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 헌사연구에 대하여

  선지자선교회

2016. 7. 20. 선지자문서선교회 김반석

 

기독교강요(1536년 초판)에는 두 축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헌사부분이며 또 하나는 교리부분이다. 헌사는 신앙 신조에 관한 것이라면 교리는 성경 진리에 관한 것이다. 우리 교회가 그동안 기독교강요에서 교리 부분은 많이 연구하였으나 헌사 부분은 많이 연구하지 못한 것 같다.

 

헌사는 다음과 같은 주제로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 주제는 헌사를 읽으면서 대략 발췌한 것이다. 누락된 부분은 여러분들이 보완하시기 바란다.

 

첨부하면, 기독교강요의 헌사를 연구하면 곧 개혁주의 신앙을 연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헌사에서 연구 주제

 

1. 이 책을 저술한 본래의 목적에 대하여

 

2. 그 당시 프랑스 사람들의 신앙에 대하여

 

3. 이 책을 저술한 형태에 대하여

 

4. 이 교리를 중상모략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5. 재판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6. 칼빈의 신앙에 대하여

 

7. 그 당시 교회의 형편에 대하여

 

8. 왕의 통치에 대하여

 

9. 죄인 사람 자체에 대하여

 

10. 하나님의 구속에 대하여

 

11. 우리 중에 핍박당한 사람들에 대하여

 

12. 로마 가톨릭 사제에 대하여

 

13. 로마 가톨릭 교리에 대하여

 

14. 기적을 요구함에 대하여

 

15. 거짓 표적과 기사에 대하여

 

16. 교부들이 범하는 것에 대하여

 

17. 교회에서 새긴 형상에 대하여

 

18. 교부가 출교의 벌을 내리는 것에 대하여

 

19. 교부들의 수많은 제도와 교회법과 교리의 제정에 대하여

 

20. 하나님의 보복에 대하여

 

21.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통치에 대하여

 

22. 교회에 대하여

 

23. 로마 교황과 감독들의 무오성 주장에 대하여

 

24. 공회와 공의회에 대하여

 

25. 제후들에 대하여

 

26. 교황들, 추기경들, 주교들, 수도원장들, 그리고 사제들이 배출에 대하여

 

27.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 교리들과 구별에 대하여

 

28. 사도들 시대에 대하여

 

29. 거짓된 고소에 대하여

 

30. 이 고백을 폐하께 바침에 대하여

 

 

기독교강요(1536년 초판 완역) 헌사

 

지극히 위대하시고 지극히 영명하시며 지극히 기독교적인 프랑스의 왕 프란시스 폐하에게 존 칼빈은 주 안에서 평강과 문안을 드립니다.

 

1. 이 책이 쓰여진 배경

 

지극히 영광스런 왕이시여, 제가 처음 이 저술에 손을 댔을 때 폐하에게 바쳐질 어떤 것을 쓴다는 것은 꿈도 꾸지 않던 일이었습니다. 나의 목적은 어떤 기초적인 사실들을 전달함으로 그것에 의해 종교에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 참된 경건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특별히 우리 프랑스 사람들을 위하여 이 일에 착수하였는데 그들 중에 상당수는 제가 보기에 그리스도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약간의 지식이라도 가지고 있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 책 자체도 그것이 나의 의도였다는 것을 증거 하는데 그 이유는 이 책이 단순하고도 초보적인 가르침의 형태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악한 사람들의 격노가 당신의 영토에서 너무나 멀리 파급되었기 때문에 건전한 교리가 발붙일 장소가 없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만일 내가 가르치기에 착수한 자들에게 교훈을 주고 동시에 폐하 앞에 신앙을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것으로부터 폐하는 오늘날 칼과 불로써 폐하의 영토를 교란시키는 저 미친 사람들이 불같은 성화로 반대하고 있는 교리의 속성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저는 그들이 투옥, 추방, 재산 몰수, 그리고 화형에 처해야 하며 육지와 바다에서 박멸해야 한다고 부르짖는 바로 그 교리의 대부분을 신봉하고 있다는 것을 주저 없이 고백하는 바입니다.

 

정말이지 저는 그들이 우리의 명분을 당신에게 가능한 한 혐오스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끔찍한 보고들로써 당신의 귀와 마음을 가득 채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자비하심에 합당하게, 만일 단순히 고발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면 말로나 행위로나 무죄한 자가 남아 있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당신은 고려해야만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증오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이 교리 즉 제가 지금 당신에게 말씀 드리려 하고 있는 내용이 오래 전부터 모든 계층의 표결에 의하여 정죄되었으며 많은 법정의 판결에 의하여 폐기 처분 된 것처럼 가장한다 합시다. 그것은 분명히 부분적으로 그것이 대적들의 맹종과 능력에 의해 격렬한 배척을 받아 왔으며 부분적으로 그들의 허위, 트집, 중상에 의해 날치기로 또한 음흠하게 억압을 받아 왔다는 것을 말할 뿐일 것입니다. 한편 들어보지도 않고 이 교리에 대하여 피비린내 나는 선고를 내리는 것은 순전한 폭력인 것입니다. 부당하게도 그것을 반역과 악행으로 고발하는 것은 사기인 것입니다.

 

지극히 존경하는 왕이시며, 아무도 우리가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터무니없는 불평을 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중상모략들이 매일 당신 앞에 고백해지고 있는지 당신은 증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이 교리가 모든 질서와 시민이 정부를 전복하고 평화를 깨뜨리고 모든 법률을 폐기하고, 모든 신분과 재산을 박탈하려는, 한 마디로 모든 것을 뒤집어 버리려는 것 외에는 어떤 다른 목적도 갖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당신은 고발의 극히 적은 일부만을 듣고 있을 뿐입니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끔찍한 소문들이 널리 유포되고 있습니다. 만일 그러한 소문들이 사실이라면 그 교리와 그것을 만든 자들은 수천 번의 화형과 십자가형을 당해 마땅하다고 세상은 판단할 것입니다.

