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장로교 정치제도의 발전방향

2007.08.21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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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장로교 정치제도의 발전방향
선지자선교회 변 종 길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서론

  사도행전 14장 23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소아시아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는데, 그 후에 다시 그곳으로 가서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세운 다음 하나님께 부탁하고 떠나갔다. 이처럼 바울이 각 교회에 장로들을 세웠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도 바울은 자기 혼자서 모든 교회를 일일이 관리하지 않았다. 옛날에는 교통도 불편하고 통신도 발달하지 않아서 매주일마다 여러 교회를 다 돌아볼 수도 없거니와 교회의 모든 일을 자기가 다 지도하고 통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바울은 교회를 세워 놓고 떠날 때에 너희들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라고 하지도 않았다. 마치 클럽처럼 무슨 일이 생기면 모든 성도들이 다 모여서 결정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교회는 처음부터 의견이 분분하고 중구난방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대신에 바울은 교회 안에서 믿음이 좋고 훌륭한 사람들을 장로로 세워서 교회를 다스리도록 했다. 이는 세상의 정치 형태로 말하면 '공화정(共和政)'에 가까우며, 교회의 정치형태로 말하면 '장로회 정치'이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의 상당수 교회는 장로교회이다. '대한예수교 장로회'란 말은 교회 정치 형태가 '장로회 정치'란 의미이다. 그렇다면 장로회 정치는 무엇인가? 그리고 장로회 정치 제도의 장단점은 무엇인가? 그리고 한국의 장로교회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 성경과 역사적인 자료들, 그리고 현재의 한국 교회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1. 교회 정치 제도의 종류

  먼저 교회 정치 제도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하는 것부터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크게 나누어 세 종류의 교회 정치가 있다. 곧 '감독 정치'와 '회중 정치'와 '장로회 정치'가 있다.

1) 감독 정치

  감독 정치란 여러 개의 개교회를 돌아보고 다스리는 '감독(bishop)'의 권한을 인정하는 정치 제도이다. '감독'이란 한 교회만 돌아보는 사람이 아니라 여러 교회를 돌아보고 다스리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장로교회에는 감독이 없다. 장로교회에서는 아무리 능력이 있는 목사라도 다른 이웃 교회를 다스릴 수 없다. 즉 다른 교회를 주관하거나 간섭할 권한이 없다. 장로교회에는 모든 목사들이 동등하다. 그러나 옛날의 사도들은 여러 교회를 다스리고 지도하였다. 그래서 감독 교회는 초대 교회의 사도들을 본받아서 이 감독 제도를 주장하고 있다.

  감독의 가장 큰 권한은 '성직 임명권'이다. 예를 들면 감독은 어느 개교회의 담임 목사를 임명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 장로교회는 이와는 달리 공동 의회의 결의를 거쳐 목사를 청빙한다. 그래서 어느 한 사람의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의 뜻을 반영하여 결정하게 된다. 그러나 감독 정치에서는 감독이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교회의 담임 목사로 임명하여 파송한다. 그러므로 감독 교회 정치 제도하의 담임 목사는 그 교회 교인보다는 임명권을 가진 감독의 눈치를 더 보게 된다. 그러므로 목사는 교회를 돌아보는 것을 소홀히 할 위험성이 있다.

  오늘 본문 23절에 보면 "장로들을 택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택하다"는 단어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국의 '흠정역(KJV)' 번역에서는 장로들을 "임명하였다(ordained)"라고 번역하였다. 흠정역은 일반적으로 매우 좋은 번역이긴 하지만, 이 번역은 "King James Version"이라는 말 자체가 의미하듯이 제임스 왕의 후원으로 번역했기 때문에 왕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번역된 것들이 좀 있다. 즉 다소 권위적으로 이해될 수 있도록 번역된 것이 있다. 그러나 원문에 보면 "손을 들다(케이로토네오)"라는 단어가 사용되어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어떤 중요한 문제가 있을 때에는 시민들이 모여서 민회에서 직접 결정하였다. 이때 손을 들어서 투표하였기 때문에 이 '케이로토네오(cheirotoneo)'란 단어는 '택하다, 선출하다'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런데 화란에서 오랫동안 사랑받아 왔던 '국역 성경'은 "손을 들어서 장로들을 선출했다"라고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다. 이를 볼 때 화란의 국역 성경이 이 구절의 원래 의미에 충실하며 장로교회의 정치 원리를 잘 드러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감독 교회의 형태를 띠고 있는 교회로는 '감리교회'와 '영국 성공회'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있다. 감리교회는 요한 웨슬리가 창시한 교회를 말한다. 영국 성공회는 1533년에 영국의 헨리 8세가 로마 카톨릭과의 관계를 끊고 창설한 교회 형태를 일컫는다. 로마 카톨릭 교회 곧 천주교는 감독 교회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데, 평신도들 위에 사제가 있고 그 위에 주교가 있고 그 위에 대주교가 있으며 제일 꼭대기에 교황이 있다. 그래서 교황이 주교와 사제를 임명하며, 교황이 무엇을 말하면 그것이 곧 법이 되고 진리가 된다. 즉 교황이 절대적 권한을 가지고 있는 형태가 카톨릭 교회이다.

