상태에 맞는 것들을 획득하여 보존하며 사용하고 치리 하려는 주의 깊은 용심과 연구이며, 합법한 천직과 그것에 근면함이며, 검약함이며, 불필요한 소송과 보증서는 일이나 기라 그와 같은 용무들을 피함이며, 우리들 자신의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의 부와 외형적 재산을 구하여 보존하고 증진하기 위해 모든 공정하고 합법한 수단 방법으로 노력함이다.

[142문] 제팔계명에 금지된 죄들은 무엇인가?

[답] 제팔계명에 금지된 죄들은 요구된 의무들을 소흘히 하는 일 외에 절도, 강도 행위, 사람 납치, 장물 취득, 물건을 받음과 사기 거래, 속이는 저울질과 치수재기, 땅 경계표를 마음대로 옮기는 것, 사람들 사이에 맺어진 계약이나 신탁의 사건들에 있어서 불공정하고, 불성실함이며, 억압, 착취, 고리대금, 뇌물징수, 성가신 소송, 불법적으로 담을 두르는 것과 주민을 절멸하는 일들이며, 물건값을 올리기 위해서 사람의 마음을 쏠리게 하는 상품, 부당한 값을 부르는 일과 우리의 이웃에게 속하는 것을 그에게서 취하거나 억류해 두거나 우리들 자신을 부유하게 하기 위한 다른 모든 불공평하거나 죄악한 방법들이며, 탐욕과 세상 대물을 과도하게 소중히 여기고 좋아함이며, 세상 재물을 얻어 보존하고 사용하는 일에 의심 많고 마음을 산란케 하는 염려와 노력이며, 다른 사람들이 잘되는 것에 대한 질투이며, 그와 마찬가지로 게으름, 방탕, 낭비하는 노름과 우리들의 외형적 재산에 대하여 부당한 편견을 가짐이며, 우리 자신을 속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물을 바로 사용하고 안락하게 즐기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직업, 노동, 근면

"도적질하지 말지니라"는 십계명의 제8계명은 절도, 강도 뿐만 아니라, 사기, 횡령, 과분한 빚, 계약 위반, 거짓된 도량형, 투기, 고리대금 등의 부정당한 경제활동을 금한다.

노동은 천하지 않다. 아담은 범죄한 이후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을 받았다(창 3:19).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셨다"(창 3:23). 노동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게으름이 악이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타고난 재능을 주셔서 그것에 맞는 직업을 가지도록 섭리하신다. 그래서 직업을 흔히 천직(天職, vocation)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직업이든지,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재능과 적성에 맞는 직업을 '천직'으로 알고 그 일에 충실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도가 직업 선택에서 고려할 점은 무엇보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에 위반하는 죄악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죄악된 직업은 비록 아무리 물질적 소득이 좋을지라도 성도에게 합당치 않다. 또한, 성도는 그 직업이 자신의 신앙 생활을 위해서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 운동을 위해서 유익한가를 생각해야 한다. 물론, 그의 직업이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적성에도 맞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정당한 직업 생활을 위한 한 기본적 원리는 근면이다. 잠언은 근면에 대해 많이 교훈하였다. 잠언 6:6-11,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잠언 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잠언 10:26,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 잠언 11:16,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느니라." 잠언 12:24,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 잠언 18:9, "자기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패가(敗家)하는 자의 형제니라." 잠언 22:29,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구제

성경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에 대하여 강조하여 가르친다. 모세의 율법은 구제를 가르쳤다. 신명기 15:10, 11, "너는 반드시 그 [가난한 형제]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는 고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난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잠언은 구제를 강조했다. 잠언 11:24, 25,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 . .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잠언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잠언 21:26, "어떤 자는 종일토록 탐하기만 하나 의인은 아끼지 아니하고 시제하느니라." 잠언 28:27,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본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

예수님과 사도들도 구제를 강조하였고, 초대교회는 구제를 실천하였다. 신약성경이 강조하고 실천한 구제는 교회 내의 가난한 형제들에 대한 것이었다. 누가복음 12: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사도행전 2:44, 45,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로마서 12:13, "성도들의 쓸 것[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며[함께 나누며]." 고린도후서 8: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성도 섬김]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교회 헌금의 주 용도는 구제이었다. 고린도후서 9:1,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갈라디아서 2: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히브리서 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구제는 형제사랑의 표현이다. 요한일서 3:17, 18,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경제 제도/ 사유재산 문제

우리가 아는 대로 사회의 경제 제도에 대하여 두어 가지 주요한 이론이 있다. 국어 사전에 보면, 자본주의(capitalism)란 자본가가 자유경쟁 속에서 노동자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순수한 이익을 추구하는 경제 이론이며, 사회주의(socialism)란 생산 수단(노동 수단 혹은 노동력)의 공유(共有)에 근거한 계획 경제를 추구하는 경제 이론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한편, 공산주의(communism)란 재산과 생산 수단의 사유(私有)를 부정하고 자본주의의 붕괴, 계급 투쟁, 사회 혁명을 주장하는 사회이론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면 성경적 경제제도는 무엇인가? 자본주의인가 아니면 사회주의인가?

