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요한 구원파의 구원관 비판(1.2.3)

  선지자선교회

이요한 구원파의 구원관 비판 (1)

 

이요한 구원파의 구원관

 

20140613() 1이인규 권사 dsmedic@naver.com

이인규 권사 / 평신도이단대책협의회 대표

 

구원파는 최근에 세월호 사건과 관련된 유병언 계열(기독교복음침례회)과 그 분파인 이요한 계열(생명의말씀선교회, 예수교복음침례회), 그리고 박옥수 계열(기쁜소식선교회, IYF) 등이 있다. 그런데 최근에 이요한 계열과 박옥수 계열이 자신들은 구원파가 아니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반론보도를 올리고 있으며, 인터넷 홈페이지에 전화를 걸어서 글을 내리지 않으면 법적인 고발을 하겠다고 협박을 하고 있다. 물론 필자도 그와 같은 전화를 받았다.

이요한 계열과 박옥수 계열은 세월호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러나 두 계열은 유병언 계열과 함께 구원파의 3대 훼밀리이다. 그들은 서로 뿌리와 유래가 같고 유사한 교리를 갖고 있는 구원파이다. 기독교 정통교단의 이단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이 세 개의 계열이 모두 구원파라고 공식규정하고 있다.

 

먼저 이요한 계열의 구원파의 교리에 대해서 권신찬(유병언) 계열의 주장과 비교하여 보자.

 

1. 이요한 구원파의 구원관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4:26-29) .

 

이요한 계열 구원파는 마가복음 본문을 인용하여 구원을 세 가지로 분류한다.

즉 영혼의 구원, 생활의 구원, 몸의 구원이라고 하는데, 싹은 영혼구원을 상징하며, 이삭은 성품구원 혹은 생활의 구원을, 곡식은 육신의 구원 혹은 몸의 구속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씨를 심어놓고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즉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가는 동안 생명이 움터서 자라고 결심한다.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는 말씀은 세 단계의 신앙생활의 과정을 이르는 것이다. 이 단계를 달리 표현하면 싹은 십자가에 죽어서 주님이 이루신 은혜로 말미암아 받는 영혼구원을, 이삭은 구원받은 그날부터 주님 앞에 가는 동안 우리의 마음과 생활이 변화되는 성품구원 혹은 생활구원을, 이삭에 충실한 곡식은 주님 오실 때 우리의 육신이 주님처럼 당장 변화되는 육신의 구원 혹은 몸의 구속을 의미하는 것이다.”(<구원의 삼단계>, 이요한, 생명의말씀선교회, 2002, 6)

 

이요한씨가 가르치는 소위 삼단계 구원관은 권신찬씨에게로부터 배운 것이며 모방한 것이다. 극동방송에서 팀선교회를 할 때에 권신찬씨로부터 첫 번째 안수를 받은 사람이 유병언씨이며, 두 번째 안수를 받은 사람이 이요한씨이었다. 다만 권신찬씨는 지방교회와 같이 영의 구원, 혼의 구원, 육의 구원으로 분류했지만, 이요한씨는 영혼의 구원, 생활의 구원, 몸의 구원으로 용어만을 바꾸었을 뿐이다.

 

그러나 혼, 즉 마음은 세상을 좋아합니다. 구원을 받았더라도 세상의 쾌락, 돈 같은 것들을 다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혼의 구원이란 무엇인가? 신앙생활을 해가는 중에 차츰 육적인 생각이 약화되어 가서 나중에는 순전히 육신의 생각을 가지던 마음이 영으로 기울어져 하나님께 대한 주님께 대한 생각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영의 구원을 받고 난 뒤 세상을 향하던 그는 마음이 차츰차츰 힘을 잃어가면서 마음이 주님께 가게 되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해 갑니다. 그리고 맨 나중에는 육신이 들림 받습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아직도 세상을 좋아하는 육신의 마음과 욕망이 있다면 아직 자기 혼은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대개 혼이 구원받는 과정은 상당히 오래 걸립니다. 굉장히 시달림을 받고나서 나중에 어떤 말씀을 깨닫게 될 때에 다시 한번 벗어지는 것이 있고서야 영의 생각을 가집니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 일정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을 말합니다.”(<믿음으로 믿음에>, 권신찬, 기독교복음침례회, 23)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성경본문과 전혀 다른 이상한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마가복음 본문은 인간의 세 가지 단계의 구원의 과정을 분류하여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유이기 때문이다. 성경본문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저절로 자라나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유로서,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말하며,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라고 말하고 있다. 즉 씨를 뿌린 농부는 오직 씨를 뿌렸을 뿐이며, 예수님과 함께 도래한 그 나라를 지상에서 확장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의미이다.

