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선교회
● [설교를 말하다 ⑧] 내수동교회 박희천 원로목사
■ 65년간 성경 670번 읽어도… “알 수 없더라”는 고백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목회자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하고, 또 흔한 척도는 무엇일까. 옳고 그름의 당위성을 떠나 현실적으로 그것이 설교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드물 것 같다. 목회자는 오직 설교로 말하고 설교로만 규정된다는 주장도 있으니, 이것에 기대자면 설교는 목회의 처음이자 끝이다. 크리스천투데이는 기획 인터뷰 ‘설교를 말하다’를 통해 설교라는, 그 끝없고 오묘한 세계를 엿본다.
“혼자 오셨소?” 굵직한 평안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그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했다. 올해로 86세라는 것이 목소리만으로는 구별하기 힘들었다. 총신대신대원에서 28년간 헬라어, 설교해석학, 설교학 등을 가르치고, 65년간 강단 위에서 복음을 설파한 그는, 아직까지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설교를 전하고 있었다. 매일 성경을 읽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평생토록 바른 설교를 전하는 데 진력했던, ‘설교의 바이블’ 박희천 내수동교회 원로목사.
그런 그가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헷갈리고, 알 수 없었다. 이것이 솔직한 나의 고백”이라고 말했을 때는 어떤 경외심마저 들었다. 그는 “성경이 바로 이런 책”이라고 강조하면서 “목숨을 걸고 읽고, 바르게 전해야 한다”고 했다. “요즘 한국교회 설교를 들으면서 냉가슴을 앓는다”는 그를 한강의 밤섬이 내려다 보이는 자택에서 만나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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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설교의 바이블’ 박희천 원로목사를 만났다. 그는 요즘 강해서 저술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고 했다. 기자가 방문한 날에도 그는 서재에서 저술 작업에 한창이었다. ⓒ 박현우 기자
-은퇴 후에도 설교를 하고 계시지요?
“내수동교회에서 한 달에 한 번씩 하고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설교가 20~25분 사이에 끝나더군요. 이유가 있습니까?
“제가 다른 사람 설교를 들을 때에 20분 정도가 듣기 좋더군요. 내가 듣기 좋으면 다른 사람도 그럴 거 아니겠습니까? ‘한국교회 박희천 목사 설교는 20분. 죽자꾸나 길어지면 25분’. 난 설교 길게 하는 것 딱 질색입니다. 나중에 알았는데 언어학적으로 20분까지 정신 차려 듣지 20분 넘어가면 안 된답니다. 거기하고도 맞더군요. 나중에 알았어요. 학생들에게 신신당부합니다. 길게 하지 마라. 고거 사람 죽이는 겁니다.”
-담임목사 때와 은퇴 후 설교, 어떻습니까?
“고 차이점이 무엇인가 하니 나도 그것을 몰랐는데 제가 은퇴하기 4~5년 전부터 한 제목 가지고 한번에 끝낸 설교가 없습니다. 최소한도 3~4주 연속으로 설교를 했어요. 재료가 그렇게 나오더군요. 말년에 나는 그것을 느꼈습니다. 내가 은퇴하기 4~5년 전부터 한 제목 가지고 3~4주 그렇게 양이 많이 나와요.”
은퇴하고 나서 한 달에 한 번 하니까 그 점이 괴로워요. 한번에 설교 끝나는 것이 별로 없어요. 3~4주를 해야 하는데, 죽으나 사나 한번에 설교를 해야 하니까 그런 어려움을 겪어요. 연속해서 하는 설교는 못하지요. 그런 어려움이 있어요. 한번에 끝낼 설교만 해야 하니까 제약을 받습니다.”
박 목사의 말에는 아쉬움이 묻어 나왔다. 설교를 더 전할 기회가 많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럴 만한 여력이 없다. 건강의 이유도 있지만 최근에 저술 작업에 매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07년 펴낸 강해서 ‘사무엘 상·하’와 ‘다윗과 솔로몬의 통일왕국’에 이은 책을 집필 중이라고 했다. “죽기 전에는 다 써야 하는데, 하나님께 떼를 쓰고 있죠. 이거 다 한 다음에 데려가시라고요.”
-설교를 잘 하는 비결이 있습니까?