이 문제를 위하여, 우선 생각해야 할 몇 가지 점들이 있다. 우선, 성경은 절대적 혹은 궁극적 의미에서 만물의 소유권을 하나님께 돌린다. 레위기 25:23, "토지는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시편 24:1,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그러므로 실상 '나의 것'이나 '우리의 것'이란 하나도 없다. 개인이나 공동체의 모든 소유는 궁극적으로 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나 또한 성경은 상대적 혹은 위탁적 의미에서 개인 혹은 공동체의 재산권을 인정한다. 출애굽기 20:15,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출애굽기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신명기 19:14, "선인이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이동하지 말지니라." 잠언 22:28, "네 선조의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이런 사실에서 볼 때, 성경은 현 세상에서 사회주의 대신 자본주의 경제제도를 인정한다고 할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 체제에서 지나치게 부를 축적한 자본가들의 이기주의적 혹은 불법적 행위를 성경이 승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생산수단의 공유를 주장하는 사회주의는 분명히 성경적이지 않다. 자본주의가 현실적 결함들을 가질지라도 그것은 원리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인간의 이기주의적이고 부정한 심성의 문제이다. 자유경쟁에 의한 부의 추구는 기본적으로 정당한 것이다. 단지, 얻어진 부를 이웃 사랑의 원리에 따라 사용하는 선한 마음가짐이 모든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뿐이다.


빚 보증

성경은 우리가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고 가르친다. 잠언 22:26, "너는 사람으로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 남의 빚의 보증이 되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어리석음이 된다.


도박, 투기, 증권

성경은 우리가 손으로 일하여 돈을 벌어 사는 성실한 삶을 가르치기 때문에 도박이나 투기성 사업은 성도에게 합당치 않다. 그러므로 정당한 주식 투자가 아닌 투기성 증권 투자 활동도 성도에게 합당치 않다.



9계명

9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과 금지된 죄들

[143문] 제구계명은 무엇인가?

[답] 제구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함이다.

[144문] 제구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는 무엇인가?

[답] 제구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실과 우리 이웃의 좋은 평판을 우리 자신의 것과 같이 보존하고 조장함이며 진실을 위하여 출두하며 이를 옹호함이며, 재판과 처벌의 사정들에 있어서, 무슨 일에 있어서든지 마음속에서부터 성실히, 자유로이 명백히, 충분히 진실만을 말함이며, 우리의 이웃을 관대히 평가함이며, 이웃의 좋은 평판을 사랑하며, 소원하며, 기뻐함이며, 그들의 연약을 슬퍼하며, 덮어줌이며, 그들의 재능과 미덕을 너그럽게 승인하고, 그들의 결백을 변호함이며, 그들에 관한 좋은 소문을 쾌히 받아들이고 나쁜 소문을 시인하기를 즐겨하지 않음이며, 고자질하는 자, 아첨하는 자, 중상하는 자들을 낙망시킴이며, 우리들 자신의 좋은 평판을 사랑하고 보호하여 필요시에는 이를 옹호함이며, 합법한 약속을 지킴이며, 무엇이든지 참되고 정직하고 사랑스럽고 좋은 평판 있는 것을 연구하여 실천함이다.

[145문] 제구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무엇인가?

