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장 해방 그 후의 비극

  선지자선교회

와타나베: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 날로부터 이틀이 지난 817일 밤, 11시가 지나서야 비로소 신사참배반대로 투옥된 여러분들은 전원 형무소에서 나왔다고 알고 있습니다. 안 선생님의 책을 보면 형무소 문 앞에 많은 가족들과 교우들이 기다리다가 문이 열리고 여러분들이 출옥을 하자마자 일제히 승리의 찬송가를 부르면서 맞이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앙의 승리와 조국의 해방이 함께 왔다는 감동의 큰 기쁨은 우리들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숙한 순간이었겠지만, 저로서는 생각만 해도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15일부터 이틀이나 더 옥중에 머문 것은 악질 간수들, 특히 못되게 굴던 일본인 간수들이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 우선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안 선생님의 책에는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출옥을 기다리던 옥문 밖의 성도들로서는 얼마나 긴 이틀이었겠습니까?

 

조수옥: 그런데 그 전날 밤에 평양에 큰 화재가 있었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일본인들이 서류를 불태워 악한 짓을 한 흔적을 없애려다 발생한 것이라 합니다. 형무소 안에서는 남녀가 따로 따로 있었지만 출옥할 때는 함께 나왔습니다. 그때 누가 선창한 것도 아닌데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이라는 찬송이 일제히 터져 나왔습니다.

 

거기서 출옥성도 전원이 안이숙 선생님의 어머니께서 평양시내에 얻어놓은 셋집으로 가서 얼마동안 안정을 취했습니다. 그 집까지 가는 동안 큰 무리에 둘러 싸여 걸어갔는데 제가 꿈을 꾸고 있는가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출옥한 승리의 감사예배를 드리고 이어서 한 사람씩 옥중에서 받은 은혜를 간증하였는데 그 감동과 감격적인 장면을 보고 들으려는 성도가 구름같이 집 안팎으로 둘러 싸여 집안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이 많았음에도 사람들은 계속 몰려왔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일주일이나 계속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출옥하면 주기철 목사님이 목회 하시던 산정현교회를 가보고 싶었습니다. 신사참배반대운동의 상징과 같은 곳이었기 때문에 일본은 이 교회를 더럽히기 위해 교회당을 접수하여 군수공장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들어가 살 수 있을 정도가 못되어, 일주일에 걸쳐 수리하고 청소해서 다시 성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후에 우리는 거기로 옮겼습니다. 물론 산정현교회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은 평양시내 큰 교회당은 모조리 군수공장으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가족들은 물론 우리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남쪽에서 주남선 목사님의 따님이 우리를 데리러 평양까지 올라왔습니다. 한상동 목사님의 부인도 오셨습니다. 제 사촌도 왔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 바친 목숨이라 개인적인 사사로운 일은 뒤로 미뤘습니다. 한상동 목사님은 산정현교회로 초빙되어 그대로 평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해 모친이 별세하여 장례를 치르기 위해 경남으로 내려간 사이 38선이 봉쇄되어 가로막히는 바람에 평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지요.

와타나베: 남북의 분단에 관해서도 일본은 그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만, 교회분열 또한 일본 제국의 통치하에서 일어난 잘못된 종교정책이 주된 원인이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본사람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 예수교장로회의 분열을 그저 먼 산 쳐다보듯 하고 그 아픔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다 어떤 힘을 빌려쓰려고, 분열한 다른 교파와 관계를 맺는데 결과적으로 분열을 고정화해서 상처를 더 깊게 하려는 일만 하고 있는 일본교회가 많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계속 듣기로 하고 서울에 간 이야기를 계속해 주십시오

 