“설교에 대해서 잘 아는 설교학의 대가들은 어마어마한 비결들을 말하겠지요. 난 좀 무식한 사람이라, 설교를 잘할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성경을 한없이 많이 읽으라는 겁니다. 성경을 한없이 많이 읽어요. 다른 목사님들에게 미안하지만 우리 목사님들이 성경을 적당히 읽어서는 안 됩니다. 목을 내놓고 죽을 힘을 다해서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너무 많이 읽어서 손해 보는 일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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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설교 잘하는 비결은 없다”고 했다. 23년간 매일 4시간씩 성경을 읽어온 그는 후배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에게 “성경을 죽을 힘을 다해 읽으라”고 권면했다. ⓒ 박현우 기자
-진짜 설교는 언제부터였습니까?
“1945년 평양신학교 학생 시절에 저는 굉장한 기대를 가지고 설교학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설교 잘 하는 법을 한 마디도 못 들었어요. 그래서 죽을 고생을 했지요. 나름대로 설교를 잘 해보려고 노력했어요. 한 4~5년 동안 죽을 고생하다가 나름의 방법을 개발했지요. 이대로 하니까 되더랍니다. 설교의 재료를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간단합니다. 성경을 한없이 많이 읽으라는 것입니다. 적당히 읽어서는 안 됩니다. 죽을 힘을 다해 읽어야 합니다.”
-이후로 설교가 잘 되었나요?
“그 방법을 터득한 때부터는 설교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적은 없습니다. 내 설교 원고는 월요일에 나갔습니다. 그리고 다음주 설교 본문과 제목을 언제나 미리 예고해주고, 주일날 설교지만 월요일에 비서한테 보내요. 여유가 있으니까요. 건방지지만 성경 본 게 있으니까. 자동적으로 많이 나오니까요. 옛날에는 목사들이 토요일에 긴장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긴장도 안되고, 설교가 많이 여유가 있지요. 설교 준비 시간도 얼마 안 걸려요. 평소에 성경을 많이 읽어 놓으면 저절로 나오는 겁니다.”
-성경을 죽을 힘을 다해 읽으라고 하셨어요. 기준이 있습니까?
“예전에 신학교에서 학생들 가르칠 때 그걸 소개해 줬습니다. 내가 성경 본문을 얼마나 아는지 온도계가 있는데 그것으로 평생 재보라고 했습니다. 화씨, 섭씨 있듯이 온도계가 두 개다.
하나는 누가 옆에서 성경 한 구절을 읽을 때에 그 구절이 어느 성경 몇 장에 있는지 알아 맞힐 수 있느냐? 절 수까지는 필요도 없고, 장 수까지만 알아맞히면 돼. ‘하나님이 태초에 창조하시느니라’ 그거야 알겠지. 그와 같이 신구약 어디에서 누가 한 마디 읽어도 그 성경은 예레미야 39장, 이사야서 몇 장, 아무 성경 몇 장인지 알아맞힐 때까지 읽으라고 합니다.
화씨는 이사야 48장 할 때에 선 자리에서 아웃라인(요약)할 수 있느냐? 에스겔 18장 대략 무슨 말씀인지 아웃라인 할 수 있느냐? 창세기 1장이나 되겠지? 마태복음 1장이나 되겠지? 호세아 8장, 시편 48편, 아웃라인 할 수 있겠는가? 이 정도까지 읽어라. 이거 될 때까지 죽어라고 읽어라.”
-성경을 어느 정도까지 읽으신 건가요?
“내가 학생들에게 강조하지요. 이 성경책이 간단하게 증명되는 책으로 알지 말아라. 왜? 내 경험을 보아서 나는 다행히도 옛날에 1947년 5월말 어느 날 제가 가장 존경하는 최원초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일본에 계셨어요. 제 믿음의 스승이요. 아버지였지요. 그 분이 나에게 말하기를 네가 신학하고 목사되기 위해서는 성경 본문부터 많이 봐라. 말씀이 (당시에) 내게 받아지지 않았지만, 그 목사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았습니다.
21살이었어요. 그 때부터 이 나이까지 만 65년이 되는군요. 저 딴엔 죽을 힘을 다해 읽는다고 읽었습니다. 성경 몇 번 읽었는고 많이 묻는데, 하루에 성경 보면 4시간 본다는 말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사실입니다. 사실인데, 이것은 참되게 말해야 되지요. 65년을 그렇게 읽은 게 아니고.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68년도에서 91년까지 23년 동안은 문자 그대로 하루에 4시간. 구약 2시간, 신약 2시간 읽었습니다.”
-왜 91년까지만인가요?