[답] 제구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우리 자신의 것과 마찬가지로 이웃이 지니고 있는 진실과 좋은 평판을 특히 공적 재판 사건에서 해치는 모든 일들이니, 거짓 증거를 제공하고, 위증을 시키고, 고의적으로 나와서 악한 소송을 변호하고, 진실을 외면하고, 억압함이며 불의한 판결을 하고, 악을 선하다 선을 악하다 함이며, 악인을 의인의 행사에 따라 보상하고, 의인을 악인의 행사에 따라 보상하는 것이며, 문서 위조, 진실을 은폐, 공의의 소송에도 불구하고 부당한 침묵, 불법 행위가 우리 자신들로부터 책망을, 다른 사람들에게 항고를 요구할 때에 잠잠함이며, 진리를 불합리하게 탈하거나 그릇된 목적을 위해 악의로 말하고, 혹은 그릇된 의미로 혹은 의심스럽고 애매한 표현으로 진리 혹은 공의에 불리하도록 진리를 곡해함이며, 비진리를 말하고, 거짓말하고, 중상하고, 험담하고, 훼방하고, 고자질하고, 수근수근하고, 냉소하고, 욕설함이며, 조급하고, 가혹하고, 편파적으로 비난하는 것이며, 또한 오해하는 의도, 언어와 행동이며, 아첨, 허영심에 가득 찬 자만, 우리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과대 평가 혹은 과소 평가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사와 은혜를 부인함이며, 적은 과실들을 더욱 악화시킴이며, 자유로이 죄를 자백하라고 호출된 때에 죄를 숨기거나 변명하거나 경감함이며, 연약한 점을 쓸데없이 찾아내는 것이며, 거짓 소문을 내는 것이며, 나쁜 보도들을 받아들이고, 찬성하고, 공정한 변호에 대하여 귀를 막는 것이며, 악한 의심을 품는 것이며, 누구의 것이든 받을 만해서 받는 신앙에 대해 시기하거나 마음 아파하는 것이며, 그것을 손상시키려 노력하거나 욕망함과 그들의 불명예와 추문을 기뻐하는 것이며, 조소하는 멸시, 어리석은 칭찬이며, 정당한 약속을 위반함이며, 좋은 소문이 있는 일들을 소홀히 함이며, 누명을 초래할 일들을 우리들 자신이 실행하고 피하지 아니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못하도록 능히 할 수 있는데도 막지 아니하는 것이다.


거짓말

성경은 특히 거짓말에 대하여 그것은 마귀에게 속한 죄요 지옥의 형벌을 받을 죄라고 매우 명확하게 그리고 강하게 정죄한다. 요한복음 8:44, "(마귀는)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요한일서 2:21,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요한계시록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계시록 22: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

이와 같이 성경이 거짓말을 철저하게 정죄하는 것을 볼 때, 소위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도 허용될 수 없다고 본다. 만일 그런 류의 거짓말을 허용한다면, 위의 진리들이 부정되거나 매우 혼란해지고 말 것이다.

선의의 거짓말을 위해 인용된 다음의 몇 가지 대표적 성경 구절들은 그러한 거짓말을 정당화 한다고 볼 수 없다.

출애굽기 1:19,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이 구절에 대하여, 매튜 풀은 적절히 주석하기를,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추상하듯이 거짓말이 아니고 그들 중의 많은 이들에 대한 진실(사실)일 것이며, 또 그들[그 산파들]은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그렇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 . . 그러므로 여기에는 단지 진실 외에 아무 것도 없다. 비록 그들이 전체의 진실을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할 의무는 없었다"고 하였다. 이 주석적 관찰은 이 문제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 된다고 본다.

여호수아 2:4-6,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가로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로서인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에게 미치리라 하였으나 실상은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이 구절에 대하여 매튜 풀은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그의 대답은 . . . 명백히 거짓되었고 그러므로 의심할 수 없이 죄악되었으나, 그의 의도는 선하였다. 그러나 매우 가능한 사실은, 그가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고 말한 바와 같이 선의의 거짓말은 불법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나, 혹은 최악의 경우 이것이 그의 연약함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것을 용서하시고 그의 믿음은 크게 보상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여하튼, 라합의 거짓말이 선의의 거짓말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될 수 없다.

그 외에, 엘리사가 자기를 잡기 위해 도단을 포위한 아람 군대에게 "이는 그 길이 아니요 이는 그 성도 아니니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의 찾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리라"(왕하 6:19)고 한 말은 감추인 의미에서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셨으므로 그것을 그들에게 알려줄 의무는 없었다.

또 여호수아가 아이성을 정복할 때 쓴 것과 같은 복병전술도 은폐의 행위이지 거짓의 행위는 아니다. 상대방에게 자신들의 퇴각 행위의 참 목적을 알려줄 의무가 그들에게 있지 않다. 아이성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퇴각의 목적을 몰랐기 때문에 속은 것뿐이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느 경우든지 진실해야 하고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성도는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예를 들어 자기나 자기 가족의 목숨을 찾는 악한 무리 앞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진실을 말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인 의사는 어떤 경우에도 치료를 위하여 환자에게 거짓말을 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10계명

10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과 금지된 죄들

[146문] 제십계명은 무엇인가?

[답] 제십계명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제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함이다.

[147문] 제십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는 무엇인가?

[답] 제십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은 우리들 자신이 가진 그대로 온전히 만족하고 우 리의 모든 내부적 동기와 애정이 그의 소유 전체에 주의하고 조장함이다.

[148문] 제십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무엇인가?

[답] 제십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우리들 자신이 소유한 재산으로만은 불만하여, 이웃의 소유에 대한 난폭한 동향과 애착심을 가짐이다.


