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생애

2007.05.31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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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의 생애
선지자선교회

노재관교수(칼빈신학교)

Ⅰ. 유년기

존 칼빈(John Calvin)은 1507년 7월 10일 프랑스 파리에서 북쪽으로 약 60마일 떨어진 노용(Noyon)에서 태어났다. 칼빈의 아버지 제랄드 칼빈(Gerard Calvin)은 부모가 경영하는 통을 만드는 공장에서 도제 교육을 받았으나 시의회의 비서 임무와 교구의 서기 임무를 보았다. 그리고 목사의 고문이 되었다. 그는 귀족 계급에 속했으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칼빈의 어머니 즈앤(Jeanne)도 전에 음식점을 경영한 노용 시의 온건파 유지급 인사의 딸로 경건한 부인이었다.

칼빈은 아버지 덕분에 그 지방 출신의 상류계급의 자녀들과 접촉할 기회를 가졌으며 그들과 친한 친분 관계를 갖게 되었다. 칼빈은 노용에서 그의 형 챨스(Charles)와 그의 동생 안토니(Antony)와 함께 초등학교인 카피츠 학교(School of the Capettes)를 다녔다. 그는 타고난 지성과 판단력으로 학우들 사이에서 뛰어난 인물로 인정을 받았다.

칼빈은 안색이 좋지 않았으며 몸이 허약하고 신경질적이었으며 수줍어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화를 잘 내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사리를 판단하는 데에는 정확했다. 그리고 그의 지적 능력은 아주 뛰어났으므로 아버지의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칼빈에게 좋은 교육의 기회를 주는 것이 가장 좋은 투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칼빈을 파리에 있는 대학으로 보내게 되었다.



Ⅱ. 학문 연구

14세 때 그는 파리로 가서 라 마르셰 대학(College of La Marche)에 등록했다. 그는 그 대학의 마두린 코디어(Mathurin Cordier) 교수에게서 라틴어를 배웠다. 그러나 칼빈은 그 대학에서 몽테규 대학(College of Montaigu)으로 옮겼다. 몽테규 대학은 금욕적이고 엄격한 훈련을 요구하는 대학이었다. 하루 일과는 아침 4시에 시작되었으며 수업은 아침 5시부터 오후 5시까지 계속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금욕주의적인 삶과 장시간 공부하는 습관을 익혔다.

칼빈은 5년 간의 대학 생활 동안에 많은 친구들과 교제를 나누었다. 특히 당시 왕의 주치의였던 윌리암 콥(William Cop)의 아들 니콜라스(Nicholas) 콥과 친한 사이였다. 그리고 종교 개혁의 새로운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에 자크 르 페브르(Jacques Le Fevre)는 바울 서신 주석에서(1512년)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를 공공연히 가르침으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칼빈은 당시 신학계에 일고 있던 이런 변화를 간파하고 있었다. 5년 간의 대학 생활을 마친 뒤 1528년에 그는 사제 훈련을 위한 다음 단계로써 신학 연구 자격 시험에 통과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18세의 아들에게 신학에서 법학으로 전공을 바꿀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법조계의 직업이 부와 명성을 얻게 하는데 확실한 보장이 되기 때문이었다. 칼빈은 아버지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칼빈은 오르레앙 대학(University of Orleans)으로 갔다. 그는 거기에서 프랑스 최고의 법학자인 피퍼 타이잔(Peter Taisan) 문하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1년 후에 그는 이탈리아의 법학자 안드레아 알키아티(Andrea Alciati)의 명성을 듣고 부르지 대학(University of Bourges)으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열렬한 루터파 신자였던 멜케오어 볼마르(Melchor Wolmar) 교수에게서 헬라어를 배웠다. 이 대학에서 칼빈은 언어학, 문학 그리고 고대문학에 열정을 품었다. 칼빈은 헬라어 고전은 물론 신약 성경을 원문으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1531년 5월에 칼빈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칼빈은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신학에서 법학으로 그의 학문의 길을 바꾸었으나 이제는 자유로이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파리 왕립 대학(Royal College)로 옮겨 헬라어와 히브리어 연구를 계속했으며 니콜라스 콥과의 우정을 다졌다. 1532년 1월에 그는 오르레앙 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1532년 23세의 나이로 세네카의 <관용론> 주해서를 출판했는데 그의 인문주의적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세네카의 <관용론>은 로마의 황제 네로가 기독교를 무참하게 박해하는 것에 대하여 스토아주의적 입장에서 네로의 마음을 돌이키려는 마음에서 쓰여진 책이었다. 칼빈이 주해서를 쓴 것은 프랑스 왕 프란시스1세가 개신교도들을 박해하는 것에 대한 의분 속에서 왕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유창한 라틴어로 이 책을 기록했다.



