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 두 가지 비유

 

1982. 6. 19. 토새

 

본문:누가복음 16장 10절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오늘 아침에는 단어에 대해서, 몇 단어에 대해서 성경적 뜻을 말씀하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있는 단어를 일반 세상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성경에 사용된 단어는 성경대로의 그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충성이라는 충성은 예수님의 대속의 댓가에, 대속의 그 공로에 팔린 것을 인해서  주님의 것으로, 주님을 위해서, 주님에게 쓰여지는 그것을 가리켜서 충성이라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또 ‘지극히 작은 충성 큰 충성’ 이 충성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제일 먼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에 팔려서 주의 것 된 자가 주를 위하여  주의 뜻대로 쓰여지는 이것을 가리켜서 충성이라 그렇게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대속의 값에 팔린 이것으로 인하여 자기가 주의 것 된 것,  이것으로 인하여 주를 위하여 사는 것, 이것으로 인하여 주님에게 다 쓰여지는  것, 이로 인한, 대속을 근거한 이것이 없으면 이는 어떤 충성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되겠고,  또 ‘지극히 작은 것에, 큰 것에 충성된 자는 지극히 작은 데 불의하고 큰 데  불의하다’ 이 충성의 대조가 불의입니다. 충성의 대조가 불의요. 충성의 반대가  불의입니다. 그러면 충성이 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충성은 이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막바로 이 충성을 하나님이 의로 인정하시는 것이라.

그러면 그 사람이 자기가 실력있는 대로 실력을 다 기울여서 충성했으면 그  충성한 것이 실력있는 사람의 행동에 비하면 뭐 백분지 일이 안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너는 의인이다, 너는 의롭다, 이렇게 인정을 해 주시고, 그  사람이 선천 후천에 모든 실력을 구비한 사람이라 그 사람이 백분지 일만 들여서  주님을 위해 살아도 무능한 자가 수백 명 수십 명이 산 것보다 생애에 그 모든  가치나 또 역사한 것이나 결과나 그것은 많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다하지  아니했고 자기는 남은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그것을 의로 인정치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충성이라는 단어에 대한 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충성은 대속을 인해서 주를 위하여 산 것인데, 그 사람이 무능해도 다해서  충성했으면 하나님 앞에서는 의로 인정을 받고, 아무리 유능한 자라도 다해서  충성하지 않았으면 그거는 불의로 판정받는다 하는 그것을 여기 충성이라는  단어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충성 이것이 우리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가 된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한 그 행동에 실지의 가치를 따라서 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일해 놓은 그 일에 자기를 어떻게 들여서 일했느냐 하는  그것을 가치로 삼는다 하는 것을 여기에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알아듣겠는지?  우리는 평가할 때에 이 세상에서 그 사람이야 뭐 성의를 다 들였든지, 힘을,  전력을 다 기울였든지 일을 해 놓은 그 결과의 가치를 보고 그것을 평가합니다.

