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파란 무엇인가?(1)

2014.07.15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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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파란 무엇인가?(1) 

 

19881220() 최삼경 목사 sam5566@amennews.com 

 

서론: 이단과 성경

  선지자선교회

1. 이단이란 무엇인가

 

한국에는 어림잡아 100여 개의 이단이 있는데, 그 중에 외국에서 들어온 소위 외래파는 열 개밖에 없다는 점을 볼 때, '한국교회는 과연 이단의 천국인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 예수, 인간 하나님이 50여 명이나 되며, 숨은 이단까지 꼽는다면 200여 개는 능히 되리라고 본다. 왜 이렇게 이단이 많은가, 그 대책은 무엇인가를 따지기 전에 이단이 무엇인가부터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창세기 3장에서부터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기 시작하던 사탄은 요한계시록 20장에 이르기까지 성도를 미혹한다. 성경은 이들을 "양의 옷을 입은 자"(7:15), "가만히 들어온 자"(1:3-4), "미혹하는 자"(요일 3:7-11), 또는 "거짓 그리스도, 거짓 예언자"(24:24) 등으로 부르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이단이라 하는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한 마디로 이단이란 교리적으로 잘못된 것을 이단이라 한다. 한국의 성도들은 이단문제를 교리와 연결시키지 않고, 윤리문제와 연결시키는 경향이 짙다. 이는 잘못이다. 이 말은 윤리적인 잘못은 교리적인 잘못에 비해 문제가 적다는 말은 아니다. 이단문제는 윤리적인 문제와는 별개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안식교 같은 이단은 윤리적으로 성결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단이다.

 

예를 들어보자. 내가 기독교방송국에서 이단에 대한 방송을 할 때 강의 후, 모인 방청인들의 질의를 듣게 되었는데, 교리적인 질문은 단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다. 돈 문제나, 성 윤리 등의 윤리적인 문제만 호소하여 강사를 마치 종교경찰로 착각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윤리 문제를 교리 문제보다 덜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단의 문제는 교리적인 문제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교리적으로 무엇이 잘못되면 이단이며, 어느 정도 잘못될 때 이단이라 할 수 있는가? 한 마디로 모든 교리에서 이단이 발생할 수 있고, 지엽적인 문제가 아닌 핵심적인 교리에서 벗어날 때 이단이 된다.

 

예를 들어보자. 요한이서 17절에 보면,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라고 했다. 여기에 보면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면 이단이라고 했다. 이 말은 요한이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고, 신성만 인정하는 도케니즘(가현설주의자) 이단에 대한 말이었다. 또한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단이 될 수 있다. 예컨대 도케니즘과는 정반대로 예수님의 신성을 제한하던 아리우스도 이단인 것과 같다. 그런 점에서 모든 교리에서 이단이 발생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양성(兩性) 문제만이 아니라, 삼위일체론, 창조론, 인간론, 구원론, 교회론, 계시론, 종말론 등 어떤 교리로부터도 이단이 발생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2. 성경에 대한 이단의 두 가지 입장

 

성경과 접촉점을 가지지 않았다면 기독교 이단이라고 할 수 없다. 성경과 접촉점을 가지고 있고, 최소한 성경적 분위기를 가졌을 때, 기독교 이단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이단이 보는 성경계시는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성경계시 외에 자기계시를 가진 이단이요, 둘째는 성경계시만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이다.

 

대부분 이단은 성경 외에 자기계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그렇지만은 않다. 예를 들어 통일교는 성경 외에 원리강론이란 자기계시를 가지고 있고, 몰몬교도 성경 외에 몰몬경이란 자기계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때로는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무서운 이단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실제 예를 들어보자. 보는 사람의 견해에 따라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을 전자에 속한 이단으로 볼 수도 있다. 안식교의 경우 화이트 여사의 대쟁투를 성경 외의 계시로 인정한다고 볼 수 있으나, 표면적으로 그렇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물론 세분하자면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은 둘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실질적으로는 자기계시를 가지고 있으나 표면적으로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이다.

 

비록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은 내면적으로 자기계시를 가지고 있더라도 기성교인에 대한 표면적 주장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데 왜 이 같은 구분을 하게 되는가. 그 이유는 실질적으로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든, 표면적으로만 성경을 자기계시로 인정하든, 여기에 속한 이단이 더 무서운 이단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정통교인들 마음 속에도 이들에게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며, 논쟁을 하다보면 오히려 이단자들이 성경을 더 사랑하는 것 같이 되고, 저들은 성경 속에 있고, 우리는 성경 밖에 있는 것처럼 되는 것이다.

 

이제 그 초점을 구원파 이단으로 돌아가 보자. 이 구원파야말로 자타가 부정할 수 없는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이다. 그러기에 가장 무서운 이단 중의 이단이 구원파이다. 이단이 성도를 미혹하는 자들이요, 성도를 속이는 자들이요, 가만히 들어와 양을 노략하는 자들이라는 점을 볼 때, 성도를 미혹하는 그 힘은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이 더 강하다고 보아야 하고, 통계적으로 그러하다. 그렇게 볼 때 여호와의 증인과 안식교를 경계해야 하고, 더욱 경계해야 할 이단이 구원파이다.

 

3. 문제는 성경해석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이 더 무섭다고 했다. 그러나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든, 성경 외에 자기계시를 가졌든, 우리 논쟁의 초점은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이단 연구에 있어서 두 가지 자세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현상학적 연구요, 또 다른 하나는 신학적 연구 내지는 성경해석학적 연구이다. 전자의 연구도 중요하다. 그러나 성경해석학적 연구가 이단연구의 핵심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앞으로 이단을 교리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정의한 것에 비추어 볼 때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성경이다. 비록 성경 외에 자기계시가 있는 이단이라도 그들이 주장하는 최소 최대한의 성경적 접촉점 그것이 우리 논쟁의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이단에 수십년씩 빠졌다가 돌아온 자들마다 정통교회의 이단 비판 서적을 보고, 그들 이단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본인이 볼 때, 이단에서 나온 자들은 이단에 대한 이해는 깊으나 비판의 기준이 약하고, 이단에 빠지지 않고 이단을 비판하는 자들은 비판의 기준은 강하나 이단에 대한 이해가 약하다. 이단자들이 가진 성경 외의 자기계시나 교리기준을 이해하기가 이렇게 어렵다는 말이다. 이것이 이단전문연구가에게도 어려운데 일반목회자나 하물며 평신도야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네 것'은 모르더라도, '내 것'만은 분명히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내 것'이 바로 성경이다. 그런 점에서 성경이 문제다.

 

특별히 성경해석학적 기준과 방법이 문제이다. 이런 점에서 이단논쟁은 성경해석학적 논쟁이요, 특히 구원파 논쟁은 성경해석학적 논쟁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 자체도 그런 점에서 쓰여졌다. 하나의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그 잘못된 해석을 적용하면 결국 사망의 길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잠언 기자는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14:12)라고 했다.

 

예를 들어 "피 채 먹지 말 것이니라"(9:4)는 말을, 수혈하지 말라는 말로 해석하여 수혈을 거부하다 죽어가는 여호와의 증인들을 보라. 그런 점에서 본론의 구원파 교리비판은 성경해석학적 오류를 지적하고 반증하는 것이다.

 

4. 이단을 사용하시는 하나님

 

누구든지 하나님의 역사에 사용된다. 사용되는 방법은 두 가지 중 어느 한 가지에 속한다. 하나는 긍정적인 면이요, 하나는 부정적인 면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구약의 바로도 사용하셨고, 신약의 가룟 유다도 사용하셨다. 단지 부정적인 면에서 사용된 것이다.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사람이 있고, 이를 괴롭히는 이단이 있었다. 그러기에 신약 27권중 이단을 경계하지 않았던 곳은 없다. 또한 신앙의 선진들의 글 속에는 늘 변증적 요소를 담고 있다. 초대교회 교부들의 글 속에 이단논쟁이 없는 자는 거의 없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단을 사용하신다는 증거이다.