 

이처럼 지극히 사악한 비난들이 믿기워지고 있는 때에 그 교리에 대한 일반의 증오심이 일고 있는 것이 어찌 이상한 일이겠습니까?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협력해서 우리와 우리의 교리를 정죄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재판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감정에 사로 잡혀서 자기들이 집에서 가져온 편견들을 판결로써 선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자신의 고백에 의해서나 혹은 확실한 증언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지 않은 사람을 아무도 처벌하지 않는다면 자기들의 직무를 완전히 유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슨 죄에 대해서 입니까? 이 정죄된 교리에 대해서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무슨 권리로 그것이 정죄되었습니까? 이제 그들의 변호의 핵심은 바로 이 교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진실이라고 지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심지어 속삭일 수 있는 권리조차도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2. 박해받는 복음주의자들을 위한 탄원

 

이러한 이유로 인해, 무적의 왕이시여, 저는 정당하게 당신에게 이 송사를 충분히 심리해주시기를 청원하는 바입니다. 이 송사는 지금까지 적법한 절차 없이, 사법적 엄숙함 보다는 폭력적인 열기에 의해 취급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여기서 개인적인 변호를 함으로써 무사히 조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비록 제가 저의 조국을 지극히 사랑하는 인지상정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 속에서 추방되어 있는 것이 크게 유감스럽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모든 신자들의 공통된 주장, 곧 그리스도 자신의 주장을 기꺼이 붙들고자 합니다. 이 주장은 현재 폐하의 왕국에서 완전히 짓밟히고 철저하게 버림받은 상태에 놓여 있는데 그것은 페하의 승인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바리새인들의 폭정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주장이 수난을 받고 있다는 그러한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불경건한 사람들이 지금까지 크게 득세를 해서 그리스도의 진리가 추방되고 흩어져서 비록 소멸까지는 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여전히 가려져 있고 묻혀져 있으며 빛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련한 교회는 잔인한 살육에 의해 피폐되거나 혹은 추방을 당해 유배 중에 있거나 혹은 협박과 공갈에 압도당하여 감히 입도 열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경건한 자들은 광분해서 이미 기울어 가고 있는 벽을 강타하고 그들이 악착같이 추구하고 있는 박멸 운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한편 아무도 그러한 광분에 대항하여 교회를 지키고자 나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열렬히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무지한 자들의 오류와 경솔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왜냐 하면 소위 온건한 사람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오류와 경솔을 하나님의 가장 확실한 진리라고 부르고 있으며,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지혜의 신비를 부여해 주시지 못할 만큼 야비한 자들은 아니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처럼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극히 현명하신 왕이시여, 그처럼 정당한 변론에 대해 당신의 귀나 마음을 닫아버리지 않는 것이 당신을 위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특별히 아주 중요한 문제들,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게 땅위에서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의 진리가 어떻게 그 영예로운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스도의 왕국이 어떻게 우리 가운데서 온전하게 유지될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 걸려 있을 때에는 말입니다. 실로 이 문제는 당신이 듣고 인지할 가치가 있는 것이며 당신의 왕관의 영광에 어울리는 일입니다. 정말이지 이러한 생각이 진정한 왕을 만드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왕국을 통치하는데 있어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인식하는 것 말입니다(13:3).

 

만일 자신의 왕국을 통치하는데 있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 왕이 있다면 그는 왕의 법도를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산적 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자기의 왕국이 하나님의 홀, 즉 그의 거룩한 말씀에 의해 통치되고 있지 않는데도 그것이 지속적으로 번영하기를 바라는 자는 스스로 속고 있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예언이 없으면 백성이 흩어진다(29:18)” 한글 성경에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역자주)’고 선포하는 하늘의 음성은 거짓말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의 비천함에 대한 경멸이 당신으로 하여금 이러한 노력을 단념토록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말이지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천하고 낮은 미미한 존재들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물론 비참한 죄인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도 우리는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고전4:13 참조)이거니와 혹은 이름 붙일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천한 것들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는 그의 자비 외에 자랑할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으며(고후10: 17-18) 그것에 의해 우리는 영원한 구원의 소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공로는 전혀 없이 말입니다(3:5 참조).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자랑할 것이라고는 우리의 연약함뿐인데(고후11:30, 고후12:5, 12:9) 참조) 그들에게 있어서는 단지 고개짓으로 그것을 인정하는 것조차도 커다란 불명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교리는 기가 꺽임이 없이 세상의 모든 능력들 위에 우뚝 솟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에게서 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왕으로 삼으셔서 바다에서 바다까지 그리고 강들로부터 땅끝까지 다스리게하셨기 때문입니다.(72:8, 71:7, 빌게이트역) 그리하여 그는 그 철과 놋 같은 힘으로, 그 금은 같은 광채로 전 세계를 쳐서 그 입의 막대기로 마치 토기를 부스러뜨리듯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그의 통치의 장엄함에 관해 예언했던 것처럼 말입니다(2:32-35, 11:4, 2:9 종합). 사실 우리의 대적들은 우리가 거짓되이 하나님의 말씀을 핑계 삼아 사악하게도 그것을 더럽힌다고 소리칩니다. 폐하께서 소유하신 분별력을 발휘해서 우리의 고백을 읽어보시면 그것이 얼마나 악의에 찬 무고이며 파렴치한 말들인지를 판단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당신의 열심과 주위를 끌기 위해, 혹은 최소한 당신께서 우리의 고백을 읽을 수 있는 길을 준비하기 위해 어떤 것을 말씀드려야만 하겠습니다. 바울이 모든 예언은 믿음의 분수대로 해야 된다고 말했을 때(12:6), 그는 성경의 모든 해석을 시험하는 아주 명백한 규칙을 제시한 것입니다. 이제 만일 우리의 해석이 이 믿음의 규칙에 의해 평가된다면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옷을 입기 위해 우리는 미덕이 전혀 없는 벌거숭이이며, 하나님에 의해 채움을 얻기 위해 우리에게는 아무 선한 것이 없으며, 그분에 의해 자유를 얻기 위해 우리는 죄의 종들이며, 그분에 의해 비췸을 얻기 위해 눈먼 자이며, 그분에 의해 교정을 받기 위해 절름발이이며, 그분에 의해 지탱되기 위해 약한 자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믿음에 가장 잘 부합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모든 영광 돌릴 기회를 제거하여 그분 홀로 영광스럽게 부각되며 우리는 그분 안에서 영화로워하는 것보다 믿음에 더 잘 부합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고전1:31, 고후10:17 참조)? 우리가 이러한 것들이나 이와 유사한 것들을 말하면 우리의 대적들은 참견을 하면서 불평하기를 이런 식으로 우리가 자연의 맹목적인 빛과 기상의 준비들과 자유 의지와 영원한 구원을 받을만한 공로가 있는 행위들, 심지어 그들의 적선을 통한 구원까지도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모든 찬송과 영광, , , 그리고 지혜가 하나님에게만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이 생수의 샘물을 너무 많이 마셨다고 책망 받았다는 이야기를 읽고 있는 것입니다(4:14). 오히려 자신들을 위하여 웅덩이를 팠는데 물을 저장할 수 없는 터진 웅덩이를 판사람들이 심하게 책망 받았다는 이야기를 읽고 있는 것입니다(2:13).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형제요 구속자로 인식되는 곳에서 하나님이 구속해 주시는 아버지가 되심을 확산하는 것보다도 더 믿음에 가깝고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를 향한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8:32) 그분으로부터 모든 행복하고 성공적인 것을 자신 있게 기대하는 것보다 더 좋고 믿음에 가까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면 그들은 우리를 공격하면서 소리치기를 그러한 확실한 신뢰는 교만과 자만을 피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있는 어떤 것도 자랑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자랑해야만 합니다. 또한 우리는 주 안에서 자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 외에는 허세를 극복할 방법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고후10:17, 고전1:31, 9:23-24).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지극히 높으신 왕이시여, 우리의 주장을 전체적으로 간단히 검토해 보시고 만일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기”(딤전4;10) 때문이며, 우리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17:3) 임을 믿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당신이 분명히 발견하실 수 없거든 우리를 사악한 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사악한 자들로 여기십시오.