Ⅲ. 새로운 삶의 시작

1533년경에 칼빈은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였으며 종교 개혁 운동에 합세했다. 그는 자신의 개종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음으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시편 서문에서 "뜻밖의 회심"이란 말을 쓰고 있다. 이런 사실은 사도레에게 보내는 서신에서도 나타난다. 1533년 11월 1일에 그의 친구 니콜라스 콥이 파리 대학의 총장으로 취임했다. 이 취임 연설의 원고는 칼빈이 작성했다. '기독교 철학'이란 제목 하의 연설은 어느 정도 루터의 산상수훈 설교를 반영하고 있다. 이 연설은 루터가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복음과 율법을 비교해서 복음의 절대성을 강조하고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강조했다. 그리고 종교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박해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 연설 이후 그들에 대한 비난과 핍박이 가해졌다. 니콜라스 콥은 바젤로 피신하였고 칼빈도 결국 파리 남서부 250마일에 위치한 앙그렘(Angouleme)에 은신처를 정했다. 그는 친구인 루이스 두 틸레(Louis du Tillet)의 집에 머물렀는데 그 집에는 약 4천여 권의 장서가 있었다. 여기에서 칼빈은 방해를 받지 않고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기독교 강요>의 체계를 세웠던 것이다.

칼빈은 1534년 5월 4일에 공식적으로 로마 교회와 결별을 했다. 1534년에 그는 재세례파의 영혼 수면설에 반대하여 '심령 수면설'이라는 소제목의 소책자를 발간했다. 당시 프랑스의 통치자였던 프란시스 1세는 종교개혁에 대하여 불분명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관용과 박해로 프로테스탄트들을 대했다. 1534년 10월 18일에 프로테스탄트들에 대하여 비난하는 삐라가 프랑스 전역에 살포되었다. 그들에 대한 박해 이유는 로마 교회의 미사와 교리 그리고 성직자에 대한 비난 때문이었다. 칼빈도 결국 망명자로 프랑스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1535년 1월 칼빈은 스위스 바젤로 가서 친구인 콥을 만났다. 그리고 듀 틸레의 서재에서 쓰기 시작한 <기독교 강요>의 탈고를 서둘렀다(1535년 8월). 이 때 그의 나이 26세였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초판을 발행하면서 프란시스 1세에게 헌정사를 썼다. 1536년 3월 바젤에서 라틴어로 출판된 <기독교 강요> 초판은 모두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1장: 율법, 2장: 신조 문제, 3장: 기도(주기도), 4장: 성례, 5장: 다른 성례들, 6장: 기독교인의 자유).



Ⅳ. 1차 제네바 종교개혁

칼빈은 <기독교 강요> 출판 후 친구 듀 틸레와 함께 이탈리아의 북부를 여행하였으나 로마 카톨릭 교회의 반대로 바젤로 돌아왔다가 파리로 돌아갔다. 그는 가사를 정리하고 동생들을 데리고 1536년 6월 제네바를 경유하여 스트라스버그로 갈 계획을 세웠다. 이 때 프랑스의 프란시스1세와 독일의 챨스5세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여 스트라스버그에 이루는 도로가 차단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우회로를 통해 그 해 7월 하순경에 제네바 시에 도착했다. 그는 그 곳에서 하룻밤만 머물 예정이었다. 수세기 동안 제네바는 로마 카톨릭의 지배를 받았다. 그런데 제네바는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로마 카톨릭을 거부하였다. 1535년 8월 10일 제네바 시는 로마 교회의 미사 의식을 폐지할 것을 정식으로 결의하였고 1536년 5월 21일에는 시민 총회에서 복음주의적 신앙을 따를 것을 결의하였다.

