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0822주후

 

제목: 앉은뱅이의 표적

  선지자선교회

본문사도행전 31-15절 상반절

제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오전에 이런 그 본문에서 네 가지 종류의 인물들이 기록돼 있는 것을 증거했습니다. 첫째는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이요, 둘째는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을 날마다 구걸하기 위해서 성전 미문에 메어다가 놓는 사람들이요, 또 하나는 기도하러 갔다가 이 병신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이 낫기를 역사한 사도들이요, 또 한 사람은 앉은뱅이가 병나은 것을 보고 기이히 여기며 놀란 그 사람들입니다. 이 네 가지 종류의 인물은 우리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인물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고 또 전인류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오후에 이 말씀을 또 증거하게 되는 것은 내가 증거하는 것도 부족하지마는 이 증거를 듣는 사람들의 마음도 많이 완패해 있기 때문에 다시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도리를 그저 성경을 망라해 놓고 연구하려 하면 그 강령을 잡기가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주 형식 이 역사계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해 주신 일이 많습니다.

마지막 예언서 요한계시록은 거의가 다 상징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기억하기 쉽고, 생각하기 쉽고, 깨닫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 하신 것이요, 성신의 감화가 없으면 탈선돼서 삐뚤어지고 잘못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예언서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비유가 아니면 또 형식이 아니면 계시하시지를 별로이 안 했던 것입니다.

오전에도 증거한 것처럼 이 네 가지 종류의 인물 중에 제일 복된 사람이 누구냐? 제일 자기도 복되고 남도 복되게 하고 주님도 기쁘시게 한, 이 네 종류의 인물 중에 제일 행복된 사람은 나면서 앉은뱅이 된 그 사람이 나은 그것을 인해서 가졌던 행복입니다.

기독교에는 별별 기쁨도 있고 별별 축복이 있습니다. 그 종류의 수가 심히 많습니다. 그러나 변함없는 행복과 가장 뛰어난 기독자의 행복은 첫째가 앉은뱅이에게 임한 거와 같이 이 앉은뱅이 행복이 기독교의 제일된 행복인 것입니다.

자기가 어데까지 변화가 되고 어데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지사충성을 한다 할지라도 그 충성만으로 기독자의 제일된 행복은 가지지를 못합니다. 만일 자기가 어떤 성자가 되고 성녀가 됐다 할지라도, 그가 이미 된 성자 성녀의 그 권능을 가지고 주를 위해서 온갖 봉사와 희생을 한다 할지라도 그 속에 이 병을 고친다는 그 역사가 없다고 하면 그에게는 참된 기독자의 행복을 붙들지 못하고 놓친 사람입니다. 절대로 그에게 세상을 능가할 만한 그런 행복은 그 본인에게 없습니다.

모든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이나 역사에 성도들이 자타를 예수님으로 인하여 고치려고 하는 그 욕망과 그 성질의 역사와 그 결과가 있을 때에만 참된 기독자의 행복을 갖추었던 것입니다. 그 외에는 갖추지를 못했습니다.

여게 네 인물이 있는 중에도 첫째는 앉은뱅이가 제일 쾌락을 그때에 가졌고 또 그에게 욕망과 희망은 양양했습니다. 둘째로는 베드로와 요한 사도였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든 것을 성하게 고쳐 주려는 그 욕망과 그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 쾌락과 기쁨을 가졌습니다. 그것이 주님에게도 기쁨이 되고 자신에게도 기쁨이 되고 금생과 내세에 기쁨이 됐지 만일 이것이 아닌 다른, 세상이 좋아하는 운동을 어떻게 힘있게 했다 할지라도 모든 면으로 구비한 성공을 했다 할지라도 그 중심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치료하려는 이 욕망과 그 운동과 그 결과가 이루어지지 아니했으면 그는 결단코 쾌락을 취하지 못했을 것이요 반드시 무엇인가 갈증과 가책을 가지고 하나의 그 고통을 그가 만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기독 신자라면 언제나 예수님으로 인하여 자기에게 있는 자기를 고치든지 다른 사람을 고치든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고쳐보려는 요 역사 요 외에는 세상에서의 기독자의 쾌락은 없는 것입니다. 행복은 없습니다.

