腓利比书1章20节/빌립보서 1: 20

2007.11.04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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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年3月19日周三晨更
선지자선교회 本文:腓利比书1章20节

“照着我所切慕,所盼望的,没有一事叫我羞愧;只要凡事放胆,无论是生是死,总叫基督在我身上照常显大。”

“没有一事叫我羞愧”的意思是:不管遇到什么样的事,只要这是使神尊贵、使神喜悦、并合神心意的事,那么,因着这是荣耀神、使神喜悦、合神心意的事,他就会毫不犹豫、毫无顾忌、毫无不满、毫无不情愿地去面对,他会毫不犹豫地面对任何苦难、冤屈、损失、贫困、虐待和刑罚。
“没有羞愧,只要”,这里“只要”是“和过去一样”的意思,即不只是现在,过去他的生活也是如此。意思是他和过去一样,现在也是凡事放胆,想使主喜悦和尊贵的心思和行动现在也非常坚定。他的这种心思和行动非常强烈,因此即便遭遇饿死、挨打、危险的事、坐监、拷问、苦行、死亡、名誉被毁、最大破坏、自己的某种活动遭到动摇或破坏等这些事,也坚定不移,丝毫不动摇想使主尊贵的身心行动,这就叫“凡事放胆”。

这就好比几人合抱的大树,遇到一般的小风吹打、小孩子们用打场的器具敲打或扎上绳来拽,这大树都会纹丝不动一样。就像这大树稳固一样,这种想要使主尊贵的坚固的心,能绰绰有余地超越世上任何东西,这就叫“凡事放胆”。这是因为所有忧虑都不能强过想要使主尊贵的忧虑,所以,因为想要使主尊贵的心思非常强,所以这些忧虑不能来动摇它。遇到任何事都不会使我厌烦,不会使我羞愧,任何事都不能给我丝毫的动摇,这就叫“凡事放胆”。

我们信者如果能这样做的话,对主的福音当然是荣耀的,主也会喜悦。我的威信会如何、我的经济会如何、我的家庭会如何、我的仕途会如何、我的舞台或企业会如何、我的健康会如何、我生命会如何等,因为这样的忧虑,所以我们在信仰路程上会有犹豫。这“切慕”是指这些。
“所切慕、所盼望的”,这种期待和盼望十分恳切,所以不论遇到任何事情,都能凡事放胆,凡事坚固。不论遇到何事,都不会忧郁、嫌弃、迟疑或不喜欢。没有羞愧,凡事放胆,“切慕”、“盼望”,这些都是带有一样意思的词语。
(言语与行动及言语与人格的连贯性)
我们信的人有一个奥妙的事,就是言语和行为最终会一致。心里没这样想,觉得“这是没用的话”,所以就忽略掉,但是过很长时间后发现,言语和心是合拢在一起的。心是跟着言语而去的。心跟着言语而去,也有言语跟着心而去的。言语跟着心而去是定理,但此外心也跟着言语而去。若有人说了没有修养的话,但心里却不是那样想的,他觉得“这算什么,只是一句话而已”,明知这话不好,却狠狠地说了一两次,然而后来发现自己的心和那言语一样变了。
言语和心再怎么认为各自是不相干的,但是,我们说话时要明白言语和心有着走向一致的力量;如果想“话我是那么说,但心是另一回事”,就这样忽略而过,或心想“一句话而已,算不得什么”的话,就是上当受骗了。慢慢不知不觉地我们的心会跟随言语而去。而且,言语和行动也是一致的。我们再怎么做有口无心的行动,结果我们的心和行动会变成一样的。而且,我们就算把自己的心放置一边,去行动,最后心也会和行动一致。
心和行动最终会在一个地方相见。所以,如果我们不喜欢坏的心,那么,就要连行动也别做出来;如果不喜欢这样的心,而做这样的行动,那么,你再不喜欢这样的行动,这心也会变成与行动相同的。如果你不喜欢某一行动,那么就不要存那样的心,如果存了那样的心,最终就会变成行动。所以,因着行动形成心,因着心形成行动。

例如,有个人心里恨一个人,恨不得把他杀掉。因为恨他,所以想“不管怎样把他杀掉”,存着哪一天要杀掉他的想法,但在外表和行动上若继续去行爱的行动,最后心也会爱那个人。
自己哪怕是用恨的心,为害那个人而做了爱的行动,但不知不觉间因爱的行动,连心也变成爱的心。

