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중표 목사님
선지자선교회
이중표 목사님은 1938년 8월 29일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배가 고파 물로 배를 채우면서도 그의 가슴은 늘 하늘을 품고 있었고 그의 눈에는 어머니의 생명을 담은 눈물이 목회의 생명샘이 되어왔습니다. 또한 그는 역사를 가르치던 스승의 눈물을 보며 조국을 향한 깊은 사랑을 배웠습니다.
목사님은 소년 시절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는 고통 중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주의 종이 되고자 헌신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에 붙들려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수업시간에 "나를 배우라"는 하나님의 감동을 받았고, 이후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실존적으로 살게 하는 별세신학을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목회신학인 별세신학은 한국교회 갱신의 동력이 되어온 한신목회개발원의 사역을 통하여 교회의 담을 넘고 대중화, 모델화, 신학화되어 왔습니다.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목사님의 일관된 별세영성이 수많은 목사들을 일깨워 교회를 살리고 있습니다. 지난 날 하늘을 품었던 마음은 목회 여정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채워졌고 민족을 향한 사랑은 한국민족을 신자화하는 비전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한신대학원과 켈리포니아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였고 1977년 6월 5일 한신교회를 개척하여 지금까지 섬겨왔습니다. 지난 2000년에는 한국기독교장로회 84회 총회장으로서 한국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하여 일하였습니다.
2004년 여름 담관암 수술을 통해 별세사수(別世四修)를 체험하며 모든 삶에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거지로서의 삶을 선언하셨습니다. 별세는 거지(巨智:큰 깨달음)이니 자기를 비우고 거지로 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병상에서 실현되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목사님은 주님께서 주신 은혜의 눈물을 넘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목회,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 부활의 영광과 행복을 누리는 창조적인 별세목회를 이루다가 2005년 7월 7일, 주님의 곁으로 떠나셨습니다.
■ 김명혁목사 ‘故 이중표목사님을 애도하며’
세상에 미친 한국교회의 성도들에게 십자가의 사랑을
작년 10월 18일에 “사랑하는 이중표 목사님” 이란 제목으로 목사님에게 사랑의 글을 띄운 일이 있습니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서로를 좋아하고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전화로 인사를 나누며 목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아이들처럼 반가워 하며 좋아했습니다.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면서 빵 한 조각을 서로 나누면서도 정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무리했습니다.
“사랑하는 이중표 목사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세상에 파묻혀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님과 십자가와 천국을 밝히 보여주십시오. 성 프랜시스에게 주셨던 은혜를 목사님에게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랑합니다.”
저는 오늘 2005년 7월 7일에 다시 “사랑하는 이중표 목사님!”이란 제목으로 목사님에게 사랑과 존경의 글을 띄웁니다.
바로 이틀 전 목사님을 찾아 뵌 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때 저는 목사님과 눈에 눈을 맞추고 목사님의 손을 꼭 붙잡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을 때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라고 하고는 더 이상 기도의 말을 이을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이 가슴과 목에 가득 찼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참 만에 다시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라고 기도를 시작하고는 마치 임종 기도를 하는 것 같은 기도를 드렸지요.
폴리캅과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사나 죽으나 혼탁한 한국교회에 오직 주님 사랑을 순수하게 나타내 보이게 하시고, 오직 십자가의 주님만을 순수하게 나타내 보이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지요. 그리고 순교자들이 고통을 당할 때 그 모든 고통을 제하신 주님께서 이 목사님이 당하는 모든 고통을 제해 달라고 기도를 했지요.
사랑하는 이중표 목사님! 그 동안 수고를 많이 했습니다. 병상에 있던 지난 수 개월 동안에도 십자가의 주님과 별세의 주님을 밝히 증거하기 위해서 모든 정력과 모든 진액을 다 짜 내었습니다.
세상에 미친 한국교회의 목회자들과 신자들에게 십자가의 주님과 천국을 밝히 보여주시기 위해서 작고 세미한 그러나 온유하고 겸손하고 진실한 주님의 음성을 밝히 들려주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저에게는 개인적으로 깊고 심오한 영적 감동과 영감을 전해주셨습니다.
지난 3월 2일 국가조찬기도회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제일 먼저 전화를 건 사람이 바로 이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잘못했습니다” 란 조그만 회개의 기도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 이 목사님은 전적으로 동의하시면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나는 지금 회개할 자격도 없을 정도로 마음이 강퍅해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지요. “이 목사님이 회개할 자격이 없다면 도대체 누가 회개할 자격이 있습니까?” 의인이 너무 많은 지금, 분노와 정죄가 너무 많은 지금, 이 목사님은 지극한 겸손과 온유와 용서와 사랑을 몸으로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이중표 목사님, 편히 쉬십시오. 손양원 목사님과 동인 동신 군이 먼저 가 계시는 천국에서 편히 쉬십시오. 아니 순교하신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과 어머님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아들 철원이도 먼저 가 있는 천국에서 우리 주님을 마음껏 찬양하면서 편히 쉬십시오.
목사님은 2005년 7월 7일 오전 4시 30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동안 별세를 설교하시면서 죽음을 상징하는 4자를 많이 쓰셨는데 (교회 전화는 594-4141, 집 전화는 535-4744),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서 교회와 천국을 상징하는 7자와 관련된 7년(2+5) 7월 7일 7시(4+3)에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조만간 목사님을 천국에서 뵙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2005년 7월 7일 김명혁 목사 드림
■ 국민일보에 게재되었던 이중표 목사님 간증문 중 일부를 발췌한 것
나는 죽게 될 때 병들어 죽었다는 말을 듣는 것이 괴로웠다. 그동안 그토록 순교를 외치면서 살아있는 순교자가 되기를 꿈꾸던 내가 병들어 죽는다는 것이 한없이 슬펐다. 이 몸을 주의 제물로 드리고 죽어야 한다. 살아도 주께 영광이요,죽는다면 그 죽음으로 예수님께 영광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병상에 누워 방문한 이들이 나의 쾌유를 위해 기도할 때 감사했다. 그리고 마음에서는 이렇게 소원했다. “주여,나를 별세시켜 주옵소서.” 수술을 받기 전의 검사도 고통스런 과정이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했으나 그 후에도 시련은 계속됐다. 그때마다 나는 별세를 배우고 체험하는 소원으로 일관했다.