“왜 91년까지냐? 부끄럽지만 눈이 좀 안 좋습니다. 백내장 수술해서요. 눈을 잘 보지 못해서 91년부터는 그렇게 못 읽었어요. 지금은 또 제가 저술하는 것이 있어요. 육신의 제한이 있어요. 현직에 있을 때는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11시간 반, 지금은 7시간 반 밖에 못 앉아 있어요. 시간적으로 제한받고, 저술 때문에 그렇게 못 읽어요.”
▲박희천 원로목사는 시편과 잠언을 약 670번을 읽었지만, “아직까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이것이 성경이고, 자신의 고백”이라며 겸허한 소회를 밝혔다. ⓒ 박현우 기자
-성경 중에서 특히 많이 읽은 부분은요?
“제가 특별히 시편과 잠언은 약 7백 번 정도 읽었습니다. 제가 옛날에 50년도 1월 1일부터 하나님께서 어떻게 제게 그 마음을 주었는지. 구약의 역사적인 부분은 기억이 잘 되요. 그런데 시편과 잠언은 시니까. 사건이니 아니니까 기억이 잘 안 돼요. 시편과 잠언은 중요한 내용이에요. 그걸 알고 안 되겠다 그때부터 구약을 순서대로 읽는데, 시편 하루에 5편. 한 달에 한 권. 하루에 잠언 1장. 한 달에 한 권 읽죠. 그것을 이날까지 계속했습니다. 그래서 시편은 환합니다.
그런데 잠언은 환한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이게 성경이거든요. 시편은 문맥이 있지요. 잠언은 문맥이 없습니다. 시편 잠언을 660~70번 읽었는데 잠언은 지금도 헷갈려요. 이게 제 고백입니다. 시편, 잠언을 그 정도 읽었는데 이 꼴입니다. 이게 성경이더군요. 그래서 성경은 간단하게 증명될 책이 아니다. 65년을 쪼아대고 시편 잠언을 660~70번 정도 읽었는데도 이 꼴이니 얼마나 더 읽어야 되겠습니까? 성경이 이런 책이에요. 난 이걸 고백합니다.”
-요즘 한국교회 설교를 들어보면 어떻습니까?
“이건 좀 건방지지만은 여기저기서 말을 들어보면 내로라 하는 설교학 교수님들조차도 이것을 강조하지 않더군요. 들리는 말에 의하면, 심지어 한국교회 설교의 태양이라고 하는 그러한 목사님들조차 설교 잘하는 비결을 다른 사람의 설교집을 되도록이면 많이 읽으라고 합니다. 그 말 들을 때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그 교수님이 다른 사람의 설교집을 되도록이면 많이 읽으라고 했다는데 그 교수 밑에서 배우는 신학생들이 얼마나 불쌍한가 말이죠.
오늘 설교학 교수들조차 죽을 힘을 다해 보지 않으니까 그 세계를 모릅니다. 나는 다행이도, 최홍초 목사님 통해서 강한 도전 받았습니다. 나도 그 때 도전 못 받았으면 그렇게 됐겠지요. 설교 잘하는 데 방법이고 비결이고 없다. 성경 많이 봐라. 이거 내기한다고 해도 자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최고로 꼽는 설교자는 누구입니까?
“고 백영희 목사님 말 못 들어봤지요? 저는 신학생들에게 백영희 목사 설교를 모르고 설교학을 논할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세상 뜬 지 20~30년 됐는가. 고창의 시골에서 자라신 분이고, 이 분은 초등학교도 못 나온 분입니다. 고려신학교 밖에 못했지요. 그런데 예수 믿고 나서 거창 산골짜기에서 한글 성경을 죽어라고 읽은 거에요. 나는 백영희 목사님 설교를 많이 들었는데, 백영희 목사님 설교는 전국적이 아니라 세계적입니다.
그분의 설교는 무엇인고 하니 오늘 목사들의 설교가 나는 그렇게 하지는 못하지만 제 소원은 ‘설교는 자살을 하러 가던 사람이 자살을 하러 가다가 마지막으로 예배당을 들려보고 가자. 예배당에 들렀다가 설교를 듣고 내가 왜 죽어? 이렇게 만들어야 된다’는 그겁니다. 백영희 목사님 설교가 바로 그런 설교였습니다. 설교는 약장사가 아니거든요. 인생을 살려야 하는 것이거든요.
백영희 목사님 설교마다가 그런 설교입니다. 그 분이 하도 유명해서 내가 53년도 7월 달에 물었어요. ‘설교 잘하는 비결이 뭡니까?’ ‘비결이고 목딱이고 뭐 있냐 말이야? 본문 많이 읽으면 다 해결된다’ 그 때 ‘아멘’하고 받았습니다. 그 말씀 듣고 60여년 지났는데 지날수록 백점 만점 대답이에요.