对自己爱的人,心里真的爱他,但如果行动上做恨的行动,那么到后来跟着自己的行动,心也会变得恨了。所以,因为心和行动是一致的,若心里不喜欢,行动也就要不喜欢,行动上不喜欢,心也要不喜欢;若心里喜欢,行动也就要喜欢,行动上喜欢,心也要喜欢。人们以为这两者可以双重进行,但其实结果会变为一致。
所以,当心里喜欢时,人会对“喜欢”最终习练通达,所以虽然他还会根据环境做心里不喜欢的事,但结果其行动会跟随心而去;并且,心也会跟随行动而去。所以,有其行动必有其心,有其心必有其行动。行动和心会变为一致,我们要记住这一点。并且,行动和人格不是不同的,而是一致的,行动如何如何,但人格却是如何如何,不是这样的。按照人格形成行动,按照行动形成人格。
所以,即便开始时人格和行动可能会有判若两人的不同表现,但渐渐人格和行动越来越近,最终会成为一。心和行动不同,表里不一,行动和心相差甚远,即便我们这样存相差甚远的心和行动,渐渐地这心和行动会拉近,最终成为一。因为人们不去计算关于这方面的利害得失,所以不会去想这些。
人们都以为自己是在用处事之道来应酬,但后来发现那些都成为了自己。自己以为只是作为处事之道,作为一个权宜之计来应付这样那样的事的,但最终这些都成为了他自己。所以,我们要知道一旦我们有恨的想法和行动,那么,我们自己就会成为与自己恨的心和行动一样的人。
所以,我们为人处事之前要明白:行动和人、心和行动、言语和心,也就是言语、心、行动、自我这四样东西,是最终会结成一体、碰到一起的。如果我们心想,我只是作为一个处事之道这样做的,因为不这样做是愚蠢的,所以,还误以为人的言语、心思、行动和人自己是各不相关,互相分开的。其实这些是不能相互分开的,最终会成为一体。
我们自以为对一个人说的不是出于自己本意的话,是用此心作出彼样行动,但结果,言语、心思、行动和自己,最终会变成一个。彼此之间会越来越近、越来越近,最终聚成一团,成为“自己”。

所以,爱自己的人会爱惜自己;重视自己的人,会为了自己而珍惜自己的言语、心思和行动。爱自己的人,会说出爱的言语、发出爱的心思、做出爱的行动;所以,人只有从对所有人都说出爱的言语、发出爱的心思、做出爱的行动开始,才能成为无论对任何人都能爱的人。人不能离开这样的法则。
但人们认为这些相互之间没什么关系,觉得可以二重、三重地去做,明明可见他言语和心思不同,心思和行动不同,是二重、三重性的,他自己却还以为这不过是处世之道。可是这样度过一生之后,最后其所作所为会聚成一团成为他自己。
所以,如果早知道自己会变成那样阴险的人,就不会拥有这些。还以为自己能够按照自己的志向明白地生活,这些只是作为一个权宜之计和手段,与本我是没有关系的。还以为那些不会变成自己,所以那样做的,可最后那些竟然成为了自己,不能摆脱。
所以,如果想把自己变成伟大的人,那就要谨慎,你必须要说伟大的话,存伟大的心,做伟大的行动。自己想成为伟大的、非常优秀的、尊贵的人,但言语呢,心想,难道言语就是我吗?言语能代表我吗?所以,就不说尊贵的话,心里不存尊贵的心,行动不做尊贵的行动,唯独自己想成为尊贵的人,这样做是愚蠢的。度过一生以后,回头一看,才发现人的言语、心思、行动和自己最终是一个。所以,人的言语、心思、行动和自己最终是一个。

“所切慕,所盼望的”,这恳切的心思在哪里呢?在撒种的比喻中,种子表示神真理的话语,撒在路边的种子,表示这真理没有吃掉一点“自己”,路边的地是指“自己”。
自己!说得狭隘一点,就是自己的心思,只有真理吃掉了自己,我们才能长大。路边撒下的种子,因自我太硬,真理一点都不能吃掉。撒在石头地里的种子,真理在吃“自己”时,被“自己”所拦阻,这真理在吃“自己”的心思、自己的想法、自己的时间、自己的活动时,与自己相碰撞时,就再也吃不下去了,因为自己而吃不下去了,圣经中将这比作是石头。根须扎下去时,有石头顶着,这石头是指自己。
撒在荆棘丛里的,真理来了,要吃掉自己的时间、自己的思想、自己的言语、自己的心思、自己的行动,只有吃掉了自己,这真理才能在我们里面结果,才能成功。但想吃掉自己时,发现世上的忧虑、物质的贪欲,属世的贪欲,这些已经把自己都吃掉了,真理没什么可吃的了。从早晨到晚上,从晚上到早晨,属世的物欲、世界的贪欲这些占满我们里面,把我们的身心、心思、言行都吃掉了,真理来了,不能吃掉什么,那还能结什么果子呢?
撒在好土上的种子,自己所接受的真理,这真理将自己的心思、想法、言语、行动都吃掉了,将这把自己都吃掉,比喻为撒在好土里的种子。换句话说,我接受主的真理,学习之后,如果想要这真理结果,只有对这真理,尽心、尽性、尽意、尽力、倾尽生命地对待真理,真理才能照着真理结出成果,我们才能成为真理的自己。这真理的果子有百倍、六十倍、三十倍,说的就是按照真理的样式成为自己。
按照真理的样式成为自己、按照真理的样式行动的,就会有百倍的收成。这难道是说自己变成一百个吗?我们自己不但一百,比一千、一万都要多。所谓“自己”,虽然灵是单一体,但身心的“细胞”却是比肉体的细胞要多,其中每个都照着真理成为一个要素;心思有很多,每个心思都照着真理成为一个心思,心思若有数十个,每个都照着真理;行动超越数十个、数百个,也都照着真理做成。圣经中称这为百倍、六十倍、三十倍。
说百倍并不是说正好一百倍,十是人间的满数,所以,这百倍只是指人类的知识无法测量的多数性的圣化。
所以,我们的盼望是非常重要的。我们的盼望,单纯这盼望也是有用的。因为盼望成为实际,盼望成为自己。所以,神将盼望放在我们里面,这盼望是神的盼望、好的盼望,“将盼望放在我们里面,成就的却是神。”照着盼望成就的是神。神会照着盼望给予成就。
如果自己里面有不好的盼望,那就没有办法。弟兄姊妹们!这世上的聪明,你们要将它看作非常没有价值的。有口才、有智慧、聪明、敏锐、锐利、优秀,这些毫无价值。其价值是虚无的。因为这些再好,若其盼望不好,这些就全都被恶用。这些只不过都是些工具罢了。而没有这些的人、笨拙的人,虽然他的盼望看似虚无,但若这盼望是对的,这人最终会成为伟人、正确的人。