‘이것은 놀다 해도 잘했었기 때문에 이거는 잘했으니까 이거는 합격, 아무리 참  신명을 다 기울여 했다 할지라도 이거는 못 쓰니까 가치없는 것’ 이렇게 실상의  가치를 보고 평가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생애의 가치를 보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애에 대해서 우리 자신들의 들인 것이 자기를 어느 정도 들였느냐?  자기의 들인 그 양에 대하여 양을 근거해 가지고 평가하는 하나님이시라 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많이 가진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는 일 하기가  힘들고 속기 쉽다 말이오. 많이 가졌으니까 조그매만 해도 다른 사람보다 해  놓은 결과가 많으니까 자기는 된 줄 알기 때문에 미혹받기 쉽고, 또 많은 사람은  많은 것을 다 들여 하기가 어려운데 아주 참 빈약한 사람은 빈약한, ‘나는  이렇게 빈약하니 빈약한 이것도 들이지 않으면 어찌 되겠느냐?’ 빈약한 것을 다  들이고도 항상 저는 앞에 서지 못할 자로 알고 이렇게 겸손해지고 이러니까 다  바치기가 쉽다 그거요. 그러니까 가난한 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후사가 된  자들이 많다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또 거기에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지극히 큰 것에도 충성된다’ 지극히  작다 하는 그 단어를 가지고 있는데, 지극히 작다는 이 단어 속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 주님이 이렇게 지극히 작은 것을 그렇게 인정해 주신다는 이 뜻의  내용은, 작은 것은 우리에게 끊어질 시간 없이 계속됩니다. 우리에게 봉착되는  것 중에 큰 것은 참 1년 만에 하나, 아주 큰 것은 평생에 하나, 이렇지만 지극히  작은 일은 없는 시간이 없고, 없는 날이 없고, 없는 장소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께서 ‘요거 하는 사람은 제일 큰 것도 한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충성이 계속되는 것을 원하시는 고 중심을 가지고 있다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이라고 말하니까 하나님은 혹 사소한 것 그것을 원하시는가? 또  이것은 방편상 작은 것 하면 차차 차차 연성돼 가지고 성장되어서, 천리길도 첫  자욱, 첫 한자욱으로 시작한다는 말과 같이 그런 것인가 하는 생각을 가지기  쉽습니다. 일반 세상에서는 그렇게 해석하겠는데, 물론 그 이치도 있지만 그  이치보다도 당신이 우리의 충성을 원하는 것을 1년만에 큰 충성 하는 그것을  원치 아니하고 계속되는, 그 충성을 계속하는, 계속되는 충성을 당신이 원하신다  하는 것을 이 안에다가 내포해 놓은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계속, 주님은 어떤 어떤 댓가를 가지고 대속의 공로를 설정했다. 이  공로를 내게 주셨으니 이 공로를 나는 받은 자다. 이 공로의 가치가 어떠하다.

이 공로의 그 효력은 어떠하다. 이 공로의 이용의 결과는 어떠하다. 이 공로  내가 받았으니 나는 당신의 것이다. 당신의 것이니 당신을 위해서만 살지 다시는  내 자신이나 무엇을 위해서 살 수가 없다.

왜? 큰 값에 팔렸기 때문에 그에게 다 쓰여져야 한다. 그래도 큰 값에 팔린 것이  너무도 이용 가치가 허무하기 때문에 무익한 종이다. 자꾸 이것을 생각하는 것을  당신이 원하신다 하는 그 뜻으로 ‘지극히 작은 데 충성된 자는 큰 데도  충성되다’ 하는 것을 말씀하신 이 단어의 뜻이 이 뜻을 그게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점진적으로 성장되고 전진되고 점점 향상돼 가는 그런 일반적 세상 뜻,  단어의 뜻 이것만을 가진 것이 아니고, 이 단어의 뜻에 큰 것은 주님이 우리의  충성 계속하는 것을 원하신다. 지극히 작은 일은 계속해 있어.

자기가 마음을 쓰는 것은 이 시간에도 마음 써야 되고, 저 시간에도 마음 쓰고,  마음 써야 될 그 일이 크게 참 쓰일 일은 평생에 하나 닥치는 일도 있지만  지극히 작은 일에 마음 쓰는 일은 이것은 계속되지 않을 때가 없다 그거요.

이것을 당신이 요구하시는 이 뜻을 깨닫고 살아야 되지, 자기가 진보적으로,  전진적으로, 성장적인 그것을 증거한 것으로만 생각하면 자기는 다른 사람보다  앞서 있으면 우쭐할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고 계속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갈라디아 5장 1절에 보면 자유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자유하도록 하기 위해서  너희들을 부르셨다 했는데, 이 자유라고 하는 이 자유의 뜻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먹고 싶을 때에 먹지 못하는 것은 먹는 데에 자유가 없는 사람, 가고 싶은 데에  가지 못하는 사람은 가고 싶은 데 자유가 없는 사람, 또 하기 싫을 때에는 안  해야 되는데 하기 싫어도 안할 수 없는 사람은 하기 싫은 것에 자유가 없는  사람, 하고 싶은 데 자유가 없는 사람, 보고 싶은 데 자유가 없는 사람, 또  버리고 싶은 데 자유가 없는 사람 이것 다 뭐 제 욕심대로 제 소원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자유가 있는 것이고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하면 자유가 없는  것인데, 그러면 여기에 자유는 어떤 자유를 말하는가? 자유는 육체의 소욕의 자유가  있고, 성령의 소욕의 자유가 있습니다. 자유가 둘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말하는 것은 육체의 소욕의 그 자유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일방적으로 육체의 소욕을 성취하는 그 자유를 원하지만 성경에 기록한 이  자유는 그 자유가 아닙니다.