2) 회중 정치

  회중 정치는 다른 말로 독립 교회의 정치이다. 이것은 감독 정치와 정반대의 정치 제도이다. 회중 정치는 교회 구성원 개개인의 역할을 강조한다. 어떤 중요한 문제가 있으면 전체 교인이 모인 회의에서 안건을 의논하고 결정한다. 그리고 회중교회는 다른 외부의 간섭을 전혀 받지 않는다. 장로교회는 노회를 구성하여 개교회를 관리하며, 개교회에 문제가 있을 때에는 노회와 총회가 간섭하고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회중 정치에 의하면 개교회 위의 노회나 총회를 인정하지 않으며, 개교회의 '자율성'과 '민주주의' 원칙을 강조한다. 이에 해당하는 교회로는 '침례교회'와 '회중교회'가 있다. 회중 정치 제도에 의하면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교회간의 협력이 어렵다. 하지만 교회간의 협력이나 교제가 필요할 때는 '협의체'를 구성하는데, 이 협의체에서 의논하고 결정한 것은 구속력이 없다.

3) 장로회 정치

  장로회 정치 제도는 제네바의 존 칼빈에 의해 시작되었고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에 의해 발전되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장로회 정치 제도가 발전하였는데, 그 발전 과정은 다음과 같다. 스코틀랜드에서 종교개혁을 시작할 때 처음에는 탄압이 아주 심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교회를 바르게 세우려는 목사와 장로들이 매주 월요일 모여서 일종의 수양회 같은 것을 가졌다고 한다. 원래는 성경 공부를 하고 교제를 하기 위해 모였는데, 이것이 차츰 발전되어 교회에 대한 여러 문제들을 의논하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여기서 결정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노회(presbytery)'이다.

  노회(老會)란 장로회(長老會)를 뜻한다. 곧 목사와 장로들이 모여서 교회의 문제를 의논하고 결정하는 모임을 말한다. 이 '노회'가 중심이 되어 교회의 문제를 결정하는 정치 제도가 곧 장로회 정치 제도이다. 노회 위에 총회가 있고 노회 밑에는 개교회의 당회가 있다. 이 중에서 특히 노회에 중요한 권한이 주어져 있는 것이 장로회 정치 제도이다.

  이 장로회 제도에서는 신약 성경에서 나오는 '감독'을 '장로'와 같은 의미로 보았다. 여기서 '감독'이란 감독 정치에서 말하는 바 목사들 위의 감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원어상 교회를 '돌아보는 자(episkopos)'란 의미이므로 장로와 같은 의미로 보았다. 또한 디모데전서 5장 17절에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고 하였는데, 이 구절을 따라 '가르치는 장로'와 '치리하는 장로'의 두 종류로 나누었다. 이 '치리하는 장로'는 오늘날의 장로를 말하고 '가르치는 장로'는 목사를 뜻한다. 즉 목사는 교육과 치리를 담당하는 장로이고, 일반 장로는 치리만 하는 장로이다. 이 목사와 장로들이 모여서 당회를 구성한다. 이 장로교는 스코틀랜드에서 발생하여 미국으로 건너가서 크게 발전하였다. 그리고 한국에 선교사들이 들어올 때 미국의 장로교 선교사들이 초기에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한국에는 장로교회가 뿌리를 내리고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2. 장로회 정치 제도의 장단점

  그러면 장로회 정치제도의 장단점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장점

  첫째, 교역자들의 일방적인 독재를 견제할 수 있다. 감독 정치 하에서는 교역자가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했다. 카톨릭에서는 성직자가 결정하면 끝이 난다. 여기에 이의를 달 수 없다. 그러나 장로회 정치 하에서는 목사 혼자서 교회 일을 다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설교는 목사가 담당하지만, 교회의 행사는 장로들과 모여서 의논하여 결정하게 하는 제도이다. 평소에는 목사가 문제없이 잘 하겠지만, 목사도 사람이기 때문에 행정이나 운영에 완벽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교회에 당회가 있어서 장로들과 함께 의논함으로써 실수를 줄일 수 있게 된다.