칼빈이 제네바에 도착하자 칼빈의 친구인 듀 틸레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화렐(William Farel)이 그를 찾아왔다. 화렐은 제네바에서 개혁 운동을 일으키고 있던 개혁자였다. 제네바 교회에 칼빈이 필요하다고 그를 설득했다. 그러나 칼빈은 학문 연구에 몰두하려는 자신의 계획을 피력하였다. 그러자 화렐은 다음과 같이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당신의 학문 연구가 하나의 구실에 불과하다고 선언하오. 만약 당신이 이 주님의 사역을 거부한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저주하실 것이오." 결국 칼빈은 그의 설득을 받아들였다. 나중에 칼빈은 그 날 밤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그 때 나는 화렐의 무서운 명령에 감당하기 어렵도록 몸을 떨었다. 그의 음성은 마치 높은 보좌에서 들려 오는 하나님의 음성과 같았다."

칼빈은 먼저 바젤로 가서 자신의 일을 처리한 후 1536년 8월 하순에 제네바에서 성경 교사로 그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 해 10월 1일부터 8일까지 제네바에서 멀지 않은 로잔(Lausanne)에서 성찬론 문제로 신교와 구교 사이에 토론회가 열렸다. 칼빈은 로잔 시의 신교파를 지원하기 위해 그 회의에 참석하여 로마 교회의 오류를 터툴리안, 크리소스톰, 어거스틴 등을 비롯한 많은 교부들의 서적을 원고 없이 자유롭게 인용하며 로마 카톨릭의 성찬론을 반박했다. 이 회의 후에 칼빈은 큰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는 시의회에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관한 조항'을 제출하고 의회의 승인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그는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였다(1537년). 칼빈과 화렐은 이것들을 기초로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추진하려고 했다. 이것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칼빈의 반대자들로 보강된 시의회(4인중 3인은 칼빈과 화렐 반대)는 교회 문제에 대하여 베른 시의 주장을 따랐다. 문제의 발단은 성찬식에 사용하는 떡이 문제였다. 1538년 제네바 시의회는 베른시에서 사용하는 떡을 사용하도록 결의했다. 베른에서 사용하는 성찬은 로마 교회와 같은 점이 많았다. 당시 제네바 교회에서는 일상적인 빵을 성찬에 사용했는데 이것을 금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성례식을 거행 할 수 없다고 칼빈과 화렐은 주장했다. 결국 이런 일로 인해 칼빈과 화렐은 시 당국에 의해 추방 명령을 받았다.



Ⅴ. 스트라스버그에서의 사역

추방당한 칼빈은 바젤로 갔다. 칼빈이 교회 사역을 하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스트라스버그는 그를 초청했다. 스트라스버그는 많은 프랑스 종교 망명자들의 피난처였다. 칼빈은 개혁가였던 부쳐(Bucer)의 추천으로 1538년 9월 8일 프랑스 난민 교회에서 그의 사역을 시작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실행할 수 없었던 교회와 국가의 분리 문제를 실행할 수 있었다.

1539년 2월에 칼빈은 신학 교수로 임명이 되어 고린도서를 강의하였다. 그는 개혁자 부쳐와 함께 독일의 제 종교회의에 참석함으로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 그리고 멜랑히톤(Phillip Melanchthon)과 교제한 후 루터의 종교개혁의 진수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회중용 찬송으로 시편을 도입했으며 공예배의 기도문을 수정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게 되었다.

1539년 3월 제네바 당국자들은 추기경인 제이콥 사도레(Jacob Sadoleto)로부터 공개 서한을 받았다. 그는 이 서한에서 제네바 시가 로마 카톨릭 교회로 복귀할 것을 권했다. 사도레에게 답신을 써 줄 것을 요청 받은 칼빈은 답신을 썼는데 이는 가장 뛰어난 종교개혁 변증문이다. 그 해 7월에 칼빈은 스트라스버그의 시민권을 얻게 되었고 8월에는 <기독교 강요> 제 2판을 스트라스버그에서 출판했다. 이 2판은 초판보다 약 3배정도 큰 것이었으며 루터도 이 재판을 읽고 매우 기뻐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칼빈은 로마서 주석을 간행했다.

칼빈은 1540년 8월에 부쳐의 소개로 만난 이델레트라는 두 아이들을 가진 과부와 결혼을 했다. 그녀는 자신의 건강이 그리 좋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순복의 성품으로 죽을 때까지 칼빈을 도왔다. 그들은 1549년 3월 이델레트가 죽을 때까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였다.