성령의 소욕,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그 소원으로 우리가 중생됐습니다. 영감이라  말은 하나님의 소원이라 말이요, 하나님의 마음이라 말이요, 하나님의 생각이라  말이요, 하나님의 뜻이라 말인데 영감으로 우리가 중생됐고, 또 진리는 하나님이  앞으로 계획하는 그 당신의 의지를 가리켜서 진리라 이러는데 당신의 마음과  당신이 결정해 놓은 의지, 이 두 가지 가지고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두 가지 가지고 살아났다 말은 하나님이 한 번 뜻을 냈으니까 뜻 내놓은 것, 그  한 번 뜻을 냈으면 그 뜻은 그 뜻으로 하나의 개체가 되어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하나님이 마음을 한 번 가졌으면 그 마음은 한 번 가진 마음이  그대로 개별적으로 있는데, 그러면 오늘 마음 한 번 하나 가졌으면 오늘 가진 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중생된 사람, 또 어떤 사람은 그 전날 마음 가진  그 마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중생된 사람, 하나님이 이런 뜻도 가지고 저런  뜻도 가지고 여러 뜻을 가졌으니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가지신 이 뜻으로  중생했고 어떤 사람은 저 뜻으로 중생했고 하는 그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계속 나오는, 하나님의 뜻이 계속 나오는 그 계속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 계속  나오는 그 뜻으로 인해서 살아났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중생하는 것은 하나님이 영원 무궁토록 계속하는 그 뜻에  연결되었으면 그 뜻이 나오는, 하나님의 뜻이 나오는, 나오는 거기에 연결됐다  하는 것을 ‘진리로 중생됐다’ 또 ‘하나님의 마음 영감으로 중생됐다’ 하는  것은 하나님의 그 마음의 움직임, 마음의 움직임 그 움직임에 연결됐다.

그러면 오늘 하나님의 마음에는 오늘 연결되어서 연결되는 그것으로써 우리가  중생됐고, 억만 년 후에 하나님의 마음이 나오는 그 마음은 또 그 마음에  연결되고,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이시는 움직여 놓은 그 마음의 결과인 그걸로  말미암아 중생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이는 그 움직임으로 중생됐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잘못하면 요것도 물으면, 구별을 못 하고 있으면 마귀라는 놈은 고걸  알고 있기 때문에 고걸 가지고 시험을 해서, 한창 어려워서 좌냐 우냐, 승리냐  실패냐 하는 그 절정에 도달했을 때에 요런 교리와 신조를 가지고 그 사람에게  질문합니다. ‘네가 이거냐 저거냐’ 할 때에 ‘그거 판정 못하겠는데’ 그럴  때에 거기에서 하나의 끄내끼를 맺어 가지고 졸졸 나오면서 이래 가지고  ‘이러니까 네가 무엇을 판정해 가지고 이거 확신을 가졌다고 하느냐’ 해서 그  사람의 신앙을 무너트려 가지고, 자기가 평소에 생각지 못했던 것 알지 못하던  그런 교리와 신조 문제가 나와 가지고 확정을 짓지 못하기 때문에 그때부터 그  신앙이 꺼꾸러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교리와 신조는  궁극에 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중생하기를 그렇게 중생했기 때문에 우리의 소원은 뭐인가?  오늘 주님의 소원은 내 소원이 됐고, 또 내일 주님의 소원은 또 내일 내 소원이  됐고, 주님의 소원이 계속 나오는 그 소원 그것이 내 소원이 되어지는, 그  주님의 소욕이 계속 나오는 그, 나와 가지고 있는 그 소욕이 내 소욕이 아니라,  그것도 내 소욕이지만 계속 나오는 그 소욕이 내 소욕이라는 요걸 여러분들이  똑똑히 알고 확정을 지워야 합니다.

이것으로 중생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속적 소원 소욕 그것이 우리의  계속적 소욕 소원, 내일은 무엇을 소원하겠느냐? 내일 소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산적으로, 예정적으로, 계획적으로 소원하는 것은 그것은 내일 것을 오늘  소욕하는 것이 있지만 내일 또 당신이 내일 소원할 것은 내일 당신의 소원이  나올 터이니까, 아직까지 내일이 안 닥쳤으니 당신의 소원이 나오지 않았으니까  내 소원이 없고, 내일 당신의 소원이 이래 나오든지 저래 나오든지 소원 나오는  그것이 내 소원이라 그거요.