  둘째, 신앙이 좋고 경륜이 있는 사람을 지도자로 세워 교회를 다스리게 하기 때문에 매우 효율적이다. 예를 들어 어떤 문제가 있을 때에 모든 회중이 모여서 의논해야 한다면, 이것은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평교인들은 예배에 1시간 참석하는 것도 힘들어 하는데, 매주마다 예배 후에 1시간씩 의논한다면 교인들이 견디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교회에 잘 오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일을 모든 교인들과 의논할 때 이는 매우 비효율적이다. 이와 반대로 장로회 정치 제도는 대부분의 문제를 목사와 장로들만 모여서 의논함으로써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다.

  셋째, 이 제도는 건덕적이다. 예를 들자면 교회에는 평교인들이 다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을 의논해야 할 때도 있다. 교회에는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혹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징계 문제를 다룰 때 목사와 장로들이 심사숙고하여 적당히 권면을 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 징계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을 모든 교인들이 모여서 누가 어떤 죄를 지었느니 하고 공개적으로 다룬다면, 이는 덕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 장로회 정치 제도는 교회의 건덕을 좋은 제도이다.

  넷째, 장로회 정치 제도는 교회 전체의 동의나 협력을 얻어내는 데 유리한 제도이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수련회를 한다고 하자. 목사 혼자서 장소와 날짜 등 모든 것을 다 결정하여 동해안으로 가자고 하면 참여가 부진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성도들 중에는 서해가 좋다, 남해가 좋다, 지리산이 좋다 등등 의견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당회에서 장로들과 의논하여 결정하면 교회 전체의 결정이 될 수 있다. 따라서 교인들은 당회가 결정하였으므로 이에 따르자고 쉽게 동의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제도는 교인들의 동의와 협력을 얻어내는 데 유리한 제도이다.

다섯째, 교인의 교회 행정과 봉사에 참여를 확대함으로써 봉사의 보람을 갖게 한다. 즉 목사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하여 지도하고 다스리는 것보다 장로들이 함께 참여하여 의논하고 교회 일에 참여함으로써 봉사의 보람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회중교회처럼 모든 교인들이 참여하는 것은 아니므로 한계는 있다.

2) 단점

  그러면 장로회 정치제도의 단점은 무엇인가? 장로회 제도가 비록 성경적으로 옳고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인간이 참여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장점이 있는 반면 단점도 있다. 이를 좀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장로에게 너무 많은 권한이 부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장로회 제도는 교인 전체가 교회 행정에 다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인격이 겸비된 소수의 사람을 뽑아서 권한을 위임한 것이다. 그렇게 되다 보니 장로들에게 권한이 많이 주어지게 되었다. 감독 정치  제도하에서는 교역자들에게 권한이 너무 많이 주어져서 문제가 되었다면, 장로회 정치 제도는 장로들에게 권한이 너무 많이 주어져서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한국 교회에서는 장로들에게 권한이 많이 주어진 반면 책임지는 것은 너무 미약한 경향이 있다.

  둘째, 특정 장로가 문제를 일으킬 경우 이것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가 미흡하다. 교회에는 문제가 많이 있다. 물론 문제가 있을 때에 교역자는 자신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한다면 도덕적으로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즉, 장로 한 두 사람이 고집을 부리고 문제를 일으켜서 교회를 어렵게 할 경우 이를 제어할 수 있는 장치가 현재 한국의 장로교회에서는 미흡하다. 따라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실제로 중요한 문제이다.

