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선교회
■ 이응찬(?~1883.9)
내용 이응찬은 로스와 매킨타이어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6년 가까이 <예수셩교젼서>의 번역에 매달려 절반 이상 번역과 수정을 한 후인 1883년 9월 콜레라로 소천하였다. 예전에 술과 아편을 즐기던 그가 성경 번역을 몰입하여, 그 복음을 동족에게 전해주려고 애쓰다가 이국 땅인 만주 봉천에서 순교하였다.
1876년 봄,로스는 한글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하였는데 그 이름은 이응찬이었다. 로스는 한글선생을 고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불확실한 것인가를 알았기 때문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로스는 1877년 이응찬과 함께 미래의 선교사들을 위한 기초 한글교재(Corean Primer)를 간행하였고,1878년 봄에는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하였다. 이 당시 서양인을 돕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이응찬이 로스를 도와서 성경을 번역하고 있다는 것을 안 어떤 한국 사람이 이응찬을 고발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래서 그는 다시 의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후인 1879년 봄,이응찬은 다시 만주로 왔다.
당시 로스는 안식년으로 본국에 귀국하였다. 그가 하던 번역사업은 매킨타이어에 의해서 계속되었다. 매킨타이어는 이응찬을 한글교사로 삼고,성경을 계속 번역하도록 했다. 이때 번역한 것이 로마서와 히브리서였다. 이응찬은 매킨타이어로부터 세례를 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의 신앙이 분명하지 않았다. 그는 아편쟁이로 의심받았고,식사 때에는 중국 화주(火酒)를 곁들이는 습관이 있어서 그가 출석하던 중국교회신자들은 그의 신앙을 의심하였다. 이응찬의 세례는 자꾸 연기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이응찬은 짬을 내어서 고향을 방문하였고,매킨타이어는 그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응찬은 고향에 가서 성경을 깊이 연구한 다음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서 돌아왔다. 그래서 그는 1879년 여름 매킨타이어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것은 한국 개신교인으로서는 세 번째 세례였다. 1881년 로스는 안식년을 끝내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이응찬은 로스와 더불어서 성경번역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 후 긴 세월을 통해서 로스와 이응찬은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고,1887년 최초의 한글번역성서인 ‘예수셩교젼서’가 완간되었다. 이응찬은 이 최초 한글성서의 반절 이상을 번역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 성경번역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1883년 9월 이국 땅 봉천에서 콜레라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번역한 성경은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자료: 서울신대 신학대학원장> K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