 

예를 들어 아리우스의 반 삼위일체론이 아다나시우스의 삼위일체론을 낳게 했다. 이처럼 이단은 정통교회의 신앙적·교리적 약점을 자극하고, 보완하고, 수정하고, 견고히하는데 공헌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파는 무슨 공헌을 했는가? 어떤 점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이단인가? 구원파가 생긴 배경은 장로교 신학과 워치만니 사상이다. 권신찬 씨는 장로교 목사였다는 점과 워치만니 사상과 상통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한 마디로 구원파 문제는 죄와 구원의 문제임을 알아야 한다. 이 점에 대한 기성교회의 약점을 뚫고 들어온 이단이요, 또한 이 점에 대한 신학적 필요를 자극하여 구원의 확신문제를 정립하게 한 것이다.

 

이 점을 이제 살펴보자.

 

본론: 구원파 교리 비판

 

. 같은 교리에 다른 세 개의 구원파(권신찬, 이요한, 박옥수)

 

구원파란 이름이 증명하듯이 구원을 강조하는 집단이라는 점과, 더욱이 기성교단의 이름을 가진 6개의 이단 중의 하나라는 점을 볼 때 이단 중의 이단이 이 구원파이다.

 

권신찬, 유병언 씨가 이끄는 구원파는 '기독교복음침례회'란 이름으로, 이요한, 일명 이복칠 씨가 이끄는 구원파는 '대한예수교침례회'란 이름으로, 박옥수 씨가 이끄는 구원파는 '예수교복음침례회'란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통 침례교가 많은 피해를 입고있는데, 한국교회는 이 점을 유의하여 정통교단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1981년에 한국평신도복음선교회 편집위원회 이름으로 편저한 신아문화사 발행(발행인 송일동), 세칭 구원파란?제목의 구원파를 옹호하는 책이 나온 일이 있었다. 그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들의 주장이 장로교나 감리교의 기본적인 교리와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것은 그들 자신도 잘 알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론적으로만 교리를 알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적인 경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뿐이다."(p41)

 

이 말에 의하면 구원파들의 교리와 기성교회 교리가 아무 차이가 없는데, 교리 문제가 아닌 다른 문제로 자신들을 이단으로 규정했다는 말이 된다. 즉 이단이 아닌 자를 이단으로 규정했다는 말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이단된 자보다, 이단을 규정한 자가 더 나쁠 것이다. 또한 같은 책 머리말에서는, "교리적인 것이라면 얼마든지 우리를 비판해도 상관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과연 저들의 말대로 구원파 교리는 정통 기독교의 것과 같은가?

 

필자는 지금부터 정통 기독교와 너무나 유사하나, 다른 종교요 다른 복음이요 또한 반 하나님적이요, 반 성경적인 구원파의 이단성을 교리적인 면에서 분석 비판하려고 한다. 본인은 수 차례 권신찬, 박옥수 씨에게 공개질의를 한 일이 있다. 물론 대답은 없었다. 이 책은 이요한 씨를 포함하여 권신찬, 박옥수 씨에게 공동으로 드리는 공개질의서라고 볼 수 있다.

 

권신찬, 이요한, 박옥수, 이 세 사람이 이끄는 같은 교리의 다른 교단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모르겠다. 사실 그 점에는 별 관심이 없다. 단지 그들의 교리가 정통교회와 무엇이 다른가 하는 점이다. 이요한 씨는 권신찬 씨와 윤리적인 면에서는 물론, 교리적인 부분에서 다르다고 했다 한다. 필자는 다 같은 입장에서 비판하려 하는데, 이요한 씨나, 박옥수 씨는 권신찬 씨의 이론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밝혀 응답해 주기 바란다.

 

자신들의 교리가 기성 정통교회와 다르지 않다고 하든(권씨처럼), 아니면 정직하게 다르다고 하든, 정통교회의 교리와 분명히 다른 교리들을 밝히려 한다. 다르다고 하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면 고치고 회개하여 돌아올 것이요, 그렇지 않는다면 다르다는 점을 알고 있으면서 단지 성도를 미혹하기 위한 위장전술에 불과한 것이었음이 판명될 것이다.

 

. 구원파 교리, 무엇이 다른가

 

1. 구원관에 나타난 이단성

 

최근 들어서는 구원파 교인들 중에 10단계 질문서라는 것을 사용하는 자들을 본 일이 없다. 10단계 질문서를 비록 지금은 사용하고 있지 않더라도 그 질문 속에 구원 문제에 대해 저들이 주장하고 싶은 모든 내용과 기성교인들을 미혹할 수 있는 함정의 핵심이 다 숨어 있다. 그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첫 번째 질문: 선생님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확실히 알고 믿습니까?

두 번째 질문: 선생님은 거듭나셨습니까?

세 번째 질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을 확신하십니까?

다섯 번째 질문: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여섯 번째 질문: 모든 죄가 용서되었습니까?

일곱 번째 질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활이 아닙니까?

여덟 번째 질문: 구원받은 것이 확신되어집니까?

아홉 번째 질문: 재림주를 영접할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열번째 질문: 구원의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점에 대한 구원파의 어떤 주장이 성경과 다른가?

 

(1) 회개의 개념이 다르다.

모든 이단들이 정통교회의 약점을 찾아 공격하고, 기성교인들의 체계나 확신을 뒤흔들어 자기들만의 구원을 주장하는 것처럼 구원파는 이 회개문제를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다. 즉 기성교인들이 회개하는 모습을 공격하기 위하여 새벽마다 울고불고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는 것이요, 또한 회개란 단어를 구원받은 후에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데는 적용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자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 논리적 근거는 이 것이다. 회개란 '돌이킨다'는 말로써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한 번 돌이켰기 때문에 더 이상 돌이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설명하면 이런 말이다. 회개란 오직 구원을 위해 돌이키는 행위로써 우리의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께서 현재, 미래, 과거의 모든 죄를 다 사해 주셨다는 것을 받아들임으로만 가능한데 이미 사해준 죄를 또 다시 사해 달라고 울고불고 회개할 필요가 없으며, 그런 점에서 회개한다는 것은 사죄의 확신이 없는 증거가 된다는 것이요, 결국 울고불고 회개하는 자들은 구원받지 못한 지옥의 자식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고백할 때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백 날을 울고불고 회개해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정죄해버리는 것이 구원파이다.

 

비판해 보자.

구원을 위해 필요한 회개라 구체적 죄의 고백이 없어도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그리스도께 돌이키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그 실례가 누가복음 23장 강도의 구원이다. 물론 죄인이 되었기에 죄를 짓게된 것이요, 죄는 보고, 죄는 깨달으며, 죄는 고백하나 죄인임을 깨닫고 죄인임을 고백하지 못하면 안 된다. 우리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죄를 짓는다. 그러나 인류에게 죄가 들어온 것은 죄를 지었기에 죄인이 된 것이다.

 

더욱이 구체적인 죄에 대한 참회하는 마음과 통회자복하는 마음없이 어떻게 죄인임을 알게 되는가? 죄에 대한 의식이 없이는 죄인에 대한 의식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죄를 범하지 않는 죄인도 있는가? 없다. 구원파의 주장은 죄와 죄인의 관계를 잘 모르고 행하는 오직 기성교인을 미혹하기 위한 술책에 불과하다.

 

회개에는 지, , 의의 인격적인 요소가 다 포함된다. 죄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 있을 때 통회자복하게 되고, 눈물을 흘리게 되고,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이키게 되는 것이 아닌가? 구원파의 사람들은 회개란, "돌이키는 것이다."라는 말만 할 뿐이며, 구체적인 회개의 행위가 무엇인지 대답하는 경우를 본 일이 없으며, 오직 기성교회의 회개의 자세를 부정하려는 데에만 일치점이 있었다.

 

물론 통회지복하고 눈물을 흘린 그 행위가 죄를 씻는 것은 결코 아니다. 회개를 하면 회개의 행위가 죄를 씻는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긍휼과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이 죄를 씻고, 죄를 사하고, 죄인을 용서하고, 구원하시는 것이다. 단지 회개란 죄 때문에 죽어버린 인간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드신 사랑의 법칙일 뿐이다. 그러니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행위를 공격할 것이 아니라, 회개에 대한 성경적인 바른 깨달음이 없는 자기 연민의식의 눈물과 슬픔을 회개로 착각하는 교인들을 동정하고 바르게 가르쳐야 할 뿐이다.