 

다시 정리하여 말하자면 성경본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1) 마가복음 426-29절은 영혼육의 세 단계의 구원과정을 각각 구별하는 내용이 아니며, 그와는 정반대의 의미로서 아무도 모르게 저절로 자라나는 과정, 즉 단계적인 구별이 없는 과정을 의미한다.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되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성경구절이 그것을 반영하고 있다.

(2) 본문은 인간의 구원의 단계를 구별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유이다. 마가복음 4장과 병행되는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도 모두 하나님나라에 대한 일곱 가지의 비유로써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말하는 내용이다. 마가복음 본문 바로 뒤에 기록된 구절도 겨자씨와 같은 작은 씨로부터 크게 성장하는 나무에 대한 내용으로서 진행적이며 확장적인 하나님나라를 비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요한 계열 구원파는 본문으로 세 단계의 구원으로 분류를 하여 영은 이미 구원을 받았고 죄가 없다고 주장하며, “육체는 구원을 받지 못하였으며 죄가 남아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전인적인 인간의 영과 육을 분리하는 이원론적인 사상을 성경적으로 짜맞추기 위하여 전혀 관계가 없는 성경구절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인간 자신이 스스로 깨달음으로서 그 시간에 이미 거듭났으며,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요한 측은 싹의 과정을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 죄 용서함을 받는 동시에 하나님의 생명이 시작된다”(<구원의 삼단계>, 이요한, 생명의말씀선교회, 7)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마가복음 본문은 깨달음의 어느 시간이나 각각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뿌려진 씨가 저절로 자라나서 곡식이 되는 것과 같은 하나님나라의 과정을 말한다.

 

하나님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이 땅에 도래하였다. 예수님이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비유를 한 것이 마태복음 13장과 마가복음 4장에 기록되어 있다. 마가복음 4:26-29에 있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유는 마태복음에 없는 내용이지만 마태복음 1324절 이하에서 밭에 뿌려진 씨로부터 저절로 자라나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와 같은 유사한 내용은 있다.

 

심지어 이요한 구원파는 마태복음 13장의 여자가 가루 서말에 누룩을 넣은 비유에 대해서 가루 서말을 삼위일체로 비유풀이를 하는 황당한 해석을 하며, 누룩에 대해서는 기독교가 다른 교훈을 넣은 것이라고 비유를 하고 있다. 실제로 이요한씨의 삼위일체관은 정통삼위일체가 아닌 이단적 양태론을 추종하고 있다. 이요한씨는 교회에서는 목사, 집에서는 여보, 자녀들에게는 아버지가 된다는 전형적인 양태론을 삼위일체라고 가르쳤으며, 삼위가 동시에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 설명하기 어렵다고 가르쳤다.

 

마태복음 13장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유에서, 가루 서말에 넣은 누룩에 대한 비유와 함께, 아주 작은 겨자씨가 새가 깃드는 큰 나무로 성장하는 것에 대한 비유는 하나님나라가 성장하고 확장하게 된다는 비유를 뜻한다. 13:33전부 부풀게 한 누룩이라고 말한다.

가루 서말이라는 분량은 유대인들의 일상적인 가정의 하루 식량이었으며, 누룩을 넣어 전부 부풀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나라가 확장되어지는 것을 말한다. 마가복음 426-29절도 씨를 뿌린 것이 저절로 자라나서 곡식을 맺게 되어 추수를 하게 된다는 예수와 함께 지상에 도래한 하나님나라의 확장에 대한 비유이며, 그것을 구원의 삼단계로 변질시켜 해석하는 자체에 문제가 있다.

 

이렇게 성경을 자신들 교리에 짜 맞추는 해석은 이단들의 상용수법이다. 특히 이요한 계열의 성경해석은 아무도 공감할 수 없는 황당한 해석이 많다. 그 한 예를 들어보자.