자족하는 삶

탐심은 우상숭배와 같은 죄악이다. 그것은 돈을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죄악인 것이다. 우리는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천국에 소망을 두어야 하고 이 세상에서는 자족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디모데전서 6:6-10,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빌립보서 4:11-13,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절제

절제는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9가지 열매들 중 맨 마지막으로 언급된 덕이다. 절제는 술에 있어서는 물론이거니와 또한 지식과 말과 감정 등에 있어서도 필요하다. 베드로후서 1:6, "지식에 절제를." 야고보서 1:19, "말하기는 더디 하며." 잠언 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바울 사도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가르쳤다(고전 6:12). 또 그는 다른 곳에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라고 말하였다(고전 10:23). 또 그는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말한 후 자기도 자기 몸을 쳐 복종시킨다고 간증하였다(고전 9:25, 27). 자기가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성숙한 인격의 모습이다.


자기 부정

자기 부정은 성도의 삶의 한 기본적 원리이다. 이것은 주께서 제자들에게 친히 명령하신 삶이다. 마태복음 16:2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자기 부정은 자기의 생각과 견해, 고집, 교만, 자랑, 명예심, 감정, 욕망, 생에 대한 애착 등을 부정하는 태도이다. 그것은 곧 절제와 자족하는 삶으로 이어진다.

자기 부정은 십자가의 속죄의 복음을 깨닫고 자신을 주님께 헌신할 때 가능하다.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고린도전서 6:19, 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찬송가 147장,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죽으신 구주 밖에는 자랑을 말게 하소서. 보혈의 공로 입어서 교만한 맘을 버리네. . . .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감사

성도의 삶은 또한 감사의 삶이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무엇보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감사하다'는 히브리어(야다)는 찬송하다는 말로 번역되기도 하는 말이다. 또 이 말은 '찬송하다'는 다른 말(할랄)과 매우 빈번히 함께 사용되고 있다. 역대상 16:4, "(다윗은) 또 레위 사람을 세워 . . . 여호와를 칭송하며 감사하며 찬송하게 하였으니."

감사는 하나님의 하신 일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행위이다. 앞에서 말한 히브리어 동사(야다)는 구약 헬라어 번역 성경에서 대부분 '고백하다'(엑소몰로게오)는 말로 번역되었다.

그리스도인의 감사의 이유는 우리의 영육의 삶을 위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다. 성도들이 음식을 먹을 때 감사하는 것뿐만 아니라(마 15:36; 26:27; 행 27:35), 무엇보다 그들의 구원과 주의 백성된 삶을 인하여 감사한다. 로마서 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성경은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교훈한다. 에베소서 5:20,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라." 골로새서 3:17, "무엇을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께 감사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8, "범사에 감사하라."


기쁨

성경은 또한 성도에게 기쁨의 생활을 가르친다.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갈라디아서 5:22,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 . . ." 빌립보서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과연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기쁨의 생활을 경험하였다. 사도행전 13: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고린도후서 8:2, "(마게도냐인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베드로전서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이유는 특히 구원의 사실에 있다. 누가복음 10: 20,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사도행전 16:34, ". . .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이 구원은 하늘의 소망에 이어진다. 성도의 구원의 기쁨은 곧 천국을 소망하는 기쁨인 것이다. 로마서 5:2,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로마서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마태복음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하나님께서는 죄인 한 명이 회개하는 것을 의인 99명을 기뻐하심보다 더 기뻐하신다(눅 15:7). 그러므로 사도들의 기쁨은 복음이 전파되고 성도들이 예수 잘 믿는 것이었다. 빌립보서 1:18,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요한이서 4,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성도의 기쁨은 심지어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는 기쁨이다. 사도행전 5: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빌립보서 2: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베드로전서 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고난과 인내

성도의 귀한 한 덕은 고난 중에 인내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라고 말씀하셨다(눅 8:15). 또 그는 재림 직전의 환난의 징조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다(마 24:12, 13).

사도 바울도 인내에 대해 많이 말씀했다. 로마서 5:3, 4,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고린도전서 13:4, "사랑은 오래 참고." 갈라디아서 5:22,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디모데후서 2:11, 12,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욥기는 고난 중의 인내에 대해 가장 잘 증거한다. 욥기의 중요한 요절은 욥기 23:10일 것이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야고보는 욥의 인내에 대해 증거하였다. 야고보서 5:7-11,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 . .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요한계시록은 주의 재림 직전의 대환난 시대에 성도에게 인내가 필요할 것을 증거하였다: 13:10,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우리가 진리를 바로 깨닫고 믿었다면 고난 가운데서도 그 믿음을 간직하고 오래 참는 자가 되어야 한다.