 

회개는 한 번만 하는 것으로 회개를 거듭하는 것은 구원이 없는 증거로 보는 점이 비성경적이다. 구원을 위한 회개와 성화를 위한 회개에 대하여는 별개로 취급하겠다. 일단 구원을 위한 단회적 회개의 면만을 살펴보자. 하나님께서는 불신자가 예수를 믿고, 구원 받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만큼 구원받은 성도가 구원의 터에 머무르지 않고 성장하기를 똑같이 바라고 계신다. 그런 점에서 성장을 촉구하며 회개의 터(구원을 위한)를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가라고 촉구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6:1-2). 원리적으로 볼 때 틀림없이 구원의 터를 두 번 닦을 수 없고, 구원을 위한 회개를 두 번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구원파의 잘못은 구원을 위한 회개를 두 번 할 필요가 없다는 것과 연약한 믿음의 사람들이 여러 번 할 수 있다는 성도의 약점을 혼돈하고 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의미로 믿음이 약한 자들을 정죄한 곳이 있는가? 심지어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예수는 믿고 구원은 받았으나 아직 젖밖에 못먹는 어리아이를 가르쳐 육신에 속한 자(σαρκικοs)라고 했는데 구원파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도 지옥의 자녀가 되지 않겠는가? (고전 3:1)

 

구원파는 구원을 위한 회개와 성화를 위한 회개를 혼돈하고 있다. 그들은 구원을 위한 회개가 단회적임을 밝혔다. 그러나 성화를 위한 회개는 반복적이다. 이 말은 성화를 위한 회개와 구원을 위한 회개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말이 아니다. 회개 자체는 둘다 단회적이다.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는 사건 자체는 단회적이다. 그러기에 성경은 회개하라는 말을 제 1 단순과거형태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같은 죄를 계속 범한다는 점에서 성화를 위한 회개는 반복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만일 성경이 구원파의 말처럼 한 번 사죄 받은 후에는 미래의 죄까지 사함받았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필자도 그렇게 하겠다. 그러나 그것이 상식적으로 보아도 무서운 종교가 될 수 있는 것은 구원받은 후에는 어떤 죄도 죄가 아니라는 논리가 가능해지고 결국 살인, 간음 등 어떤 죄도 지을 수 있다는 말이요, 실질적으로 그렇게 적용시키는 구원파 교인들이 있다는 점이다.

 

즉 구원받은 후에도 죄를 지으나 그저 그 죄를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참으로 성경의 가르침과는 하늘과 땅처럼 멀지 않은가? 다음의 성구 다섯 개는 분명히 같은 회개란 단어의 성화를 위한 반복적 회개임이 입증되는 결정적 성구들이다.

 

<다섯개의 핵심 성구를 중심으로>

 

1. 시편 51

박씨는 본 51편의 회개 또한 구원을 위한 회개로 보지 않는지 5절의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는 말을 가지고 다윗이 원죄를 말하고 있지 않느냐고 했으며 더 나아가서는 어디에 다윗이 그 입으로 직접 자신의 죄를 열거하며 사해주기를 바랐느냐고 물어왔습니다.

 

그 물음에 저의는 오늘과 교회가 하나 하나의 죄를 들어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서이고 회개는 한번으로 족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잘못된 하나의 전제로부터 스스로 다음과 같은 모순을 낳게 합니다.

 

우선 다윗이 회개를 여러 번 했다는 말이 됩니다(본문, 삼하 24:10, 시편 32:5 ). 그러니 다윗은 구원의 확신이 없었다는 말이요 고로 다윗은 지옥에 갔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에서 다윗이 자신의 죄를 스스로 고백한 내용이 없다고 하니 이 얼마나 성경을 모르는 소리인가. 그가 "죄과" "죄악" ""라고 한 말은 무슨 죄인가? 그리고 14절에서 "피흘린 죄"에서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또한 17절에 그가 "통회하는 마음"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2. 사무엘하 24:10

이곳에 나타난 다윗은 회개는 더욱 결정적입니다. 그가 직접 자신의 죄를 구체적으로 고백하며 사해주기를 구했습니다. "(인구조사 후에)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구원파의 말대로라면 이미 사함을 받았는데 무엇을 또 사해 달라는 말입니까? 다윗을 또 다시 지옥으로 보내시렵니까?

 

3. 주기도문(마태복음 6)

우리가 늘 암송하는 주기도문 중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구원파들은 이 회개도 단회적인 회개로 볼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가지 문제에 봉착되어 버립니다.

 

이 기도문 전체가 모두 반복되어야 할 기도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한번만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 없으며, 일용할 양식이 한번만 필요한 것도 아니며,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께 한번만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죄사함이 기도만은 한번으로 족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이 회개가 성화를 위한 회개가 아니라면 구원 또한 유동적일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후에도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우리의 죄도 사함받지 못함이니 구원파의 말로하면 지옥에 가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본문은 원어에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이 죄는 복수로서 자범죄를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주어가 복수일 때나, 구체적인 죄에 의해 나타내는 원죄를 말할 때를 제외하고 원죄를 나타낼 때 복수로 사용된 경우가 있는가 제시해 보십시오.

 

주기도문의 이 회개는 우리가 매일 해야 할 성화를 위한 기도임이 분명합니다.

 

4. 요한일서 1:8-9

먼저 본문을 살펴봅시다. "우리가 죄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여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얼핏 보면 구원에 대한 회개를 말하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그렇게 볼 때 3가지 문제에 봉착됩니다.

 

이 편지의 수신자는 불신자가 아니고 성도들이었습니다. 이 서신에서 요한은 이 편지를 받은 자들에게 "자녀들아" 또는 "아이들아"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도들을 지칭하는 호칭들입니다. 성도들에게 또 다시 구원을 위한 회개를 가르친다는 것은 모순된 일입니다.

 

본문에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했는데 이 우리란 주어는 1인칭 복수로서 저자를 포함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사도요한이 한번에 족한 회개기도를 또 하려 했고 또 성도들에게 가르쳤다면 사도요한은 지옥으로 보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란 단어 또한 복수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또한 성화를 위한 회개로서 구체적인 죄에 대한 회개를 가르치는 말입니다.

 

5. 끝으로 요한계시록의 교회들에 보낸 사도요한의 글입니다

 

요한계시록에 회개하라는 말이 12번 나오는데 대부분 구체적인 죄를 하나씩 지적하여 열거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들은 바로는 이들 구원파는 구체적인 죄의 고백은 구원을 위한 회개도 아닌 것으로 그것을 부정하였습니다. 물론 본인도 한두 가지 죄를 고백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구원을 위한 회개가 다 되었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자는 한가지 구체적인 죄의 뉘우침으로부터 시작하여 자기 전인이 죄인임을 알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죄에 대해 죄의식이 없이 전인적인 의미에서 죄인이란 의식은 불가능할 것이 아닙니까?

 

(2) 죄인과 의인의 개념이 다르다.

구원받은 후에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죄인이냐 의인이냐를 물어서 죄인이라고 하면 천국은 의인만 가는 곳이요, 지옥은 죄인이 가는 곳이니 지옥에 간다고 말한다.

 

물론 우리는 신분적으로 의인임에 틀림이 없다. 오직 예수님의 공로 때문에 죄인을 의인으로 여겨주시는 것이다. 더욱이 기억해야 할 것은 성도가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다고 해도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죄를 짓는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감사 외에 뽐낼 것도 예수님의 공로 외의 자랑할 것도 없다. 그런데 구원파의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 의인이냐, 죄인이냐를 물어서 "죄인이다"라고 하면 지옥의 자식으로 정죄해버린다는 점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거스리는 사탄적 궤계가 아니고 무엇인가? 욥의 세 친구는 하나님 편에서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형벌을 받는다고 말하여 욥에게 회개를 촉구하다가 오히려 하나님께 책망을 들었다.(42:7-9)

 

사실 참된 의미의 의인이 아니면 참된 의미의 죄인이란 고백이 불가능한 것이며, 또한 참된 의미의 죄인이란 고백이 없이 참된 의미의 의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피할 수 없는 성경적 증거가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음을 강조하던 바울은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했다는 사실이다(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셨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딤전 1:15). 13절에서는 자신이 훼방자요, 행악자였음을 과거시제로 밝히고 나서 죄인임을 고백할 때는 현재시제로 말했다는 것이다.

 

이단자들에게 어떤 성구를 말한들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겠는가? 특히 박옥수 씨와 그 수하의 모든 사람들은 이것이 과거시제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웃어야 할 것인가, 울어야 할 것인가?