 

주님이 명하신 대로 제자들이 남은 음식을 거두니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마가복음 8장에는 이와 비슷한 사례로 4,000명을 먹이시고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떡을 만들어 먹이신 이적은 두 번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다섯이라는 숫자는 죄인을 가르키는 숫자로 여러 번을 사용되고 있으므로 아마도 5,000여 명은 주님 앞에 있는 죄인의 모습을 가르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넷이란 숫자는 고난 혹은 세상을 가리키는 숫자이므로 4,000여 명은 세상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5,000명을 먹이시고 남은 열두 광주리와 4,000명을 먹이시고 남은 일곱 광주리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이 사건 등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남은 열두 광주리와 일곱 광주리는 먼저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고 그 후에 이방인도 구원의 은혜에 참여해 일곱 교회시대가 형성될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 이요한, 생명의말씀선교회, 269-270)

 

과연 4000명의 4가 고난과 세상을 뜻하며, 5000명의 5가 죄인의 모습을 뜻한다고 생각이 되는가? 또한 열두 광주리의 12이 이스라엘의 구원이고, 일곱 광주리의 이방인의 일곱 교회를 비유한다고 생각이 드는가? 또한 열두 광주리와 일곱 광주리가 이스라엘의 구원과 이방인의 교회의 순서라고 해석할 수 있는가? <계속>

 

이요한 구원파의 구원관 비판 (2)

이원론적인 인간론

20140620() 이인규 권사 dsmedic@naver.com

이인규 권사 / 평신도이단대책협의회 대표

 

2. 이원론적인 인간론

 

인간의 구성요소를 영혼육으로 분리하는 신학적인 견해에는 삼분법이 있고, 영혼과 육의 이분법이 있지만, 이것은 단지 구성요소를 말하는 것으로서, 인간을 살아서 각각 영혼육을 분리할 수는 없다. 인간은 영혼과 육이 연합하여 전인적이며 총체적인 하나의 인격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영혼만 존재한다는 것은 죽음 이후의 분리를 말하며, 또한 영혼이 없이 육체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시체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나의 영혼만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며, 전인적인 라는 인격이 구원을 받았다는 뜻이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도 내 육체에만 죄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라는 인격이 죄인이라는 것이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육체는 땅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께로 간다. 또한 부활은 몸의 구원이 아니라, 영혼이 신령한 몸, 강한 몸, 영광의 몸을 갖게 되는 궁극적인 구원을 말한다. 부활은 구원을 받는 사람의 당연한 과정으로서 구태여 다른 단계로 분류할 필요도 없다.

 

성경은 영은 이미 구원을 받았고 죄가 없다는 구원파의 주장과 달리, 영도 육과 같이 더럽다고 말한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7:11).

 

성경은 구원파의 주장과 달라 육체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과 혼도 죄를 짓는다고 말한다.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이니 자기의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soul)을 보전하느니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spirit)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16:17-18).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 하였사오니 내 영혼(네페쉬)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41:4).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spirit)을 감찰 하시느니라”(16:2).

 

더욱이 성경은 육체는 구원받지 못하고 죄가 있다는 구원파의 주장과 달리, 육체에도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며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말한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1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63: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84:2).

 

이요한 계열은 두 번째 구원의 단계로서 생활의 구원, 성품의 구원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기독교의 성화와 전혀 다르다. 결국 이요한 측이 주장하는 구원의 삼단계는 기독교복음침례회와 지방교회가 주장하는 영의 구원, 혼의 구원, 육의 구원과 다를 것이 없다.

 

어느 성경도 영과 혼과 육의 구원으로 각각 구별하지 않으며, 또 성경은 영만이 먼저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으며, 우리의 전인적인 온 영과 혼과 몸이 그리스도 강림할 때까지 흠 없게 보전되라고 말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사도요한은 우리가 죄가 없다고 하면 스스로를 속이고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아래 본문이 과연 영혼만 죄가 없다는 뜻인가? 또는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백을 하라는 뜻인가? 사도요한은 우리에게 죄가 있다고 분명히 말한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우리가 거듭났을 때에 우리 죄가 없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인이라고 칭하여 주시고 우리를 정죄하지 않겠다는 것이 곧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가 되는 것이다. <계속>

 

이요한 구원파의 구원관 비판 (3)

 

자기 자신이 스스로 단정하는 구원과 거듭남

20140627() 이인규 권사 dsmedic@naver.com

이인규 권사 / 평신도이단대책협의회 대표

 

3. 자기 자신이 스스로 단정하는 구원과 거듭남

 

알기 쉽게 예를 들어보자. 내가 만일 20년 전에 예수를 믿었는데, 지금은 믿지 않거나 혹은 타종교를 믿고 있다고 가정하여 보자. 내가 구원을 받았는가? 또 다른 예를 들어서, 내가 지금은 예수를 믿지 않지만, 20년 후에 예수를 믿을 것이라고 가정하여 보자. 내가 구원을 받았는가?

