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조

2008.06.12 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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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선교회

■ 서경조(1852-1938)

한국인 최초의 7인 목사중의 한 분으로 서상륜의 동생이다. 1884년 형의 권면으로 개심한 후 1885년 서상륜과 함께 소래교회를 설립하였으며, 1910년부터 새문안교회의 동사목사로 시무하였다.



서경조의 생애 (1852-1938) (1)



1) 한국의 감사절



"全國 敎會에셔 一年에 一次式 感謝할 日을 作定할 問題에 對하야 徐景祚長老가 演說하기를 我國敎會가 比前 旺盛한것이 天父의 恩惠인즉 一 感謝日을 定하고 一年에 一次式 悅樂하며 感謝하난거시 甚合하다하고 其後에 梁甸伯·金興京·邦基昌·韓錫晋 諸氏가 繼續 說明하다.") 죠선 예수교장로회 공의회 제4회 회의록. 233쪽 (이하 공의회록으로 기재)

이상은 1904년 9월 13일 午后 2시 30분부터 서울 銅峴예배당에서 회집된 제 4회 합동 공의회 회의록 일부이다. 이 때 서경조는 발언권을 얻어 감사주일 제정에 대하여 크게 연설한다.

그가 주창한 감사의 이유는 한국에 복음이 전파되어 많은 교회가 설립되고, 많은 동포들이 교회를 통하여 구원을 받게 된 것을 감사하여 감사절을 지키자는 주장이었다.

이 어찌 놀라운 신앙이 아닌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은 일 년 농사와 많은 소출에 감사하였으나, 서경조는 육신의 풍성한 삶을 감사한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은혜를 감사한 것이다. 참으로 차원 높은 감사요, 감사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신앙의 감사이다.

그는 감사의 선봉장이요, 한국 교회 감사절의 창시자이다. 그가 감사절을 지킬 것을 제창함으로써 그 해 전국 교회는 일제히 감사주일을 지켰고, 이것이 효시가 되어 해마다 감사절을 지키게 된다.

요즘 교회에서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설명할 때면 으례 미국 청교도들에 의하여 제정된 것을 한국 교회가 수입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이런 설명은 뿌리를 알지 못하고 가르치는 맹목적인 교훈이다. 한국 교회의 감사절은 서경조의 감사신앙이 뿌리이며, 영적 은혜에 대한 감사이다. 일천이백만 성도와 5만에 가까운 교회를 가진 거대한 한국 교회는 교회 설립 1세기를 넘기고 이제 21세기를 바라보는 현시점에서 주님께 더욱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감사절이 지켜지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또 오늘의 한국 교회가 감사절의 유래를 미국 교회의 감사절을 수입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 요인들이 역사 속에 숨어 있다.

서경조가 감사절을 주창하자 한국 장로들은 일제히 찬성 발언을 한다. 그리고 선교사 중에도 牟三律목사는 찬성하며 "卽時感謝日을 作定"할 것을 동의하였으나, 이상하게 "韓偉廉牧師는 委員을 選定하고 限一年間 他敎會와 相議한후" 지키기로 개의를 하니 오히려 개의가 가결된다. 회장 자벽으로 선출된 위원들은 한위렴(한위렴(韓偉廉) William B. Hunt(1869-1953)을 비롯하여 언더우드·방기창·심취명·양전백 등이다.

시간이 잠시 흘러 이틀 후(15일 오전 9시)에 속회된 회의에서는 한위렴(韓偉廉)의 보고가 다음과 같이 있었고, 그것이 가결 된다.

"韓偉廉牧師가 報告하기를 今年 感謝日은 陽曆 十一月十一日로 定하얏다 하며 鄭益魯長老가 動議하야 採用하기로 決定하다."( 앞의 책. 237쪽).

타 교파와 협의를 한다는 명목으로 일 년간 감사절 지키는 것으로 유보하자던 사람들에 의하여 이틀만에 감사절은 가결되었고, 그 후 위원들에 의하여 감사절은 해마다 변경되었는데 그 진행 과정은 다음과 같다.