병상에서 성경을 일독하면서 발견한 나의 깨달음은 병들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병이 나은 것은 하나님의 전능과 자비의 영광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을 크게 들어 쓰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나는 이것을 깨달았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별세의 신앙과 그 은혜가 없으면 바르게 살 수도 없고 바르게 죽을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 천국병원에 입원한 환자다. 예수님의 건강인 인격을 회복하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한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할 때 예수께서는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 11:3∼4) 이 말은 나사로가 죽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요,죽음까지 갔다 돌아온다는 뜻이다. 죽고 살아온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아들 예수의 부활 능력의 영광을 본다는 것이다.
고통을 체험하는 병이 있고 죽음을 체험하는 병이 있다. 고통을 체험하면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회개하면 연단이 되어 인격적으로 더욱 성숙해진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아픔을 체험하고 병만 고치고 기뻐한다.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믿음으로 병 고친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그 믿음이 하나님의 큰 영광이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대부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병은 죽음을 체험해야 한다. 그 병에서 죽음을 체험하게 될 때 비로소 별세인 ‘새로운 세상’을 살게 된다.
나사로는 완전한 죽음을 체험했다. 그것은 나사로가 무덤 속에 들어갔고 완전히 육체가 썩어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의 죽음과는 다르다. 무덤은 죽은 자를 매장하는 곳이요,이 세상을 떠난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다. 나사로는 무덤에 들어간 것이다. 나사로는 무덤에서 살아난 자요,병을 고친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난 자이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에서 죽음을 보았고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므로 병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어야 하며 죽음을 체험해야 한다.이것이 바로 ‘종말의 별세’다.
그동안 세 차례나 받은 담석증 수술은 죽는 연습이었으며 무덤에 들어가지 않고 부활을 고백하는 신앙 수련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미 죽음을 선고 받았기에 몸으로 별세를 고백하는 은혜를 입게 된 것이다. 치료의 전 과정에서 주님의 뜻을 거스르고 살아온 죄악을 고백했다. 의사는 암 부위를 제거했으나 나는 내 속에 응고되어 있는 죄의 근원적 치료를 간구했다. 이미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죄사함의 구원은 받았으나 내 속에 뿌리박혀 있는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이 끊임없이 녹아내려야 할 것을 조용히 고백하며 눈물로 회개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나는 지금 방사선 치료대 위에서 다윗의 시편을 암송하며 눈물을 흘린다. 이것은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한 은혜의 길이다. 이 눈물이 내 심령을 성결케 하고 있는 것을 느끼며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나는 태생적으로 눈물을 먹고 태어났다. 눈물 많은 어머니에게서 눈물을 받아먹고 자랐고 선생님의 눈물까지도 나의 눈물이 되어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배웠다. 신학교에 다니면서는 민족을 생각하며 울었고 목회를 시작하고서는 주님을 생각하며 많이 울었다. 성도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흘렀고 믿지 않는 이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이 쏟아졌다. 이렇게 많은 눈물이 가슴에 흘렀고 빗물처럼 쏟아지는 눈물은 땅을 적셨다. 내 사명이 있는데 세상을 떠나면 교회는 어떻게 될까. 걱정이 많았다.
내 아내는 겉으로는 약해 보이지만 속은 강인한 여인이다. 그 강한 심성 때문에 나는 평생 아내의 도움을 받고 살아왔고 아내의 굳은 심지에 의지하여 목회도 해왔다. 그러나 이번 일에는 아내가 너무 약한 모습을 보였다. 내가 암 진단을 받았을 때 그 명랑한 아내의 얼굴에서 빛이 사라졌다. 그리고 불면증에 시달렸다. 아내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의식이 혼미했고 몸은 방향을 잃은 것처럼 흔들거렸다. 나보다 먼저 쓰러질 것 같았다.
나도 밤이면 병상에 누워 혼자 식구들을 생각했다. 살아오면서 사랑해주지도 못했고 그저 목사라는 명분으로 내 뜻대로 살아준 아내를 생각하니 눈에서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다. 고마운 여종,별세의 4수(4修)를 초조와 불안으로 겪어야 했던 아내를 생각하니 내가 내놓을 수 있는 것은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눈물뿐이었다.
나는 네번이나 쓰러져 병상에 누웠으니 건강한 몸이 아니었다. 늘 지친 몸으로 끌려 살았고 이번에도 병상에 눕기까지 어느 하루 편안함이 없었다. 목회 사역도 지친 몸을 일으키고,눕고의 반복이었으며 집회도 말씀 전하는 시간만 서 있고 그 외 시간은 누워 휴식해야만 했다. 이게 무슨 아내의 남편이며 아들의 아버지이겠는가. 가족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에 울고 울었다. 그래도 목회는 어느 정도 성실하게 한 것이 내게는 기적 같은 일이다. 약한 몸으로 다른 일은 다 포기하고 교회만 위해 살게 한 것이 은혜였다. 그 감사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부모에게 불효한 죄인,아내에게 잘못된 남편,교인들에게 사랑없는 목자,주님 앞에 불충한 종,후배들에게 좋은 본이 되지 못한 선배…. 눈을 감으니 60여년의 생애가 주마등처럼 스쳐가면서 눈물만 흘러내렸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는 울지 않기로 했다. 수술을 받고 퇴원하기까지 나는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이것은 주님께 시종일관 드린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다.
“주님! 제가 아무리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더라도 교인들 앞에서 이제 더 이상 울지 않게 해주세요. 평소에 눈물 많은 종이 울면 약해 보입니다. 오직 평안한 마음 주시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이 기도에 응답하여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거두어주셨고 담담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게 하셨다. 입원 기간 내내 8시간 이상 평안히 잠을 잤다. 뿐만 아니라 이번 4수에서는 눈물이 그쳤다. 죽음을 담담히 맞아들이기로 생각하자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도리어 죽을 수 있음에 감사할 수 있었고 죽음 앞에서 한없는 자유를 누렸다. 이미 별세한 사람이 죽음을 앞에 놓고 울 까닭이 없다. 죽은 자는 울지 않는다. 별세의 4수는 나로 하여금 울지 않는 죽음을 배우게 하였다. 나는 내 몸에 죽음의 사자로 찾아온 암을 두려워하거나 적대시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암이 나를 죽음으로 데려갈 적군으로 여겨지지 않고 친구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이렇게 암에게 속삭여주었다.