  셋째, 목사와 장로를 너무 같은 수준에서 보는 것도 문제이다. 장로교회의 원리에 의하면 목사도 장로로 보았다. 신약 성경에서 '장로'는 헬라어로 '프레스비테로스(presbyteros)'인데, 이는 원래 원로(元老) 곧 나이 든 사람을 말한다. 이 원로는 옛날 유대에서 나이가 많고 경험이 있고 인품이 있는 사람을 지도자로 세워서 마을의 일들을 처리하게 한 것에서 유래했다. 따라서 '장로'란 연륜이 있고 경험이 많은 '지도자'를 뜻한다. 사도 바울이 교회를 세우고 장로들을 세웠는데, 이 장로는 교회를 지도하는 '지도자'이다. 그래서 오늘날 장로보다는 의미가 넓다. 그래서 목사도 교회의 지도자라는 의미에서 장로라고 불린다. 그리고 오늘날의 장로도 교회의 지도자이기 때문에 장로라 불린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와 장로를 다같이 '장로'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목사와 장로를 '모든 면에서' 같다고 보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목사와 장로는 같은 장로로 볼 수 있는 측면도 있지만 다른 측면도 있다. 목사는 전적으로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고 복음을 위해 훈련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장로는 세상 일을 하면서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사람이다. 따라서 서로의 위치를 존중하면서 일해야 하는 것이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은 잘못이다. 성경에서도 분명히 '다스리는 장로들'과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들'로 구별하였다(딤전 5:17).

  넷째, 장로를 교인의 대표로 보는 생각도 잘못이다. 한국 교회에서는 장로를 '교인의 대표자'로 보는 경향이 농후하다. 그러나 장로는 교인의 대표로 세워진 것이 아니다. 한국 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목사는 노회에서 파송되어 오지만, 장로는 교인의 대표니까 교회의 주인은 장로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이들은 목사를 고용된 사람이라고까지 생각한다. 이것은 직분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온 것이다. 목사든 장로든 집사든 다 하나님께서 세워서 맡기신 직분이다. 즉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인도하기 위해 필요해서 세우신 직분이다. 개혁교회의 "장로, 집사 장립 예식문"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지상의 교회를 다스리시고 돌보신다. 그리스도는 이를 위해 사람을 사용하시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그는 그의 교회에 직분자들을 주신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른 것이다. 장로는 교인의 대표자라는 생각은 잘못된 인간적인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교회 안에 갈등을 일으키기 쉽다. 그래서 한국 교회 안에는 목사와 장로간의 갈등과 대립이 매우 많다. 교회 안에서 특히 당회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가 많다. 그러므로 교회의 직분은 목사나 장로나 집사 모두 다 하나님이 세우신 직분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다섯째, 장로의 정치제도는 본질적인 문제로 교회 회중 전체의 뜻을 반영하는 데 미흡하다. 장로회 정치 제도에는 불가불 약간의 권위적인 면이 남아 있다. 장로회 제도는 교인들 중에서 소수를 뽑아서 다스리게 하기 때문에 회중 전체가 개입되어 참여하는 것이 미흡하다. 물론 교회에 권위가 살아 있어야 하고 모든 사람이 교회 행정에 다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너무 지나쳐서 불필요하게 권위주의적으로 되고, 평신도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때에 따라 평신도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도 존중해야 할 필요성도 있는 것이다.

3. 장로직 임기제

  다음으로 필자는 현재 한국 교회가 당면한 한 중요한 문제를 언급하고자 한다. 이는 곧 장로직 임기제에 관한 것이다. 장로직을 임기제로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한국 교회의 장래를 바라보면서 원리적으로 말하고자 한다.