우리는 오직 값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현재진행적인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며,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now)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who are in Christ Jesus)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8:1).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 과거에 예수를 믿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며, 과거에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 우리를 구원받게 하지 않는다. 내가 어떤 사실을 알고 깨닫게 되는 순간이 과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현재성과 같은 의미가 될까? 구원은 하나의 길이며 과정으로서 ‘Already but not yet’이라는 역동적인 과정을 뜻한다.

 

구원파는 스스로 구원을 받았다고 단정한 날 이후부터 이미 구원을 받았고 거듭났으며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데, 그러한 구원은 아주 쉬운 구원관으로써 스스로의 단정적인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사이비집단도 모두 자신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가르치며 오히려 이단집단일 수록 자신들만이 구원을 받았다는 배타적인 구원관을 주장한다.

 

구원파에서 스스로 구원을 받았다고 한 자가 사이비 교주의 이단집단에 빠졌다면 그는 과연 구원을 받는가? 필자가 직접 구원파 교인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니, “그가 구원을 받았다고 했던 구원간증이 잘못되었다고 답변을 한다. 그렇다면 스스로 구원을 받았다고 단정하는 것이 실제 구원과 다른 경우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

 

개혁주의의 견인교리는 구원파와 전혀 다르다. 개혁주의에서 구원이 취소가 되지 않는 경우는 자기 자신 스스로의 구원 단정이나 깨달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작정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성도를 뜻하기 때문이다.

 

견인의 개념 : 이 교리의 의미는 분명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이 교리는 모든 예배 참석자나 교회 회중들이 그들의 신앙 안에서 끝까지 견인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는 공적으로 신앙고백 하는 모든 사람들은 영원히 안정하게 된다는 것이나 우리에게 참 신자로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결코 신앙에서 떠나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시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 교리는 성경이 분명하게 언약을 깨뜨리는 사람이 있다고 증거하기 때문에 구속사 가운데 드러난 은혜 언약 속으로 결합된 모든 사람이 안전하게 된다는 개념도 아니다.”(<개혁주의 구원론>, 안토니오 후크마, 기독교문서선교회, 386)

 

성도의 견인의 교리의 요지는 하나님이 중생시키시고 은혜의 상태로 유효적으로 부르신 자들은 그 상태로부터 전적으로 또한 궁극적으로 떨어질 수 없으며 다만 분명히 그 상태에서 끝까지 견인하여 영원히 구원받을 것이라는 것이다.”(<조직신학 하권>, 루이스 벌콥, 기독교문사, 312)

 

다시 말하면 개혁주의가 말하는 진정한 구원의 확신은 주관적인 느낌과 자의적인 깨달음이 아니다. 특히 구원파에서는 스스로 구원을 받았다고 깨달은 사람이 죄를 지으면 금전적인 손해나 질병 등의 징계를 받는다고 주장한다. 심지어는 구원받은 사람 자신에게 징계가 없다면 혹시 구원을 못 받았는지 자신을 살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이 가만히 놓아두신다. 조금 있다 지옥 갈테니까 내버려 두시는 것이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이 잘못 하면 하나님이 가만 놔두시지 않는다. 만일 구원받았다는 사람이 거짓말하고 남을 속였다면 몇배의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남의 돈을 떼먹었으면 몇배를 잃게 하시고 바른 길로 가도록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면 거기에 따른 징계가 있다.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죄지만, 하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도 죄이다. 거듭난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지 않고 하지 않아야할 일을 하게되면 물질적으로나 육신적, 정신적, 신앙적으로 징계가 있고 심할 경우에는 육신을 죽이기까지 하신다. 그러므로 징계가 있음을 두려워해야 한다.” (<구원의 삼단계>, 이요한, 생명의말씀선교회, 32)

 

인간은 누구든지 의인이 없으며 모두 죄인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렇다면 사람은 누구든지 죄를 짓기 때문에 이요한 측의 주장대로 본다면 결국 누구든지 살아가면서 금전적인 손해나 사고, 고난, 질병 같은 일이 있을 것이고, 그 때마다 죄를 지어서 그런 징계를 받은 것으로 알고 더욱 교회에 충성하여야 한다는 것인가? 심지어 이요한 측은 오히려 징계가 없다면 구원을 받지 못한 자가 아닌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성경에서 거듭난 사람들은 항상 징계와 심판을 당할까?