“네가 내 몸을 찾아주어 고맙다. 나는 별세를 배우는 하나님의 종이요,별세의 수련생이다. 내게 별세를 가르쳐주는 좋은 친구가 되어 주렴.”
암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다. 내 마음은 더욱 자유롭고 평화로워졌다.
인간의 본능 가운데 대표적인 3대 본능이 식욕 소유욕 명예욕이다. 나이가 들면 식욕도 쇠한다. 그래서 밥맛이 없다. 소유욕도 의미가 없다. 나이가 들면 소유가 부담이 된다. 그래서 힘겨워 빨리 인계하고 은퇴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꼭 하나 끝까지 남아 죽을 때까지 유지하려는 본능이 있으니 그것은 명예욕이다. 명예욕은 생존의 욕구와 같다.
예수님의 광야시험은 인간의 3대 본능의 시험이었다. 먼저 식욕의 시험이었으며 두번째는 눈으로 보는 소유의 시험이었고 마지막은 인간의 최후의 명예욕의 시험이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희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셨느니라”
우리 조상 때부터 물려진 제사문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죽으면 그만인 것을 자손들에게서 절 받으며 자기 이름 석자를 후손들 가슴에 남기려는 것이다. 아들을 선호하고 자녀를 두려는 인간의 본능은 그 명예욕에 근거하고 있다. 로마의 황제가 신이 되어 예배를 받는 신상을 만들어놓은 것은 인간의 명예와 탐욕의 허상이었다.
“사탄이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 가로되…” 그 산에 천하만국이 어디 있는가? 예루살렘을 본다 해도 헤롯이 지배하는 나라의 궁전일 뿐이었다. 예수님에게 보여준 영광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요,눈으로 보이지 않는 내적인 것이다. 천하만국의 영광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 가운데 있는 하늘처럼 높아지려는 교만한 탐욕이다. 장차 이 세상 나라가 모두 주 앞에 드려질 것이니 천국만이 천하만국의 영광일 뿐이다.
나는 어린 시절이나 지금이나 일반적인 명예심은 없다. 그래서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고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지금도 내 이름 석자를 사상 희생 업적 죽음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다. 그런 명예심 때문에 별세신학을 남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나의 정체성을 아신 주님이 손을 쓰신 것이다. 그런 내게 별세는 내 영광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임을 깨닫게 했다. 진정한 별세는 영광을 십자가에 못박고 자기를 죽이고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이다.
나는 14시간의 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에 돌아와 주일을 맞았다. 면회시간에 교인 몇 명이 들어와 목사님의 수술이 잘되었다고 교인들이 축제 분위기라고 전해주었다. 순간 내 속에서 ‘4수하는 종에게 축제 분위기라니…’라는 말이 떠올랐다. 별세4수에 들어온 종에게 축제라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날 밤 참으로 무섭고 떨렸다. 눈을 뜨나 감으나 사탄이 나타나 나를 사로잡아 캄캄한 어둠속으로 끌어가려 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물러가라”하고 외쳤으나 물러갈 생각도 않고 큰 용이 내 몸을 휘감을듯 달려들었다. 나는 위기를 느끼고 살려달라고 외치고 외쳤으나 응답 없는 흑암이었다. 헛소리와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내 모습을 보고 간호사가 위로했다. 그러나 사탄과 나의 싸움을 저들이 알 길이 없었다. 몇 시간이 지난 후 하늘로부터 천둥 번개가 치면서 빛이 내리고 “축제를 못박아라,영광을 못 박아라”는 음성이 우레처럼 들렸다. 그리고 사탄은 완전히 사라졌다.
“종아,네 교인들은 나를 모르고 너를 모른다. 너는 나와 함께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 그리고 별세의 축제를 이루어 천하만국을 살려야 한다. 천하만국은 예수님의 아들 예수의 하나님 나라다. 네가 십자가에서 나와 함께 죽고 사는 별세에 이르면 천국의 보좌가 네 마음에 닿아 하늘과 땅이 천국이 될 것이다.”
나는 그날 밤 살아났다. 그리고 하늘이 열렸다.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밤인지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 이것이 바로 영적 전쟁인 것을 나는 그날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중환자실에서 두 번 째 밤을 맞이한 날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교인들, 그리고 이 종을 섬기는 여종들이 찾아왔다. 한 여종이 곁에 와서 아들이 영국 유학을 빨리 떠나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여종의 아들은 나를 수행하는 보좌사역자로 2년간 동행한 후 영국으로 유학하게 돼있었다. 아픈 목사님 곁을 떠날 수 없다고 하는 아들에게 수술이 잘되었으니 염려하지 말고 떠나도록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 나는 죽음의 계곡을 헤매었다. 그들이 돌아간 후 심리적 불안감 때문이었는지 내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얼마나 위험한 단계였는지 모른다. 중환자실의 이동식 기계로 초음파촬영 CT촬영 X선촬영 등 수없는 검사가 계속되었다. 열이 오르고 심장이 요동치는 등 고통스럽고 불안한 시간이 새벽까지 계속되다가 잠시 잠이 들었다. 그때 주님이 깊은 은혜를 남겨주셨다. 마태복음 20장 21∼23절 말씀이 환상 중에 나타났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이 말씀을 예수님은 이 종을 향하여 들려주고 계셨다. 나는 예수님이 주시는 잔을 마시도록 부르심 받은 종이요,내 곁에도 이 잔을 마실 자가 있어야 한다. 우리 주님은 “이 잔을 마시는데 관심이 없는 자는 수종도 아니요 수행도 아니요 섬김도 아니니 다 떠나게 하라 떠나게 하라 떠나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일절 교인과 친구들의 면회를 거절했다. 면회도 위로가 되지 못했고 주님은 나와 함께 주님이 주시는 별세의 잔을 마시는 자가 친구요 동역자요 형제인 것을 알게 하셨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마 12:50)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십자가에 죽고 부활케 하는 것이요,아들의 뜻은 아버지에게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나는 예수님이 주시는 잔을 나의 잔으로 받아들이는 제자가 되고 싶었고 나의 좌?우편에도 주님의 잔을 마시려는 형제요 자매,동역자를 찾게 되었다. 지금 내게는 떠나야 할 내적인 문제와 외적인 환경이 있다. 그리고 떠나보내야 할 사람이 많다.