1904년은 양력 11월 11일이며, 1905년은 양력 첫째 주일 후 4일 즉 목요일이며, 이날은 양력 11월 9일 (음력 10월 14일)이다. 1906년에는 11월 19일, 1908년에는 11월 마지막 목요일로 정하였는데 이날은 11월 29일 (음력 10월 14일)이다.

여기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을 가다듬어 보자. 현명한 독자들은 이미 감사주일을 연동적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그리고 11월 마지막 목요일에 접근해 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한국 교회의 감사절은 반드시 목요일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주일에 감사예배를 드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의 입장에서는 목요일에 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많은 수확을 감사하면서 시작된 미국 교회의 감사절은 행정관 브랫드포드(Bradford)가 감사절 지킬 것을 정식으로 선언하였으나(1623) 국경일이 된 것은 와싱톤 대통령(1789)이 11월 26일을 감사절로 정하면서부터 였고, 링컨 대통령이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감사일로 개정함으로써 미국의 감사일은 목요일이 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감사일은 목요일어야 할 필요는 없다.

이제 1914년에 있었던 제3회 총회록을 참조한 후에 다시 내용을 정리하도록 한다.

"감샤일은 션교사 최초 도션일(양력 십일월 뎨 3회 쥬일 후 삼일(저자주: 11월 18일)로 뎡하다" 예수교쟝로회 죠션 총회 뎨삼회 회록. 1914. 29쪽. (이하 총회록으로 기재)

곽안련은 [장로교회사 전휘집]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感謝日은 陽曆 十一月 第三 主日後 三日(水曜日)노 定하얏난대 此난 宣敎師가 朝鮮에 始渡하던 日을 擬用하기로 한것이니라. (一九一四年會錄 二十九 頁)") 곽안련. 앞의 책. 63쪽.

이 회의록은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준다.

서경조가 주창하였던 감사신앙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미국 교회가 지켰던 추수감사절로 모습을 바꾸었을 뿐 아니라 감사의 이유마저 선교사의 내한이라는 [변태아]가 되고 만 것이다.

총회록은 분명히 선교사가 처음으로 내한한 것이 감사해서 감사절을 지킨다고 하였다. 그것도 감사의 이유가 될 수는 있겠으나 한국에 선교사가 처음으로 입국한 것은 11월이 아니다.

서경조가 감사주일을 주창한 것은 선교사의 내한이 아니라 한국에 많은 교회가 설립되고 많은 동포가 믿고 구원을 받게 된 것이 감사해서였는데, 선교사들과 총대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혹은 모르고 있었는지?

당시 한국의 농촌은 관개사업의 부실로 해마다 흉년이었다. 서경조가 감사일을 정하자고 주창했을 때도 흉년으로 고생하는 지역을 위하여 교회는 구제헌금을 결의했었다.

"朝鮮語를 用하난 會에셔난 凶年을 因하야 流離하게 된 金浦 通津 白川 延安等地에 잇난 敎會를 爲하야 各敎會가 捐補하기로 決定하고"(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록. 제4회 회의록. 18쪽.(이하 독노회록으로 기재)

먹을 것이 풍성해서 지킨 추수감사예배가 아니라 먹을 것은 핍절하여도 믿고 구원을 얻게 된 것이 감사해서 드린 감사 예배가 아닌가? 이런 감사신앙의 본질을 지금 한국 교회에서는 찾을래야 찾을 길이 없다. 다만 미국 교회의 추수감사절을 내 것으로 알고 지키고 있을 뿐이다.

뿌리를 완전히 잊고 있으면서도 잊었다는 사실마저 모르는 불감증에 걸린 오늘의 현실이 너무 통탄스럽기만 하다.

이것이 사대주의적 발상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 아픈 과거를 씻고 이제는 우리 것을 찾아 소중하게 발전시켜 가자고 굳게 다짐하여야 한다.