1) 신약 성경과 장로직

  물론 신약 성경에는 '장로직 임기제'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종신제'로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도 않다. 성경에는 어느 말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신약 성경을 읽어 볼 때 대체로 신약 교회의 장로들은 종신토록 봉사했다고 생각된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일반적으로 느끼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종신제를 따라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성경을 보니까 장로들은 종신토록 봉사하게 되었으므로 이것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우리는 상당히 미묘하지만 구분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교리와 진리 문제, 즉 구원이나 신앙 생활에 관계되는 문제는 오늘날 우리의 신앙 생활의 표준이 된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만고불변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시대가 변했으니까 오늘날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교회 제도나 교회를 섬기는 봉사의 방법 중에서 어떤 것은 꼭 불변의 진리는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이 있다. 장로를 세우는 것은 우리가 따라야 한다. 그러나 세부적인 것까지 모든 것을 오늘날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초창기 교회의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면 초대 교회는 거의 모든 교회가 가정 교회였다. 즉 가정에서 모여 예배 드리고 식사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의 교회도 전부 가정에서만 예배 드려야 하고, 교회에서 예배 드리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초대 교회는 예배당 건물도 없었고 성도들도 얼마 되지 않았다. 사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전도했지만, 그 때 한 교회에 교인이 많았다고 볼 수는 없다. 아마 몇 십 명 또는 몇 명 안팎이었을 것이다. 에베소 교회 같은 교회는 어쩌면 백 명이 넘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교회는 어느 유력한 성도의 집에 모여 예배 드렸을 것이다. 신약 성경 어디에도 사도 바울이 교회당을 지었다는 기록이 없다. 아마 교회당을 건축했다면 많은 곳에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그의 생애를 마쳤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처음에 사도로서 복음을 지중해 연안 일대에 편만하게 전해야 했기 때문에 교회당을 지을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교인들 중에서 신앙이 좋고 부유한 성도의 집에 모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도 가정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하나 예를 들어보자. 신약 성경에는 주일학교를 했다는 기록이 없다. 따라서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교회도 주일학교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은 잘못이다. 처음에는 초창기라서 주일학교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아이들을 양육하기 위하여 주일학교를 세우고 교사들을 임명하고 주일학교를 운영하는 것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은 어린아이들에게 신앙 교육을 잘 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진리의 표준이다. 그러나 주일학교를 조직할 것인가 말 것인가, 어떤 식으로 조직할 것인가 하는 것은 성경에 모두 기록된 것은 아니다. 이런 것은 시대와 형편에 따라 교회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장로에 대해 종신제냐 임기제냐 하는 것도 절대 불변의 진리나 교리는 아니다. 오히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과 교회를 바르게 섬길 수 있는가? 란 점에서 판단할 수 있는 실제적인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

2) 역사적 고찰

  역사적으로 이 문제를 고찰해 보면, 개혁교회는 대부분 임기제를 실시했다. 그것은 실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 주된 이유는 권위주의를 피하고 교회 정치에 대한 평신도의 영향력을 증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를 지내 오면서 천년 이상 교권에 눌려 온 성도들이 권위주의를 피하고 평신도들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16세기의 종교 개혁자들이 장로에 대해서도 임기제를 도입하게 된 것이다.

  제네바의 칼빈은 이렇게 보았다. 즉 역사의 교훈을 고려해 볼 때 장로 임기제를 실시하는 것이 교회를 위해 큰 유익이 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과거 중세 카톨릭 교회를 보면 성직자가 교회에서 독재를 하게 되고 교인들이 압제를 당했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성직자만 자유로웠지, 교인들은 노예와 다름없었다. 신부가 말하면 꼼짝 못했다. 거기에는 복종밖에 없었다. 그래서 중세 천년 동안 교인들을 영적으로 우매하게 만들었고 노예처럼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이 이것을 타파했다. 칼빈은 교인들이 선출하는 장로직을 도입했다. 교인들이 장로를 선출한다는 것은 중세에는 없었던 것인데, 종교개혁 시대에 다시 부활된 것이다. 곧 초대 교회에 사도들이 했던 것을 부활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목사와 장로들이 교회를 치리하도록 했다. 이 장로에 대해 칼빈은 일시적으로 봉사하는 것이 좋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 있는 여러 능력들과 은사들이 가능한 한 많이 나타나고 발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다른 사람들도 자격이 있으면 다음 기회에 장로를 함으로써 여러 사람이 은사를 발전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며, 또한 교회 안에서는 어떠한 독재도 방지되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교자의 경우는 다르다고 보았다. 종교 개혁자들은 목사를 '설교자'로 보았다. 이것은 그 만큼 설교의 직분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이 회복한 것은 바로 설교의 권위이다. 즉 예배에 있어서 미신적인 성찬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증거가 핵심이라고 하여 목사를 '설교자' 또는 '말씀의 수종자'로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설교자의 경우는 장로와 다르다고 보았다. 설교자의 직분은 일시적이 아니라 평생토록 주어진다. 그리고 이 직분을 위해서는 수년간의 준비가 필요하다. 실제로 한국에서 목사가 되기 위해서 대학부터 계산하면 대학 4년, 대학원 3년, 강도사 3년 합해서 10년이 걸린다. 이렇듯 목사가 되는 것이 참 어렵다. 그리고 목사직을 위해서는 생애 전체를 바친다. 곧 다른 세상 직업을 다 버리고 전적으로 목사직에 종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목사에 대해서는 임기제를 도입할 수 없다고 보았다.