아스니우스는 궁정학자로 왕자들의 가정교사였는데 평소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고요한 시간에 골방에서 기도를 하던 중 그는 내면으로부터 들리는 하나님의 응답에 귀를 기울였다.
“떠나라,침묵하라,그리고 기도하라!”
하나님의 응답에 순종하기 위해 그는 즉시 항구로 나가 몰래 배를 타고 알렉산드리아를 가로질러 곧장 사막으로 들어갔다. “주님, 내가 말씀에 순종하여 세상으로부터 떠나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는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꿇어앉아 주님께 기도했다. 그러나 내면의 소리는 여전히 떠나라는 음성만 들려왔다. 그는 한동안 그 말이 담고 있는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어 고민하며 기도하다 마침내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떠나라는 뜻임을 깨달았다. 그는 먼저 세상의 집단의식으로부터 떠났다. 떠남은 고독을 낳았다. 그 고독 속에서 말과 생각이 없는 침묵을 배웠다. 떠남을 통해 그는 새로운 영성을 얻는 신비를 체험했다.
사람이 병들면 떠남의 신비를 배운다. 사람 물질 명예 소유도 떠난다. 애인도 떠나고 심지어 가족도 떠난다. 병든 목사에게는 교인도 떠난다. 다 떠나게 된다. 저들이 떠나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면 병든 인간의 비참함을 슬퍼하고 절망하게 된다. 그러나 자기가 먼저 떠나면 떠남의 신비를 체험케 된다.
나는 병상에서 사람을 거절했다. 그리고 혼자 떠나는 별세를 체험키로 했다. 혼자 천국으로 향하여 예수님과 그 길을 걷기로 했다. “떠나라,떠나게 하라,떠나보내게 하라.” 이 음성이 지금도 내 귓전을 울린다.
별세의 4수(四修)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던져주신 키워드는 ‘삶과 죽음’이었다. 수술을 전후하여 삶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였다. 별세신앙의 시각에서 삶과 죽음이란 무엇일까?
진단을 기다리면서,수술을 앞두고,수술에서 깨어나서,수술 후 더딘 회복 과정에서 계속 삶과 죽음을 묵상했다. 별세의 4수에 이르러서야 나는 삶과 죽음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세계인 것을 묵상하게 됐다. 생각해보면 3수(三修)까지의 별세시험은 살아서 죽는 것이요,‘죽음 없이 죽는 연습’이었다.
모리아 산에서 이삭은 결박을 당한 채 죽음의 위기를 체험했다. 직접 죽음을 겪지는 않았다. 이삭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숫양의 희생을 통해 죽음의 의미를 간접 체험한 것뿐이었다. 3수까지의 별세 수련은 이와 같이 죽지 않고 죽음을 배우는 것이었다. 무덤에 들어가지 않은 채 부활의 은혜를 받는 것이었다. 세 번 쓰러졌어도 죽는다는 실감은 없었다. 그러나 이번의 4수는 달랐다. 실제 죽음을 예감하며 수술에 임했다. 수술은 50% 가능성을 가지고 시작한 것이었다. 수술이 빨리 끝나면 포기한 것이요, 수술이 길어지면 희망이 있는 것이라고 했다.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가족과 장로님들은 10시간이 넘어갈 때 안도의 숨을 쉬었고 성도들의 강렬한 기도는 하늘에 치솟고 있었다. 긴장의 시간이었다. 죽음을 실감하며 수술에서 깨어났다. 삶과 죽음을 넘나들고 있었다. 삶이 있는 죽음, 죽음을 경유하는 별세수련의 과정이었다. 죽음으로 죽는 참 죽음의 연습이요, 죽음으로 삶을 실감하는 수련이었다.
감히 예수님의 생애 사건과 비유하자면 지난날 3수의 별세시험은 광야에서의 시험이었다. 그에 반해 이번 4수는 겟세마네를 거쳐 갈보리에 이르는 시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출발하실 무렵 광야에서 겪은 세 가지 시험은 육체적 생명을 지닌 채 자신 안에 일어날 수 있는 욕망을 죽이는 시험이었다. 그러나 겟세마네의 시험은 갈보리에서 직접 죽어야 하는 시험이었다.
진단과 수술 과정에서 나는 죽음의 실체를 보았다. 죽는다는 문제를 실감했다. 온통 죽음에 대한 묵상이 나를 지배했다. 별세의 사수는 넉 ‘四’자의 ‘四修’일 뿐 아니라 죽을 ‘死’자의 ‘死修’였다.
그러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 별세 4수의 시험을 통해 받은 하나님의 은혜는 실로 큰 것이었다. 그것은 생명에 이르는 죽음이요, 삶을 얻는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자에게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는 자에게 삶이 있다. 나는 수술을 금요일에 마치고 중환자실에서 금요일 오후부터 토요일을 거쳐 주일을 맞았다. 머릿속에서 의식이 살아났을 때는 수없는 별세의 말씀이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기록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런 기도를 했다.
“주님이 감동과 은혜의 말씀을 이 종의 머릿속에 입력하사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순간순간 떠오르게 하옵소서.”
그러나 그 신비한 말씀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살아야 할 목적을 여기에 두고 살았기에 잊는 순간 ‘나는 죽는구나!’ 괴로워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삼층천의 환상은 하나도 보여주지 않았다. 내 기도가 평소에 부족했고 내가 가진 신학이 나를 천국으로 올리는 것보다 천국을 지상에 끌어내리는 데 힘쓴 때문이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모합니다. 주님과 함께 천국에 있기를 원합니다. 나를 데려가 주옵소서.”
소원해도 전혀 응답이 없었다. 수술 후 사흘째 되던 날,눈을 감고 잠을 자려는데 내 마음과 영이 하늘로 떴다. 강력한 별세의 말씀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별세의 은혜는 삶과 죽음이 하나인 것을…. 낮이 있어야 밤이 온다. 밤이 지나면 낮이 온다. 그러므로 낮과 밤은 구분할 수는 있으나 하나의 시간 속에서 만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었기에 삶과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도 주의 생명이요, 죽어도 주의 생명이니 사나 죽으나 주의 생명일 뿐이다.