 

만일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있는데도 징계가 없다면 오히려 자기의 믿음을 돌아보고 혹시나 사생자 즉 구원 받지 못한 자는 아닌지 의심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생명의말씀선교회 홈페이지)

 

결론적으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관적인 사역임에도 불구하고, 구원파의 구원은 매우 쉬운 구원이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 깨달으면 받는 구원으로서 그 구원은 취소되지도 않는다고 한다.

즉 자기가 스스로 구원을 받았다고 단정한 구원이 곧 하나님의 최종적인 구원과 동일하며, 그 구원은 결코 취소되지 않는데, 죄를 지을 때마다 징계를 당한다는 것이 곧 생활의 구원이 되는 셈이다. 또한 다른 교회는 구원이 없다고 가르치며, 이요한 측 교회를 떠나면 저주를 받는다고 가르치고, 다른 교회의 교인들과는 결혼도 못하게 하는 배타성을 갖고 있으면서, 더욱이 수십년 전부터 임박한 종말이 곧 온다는 주장을 가르쳐 왔다.

 

특히 모든 계열의 구원파들은 감리교의 웨슬레도 몇년 몇월 몇일에 구원파와 동일하게 구원을 받았다고 말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웨슬레 목사는 그 날을 일기에 기록하였을 뿐이며, 그 날짜에 구원을 받았다거나 거듭났다고 말한 적이 없다. 더욱이 웨슬레 목사는 구원파의 주장과 전혀 달리, 거듭난 사람도 믿음, 소망, 사랑이 필요하며, 아직 죄의 뿌리가 남아있으므로 그 죄를 제거하기 위하여 성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웨슬리에 따르면 중생한 죄는 원죄의 죄책이 해결되어 과거처럼 신자를 지배하지 못하지만 죄의 능력은 아직도 남아있어서 성령을 거슬른다. 이 남아있는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화의 은총이 필요하다. 죄는 하나님의 법에 대한 의도적(고의적) 위반이다. 중생한 신자는 믿음, 소망, 사랑에 머물러 있는 한, 기도와 감사의 생활을 하는 한, 의도적으로 이 죄를 범하지 않는다..... 웨슬리는 인간 본성의 내적 타락으로서의 죄의 뿌리인 원죄는 행동이 아니라 상태로서의 죄로 중생한 자에게도 남아있는 죄로 본다. 우리의 자범죄는 원죄의 가지와 열매에 해당된다. 웨슬리는 이 남아있는 죄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성결을 제시한다. 웨슬리에게 성결은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남아있는 죄의 뿌리를 제거하시고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 주시는 은총의 역사이다.”(<존웨슬리와 감리교신학>, 김영선, 대한기독교서회, 216-217)

 

마틴 루터는 우리는 의인임과 동시에 죄인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4. 어떤 죄를 지어도 이미 영혼은 구원을 받았다는 도덕폐기론

 

소위 도덕폐기론이라는 주장이 있다. 도덕폐기론이라는 것은 죄를 지어도 좋다라고 가르치는 교리가 아니며, 죄를 지어도 구원에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교리를 뜻한다.

구원파에서는 자신들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고 극구 부인을 함에도 불구하고 도덕폐기론은 구원파와 같은 이단들에게 볼 수 있는 교리가 맞으며, 그들은 실제로 그렇게 가르치고 있으며, 그 증거로써 그들이 가르치는 대표적인 성경구절이 고린도전서 55절이다.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고전 5:5)

 

이 성경본문의 배경을 살펴보자.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고전 5:1-2).

 

아버지의 아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계모, 새어머니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린도교회에서 자신의 계모를 범한 교인이 있었다. 바울은 이런 자를 교회에서 쫓으라고 말하는데, 위 본문을 구원파와 같은 도덕폐기론자들은 이러한 간음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영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해석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파는 대외적으로는 어떤 죄를 지어도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가르치지 않는다고 변명을 한다.