이러기 때문에 이것이 자기 안에 있는 악의 세력이든지 자기 밖에 있는 악의  세력이든지 어떤 악의 세력이나 어떤 존재의 그 모든 환경이나 그런 것들에게  조금도 억제당하지를 아니하고 어데서든지 그 소원하는 그대로 달성해 나가고  소원하는 그대로 생명을 빼앗길지라도 그 소원하는 그 소원과 소욕은 조금도  제재받지 아니하고 그대로 자유하는 그 자유를 가리켜서 여기에 자유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자유라는 말씀을 갈라디아 5장 1절 이하에 하면서 거기에 ‘굳게  서서’ 라는 단어가 붙어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이 자유는 어떤 것에게라도  꺾어지지 않아야 된다 하는 그 뜻을 내포해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는다’ 하는 그 단어가 또 그 다음에 붙어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자유에 연속되어서. 그러면 이 자유는 다만 하나님과  연결된 그 연결로서, 하나님과 연결돼 있으니까 하나님의 소원이 내 소원이요,  하나님의 소욕이 내 소욕이지 다른 이의 소욕과 다른 이의 소원에게 자기가  피동되지 않는다. 거기에 제재받지 않는다 하는 그것이 이 자유 안에 들어 있는  자유의 뜻입니다.

그런고로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신 이 주신 자유 이 자유는 성령과 진리의 소원과  소욕 그대로 하고 싶은 그대로 하는 그것이 우리의 자유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육체의 소욕과 소원 이것이 마구 그 앞에서는 죽는 것이요 꺼꾸러지는 것이요 다  바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잘못 알고 자유와 자유를 혼돈시켜 놓으면 사람은 망합니다.

이것을, 자유와 자유를 구별하지 아니하고 자유와 자유를 혼합 혼돈시켜 놓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자유하는 것은 어떤 피조물에게도 꺾어지지 아니하는 견고성을  가져야 자유인 것입니다.

또 어떤 피조물에게도 피동되지 아니하고, 피동되지 아니하고, 창조주에게도  피동되지 아니하고 피조물에게도 피동되지 아니하고, 창조주에게도 피동되지  아니하고 창조주로 말미암아 자기가 연결되어 있는 중생된 그 자체의 소원  그대로 하는 것이 그것이 자유인 것입니다. 이 자유는 얼마나 높은 뜻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믿음보다는, 믿음보다는 자유가 더 권위있습니다. 믿음은 주님과 나와의  이질되고 이색되어 있고 달라져 있는 거기에 나를 부인하고 당신을 따라가는  것이 믿음인데, 이제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라지는 그것은 당신에게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하고 나하고 연결된 그 연결된 것만치 당신의 소원이 내  소원이요, 당신의 소욕이 내 소욕이요, 당신의 자유가 내 자유요,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참 제자된 것, 성화된 것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유에는 견고성이 있어야 되고, 자유에는 어떤 것에게라도  다시는 종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것에게라도, 아무것에게도 팔린 것이 없소. 또  그에게 지배를 받지 않아. 그에게 끌리지 않아. 이것이 자유입니다.

그러기에 이 자유를 구별하지 못하고, 악의 자유, 악의 자유는 육체의 소원과  소욕대로 하는 자유인데, 이 자유와 저 자유를 혼합하기 때문에 절단이 납니다.

믿는 사람들이, 성도라는 것은, 성도라는 말은, 성도라는 이 단어도, 이  성도라는 단어를 바로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실패를 합니다. 성도라는 그  단어는 거룩한 사람, 의로운 무리들이라, 참 선한 무리들이라 그런 말이 아니오.

성도라 말은 많은 사이비한 복잡한 가운데서 또 선별하고 선별하고 선별하고  선별하고 선별해 가지고 참인 그 하나에 도달한 완전 선별 그것을 가리켜서  거룩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이것을 향하여 찾아가는 무리들이라 하는 그 명사가  성도인 것입니다.