내가 별세4수의 수련을 통해 받은 은혜는 사는 것도 영광이요, 죽는 것도 영광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는 것은 영광을 위해서라고 고백하면서 죽음을 영광으로 보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보지 못했다. 죽기 싫으나 죽었고 억지로 죽었을 뿐이다. 병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믿는 것이 좋은 믿음인가?
죽음에 직면하면서 내가 깨달은 첫 번 째 진리는 죽음이 영광이라는 것이다. 죽음을 두고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돌아가셨다고 표현한다. 여기에는 죽음에 대한 철학적 개념이 담겨 있다. 죽는다는 것을 돌아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죽음을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데려가신 사건으로 신앙고백 한다. 소천(召天)으로서의 죽음이다.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에 천국으로 갔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죽음에 대한 보편적 인식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을 영광에 이르는 길로 보셨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고 말씀하셨다(요 12:23).
예수님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순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순간이요,그 영광에 이르는 기회로 여기셨다. 예수님은 자기 죽음을 통해 영광의 본체이신 하나님과 다시금 하나가 된다는 것을 확신하셨다. 별세신앙의 사람 사도 바울도 예수님의 그 죽음에 대한 이해를 공유한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 5:8)
사도 바울은 생명을 중하게 여겼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별세신앙의 시각에서 죽음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나의 결론은 죽음이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죽음에 직면하여 얻은 결론이다. 과거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어떻게든 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온 죽음의 위기 앞에서 내 생각은 달라졌다. 죽음의 위험 부담을 안고 수술에 들어갔고 죽음으로부터 일어나듯 수술에서 깨어났다. 죽음을 가까이 경험하면서 죽음으로부터 살아나지 않는다 해도 죽음은 그 자체로도 영광이었다.
죽음은 생의 완성이다. 생을 마감하는 죽음의 시각에서 내 뒤를 돌아보니 지금껏 살아온 생애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18세 어린 나이에 폐결핵에 걸릴 만큼 연약했던 내가 생명을 오늘까지 유지하고 살아온 것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이제 그 생애를 마칠 수 있다면 영광이다. 지금까지 산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많이 살았다. 더구나 목양 40년, 주의 종으로서의 세월은 과분한 은혜의 향유였다. 하나님은 그 오랜 세월 섬긴 교회마다 한결같은 은혜를 주셨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게 하셨고 감동으로 말씀을 대언하게 하셨다.
그토록 많은 눈물을 흘리며 살아온 생애는 목사로서 너무 행복한 인생이다. 지금 죽는다 해도 영광일 따름이다. 더 이상 인생을 산다고 해도 이미 살아온 시간의 단순한 연장일 뿐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이미 족하다. 하나님이 주신 절대적 사명은 이미 수행했다. 지금까지 살아 숨쉬고,뛰고 달리며 일해온 기회를 가진 것만으로도 영광이다. 내 마음은 지금 곧 죽음이 다가온다 해도 한없이 평안할 것 같았다.
손수 개척해 지금까지 혼신의 열정을 기울인 한신교회의 목양사역도 하나님께서 마치게 해주시는 시간이 가장 적절한 때라는 믿음이 왔다. 내 할 일은 다 끝난 것으로 느껴졌다. 성도들은 내가 없어도 이제 다른 목자를 통해 은혜 받으면 될 뿐 걱정할 것이 없다는 여유가 생겼다. 다만 홀로 남을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홀로 남은 아내조차 하나님의 은혜로 살다가 주의 품으로 돌아오겠지 하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죽음을 영광으로 여기며 담담하게 맞아들이자는 생각에 이르자 생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해방됐다. 내 마음은 새처럼 자유롭게 비행(飛行)을 시작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직면하게 하시고 죽음이 행복이 된다는 은혜를 깨우쳐주셨다. 그동안 나는 별세 신앙과 진리를 말했지만 죽음과 친밀하지는 않았다. 멀리 있는 죽음을 굳이 먼저 앞당겨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셈이다. 그동안 내가 별세를 말할 때 그 별세는 종말적 죽음이 아니요 자기부인으로서의 죽음이었다. 이 세상 것을 향한 육신의 정욕을 쳐서 죽이는 것, 안목의 정욕을 부인하는 것, 이생의 자랑에 대한 유혹을 부정하는 자기 죽음이었다.
이것은 살아서 자기를 죽이는 별세였다. 이 점에서 나는 부단히 정진했고 어느 정도 성과도 거두었다. 그러나 실제로 죽는다는 것은 실감해보지 못했다. 죽음의 문제를 무의식속에서 마냥 미루어두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별세 4수(四修)는 실제적인 죽음이 아주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가까이 있음을 상기시켜주었다. 죽음이 내 곁에 매우 가까이 있었다. 상황은 죽음에 대한 자세를 분명히 요구하고 있었다. 죽음은 현재 여기서 맞이하는 나의 실존적 문제였다.
나는 결코 염세주의자가 아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삶을 즐거워한다. 비록 가난하게 태어났어도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하신 부모님께 감사했다.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태어나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것에 감사한다. 육신의 몸을 입었기에 속죄의 은총을 입고,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으며,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이러한 은혜의 기회를 주신 것을 생각하면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신앙적으로 타계주의자도 아니다. 이 세상은 질고와 고통뿐이며 영원한 행복은 다가오는 내세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주어진 삶 속에서 천국을 누려야 하고 이 세상 삶 속에서 최선을 다할 때 그 영광, 그 행복이 영원한 소망에 이른다고 여겼다.
그렇다고 죽음을 예찬하는 신비주의자는 더욱 아니다. 일부러 고행을 통해 자신을 괴롭히고 서서히 죽여가며 거기서 특별한 은혜를 체험한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별세의 신앙은 오늘의 삶속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주장한다. 그 삶을 하나님께 영광스런 것으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행복한 것으로, 그리고 다른 이들을 유익하게 하며 세상을 살리는 삶으로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제 내게 더 이상 육신의 삶을 살 수 없는 그 때에, 죽음이 바로 코앞에 다가온 그때에 그 죽음에 대해서 신앙고백을 강요하고 있었다. 결론은 죽음은 행복하다는 것, 죽음과 친구가 되어야겠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죽음을 불행한 것으로 생각한다. 죽음을 하나님의 저주요 심판의 결과만으로 받아들인다. 죽음을 가져오는 것은 사탄의 사자요, 죽음을 지배하는 것은 악의 세력이라고 여긴다.