 

이러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쇠사슬에 묶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곤장을 맞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조롱을 당하면서 끌려 다니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추방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야만적인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도망을 다녀야만 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대적들을 보십시오(나는 사제들을 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지시와 의도에 따라 나머지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적대적인 행위를 일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 잠시 동안 어떠한 열심이 그들을 움직이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진정한 종교를 등한히 하고 멸시하도록 즉각 허용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에서 전수되어 내려오는 것이며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인정받는 자리를 차지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 어떤 신념을 견지하고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나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떤 신념을 갖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그가(그들이 일컫는 바) 맹목적인 신앙으로 자기의 마음을 교회의 판단에 맡기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명백한 불경에 의해 더렵혀진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도 그들에게는 별로 고통이 되지 않습니다. 교황청의 수위성과 거룩한 어머니가 되시는 교회의 권위에 대항하여 손가락을 드는 자만 없다면 말입니다.

 

왜 그들은 미사, 연옥, 성지 순례 따위의 시시한 문제들을 위해서 그토록 모질고 독하게 투쟁하는 것입니까? 아주 분명한 신앙이 없이는 그러한 것들 속에 참된 경건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부인하면서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그 어떤 것도 증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저들의 신은 배요”(3:9) 저희 부엌이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러한 것들이 제거된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요 심지어 사람도 아니라고 믿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배가 터지도록 먹는 반면 또 어떤 사람들은 겨우 부스러기만을 씹고 있다 할지라도 역시 그들 모두는 한 솥의 밥을 먹고 있으며 그 솥은 그러한 연료가 없으면 단지 식을 뿐 아니라 점점 얼어붙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자기 배에 가장 깊은 관심을 가진 자가 자기 신앙을 위한 가장 열성적인 옹호자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모든 사람이 한 가지 목표를 향해 진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의 지배권을 보존하거나 혹은 자기 배를 채우는 것입니다. 진지한 열심을 조금이라도 보이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3. 대적자들의 비난에 대한 논박 - 새로운 것, 불확실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 과 기적들의 가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의 교리를 공격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비난하며 거기에 온갖 이름을 붙여 명예를 훼손함으로써 그것이 증오와 의심의 대상이 되게 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새롭고최근에 생성된것으로 부릅니다. 그들은 그것을 의심스럽고 불확실한것으로 비난합니다. 그들은 그것이 무슨 기적에 의해 뒷받침되는가를 묻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그토록 많은 거룩한 교구들의 동의와 아주 오래된 전통에 대항하여 전통을 부정해 버리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고 묻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교회에 대항해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므로 그것이 종파 분리의 죄를 범하는 것임을 인정하든지 아니면 도무지 그런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던 수 세기 동안 교회가 죽어 있었던 것인지 둘 중에 하나를 인정하라고 우리를 몰아칩니다. 드디어 그들은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것은 열매에 의해서 정체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 종파들과 아주 많은 불온한 소란들과 커다란 무질서를 낳았다고 본다는 것입니다. 실로 그들이 속기 잘하고 무지한 대중들 앞에서 버림받은 주장을 매도하기란 극히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도 말할 기회를 얻게 된다면 방종하고도 낯 두껍게 거리낌 없이 쏟아 붓는 이 비난들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먼저, 그것을 새로운 것이라 부름으로써 그들은 하나님께 큰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은 새로운 것이라는 비난을 받을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는 그것이 그들에게는 새롭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그리스도도 그의 복음도 다 새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 나셨느니라”(4:25)는 바울의 설교가 고대의 것임을 아는 사람은 우리에게서 아무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알려지지 않은 채 오랫동안 파묻혀 있던 것은 인간의 불경건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해 우리가 그것을 되찾았으므로 그것이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이라는 주장이 마땅히 인정되어야 합니다.

 

동일한 무지가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의심스럽고 불확실한 것으로 보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께서 자기의 선지자를 통해 탄식하신 것입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1:3)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 그것의 불확실성을 조롱할지라도 만일 그들이 그들 자신의 피로써, 또한 그들 자신의 생명의 댓가로 그들의 교리를 인쳐야 한다면 그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엄청난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의 공포나 심지어 하나님의 심판대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기적을 요구함으로써 부정직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새로운 복음을 날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행하신 모든 기적들이 확정해 주고 있는 진리의 복음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비교할 때 그들은 이상한 능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계속되는 기적에 의해 자기들의 신앙을 확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그들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평온 했을 마음을 동요 시킬 수 있는 기적을 끝까지 주장합니다. 그들은 그처럼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우며 허망하고 거짓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령 그것들이 경이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진리를 대항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호는 기적에 의해서든지 혹은 사람들의 자연적 질서에 의해서든지 항상 그리고 모든 것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사탄도 자기의 기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비록 그것이 진정한 권능이라기보다는 사기에 불과하지만 단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미혹하기에 안성맞춤의 것입니다(살후2:9-10 참조). 마술사와 요술쟁이들은 항상 기적으로 유명했습니다. 우상숭배도 놀라운 기적들 때문에 더욱 조장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우리에게 마술사들이나 요술쟁이들의 미신을 재가해 주지는 않습니다.