박 목사는 “고 백영희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 다른 설교는 듣지 못할 정도”라며 백 목사의 설교를 높이 평가했다. 백 목사는 고신 교단 출신이지만, 1959년 6월 제명을 당하고, 이단 시비 등으로 한 차례 아픔을 겪었다. 백 목사가 부산서부교회 담임 시절이었던 1979년 한 일간지의 특종 보도로 ‘세계 최대 주일학교’로 소개되어 당시 10여년간 기독교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그러다 1989년 8월 27일 백 목사는 주일 새벽예배 설교 도중 괴한의 칼에 찔려 순교했다. 그의 명맥은 예수교장로회 한국총공회(백영희 목사 창립) 교단이 잇고 있다.
매서웠다. 한국교회 설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얼음장이 되어 사방으로 튀었다. “건방지지만”으로 시작해 “맞아 죽을 각오로”로 끝나는 비판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분위기 전환을 위해 내수동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봤다.
-내수동교회 대학부는 대단했죠?
“80년 그 무렵에 저는 행정을 할 줄 몰라서, 사람 끌어 모으는 재간이 없었어요. 교인이 450명이었는데 그 중에 대학생이 150명이었죠. 당시 예장 합동 교단에서 대학생들이 가장 많이 모일 때였어요. 그 때는 왜 이렇게 많이 모이나 몰랐어요. 그런데 제가 은퇴하기 1년 전에 송인규 목사(합동신학대학원 교수)가 그러더군요. ‘설교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 그 때서야 그런가? 했어요. 어설프게 회상이 떠올라요.”
당시 내수동교회 대학부의 멤버들은 현재 한국교회를 이끌어가는 리더들이 됐다. 박 목사의 영향이었을까? 대부분 설교에 일가견이 있는 목사들이다. 오정현(사랑의교회), 김남준(열린교회), 오정호(대전새로남교회), 박성규(부산부전교회), 화종부(제자들교회), 송태근(강남교회) 목사 등이 내수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박 목사의 영향을 받았다.
-지금 제자들을 생각하면 어떤 마음입니까?
“내사모라고, 내수동교회 사역자 모임을 1년에 한 차례씩 갖습니다. 같이 식사하고 교제 나누는데, 갈 때마다 하는 말이 ‘여러분 미안스럽다. 태평양을 누비는 고래들인데, 실개천에 가둬 놨으니 얼마나 미안한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무슨 뜻인가요?
“오정현, 김남준이 다 거물들 아닙니까? 나는 속이 좁은 사람인데, 나하고 일할 때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말이야. 그 말을 해마다 합니다.”
-이런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예전에 (신대원에서) 신학생들에게 그런 말을 했지요. 호랑이를 설명할 때 그림 속 호랑이를 본 사람과 동물원에 가서 호랑이를 본 사람, 백두산에 올라가 호랑이를 본 사람은 다르다. 누가 실감나게 호랑이를 표현할 것이냐는 겁니다. 또 히말라야산에 대해서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굽니까? 아인슈타인이 할 수 있습니까? 아니죠. 직접 정상에 올라간 사람이 실감나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설교자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한국의 설교자들이 모두 이런 설교자가 되면 좋은 거지요.”
(크리스천투데이 박현우 기자 2012.03.22.)
● 서울 내수동교회 박희천 원로목사 “목숨걸고 가감없이 전함이 내 사명”
"요즘 목사님들은 죽을 힘을 다해 성경을 보지 않는 것 같아요. 가슴이 아픕니다. 목사님들이 너무 바빠요. 형편이 되면 성경 몇 장 보고 안되면 안 보는 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대단히 죄송하지만 그러다 보니 목사님들이 성경을 잘 알지 못하고 본문 해석도 제대로 못하는 설교가 많습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매 맞아 죽을 거예요. 그러나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니 일사각오의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아야 하는 것이 목사로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서울 내수동교회 원로 박희천(81) 목사가 최근 인터뷰를 통해 한국 교회 목회자들에게 한마디 했다. 모름지기 목회자라면 죽기를 각오하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에게 전하는 책임을 맡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 목사의 눈에는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성경 연구보다는 다른 데 신경을 너무 쓰고 있는 것으로 비친다. 목회자들이 성경을 깊이 연구하지 않은 결과 강단이 약해지고 한국 교회의 위기로까지 연결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1975년부터 98년까지 내수동교회를 담임한 뒤 은퇴한 박 목사는 목회 사역 중 설교에 가장 역점을 뒀다. "당시 내수동교회에는 먼곳에서 찾아온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나 하나만을 믿고 온 성도들이었습니다. 설교 하나만은 내가 책임져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성경을 많이 읽었습니다. 평소에 늘 성경을 읽고 묵상하다 보니 설교 준비에는 별로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됐습니다."