所以,任牧师一职的人,如果带着虚无的虚荣心、带着所谓尊荣、名誉心、荣耀心去服事,心里企图抓住派系的权柄、企图抓住政权、企图抓住王权等,那么这就是咒诅之中的咒诅。
这些想法不进来。这些想法一生当中一次也没有进来过。这些离我们千万里远,如何能进来呢?不进来这些东西的人是有福的。不进来的人多。如果这些进来,抵挡这些的人是站在危险位置上的人,这人必须不断地为此付出努力才可以。
这些不出现才是圣徒的正常状况。吃主的血和肉,这些怎么可能出现呢?站在无所不知的审判者前面,怎么会有那种虚无的想法靠近我们呢?认识主的人,在主里面有盼望的人,这样的人不会有这些出现,没有这样想法。是把它们除掉了吧?不要这么想,因为根本没有出现这种想法的时间,没有时间出来。那些令人害羞的、羞耻的、什么都不是的、虚假的,我怎么把它能当作事情来付诸行动呢?这些想法干脆不进入我们内心,不想这些事情,一生一次都不想,这才是正常基督徒的心。
如果这些几天一次间断性地进来,因此需要不断与这些争战,那么他是灵性层次非常低的人,他还处于比较低的位置。如果发现自己不断与这些争斗,那么,他一生都要常常立一个望楼,向着这些拉开弓备战,不然是不行的。
但这些进来的时候,如果他研究作战方案:“啊,这样试试,还是那样试试?这样能得胜还是那样能得胜?这样是捷径还是那样是捷径?”那这个人就是很难再回转。这种状况下,很难回来。除非神用墙、荆棘阻挡,不然他不会回来。回来的时候早过了,不能回来。

所以,人们开始过信耶稣的信仰生活之后,面对惩诫,有悔改的人,也有一生没有惩诫度过的人。通过惩诫悔改的人,这样的人需要神将他打折,将他拔除,用荆棘、墙来阻挡帮助他。

“不要轻看主的警诫”,这句话的意思是,你如果受过一次警戒,就会受那么多的损失,受一次,损耗一次,如果习以为常,总是挨打,就会成为残废。难道会成为别的吗?喝了毒药得了一次医治,还以为“啊,吃了药就好了!”毒药本来吃一次都会受伤,大大受伤,——虽然对这一处是好的,别处却是受伤很多,我们却吃了又吃,成了残废,到最后岂不白费力气了吗?惩诫就像毒药一样。惩诫就某一个地方是必要的,但只对那一个地方是必要的,不是哪儿都必要。
所以,不要觉得习以为常。如果没有惩诫,他就不是真儿子,是私子。是假冒的信者,被人拉来,作为陪衬,到处走走。“是私子,不是真儿子”。圣经上说,如果你们没有惩诫,就是私子,不是真儿子。
我们的心是重要的。当主耶稣说,卖我的人就在你们里面时,所有的门徒都发抖、害怕,问:“是我吗!!”“是我吗!!”,只有加略人犹大大胆面对。
耶稣说那人就是“同我蘸手在盘子里的”那个人,这时加略人犹大蘸手在盘子里,所以犹大自己和在座的其他人都知道是犹大。自己和别人都知道了,旁边的其他人就是已经显明不是自己了,也都发抖,只有犹大对此没有一点颤抖的心。他想:卖不卖的,都是命中住定。对做与不做没有什么恐惧,没有刺激,将自己的心偏转,转身出去了,这就是犹大。
心里的虚荣和贪心,有些人里面的这些东西不出来;出来的人要努力持续把这些吸出来。要立一个守望台专门守望这一点,在那里架上一个大炮。
但这个时候,如果你不发抖,还在自己研究方案,这样的人靠自己回转是难的。都这样了,还不发抖,还在研究方案,这样顽梗,已经堕落到这种程度的人,需要神给他惩诫,帮助他折断那种顽梗,需要神帮助一次,拔除这个据点。
“用刺和墙拦阻”,说的是惩诫。受了一个惩诫,仍不回转,不回转虚荣的梦,受了惩诫仍没有惧怕。不回转虚荣的梦,即便如此都不惧怕,这样做的时候没有惩诫的人,是私子,不是真儿子,这个时候,他如果没有“啊,我分明是心里有和他一样的虚荣和贪心,但却没有惩诫,我是不是没有惩诫的私子啊?!”这种想法,对自己是不是私子没有什么想法,这种人虽然不能说是未蒙拣选的人,但至少没有到神召他的时候。他是里面还没有重生的灵,神还没有让他着手开始信仰生活的人,虽然来教会,但仍不发抖,还仍属于加略人犹大。
所以,我们所切慕和盼望的,我们的恳切向哪儿倾斜?观察牧会的人,有很多人只用技术来牧会。只用技术来牧会的人,靠讲道讲得好,那个人不见得能牧会成功。讲道再好,他的讲道中没有圣灵的显现,事工没有权能,那么,听道的人他们的信心就来自人的聪明。因为来自人的聪明,没有权能,所以不能胜过世界。
历史当中这类事件常有出现,如倭政末年胜过神社参拜的事件;6.25动乱时,在仇敌中间过得胜生活,没有犯罪的事件等,这些都是神的权能,靠人的决心是不行的。
现在和以后那个时候是不一样的。想着:到那时把生命献上吧。但到那时为了不放弃神和神的道,放弃自己的所有,还不算什么,比较容易,但最后把生命献上,却是非常不容易的。在献上生命之前,物质还好说,但最后放弃生命最难,所以,人到那时大多都会变质。