이런데 모든 것을 이렇게 ‘거룩하고 진실하사’ 이것이 있어야 되어지는  것인데, 그만 이 하나인 여기에 도달하지 아니하고도, ‘사이비하다. 이것도  그거다, 저것도 그거다.’ 어떻게 옳은 것이 둘이 있으며 참이 둘이 있겠습니까?  참은 하나뿐이지. 둘이 있으면 참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이 자유를 구별하지 않는고로 제가 하는 것이 저 죽이고 남 죽이고 막  죽이는 것인데, ‘너 그거 자유하지 말아라.’ 그거 자유하지 말라고 말하면  살리는 말인데, 저 하고 싶은 대로 안 한다고 삐꿔 가지고 도망을 쳐. 어데든지  도망을 해 보지. 어데든지 가 봐. 천국 가는 길은 절대 한 길뿐입니다. 두 길은  없어.

자기 악의 자유를, 네가 악의 자유 그걸 가지고 따라가면 옛사람 그놈이  좋아하고 기뻐하기 때문에 네가 옛사람으로 살아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고,  옛사람 대우하니까 좋아해 주니까 순전히 사망뿐이지 너에게 생명 역사는 없는  것이니까 네가 자유하는 그 자유를 버리라. 그 자유를 방해하면 고만 발악하고  달려듭니다. 그래 가지고 다 나가고 뛰어 나가는 자 됩니다. 그게 악의 자유요!  여기에서도 악의 자유를 그것을 제재하면 암병 걸린 것을 치료해 주는 거와 같은  것인데 그걸 하나 치료하려고, 그 자유를 꺾으려고 하면 그것이 내가 얼마나  희생되는 것인데, 그게 십자가의 죽음인 줄 알고 지금, 주님의 발자취인 줄 알고  남의 악의 자유를 그걸 막아 가지고 악의 자유로 말미암아 멸망받지 아니하고,  참 자기가 매장시켜 놓은 의의 자유,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참 자기의, 참  자기의 이 자유, 성령의 소욕 성령의 소원대로 이루어지는 이 자유 이것을 죽여  놓은 이것을 살리려고 하면 이 자유를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고만 거기에 대해서  옛사람 그놈하고 합작되면 이제까지 뭐 스승으로 모셨던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있기를? 선배가 어데 있습니까? 진리의 선배가 어데 있습니까? 저거 족속이  제일이지.

그것을 지금도 불만 불평하고 있는 사람들 이 가운데도 많이 있는데,  아브라함에게 대해서 성경에 나타낸 첫 성구가 그겁니다. ‘본토 네 아비 친척의  집을 떠나라’ 믿음의 조상에게 첫 명령이 이건데 이것이 무슨 뜻인지도 알지도  못하고,  그러기에 대성받이가 불쌍합니다. 부자가 불쌍합니다. 대성받이가 불쌍하요.

부자가 불쌍하요. 세상적으로 똘똘 뭉친 뭉텅이가 강하면 강할수록 천국에  대해서는 불쌍합니다. 그것이 콩가루 집안같이 바싹 깨지고 난 다음이라야  비로소 되어집니다.

교회 운동을 가리켜서 맷돌 운동이라고 이렇게 비유한 것은,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전곡, 밭곡식이 많은데, 그 곡식을 매에다 대고 아침마다, 점심 때마다  매에다가 덜덜덜 갈면 가루가 돼. 그때는 기계가 없으니까. 가루가 되면 갈아  가지고 가루된 걸 가지고 빵을 찌면 여러가지 잡곡이 가루가 되어 가지고 한  떡이 됩니다. 한 떡이 돼. 이것을 만드는 것이 교회 운동이라 그말입니다.

김가고 이가고 박가고 신가고 다 깨져 가지고, 바짝 깨져 가지고, 예수 안에서  진리와 성령으로 바싹 깨져서, 자기의 주관도 사욕도 다 육체의 소원도 다 없이  바싹 깨져 가지고 이제 진리와 성령으로 한뭉텅이 되어지는 이것이 성전 안에  있는 떡상인데, 떡상, 성전 안에 있는 떡상 없으면 안돼. 떡상은 잡곡을 빠사  가지고 한덩어리 떡을 만든 그것을 지금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깨져 가지고 진리와 성령으로 한덩어리 된 이것이라야 하나님 앞에  헌신이 되지, 떡상은 자기의 몸을 바치는 걸 말하는데 이렇게 빠사져 가지고  하나된 그것이라야 하나님 앞에 필요하지 다른 거는 필요가 없어.