서경조의 생애 (1852-1938) (2)



2) 유년 시절



신앙의 위인 서경조는 1852년 12월 14일 의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상우(相祐)이고, 경조는 자(字)였다. 서경조는 형보다 더 어린 시절에 부모를 잃음으로써 부모의 사랑을 느껴 보지 못하고 자라야 했다. 그러나 어렸을 때의 시련이 오히려 더 크고 깊은 그릇이 되는 요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부모를 며칠 사이에 잃은 소년은 서당에서 배우는 한문공부를 형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독학으로 한문을 익혀야 했다. 독학으로 익힌 한문이지만 말년에 아들 병호와 함께 상해에서 망명생활을 할 때 [그는 한문서적만 탐독하였다]고 손자 서재현 장로가 증언하는 것으로 보아 매우 총명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3) 입신동기

서경조가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은 그의 표현대로 오랫동안의 [心中戰] 즉 번민의 몸부림이 있은 후의 일이다.

그가 처음으로 복음과 만난 것은 1878년의 일이다.

형은 벌써 여러 차례 만주를 왕래하며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나 그는 아직 뚜렷한 목적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 만주를 왕래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觀光차로 舍伯과 其外 四人이 淸國 營口에 드러가셔"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 때 그는 맥킨타이어의 사저에서 드리는 예배에도 참석한다. 그가 기독교에 대하여 가진 첫 인상은 중국인 교인들에게서 풍기는 온유와 겸손의 몸가짐이었다. 평소 접촉하는 일반 중국인들은 교만 무례하며 한국인들을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었으나 예수를 믿는 중국인들은 매우 [겸손]하였다. 우선 그는 이 [겸손]에 큰 호감을 가지면서 심중전이 시작되는데 "예수교 中에 必有好況也라고 하고 慕敎之心이 生한지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이 사실은 지금 우리에게도 큰 교훈을 준다. 성도들의 겸손과 섬김은 바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 [慕敎之心]의 동기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 때 예수를 영접한 것은 아니다.

그 후 중국인과 서양인이 합작으로 경영하는 중서서원(中西書院)에서 많은 서적을 보면서 신문화의 위대함에 현혹되어 또 다시 기독교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 때에도 "井中之蛙가 大海에 나온듯 하더라, 예수교 할 마음이 더욱 나난지라"고 고백한다.

그는 역시 신중하였다.

그 후 맥킨타이어의 초대를 받고 융숭한 대접까지 받았지만 역시 예수를 영접하지 아니한다. 그가 감동의 회오리를 계속 체험하면서도 성큼 예수 앞으로 다가서지 못한 것은 "예수교理가 엇더한지 不知"한 때문이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모험보다는 오늘의 현실에서 신중한 검토를 거친 후 출발하려는 그의 신중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은 그에게 기회를 주시기 시작하였다. 그가 1883년 소래로 이주한 후 로스가 탁송한 6천권의 성경 중 신약전서와 덕혜입문 등을 형에게서 전해 받고 성경을 탐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성경을 탐독한 후의 사항에 대하여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예수교 할 마암이 깁히 드러가난 동시에 그 교를 하면 被殺하리라 하난 마암이 또 생겨 心中戰이 니러나난지라."

그러나 이것은 그의 초보적인 고민이었다. 그 후 그의 心中戰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즉, 지금까지는 천주교의 박해를 보고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에서 오는 심중전이었으나, 로마서를 읽으면서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고, 속죄의 도리를 깨닫게 되면서부터는 心中戰의 방향이 죄와 속죄의 문제로 변천하게 된다. 더욱이 사도바울의 죽음을 초월한 신앙과 선교부분에서 그의 심중전은 정리 단계로 접어들었고 큰 감동과 함께 완전히 자리를 굳히게 되며, 최후로 성령과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함으로써 신앙을 갖기로 결단한다.

그는 이 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聖神 밧난일에 대하여 생각이 나기를 죽난 거슨 잠간 동안이오 죽을가 두려운 마암이 실샹 어려우니 셩신을 밧아 두려운 마암이 업스면 죽난거시 두려올 것 업고 또한 死生이 天主의 뜻대로 되리라하고 信心을 定하였으나 그래도 간간이 죽기 두려운 마암이 잇어 聖經을 만히 상고하여 보고 위로를 만히 밧으니라"

"聖經을 만히 상고하여 보고 위로를 만히 밧으니라"

그가 신앙을 갖게 된 근본적인 동기는 성경이다. 이것이 한국 교회의 뿌리이며, 초창기 한국 교인들의 진솔한 모습이기도 하다.