질병

질병은 성도가 빈번히 당하는 고난들 중의 하나이다. 질병의 원인은 무엇이며, 질병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바른 태도는 무엇인가? 세상에서 모든 불행한 일들은 근본적으로는 인생의 타락과 세상의 저주받음에서 비롯되었다. 그것들은 본래의 창조세계에 속하기보다 죄로 인해 저주 받은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래의 창조세계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심히 좋았으며 거기에 어떤 악한 요소들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은혜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리고 그것을 믿음으로 죄사함 받았는데, 왜 그의 삶에 흔히 질병이 찾아오는가? 그리스도인의 질병의 원인 혹은 이유는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로, 그리스도인의 질병은 그의 특정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징벌로 온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불순종에 대해 질병으로 징벌하실 것을 경고하셨다. 거기에 언급된 질병들은 염병, 폐병, 열병, 상한(傷寒, 염증), 학질, 종기, 치질, 괴혈병, 개창(疥瘡, 옴), 미침, 눈멂, 경심증(驚心症) 등이다(21, 22, 27, 28, 35절). 그러므로 성경에 명확히 계시된 진리에 의하면, 사람의 질병은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다.

구약의 역사에서, 예를 들어,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나, 엘리사의 시종 게하시나, 유다왕 웃시야 등은 범죄함으로 문둥병이 들렸다(민 12:9, 10; 왕하 5:27; 15:5). 그것은 다 하나님의 징벌이었다. 또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후 광야에서 범죄함으로 염병[전염병]으로 고생한 적이 있었다(민 16:46). 또 유다의 악한 왕 여호람은 그의 말년에 창자에 고치지 못할 병이 들었다(대하 21:18).

신약에서도, 마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네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고(막 2:5), 또 요한복음 5장에 보면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후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5:14)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들은 병과 죄가 직접 관련이 있음을 보인다.

시편 119:67에는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고 고백했고, 히브리서 12장에는 우리가 사생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참 아들일진대 징계가 있다고 했는데, 이 고난과 징계는 때때로 육신의 질병으로 오는 것이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의 질병은 직접적인 죄와 상관 없이 단순히 그의 신앙 인격을 훈련시키는 과정으로 오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당하는 모든 불행의 요소들은, 그것들이 특정한 죄로 인하여 직접적으로 왔든지 안왔든지 간에, 하나의 훈련의 과정이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의 훈련 과정을 통하여 점점 더 거룩한 인격이 된다.

앞에서 인용한 대로, 시편 저자는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고 고백하였다(시 119:67). 또 시편 39편에 보면, 시편 저자는 병 중에서 인생의 헛됨을 깨닫고 그의 소망을 하나님께만 두게 되었음을 고백하였다(4-7절). 히브리서 12장에서도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은 우리의 거룩과 의를 위함임을 말씀하셨다.

위의 경우들은 고난이 죄의 징벌로 온 경우이지만, 그렇지 않고 단순히 성도의 훈련을 위한 고난도 있음을 성경은 보인다. 그리스도인이 늙어서 당하는 노환(老患)은 이러한 종류의 훈련이다. 노환은 인간에게 마지막 훈련과정이다.

특히, 구약 욥기는 고난이라는 주제를 다룬 성경이다. 욥은 재산과 자녀들을 잃는 고난에 더하여 온 몸에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악창이 생겨서 고통을 당하였다(욥 2:7). 그러나 그의 고난과 질병은 죄에 대한 징벌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를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라고 인정하고 칭찬하였었다(1:8; 2:3). 그의 고난의 이유는 단순히 그의 인격 성숙을 위한 훈련이었다.

신약에서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바울 사도의 연약의 경우도 그러하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아마도 어떤 질병)를 주신 까닭은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한 징벌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그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는 예방적 이유이었다(고후 12:7). 여기서도 고난이 인격 훈련의 한 방법임이 증거된다.

충성된 일군인 에바브로디도의 병(빌 2:26, 27)이나 디모데의 위(胃)병(딤전 5:23), 그리고 드로비모의 병(딤후 4:20) 등도 아마 그런 류의 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성경은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건강한 삶을 누릴 것도 약속한다. 출애굽기 15: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또 잠언 3:7, 8,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良藥)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우리 말에 '양약'이라고 번역한 이 말은 영어성경에는 '건강,' '치료'라는 말로 번역되었다.

그러면, 질병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의술과 약도 하나님의 일반적 은혜의 산물이므로, 그리스도인은 그것들을 감사히 사용할 수 있다. 야고보서 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먼저 병을 주신 자도, 치료하실 자도 하나님이심을 인정해야 한다. 출애굽기 15:26,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시편 103:3,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모든 질병은 하나님의 허락 속에 오며 하나님은 인간의 질병의 원인을 아시고 능히 치료하실 수 있다.

경건한 왕 아사는 말년에 그 발에 심히 중한 병에 걸렸을 때에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다(대하 16:12). 이것은 그의 행위가 의롭고 선하지 않았음을 보인다.