所以,我们保守自己的心,不知道有多重要。这心要在言语当中造就,因为心在言语中容易造就,心若要在心中造就,那就难了。心要在言语中造就,圣洁的行为要在心中造就,像神一样完全和洁净的自己,要在行为中造就,若想在别处直接造就,那么,这是不可行的方法。
同声祷告之后,自由散开。今天上午没有劝察会。



1980년 3월 19일 수. 새벽
본문:빌립보서 1: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아무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이 말씀은 주님을 존귀케 하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주님의 원하시는 대로 하는 이 생활에 부딪히는 어떤 일이라도 주를 기쁘시게 주를 영광스럽게 주의 원하시는 대로 하는 이 생활로 인하여 어떤 일을 닥쳐도 주저하지 아니하고 꺼리지 안하고 못마땅해 여기지 아니하고 마음에 싫어 여기지 아니하고 하는 말씀입니다. 어떤 고난이라도 억울함이라도 손해라도 가난이라도 천대라도 형벌이라도 조금도 주저하지 아니하고 하는 말씀입니다.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오직 전과 같이 지금만이 아니고 과거에도 생활이 이 생활이었다는 말입니다. 과거에도 이 생활이었다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주를 기쁘시기 존귀케 하려는 이 마음과 행동이 심히 튼튼한 것을 가르쳐 말합니다.
심히 튼튼한거 이 마음과 행동이 강해서 굶어 죽는 일이나 매 맞는 일이나 위험한 일이나 감옥이나 고문이나 고행이나 죽음이나 명예의 절단이나 가장파괴나 자기의 어떤 그 활동이나 그런 것들이 흔들리고 그런 것들이 깨지고 그런 일들을 만나지고 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주님을 존귀케 하려는 이 심신의 행동을 추호도 요동치 못하는 견고함을 가르쳐서 “온전히 담대하여” 하는 말씀입니다.