 

옛날의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파성추로 단순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즉 그들도 기적에는 능했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제 어거스틴이 그때 도나투스주의자들에게 대답했던 것처럼 우리 대적들에게 대답합니다. 거짓 표적과 기사를 가진 거짓 선지자들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까지 미혹하러 올 것임을 주께서 예언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기적 행하는 자들을 경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24:24). 그리고 바울은 적그리스도의 통치가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사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살후2:9). 그러나 그들은 말하기를 이 기적들은 우상이나 마술사나 혹은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성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마치 우리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것이 사탄의 궤계임을 모르거나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고후11:14).

 

옛날 이집트인들은 예레미야를 경배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때 이집트에 장사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그에게 제사도 드리고 신적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그들은 우상숭배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거룩한 선지자를 오용한 것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처럼 그의 무덤을 숭배함으로써 뱀에게 물려도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은 자들에게 유혹을 역사하게 하사 거지 것을 믿게”(살후2:11)하는 것이 지금까지 항상, 그리고 앞으로도 아주 공정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 외에 우리가 달리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에게도 기적이 전혀 없지 않은데 그것은 아주 확실하고 조롱거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의 대적들이 자신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가리키는 기적들은 순전한 사탄의 미혹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로부터 허망한 데로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13;2 이하).

 

4. 교부들이 종교개혁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부당한 주장들

 

게다가 그들은 부당하게도 고대의 교부들이 우리를 반대한다고 주장합니다(나는 보다 나았던 교회시대의 고대 저술가들을 두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들이 자신의 불경건에 대한 지지자들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일 교부적 권위에 의해 승부가 결정된다면 우리 편에 있습니다. 이 교부들은 현명하고 우수한 글들을 많이 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흔히 일어나는 일들이 어떤 경우에는 그들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소위 경건하다고 하는 그들의 후손들이 지혜와 판단력과 정신력을 총동원하여 교부들의 결합과 오류들만을 숭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교부들이 썼던 훌륭한 글들을 이들은 이해하지 못하거나 잘못 설명하거나 혹은 왜곡시킵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황금 가운데서 쓰레기를 모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우리를 교부들의 대적이요 교부들을 멸시하는 자라고 몰아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부들을 멸시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만일 그것이 현재의 우리 목적이라면, 나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오늘날 우리가 말하고 있는 대부분이 교부들의 사상과 일치한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만물이 우리의 것이며(고전3:21-22) 우리를 섬겨야 하며, 우리를 주관할 수 없으며(22:24-25) 우리는 모든 일에 예외 없이 순종해야 하는(3:20 참조) 그리스도 한 분에게 속해 있다(고전 3:23)는 것을 항상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교부들의 저술에 정통해 있습니다. 이러한 구별을 준수하지 않는 자는 종교에 있어 어떤 확실한 것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거룩한 사람들도 많은 것을 몰랐으며, 종종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서로 의견이 대립되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우리 조상들에 의해 설정된 경계를 범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명하는 것은 공연히 한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말합니다(22:28). 그러나 동일한 규칙이 전답의 경계와 신앙의 순종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지어다”(45;10)란 말로 기준을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풍유를 그렇게 사랑한다면 왜 옮기면 불법인 지계표를 설정한 조상들로서(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사도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까(22:28)?

 

제롬은 이 구절들을 이렇게 해석했으며 그들은 그의 말들을 그들의 교회 법전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대적들이 그들의 이해력에 따라 조상들이 설정한 한계를 보전하고 싶어 한다면 왜 그들은 그것들을 그처럼 멋대로 범하는 것입니까?

 

우리 하나님은 마시지도 먹지도 아니하시며 따라서 쟁반도 컵도 필요로 하시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교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교부는 신성한 의식에는 금으로 산 것이 아닌 것들은 금으로 기쁘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고로 그들의 의식을 행할 때 금이나 은이나, 상아나 대리석이나 귀한 돌이나 비단을 즐겨 씀으로써 이 한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모든 것을 사치스럽게 장식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고기 먹는 것을 삼가는 날에 자기는 자유롭게 고기를 먹는다고 말한 사람도 교부였습니다. 그런고로 그들이 사순절에 고기를 맛본 어떤 사람을 저주했을 때 그들은 경계를 범한 것입니다. 한 교부는 자기 손으로 일하지 않는 수도승은 살인 청부업자 같은 자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한 교부는 수도승들이 비록 명상과 기도와 공부에 열심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의 물질을 축내며 사는 것은 불법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고로 수도승들의 게으른 창자를 이 매춘굴 즉 수도원에 두고 다른 사람들의 물질을 포식하게 했을 때 그들은 또 경계를 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교회에서 새긴 형상을 보는 것은 몸서리칠 끔찍한 일이라고 말한 것은 교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교회 안에 형상이 없는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남겨두지 않았을 때 그것은 그러한 한계 안에 머무르는 것과는 먼 일이었습니다. 또 어떤 교부는 말하기를 장례식에서 죽은 자에 대해 인간적 도리를 다한 후에는 그들로 하여금 편히 쉬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은 자들을 위해 계속적인 염려를 부추김으로써 이 한계들을 범하고 있습니다.

 

교부들 가운데 한 사람은, 어떤 종류의 성찬에는 참석하고 다른 종류의 성찬에는 불참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성찬으로부터 완전히 제외되어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또한 교부는 강력히 주장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고백함에 있어 자기들의 피를 흘려야 한다는 강요를 받더라도 주의 보혈을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앞의 교부가 출교의 벌을 내리고 뒤의 교부가 타당한 이유로 책망한 바로 그것을 불가침의 법률로 권장했을 때 그들은 이 지계표를 옮겨 버린 것입니다.

 

어떤 애매한 문제를 판단할 대 분명하고도 명백한 성경의 증거 없이 이편이나 저편을 드는 것은 경거망동이라고 단정한 분도 교부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 없이 수많은 제도들, 교회법들, 그리고 교리적 결정들을 제정했을 때 그들은 이 한계를 망각한 것입니다. 다른 이단들 가운데서 몬타누스가 최초로 금식법을 강요했다고 해서 몬타누스를 꾸짖은 것도 교부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주 엄격한 법률로 금식을 명령함으로 그러한 한계를 훨씬 지나쳤던 것입니다.