그리스도인은 또한 회개치 않은 죄를 생각나는 대로 회개하며 병낫기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야고보서 5:14-16,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비상한 경우에, 성도는 금식하며 기도할 수 있다. 마가복음 9:29, "이르시되 기도[와 금식] 외에 다른 것으로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전통적 사본에는 '금식'이라는 말이 들어 있다. 금식은 육신의 쾌락을 폐지하고 결사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며 기도의 최후적 방법이다.


아디아포라(adiaphora)

'아디아포라'는 도덕적으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중립적인 행위들 혹은 의식들을 가리킨다. 교회 역사상, 성경에 명확히 명령되었거나 금지되지 않았던 어떤 것들에 대해 그것들이 아디아포라인가 어떤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종교개혁 시대에, 루터는 로마 천주교회의 전통적 예배 형식들 가운데서 성경에 금지되지 않았고 또 복음을 부정하지 않는 것들은 유지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후에 루터교회에서 어떤 이들은 미사, 고해 성사, 종유 성사, 성직자의 복장 등을 선한 양심으로 따를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다른 이들은 그것을 타협으로 간주하였다. 또 17세기에 오락의 문제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오락이 그 자체로는 선이나 악이 아니고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그것을 선이나 악이 되게 한다고 가르쳤고, 다른 이들(루터파 경건주의자들)은 어떤 행위도 그 자체적으로 아디아포라인 것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아디아포라를 인정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포도주를 마시는 문제. 디모데전서 4:3-5,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할례에 대하여. 사도행전 16: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쌔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줄 다 앎이러라." 갈라디아서 2:3; 5:6,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 고린도전서 8:12, 13,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고기를 먹는 것. 로마서 14:15,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계명과 복음의 관계

[149문]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가?

[답] 아무도 자기 스스로가 현세에서 받는 어떠한 은혜로나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없고, 언행 심사간에 매일 계명을 범할 뿐이다.

[150문] 하나님의 율법의 위범은 그 자체들에서와 하나님 보시기에 동등하게 흉악한가 ?

[답] 하나님의 율법의 위범은 동등하게 흉악한 것이 아니지만 어떤 죄만은 더욱 악화되는 까닭에 하나님 보시기에 다른 죄보다 더 흉악하다.

[151문] 어떤 죄들을 다른 죄들보다 더 흉악하게 악화시키는 것들은 무엇인가 ?

[답] 죄는 다음과 같은 데서 더 악화하게 되는 것이다.

1. 범죄하는 사람들 때문에

범죄자의 연령이 높거나 더욱더 많은 경험이나 은혜를 가졌거나, 직업, 재능, 지위, 직임에서 탁월하고 다른 사람들의 지도자, 다른 사람들이 따를 만한 모범이 될 수 있는 경우에 그렇다.

2. 피해 입은 당사자들 때문에

하나님과 그의 속성들, 그의 예배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에 대항하여, 성령과 그의 증거 및 역사에 대항하여, 윗사람들, 탁월한 사람들, 우리가 특별히 관계되고 약속된 사람들에 대항하여, 어떤 성도들 특별히 연약한 성도들과 그들 혹은 다른 사람의 영혼들, 모든 사람들 혹은 많은 사람들의 공통적 복리에 대항하여 범죄한 때에 그렇다.

3. 범죄의 성격과 특질 때문에

율법의 명시된 문자를 그대로 범했거나, 많은 계명을 범했으므로 거기에 많은 죄가 포함되어 있든가, 마음에 품었을 뿐 아니라 말과 행동으로 쏟아져 나오고, 다른 사람들을 중상하고 배상할 의지가 없다든가, 수단 방법, 긍휼을 베푸는 일, 심판들, 본성의 빛, 양심, 판결, 공적 혹은 사직 훈계, 교회의 권징, 세속적 징벌이나, 하나님 혹 사람들에 향한 우리들의 기도, 목적, 약속, 서약, 언약, 용무에 대항하여, 고의로, 일부러, 뻔뻔스럽게, 으스대면서, 악의로, 자주, 완강히, 기쁨으로, 계속적으로, 혹은 회개한 후에 다시 타락함으로 범죄하는 경우에 그렇다.

4. 때와 장소의 상황 때문에

주일이나 다른 예배시 또는 예배 직전이나 직후에 실수를 미리 막거나, 고치는데 도움이 있거나, 공석이나, 또는 다른 사람들이 있어서 이로써 그들이 선동되거나 불결해지기 쉬운 경우에 범죄하면 그렇다.

[152문] 모든 죄는 하나님의 손에 무엇을 받아야 합당한가?

[답] 모든 죄는 심지어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의 주권과 선과 거룩에 또는 그의 의로운 율법에 대항하는 것이므로 현세와 내세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아 마땅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고서는 속죄될 수 없다.