1539년 2월 이후의 제네바 시의 상황은 변화되기 시작했다. 1540년 네 명의 목사들 중 두 명이 분쟁과 혼란으로 인하여 제네바를 떠났다. 당시에 프랑스와 베른이 제네바의 독립을 위협하고 있었기에 제네바는 용기 있는 지도자를 필요로 했다. 또한 추기경 사도레에게 칼빈이 서한을 보낸 후 사도레와 로마 교회가 일언반구 논박을 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제네바 시는 다시 칼빈을 필요로 했다. 초청장을 받고도 결정을 하지 못한 칼빈은 화렐과 의논했다. 1541년 1월에는 <기독교 강요>를 프랑스어로 번역 출간했다. 화렐의 편지를 받은 것은 2월 말이었다. "제네바의 돌들이 오라고 부르짖을 때까지 기다리겠느냐?"는 그의 벼락같은 편지에 칼빈은 굴복하게 되었다.



Ⅵ. 2차 제네바 종교개혁

1541년 9월 1일 칼빈은 화렐과 부쳐의 강권에 못 이겨 다시 제네바로 돌아왔다. 3년 4개월 전 그를 추방했던 시민들이 이 날은 기마대까지 총 동원해서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여기에서 그의 개혁가로서의 인생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칼빈은 제네바 시를 하나님의 도성으로 만들고 싶었다. 성경의 원리로 국가의 기반을 세우고 교회와 국가가 서로 분리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서로 협력하는 세계를 만들고자 했다. 교회는 교회의 제반 문제를 관장하고 국가는 법과 질서의 문제를 관장하는 그런 질서를 그는 원했다. 그는 그이 이상을 실현하는 첫 단계로 시의회에 가서 1)법에 따라 교회를 다스릴 것 2) 교회의 헌법을 제정할 것 3) 자신을 시의회의 고문으로 세워 줄 것 등을 요구했다.

1541년 칼빈은 '교회 법규'를 제정했다. 이 법규는 몇 가지 수정이 있은 후 소 의회, 200인 의회, 총회에서 통과되어 대중 앞에서 낭독되어 공포되었다(11월 20일). 이 교회 법규의 실행 및 감독을 위해 감시 위원회도 조직되었다. 그리고 정부가 교회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에 합치된 방향으로 정책을 펴 나갈 것에 대해 합의를 했다. 교회의 조직은 초대 교회의 조직에 따라 목사, 교사, 장로, 집사의 네 직분이었다.

칼빈은 교리 문답서를 작성하여 교인들을 교리적으로 훈련시켰다. 성경의 원리가 모든 시민의 생활 속에 받아들여져 영적 이상향에 이르도록 힘을 다하여 노력했다. 칼빈의 엄격한 노선에 반대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결국 제네바 시에는 도박이 사라지고 댄스가 금지되었으며 사치와 방탕한 생활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 나왔고 칼빈의 설교를 듣기 위해 성 베드로 교회는 항상 가득 차게 되었다.

1541년부터 1555년까지 14년 동안 칼빈은 많은 어려움을 당하며 개혁을 위해 싸웠다. 그의 개혁에 도전한 자들은 다음과 같다.

(1) 1543년 카스텔리오(Sebastian Castellio)가 목사직을 청원하였다. 그는 원래 인문주의자였는데 칼빈 밑에서 인문주의 교육에 기여했으나 성경의 권위는 불신하고 있었다. 즉 성경의 일부의 정경성을 부인하였다. 예를 들면 그는 아가서를 '음란하고 추잡스런 시'로 생각했다. 그는 목사 자격 심사에서 탈락하였고 결국 칼빈의 적이 되었다.

(2) 전직 수도사였던 볼섹(Jerome Bolsec)은 칼빈의 예정론에 반박하였으며 칼빈을 비방하는 전기를 써서 반 칼빈 운동을 전개하다가 형을 받아 투옥되고 결국 제네바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로마 교회로 복귀하였다.

(3) 자유파에 속한 페랑(Ami Perrin)과 버틀러(Philbert Berthelier)도 칼빈에 도전했다. 페랑은 칼빈을 제네바에 귀환하도록 스트라스버그에 특사로 파견된 자였다. 그는 제네바 시에서 절대적 지지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으나 자유파로 이적하였다. 그리고 그의 부도덕한 생활로 장로회의 징계를 받자 이를 거부하였다. 버틀러도 역시 부도덕한 생활 때문에 장로회의 결정에 따라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자 장로회에 반기를 들었다.