  제네바 교회에서는 장로와 집사들을 해마다 새로 임명했다. 물론 재임명될 수는 있었지만 임기는 1년으로 정해져 있었다. 제네바 교회에서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있었다. 그것은 장로들을 교회가 아니라 제네바 시의회가 해마다 임명했기 때문이었다. 즉 종교개혁 당시의 제네바는 교회와 시의회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과는 다른 측면이 있었다. 12명의 장로들은 해마다 2월에 1년 임기로 임명을 받았다. 칼빈 사역 후반기에는 '목사회'에서 합당한 장로 후보를 시의회에 추천했다. 이 제도가 좋다고 해서 많은 다른 곳에서도 호응을 받았다.

  칼빈 이후로 프랑스 개혁교회가 칼빈의 제도를 따랐고 화란 개혁교회도 칼빈의 원리를 따라 장로와 집사 임기제를 따랐다. 1571년 엠던(Emden) 총회에서 장로와 집사의 임기를 2년으로 정하였다. 이 기간은 교회 형편에 따라서 늘일 수도 있고 줄일 수도 있다고 하였다. 1574년과 1578년의 도르트레흐트(Dordrecht) 총회에서는 엠던 총회의 결정을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1581년 미들버르흐(Middelburg) 총회에서는 장로와 집사의 임기는 2년으로 하고 매년마다 그 정수의 반을 교체하도록 결정했다. 그러나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에는 다르게 할 수 있도록 했다. 곧 '2년'이란 것은 절대적인 원리가 아니라 교회 형편에 따라 달리 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특별한 사유가 없을 때에는 2년으로 하도록 했다. 그 후의 총회들은 이 결정을 그대로 따랐다.

3) 현재의 개혁교회

  이처럼 개혁교회의 전통을 보면 장로의 임기는 종신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현재 화란 개혁교회는 대개 장로의 임기를 4년으로 하고 있다. 그 기간은 교회의 형편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 예를 들면 시골과 같이 장로를 구하기 어려울 때에는 좀더 연장할 수도 있고, 다른 교회에서는 3년으로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개는 4년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장로가 4년 동안 봉사하고 나서 신임투표를 하고 다시 봉사한다는 것이 아니라, 4년을 봉사하고 나면 완전히 장로직에서 물러나서 평신도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1년이 지나면 다시 장로로 선출될 수 있다. 그래서 선출되면 다시 장로로 봉사하게 되고, 떨어지면 그냥 평신도로 남는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어떤 교회에서는 장로임기제도를 형식적으로 시행하고 있다고 한다. 즉 3, 4년 봉사하고 나면 신임투표를 해서 다시 봉사하게 한다. 그것도 3분의 2 찬성이 아닌 과반수 찬성으로 하거나, 심지어 어떤 교회에서는 당회에서 투표하기도 한다. 이렇게 형식적으로 할 바에야 차라리 안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된다. 화란 개혁교회는 완전한 장로임기제이다. 필자는 화란의 장로들에게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 화란의 장로직은 말 그대로 봉사직이다. 한번은 알고 지내던 장로를 길에서 만나서 "장로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더니, 그 장로님은 웃으면서 자기는 이제 더 이상 장로가 아니라고 했다. 즉 화란은 장로 임기가 끝나면 평신도로 돌아오고 장로라는 호칭도 쓰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장로와 집사는 대개 종신제로 하고 있다. 물론 은퇴 연령이 있어서 종신제에서 약간 후퇴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거의 종신제이다. 이런 종신제는 한국 교회의 초창기에는 필요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20세기 후반이 지나고 21세기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각도에서 한국 교회의 문제를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성경으로 돌아가야 되고, 종교개혁 당시로 돌아가야 되고, 개혁교회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5. 한국 장로회 제도의 개선 방향

  마지막으로 한국의 장로회 제도의 개선 방향에 대해서 시간 관계상 간략히 두 가지만 말하도록 하겠다.