[153문] 범법으로 인하여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피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답] 범법으로 인하여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피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중보의 혜택을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외적 방편을 부지런히 사용하는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결론

성화의 점진성과 불완전성

그리스도인의 선한 인격과 삶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화는 점진적이다. 또한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불완전하다. 성경은 중생한 그리스도인에게도 끊임 없는 내적 싸움이 있음을 증거한다. 로마서 7:7-26,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 . .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 . .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 . .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성도가 혹 의식적 죄들로부터 떠나는 성숙함을 가졌다 할지라도 탐심과 마음의 음욕과 미움 등의 내면적 죄를 떠나기는 어렵다고 보며, 더욱이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제일 큰 계명을 지키기에는 매우 미달된다. 적극적인 범죄의 죄도 문제이지만, 그보다 못지 않게 소극적인 태만의 죄, 불이행의 죄가 늘 존재하는 것이다. 완전은 성도의 목표이기는 하지만 현실에서 도달할 수 있는 목표는 아니다.


선행에 대한 상급

인간의 선행은 하나님께 상급받을 자격을 갖기에나 공로가 되기에 부적합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미래의 차등한 상급을 약속하신 것도 사실이다. 마태복음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네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상급에 대한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히브리서 11:6,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 마태복음 6: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드러나게(전통본문) 갚으시리라." 누가복음 6: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누가복음 14:13, 14, "잔치를 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불구자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히브리서 10: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히브리서 11:26,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특히 복음 사역자들에게 보상이 약속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3:8, 14,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 . .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일]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요한이서 8,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않고 온전한 상을 얻게 하라"(전통본문). 마태복음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누가복음 19:17,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마태복음 5:11, 12,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누가복음 6: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복습 문제들
1. 기독교 윤리를 정의하라.
2. 기독교 윤리의 기준은 무엇인가?
3.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4. 말에 대한 성경의 교훈들을 요약해보라.
5. 경건의 필수적 요소 두 가지는 무엇인가?
6. 헌신의 의미, 이유, 방법을 요약하라.
7. 신약의 예배와 구약의 제사의 연관성과 차이성에 대해 말하라.
8. 찬송의 의미, 이유들, 바른 방법은 무엇인가?
9. 현대 기독교 음악(CCM)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10. 제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바른 태도는 무엇인가?
11. 신약 아래서 그리스도인의 맹세에 대해 간략히 논하라.
12. 안식일을 주신 목적 혹은 이유들을 열거하라.
13. 주일을 거룩히 지켜야 할 이유들은 무엇인가?
14. 의식법들의 폐지에 대해 논하라.
15. 신약 아래서의 십일조 생활에 대해 간단히 논하라.
16. 부모에 대한 효도에 대해 간단히 말하라.
17. 자녀교육의 내용과 방법을 요약해보라.
18. 직장에서의 상하관계에 대한 성경의 교훈은 무엇인가?
19. 그리스도인이 국가위정자들에 대해 가지는 의무는 무엇인가?
20. 교회의 정치참여에 대해 논평하라.
21. 자살에 대해 간단히 논하라.
22. 금주(禁酒)하고 금연(禁煙)해야 할 이유들을 요약하라.
23. 낙태가 살인죄라는 것을 성경적으로 간단히 논하라.
24. 산아제한에 반대되는 성경의 교훈들은 무엇인가?
25. 사형제도에 대한 정당성은 무엇인가?
26. 전쟁에 대한 성경의 원리는 무엇인가?
27. 결혼의 의미와 일부일처 제도에 대해 간단히 논하라.
28. 결혼의 필요성 혹은 이유들과 부부의 의무에 대해 말하라.
29. 부부의 성관계에 대한 성경의 교훈은 무엇인가?
30. 이혼과 재혼에 대한 성경적 원리들은 무엇인가?
31. 동성애를 정죄하는 성경 교훈을 요약하라.
32. 옷, 머리, 화장에 대한 성경 교훈을 요약하라.
33. 영화, 연극, T.V.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건전한 태도는 무엇인가?
34. 인공 수정, 대리모, 인간 복제에 대해 간단히 논하라.
35. 개인이나 공동체의 재산권에 대한 성경의 원리들은 무엇인가?
36. 소위 '선의의 거짓말'에 대해 간단히 논하라.
37. 자족하는 삶, 절제, 자기 부정에 대해 간단히 논하라.
38. 질병에 대한 성도의 바른 태도에 대해 말하라.
39. '아디아포라'에 대해 간단히 논하라.
40. 성화의 점진성과 불완전성에 대해 간단히 말하라.