 

(3)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사상이 다르다.

구원파의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을 때와 장소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묻는다. 아니 그렇게 묻는 것을 즐겨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최대 무기로 사용하는 것 같다. 10년만에 시아버지 장로님을 공항에서 만나자마자 첫 인사가, "아버님, 구원받으셨습니까?"라는 질문을 했다 한다. 필자가 아는 어떤 목사님에게, "목사님 구원받으셨습니까? 이제 보니 구원을 못 받으셨군요.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으세요."라고 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대답을 못하거나 화를 내면 구원받은 자에게 구원 받았느냐고 묻는 데 대답을 못할 것이 무엇이며, 더욱이 구원받은 성도라면 화를 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아마 그래서 이들이 구원파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 같은데 그들 편에서 보면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여겨야 할텐데 왜 교단이름을 아예 구원파라고 하지 않고, 역사적 정통성도 없이 침례교 이름을 도용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더욱이 그들은 구원의 점진성 같은 것은 아예 부정한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확신이 없는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심지어 몇 년, 몇 월, 몇 시, 몇 분에 구원 받았느냐고 다그치는 것이 상례이다.

 

이 점을 하나님의 주권과 관계시켜 비판해 보자.

구원을 확증하지 못하면 구원이 없다고 하는 점이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것이다. 구원을 받았으니 구원이 있고 구원의 확신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들은 구원의 확신이 있으니 구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성경이 구원을 확증하라고 할 때(고후 13:5), 구원의 확신이 구원을 좌우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성경은 구원의 확신을 요구하나 예수를 믿고 있으면서도 확신이 없는 자들을 구원파처럼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한 일이 없다. 그 경우가 위에서 언급한 히브리서 6:1-2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구원받지 못한 자에게 주신 말씀으로 보게 되면 모순이 생기게 된다.

 

구원의 문제를 인간의 믿음의 측면에서만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믿음을 동시에 말한다. 즉 하나님의 전지성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동시에 균형있게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인간의 믿음을 촉구하지만 구원이 인간의 믿음의 대가라거나 인간의 공로라고 말하는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인 예정을 말한다고 해서(1:4, 2:1) 인간의 의무인 전도나 믿음을 의심하지도 경시하지도 않는다.

 

분명 믿음으로 얻는 것이 구원이나 하나님의 주권을 잊어버리면 그것도 인간주의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런즉(우리의 구원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9:16)고 하였다.

 

필자는 구원파의 교리를 구원관과, 교회관과 종말론의 측면에서 정통교회의 교리와 다르다는 점을 증명하려 한다. 그러나 그 핵심이 이 구원관에 있음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기독교복음침례회', '예수교복음침례회', 또는 '대한예수교침례회'란 공식적인 명칭 외에 구원파란 이름이 저들에게 붙여진 것은 그들이 구원에 대한 질문을 핵심으로 정통교인들을 유혹하고 혼란에 빠뜨리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마치 구원에 대한 비밀을 자기들만 알고 있는 것처럼, 마치 구원을 받았으니 구원의 확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확신이 있으니 구원을 받은 것처럼, 또는 좁은 의미의 구원 즉, 중생이 신앙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심지어 자신들만 구원받은 무리인 것처럼 겸손으로 위장된 영적 교만과 오만을 떨기에 정통교회는 그들을 일명 구원파 이단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누구를 만나든지 "구원 받았습니까"라고 질문하기를 즐겨한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목사에게조차 구원받았느냐고 묻는 인간적인 무례함은 구원의 기쁨과 확신에서 오는 것으로 백번이라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었으나, 동일한 구원의 고백을 하여도 구원받지 못했을 경험에 의하면 목사에게조차 구원받았느냐고 묻는 인간적인 무례함은 구원의 기쁨과 확신에서 오는 것으로 백번이라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었으나, 동일한 구원의 고백을 하여도 구원받지 못했다고 정죄하는 사탄적 판단과 그 오만만은 용서하고 싶은 생각이 결코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구원파의 핵심교리는 역시 구원문제이다.

 

2. 교회론에 나타난 이단성

 

구원파의 교회론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먼저 구원파를 옹호하기 위해 쓰여진 신아문화사 발행 세칭 구원파란제목의 책 표지에 보면 (한국평신도복음선교회 편집위원회 편저, 발행자 송일동, 1981. 5. 25. 발행),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란 제목으로 자신들의 신조를 12가지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는데, 7항에서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교회는 보이는 건물이나 인위적인 조직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로만 이루어지고,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몸이며 신부이다. 그리스도인은 그 몸의 자체이며 사랑의 교제 가운데 성령이 역사하셔서 그 몸이 성장함을 믿는다."

 

그런데 이것은 기독교복음침례회(권신찬, 유병언)의 것이요, 대한예수교침례회(속칭 이복칠 파 또는 이요한 파)의 신조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이요한 파에서 생명의 빛이란 잡지가 나오는데, 36878월호에 보면 (편집인 이명원, 발행인 이행오, 발행처 대한예수교침례회), 제일 뒷면의 '우리는 이렇게 믿는다'에서 권씨의 12개항보다 두 개가 적은 10개항으로 나누어 자신들의 신조를 소개하고 있다. 그 중 일곱 번째 항에 가서 교회에 관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교회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으로 서로 사랑하며 교제하는 무리이며 이들이 곧 그리스도의 몸이고 지체의 각 부분임을 믿는다" 이요한 씨는 권신찬 씨의 신조를 약간 변경한 것을 알 수 있다. 얼핏 보아서는 왜 이 같은 신조를 발표하게 되었는지, 또 정통교회 교회관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를 수 있다.

 

필자는 이들의 교회관을 좁게 비판하는 면에서보다, 넓은 의미에서 3개항으로 나누어 소개, 비판하고자 한다.

 

(1) 종교와 복음문제를 중심해서

권씨의 경우 자신의 가르침이 정통교회로부터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본인도 알고 있었다. 그는 양심의 해방이란 책 서문에서, "내가 왜 새삼스럽게 교회 지도자들의 그릇된 가르침을 지적하고 교회의 부조리를 비판하게 되었으며 개인이 영혼구원을 외침으로써 일부 기성교파 지도자들의 도전을 받게 되었는가?"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 책이 쓰여질 당시에는 일부 기성교파 지도자들에만 도전을 받았는지 모르겠으나 현재는 모든 교회로부터 도전을 받아 이미 이단으로 정죄받게 되었으니 그 점에 대한 변명이 따로 있어야 할 것으로 본다.

 

어쨌든 그가 기성 정통교회와 달리 자신의 교리체계를 세우는 데 그 핵심을 종교와 복음의 구별로부터 시작했다는 점이다. 양심의 해방이라는 책에서도 8향이 '종교에서의 해방'이란 제목이었고, 심지어 종교에서의 해방이란 책을 써서(일류사, 1977. 11. 21 발행) 자신의 교회관, 율법관 및 예배관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이요한 씨도 마찬가지이다. 이요한 씨는 어떻게든 권씨와 자신이 다르다고 하는 것을 주장해야 될 입장일 것이요, 또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권씨 편에서 보면 배반한 제자 밖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생명의 빛23861월호, 26페이지에 우종억 씨가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글을 썼는데 권씨의 종교와 복음에 대한 이론과 같다.

 

우선 이 점에 대한 권씨의 이론을 소개하고 비판하기로 하자.

종교는 사망이다 - 종교란 뜻의 라틴어는 릴리지오(Religio)로서, '속박한다' '구속한다'는 뜻으로 구속하고 속박하니 이는 복음과 반대되는 것으로 '사망'이다.

 

다른 종교는 물론 기독교도 종교이다 - 많은 다른 종교만이 아니라, 기독교마저도 종교로서 사람에게 속한 것으로 지옥이요, 오직 복음만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서 천국이다. 실예를 들어보자.

 

"새벽마다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모여든 사람들의 울부짖는 기도 소리는 기독교 종교가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매고, 억압하고 있느냐를 보여주는 것이며, 그 밖의 모든 종교들은 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양심에 강력한 명령으로 군림하여 사람들은 그 명령에 매여 억압되어 있습니다."(종교에서의 해방, 머리말에서)

 

율법은 종교이다 - 하나님께서 주신 구약의 율법은 종교를 가리키는 것이다. 율법은 외면적인 것이요, 복음은 내면적인 것이다. 모든 인생은 율법 앞에서 벌벌 떨 수밖에 없는데, 그러기에 율법은 종교이다(이 문제는 율법관을 중심해서 자세히 취급하겠다).