마치 비유컨데 여러 아름되는 둥구나무를 여러 아름이 되는 둥구나무를 사소한 바람이 불어봤자 그것을 아이들이 햇가리를 가지고 때려봤자 아이들이 실나끈을 주어 매가지고 잡아 댕겨 봤자 그 둥구나무가 요동치 않는 그런 일과 같은 그 둥구나무에 튼튼함을 둥구나무에 튼튼함과 같은 주를 존귀케 하려는 그 마음에 튼튼한 것을 세상 어떤 것이라도 다 능가하고 남음이 심히 큰 것을 말해서 “온전히 담대하여” 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모든 염려가 주를 존귀케 하려는 이 염려보다 약하고 주를 존귀케 하려는 이 마음이 크고 강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와서 흔들지 못한다. 어떤 일이라도 싫지 않다. 부끄럽지 않다 싫지 않다. 그런 것들이 와야 추호도 요동치 않는다 하는 그것을 가르쳐서 “온전히 담대하여” 말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하면 분명히 주님에 복음에는 영광스럽고 또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내 위신에 위신이 어찌되나 내 경제가 어찌되나 가정이 어찌 되나 내 출세가 어찌되나 내 무대나 내 업체가 어찌되나 내 건강이 어찌되나 생명이 어찌되나 하는 그런 염려 때문에 그런 염려 때문에 신앙걸음을 걷다가 주저하는 것입니다. 이 간절한 기대란 말은 그것을 말합니다.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기대와 소망이 간절한 이 간절이 어떤 것을 부딪쳐도 온전히 담대하도 온전히 튼튼하다 어떤 것을 만나도 주저하거나 꺼리거나 지체하거나 싫지 않다 하는 것을 가르쳐서 부끄럽지 않고 온전히 담대하고 간절한 기대와 소만 이것 다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말의 힘은 말과 행동과 마음의 연관성)
우리 믿는 사람들이 참 오묘한 일 있습니다. 말과 마음이 결국은 같이 돼집니다. 마음없이 고의적으로 이거는 쓸데 없는 말로 지내 버립니다. 그렇게 생각하지마는 나중 가서 오래 지나고 보면 말과 마음이 한테 다 모입니다. 마음이 말을 따라 갑니다. 마음이 말을 따라가요 말이 마음 따라 가는 것도 있지마는 말이 마음을 따라 가는 것은 정한 이치지마는 이외에도 마음이 말을 따라갑니다. 그 사람이 소양 없는 말을 자기 마음은 따로 두고 그까짓 말이야 그거는 안된 말로 알고도 그런 말을 한번 두 번 심히 하면 나중에 자기의 마음이 그 말과 같은 그 마음이 돼 버리고 맙니다.
말과 마음이 아무리 자기는 딴것이라고 생각하고 하지마는 말과 마음이 일치되는 이런 힘이 있는 것을 알고 말을 해야 되지 자기가 말은 그리할지라도 마음은 따로 있으니까 하고 지나 버리는 하고 내버리는 말 그까짓거야 아무런 상관 없지 생각하면 속았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마음이라는 것은 말을 따라 갑니다. 또 마음과 행동는 그것은 일치 됩니다. 아무리 자기가 마음 없는 행동을 했다 할지라도 결국은 그 마음이 행동과 같이 됩니다. 또 자기 마음은 따로 두고 행동을 했다 할지라도 마지막에는 마음과 행동이 같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과 행동은 결국은 한군데 가서 둘이 만난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고 나쁜 그 마음을 싫거든 그 행동까지 안해야 되지 그런 마음은 싫어 하면서 그 행동을 하면 아무리 그런 행동 싫다 해도 그 마음과 같은 싫은 행동이 됩니다. 또 자기가 그런 행동이 싫다 그 행동이 싫으면 그런 마음을 안 가져야지 마음을 가지면 결국은 행동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행동으로 마음이 이루어지고 마음으로 행동이 이루어집니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그 속 마음으로는 그 사람을 미워서 어쩌든지 살해하면 싶습니다. 그 사람이 미워서 어쩌든지 저걸 죽여야 되겠다 그런 아주 언제가 저거는 죽여야 되겠다고 그런 살해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외식의 행동이나 사람을 사랑하는 행동을 해 나가면 결국은 마음까지도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는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을 해치기 위해서 사랑하는 행동을 했다 할지라도 자기도 모르게 사랑하는 행동으로 인하여 마음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이 돼 버리고 맙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속으로 마음으로는 진정 사랑하면서 행동은 미워하는 행동을 어떤 계획이든지 합니다. 하면 나중에는 행동에 따라서 마음까지도 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과 행동이 일치기 때문에 마음이 싫거든 행동으로도 싫어야 되고 그 행동이 싫거든 마음으로도 싫어야 되고 마음으로 좋거든 행동도 좋아야 되고 행동이 좋으면 마음도 좋아야 되지 그것을 이중으로 사람들이 알고 이중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마는 안됩니다 결국은 일치가 됩니다.