이런 자랑스런 뿌리를 가진 한국 교회는 지금 말씀의 홍수에 묻혀 말씀의 기갈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서경조의 이런 心中戰은 선교사 내한 이전의 일이다.



서경조의 생애 (1852-1938) (3)



4) 서경조의 수세



그가 신앙을 가질 것을 결심하고 선교사의 내한을 기다리던 중 1885년에 서울의 형으로부터 상경하라는 서신을 받고 상경한다. 그가 상경하였을 때에 언더우드는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푼 후의 일이었다.

"셔울 사람 1인과 의쥬 사람 1인이 셰례를 밧앗더라"

이것은 분명히 1885년에 이루어진 일이다. 이 때 서경조도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그해 9월 언더우드는 소래로 내려와 서경조의 차남 병호에게 유아 세례를 베풀게 된다.

이 사실에 대하여는 본서에서 이미 밝혀 두었다.

이 문제는 언더우드가 언제 소래에 왔었느냐를 규명하는 정도의 가벼운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게 되는데, 그것은 한국 교회 최초의 수세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로 발전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최초 수세자는 노춘경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1885년에 있은 세례식은 노춘경의 세례식보다 먼저 있은 것이 분명하며, 언더우드는 이 사실을 숨김으로써 역사를 오도한 것이다.



5) 신앙과 성품



이삭의 장자 [에서]는 사냥을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성격이 호탕하였으나 야곱은 가정에 조용히 거하며 내실을 기하는 사람이었다. 이 쌍둥이 형제의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던 것처럼 서상륜·서경조 형제의 성격도 판이하게 달랐다.

서상륜은 호탕한 에서와 같은 성품을 가졌고, 서경조는 조용하면서도 차분히, 그리고 양보와 겸양의 덕을 어려서부터 몸에 익힌 전형적인 선비형의 인물이다. 이런 성품을 채필근목사는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라고 평하였다. 이런 성품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할머니 슬하에서 자라면서 형성된 것 같다.

형이 1879년 세례를 받고 로스와 성경 번역에 정열을 기울일 때, 그는 고향으로 발길을 돌리고 만다. 그 후 이들 형제는 잠시 동안 길을 달리한다.

"본국에 나온 후에 통샹 되기만 기다리더니"라고 한 것으로 보아 외국과의 정식 국교를 맺고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는 개방과 자유의 시민 사회가 오기를 기다렸고, 믿음에 대하여는 그 때 다시 생각하기로 한 것 같다.

사도 바울의 전도단 일행으로 동행하던 마가가 밤빌리아의 버가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옴으로써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아주 미묘한 분위기를 가지게 되나 후에 마가는 사도 바울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이 되었던 것처럼, 서경조도 처음에는 신앙의 뿌리를 쉽게 내리지 못하여 형과 헤어졌지만 후에는 한국 교회에 절대로 필요한 인물로 성장한다.

대기는 만성(大器晩成)하는 법이다.

그의 겸양의 덕은 새문안교회와 같은 해에 성전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상량의 순서를 서울 교회에 양보한 것으로도 잘 나타나고 있으며, 이런 인품은 그의 생애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말년에 있은 일이다. 소래의 제 3대 목사로 부임한 김응순목사에게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모든 서적을 물려 주었는데, 이에 대한 고마음을 잊지 못한 김응순목사는 친필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그의 높은 인격과 욕심없이 후배를 사랑하는 마음을 격찬하고 있다.

"서목사님은 존경하는 목사님으로 내가 송천교회에 부임하였을때 나를 송천의 3대 목사라고 하며 일생동안 가지셨던 서적을 모두 나에게 인계해 주셨다."



서경조의 생애 (1852-1938) (4)



6) 소래교회 설립



형과 함께하는 만주여행을 마치고 고향 의주에 돌아와 조용히 생활하고 있던 1883년 이른 봄 어느 날 갑자기 형이 돌아왔다. 그리고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구미리 "봉대"에 있는 외육촌에게 은신차 떠나니 가산을 정리하여 따라오라는 간단한 말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나고 말았다. 이 말을 들은 동생 경조는 고향에서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을 알고 형을 따라 황해도 장연군으로 이주하게 된다. 이 때를 "一千八百八十三年 癸未年에 長淵 松川洞에 移住ㅎ게 된지라"고 하였다. 이 때부터 서상륜과 서경조는 소래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활달한 성격과 한국을 복음화시켜 보겠다는 뜨거운 사명을 가진 서상륜이 좁은 소래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수도 서울로 떠나니 소래교회는 서경조가 전담·관리하게 된다.