1) 장로직의 임기제 도입

첫째로, 장로직의 임기제 도입이 필요하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는 국내에 찬반토론이 있고 반발이 많은 것으로 안다. 언젠가 서울에서 토론이 있었으나 아직까지 채택하는 교회는 별로 없다. 지방은 더 하리라 본다. 그렇지만 이제는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필자는 이것이 앞으로 불가피하며 대세라고 본다. 앞으로 10년 내지 20년이 지나면 상당한 변화가 있으리라고 본다. 왜냐하면 장로의 권한이 너무 강해지면 피해가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물론 대다수는 봉사를 잘 하고 교회에서 충성해 왔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나쁜 영향이 많이 흘러 들어오고 있다. 또한 평신도들의 소외도 심화되고 있다. 장로회 제도는 카톨릭의 교역자의 전횡을 막는 데는 기여했으나, 지금에 와서는 장로들이 권위를 부리는 제도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평신도들이 소외되기는 마찬가지이다. 지금 시대는 인터넷을 통하여 근본적인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물론 인터넷은 단점도 많이 가지고 있지만, 그 중 유익한 것 하나는 이로 말미암아 '직접 민주주의'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앞으로 몇 년이 지나면 국가의 중요한 문제 대해 국민이 직접 의사를 표현하고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고대 그리스의 직접 민주정치가 오늘날 인터넷의 도움으로 다시 가능하게 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변화를 감안하면 장로의 임기제 도입은 필연적인 대세라고 본다.

  그리고 이왕 도입해야 한다면 빨리 도입하는 것이 좋다. 필자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자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대세라도 성경에 어긋나고 개혁교회의 원리에 맞지 않으면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 이 때문에 당하는 고통과 손해와 고난은 감수해야 하고 핍박으로 여겨야 한다. 그렇지만 원리가 옳고 교회에도 유익이 되고 시대도 그렇게 나아간다면 도입을 주저할 필요가 없다. 가능한 한 빨리 도입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선점효과' 때문이다. 즉 먼저 뛰어들었을 때 누리는 유익이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특히 인터넷 업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무료전화 시스템인 '다이얼 패드'를 들 수 있다. 이것은 다른 회사도 곧 개발할 수 있는 기술인데, 이 회사의 개발이 다른 회사들보다 몇 달 앞섰다는 것이다. 사실 인터넷 업체에서는 다른 회사보다 3개월 앞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지금은 다이얼 패드가 서비스를 시작한 지 6개월 이상 지나 1천만명 이상의 회원을 확보했기 때문에 후발업체가 따라오기는 힘들어졌다. 이런 현상을 교회에도 적용할 수 있다. 물론 교회의 경우는 시간이 좀 길다. 그러나 교회에도 성경적으로 원리상 옳다면 먼저 도입하는 교회에 많은 유익이 있게 된다. 좋은 제도를 먼저 도입하게 되면 뭔가 신선하고 이미지가 좋게 되어 특히 젊은 층이 교회로 몰리게 된다. 그러므로 이왕 할 바에는 먼저 시행하여 선점효과를 노리는 것이 좋다. 또한 이왕 할 바에는 형식적인 신임투표제가 아니라, 완전한 임기투표제를 하는 것이 좋다.