사람들은 죽음은 인생의 끝이요 완전한 종말로 생각하며 두려워한다. 죽음은 되도록 지지 않아야 할 수고로운 짐이요, 벗어버려야 할 고난으로 생각한다. 세상 사람들이나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죽음은 자신의 적일 따름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를 동정했다. 65세의 나이에 죽는 것은 너무 이르다고 아쉬워했다. 고생만 하고 죽어서는 안 된다. 더 살아서 좋은 날을 누리라고 격려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살아온 날들이 행복했고 앞으로 더 사는 것에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도리어 죽음의 행복을 꿈꾸었다. 가까이 다가온 죽음과 대면하면서 죽음조차 친구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죽음도 감사하다. 오래 산다고 반드시 좋은 것일 수만은 없다. 편안한 날을 얼마 더 산다한들 더 좋을 것도 없으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를 데려가시는 그 순간이 가장 적당한 때인 것이다. 그러니 죽음도 행복인 것이며 죽음 앞에서 감사를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예수를 믿고 별세신앙으로 행복을 설교했다. 지상 천국의 행복은 외쳤으나 내세 천국은 자신이 없었다. 죽음 너머의 세계이기에 마음에 큰 부담이었다.
나는 수많은 성도들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믿음 좋은 사람들은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양극이었다. 하나는 죽음을 사탄이 주는 저주로 받아들이면서 죽음을 이기고 믿음의 승리를 부르짖었다. 믿음은 병마와 싸워 이기는 능력이요, 기도는 병마를 추방하는 방편으로 신앙고백하면서 부르짖고 살기를 소망했다. 살려는 의지가 자랑스럽고 그 믿음이 부럽기도 했다. 또 하나는 괴로운 세상 더 살아 무엇하느냐. 죽기를 원한다고 고백했다. 이 사람은 괴롭고 죄 많은 세상을 떠나는 죽음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믿음도 없고 저런 믿음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죽음을 천국의 주님께 친구로 데리고 가고 싶었다.
나는 오랫동안 하늘과 땅을 구분하며 생각했다. 하늘은 높고 거룩한 곳이요, 땅은 낮고 죄 많은 인간이 사는 세계로 여긴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하늘과 땅은 분리할 수 없는 세계로 하늘은 땅이 있어야 하늘이요, 땅은 하늘이 있어야 땅이었다. 삶과 죽음도 분리할 수 없는 경지로 나를 이끌어 갔다. 살아있는 자에게 죽음이 있으며 죽을 수 있는 자에게 또한 생명의 보장이 있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은 함께 살고 함께 죽는 친구인 것이다. 삶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죽음도 참으로 행복한 것이다. 별세의 행복은 삶과 죽음의 행복이요, 천국에 닿은 행복이다.
이 세상 삶 속에서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가 오는 것이 당연하고 또한 아름답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에게는 양들을 위한 희생이 기쁨이셨기 때문에 기꺼이 십자가 죽음의 길로 나아가셨다. 예수님은 마음에 아무 근심 없이 행복한 마음으로 죽음을 넘어 하나님 아버지의 처소로 들어가셨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넘어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큰 기쁨의 길이라 말씀하셨고 그 기쁨을 제자들과 함께 나누어 가질 것을 소망하셨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통해 택하신 백성들이 구원을 받는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에 십자가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별세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죽음은 행복의 길이다.
성 프란체스코는 그의 죽음을 이렇게 노래했다.“그가 오면 즐겨 맞으리, 자매 되는 죽음이여!”그리스도와 연합된 프란체스코에게 죽음은 자매였고, 노래의 주제였다. 그의 제자들이 “방안에서 노래 부르며 악기를 뜯고 있으면 저들이 성자라는 생각을 버릴 것입니다”라고 간청할 정도였다. 이에 대해 프란체스코는“성령의 은혜로 나는 하나님의 품속에 들게 된다. 나는 하나님의 기쁨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고 대답하였다. 프란체스코는 1226년 10월3일 드디어 죽음의 순간을 맞았다. 그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형제여, 가서 재를 가져 오시오. 그리고 그것을 내 몸에 뿌려주시오.” 한 형제가 접시에 담아온 재를 그의 몸에 뿌리자 재를 온몸에 뒤집어쓴 프란체스코는 조용히 말했다.“조금 있다가 나도 티끌과 재로 되어버리겠지.”프란체스코는 재를 뒤집어 쓴 채 움막에 누워 계속 기도하다가 죽음을 맞았다.
죽음은 결코 불행한 것만이 아니다. 죽음의 최종적 주권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 프란체스코가 죽음을 자매처럼 맞아들인 것처럼 나도 죽음을 친구로 맞아들이기로 마음을 정했다. 병상에 누워 죽음에 대한 묵상이 이에 이르자 마음에 한량없는 평화가 임했다. 수술 시간이 다가와도 평안히 잠들었다. 밤마다 잠에 드는 것을 죽음에 드는 것으로 여기면서 평안히 안식에 들어갔다. 하나님께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거둬가시고 안식의 확신을 주신 까닭에 매일 충분한 숙면을 취했다.
병의 진행은 죽음에 이르고 있는데 내 마음에는 도리어 자유가 왔다. 지금껏 살아온 세월은 이미 죽어온 세월이고 앞으로 죽는다 하여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원히 살 것이다. 죽는다면 기꺼이 죽으리라. 죽음의 순간이 온다면 이 세상을 기꺼이 떠나리라. 죽으면서도 이 땅을 떠나지 못하고 이 땅의 것을 버리지 못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별세가 헛된 것이요, 그 안에서 살아온 생애가 헛된 것이 될 터이다.
목회에 성공하고 그 많은 성공 때문에 죽지도 못하는 경우를 본다. 영원을 증거할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지 못해 방황하고 있는 사탄의 후예들이 많다. 제대로 죽지도 못하는 것이다. 세상일을 잊지 못하여 떠나지 못한다면 죽은 사람이 아니다. 나는 죽을지도 모를 수술을 앞두고 이 세상의 일에 대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내 아내는“당신 죽으면 교회는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했다. 자기가 자원해서 개척한 교회이니 애착이 얼마나 크겠는가. 어느 것 하나 그 사람 없이 된 일이 없었으니 그 마음이 어떠하랴!