이런 것 저런 것 여러가지 역사가 있지마는 만일 그 사람이 복음 운동을 위해서 온갖 봉사의 희생의 역사를 했다 할지라도 했을지라도 그 사람이 자기가 경영하고 희생하고 봉사한 것이 예수님의 은혜로 인간을 고쳐보려는 그 목적에서 그를 위해서 한 것이라는 것을 만일 그 사람이 잊어버렸을 때에는 즉시 그에게 암흑이 와서 갑갑하고 답답함이 그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생활을 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되찾는 것은, 내가 이렇게 한 것이 세상과 세상의 무엇을 위함이 아니요 이는 내가 그리스도를 표본으로 하여 나를 고치기 위한 일이며 그렇지 않으면 내가 형제를 예수님의 공로 인하여 고치기 위함이라는 이 사실 이것 때문에 했단다는 것을 자신이 다시 발견했을 때에 잊어버렸던 행복은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가 이 세상에 있어서 예수님의 이 대속으로 온갖, 사죄로 치료하고, 칭의로 치료하고, 화친으로 치료할, 예수님으로 인하여, 내가 온 것은 병든 자를 고치기 위해서 왔다고, 의인 때문에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대로 이것이 복음 역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것을 굳게 잡읍시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암만 부르고 암만 찬양하고 어떻게 무엇으로 봉사할지라도 그 중심이 예수님이 피흘려 구속하신, 인간의 병든 것을 고쳐보려는 이 운동이 아니라면 그에게는 행복의 영감은 가지를 않습니다.

 

오후에 봉독한 데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기이히 여기고 주목을 하고 놀랬습니다. ? 밤낮 업혀다니고 밤낮 메여다니고 자기의 몸과 같이 자기 수족같이 그렇게 밀접하고 친밀한 그 사람들은 다 그 자리에 있었겠지마는 작별을 하고 베드로와 요한을 따랐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고 뛰고 굴려 인생의 행복을 누리면서 기뻐 즐거워하면서 그에게 소속한 사람들이 되어졌습니다. 그것을 많은 사람들은 보고 기이히 여기면서 놀랐습니다.

우리가 땅위에서, 거게서 거게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타를 고쳐서 복되게 하려는 이것도 될 수 있고 잘못하면 병신을 병신 더 되게 해 가지고 병신 놀음 해서 얻는 수입 소망하고 병신을 이용하는 그런 비참한 자도 되기 쉬운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진리와 영감으로 그 사람이 회개해서 구속을 바로 입고 구속주를 찬양하는 참 만유의 주님 앞에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의인이 됨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영육이 행복되기를 소망하지 않고 원죄와 본죄로 죽은 원죄 운동 본죄 운동, 마치 병신 중에도 심한 병신이면 구걸하기에 권위가 더 있고 많은 사람에게서 유익을 더 보는 것처럼 인간이 인간을 벗어나서 원죄 뭉텅이가 되고 본죄 뭉텅이가 돼서 타락한 중에 제일 많이 타락한 자라면 그는 원죄와 본죄의 세력을 가지고 이 처세하는 동안 인간에게 착취하고 인간에게 봉사나 희생이라 하는 것은 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부패성 가지고 잘 살도록, 어릴 때부터 가르치는 것이 부패성 가르치고, 대대학을 보내는 것도 부패성 가르치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떠난 이것의 장기로, 이것의 성장으로, 이것의 강장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이용하고 모든 사람에게서 유익을 입으려는 그것이 정말로 양심을 가지고 생각하면 병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병신 팔아 가지고 돈벌이 하는, 병신 이용해 가지고 자기 유익하게 하는 그것이나 조금도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잘못하면 인간의 원죄 본죄의 부패성, 하나님을 멀리한 부패성 이것을 길러 가지고 저의 처세의 기능을 삼고 그를 행복되게 하려 하여 이 면에 주력하는 메어다 놓는 봉사자가 되기 쉽습니다. 온 세상을 이것이라고 해도 실은 과언이 아닐 만치 이 진리에서 보인 대로는 이대로인 것입니다.