고려신학대학원과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한 박 목사는 목회를 하면서 28년 동안 총신대 신대원에서 설교학과 히브리어를 가르쳤다. 당시 공부에 대한 박 목사의 열정은 예장합동 출신 목회자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정도로 대단했다. 지금도 박 목사는 매일 6시간30분씩 책상 위에 앉아 집필과 연구를 한다. 대충 책상에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시간을 체크하면서 공부한다. 박 목사는 60대까지는 11시간30분씩 책상에 앉아있었다. 새벽기도부터 바쁜 목회 일정을 모두 소화한 뒤 공부에 투자한 시간이 무려 11시간30분이었다.
70대가 되니 체력적으로 힘이 들어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이 7시간 30분으로 줄어들었다. 공부 시간이 줄어든 게 너무나 기가 막혀 대성통곡을 하기도 했다. 80대가 되면서 공부 시간이 또 1시간 줄어들었다. 어떻게 이런 공부 시간 확보가 가능했을까.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면 누구나 가능합니다. 여기저기 모임에 참석하면서 공부할 수는 없지요. 많은 양떼를 먹여야 하는 목회자는 침묵 속에서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을 늘려야 합니다." 목회자는 오로지 목양 일념으로 살면서 다른 곳에 눈길을 주지 않아야 된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박 목사와 함께 38년 동안 동역한 이상하 장로는 "시간과 관련해서 목사님은 칼같이 정확한 분이셨습니다. 필요한 이야기를 마치면 어김없이 시계를 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목사님이 할 이야기를 끝냈구나'라고 생각하며 자리를 떠야 했어요. 대단한 분이십니다. 또한 평생 검소하게 사셨습니다. 이런 분이야말로 한국 교회의 진정한 원로가 아닐까요"라고 반문했다.
박 목사는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생활이 바로 강단생활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생활과 강단생활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목사의 설교는 자신의 삶과 일치해야 합니다. 강단 따로, 생활 따로의 태도로서는 영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에게도 한마디 했다. "크리스천들은 믿음으로 바로 서야 합니다. 교회 나간다고 하면서 생활에서 타인에게 본이 되지 않아 손가락질 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박 목사의 이같은 목회와 삶, 학구적 열망은 고스란히 제자들에게 전수됐다. 오정현(사랑의교회) 김남준(열린교회) 오정호(대전새로남교회) 박성규(부산부전교회) 화종부(제자들교회) 목사 등이 내수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박 목사의 영향을 받았다. 오 목사 등은 늘 옥한흠(사랑의교회 원로) 목사와 함께 박 목사를 자신의 영적 멘토라고 말한다.
박 목사는 제자 오정현 목사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오 목사는 대단한 리더십의 소유자입니다. 천부적인 통솔력을 지녔지요. 영적으로 신실했던 오 목사가 한국 교회를 위해서 큰일을 하는 것 자체가 한국 교회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오 목사의 영적 통찰력이 대단하기 때문에 한국 교회가 많은 덕을 볼 것입니다."
"오 목사의 단점을 이야기해 주시지요"라는 물음에 박 목사는 곧바로 "없습니다"고 응답했다. 제자사랑이 물씬 느껴졌다.
박 목사는 80대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활력이 넘쳤다. 2시간여의 인터뷰 내내 박 목사는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시간을 아껴 바른 설교를 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설교는 목사 개인의 말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전해 주는 것이에요. 요즘 목사님들은 성경은 인사치레 정도로 읽어놓고 마음대로 자기 소리를 하고 있어요.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만 전해야 합니다."