조수옥: 우리들이 투옥되어 있던 동안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이 조직되어 교회의 자립은 무너지고 장로교도 노회도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어찌됐던 없어진 경남노회를 재건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주남선 목사님이 소리를 높였던 것입니다. 신사에 참배한 분들에게도 호소하여 모았습니다. 허물어진 제단을 함께 재건하자 하셨던 주 목사님은 신학교 선배가 되실 뿐 아니라, 살아온 경험으로도 이와 같은 모임을 주선하고 호소해야만 하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 노회 석상에서는 무엇보다도 신사참배한 교회나 참배하지 않은 교회나 모두 악과 싸워 이기지 못했기에 하나님 앞에서 같은 책임을 지고 다같이 참회하자는 결의였습니다. 싸워 이긴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므로 출옥한 우리들이나 신사에 굴복한 저들이나 다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최득지 선생의 재건교회는 신사참배한 교회와 참배하지 않은 교회를 엄격히 구분했지만 우리들은 그런 것은 생각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주요 결장사항은 신사에 머리 숙여 참배한 교역자들은 정당한 회개절차를 밟기 전에는 강단에 서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조수옥: 제 눈으로 본 일이라 확실히 말할 수 있는데 전전의 교회보다 전후교회가 더 혼란스러워 보였습니다. 성도들은 신앙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지만, 목사들 사이에서는 회개하려고 하기보다 교권을 누가 쥘 것인가 하고 서로 다투는 분위기였습니다. 저는 옥중에서 출옥하면 고아구제사업을 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교회가 어느 정도 수습되지 않으면 시작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수옥: 12월에 문창교회에서 출옥성도들을 모시고 회개하는 집회가 열렸습니다. 저도 참가했습니다 그 당시 문창교회에는 이약신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거부한 분으로 삼천포교회에서 사면하게 된 저를 부산초량교회로 불러주신 분입니다. 그 분은 경찰에 의해 초량교회를 그만두면서 만주로 잠시 피신하여 다행히 형무소로는 붙들려 가지 않았습니다. 이 목사님께서 그때 당신은 이제부터 무엇을 하실 작정이요?”라고 묻기에 저는 제 계획을 말씀드리면서 고아사업을 해 볼 생각이지만 다만 꿈에 지나지 않고 준비도 돈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께서는 당신 마음에 그러한 계획이 있다면 당장 시작하십시오. 마산에서 시작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댁이 마산에 있었는데, 자신은 교회의 목사관에서 지내므로 마산의 자기 집을 줄 테니 고아원을 시작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때의 한국사회는 해방은 됐다지만 무정부상태나 마찬가지로 어지러웠습니다. 정부가 무엇을 한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요. 거리에는 잠잘 곳이 없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일본군대가 해산되었기에 집으로 돌아오는 병사가 거처할 집이 없어 노상생활로 방랑하는 군중이 되었고, 일본 징용에서 풀려나 돌아온 동포들과 일본경찰을 피해 만주로 도망갔다가 돌아온 귀환동포들과 만주나 북한의 지배자였던 일본군인들과 일본인들은 가진 것 다 빼앗기고 일본으로 가기 위해 남쪽까지 도망 왔지만 배를 얻어 타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군중들이 한데 섞여 아수라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로 인해 다수파의 대중으로부터는 소외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당신들은 신앙을 지켰지만 우리는 교회를 지켰지 않았는가? 이것이 훨씬 더 힘들고 중요한 일이 아닌가?”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목소리가 결국 우리에게 들려왔고, 한상동 목사님이 남쪽으로 오신 다음의 일입니다만 어떤 목사님은 회합자리에서 한 목사님의 면전에다 이렇게 소리치기도 했습니다. 한 목사님은 잠자코 참고 있었습니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것이니 변명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와타나베: 지금 그 말씀을 듣고, 저는 놀랐습니다. 일본에서도 같은 생각을 가진 분들이 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하는 것은 쉽지만, 그렇다면 교회는 누가 지키는가라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입장은 아니지만, 이런 변명을 이해하고 납득한 때도 있었습니다.

 

와타나베: 그렇습니다. 그 점이 중요합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사람들에 대해서 편협하다라고 욕하는 잘못된 사람들, 그들이 말하는 그 편협독선의 십자가가 일본 사법당국의 재판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편협이란 사실은 일편단심 오직 한 마음, 그 믿음 외에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는 굳은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편협하기에 싸울 수 있었고, 편협함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면 싸움은 되지 않았겠지요? 그런데 편협과 독선이 일본 사법당국에서 기소한 이유라고 것을 접어두고라도 크리스천이라는 같은 신앙인 사이에서 편협하다느니 독선이라느니 하면서 비판하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조 원장님과 말씀을 나누고 있으면 편협한 인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편협하다는 단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계명을 바르게 지켜나가면서 예수님의 은혜를 의심없이 받아들여 믿고 이에 대해 고집스럽게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갔다는 것이 편협하다고 비판받는 것이지요. 기독교신앙의 기본적인 부분이 다수자에 의해서 애매하게 인식되어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불참배파 사람들은 호소했던 것입니다.

 

조수옥: 그 점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그 정신을 잃어버린 건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제가 폐쇄적인 사람이라고 비판받기 때문에 하는 말은 아닙니다. 이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고신파 교회에서도 자신할 수 없습니다. 늙어서 이제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저로서는 대단히 염려되는 점입니다(역자 주 : 한국 장로교회안에 대표적인 몇 개 교파가 있는데 다같이 이구동성으로 개혁주의, 혹은 칼빈주의를 주장하고 있으나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볼 때 문제는 개혁주의 또는 칼빈주의적 삶의 과제가 오히려 문제로 남아 있다고 본다. 물론 개혁주의적체계, 개혁주의적세계관을 먼저 확립해야 할 것이며 그것이 일상생활의 삶 속에 문학적 현실로 성경적 소명감에서 당연히 이루어 나가야할 것이다. 개혁주의는 단순한 이론이나 논리가 아니라 삶을 위한 체계인 동시에 교회를 위한 신학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100년사에 있어서 큰 분수령은 역시 일제에 유린당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교회 정조이다. 정조를 유린당한 자는 만사에 불성실하기 마련이다. 한국교획가 바로 그 원인 때문에 오늘날 모든 면에서 혼탁해진 것이다. 그럼 계명을 어긴 교회에 대해 개혁주의는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 회개하고 순결하고자 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와 연합하자는 한국교회는 어떤 주장을 했어야 진정한 칼빈주의이고 개혁주의겠는가. 칼빈이 한국교회사에 살아있었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 칼빈으로 하여금 한상동은 누구인가를 말하게 한다면 뭐라고 했을까? 칼빈주의적 삶의 모습이 없다는 것이 문제인 한국교회에 지나친 순결 강조는 교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