1884년 로스로부터 6천권의 성경을 인수하자, 서경조도 그 성경 일부를 얻어 소래를 중심하여 황해도 일원에서 매서활동을 전개하여 언더우드 등 선교사가 입국했을 때에는 자신을 포함하여 많은 세례 지원자가 생겨, 대거 상경하여 언더우드로부터 세례를 받아 명실공히 소래교회의 신앙적 지주가 된다.



7) 각종 직분



(1) 조선 교역자 임명의 초보

서경조가 정식으로 교회의 직분을 가지게 된 것은 1888년의 일이다. 이 일에 대하여 [사기 상]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是時에 賣書를 選定하야 一人은 京城近方에 一人은 長淵近方에 一人은 平壤近方에 一人은 義州近方에 傳道하니 이난 朝鮮敎役者의 任命의 初步니라"(차재명. 앞의 책. 14쪽).

이렇게 하여 그는 정식으로 권서의 신분을 가지고 복음전파의 제 일선에 서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활동을 회고하면서 언급하기를 "매셔의 직분을 밧앗스나 ㅊ을 파ㄴ 수는 업고 친구간에 ㅊ권이나 주니라"고 소극적인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런 말은 겸손한 그의 성품과 덕을 돋보이게 하는 표현에 불과하다. 그가 언더우드의 지시를 받고 중국인에게 성경을 전달하기 위하여 원산을 왕복할 때 보여준 활동상은 너무나 능숙하고 담대한 매서활동이었음을 여실히 증명한다.

그는 이미 생사를 초월한 전도인으로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매서인은 활동에 제한이 있는 법이다. 매서인은 이름 그대로 성경과 쪽복음 및 전도지들을 판매하면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역할에 불과한 것이다.



(2) 해서의 조사

그는 조사의 직분도 맡아 감당한다. 조사(助事)는 지방을 순회하는 선교사를 보조하며, 때로는 선교사를 대리하여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관리하는 목회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교회에 비하여 이를 담당해야 할 교역자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당시, 이들 조사의 역할은 다양하였고 때로는 조사 한 명이 5·6개처 교회를 순회하며 설교를 하는 순회 목회자의 역할까지도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조사는 어디까지나 선교사를 돕는 일(Helper)이 주업무였다.

서경조가 조사의 역할을 한 것은 그의 성경공부와 맞물려 일어난 사건이다. 그가 상경하여 성경공부를 한 후에 선교사들은 그를 대동하여 지방 순회전도에 임하곤 하였는데, 그 사례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이 발견된다.