2) 평신도의 참여 확대

  둘째로 평신도의 교회 행정에의 참여 확대이다. 우리는 21세기를 맞이해서 회중교회의 장점을 어느 정도 살릴 필요가 있다고 본다. 회중교회에 문제가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인 전체의 의견을 묻고 최대한 반영하려는 것은 이상적이고 좋은 점이 있다. 따라서 장로교회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회중교회의 장점을 살릴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것은 장로교회 제도를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장로교회가 옳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장로들을 택하여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교회의 장로회 제도는 유교적인 문화가 결부되어 권위적으로 나아가고 있고, 거기에서 평교인들과의 괴리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평교인들에게도 무언가 참여를 확대할 방향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장로교회의 원리를 무시하면서까지 평신도들을 당회에 참여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여전히 당회는 목사와 장로들이 모여 구성된 것이다. 교회의 주요 문제들은 말씀을 전하는 목사와 신앙이 깊고 오랜 경험을 쌓은 장로들이 다루는 것이 옳다. 그리고 교회 일 중에는 평교인들이 알면 상처받는 일도 있다. 따라서 당회는 그대로 존속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교회 교인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할 방안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공청회를 생각할 수 있다. 즉 교회당을 건축할 때 어떤 모양이 좋은지 평신도들에게 말할 권리를 주는 것이 참여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청회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교회가 시험에 들 때에는 공청회가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공청회가 바람직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음으로 우리는 인터넷을 생각할 수 있다. 인터넷에는 게시판이 있다. 그러나 게시판 운영도 어려움이 있다. 엉뚱한 사람들이 들어와서 이상한 글을 싣고 나갈 때가 있기 때문에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신앙과 교회에 손해가 되는 글이 올라오지 않도록 게시판을 엄격하게 관리하든지, 이것이 어려우면 폐쇄하는 것이 낫다. 다음으로 건의함 설치를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상당히 유익하다고 생각된다. 물론 평소에는 이용자가 별로 없겠지만, 몇 년이 가도 평교인들이 목사와 당회에 말을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럴 때에 글을 써서 건의함에 넣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목사가 상담 시간을 정해 놓고 교인들이 찾아오도록 하는 것이다. 평소에는 필요가 없으나 어떤 문제가 발생한다든지 어떤 중요한 문제에 있을 때에 이러한 방안을 시행하는 것도 매우 유익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문제가 일어났을 때에 통로가 없으면 교인들끼리 모여 문제에 대하여 수근수근거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상담 시간은 이런 것을 피하고 대화의 통로를 열어 놓는다는 면에서 필요하다. 그 외에 공동 의회를 활성화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장로교회의 정치 제도의 원리를 보면 당회가 있고 제직회가 있고 공동의회가 있다. 그러나 공동의회는 1년에 한두 번 모이는 것으로 끝나며 대부분의 경우 형식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실 공동의회는 교회의 최고의결기구인데 이것을 좀더 활성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21세기를 맞이한 현재 한국 교회의 시점에서 볼 때 교회 행정에 평신도들의 참여를 어느 정도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성경의 원리를 다라 지혜롭게 하여야 한다.

결론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성경 구절을 한 곳 살펴보고 마치려고 한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12절에 보면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11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직분을 주셨음을 말한다. 곧 사도와 선지자, 그리고 복음 전하는 자, 그리고 목사와 교사로 주셨다. 이어서 12절은 직분을 주신 목적을 말하고 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려 하심이라." 즉 직분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더 높은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12절의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라는 우리말 번역은 좀 부정확하다. 여기에서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와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가 두 가지로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원문에 보면 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 곧 "성도들을 무장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로 되어 있다. 좀더 직역하면 "성도로 하여금 봉사의 일을 하도록 무장시키며"이다. 즉 하나님께서 교회에 직분을 주신 목적은 성도들로 하여금 봉사의 일을 하도록 무장시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무장(武裝)'이라는 것은 준비를 시키는 것을 말한다. 곧 군인이 전쟁에 나가서 싸울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키고 갑옷을 입히고 준비를 시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목사와 장로와 집사 등의 직분을 주시는 것은 모든 교인들로 하여금 봉사의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하면 직분자들이 다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 교회는 직분자들이 다 봉사하고 만다. 그래서 평신도들은 (거의) 봉사하지 않고 예배만 드리고 집으로 돌아간다. 만약 평신도에게 왜 봉사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자기는 직분을 받지 못해서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처럼 직분을 받아야만 봉사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위 12절 말씀을 잘 이해한다면 모든 직분자들이 해야 할 일은 모든 교인들이 봉사하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고 훈련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와 장로들은 자신이 모든 일을 다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신도들을 끌어들여 그 사람들이 교회에서, 그리고 가정과 사회에서 봉사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협력자가 되고 조력자가 되도록 부름받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한 사람만 수고하고 한 사람만 영광받는 것이 아니라, 또는 소수의 사람만 수고하고 소수의 사람만 영광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인들이 함께 수고하고 함께 영광받는 그러한 체제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교회의 모습이며, 개혁교회 곧 우리 한국의 장로교회가 나아가야 할 모습이다. 따라서 참 교회에서는 "나는 직분이 없으므로 봉사할 수 없다"는 말은 나오지 말아야 한다. 모든 성도들이 다 함께 봉사하고, 집사와 장로는 평교인들의 조력자가 되어서 더욱 열심히 봉사함으로 다 함께 봉사의 즐거움을 누리는 교회가 되어야 올바른 교회이다. 우리 한국 교회가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조금이라도 유익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 이 글은 지난 2000년 8월 1일 대구 명덕교회(장희종 목사 시무)에서 행한 특강을 토대로 정리하여 2000년 10월 21일자(상), 10월 28일자(중), 11월 4일자(하) [기독교보]에 게재한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