 

기성교회는 율법이다 - 권씨의 경우 어떤 때는 자신들의 가르침과 정통교회의 가르침이 차이가 없다고 하기도 하고, 반면에 자신들의 가르침은 전혀 다른 것처럼 가르치기도 하여 이중적인 면을 보인다. 그러나 분명한 것만은 기성교회를 종교로 보고 자신들을 복음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예배에도 종교적 보고 자신들을 복음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예배에도 종교적 예배와 복음적 예배가 있다고 하는데(예배관에 대해서는 후에 자세히 취급하겠다), 이 종교적 예배의 범주에 기성교회 예배를 포함시키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자신이 이단으로 정죄 받지 않기 이해서는 동질성을 강조하며 구원파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기성교인들을 유혹하기 위해서는 이질성을 강조하여 정통교회를 정죄하는 두 개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기독교 역사가 전해 내려오면서 많은 기독교 학자와 신앙인들이 지은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그 책을 읽어보면 오늘날 우리들이 성경 안에서 발견해내고 깨달아지는 근본적인 교회의 모습, 참교회의 모습을 아직 아무도 정확하게 정립해 놓은 글이 없습니다."(불안에서 평안으로, 한국평신도복음선교회 편집, 일류사 발행, 1977. 7. 25. p.143)

 

우리는 여기에서 "참 교회의 모습을 아직 아무도 정확하게 정립해놓은 글이 없다"는 말에 유의해 보자. 오직 교회다운 교회는 권씨 자신에 의해서만 그 모습이 정립되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정통교회의 입장에서 하나씩 비판해 보자

먼저 그가 종교와 복음을 구별한 것은 그 자신이 설정한 자기 논리의 전제로 보면 받아들일 수 있다. 사람마다 사용하는 언어에 내포된 의미는 조금씩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주관적인 사사이의 표현이 객관적으로 인정받으려면 어떤 한계를 벗어나서는 안된다.

 

권씨의 경우는 그 개념 설정마저 명료성 있게 되어있지도 않지만, 그것이 객관적인 보편타당한 선 안에서 인정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것을 두 가지로 나누어 비판할 수 있다. 먼저 종교란 말의 언어학적 정의가 틀려 있다. 종교란 말의 라틴어 릴리기오(Religio)란 말을 구속한다, 속박한다는 뜻이 아니라, '삼가 경의를 표한다'는 뜻과, '다시 결합한다'는 뜻으로 보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권씨의 정의와는 둘 다 거리가 멀다. 선입관적 전제에 의해 논리를 전개하면 권씨와 같은 넌센스가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다음은 언어학적인 면이 아닌, 성경 속에서 종교와 복음의 구별이 없다는 점이다. 언어학적 구별은 무론 사상적 구별도 없다. 오히려 성경에는 권씨의 주장처럼 종교란 말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17:22). 그런 점으로 볼 때, 종교와 복음으로 나누어 놓고 심지어 기독교도 종교라고 하여 자신은 기독교 안의 무엇인지 기독교 밖의 무엇인지도 모를 전설 속에 나오는 귀신나라 같은 소리를 할 것이 아니라, 참종교와 거짓종교로 나누어 보아야 더 보편타당하지 않겠는가?

 

필자가 보기에 저들은 각자 자기교단의 명칭을 가지고 있으면서(기독교복음침례회, 예수교복음침례회, 대한예수교침례회 같은) 교회란 건물이나 인위적 조직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 도끼로 자기 이마를 찍는 행위와 같지 않은가? 조직을 부정하고, 조직을 만들고, 제도를 부정하고, 제도를 만들었다. 이 말이 기성교회가 건물을 중심한 교회관을 가지고 있는 잘못된 교회관을 공격하기 위해서 만든 칼이라고만 생각했을 뿐이지 자신의 목을 스스로 베어 낼 무기란 점을 왜 모르는가?

 

필자는 감히 말할 수 있고, 충고하고 싶은 말이 있다. 구원파는 그의 거짓된 복음에서 해방되어 참 기독교 종교로 돌아와야 한다. 그 때에 불안에서 해방되어 평안을 얻을 것이요, 이단자의 양심에서 해방될 것이요, 위험한 지구에서 구원될 것이요,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실 그 때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2) 율법관을 중심해서

이단의 특징은 정통교회와 비슷하나 다르고, 같은 단어를 사용하나 그 뜻이 다르고, 같은 말을 하나 그 목적이 다르고, 그 결과가 다르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많은 부분은 정통교회의 교리와 같기도 하다.

 

이 율법관에 있어서 다른 결정적 부분만 소개하고 비판하기로 하자.

 

구원파는 실제적인 도덕폐기론자이다. 구원파의 어느 누구도 펄쩍 뛸 말이다. 종교란 표면적으로는 항상 선한 옷을 입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틀림없이 구원파에 속한 사람들은 도덕폐기론에 빠질 수밖에 없고, 또 빠져 있다.

 

성경에는 모순이 없고, 갈등이 없다. 바울의 이신칭의 사상과 야고보의 신학이 모순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을 잘못 이해하면 믿음과 행위 사이에 갈등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 행위중심의 신앙 생활을 하면 교만과 절망의 극을 오가는 추와 같은 기독교인이 된다. 반면에 행위와 관계없는 공상적인 은혜와 믿음만 강조하면 도덕폐기론에 빠지게 되고, 윤리적인 면이 약화된다. 그것은 은혜파에 속한 교회나 교인들의 생활양상이다.

 

복만 강조되고, 은혜만 강조되고, 윤리가 무너진다. 그런데 구원파는 틀림없이 후자에 속한다. 구원받은 성도는 단회적 회개에 족하다고 하고, 더욱이 성화를 위한 회개를 부정하고 있는 점을 볼 때, 자연스러운 결론이 아닐 수 없다. 이 얼마나 편리한 종교이며 무서운 종교인가?

 

구원파는 율법폐기론자이다. 그의 도덕폐기론과 상통한다. 권씨는 로마서 7장의 남편과 아내로 비유된 율법과 성도의 관계에 대해서, "이제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으니"의 내용을 들어 구원받은 성도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한다. 이곳에서 권씨는 이제 무서운 폭군인 율법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게 되었다는 무서운 자기 복음을 만들었다(종교에서의 해방, p.43).

 

성경적인 비판을 해보자.

바울은 율법 안에서 죽었다고 말하고 이어서 율법의 적극적인 가치를 말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13절까지는 과거시제로 말했으나, 14절부터는 현재시제로 말하고 있다. 즉 구원받은 후에 율법의 지옥 정죄는 벗어났으나, 아직도 율법의 효용 아래 있다는 말이 된다.

 

아니 그보다도 사실 바울은 율법이 죄를 알려주는 것으로 죄로 더욱 죄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율법 아래 있을 때는 그토록 죄인이란 의식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오히려 은혜의 법을 알고 난 후에야 사실 율법의 죄를 깨닫게 하는 그 기능도 살아나게 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구원받은 성도는 율법을 지킬 필요도, 율법이 주는 갈등도 없어야 한다고 권씨는 말하는가.

 

권씨의 말로 하면 바울은 율법과는 관계가 없는데도 죄를 짓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왜 그토록 괴로워했는가(24). 왜 그의 심령에 율법으로 인한 영적인 전쟁을 느끼고 있는가. 심지어 죄를 짓는 자신이 괴로워 디모데전서 1:15에서는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까지 했는가. 죄를 죄되게 하는 율법이 죽었는데 죄에 대해 그토록 괴로워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구원받은 후에는 율법이 필요없게 되었으니 구원받은 후에 짓는 죄는 무엇으로 죄인지 알 수 있는가. 알 필요도 없는가. 아니면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할 필요도 없다고 할 것인가. 도둑질, 간음, 부모공경, 탐심, 살인 등등의 죄를 어떻게 무엇으로 알겠으며, 또한 권씨의 마에 의하면 구태여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할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구원받은 자이기에 거짓말을 좀 했다고 해서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세칭 구원파란, p.34-35) 단지 하나님께서 그들의 육신만 치셨을 뿐이지 영혼을 치시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이요한 씨의 의견도 같다.