 

교회의 성직자들은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고서 아내와 함께 사는 것이 순결이라고 선언한 것도 교부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다른 교부들도 그의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제들에게 독신을 심하게 강요함으로써 이 한계를 넘어가 버린 것입니다. 성경이 그를 들으라”(17:5)고 말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만 귀를 기울려야 하며 우리 앞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거나 행한 것에는 신경 쓸 필요 없이 만물의 으뜸이신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것에만 주의를 기울려야 한다고 말한 것도 교부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 위에 그리스도 외에 어떤 주인들을 세움으로써 자기 자신들이 이 경계 안에 머무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지키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도들은 한 마음과 한 목소리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궤변론자들의 궤사에 의해 더럽혀지고 변론자들의 언쟁에 말려드는 것을 혐오했습니다. 궤변론자들의 변론보다 더 악하고 끝없는 논쟁으로써 성경의 단순성을 애매모호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 외에 평생을 아무 하는 일 없이 보내는 그들은 이 경계 안에 머무르고 있는 것입니까? 만일 교부들이 다시 살아나서 이러한 자들이 사변적 신학이라 부르는 그러한 논쟁을 듣는다면 그들은 이러한 자들이 하나님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고 꿈에도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들이 얼마나 제멋대로 교부들의 멍에를 거부해 버렸는지를 일일이 열거하려 한다면 내 이야기는 끝이 없어질 것입니다. 비록 그들은 자신들이 교부들에게 잘 순종하는 자녀들로 보이기 바라지만 말입니다. 정말이지 몇 달 몇 년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너무나 비겁하고도 썩어빠진 뻔뻔함으로 감히 우리를 책망하기를 우리가 옛날의 경계를 침범해 나아갔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진리에 반대되는 관습에 호소

 

비록 그들은 관습에 호소하지만 그것도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관습에 불복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를 아주 부당하게 취급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사실상 사람들의 판단이 정확하기만 한다면 관습은 선한 사람들에게서 찾아져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종종 그 반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하는 것이 관습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일이 제대로 처리되어서 보다 나은 것이 다수를 기쁘게 한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의 사적인 악이 종종 공적 오류 혹은 악에 대한 일반적 동의를 야기 했는데 그것을 이제 선한 사람들이 법률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구에 범람하는 것이 어느 한 악의 바다가 아니라 많은 위험한 역병들이며 모든 것이 앞뒤를 가리지 않고 달려들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인간사에 대해 완전히 절망하든지, 혹은 이 거대한 악들과 맞붙어 싸우든지, 혹은 차라리 그것들을 강력하게 진압해버리든지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치유책은 우리가 그러한 악에 오랫동안 익숙해 왔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거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사회에서는 공적 실수를 인정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그의 영원한 진리만이 청종되고 준수되어야 합니다. 그 진리는 세월이 많이 지나갔다고 해서, 혹은 어떤 관습이 오래 계속되었다 해서, 혹은 인간들의 음모에 의해 좌지우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이사야는 옛날에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 이 백성이 음모라 부르는 모든 것을 음모라 부르지 말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백성의 음모에 가담하지 말며 그것에 동의해서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 그를 거룩하다 하고 그로 그들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로 삼으라”(8:12-13)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대적들로 하여금 그들이 원하는 대로 과거와 현재의 수많은 예들을 제시하게 버려두십시오. 만일 우리가 만군의 여호와를 거룩하게 한다면 우리는 크게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많은 세대가 동일한 불경건에 동의하였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심지어 삼사대까지 보복하실 만큼 강하십니다(14:18, 20:4 참조)

 

비록 전 세계가 동일한 사악함으로 음모를 꾸민다 할지라도 그분은 우리에게 대중과 함께 범죄 하는 자들의 최후가 어떠한지를 경험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는 홍수에 의해 모든 인류를 멸망시키셨으나 노아만은 그의 가족과 함께 살려 주셨을 때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노아는 믿음에 의해, 즉 한 사람의 믿음이 온 세상을 정죄했던 것입니다(7:1, 11:7). 요약하면, 악한 관습이라는 것은 일종의 전염병 외에 아무것도 아닌데 사람이 그 병에 걸리면 비록 대중과 함께 멸망한다 할지라도 멸망하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6. 교회의 본질에 관한 오류들

 

저들은 양도 논법에 의해 교회가 잠시 동안 생명을 잃었다든가 혹은 우리가 지금 교회와 갈등하고 있다든가 하는 것 가운데 하나를 억지로 인정하게 할 만큼 그토록 심하게 우리를 압박하지는 못합니다. 확실히 그리스도의 교회는 살아 왔었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우편에서 통치하시는 한 살아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그의 손에 의해 지탱되며 그의 보호로 무장하고 그의 능력으로 강화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한번 약속한 것을 틀림없이 지키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세상 끝 날까지 자기 백성과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28:20).

 

우리가 지금 이 교회에 대항해서 논쟁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믿는 자들과 함께 우리는 한 목소리로 한 분 하나님과 그리스도 주를 경배하고 찬양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그분이 항상 모든 경건한 사람들에 의해 찬양을 받아 오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육안으로 교회를 보지 않으면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결코 한정시킬 수 없는 한계 내에 교회를 두려고 하는 점에서 진리로부터 멀리 이탈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논쟁은 다음과 같은 점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첫째, 교회의 형태는 항상 드러나 보이고 관찰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둘째, 그들은 이 형태를 로마 교회와 그 계급 제도와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대로 교회가 어떤 가견의 외형 없이도 존재할 수 있으며 그 외형은 그들이 바보스럽게 흠모하는 저 외적 장엄함 속에 담길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아주 다른 표지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파하는 것과 성례를 올바르게 집행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손가락으로 교회를 꼬집어 지적할 수 없으면 격분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 가운데서 교회가 너무 자주 손상을 입어 그 외형이 사라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자기 혼자 남았다고 불평했을 때 우리는 교회가 어떤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왕상19:10, 14)?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 얼마나 오랫동안 교회는 형체 없이 감추어 있었습니까? 그 후로도 얼마나 자주 교회는 전쟁과 폭동과 이단의 압제 밑에서 전혀 빛을 발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습니까? 만일 그들이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그들은 어떤 교회가 존재한다고 믿었겠습니까? 그러나 엘리야는 아직도 바일에게 무릎 꿇지 않은 선지자 칠천명이 남아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이 땅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신자들이 그때 어떤 가견적 형태를 요구했다면 그들은 당장 낙심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누가 그의 것인지 아시기때문에(딤후2:19) 때때로 자기 교회의 외적 표시를 인간의 시야에서 제거해 버리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분에게 맡겨둡시다. 그것은 지상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무서운 형벌임을 필자는 고백합니다. 그러나 만일 인간의 불경건함이 그러한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면 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에 배반하려고 애를 씁니까?