그러기에 마음으로 좋아하는 것은 결국은 그 사람이 거게 대해서 능숙해집니다. 아무리 환경에 따라서 마음에 싫은 행동을 한다 할짜라도 결국은 그 행동이 마음을 따라가고 맙니다. 또 마음이 행동을 따라가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행동이면 그 마음이요 그 마음이면 그 행동이요 행동과 마음이 일치된다는 것을 이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또 행동과 그 사람의 인격이라는 그 인격은 딴거 아닙니다. 행동과 인격은 일치 됩니다. 행동. 그러하지마는 인격이 어떻고 그런 것 아닙니다. 인격 따라 행동이 이루어지고 행동따라 인격이 이뤄집니다.
그러기에는 처음에는 인격과 행동이 아주 판이하게 딴 것을 다른 것을 하고 있어도 차차 차차 인격과 행동은 가까워져서 하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마음 다르고 행동 다르게 아주 표리가 다르게 행동과 마음이 멀게 이렇게 먼 마음 먼 행동 마음과 행동이 아주 거리 먼 것을 자기가 하고 있다 할지라도 서서히 그 마음과 행동은 가까워서 하나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이 계산해보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다 스스로 자기가 처세술로 처세술로 하고 있는 줄로 알지마는 결국은 그 모든 것이 자기 된다는 말입니다. 자기는 처세술로 하나의 방편으로 이렇게 저렇게 한다고 하지마는 그것이 결국은 자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미운 그 생각이나 행동은 막바로 그것로 하면은 미워하는 자기 미워하는 마음과 행동과 같은 그 미움에 마음과 행동과 같은 그런 자기가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행동과 사람이 마음과 행동이 말과 마음이 말 마음 행동 자기 이 넷이 결국은 한테 뭉쳐서 하나 된다는 것 마지막에 이것이 만난다는 거 이걸 알고 처세를 해야 되지 자기가 아주 하나 처세술로 그래 하지 그런 것 아니다 어리석게 생각하고 말 따로 하고 마음 따로 가지고 행동 따로 가지고 사람 저는 따로 있는 줄로 알지마는 따로 못 있습니다. 결국은 그것이 그것 됩니다.
아무리 자기는 이런 사람에서 아주 거리면 자기 아닌 본의 아닌 저런 말을 하고 저런 마음을 가지고 이런 행동 한다 할지라도 결국은 말과 마음과 행동과 자기는 하나가 되고 맙니다. 마지막에는 자꾸 서로 가까워지고 가까워져 가지고서 결국은 똘똘 뭉쳐. 뭉쳐서 자기라는 하나가 되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애끼고 귀중히 여기는 자는 말을 애끼고 마음을 애끼고 행동을 애껴 위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는 말을 사랑하는 마음을 사랑할 수 있는 행동을 누구든지 사랑할 수 있는 말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사랑할 수 있는 행동을 하는 데에서 누구든지 사랑할 수 있는 자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거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아주 상관 없이 얼마든지 이중 삼중으로 할 수가 있다고 생각을 가져서 변연히 보면은 말과 마음이 하나가 아니고 마음과 행동이 하나가 아닌 이중 삼중적은 그것을 하면서 그것이 처세에 능한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그렇게 산 일생은 마지막 그것이 똘똘 뭉쳐서 자기가 되고 마는…,
그러니까 그런 흉한 자기가 될줄 알았으면 그런 것을 가지지 안하지요 자기는 자기대로 또렷이 있고 그거는 하나의 방편으로 수단으로 상관 없는 것인줄 알고 자기가 그것이 자기 된다는 것을 생각지 못하고 이렇게 하지마는 그것이 자기 됩니다. 떠나지를 못합니다.
그렇게 자기가 자기를 위대하게 만들어 위대한 자가 되고 싶으면 조심을 위대한 말, 위대한 마음, 위대한 행동 그걸 해야 되지 자기는 위대하게 아주 훌륭한 사람이 귀한 사람이 되고 싶으면서 말이야 그에 낸가 말 그게 낸가 해서 말은 귀한 말을 하지 안하고 마음은 귀한 마음을 가지지 안하고 행동은 귀한 행동을 하지 아니하고 자기만 귀한 사람이 되려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결국은 말과 마음과 행동과 자기는 일생동안 살고 보면 그만 하나입니다. 말하고 마음하고 행동하고 그 사람하고 하나가 돼 버렸습니다. 하나입니다.

간절한 기대와 소망 이 간절함이 어디 있는고? 씨 뿌리는 비유에 그게 씨는 하나님의 진리를 말씀하는 것인데 길가 뿌린 씨는 이 진리가 자기를 하나도 못 먹었다 그 말이요 길가라는 그 땅은 자기를 말합니다
자기! 좁게 말하면 자기 마음, 진리가 자기를 먹어야 자랍니다. 길가에 뿌린 씨는 진리가 자기가 딴딴해서 이 진리가 와서 자기를 하나도 파먹지 못하요 돌짝밭에 뿌린 씨는 이 진리가 자기를 먹다가 그만 자기라는 것에게 거쳐서 이 진리가 자기의 마음, 자기 생각, 시간, 활동을 먹다가 자기에게 딱 마찰 되니까 그만 더 먹지 못합니다. 자기 때문에 못먹소 그걸 가르쳐서 뭐 돌을 말합니다. 뿌리 내릴 때에 돌이 받치는거 돌 그거는 자기를 말하는 것이요
덤불위에 뿌린씨라 이 진리가 와 가지고서 자기의 시간도 먹어야 되고 자기 생각도 먹어야 되고 말도 먹어야 되고 마음도 먹어야 되고 행동도 먹야야 되고 자기를 먹어야 이 진리가 자기에게서 결실이 되고 성공을 할 것인데 자기를 먹을려고 하니까 세상 염려 물질 욕심 물욕과 세상 욕심 이것이 자기를 다 뺏들어 먹어 버리고 진리는 먹을게 없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세상 물욕 물욕과 세상 욕심 이놈이 들어서 자기 심신 언행심사 전부 다 먹어 버리고 진리는 와서 먹지 못하니까 그것이 무슨 결실이 있겠소?
옥토에 뿌린 씨는 자기가 받은 바에 이 진리가 자기의 마음도 생각도 말도 행동도 자기를 다 먹어 버립니다. 그러기에 자기를 다 먹는 것을 가르쳐서 옥토에 뿌린 씨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네가 주의 진리를 배워 받아 가지고서 이 진리고 결실을 할라고 하면은 이 진리에 대해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야 이 진리에 다 해야 이 진리에 네가 진리가 네게 와져. 와서. 진리대로 성과되는 행동이 돼지고 그 진리대로의 자기가 된다 그 말입니다 진리대로의 결실함이 백배 육십배 삼십배 된다는 그 결실은 진리대로의 자기된 걸 말합니다.