그 사람이 점점 병신이 더 돼 갈 때에는, 병이 짙어져 갈 때에는 메고 온 그 사람들이 저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병든 병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낫게 되고 나니까 그 사람들은 상관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참 비참한 자 된 거기에서 구출한 베드로와 요한을 붙들고 그 뒤를 따랐습니다. 인생의 종말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자기의 사랑하는 가까운 사람을 홍포 입은 부자처럼 이렇게 저렇게 땅의 것으로 행복되게 하려고 하나 마지막에 눈이 밝아 만물의 진상과 하나님의 법도를 깨닫는 그때는 원수가 아닌 그가 정말 원수라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자기 아니면 못 살겠다고 하는 자기에게 속한 사람이 그때는 자기로 더불어 원수가 될런지 모릅니다. 다 잊어버려질 것입니다.

앉은뱅이와 베드로와 요한이 서이 들어붙었고 그는 베드로와 요한의 사람이 됐고 결단코 앉은뱅이를 업어다가 메어다가 놓은 사람들의 사람은 안 됐습니다.

이 병신이 병이 나아서 남한테 병 팔아 가지고 남에게 착취하려는 구걸 행위 이것을 안 하는 참 깨끗한 사람, 복된 사람, 정상적인 사람이 됐을 때에 메어다 놓은 사람들은 그 행복을 감사하지 않고 도리어 불평했을 것입니다. ? 저희의 업이 끊어졌기 때문에. 오늘도 그런 것을 많이 봅니다.

이천 마리 도야지떼가 바다에서 몰사하니까 사람은 귀신에게서 놓여서 구출됐으니 도야지 이천 마리보다 분명히 사람이 귀하건마는 그때 가다랴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떠나기를 원했다는 그것을 우리에게 보인 것은 인생이 물질과 인간의 가치를 혼돈해서 인간보다 물질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주 봅니다. 얼마 전에도 자기 딸을 머리를 깎고 얼마를 뚜드리고 와 가지고 여게서 발악을 하는데, ? 그게 사람 된다고. 그 자식이 사람 된다고. 이제는 사람 같잖은 행위를 벗어나서 인간병을 고쳐서 사람 노릇 해 보겠다 한다고, 제 욕망대로의 가장 악인이 되어서 세상을 마구 악어처럼 삼켜야 될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이놈아 네가 이렇게 이래 가지고 이 악하고 무정한 세상에서 어떻게 세상을 살아나갈 것이라고 네가 이런 어리석은 걸음을 걷느냐? 하면서, 그 부모는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여서 그와 같이 하는 것을 많이 봤습니다.

그것이 주일을 지켜, 계명을 지켜, 하나님을 경외해, 이제는 인간에게 악을 행치 않고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고 해서 쫓겨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며 버림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며,

그것이 사람이 돼 보겠다고 어린 것이 잠을 깨서 새벽기도를 나온다, 성경을 본다, 이 아이가 미쳐서 사람 버렸다고 끌고 가 가지고, 옛날에는 공부밖에 모르고 땅에 있는 인간 지식, 죽은 지식 죽게 하는 지식 이것밖에 모르고 여게 전심 전력 기울였고 인간 노릇이란 그런 것은 말하지 않았는데 제가 무슨 의인처럼 인간 노릇 해 보겠다고 뭐 어째 보겠다고 한다고 해 가지고 박해를 당하는 그런 꼴을 많이 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러면 공부 못 한다고 새벽기도 나가려 하는 그 시간을 깨우라 해도 안 깨우고 가만히 두고 공부할 시간 되면 딱딱 깨워 줍니다. 이것이 다 뭣 때문에? 병신 만들어 가지고 인생에게 구걸하는 자 구걸 잘 하는 자 되기 위해서, 원죄와 본죄가 강해야 잔인무도한 세상에서 밟히지 않고 살 수 있다고 해서 하는 그것이 곧 그것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 계시의 말씀은 네가 기독자라면 하나 하나의 언행심사의 움직임의 그 중심이 예수님으로 인하여서 너를 고치든지 다른 사람을 고치든지 고치는 역사와 고친 결과가 없는 거게는 기독자의 기쁨은 없다. 네가 어데까지 성자가 됐다 할지라도 거게서 고치고자 하는 욕망과 고치려고 하는 역사와 고쳐진 그것이 있었으면 너는 성자의 행복을 가졌지마는 그것이 없이,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이만하면 됐다 하고 병을 발견 못 하고 고치고자 하는 욕망, 고치고자 하는 노력, 새로 고쳐진 부분 이것이 없이는 지상의 기독자로서는 행복은 없다, 쾌락은 없다 하는 것을 여게서 굳게 잡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 없이 땀을 흘리면서 메어다 놓는 것처럼 어떻게 해도 마지막에 그 사람이 죽을 때라도 정신이 돌아올 때에는 그 부모 형제가 해 준 봉사나 희생이나 노력에 대해서는 감탄이라 하는 것은 결단코 없습니다.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은반회수라, 은혜를 변해서 원수로 갚는다 하는 것이 정말로 은혜이면 하나님께서 그 은혜의 댓가를 사은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인데, ? 무지한 자기로서는 참 은혜를 베풀었다고 했지마는 실상은 인생을 몰아다가 죽이는 것밖에 안 되고 말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효를 못 하게 하는 것이오. 하나님이 사은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은이 아니요 죽이게 한 그것이기 때문에 못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어떤 정도에 있는 사람이든지 기독자가 예수의 이름으로 자타를 고쳐보려는 이 욕망과 노력과 고친 결과가 없으면 땅위에서 기독자의 행복은 없다. 이것을 등한시하고 원죄와 본죄의 배암의 지식을 많이 넣어 줘 가지고 이 부패한 세상살이를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부패해짐으로 소부패를 대부패가 되어서 삼킬 수 있는 이런 종류의 것으로 자기에게 속한 자를 위해서 봉사했다면 언젠간가 그 사람에게는 배척을 당할 것이요 다 그 사람은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을 여게서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생애는 이런 참 어두운 생애가 많은 우리들입니다.