이태형 전문기자 th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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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News paper ⓒ 국민일보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요즘 목사님들은 죽을 힘을 다해 성경을 보지 않는 것 같아요. 가슴이 아픕니다. 목사님들이 너무 바빠요. 형편이 되면 성경 몇 장 보고 안되면 안 보는 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대단히 죄송하지만 그러다 보니 목사님들이 성경을 잘 알지 못하고 본문 해석도 제대로 못하는 설교가 많습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매 맞아 죽을 거예요. 그러나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니 일사각오의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아야 하는 것이 목사로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서울 내수동교회 원로 박희천(81) 목사가 최근 인터뷰를 통해 한국 교회 목회자들에게 한마디 했다. 모름지기 목회자라면 죽기를 각오하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에게 전하는 책임을 맡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 목사의 눈에는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성경 연구보다는 다른 데 신경을 너무 쓰고 있는 것으로 비친다. 목회자들이 성경을 깊이 연구하지 않은 결과 강단이 약해지고 한국 교회의 위기로까지 연결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1975년부터 98년까지 내수동교회를 담임한 뒤 은퇴한 박 목사는 목회 사역 중 설교에 가장 역점을 뒀다. "당시 내수동교회에는 먼곳에서 찾아온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나 하나만을 믿고 온 성도들이었습니다. 설교 하나만은 내가 책임져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성경을 많이 읽었습니다. 평소에 늘 성경을 읽고 묵상하다 보니 설교 준비에는 별로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됐습니다."
고려신학대학원과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한 박 목사는 목회를 하면서 28년 동안 총신대 신대원에서 설교학과 히브리어를 가르쳤다. 당시 공부에 대한 박 목사의 열정은 예장합동 출신 목회자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정도로 대단했다. 지금도 박 목사는 매일 6시간30분씩 책상 위에 앉아 집필과 연구를 한다. 대충 책상에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시간을 체크하면서 공부한다. 박 목사는 60대까지는 11시간30분씩 책상에 앉아있었다. 새벽기도부터 바쁜 목회 일정을 모두 소화한 뒤 공부에 투자한 시간이 무려 11시간30분이었다.
70대가 되니 체력적으로 힘이 들어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이 7시간 30분으로 줄어들었다. 공부 시간이 줄어든 게 너무나 기가 막혀 대성통곡을 하기도 했다. 80대가 되면서 공부 시간이 또 1시간 줄어들었다. 어떻게 이런 공부 시간 확보가 가능했을까.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면 누구나 가능합니다. 여기저기 모임에 참석하면서 공부할 수는 없지요. 많은 양떼를 먹여야 하는 목회자는 침묵 속에서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을 늘려야 합니다." 목회자는 오로지 목양 일념으로 살면서 다른 곳에 눈길을 주지 않아야 된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박 목사와 함께 38년 동안 동역한 이상하 장로는 "시간과 관련해서 목사님은 칼같이 정확한 분이셨습니다. 필요한 이야기를 마치면 어김없이 시계를 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목사님이 할 이야기를 끝냈구나'라고 생각하며 자리를 떠야 했어요. 대단한 분이십니다. 또한 평생 검소하게 사셨습니다. 이런 분이야말로 한국 교회의 진정한 원로가 아닐까요"라고 반문했다.
박 목사는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생활이 바로 강단생활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생활과 강단생활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목사의 설교는 자신의 삶과 일치해야 합니다. 강단 따로, 생활 따로의 태도로서는 영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에게도 한마디 했다. "크리스천들은 믿음으로 바로 서야 합니다. 교회 나간다고 하면서 생활에서 타인에게 본이 되지 않아 손가락질 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박 목사의 이같은 목회와 삶, 학구적 열망은 고스란히 제자들에게 전수됐다. 오정현(사랑의교회) 김남준(열린교회) 오정호(대전새로남교회) 박성규(부산부전교회) 화종부(제자들교회) 목사 등이 내수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박 목사의 영향을 받았다. 오 목사 등은 늘 옥한흠(사랑의교회 원로) 목사와 함께 박 목사를 자신의 영적 멘토라고 말한다.
박 목사는 제자 오정현 목사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오 목사는 대단한 리더십의 소유자입니다. 천부적인 통솔력을 지녔지요. 영적으로 신실했던 오 목사가 한국 교회를 위해서 큰일을 하는 것 자체가 한국 교회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오 목사의 영적 통찰력이 대단하기 때문에 한국 교회가 많은 덕을 볼 것입니다."
"오 목사의 단점을 이야기해 주시지요"라는 물음에 박 목사는 곧바로 "없습니다"고 응답했다. 제자사랑이 물씬 느껴졌다.
박 목사는 80대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활력이 넘쳤다. 2시간여의 인터뷰 내내 박 목사는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시간을 아껴 바른 설교를 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설교는 목사 개인의 말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전해 주는 것이에요. 요즘 목사님들은 성경은 인사치레 정도로 읽어놓고 마음대로 자기 소리를 하고 있어요.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만 전해야 합니다."