 

이것을 이렇게 해석하고 적용한다면 재미있는 논리가 생긴다. 최근 들어 오대양 사건과 권씨와의 관계에 대해 논란이 많다. 이요한 씨는 자신은 권씨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는 중에 권씨는 사업을 하나 자신은 안 한다는 점을 들고 있다. 권씨는 자기가 사업을 할 수밖에 없는 성경적 이유를 또한 밝히고 있다(불안에서 평안으로, pp.149-157).

 

그런데 이요한 씨는 이 점에 대해 권씨를 공격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권씨와 같은 교리에서 구원받은 그가 사업을 좀 한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받은 구원이라면 권씨 계열의 사람들이 사업을 하는데 무엇이 문제이며, 혹 사업을 하다 본의 아니게 돈 문제가 생기고 혹 돈을 좀 먹었다고 해도 구원지상주의적인 구원파의 입장에서 볼 때,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다. 더욱이 권씨의 입장이 이해가 안 된다. 오대양 사건의 박순자 씨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애써 증명하려고 할 이유가 무엇인가? 돈 관계에 있었던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계가 없다고 할 이유가 무엇인가? 더욱이 그들이 자살을 했다고 한들 아니면 타살이라고 한들 그들의 육체밖에 멸망할 것이 없을 텐데 무슨 문제가 있는가?

 

(3) 예배관을 중심해서

권씨는 예배는 구원받은 자의 특권이라고 한다(세칭 구원파란, pp.22-23). 기도도 구원받은 자들만이 하는 것이라고 하다(같은 책 pp.99-104). 권씨는 예배란 형식을 갖추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죄사함으로 말미암아 얻은 구원의 체험에서 나오는 감사의 제사인데 예배의 자격이 없는 예배는 마귀를 섬기는 것과 같은 것으로, 행위에 의해 드리는 가인의 예배요, 참예배는 복음적인 것으로써 기쁨과 감사 속에 구원을 경험한 자가 드리는 예배로 아벨의 예배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살이 때는 예배가 없었고, 예배드릴 장소도 없었는데 바로와 인연을 끊고 난 후에야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비판해 보자.

구원받지 못한 자가 참예배를 드리지 못함은 옳은 말이나 성도들의 예배를 통해 신앙이 연약한 자나, 아직 구원은 얻지 못했을지라도 구원을 사모하는 자들과 심지어 불신자들마저도 구원의 소식을 듣게되는 법인데, 그것을 마귀를 섬기는 것과 같다고 했으니 이 또한 기성교회의 예배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권 씨가 볼 때 권씨의 교회에 구원받지 못한 자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마귀예배가 아니겠는가?

 

더욱이 곡물로 드린 가인의 예배가 행위에 의해 드리려던 종교적인 예배의 모형이라 하여 성경해석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선입견으로 성경을 본 결과이다. 만일 가인이 드렸던 예물이 곡물이었기에 문제가 있었다면 왜 하나님께서 레위기 2장에서는 소제의 규례를 주셨는가? 가인의 제사는 믿음이 없었던고로(11:4), 그 정성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또한 권씨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예배가 없었다고 하니 얼마나 성경을 모르는 말인가.

 

그리고 바로가 애굽에서 하나님께 예배한 것은 하나님을 애굽의 신과 같이 취급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 또한 성경을 모르는 말이다. 물론 그들은 바로 때문에 드리지 못했을 뿐이지 그들에게 예배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면 예배가 아닐 수도 없다.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했는데(2:23, 26:7), 이것이 예배가 아니고 무엇이며, 그리고 처음에 애굽에 건너갔을 때, 드린 제사는 제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교만하게 만들었는가? 무엇이 이들을 이단으로 만들었는가?

무엇이 이들을 참 교회를 떠난 사교로 만들었는가?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성경을 말하고 성경의 정죄를 받을 것이다.

 

3. 종말론에 나타난 이단성

 

지금을 가리켜 말세라 한다. 어떤 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말세지말이라고도 한다. 사용하는 용어는 동일해도 그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지금을 가리켜 '말세'라고 하는 데 이의를 제기할 기독교인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과 사도시내부터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지금이 종말이라면 이 종말의 때에 종말론의 정립보다도 더 요청되는 신학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종말론만큼 우리로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또 없었다. 그리하여 복음주의적 신학자들마저도 이 부분에 대하여 연구하기를 회피하고 침묵을 지켜 왔음을 교회사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지금도 이 종말론은 마치 신학교가 아닌 기도원이나 부흥회를 통하여 그 전통이 전수되고 있고, 이부 감정주의적, 신비주의적 부흥사들이나 심지어 이단자들의 전용 특허물이 되어 버렸음을 한국 교회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종말론이 맞았느냐, 틀렸느냐 또는 그것이 정통적인 것이냐를 따질 기준도 없이 종말론을 가르치고 설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말세에 신령한 종으로 자처하고 있고, 또 그렇게 인정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다보니 일부에서는 종말의식을 강조하는 것만으로 이단자 내지는 준이단자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게 되었다. 이런 현상이 생기게 된 이유는 종말론의 난제성 때문이라고 본다.

 

한국교회는 종말론 연구나 가르침을 이단의 전용물로 만들어서는 안될 시급한 사명 앞에서 조심스럽고 적극적인 연구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데 누구보다 가장 종말의식을 극대화시키는 자들이 바로 이 구원파이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1) 종말론에 대한 권신찬, 이요한, 박옥수의 차이점

이요한 씨나 박옥수 씨는 자신들은 권신찬 씨와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실질적으로 다를 수 있고, 다른 요소를 발견한다. 예컨대 초대교회로부터 큰 논쟁의 초점이 되어 온 믿음과 지식의 문제에 있어서 권씨와 이씨는 입장이 다르다.

 

이씨는 요한일서 강해설교 테이프에서 아는 것이 믿는 것보다 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는 요한일서 416"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라는 말에 두고 있다. 그런데 권씨는 "앎보다 믿음"을 강조했다(알파에서 오메가까지, 한국평신도 복음선교회, 1979, PP. 142-144). 물론 이 논쟁은 교회사 속에 반복되던 난제였으며, 결국 참된 지식은 참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나 또한 참된 믿음은 참 지식이 있어야 함을 가르친 어거스틴의 말로 집약된 사실을 저들이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것은 깊은 의미의 논쟁의 초점이 되지만 이곳에서는 피하려 한다.

 

어쨌든 권씨가 세운 교리 체계를 탈피하여 가능한 한 자기체계를 세우고 싶은 자가 이씨일 것이다. 아니, 이 점에서 박씨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종말론에 있어서도 이씨와 권씨의 입장은 차이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그 유명한 다니엘 9장에 나오는 70이레에 대한 입장이다.

 

우선 그 하나만 예를 들어보자. 물론 뒤에서 집중적으로 소개, 비판하겠으나 권씨는 이 70이레 문제에서 그 연대계산의 기점을 주전 440년대로 잡고 있으나, 이씨는 고레스 원년을 주전 538년으로 이씨보다 훨씬 전으로 잡고 있다는 점이다. 일단 이 글에서는 복잡성을 피하기 위해 이씨의 말을 무시하고 권씨의 말을 중심해서 소개해서 비판하도록 하려 한다.

 

단지 이씨가 대답할 만큼의 진실과 용기가 있다고 믿어지지 않으나 이씨는 왜 권씨의 이론을 수정했는지 밝혀주기를 다시 요청해 볼뿐이다. 그런데 박씨의 경우에는 종말론에 대하여는 기록된 글이나 테이프를 접한 일이 없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아직 거기까지 체계를 세울 힘의 여유가 없는 것같이 보인다.

 

(2) 종말의식을 강조한다고 해서 이단이라 할 수는 없다.

이단의 피할 수 없는 공통된 특징은 종말을 통한 위기의식의 고조를 들 수 있다. 권씨야말로 그런 점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대표적인 이단이다. 그가 쓴 책 제목이나 그 목차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잠시 잠깐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위험한 지구, 가는 자와 남는 자, 임박한 대환란, 세계정부와 666, 인류의 파멸의 징조와 중동사태등등의 제목들을 들자면 끝이 없다. 이화여대 교수요, 문학박사인 장윤호 씨가 위험한 지구란 책 표지 뒷면에, '권하는 말'을 썼는데 다음과 같다.