나는 이렇게 말했다.“죽은 자는 걱정하지 않는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나는 죽은 자이다. 죽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어떤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별세를 가르쳐 주신 우리 주님 앞에 내 할 일이 아닌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별세는 미련 없이 떠나는 것이요, 뒤돌아보지 않고 죽는 것이다. 그냥 담담히 수술에 임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난다면 이후의 일은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진행하실 것이었다. 육신의 생명이 죽는 순간 사역에 대한 집착도 끝나야지 그렇지 못한다면 죽고도 죽지를 못하는 것이다. 기꺼이 죽음을 맞이할 때만 그 죽음이 생명을 살리는 죽음이 될 것이었다. 나는 자유로운 마음, 사는 것에 대한 기대를 포기한 채 수술에 임했고 이제는 죽음에서 일어섰을 뿐이다.
내게는 어린 시절 성장하면서 나를 교훈하거나 간섭하여 나를 지도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노 터치(no touch) 인생으로 길을 걸어왔다. 우리 부모는 가난한 농촌생활에 시달려 아들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초등학교를 다녀도 어떻게 다니는지 묻지도 않았다. 폐결핵으로 각혈을 하고 창백한 얼굴에 병색이 짙어도 어디 아프냐고 묻지 않으셨다. 내가 군에 입대하는지, 내가 어떻게 결혼하는지 전혀 노 터치였다. 그것은 아무도 터치하지 않는 인생으로 살게 했고 결국 우리 주님의 고귀한 터치인 별세를 배우는 인생이 되게 했다.별세는 이 세상을 노 터치하는 최고의 삶의 자세다.
가을이 되면 나뭇잎은 나무에서 떨어짐으로써 그 나무를 살리고 토양을 살린다. 잘 익은 감은 나무에서 떨어짐으로써 나무를 살리고 씨앗도 살린다. 떨어질 때가 되어서도 떨어지지 못하는 나뭇잎과 열매는 살아있는 것이 영광이 아니요 도리어 수치인 것을 새삼스럽게 체감한다. 하나님은 별세 4수(四修)를 통해 완전한 자기 죽음으로 나를 끌고 가신다.
나는 그 손길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그 손을 꼭 붙들려 한다. 이제 완전한 별세의 은혜를 받기를 원한다. 이민은 했으나 마음을 고국에 두고 온 사람은 이국에서 향수병에 시달린다. 아직 이민하지 못한 사람이다. 나의 별세신앙도 죽음을 직면하고 돌아보니 온전히 이민하지 못한 임시 거류민이요, 천국의 불법 체류 자였음을 느낀다. 몸도 마음도 온전한 천국의 이민자, 온전한 별세신앙의 사람이 되기를 서원한다. 나는 이제 주님이 불러 세운 주의 종의 소명의 단계를 지나 천국에서 파송된 자로 남은 생애를 살고 싶다.
그러나 그것도 주님께 맡기고 살아가리라. 나는 죽음의 터널을 통과하여 생명이 연장되면 연장되는 대로, 이 세상을 떠나면 떠나는 대로 내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직접 일하실 것이다. 내가 마음을 비워 온전히 버리고 떠난 만큼 나를 통한 하나님의 일은 새롭게 될 것을 기대하고 싶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영원에 이르러 하늘과 땅에서 살아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그리스도 안의 생명이 되기를 소원한다.
별세신앙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은혜에 대한 신앙이다. 일반적인 구원의 신앙은 절대적으로 예정된 것을 때가 되어 받는 은혜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은혜다. 별세4수 가운데 도달한 세 번 째 진리는 죽음의 살림이라는 역설이다.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으로 죽는다.
그러나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에게는 생물학적 죽음이 도리어 생명으로 사망을 삼킨 사건이 된다. 담관 암이라는 생사를 예측할 수 없이 위험한 수술 앞에서 나는 별세신앙의 진리를 더욱 깊이 묵상할 수밖에 없었다. 결론은 죽음이 꼭 죽음인 것은 아니며 도리어 생명일 수 있고 살림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고 있다면 죽음이란 부활생명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절차요 관문일 따름이다.
그동안 별세를 외쳐오기는 했지만 내 속에는 죽지 않고 이 땅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으려는 소원이 많음을 나는 깨달았다. 개인적인 욕심과 욕망은 많이 죽이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대의명분을 앞세워 죽이지 못하고 있던 것들이 많음을 발견했다. 주님을 위하고 교회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사역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고상한 목표를 내걸고 이생의 자랑스런 탐욕이 너무 많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것은 육신의 정욕이나 안목의 정욕과는 다른 것이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은 일반적인 것이요 윤리적인 것이다. 그러나 신령한 것과 성스럽게 살려고 하는 종들 속에 감추어진 악은 하나님의 것을 사유화하려는 탐욕이다. 이것은 아무도 모른다. 성자는 성스러운 사기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안에 죽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눈앞으로 닥쳐온 죽음을 실감하면서 별세 시험을 네 번 째 수련하면서는 대의에 속한 공적인 욕망조차도 죽어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살아서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 사는 생명의 사역이 최대의 과제로 나를 사로잡았다.
살려고 치르는 시험은 세상에서 영광을 얻는다.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긴 자가 영광을 누린다. 그러나 별세의 시험, 죽음으로 치르는 시험에서는 하나님이 영광을 얻는다. 죽음은 사탄의 최종적 시험인 까닭이다. 사탄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한 생애를 잘살 것을 기대하실 뿐만 아니라 한 생애를 잘 마감하기를 원하신다. 별세의 시험은 하늘과 땅을 하나로 통일하는 시험이요 삶을 죽음을 통해 영생으로 이어가는 시험이다.
생명은 생명이요 죽음은 죽음인 것이 아니다. 위대한 영성가 헨리 나우엔은 ‘여기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란 저술에서“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삶과 죽음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하늘만 거룩한 곳이요 땅은 죄된 곳인 것만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으셨다. 완전히 죽은 자에게만 다시 사는 생명이 있다. 그리고 수많은 열매를 맺는 씨앗이 된다. 이것이 부활이다.
나는 별세에 미친 사람 같다.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살려달라고 기도해야 마땅하거늘 별세시켜 달라니 이 기도가 살자는 기도인가 죽자는 기도인가. 살아도 별세, 죽어도 별세, 병들어도 별세, 건강해도 별세. 별세로 잠을 자고 별세로 날이 샌다. 별세로 해가 뜨고 별세로 해가 진다.