 

그러한 식으로 옛적에 주께서 인간의 배은망덕함을 처벌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의 진리에 순종하기를 거부하고 그분의 빛을 소멸시켜 버렸기 때문에 그는 그들의 마비된 감각들이 어리석은 거짓말에 의해 속아 넘어가고 깊은 어두움 속에 내던져지도록 허용하심으로써 진정한 교회의 형체라고는 전혀 남아있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비록 오류와 흑암의 와중에 흩어지고 감추어지기는 했지만 자기 자녀들을 보호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바벨론의 혼란 중에서와 이글거리는 용광로의 불꽃 속에서 그들을 보존하는 방법을 아셨기 때문입니다(3).

 

나는 어떤 종류의 헛된 자랑에 의해 교회의 형태를 판단하려는 그들의 소망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지적하고자 합니다. 나의 논의를 끝없이 계속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이것을 장황하게 설명하느니보다 간단히 묘사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사도적 지위를 가진 로마 교황과 나머지 감독들이 교회를 대표하며 교회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고로 그들은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그들이 교회의 목회자들이며 주님의 의해 성별되었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대답합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비록 지명된 제사장이었으나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오류를 범했습니다(32:4). 이러한 추론에 따르면 아합을 속인 사백 명의 선지자들은(왕상:22:12) 왜 교회를 대표하지 못했겠습니까? 그리고 교회는 단 한 사람의 멸시할만한 인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말할 한 사람, 미가의 편에 있었던 것입니다.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모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18:18)라고 자랑하면서 예레미야에 대항하여 일어났던 선지자들이 교회의 이름과 형태를 지니지 않았습니까? 모든 선지자 반열에 대항하여 예레미야는 홀로 주님의 파송을 받아 율법이 제사장으로부터, 모략이 지혜로운 자로부터, 말씀이 선지자로부터 끊어지게 될 것을 선포하였던 것입니다(18:18, 4:9 참조).

 

그리스도의 처형에 대해 모의하기 위해 모였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공회에 그러한 허세가 나타나지 않았습니까(11:47)? 이제 그들로 하여금 가서 이러한 외적 가면에 매달리게 버려두십시오. 즉 그리스도와 살아계신 하나님의 모든 선지자들을 종파 분리자로 만들고, 반대로 사탄의 종들을 성령의 도구로 만드는 가면 말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의 마음으로부터 말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선한 믿음 안에서 나에게 대답하게 해 보십시오, 바젤 공의회의 결정에 의해 유게니우스(Eugenius)가 교황직에서 물러나고 아마데우스(Amadeus)r가 대신 그 자리에 앉은 후 교회는 어떤 지역에 혹은 어떤 사람들 가운데 존재하였다고 그들은 생각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들은 그 공의회가 외견상으로는 합법적이었으며 한 명의 교황이 아니라 두 명의 교황에 의해 소집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유게니우스는 그와 함께 공의회의 해체를 모의했던 모든 추기경들과 감독들과 함께 교회분열의 죄, 그리고 완고의 죄로 정죄 되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후들의 호의에 의해 후속적인 지원을 받아 그는 자기의 교황직을 고스란히 회복했습니다. 거룩한 총회의 권위에 의해 엄숙히 행해졌던 아마데우스의 선출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마데우스는 마치 짖는 개가 한 점의 고기로 달램을 받는 것처럼 추기경의 감투를 쓰는 것으로 달램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 반역적이고 완고한 이단들로부터 미래의 모든 교황들, 추기경들, 주교들, 수도원장들, 그리고 사제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발뺌을 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편에 교회와 이름을 부여할 것입니까? 외적 장엄함을 완벽하게 갖추었고, 두 개의 교서에 의해 엄숙하게 소집되었고 로마 교황청의 주재 대사에 의해 성별되었고 어느 모로 보나 질서정연했고 마지막 까지 동일한 권위를 보유하고 있는 그 공의회가 총회였음을 부인할 것입니까? 그들은 유게니우스와 그의 모든 동료들에 의하여 성별되었는데 그들이 분파주의자들이었음을 인정할 것입니까? 그런고로 그들로 하여금 교회의 형태를 다른 말로 정의하게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 그들의 수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 짐짓 그리고 의도적으로 이단에 의해 안수 받은 저들을 분파주의자들이라고 규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사실이 전에 한 번도 밝혀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비록 교회에 대한 치명적인 재앙이었지만 교회라는 미명하에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들을 세상에 오만하게 선전해 온 그들은 교회가 외적 허식과는 별관계가 없다는 풍부한 증거를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들의 도덕이나 비극적 비행에 관해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비록 그들의 모든 삶이 그러한 것들로 가득 차 있지만 말입니다. 저들 스스로 말은 듣되 행위는 본받지 말아야 할 바리새인으로 자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23:3). 만일 폐하께서 잠시만 틈을 내어 우리의 글들을 읽어보신다면 저들이 교회라고 주장하는 그것, 바로 그 교회 자체야말로 영혼을 죽이는 도살장이요 교회의 선동자요 파과자임을 틀림없이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7. 개혁 교리 때문에 야기 되었던 소란들

 

끝으로 우리 교회의 전파가 수많은 소요와 소란들과 다툼들을 불러 일으켰으며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 가져다 준 해로운 결과들을 열거할 때 그들은 충분히 정직하게 행동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한 악들이 부당하게도 우리의 교리 탓으로 돌려지고 있으나 사실은 사탄의 악의 탓으로 간주 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여기 사실상, 하나님의 말씀의 어떤 특징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면 사탄도 반드시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 교리들과 구별하는 가장 확실하고 믿을만한 표지입니다.