(국민일보 이태형 전문기자 | 입력 2007.05.30.)
● [목자의 고향] 오정현 목사와 서울 내수동교회
■ “역사의 중심은 교회… 섬김의 길을 인도한 곳이 본향”
“나의 사랑하는 책 지금 해어졌으나 우리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내 어린 시절은 찬송가 그대로였다. 내게는 어머니께서 들려주시던 성경이기도 했지만 아버지와 할아버지께서 들려주시던 성경이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손자 사랑의 으뜸이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계셨던 것 같다.
내가 서너 살 되던 때부터 무릎 위에 나를 앉혀 놓고 성경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그리고 늘 성경을 덮으시며 나에게 해주시던 말씀은 목회자의 길로 예비하신 하나님과 나만의 묵계가 되지 않았나 싶다.
“현이는 모세같이 되거라. 모세같이….”
가난했지만 기쁨이 있던 시절
내가 태어난 곳은 경상북도 의성. 할아버지 품에 안겨서 다니던 교회는 의성 삼분교회였다. 그 당시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세웠던 어머니 같은 교회로 큰 교회는 아니었지만 시골 교회에서 부친 세대에 20여명의 목사가 동시에 나왔으니 대단한 영풍이 불었던 곳이다. 그곳에서 증조할머니께서 처음 예수를 믿고 할아버지께서 그 신앙을 이으셨다.
할아버지가 가졌던 믿음의 행보를 좇아 철저한 신앙생활을 하던 우리 가족은 가야제일교회를 개척하게 된 아버지(오상진 목사)를 따라 부산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때 나이 일곱, 교회는 부산의 변두리 가야동 난민촌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었다. 교회 바로 아래에는 암자가 있었는데 나와 동생들이 지나갈 때면 누군가 돌멩이를 던지기도 하고, 큰 아이들이 위협하면서 때리기도 했다. 단지 예수쟁이가 지나간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당시 목회자 가정이 다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 가족 역시 배를 곯아야 했고 제대로 입지도 못하며 자라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철없는 나에게 일상에서 우선은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다. 그런 배움 때문인지 예배의 경건이 몸에 배게 되었다.
딱딱하고 차가운 개척교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으면 무릎이 시려오곤 했지만 학교에 갈 때도 교회에 들러 기도를 하고 등굣길에 나섰다. 동생(오정호 목사 새로남교회)과 함께 성경 퀴즈대회에 나가 수상을 놓친 적이 없었는데, 아마도 내 나이보다 많은 횟수만큼 성경을 읽었던 것이 힘이 되었던 것 같다.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부터는 등사기에 잉크를 묻혀 밤을 새워가며 교회주보를 만들었고 열여섯 살 때에는 난생 처음으로 주일학교 학생들 앞에서 설교까지 감당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이 가난한 달동네 개척교회 목사의 아들로 경험해야 했던 십대의 시간들이었다. 민감하고 자존심 하나로 똘똘 뭉쳐 있었던 시절이었기에 어려운 환경은 뼈에 사무칠 정도로 낙심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의 값으로 하나님은 반드시 구원으로 인도하신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고 은혜와 희생을 통해서 교회가 어떤 능력을 갖게 되는지 직접 목도하는 현장이 되었기에 나는 가난했지만 기쁨이 있던 시절 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1973년 입시를 위해 단신으로 부산을 떠나 서울의 학원에서 시작한 수험생활. 사직동에 얻은 하숙방은 얼마나 작던지 아침에 일어나면 문 밖으로 발이 나가 있곤 했다. 내 몸 하나 편히 뉠 곳 없었지만 개의치 않고 교회를 정하고 가장 먼저 새벽기도회부터 나갔던 곳이 내수동교회였다.
입시생이 새벽 기도에 나온다고 칭찬해 주셨던 첫 만남 이후 신앙의 야성을 키워주고 진실된 목회자상을 심어주신 박희천 목사님. 하루에 성경본문만 4시간 이상 통독하시며 성경을 거의 다 외우는 말씀의 부자. 하루에 7시간씩 공부하시는 집중력으로 매사에 진중함을 갖고 사람을 키우는 데 전력을 다하셨던 분. 나는 그토록 귀한 교회와 목회자를 만난 것이 너무도 감사한 일이었지만 신학생이 아닌 나에게 대학부를 맡기셨던 것 역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맡게 된 대학부에서 고 옥한흠 목사님을 초청 강사로 처음 뵈었다. 이 만남을 계기로 옥한흠 목사님을 나를 이끌어준 신앙의 멘토로 섬기게 되었다.