 

거게 수많은 사람들이 이 병 나은 자 보고 놀라고 기이히 여겨서 쭐쭐 따라다녔지마는 저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았지마는 사렙다 과부에게만 찾아갔다, 문둥이가 많았지마는 나아만에게만 하나님의 치능이 갔다 말씀한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권능으로 병나은 그것 보고 기이히 여기고 놀라면서 거게 주목하고 따라다녔지마는 자신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병을 낫울 욕망도 소원도 없었기 때문에 다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주여 주여 하면서 믿는다고 하지마는 예수님의 인간 치능이, 인간을 고치는 그 능력이 자기와 상관 없는 이런 사람으로, 은총을 입는 기독자를 그저 구경이나 하고 이렇게 다니는 자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오후에 말씀을 다시 증거하는 것은 기독자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고칠 것을 발견해야 되고, 또 고치는 욕망과 노력을 해야 되고, 실지로 고쳐짐이 있는 것,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가기 전에 그가 가졌지 못했던 행복을, 지상의 행복을 밧모섬에서 예수님과 자기와 다른 면을 발견하고 달음질쳐도 못 간다는 그 기절한 거기에서 이제까지 얻지 못했던 행복을 그가 발견했을 것이요 욕망했을 것이요 다소나마라도 그는 죽는 날까지 권태나지 아니하고 피곤치 아니하고 그는 배부른 자와 같이 해이해지지 않고 갈급해서 생생한 생기에서 죽는 날까지 그는 살았을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인간을 고치는 운동 외에는 아무리 봉사해도 마지막에 사람은 뺏깁니다. 자기 사람 안 됩니다. 마지막에는 원수가 될 것입니다. 어떤 걸로 봉사해도 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배은의 세상이라 불효의 세상이라 하지마는 그것이 성경대로는 원리입니다.

 

(축도)

 

주께서 어두운 우리 심령을 다시 깨우쳐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으로 인하여 자기를 고치는 자가 제일 행복되고 형제를 고치는 역사에 참가하는 자가 그다음에 행복되어 예수님으로 치료받는 여기에 세상이 측량 못할 한없는 영원한 쾌락이 있는 이 사실을 모두 체험하고 경험하고 굳게 잡고 이 일에 전력을 기울이는 전생애가 되게 하시고, 있는 힘 다 기울여 봉사하나 마지막에는 다 결렬되고 서로 원망거리와 불평거리 다 상관 없는 자 되어지는 이 사실도 깨닫고 지혜롭게 처세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감화 감동하심이 항상 저희들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설교: 백영희 목사(1982. 8. 22 주일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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