 

"권신찬 목사가 지은 위험한 지구는 바로 우리 나라 사람이,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본격적으로 위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성경말씀에 따라 저술한 우리 나라 최초의 책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위험한 지구에서 지구는 왜 이렇게 위태로워져가고 있고, 인류는 왜 이다지도 위협을 겪고 있는지, 그 원인은 어디에 있고, 그 원인에 따라 어떠한 결과가 나타날 것인지 하는 데 대한 명쾌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급변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모든 것이 우연하게 발생하고 종결지어 진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나고 정확한 증거가 성경말씀 속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 오늘날 사는 우리들로 하여금 믿음과, 믿음을 통한 생활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 책이라 확신한다."

 

그는 권씨를 기독교인으로서 성경적 종말론을 정리한 최초의 한국인으로 묘사했다. 권신찬 씨가 쓴 종말론에 대한 책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책은, 위험한 지구란 책으로 '가는 자와 남는 자(휴거)'란 소제가 붙은 책이다(중동문화사, 198011일 발행). 이 책에 의하면 곧 3차대전이 일어날 것을 지적하고, 더욱이 책 끝 부록에는 1980114일 타임(Time)지의 표지와 19801월 머드나이트 크라이(Midnight C)지에 나온 예루살렘 대회장의 조감도 그림까지 넣어서 예루살렘성전 재건을 중심해서 신약시대의 끝을 예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종교별 성전이 건립될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성전을 재건한다고 하면 그들의 시대가 되는 것이며, 신약시대(이방인의 때)는 끝이 나는 것입니다."(위험한 지구, 부록 p.7)

 

그렇다면 이처럼 종말의식을 강조하는 것이 이단이란 말인가.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종말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런데 3가지 전제 아래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성경만큼만 강조해야 한다. 둘째, 그 목적이 성경적이어야 한다. 셋째, 그 내용이 성경적으로 옳아야 한다. 그렇게 볼 때 필자는 권신찬 씨의 종말론이 다음의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 싶다.

 

(3) 권씨의 종말의식의 고취는 그 목적이 잘못되었다.

권 씨가 몸서리치도록 말세를 강조하는 데는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왕국건설에 있는 것임을 증명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그의 그릇된 교회관을 들 수 있다. 그는 교회를 사랑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불안에서 평안으로, 하권, 한국평신도복음선교회, 1977, pp. 147-148), 다른 교회관 속에 자기들만이 참된 교회로 자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1962년 경북노회 제71회 임시 노회에서 목사 면직을 받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80년에 발행한 위험한 지구라는 책 뒷면에 저자 약력이 나왔는데 1950년에 대한예수교장로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것을 그의 경력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수 받을 때까지만 장로교가 교회였으며, 그를 면직할 때는 교회가 아니란 말인가? 그리고 교회의 유형성을 전혀 부정하는 그가 도대체 그의 경력에 이 안수 받은 것을 기록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면직 받은 것도 기록해야 하지 않는가?

 

그보다 더욱 잘못된 목적으로 종말론을 사용하는 것은 그가 하고 있는 사업을 보면 알 수 있다. 권씨 자신은 자신이 사업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합리화하고 있지만, 교회가 사업을 하는 것까지는 그 자신의 체계에서 용납된다고 하더라도 사업 자금 조달을 위해 노력한다. 생긴 사건들을 볼 때, 분명히 그 목적이 잘못된 것이다(탁명환 저, 기독교 이단연구, p.225). 이 점에 대해 가장 크게 공격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이요한 씨라고 생각한다. 어찌하여 이씨는 침묵을 지키고만 있는가?

 

(4) 권씨의 종말론은 그 내용이 잘못되었다.

주장하는 방법, 범위 그리고 목적이 옳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이 잘못되었다면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이다. 권씨는 여러 책에서 이 지구가 멸망할 것을 성경과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한 마디로 보면 오늘날 세대주의적 종말론을 그대로 흉내내고 있다. 세대주의적 종말관에서 구원파의 핵심인 구원교리의 옷을 입혀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몇 군데 인용해보자.

 

"하나님의 경영에 의한 역사를 시기적으로 크게 나누면 주전과 주후로 나뉘고, 세분하면 아담으로부터 약 2천년까지는 시작의 시대이고, 그 후 2천년 예수님의 탄생까지가 선민의 시대이며, 주후 곧 신약은 서기 70년부터 1,900년간의 이방인의 때이고, 다음 환란의 7년간 주님 재림 후 1,000년간이 평화의 기간으로 되어 있다."(위험한 지구, p.4).

 

"그러므로, 신약시대는 거의가 이방의 시대로 경륜되어 있다. 누가복음 21:24에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은 멸망을 예언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한부이며 다시 이스라엘의 것이 될 것을 말씀하신 것으로, 19676일 전쟁은 1,900년간 지배되어 오던 이방의 세력에서 신·구 예루살렘이 회복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예루살렘 시에 제3의 성정 재건인데, 이미 모리아산 근처에 건축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건은 역사에 있어서 결정적인 순간에 찾아오게 된다. 그 때가 바로 어떤 사람들이 이 지상에서 사라지는 기현상이 일어나는 때인데, 그것은 육신의 변화로써 창조의 완성이며, 또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는 육신의 멸망의 시작이며,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다시 돌아보시는 선민의 시대가 되는 것이다.

 

다니엘 9:24 이하를 자세히 읽으면 7년간 환란의 기간이 오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다니엘이 포로 생활 중에서 예루살렘을 위하여 기도했는데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다.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기간은 주전 440여 년 전 페르샤왕 때부터 시작하여 70주로써 결정이 되었다. 70주는 490년을 의미한다. 에스겔 4:6에 보면 1일은 1년이라고 했다.

 

499년에 죄가 끝이 나고 예언이 다 성취되고 현재의 역사가 끝이 나는데, 69주인 483년에서 이스라엘민족의 역사는 중단될 것을 말했다. 7주와 62주만에 왕인 예수님이 탄생하시고 또 죽으실 것을 예언했고, 로마에 의하여 멸망된 후, 최후에 로마의 부활인 적그리스도에 의하여 1주가 올 것을 말해서 그것이 7년 대환란이고, 이스라엘의 때가 된다. 그것이 이방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이방인의 때가 끝나는 것을 의미한다."(위험한 지구, PP.5-6)

 

그리고 같은 책 부록에서 미드나이트 크라이(The Midnight Cry)란 잡지의 예루살렘 성전 착공 소식을 소개하면서 이제 그 성전완성을 기점으로 역사가 다 끝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 건물을 회당이라고 칭하지만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예루살렘 어딘가에 '성전'으로써 나타날 건물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계신다. 이런 성전은 현재 존재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예루살렘 대회당은 바로 그 환란시의 성전이 될 것이라는 추측이 점차 확실해지고 있다. 시간적인 요인과, 현대 건축술로 미루어 보건대, 그 건물은 아마도 적그리스도가 언약을 굳게 정할 때(다니엘 9:27), 완공되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날로부터 매일 제사가 회복되는 날까지 단지 220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다니엘 8:23-24, 9:27)."(위험한 지구, 부록 pp.10-11).

 

이 점을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이 성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성경예언 연구자들에게 아주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 환란시의 성전에 관련된 몇 가지 사항들을 열거한다.

 

적그리스도는 이 성전에서 많은 거짓 이적 행위를 행할 것이다.(데살로니가후서 2:1-12)

적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 언약을 그가 다시 굳게 정하고, 그의 중요한 활동들의 대부분이 여기에서 재연될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을 회복하여 중건토록 명령할 것이다.(다니엘 9:25)

그는 제사와 성찬을 시작하도록 허용할 것이며, 또 다시 중지하라고 명할 것이다(다니엘 8:23-24, 9:27).

그는 이 성전에서 앉아 자신을 하나님이라 선포할 것이며, 자신은 인간들이 경배하도록 허락된 유일한 신이라 선포할 것이다(데살로니가후서 2:4)

이 성전에서 그는 하나님을 모독할 것이다(요한계시록 13:5).

이 성전의 지성소 내부에 그의 형상대로 만든 상을 두고 경배토록 할 것이다. 다니엘은 이 형상을, "황폐케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다니엘 8:11-14, 9:27, 마태복음 24:15, 요한계시록 12:6, 13:14-15).