진리대로의 자기된거 진리대로의 행동된 것, 진리대로의 자기된 것, 백배라 자기가 뭐 백이 되는가 자기가 백이 아니라 천도 만도 넘습니다. 자기가 우리 자기라는 것은 영은 단일체지마는 이 심신이라 하는 것은 그 육체의 세포보다 더 세포가 많습니다. 그것이 하나가 요 진리대로의 한 요소가 되고 마음고 수많은 마음인데 요 마음이라는 요 마음이 진리대로의 마음이 됐고 저 마음이 진리대로 마음이 됐고 고 마음이 진리대로 마음이 됐고 진리대로 그 마음이 여러 수십갠데 수십개가 진리대로 됐고, 행동이 수십갠데 수백개도 넘지요. 그게 진리대로 된거 그걸 가르쳐서 백배 육십배 삼십배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백배라 말하는 백을 똑 말하는 것 아니요 그것은 십이라는 것은 인간의 만순데 만수 만수 인간의 지식이 측량 못할 만침 다수적으로 성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소원이라는 이거는 중요합니다. 우리의 소원이라는 소원만 해도 소용있는가 아니요 소원은 실지가 되고 소원은 자기가 됩니다. 자기가 되요. 그래서 소원을 우리에게 두고 그러면 소원은 하나님의 소원인데 옳은 소원인데 “소원을 우리에게 두고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 소원대로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 소원대로 이뤄진다 그 말입니다.
자기속에 안된 소원이 있으면 별수 없습니다. 여러분들!! 이 세상에 명철 그것은 아주 그까짓것은 아주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십시오 말 잘하고 지혜있고 총명하고 예민하고 날카롭고 훌륭하고 아무 가치 없습니다. 가치가 아주 허무한 것입니다. 그것 암만 좋아도 소원이 틀렸으면 그것이 전부 악용되고 맙니다. 하나의 그거는 도구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요 그 사람이 그런 것이 없어 둔하고 둔하고 아주 허무할지라도 옳은 것을 소원 했으면 옳은 걸 원하면 그 사람은 결국은 위대한 사람이 되고 옳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기에 목사 노릇 하면서도 자기가 헛된 허영을 가지고서 무슨 존영을 가지고서 명예심이나 영관심이나 자기가 무슨 패권을 잡을려고 자기가 정권을 잡을려고 자기가 무슨 왕권을 잡을려고 하는 그런 것이 그 마음에 들어오는 것은 저주중에 저주입니다.
그런게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게 평생 한번도 그 생각에 들어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근방에서 천리 만리도 먼데 그것이 어째 들어 올수가 있겠습니까? 그게 안들어 오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안들어 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게 들어오는 그것은 물리치는 사람은 참 위험한 자리에 섰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들어오는 것을 물리치는 사람은 위험한 자리에 섰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쉴새 없이 노력하지 안하면 안됩니다.
그것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그것이 성도의 정상입니다. 주님의 피와 살을 먹는데 그것이 무엇이 나타납니까? 아지 못하심이 없으신 심판자 그분앞에 섰는데 그런 허무한 생각이 어떻게 근방에 들어오겠습니까? 주를 아는 자 주안에 소망이 있는 자 그런 자는 이런 것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있는거 뽑는다 그런 생각 가지지 마시고 없습니다. 그것이 있을 사이가 없습니다. 나올 사이가 없소 그런 또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아무것도 아닌 그런 거짓부리 그것을 어떻게 제가 일이라고 생각을 하면 그것을 행동이라고 원하겠습니까? 그런 것이 자기 마음에 아얘 들어오지 않는 것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 평생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는 그것이 정상적인 기독자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혹은 며칠만이나 간혹 우뚝우뚝 들어와서 그런 걸로 더불어 싸워서 물리치는 사람은 그것은 아주 저급의 사람입니다. 아주 그거는 낮은데 있는 사람이요 그 사람은 그것으로 더불어 싸운다는 것을 발견 했으면 평생 거게 대해서 항상 망대를 지어놓고 항상 그게 대해서 쏘는 화살을 땡겨 놓고 있어야 되지 그렇지 안하면 헛일입니다.
그것이 들어오는 것을 그놈을 가지고서 ‘아 이것이 이래 볼까 저래 볼까 이래해야 성공 될까 저리해야 성공이 될까 이래야 이제 이것이 질러가는 길일까 저리해야 질러 가는 길일까?’ 그 방편을 연구한다면 벌써 그 사람은 돌아 서기가 어렵습니다 예! 그것은 하나님의 징계나 하나님의 무슨 하나님이 꺾는 담으로나 가시로나 막아서 꺾어지는 그일이 있어야 돌아오지 그전에는 못돌아 옵니다. 돌아오기가 벌써 지나간 것입니다. 돌아오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예수 믿는 신앙생활 하고 난 다음에 징계를 가지고 회개하는 사람 있고 평생 징계없이 신앙생활 하는 사람 있습니다. 징계를 가지고 회개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그런 것이니까 하나님이 꺾어 주는 것이고 뽑아 주시는 것이고 가시로 담으로 막아서 도와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하는 그 말은 그것을 네가 한번 당하면 그만치 손해가 많이 갔는데 한번 당하는 거게 대해서 허비가 많이 됐는데 예사롭게 여기고 자꾸 매 맺아만 가면 병신되고 말지 그게 별것이 되겠습니까? 아 독약을 먹어서 한번 치료가 됐는데 ‘아 약 먹으니까 치료된다’ 하면서 독약을 한번 먹어도 상할 것이 굉장이 상했는데 거게는 좋지마는 다른데는 많이 상했는데 또 먹고 또 먹고 제가 병신되고 나중에 헛일되고 말지 뭣 됩니까? 징계는 독약과 같은 것입니다. 징계는 어느 한 군데만 필요한 것이지 거게만 필요한 것이지 아무데 다른데 필요한 것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걸 예사롭게 여기지 말라 그 말이요 징계가 없으면 그것은 제대로의 것이 사사로운 아들입니다. 조작배기 신자요 옆에 붙들려서 출물군으로 동행해서 이리 저리 돌아 다니는 것이지 그것은 “사사로운 아들이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했습니다. 너희들은 징계가 없으면 사사로운 아들이요 참아들이 아니니라 이랬습니다.
우리가 마음이라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마음이란거는 중요한 겁니다. 가룟 유다는 요렇게 모든 사람은 나를 팔자가 여게 있다 하니까 이거는 팔자가 있다 이라니까 모두가 떨면서 겁을 내면서 냅니까!! 냅니까!! 이래 떠는데 가룟 유다는 거게 대해서 담대했습니다.
나와 떡 그릇에 손을 같이 지금 넣고 있는 자다. 가룟 유다가 그때 손을 넣었으니까 가룟 유다란 것을 자타가 다 압니다. 자타가 다 알았습니다. 자타가 다 알았는데 옆에 사람들은 자기 아니라 해도 아니란 것이 밝혀져도 두려워 떨었는데 가룟 유다는 거게 대해서 떨리는 마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거나 말거나 팔자라 하든지 말든지 거게 대해서 아무런 두려움이나 자극이 없이 자기 마음은 딱 따로 돌아서 가지고 나갔습니다. 이게 가룟 유답니다.
이제 자기가 허영과 허욕이 있는 그것이 안 나오는 사람 있는데 나오는 사람을 그걸 뽑기를 계속 노력해야 된다 그것만 주시하는 망대를 하나 지어 놓아야 되고 거게다 대포를 걸어 놓아야 된다.
이럴 때에 곧 떨리지 아니하고 그 방편을 연구하는 사람은 스스로는 돌아서기 어렵다 이래도 떨리지 안하고 방편을 연구하는 그 만큼 벌써 타락한 사람은 완패해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징계를 주어서 도와서 그것을 꺾어 줘야 되고 그것을 한번 뽑아서 도와 줘야 된다
“가시와 담으로 막는다” 그것은 징계를 말한다 어떤 징계에 한번에 돌아서지 그렇지 안하면 그 허영의 꿈을 돌이키지 않는다 이래도 두려워 하지 안하면 그 허영의 꿈을 돌이키지 않는다 이래도 두려워 하지 안하고 그렇게 해도 징계가 없는 자는 사사로운 아들이요 참 아들이 아니라 이럴때에 ‘아 나에게는 분명히 내가 그와 같은 지금 허영과 허욕을 가졌는데도 징계가 없다 징계 없는 사사로운 아들아닌가’ 하는 여게도 두렵지 안하고 사사로운 아들이거나 말거나 생각없는 그 사람은 불택자라고는 할 수가 없지마는서도 하나님이 부를 때가 돼서 나온 사람은 아닙니다. 그 사람은 중생이 속에 아직 없는 사람이요 신앙생활을 하나님께서 착수시키지 아니한 사람입니다. 교회 나오기는 나오지마는 그래도 떨리지 안하고 아직까지는 가룟 유다에 속한 사람이라 그 말이요.