그는 1893년 4월, 약 1개월간을 선교사 배위량과 함께 양산·대구·용궁·안동·전의·경주·울산·동래·상주·경주 등지를 순회하며 전도한 일이 있었는데, 대구에서는 성경 책을 주기는 하였으나 전도는 못하였고, 상주에서는 4·5일간 유하면서 전도를 하던 중 향교에서 전도하고 [덕혜입문]을 주었더니 다음날 다시 돌려주면서 잘 보았다는 인사만을 받았으며, 불교의 도시 경주에서는 전도보다는 구경꺼리와 놀림꺼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마페트나 이눌서 등과 함께 충청도의 공주와 청주지방에서 전도를 하였다. 이 때 그는 공주에서 달력을 많이 팔고 청주로 향하던 중 어느 시장 거리에서 장꾼들에게 성경을 많이 팔고, 또 청주에서도 가지고 있던 성경을 전부 판매하였다고 하였다. 이런 순회 전도시에 선교사로부터 파트너가 되어 줄 것을 제안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소래로 귀환하는데, 이 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집으로 올 마암이 나셔 회심할 수 업난지라, 배목사는 락루하며 만류하되 듯지 아니하난대 맛참 마삼열 목사가 내려와셔 간졀이 권하되 듯지 아니하고  나난 대륜션으로 仁川까지 와셔 목션으로 숑쳔에 내려 오니라. 잇때 나는 내 마암도 아지 못할거슨 부산셔 아모 연고 업시 집으로 오고만 십고 평양 가려해도 아모 연고 업시 가기실흔 마암만 낫스니 후에 생각하니 내가 부산에 잇섯던지 평양에 갓더면 내가 숑쳔에 잇지 못하엿슬 것이오 내가 숑쳔에 업스면 매킨지목사가 오시지 아니하엿슬 것이오 그러면 숑쳔에 영광의 교회가 일즉이 서지 못하엿을 것이오 숑쳔에 교회가 몬져 되지 아니하엿스면 海西에 수다한 교회가 일즉이 되지 못하엿스리라. 범사에 하나님의 뜻대로 되려니와 범사에 긔회가 잇고 사람이 긔회에 하지아니하면 모든 일이 되지 못할줄을 아노라"(서경조. 앞의 책. 95쪽).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기신 지역은 해서 지역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기에 해서 지역 교회를 위한 조사로 만족하였고, 이 일을 위하여 선교사들의 제안도 거절하면서 소래로 귀환하여 최선을 다하였던 것이다.



서경조의 생애 (1852-1938) (5)



(3) 부산지역의 첫 열매 김기원

1893년 봄 배위량과 부산지역 전도를 하였을 때 부산 지역 최초 신자 김기원과의 만남이 있었다.

"부산셔 밋기로 작졍한 一人을 차즈니 셩명은 김긔원이라 죵쳐병이 즁한 것을 보고 위로를 하고 셥셥이 떠나니라"(앞의 책. 93쪽).

김기원으로서는 이 순간이야 말로 주님의 유효적인 소명을 받은 절대적인 순간이었다.

그는 본래 부산 사람이 아니다. 대구가 그의 고향이며, 우연한 기회에 부산에서 선교사와 서경조를 만나게 된 것이다. 더우기 그는 종창이 심한 상태에서 복음을 듣게 되었는데, 이는 마치 서상륜이 만주에서 열병으로 고통을 당하던 중 맥킨타이어를 만난 경우와 유사하다. 그는 교인이 된 후 아담스(아담스 James E. Adams (한국명; aIeueA) 1867-1929)와 브루앤(브루엔 Henry M. Bruen (한국명; 1874-1957), 어드맨(어드맨 (aUOoØ¿) Walter E. Erdman. (1877-1948).과 함께 대구지역 전도에 힘썼고, 특히 아담스의 조사로 일하며 1896년에는 대구 남성정교회의 조사로 임명된다.

대구지역은 일찌기 천주교회에서 장악한 지역으로 개신교를 이단시하여 전도가 쉽지 않은 곳이었다. 이 곳에 배위량은 1년이상을 거주하며 심혈을 기울인 결과 서자명¡¤정완식 등 4,5인이 믿기로 작정하여 힘을 얻는다. 대구가 복음앞에 문호를 개방하게 될 때 선교회에서는 1천량을 지불하여 남성정의 정씨 집(20여간)을 매입하여 예배당으로 개축하였고, 교회가 부흥함에 따라 여러 직분을 선택하게 되는데, 이 때 김기원은 조사로 임명된 것이다.

대구지역에 교회가 설립되고 김기원이 조사가 되었으니 참으로 반갑고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사기 상]을 읽고 있으면 다른 지역은 모두 개척 전도자가 한국인 조사이며 예배당으로 사용한 건물도 자체적으로 공급하고 있는데 반하여, 유독 대구만은 선교사가 전도에 힘을 쏟았고, 건물도 [宣敎會에셔 金 一千兩으로 南城洞 鄭氏家 二十餘間을 買收하야 禮拜堂으로 使用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부분은 자급·자족·자전을 표방하고 있는 한국 교회로서 참으로 옥의 티와 같이 유감스러운 역사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 후 김기원은 평양의 조선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제 6회. 1913), 동년 12월 31일 마산포교회에서 회집된 제 7회 경상노회에서 목사고시에 합격한다. 1914년 1월 16일 경상노회 임시 노회에서 임시 회장 왕길지(G. Engel(왕길지(eYNIo¤) George O. Engel. 1864-1939. 독일 출신의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선교사)의 집례로 안수를 받고 목사로 장립되며, 경남 창원군 소재 웅천(熊川)교회를 비롯하여 경상남.북지역에서 1924년까지 목회를 한다.