 

거짓 교리는 쉽사리 그 모습을 드러내며 모든 사람이 귀 기울여 받아들이고 세상의 박수갈채와 함께 청종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깊은 흑암 속에 잠겨 있던 수 세기 동안 인간들은 이 세상 주관자들의 농담거리와 농락거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사르다나팔루스(Sardanapalus)처럼 빈둥거리면서 깊은 휴식을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평온하고 고요하게 자기 왕국을 차지한 채 노닥거리는 것 외에 달리 무슨 할 일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위로부터 비치는 빛이 어느 정도 그의 흑암을 쫓아내었을 때 더 강한 자가 그의 왕국을 공격하여 괴롭혔을 때(11:22) 그는 오랜 잠에서 깨어나 무기를 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사람들로 하여금 행동하게 함으로써 동터오는 진리를 폭력으로 눌러버리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아무 효력을 얻지 못하게 되자 그는 전략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재세례파들과 괴상한 악한 자들을 통해서 불일치와 교리적 논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진리를 희석화 시키고 마침내는 말살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그는 두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줄기차게 포위하게 있습니다. 인간의 폭력적 수단을 통해서는 참된 씨를 뿌리뽑아버리고 자기의 기시덤불로써(할 수 있는 대로) 그것을 질식시켜 버림으로써 그것이 자라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지도자 되신 주님께 주의를 기울인다며 그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주님은 오래 전부터 사탄의 간계들을 우리 앞에 펼쳐놓으심으로써 사탄이 우리를 부지중에 사로잡지 못하게 하셨으며 강력한 방어물로 우리를 무장시키셔서 사탄의 계교를 물리치게 하셨던 것입니다.

 

게다가 사악하고 반역적인 무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해서 일으키는 폭동이나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분파들을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 탓으로 돌리는 것은 얼마나 사악한 일입니까? 사실 그 양자는 둘 다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것인데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닙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가 자기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와상18:17).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는 선동가였습니다(23:5, 19:7 참조). 백성들을 소란케 하는 자라는 고발이 사도들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우리를 향해 들끓고 있는 그 모든 소요들과 소란들과 논란들로 인해 우리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있는 자들이 그 외에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엘리야는 우리가 그러한 고발에 대해 어떻게 대답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류를 널리 퍼뜨리거나 소요를 불러일으키는 자는 우리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저들이라는 것입니다(왕상18:18).

 

그러나 저들의 무모함을 견제하기 위해서 그 한 가지 답변으로 족한 것처럼 종종 그러한 중상모략에 의해 동요되고 혼란에 빠지는 자들의 어리석음에 대처하는 데에도 그 한 가지 대답으로 족할 것입니다. 이러한 동요에 굴복해서 자기들의 입장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그들로 하여금 사도들도 그 시대에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과 똑 같은 일들을 경험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바울이 쓴 거룩한 말씀들을 억지로 풀다가 멸망을 자초한 무식하고 굳세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벧후3:16). 그들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말을 듣고 즉시 결론짓기를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자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멸시했던 자들이었습니다(6:11). 신자들이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말을 듣고는 당장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짓자고 지껄였던 것입니다(6:15).

 

바울이 악의 사주자라고 비난했던 자들도 있었습니다. 많은 거짓 사도들이 몰래 들어와서 바울이 설립한 교회들을 파괴하려 했습니다(고전1:10, 고후11:3, 1:6).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고”(1:15) “순전치 못하게심지어 악의를 가지고, “그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그리스도를 전파했던 것입니다(1:17). 어떤 곳에서는 복음이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했던 것입니다”(2:21) 어떤 이들은 개가 토하였던 곳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운 것처럼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었습니다(벧후2:22).

 

많은 사람들은 성령의 자유를 육신의 방종으로 전락시켜버렸습니다(벧후2:18-19). 많은 형제들이 몰래 기어 들어와서 경건한 자들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습니다(고후11:3-이하). 바로 이러한 형제들 가운데에서 여러 가지 논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6:11, 15).

 

여기서 사도들은 어떻게 해야 했겠습니까? 잠시 동안 복음을 위장하거나 혹은 제처 두거나 떠나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은 복음이 그토록 많은 논란거리와 위험의 원천 그리고 중상모략의 원인이 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류의 환란 속에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9:33, 벧전2:8, 8:14 참조)이며 많은 사람이 폐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으셨다”(2:34)는 말씀을 생각하여 도움을 얻었습니다.

 

이러한 확신으로 무장하고서 그들은 모든 소요와 모욕의 위험을 헤치고 담대히 전진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동일한 생각으로 힘을 얻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바울도 복음의 이 영원한 성격에 대해 복음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고후2:15)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으로 이르는 냄새”(고후2:16)라고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8. 왕은 거짓 고소에 근거하여 행동하는 것을 조심하소서. 무죄한 자들은 하나님의 판단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자비로운 왕이시여, 저는 당신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대적들이 당신 속에 공포를 불러일으키려고 애써 만든 거짓된 고소에 조금도 동요되지 마소서. 즉 이 새 복음에 의해(그들이 그렇게 부르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단지 소요와 모든 범죄에 대한 면책을 찾고 있다는 고소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고전14:33)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은 죄를 짓게 하는 자”(2:17)가 아니요 마귀의 일을 멸하려”(요일3:8) 오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최소한의 협의도 준 적이 없는 일을 의도했다는 부당한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짐작컨대 우리가 나라들을 전복시키려는 모의를 꾸미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번도 선동적인 발언을 해본 적이 없으며 페하의 치하에 살고 있었던 동안에도 항상 고요하고 단순한 생활을 추구했으며 고국으로부터 피신해 있는 지금도 폐하와 폐하의 왕국의 번영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짐작컨대 우리가 방탕한 죄악들을 거침없이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도덕적 행위들 속에 비난받아 마땅한 일들이 많이 있다 할지라도 그토록 심한 비난은 천부당만부당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복음의 혜택을 적지 않게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이러한 중상자들에게 순결, 관용, 자비, 절제, 인내, 정절 그리고 모든 다른 덕들의 모범이 되지 못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한다는 것은, 우리가 사나 죽으나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을 소원한다는 것만 봐도 너무나 분명합니다(1:20 비교). 그리고 비범한 찬양을 받았어야만 할 저 한 가지 사실로 인해 사형의 처벌이 가해진 우리들 중 몇 사람의 무죄와 시민적 결백에 대해 증오 그 자체가 증언을 하도록 강요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들이 복음을 핑계로 소요를 일으킨다면- 지금까지 당신의 왕국에서 그런 사람이 발견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만일 어떤 자가 자기의 방종한 사악들을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 은혜로 미화한다면-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저는 많이 알고 있습니다만- 그들은 법률과 법률의 처벌 조항에 의해 자기들의 죄에 상응하는 엄한 심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단지 그 와중에 파렴치한 자들의 사악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복음이 모독당하지 않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지극히 고상한 왕이시여, 저는 폐하께서 너무 쉽게 저들의 중상모략에 귀를 기울이시게 되지 않도록 우리를 중상하는 자들의 사악한 계획들을 자세히 개진해 올렸습니다. 너무 지엽적인 것까지 포함되지 않았나 염려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 서문이 이미 거의 완전한 하나의 변론서의 분량에 이르러 버렸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제가 하려고 했던 것은 변명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의 송사에 대한 실제 형편에 폐하께서 귀를 기울이시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폐하의 마음은 사실상 우리에게서 떠나 있으며 등을 돌린 상태이며 심지어 진노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만일 폐하께서 고요하고 안정된 기분으로 우리의 이 고백을 한번 읽어주신다면 우리는 폐하의 은총을 되찾을 자신이 있음을 첨언합니다. 우리는 이 고백을 변명 대신으로 페하 앞에 바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 악의로 충만한 자들의 속삭임들만이 폐하의 귀를 가득 채워 피고인들은 자기를 위해 변론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단지 저들의 미친듯한 격노만이 폐하의 묵인 하에 투옥, 채찍질, 고문, 절단형, 화형 등으로 나타나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도살당할 운명에 처한 양처럼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될 것입니다(53:7-8, 8:33). 그러나 우리는 인내로 우리의 영혼을 얻을수 있을 것이며(21:19) 주의 강한 손이 때가 되면 틀림없이 나타나 가난한 자들을 그들의 환란에서 건저내시고 그들을 멸시하는 자들을 처벌 하실 것을 기다릴 것입니다.