참고 도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가이슬러, 노르만. 기독교 윤리학. 기독교문서선교회, 1992.
머리, 죤. 기독교 윤리. 김남식 역. 성암사, 1975.
명신홍. 개혁파 윤리학. 기독교문서선교회, 1971.
박윤선. 성경신학. 영음사, 1971, "제8장 신약의 윤리," 205-215쪽.
이보민. 기독교 사회윤리학. 개혁주의 신행협회, 1989.
Baker's Dictionary of Christian Ethics. Edited by Carl F. H. Henry. Baker Book House, 1973.
Davis, John Jefferson. Evangelical Ethics: Issues Facing the Church Today.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85.
Encyclopedia of Biblical and Christian Ethics. Edited by R. K. Harrison. Revised Edition. Nashville: Thomas Nelson Publishers, 1992.
Feinberg, John S., Paul D. Feinberg. Ethics for a Brave New World. Wheaton, Ill.: Crossway Books, 1993.
McQuilkin, Robertson. An Introduction to Biblical Ethics. Wheaton, Ill.: Tyndale House Publishers, 1989.



기독교 윤리          2001년도 2학기, 계약신학대학원
강사: 김효성

목   표: 성경에 계시된 성도의 생활 원리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함.

독서 과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91문답부터 153문답까지와 그
          참고 성경 구절들을 다 찾아 읽을 것

강의 및 연구 주제들
8/27  (개강예배)
9/ 3  삶의 목적, 기독교 윤리의 개념, 기준, 원동력, 내용들
9/10  거룩, 의, 선, 진실, 윤리적인 말
9/17  경건, 헌신, 순종, 겸손
9/24  1계명, 찬송, 현대 기독교 음악, 타종교인들에 대한 태도
10/ 1  (추석 휴강)
10/ 8  2계명, 제사, 현대적 우상, 마리아; 3계명, 맹세, 서약
10/15  4계명, 안식일과 주일, 의식법들, 취미와 오락
10/22  5계명, 효도, 자녀 교육, 직장, 국가 위정자들, 사회 정의
10/29  6계명, 자살, 술과 담배, 낙태, 산아 제한과 피임, 안락사
11/ 5  사형, 전쟁; 7계명, 결혼, 부부의 관계, 성(性), 이혼, 재혼
11/12  동성애, 머리, 화장, 옷, 인터넷, 인공 수정, 인간 복제
11/19  8계명, 근면, 구제, 빚 보증, 도박; 9계명, 거짓말
11/26  10계명, 자족, 절제, 감사, 고난, 인내, 아디아포라, 결론
12/ 3  (학기말 고사)

보 고 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91문답부터 153문답까지의 참고
         성경 구절들을 요약하여 제출할 것.

성적 평가: 독서 10%, 보고서 10%, 학기말 시험 80%,
          결석은 2회에 1점 감점



참고 도서
가이슬러, 노르만. 기독교 윤리학. 기독교문서선교회, 1992.
머리, 죤. 기독교 윤리. 김남식 역. 성암사, 1975.
명신홍. 개혁파 윤리학. 기독교문서선교회, 1971.
박윤선. 성경신학. 영음사, 1971, "제8장 신약의 윤리," 205-215쪽.
이보민. 기독교 사회윤리학. 개혁주의 신행협회, 1989.
Baker's Dictionary of Christian Ethics. Edited by Carl F. H. Henry. Baker Book House, 1973.
Davis, John Jefferson. Evangelical Ethics: Issues Facing the Church Today.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85.
Encyclopedia of Biblical and Christian Ethics. Edited by R. K. Harrison. Revised Edition. Nashville: Thomas Nelson Publishers, 1992.
Feinberg, John S., Paul D. Feinberg. Ethics for a Brave New World. Wheaton, Ill.: Crossway Books, 1993.
McQuilkin, Robertson. An Introduction to Biblical Ethics. Wheaton, Ill.: Tyndale House Publishers, 1989.


기독교 윤리 시험문제
1. 기독교 윤리를 정의하라.
2.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3. 찬송의 의미, 이유들, 바른 방법은 무엇인가?
4. 현대 기독교 음악(CCM)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5. 주일을 거룩히 지켜야 할 이유들은 무엇인가?
6. 자녀교육의 내용과 방법을 요약해보라.
7. 그리스도인이 국가위정자들에 대해 가지는 의무는 무엇인가?
8. 교회의 정치참여에 대해 논평하라.
9. 금주(禁酒)하고 금연(禁煙)해야 할 이유들을 요약하라.
10. 낙태가 살인죄라는 것을 성경적으로 간단히 논하라.
11. 사형제도에 대한 정당성은 무엇인가?
12. 전쟁에 대한 성경의 원리는 무엇인가?
13. 결혼의 필요성 혹은 이유들과 부부의 의무에 대해 말하라.
14. 동성애를 정죄하는 성경 교훈을 요약하라.
15. 소위 '선의의 거짓말'에 대해 간단히 논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