예수는 이 상이 그 성전에 나타나는 것을 보거든 산으로 도망하라고 유대인에게 말씀하고 계신다(마태복음 24:15-20).

예수님의 발이 감람산 꼭대기에 닿을 때, 예루살렘에 대지진이 일어날 것이며 모든 성벽이 무너질 것이다.

 

비판해 보자

 

넓게 비판하자면 세대주의적 종말론이 비판되어야 하고, 세밀하게 비판하자면 하나씩 분석·비판해야 한다. 필자는 곧 한국의 종말론을 적극적인 면에서 정리할 날이 있을 것으로 보고 그때 세대주의적 종말론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을 하도록 하겠다. 일단 권씨의 겨우 큰 전제가 잘못된 점만을 비판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맺으려 한다.

 

연대를 계산하는 방법이 잘못되었다.

한결같이 종말론을 강조하는 자들 속에는 말씀 앞에서 겸손을 찾기 어렵다. 자신의 해석과 하나님 말씀을 동등하게 여겨버리므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우리 이해의 필연적인 기준과 개연적인 기준을 구별하지 않고 있다. 하나의 전제가 잘못되면 자연히 나머지도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 전제에 보편타당하고 객관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성경해석을 하지도 못한 채 바로 그 기준을 적용하고, 응응하니 평신도들은 그 말씀이 맞았는가, 틀렸는가를 생각해 볼 여지도 없이 끌려 다니며 거짓된 교리에 생명을 걸고 마는 것이다.

 

권씨의 연대계산이 맞으려면 가장 먼저 다니엘 9장의 해석에서 1일을 1년으로 보는 그 해석이 옳아야만 할 것이다. 다니엘 9장의 70이레만큼 이것이 옳다고 정의를 내리기 어려운 부분이 성경 주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1일을 1년으로 보는 이 견해는 에스겔 4:6에 근거하고 있는데, 그것을 이 다니엘 9장의 70이레 문제에 적용시키려면 다음의 문제가 생기게 된다.

 

성경의 모든 예언은 1일을 1년으로 계산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권씨는 성경의 모든 예언에 대하여 1일을 1년으로 계산해야 한다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자도 없다. 그렇다면 다니엘 4장에서 느부갓네살왕의 일곱 때를 중심해서 1914년에 예수님이 영적으로 임했다는 여호와 증인의 해석과 다니엘 8장의 2,300주야를 2,300년으로 계산하는 안식교의 해석이 틀리다고 말하기 어렵게 된다.

 

어떻게 에스겔 4장과 다니엘 9장이 연결되는지를 밝히고 1일을 1년으로 계산할 때와 그렇지 못한 때의 기준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길이 없다.

 

1일을 1년으로 잡을 때, 70이레의 시작 연대를 잡을 길이 없다. 같은 계산 방법을 통하여 이요한 씨는 그 기준을 고레스 원년인 538년으로 잡았고, 권씨는 440여 년으로 잡았다. 만일 이씨처럼 앞의 연대로 잡으면 계산상 모순이 발생하고, 권씨처럼 후의 연대를 잡으면 성경해석적인 모순과 연대계산상의 모순을 둘 다 낳게 된다. 이 점을 살펴보자.

 

연대를 계산하는 기준이 잘못되었다.

같은 다니엘 9장의 70이레 문제에 3가지 기준점이 생겼다. 첫째는 안식교인들의 아닥사스다 7년 주전 457(사실은 458년임)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둘째는 세대주의자들의 아닥사스다 20년으로 주전 445년이요, 셋째는 고레스 원년인 538년으로 보는 견해이다. 앞의 두 가지는 11년설을 따르고 있으며, 셋째는 11년설을 비교적 취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기준점이 나온 공통점이 무엇인가 하면 다니엘 9장의 '예루살렘 건축령'이란 역사적 근거이다.

 

예루살렘 건축령이 예루살렘 성읍 건축령인지, 성건건축령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에 따라 본문해석도 그 기준도 달라진다. 그러나 둘 다 포함시켜 볼 때, 예루살렘 건축령이 오직 네 번 내려졌는데, 즉 고레스 원년 538, 다리오 2520(완성은 516), 아닥사스다 7458, 아닥사스다 20445년이 그것이다. 필자는 만일 11년설을 취하려면 차라리 445년 보다 안식교의 457년이 더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점에 대한 논쟁은 그만두고 권씨의 이론만 비판하자. 권씨의 기준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다니엘 9장의 예루살렘 중건령이 성전 중건령인지, 성읍 중건령인지 밝히지 못하고 있다. 권씨는 기준을 잡을 때는 성읍 건축령으로 잡았는데(아닥사스다 20년의 명령은 성전과는 관계가 없는 성벽 건축령이었으니까) 그것을 적용할 때는 1980년대의 예루살렘 성전 건축과 연결시키더니만 그것을 다시 그 성전을 이용하여 성읍을 재건할 사탄의 역사와 연결시켰다(위험한 지구, 부록 p.14).

 

25절 한 절의 '예루살렘 중건령'의 예언을 두 가지로 사용했다. 그 하나는 연대의 기준을 잡을 때 사용하여 445년으로 잡았고, 그것을 말세에 예루살렘 성전이 완성된 후 사탄에 의해 예루살렘 성읍을 재건한다는 미래의 예언성취의 측면에서 사용했다. 그 근거를 밝힐 길이 없다. 물론 그 기준을 아닥사스다 20년의 영으로 잡은 것도 틀렸지만 본문은, '예루살렘 중건령이 날 때부터' 69이레 후에 기름부음 받은 자가 나타난다고 했으니, 오직 연대의 기준을 잡을 때만 사용되는 말이다.

 

연대의 기준이 왜 주전 445년으로 잡혀야 하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 예루살렘 성전 및 성읍과 관계된 명령은 4차에 걸쳐 있었는데 왜 성읍 보수 명령이 내려진 445년으로 잡아야 했는가? 저들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그 이유는 간단하다. 11년 설의 비교적 합리적인 해석처럼 보이는 유혹을 이기지 못한 증거요, 그 계산법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과 맞출 수 있는 연대는 주전 440여 년이 되어야 하니 결국 아닥사스다 20년의 조서를 취하게 된 것일 뿐이다.

 

더욱이 권씨는 그 연대마저 445년이라고 하지도 못하고, '주전 440여 년 전부터 시작하여'라고 했는데, 그 점도 분명하지 못한 해석이다. 1일을 1년으로, 69주는 483년이며, 70주는 490년이라고 하는 명확한 연대계산이 명확하지 못한 데서 출발한다면 역시 모두 명확하지 못한 것이 될 뿐이다. 그런데 이 세대주의적 해석은 차라리 안식교의 해석보다 더 못한 것이 되어버린다.

 

사실 이 세대주의적 해석은 한국 교회를 가장 넓고 깊게 사로잡고 있는 종말론으로서 1000년 왕국이니, 144,000이니, 2000년이니 하는 숫자놀음에 불과할 뿐이며, 이중 심판교리가 나오게 되고, 구원마저 다원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더욱이 권씨의 경우 예수께서 우리를 떠나가신 것처럼 성령도 가시는 날이 온다는 반삼위일체적이요, 반성경적인 희안스러운 주장까지 하게 되었다(위험한 지구, pp.26-28).

 

후기: 구원파를 경계하라

 

양의 탈을 쓴 이리와 같은 이단의 특성을 가장 잘 살린 이단 중의 이단이 소위 '구원파'이다. 그런 점에서 요즈음 권신찬 씨나 이요한 씨 보다 박옥수 씨가 더욱 한국 교회에 위협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많은 기성교회 목회자들 중에 구원파와 깊이 관계가 되어 있는 자를 알지 못한 채 그들과 교제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들을 교회 단상에 세우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 하나가 박옥수 씨 파에 속해 있는 평신도 선교사 김성준 씨이다. 현재 남미 아마존강에서 선교를 하고 있으며, 도움 없이 스스로 선교한다고 자처함으로 기성 교회로부터 많은 인정과 동정을 받고 있다.

 

어쨌든 구원파 경계해야 한다. 더욱이 그릇된 종말론을 인용하여 하나님 나라 건설이 아닌, 구원파 이단 왕국건설에 힘쓰는 이리 떼에게 양들을 빼앗기지 않도록 복음의 울타리를 든든히 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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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최삼경 목사가 <구원파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집필한 글을 전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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