 

왕 중의 왕이신 주께서 폐하의 보좌를 의() 가운데(25:5 참조), 폐하의 통치를 공평 가운데 견고케 하시기를 기원하나이다. 지극히 강하고 영명하신 왕이시여.

 

바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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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36년 초판)

 

 

차 례

 

머리말

 

서 론

 

. 1536년판 강요가 나오기까지(1532 - 1535)

. 기독교 강요 초판(1536)

 

헌사 - 프랑스 왕 프란시스에게

 

1. 이 책이 쓰여진 배경

2. 박해받는 복음주의자들을 위한 탄원

3. 대적자들의 비난에 대한 논박 - 새로운 것, 불확실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 과 기적들의 가치

4. 교부들이 종교개혁의 가르침에 반대한다는 부당한 주장들

5. 진리에 반대되는 관습에의 호소

6. 교회의 본질에 관한 오류들

7. 개혁 교리 때문에 야기되었다는 소란들

8. 왕은 거짓고소에 근거하여 행동하는 것을 조심하소서 : 무죄한 자들은 하나님의 판단을 기다립니다.

 

1장 율법-십계명 해설 포함

 

A. 하나님에 대한 지식(1)

B. 인간에 대한 지식(2-3)

C. 율 법(4)

D.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5-6)

E. 십계명 강해(7-23)

서 문(7-8)

1 계명(9)

2 계명(10-11)

3 계명(12)

4 계명(13-16)

5 계명(17)

6 계명(18)

7 계명(19)

8 계명(20)

9 계명(21)

10 계명(22-23)

F. 요약(24-25)

G. 칭의(26-32)

H. 율법의 용도(33)

I. 칭의(계속)(34-38)

 

2장 믿음-사도신경 해설 포함

 

A. 믿음과 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1-9)

B. 사도신경 해설(10-34)

첫째부분(10)

둘째부분(11-19)

셋째부분(20)

넷째부분(21-34)

C. 믿음, 소망, 사랑(35)

 

3장 기도-주기도문 해설 포함

 

A. 일반적 의미의 기도(1-13)

B. 주기도문 해설(14-30)

서론(14-16)

첫째 간구(17)

둘째 간구(18-19)

셋째 간구(20-21)

넷째 간구(22-24)

다섯째 간구(25-26)

여섯째 간구(27-30)

C. 기도의 실제(31-33)

 

4장 성례

 

A. 일반적 의미의 성례(1-10)

B. 세례(11-23)

C. 성만찬(24-52)

D. 성례의 집행(53)

 

5장 거짓 성례

 

서론(1)

A. 견진례(2-10)

B. 고해(11-44)

C. (세칭) 종부성사(45-48)

D. 성직의 계급 - 신품성사(49-67)

E. 혼인성사(68-70)

 

6장 기독교인의 자유, 교회의 권능, 그리고 정치 조직

 

A. 기독교인의 자유(1-13)

B. 교회의 권능(14-34)

C. 세상 정치(35-56)

 

뒷 표지

 

이 책은 기독교강요 초판의 완역판이다. 초판의 사상이 거의 변함없이 최종판에서도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 초판은 칼빈신학의 정수요 핵심이라고 불리운다. 초판은 라틴어판으로 300여 페이지이며, 최종판은 1500여 페이지로, 초판은 최종판의 1/5이다.

 

이 초판 기독교강요가 1536년 세상에 나왔을 때 이 책은 세계를 뒤흔들었고 역사를 움직였다. 로마교회는 기독교강요를 가장 두려워했으며, 개혁교회는 이 책으로 말미암아 체계가 잡히고 당당하게 참 교회를 향한 길을 갈 수 있었다.

 

이 책으로 칼빈은 일류 신학자로 인정을 받아 제네바 교회의 청빙을 받게 되었다.

 

로마교회가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 의존하는 만큼 개신교회는 칼빈의 기독교강요에 의존했다.

 

미국 신학자 폴 푸르만(Paul T, Fuhrmann)은 이렇게 말했다. “방대한 최종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칼빈의 모든 반대자들의 입장을 이해해야만 한다. 이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그러한 논쟁 없는 초판이 현대의 독자들에겐 훨씬 더 이해하기 쉽다.”

 

또한 초판 기독교강요는 모든 신자들을 대상으로 저술한 반면, 최종판은 신학자와 반대자들을 염두에 두고 저술하여, 초판이 칼빈의 신학사상의 진수를 다 포함하면서도 누구나 다 읽어 이해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최종판은 20여 년간 반대자에 대한 답변과 보충을 통해 증보되어 초판의 5배 분량이 되었을 뿐이다.

 

기독교강요 1536년 초판은 칼빈의 신학의 핵이라 할 수 있다. 그후 몇 차례 증보 출판한 이유는 내용을 고치거나 수정한 것이 아니라 당시 로마교회나 재세례파들의 신학적 오류를 반증하다보니 양이 늘어났을 뿐이다. 그러므로 초판은 최종판의 요약으로 보아 무방하다. 그래서 초판은 학계에서 역사적 가치에 있어 최종판 이상으로 많이 읽혀지고 있다. 박희석 교수(총신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