그러므로 우리가 간절한 기대와 소망 나의 간절함이 어디 기울어져 있는지 목회에 보면 기술만 가지고 목회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기술만 가지고 목회하는 사람들 설교 잘하는 것 가지고 그 사람 목회 성공하는 것 아닙니다. 아무리 설교를 잘해도 그 설교에 성령의 나타나심과 권능이 역사하는 그것이 없으면 그 설교들은 그 사람들 중에 그 믿음이 인간의 꾀에 있지 인간의 꾀에 있지 권능에 없기 때문에 세상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런 것이 문뜩문뜩 있어 왜정말년에 신사 참배를 이긴 것이라던지 6.25 동란에 그 원수 속에서 있으면서도 죄짓지 아니하고 승리한다던지 그런 것은 그것이 다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인간 결심 가지고 되는 것 아닙니다.
지금과 그때는 다릅니다. 그때 생명 내놓지 해도 그때에 자기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도를 내놓지 않기 위해서 뭐 있는 소유 그까짓거야 쉽지마는서도 마지막에 목숨 내놓는다는 거 그게 제일 어렵습니다. 목숨을 내놓기 전에는 물질 그러지마는 마지막에 목숨 내 놓는게 제일 어렵소 그때 가면 다 변질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마음 단속이라는 것이 말 단속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마음을 말에서 만들어야 됩니다. 마음을 말에서 만들어야 돼요 마음을 말에서 만들기가 쉽지 마음을 마음에서 만든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마음을 말에서 만들고 거룩한 행위를 마음에서 만들고 하나님과 같이 온전하고 깨끗한 자기를 행동에서 만들어야 되지 다른데서 거게서 직접 그것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안되는 방편입니다. 그거는 불가능의 방편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오늘 아침에 권찰회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