78년 옥한흠 목사님이 미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나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가서 수양회 강사로 목사님을 모셨다. 귀국하자마자 내수동교회 대학부 여름수양회에 오신 목사님은 46명의 청년 대학생들을 향해 집회 기간 내내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셨다. ‘생명과 교제 기쁨’이라는 제목 앞에 우리 모두는 눈물로 회개하고 은혜 받고 거꾸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대성통곡의 현장이었다. 그 집회는 놀라운 전환점이 되었다. 집회에 참석했던 46명 대부분이 헌신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지었던 죄를 다 고백하고 전도하러 나가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전도하러 나가는 성령의 역사도 일어났다.
복음의 꿈 복음의 능력
여름수양회를 마친 후 두 달여의 시간이 흐른 9월 25일. 당시만 해도 대학생들이 전국에 걸쳐 10만 명도 안 됐는데 46명의 형제자매들이 500명의 태신자를 전도집회에 데리고 오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내 마음속에 ‘캠퍼스 사역만을 위해서 살아야 되겠다’ ‘젊은이들을 위해서 내 일생을 바쳐야 되겠다’는 결심을 갖게 하였다. 이 결심을 옥 목사님께 말씀 드렸고 “목회자의 길을 가지 않고 한 생애를 캠퍼스 사역에 바친다는 것은 무리다. 현실감이 없다”는 대답 후 나는 기도 끝에 뒤늦은 신학 공부를 하게 되었다.
76년 대학부 형제들과 예수원 대천덕 원장님과의 만남은 또 다른 큰 도전이 되었다. 그 외진 곳에서 박하기로 소문난 음식만 먹고 살면서도 조국과 굶주리고 소외된 사람들을 품고 기도하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나 역시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게 되고 성령 사역에 눈을 뜨고 난 후부터 영혼구원에 늘 절박한 심정이 들었고 복음전도에 관한 한 가슴이 뜨거워져서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82년 미국에 건너가기 전까지 8년여 동안 주일 새벽마다 병원전도에 매달린 것은 그 때의 열정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캠퍼스를 돌며 전도를 하고 ‘복음은 살아 있어 반드시 역사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복음전도에 미쳤던 지난 시간. 지나간 과거의 피해의식에도 눌리지 말고 알 수 없는 미래 때문에 불안해하지도 말고 다만 오늘 맞닥뜨린 삶의 환경을 극복하겠다는 정신으로 무장하게 해준 지난 현장은 복음의 꿈을 영글게 한 거룩한 고향이다.
세속 역사는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이 나타날 수 있는 교회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역사의 중심은 교회라는 사실을 알게 해준 지난 시간. 마라토너의 긴 호흡과 거시적인 안목을 가지고 오늘 내게 닥친 어려움이 어떻게 선한 결과를 가져올지 하나님의 반전 역사를 기대하는 방법을 터득했던 지난 현장은 복음의 능력을 경험케 한 영적인 고향이다.
나는 지난주 참으로 오랜만에 내수동교회 대학부에서 함께 지냈던 강남교회 송태근 목사, 부산부전교회 박성규 목사, 내수동교회 박지웅 목사와 내수동교회를 찾아 귀한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모두가 이제는 각자 사역지에서 한국교회를 섬기는 중견 목회자가 된 우리는 청년 시절 순수한 복음을 만났던 고향 같은 이곳에서 지난날의 사명을 힘차게 외쳤다.
“우리는 땅끝까지 이 세상 끝날까지 그리스도의 증인들이다. 오직 한번뿐인 인생 속히 지나가리라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일만이 영원하리라!”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
1956 경북 의성 출생. 1970년대 대학 청년들의 영적 부흥을 주도했던 서울 내수동교회 대학부를 이끌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바이올라대학교와 탈봇 신학대학원(M.Div), 미시간 칼빈 신학대학원(Th.M), 포체프스트룸대학교 신학부(Ph.D), 하버드대학교에서 수학(Resident Fellow)했다. 미국 남가주 사랑의교회를 섬기다가 돌아와 현재 사랑의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저서로 ‘잠들지 않는 사역자’ ‘통찰과 예견’, ‘열정의 비전메이커’, ‘목회트렌드2000’, ‘믿음의 가문을 일으키라’, ‘새천년 사역의 패스파인더’, ‘사람을 세우는 설교’ 등이 있다.
(국민일보 윤중식 기자 2011.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