서경조가 수고하여 뿌린 씨는 결코 헛되지 아니하였다. 당시에는 서운하게 헤어졌지만 목사가 되어 만났을 때 저들의 감회는 깊었으리라. 이것이 전도자의 기쁨이요 영광이 아닐까?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살전 2:20).



(4) 해서지역 개척자

소래교회가 설립된 이 후 해서지역에는 많은 교회가 앞을 다투며 설립된다. "사기 상"에 의하면 1893년 한 해 동안에 무려 14개처 교회가 설립된다. 그 중에 장연군 칠곡교회는 서경조의 전도를 받은 김치도·홍염범이 믿고 교회를 설립하였고, 문화군 사평동교회는 소래교회의 지교회로 설립되었으며 다음 해 곡산읍교회를 설립하게 되는데, 곡산읍교회의 설립내용은 다음과 같다.

"谷山邑 敎會가 成立하다. 그後 徐景祚 巡行時에 敎會가 設立되니라") 앞의 책. 28쪽.

이 부분에서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곡산읍교회 개척자로서의 서경조가 아니라 순행자로서의 서경조이다. 그는 소래교회에 조용히 앉아 있는 조사가 아니었다. 교회를 개척하고 설립할 뿐 아니라 해서지역의 여러 교회를 견고히 세우기 위하여 부단히 순회하는 순회 전도자였다. 이런 일이 그 후에도 변함없이 진행되는 것을 [사기 상]은 전해주고 있다.

1905년의 서경조는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공의회의 일로, 신학 공부로, 소래교회의 목회자로, 이중 삼중의 많은 일들이 가는 곳마다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때에도 그는 순회 전도자의 역할을 중단하거나 소흘히 여기지 아니한다. 그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 청산교회의 설립이다.

"長淵郡 靑山敎會가 成立하다. 初에 徐景祚의 傳道로 敎會가 成立되야 후에 禮拜堂을 建築케 되니라"

이런 기록들로 보아 그는 해서지역 교회를 위한 헌신적인 노력을 끊이지 않았고, 이것을 그의 최대의 사명으로 알고 감당하였던 것이다.

 



서경조의 생애 (1852-1938) (6)



(5) 장로가 되다



소래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료와 서경조의 기록에 의하면, 1895년 기와집 예배당을 건축한 후 서경조는 장로가 된다. 그러나 교회사는 1900년에 비로소 한국교회에서 장로장립이 있었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우리는 좀 더 자세한 연구와 접근이 필요한 줄 안다.

우선 지금까지 전하여 오는 사료중 [장로교회사 전휘집](長老敎會史 典彙集)의 기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朝鮮敎會에셔 長老選擧난 一九00年브터 始作하얏난대 一九0一年 (英語會錄) 各道에 初次選擧한 長老난 如左하니라.

이상과 같은 기록과 함께 1900년에 선출된 장로는 평남에 김종섭, 황해에 서경조라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한 [사기 상]의 기록은 앞서의 기록과는 내용면에서 퍽 상이할 뿐 아니라, 오히려 소래교회의 사료를 입증해 주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長淵郡 松川敎會에서 徐景祚를 長老로 將立하야 堂會를 組織하니 是乃 我國敎會의 最先 長老더라. 同時에 敎人이 協力 涓金하야 瓦家 八間 禮拜堂을 新築하얏다가 翌年에 敎人이 增多함으로 瓦製八間을 增築하니라"

이 부분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예배당 건축과 서경조의 장로장립이 [동시]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소래교회의 기와집 예배당은 1895년에 건축되고 1896년에 증축된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사기 상]의 기록이 1900년도의 기록이긴 하여도 기와집 예배당이 건축된 1885년에 장로장립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 부분에서 서경조 자신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해 가울(저자주: 1895년)에 원목사가 나려와 교회 일을 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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