별세의 신비를 깨달은지 20년.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께 땅에 엎드려 절을 했고 그 신비에 놀라 감탄하고 너무 감사해서 울고 또 울었다. 나는 별세를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같다. 이것을 깨닫고 나니 사는 것이 신비요 눈물이요 감탄이다.
우리 부모가 태중에 잉태함이 별세의 신비요, 어린 아기가 볏짚 오라기를 잡고 울음을 터뜨릴 때 그것이 별세의 눈물이다.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배가 고파 물로 배를 채우고 잔디밭에 누워 하늘을 우러러보며 “물로 배를 채웠으나 가슴은 하늘로 채워다오”하던 어린 소년의 꿈이 하늘을 끌어내려 땅에 닿게 하는 별세의 꿈이 아니었던가?
내가 청소년이 되던 어느 날,달빛이 밝은 밤에 길을 걷다가 숨을 쉬는 것이 하늘을 마시는 것이요, 하늘을 마시므로 살고 있다는 놀라운 신비를 깨달았다. 이 몸은 땅에 있으나 하늘을 마시고 있으니 하늘과 땅이 따로 있음이 아니요, 하늘이 내 안에 있고 내가 하늘 아래 있으니 하늘과 땅,하늘과 내가 하나가 되는 신비에 놀랐다.
신학교에서 수업하던 중 내 심령 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종아,너는 지금 무엇을 배우고 있느냐”저는 조용하게 대답했다.“신학이옵니다.”질문은 계속되었다.“신학이 무엇인가?” “주님,신학(神學)은 하나님을 배우는 것이옵니다”라고 즉시 응답했다. 이때 강력한 음성이 나를 사로잡았다.“너는 신학을 나에게 배워라.” 한국의 석학들이 교수로 있는데 신학을 하나님께 배우라니 그것은 청천벽력이었다.
“주님, 하나님을 아는 신학을 배우게 하옵소서.” 기도할 때 섬광처럼 스쳐가는 말씀이 있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배우라”(마 22:29) 하나님 신학을 배우는 원리가 멍에에 있었다. 그때부터 멍에의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유대 땅에는 멍에 속에 두 마리 나귀나 말이 짐을 나르고 일을 한다. 그것처럼 스승이신 예수님과 내가 한 멍에를 메고 배우라는 것이었다. 나는 박수를 쳤다. 영광의 박수를 쳤다.
“바로 이것이다.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 교수를 배워서는 안 된다. 예수를 배워야 한다. 교수 신학이나 교수 점수를 따서는 안 된다. 성서를 공부하고 기독론을 배워도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지 않으면 다 이론이요, 헛된 공론이다.”
예수 배움이 신학이요, 예수를 배우는 사람이 신학생이요, 예수를 배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교회 아닌가. 그렇다면 예수 멍에를 메고 배우고 살자. 나는 그날 이후 이렇게 결단했다. 그 멍에는 곧 십자가다.“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자. 별세는 낮에도 신비하고 밤에도 신비하다. 별세는 사나 죽으나 신비한 진리다.
나는 예수에 미친 사람이다. 내가 생각해도 미쳤다. 남들이 보아도 미친 사람이다. 나는 예수 믿고 예수께 미쳤다는 말을 들었다.처음 목회지에서 사람들이 예수에게 미친 전도사가 왔다고 했다. 신학교에서 나를 가르쳤던 교수도 예수에 미친 제자가 왔다고 했다. 예수가 나를 미치게 만들었으니 그것은 나의 감정이 아니며 예수님의 사랑이 미치게 만들고 별세를 외치게 된 것이다.
987년 봄이었다. 나는 사순절 기간에 성서를 통하여 예수님의 수난과 관계된 말씀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고 있었다. 수난주간에는 사복음서에 있는 말씀을 읽으면서 성전에서 기도했다. 성 금요일 아침에 금식하며 주의 십자가를 묵상하고 있었다. 변화 산에서 있었던 사건을 읽는 중 누가복음 9장 31절에서 나는 ‘예수님의 별세’를 예감하고 눈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별세로 표현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별세’(別世)로 표현한 말보다 더 정당한 표현은 인간 언어로서는 더 이상 없다. 나는 즉시 별세라는 원어의 의미를 관찰했고 ‘Exodus’(출애굽)의 단어에 감탄하면서 무릎을 꿇었다. 성서를 별세를 통해 관통하는 느낌이었고 별세로 2000년 교회사를 오늘의 교회로 연결하는 사건이 될 수 있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2000년 전에 있었던 사건이었다. 그것을 현재 내게 별세로 나타내야 한다. 내게 별세가 되지 않으면 신앙고백은 되나 큰 축복이 될 수 없다. 모든 축복은 별세가 이루어질 때만 참다운 복이 되는 것이다.
별세는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별세는 이 세상을 떠나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이며 세상을 바꾸어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별세는 죽으므로 다른 세상이 없다.그러나 예수님의 별세는 십자가에 죽고 부활했으므로 이전 세상은 지났고 새로운 세상을 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출애굽을 별세로 표현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을 떠나 더 좋은 세상인 가나안으로 들어가려고 한 것이다. 만약에 가나안에 들어간다는 희망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절망 가운데 바로의 영원한 노예생활로 끝났을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별세를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십자가와 부활을 주시려고 십자가에 죽고 부활했다고 믿는 것은 큰 은혜가 되지 못한다. 예수 믿으면 별세를 얻어야 한다. 별세는 나의 죽음이요, 다른 세상을 사는 것이요, 세상을 살리는 것이다.
BC와 AD는 별세의 확실한 사건이다. 예수님의 복음이 들어간 곳은 가정 사회 국가 어디나 BC와 AD인 별세가 이루어져야 한다. 별세는 애굽을 떠나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 인생을 애굽의 노예처럼 고통의 노예생활, 불행한 과거를 떠나서 젖과 꿀이 흐르는 심령과 환경과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죽는 것보다 예수님이 주는 새로운 세상을 사는데 목적이 있다. 만약에 내가 일백 번 고쳐 죽고 산다한들 새로운 세상이 오지 않은 채 옛 세상 그대로라면 살아서 무엇하리요. 죽었다가 사느라 고생만 더할 뿐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별세를 사는데 있다. 아, 별세의 신비로움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