(4) 칼빈의 생애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던 중요한 사건은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와의 논쟁이었다. 그는 스페인 출신으로 다방면에 천재적 소질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의사요, 법률가요, 신학자였다. 그가 혈액 순환을 발견한 자였다. 1531년 그가 20세 되던 해에 <삼위일체론의 오류>를 라는 책을 출간하여 화제를 모았던 자였는데 1533년에는 <기독교의 회복>이란 책을 써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공박하고 전통적인 신학을 공격하였다. 그는 '삼위일체론'을 가리켜 '머리 셋을 가진 지옥의 개'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그는 삼위일체 뿐만 아니라 동정녀 탄생, 유아세례, 그리스도의 신성 등을 부인했다. 이런 저작으로 인해 그는 프랑스에서 체포되어 카톨릭 교회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리용 감옥에 수감되었던 중에 탈옥하여 제네바로 왔다. 그는 결국 칼빈의 교회에서 체포되어 유스티니안 법정에서 칼빈과 심각한 논쟁을 한 후 소 의회에서 삼위일체와 유아세례를 반대했다는 죄목으로 산채로 화형에 처해질 것을 언도 받았다. 자유파는 칼빈에 대항하는 세르베투스를 지지했다. 결국 그는 1553년 10월에 화형에 처해졌다. 그의 처형은 결국 칼빈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역사와 후대의 사람들은 세루베투스의 화형에 대한 비난과 함께 그 책임을 칼빈에게 돌리고 있다.



Ⅶ. 그의 말년의 사역

제네바의 개혁을 위한 14년 간(1541-1555)의 계속된 투쟁은 칼빈의 승리였다. 1555년 2월 선거에서 소 의회의 행정관 4명 모두 칼빈파에서 선출되었으며 200명의 의회도 절대다수가 친 칼빈파에서 선출되었다. 자유파에 속하여 칼빈 반대 운동을 전개했던 페랑과 버틀러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도 세르베투스의 죽음으로 제네바를 떠났다. 장로회는 정부의 간섭 없이 출교시킬 수 있는 영구적인 권한을 승인 받게 되었다.

칼빈이 제네바 개혁 사역의 목표는 (1)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교회 사역의 질서와 규율의 고수 (2) 제네바 시에 좋은 교육 기관을 설립하는 것 (3) 다른 나라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음으로 민족과 국경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1559년 제네바 시는 칼빈에게 시민권을 줌으로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학술원 설립 허가를 받았다. 그 해 6월 5일에 학술원이 공식으로 개원되었으며 데오도르 베자(Theodore Beza)가 원장으로 피선되었다. 5명의 교수진과 함께 칼빈은 신학을 가르쳤다. 이제 교회 지도자 양성을 위한 그의 꿈이 실현된 것이다. 처음에는 162명으로 개원했으나 5년 만에 13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칼빈의 신학 강의를 들으러 몰려왔다. 이 제네바 아카데미는 오늘날 제네바 대학의 전신이다.

칼빈의 개혁 운동은 그의 생존시에 이미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유그노(Hugnote) 운동이 칼빈의 사상을 받아들여 1552년 파리 대회에서 칼빈주의적 신조를 채택했고, 네덜란드에서는 칼빈주의자 브라이(Bray)에 의해 1561년 벨직 신앙고백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는 1560년 그의 제자에 의해 장로교 신조가 채택되어 장로교 국가가 되었다. 영국 교회는 칼빈주의 영향 하에 '39개 신조'를 채택했고 곧 청교도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독일 남부 지역은 칼빈주의 일색으로 변하여 1563년에는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이 채택되었다. 스위스에서는 취리히, 바젤, 베른 등이 칼빈주의를 따르게 되었다.

칼빈은 몸이 허약한 사람이었다. 위궤양, 관절염, 천식, 폐병 등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열정적인 사역을 계속했다. 그는 연 200회의 설교와 200회의 강의를 하였으며 성경 각 권의 주석을 썼다. 그는 <기독교 강요>를 계속 재편집했고 20년에 달하는 신학 논문을 발표했다. 그의 저작 전집은 모두 59권이 달한다. 그는 임종이 가까울 무렵 비명 없는 무덤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1564년 5월 27일에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의 나이 55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