 

고전 5:5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그런 사람을 사탄에게 내주어 버리면 죽어 버립니다. 그것은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하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 죄도 죽는 징계를 말하지만 영원히 멸망받는 것은 아닙니다. 지옥 갈 죄를 사함 받은 것은 완전한 것입니다. 완전히 죄사함을 받은 것입니다.”(<성경은 사실이다>, 권신찬, 기독교복음침례회, 399)

 

구원을 받은 사람이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영혼이 지옥에 가는 죄가 아니라 육신이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는 말입니다.”(생명의말씀선교회 홈페이지)

 

과연 새어머니를 간음하여도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은 죄사함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육체적인 징계만 받을 뿐일까? 새어머니를 간음하여도 육체적인 징계를 받을 뿐이고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이런 주장을 가르치면서 자신들은 도덕폐기론이 아니라고 숨기는 자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도덕폐기론이라는 사상은 어떤 죄를 지어도 구원과 상관이 없다는 것이며, 위 성경구절을 인용하며 자신의 계모를 간음하여도 이미 영혼은 구원을 받았다고 가르친다면 그것이 곧 도덕폐기론이 된다.

 

본문은 음행을 한 교인을 사탄에게 내주었다고 표현한 것에 대해서, (1) 교회가 로마법정에 고발을 하였거나 (2) 죽음에 이르는 심각한 질병에 걸린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3) 교회에서 징계를 하여 쫓아내는 것을 사탄에게 내 주었다고 표현한다고 본다.

그러나 사탄에게 내 주었다라는 표현은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능동적인 행위를 뜻하므로 교회에서 쫓아냈다는 징계의 의미로 보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무엇보다도 그 이유는 성경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 때문이다.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고전 5:2).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고전 5:12-13).

 

그렇다면 징계를 하여 교회를 쫓아낸다고 하여도 육체는 멸하고 영은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본문에서 멸하고라는 단어는 올레드로스라는 헬라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는 죽음이라는 뜻도 있지만, 대부분은 붕괴, 파괴, 폐허, 징계라는 의미로 사용되어진다. 그것은 공동체인 교회에서 쫓겨나는 벌을 받는 자체를 육체적인 파괴, 징계로 보는 것으로서, 징계를 받음으로서 혹시라도 자신의 죄를 회개한다면 영은 구원을 받게 된다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 영혼은 구원을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주 예수의 날(on the day of Lord)에 구원을 받게 하려함이다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호크마주석은 캘빈의 해석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칼빈(Calvin)은 전반부에 등장하는 내어준다라는 말의 법정적, 선언적 의미를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사단에게 내어주는 행위는 일시적인 것으로서 궁극적인 심판과 구원에 선행하는 임시 조치라는 뜻이다. 음행한 자들을 사단에게 내어주는 교회의 심판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이며 영원한 그리스도의 심판에 의하여 그의 운명은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참된 사랑의 원리인 징계를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다시 그들에게 미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하며 또한 올바른 징계를 행함으로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야 한다. 한편 바울은 '주 예수의 날'이라는 구절을 첨가함으로써 그 징계 받은 죄인들을 주의 백성들 가운데서 다시 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따라서 본 절에서 범죄자에 대한 징계의 목적을 살펴볼 수 있다. 즉 징계는 범죄한 영혼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이나 유기가 아니라 회개와 돌이킴을 위한 일시적 고난이며 구원을 전제로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이다.”

 

사탄에게 내 준다는 표현은 공동체의 밖, 즉 교회 밖으로 쫓겨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골로새서 113절에는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로 옮기셨으니라고 말하고 있으며, 에베소서 22절에도 세상에 있는 상태를 사탄의 권세에 있는 것으로 언급하기 때문이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2:2).

 

사탄에게 내 준다는 표현은 교회에서 쫓아내 세상에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적합하며, 동일한 표현이 다른 성경에도 나와 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딤전 1:19-20).

 

그 중에서 후메내오에 대해서는 디모데후서에서 이단적인 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딤후 2:17-18).

 

즉 출교와 징계의 목적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째는 교인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이상한 사상을 전하지 못하도록 분리시키는 것이며, 둘째는 혹시라도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뜻이다. 성경은 그러한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5-26).

 

무엇보다도 성경은 어떤 죄를 지어도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새어머니를 간음한 자를 사도바울을 교회에서 쫓아내라고 말하며, 그러한 징계를 하는 목적이 혹시라도 그가 회개하고 돌이킨다면 주 예수의 날에 그 영혼을 구원받게 하려하는 목적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 성경구절을 자신들의 황당한 교리에 짜맞추어서 새어머니를 간음하여도 이미 영혼이 구원을 받았으므로 징계만 받는다라고 가르치는 곳이 있다면 어찌 도덕폐기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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