오병이어로 5천 명이 먹은 그것은 완전히 죽은 것이, 죽은 고기가 하나님 앞에  왔기 때문에 필요된 것이고, 빠사 놓은 잡곡이 한덩어리 돼 가지고 당신 손에  들렸기 때문에 필요하다 하는 이것이, 지극히 작은 것 하나님께 드리면 무한의  가치로 그 효과를 낸다는 그 뜻은 결과를 말하는 것이고, 그 원인은 죽어야 되고  빠사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데 그것 가지고 지금도 혈통을, 혈통이 성신의 감화보다 커. 절대 커. 제가  그걸 버리기 전에는 복음만 팔아 먹고 교회가 구멍가게만 됐지 아무  소용없습니다. 이 진리는, 천하에 어떤 곳에 가도 이 진리는 거부하지를  못합니다.

그러기에 자유와 자유를 구별해서 자유의 단어의 뜻을 바로 깨달아야 되지,  자유는 두 종류 외에는 종류가 천 종류 만 종류도 되지만 그렇게 가르면  혼돈되어서 미혹받습니다. 자유는 두 가지 종류라 하면 됩니다.

자유는 하나님의 소원과 인간의 소원 이 두 가지 소원이라 그말이오. 인간의  소원대로 하는 자유가 있고, 하나님의 소원대로 하는 자유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자유는 하나님하고 한덩어리 됐소. 하나님은 머리 우리는 몸, 그리스도는 머리  우리는 그 몸, 이렇게, 창조주와 피조물이 혼합되고 이렇게 혼잡됐다는 말이  아니고, 언제든지 창조주는 창조주 피조물은 피조물이지만 결합면에는 일체를  이루었다 그말이오, 결합면에는. 이러니까 본체는 다르지만 움직이는 그  활동면에는 일행을 이루었다 그말이오. 주님은 일체를 이루셨고, 일위를  이루셨고, 우리는 일행을 이루어서 가지는 자유입니다.

이런데 단어를, 내가 언제─신학박사인데─지금은 가지도 않지만 유명한  신학박사가 와 가지고 강의한다 하기 때문에 가 봤는데─지금 한국에 있는데,  내가 그 교파를 말하지 않습니다. 말하면 또 가서 찝는다 할까 싶어서─설교를  하면서 단어 해석을 하는데, 그 단어 해석을 세상 어학들 가지고 해석을  하더라고. ‘한어 사전에는 그 뜻이 이렇고, 영어 사전에는 이렇고, 또 라틴어  사전에는 뜻이 이렇고’ 백 군데 대 봤자 성경의 뜻은 아니더라 그거요. 성경  단어는 성경대로의 성경에서 적용하는 그 뜻이 따로 있습니다. 죽은 법칙에  사용하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자유와 자유를 구별해서, 나에게 말하니 나를 죽여 지옥에 가두는 이  자유, 껍데기는 자유나 나를 완전히 사망에 가둬 버리는 이 자유를 방해하는  것인지, 참 영생하는 자유를 방해하는 것인지 이것을 구별해야 그 사람이 내게  말하는 것이 참 은사의 말인지, 그것이 나를 해치는 말인지 구별을 하지,  이것을 구별하지 아니하고 어쩌든지 제게 듣기 싫으면 싫어하고 제게 듣기  좋으면 좋아하니, 듣기 싫은 자체 그놈이 자기 아닌 원수인 그놈인지 참  자기인지 이것을 구별하지 아니하고, 그만 자기만 무조건 대항하면 다 싫고  자기를 반대한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생명에서 거리가 멀다 그말이오.

아직도 우리 가운데 있는 이 교역자 가운데 머뭇거리는 그런 자들이 있어. 그런  자는 가 버려야 돼. 회개 안 하면 가야 되지, 뒤에 책임이 있어. 왜? 하나님이  보낸, ‘자, 백목사야! 너 이 사람 왜 이러도록 내버려뒀나?’이거 내가 어찌  심판 받소? 같이 가서 계산을 해야지. 심판을 받아야지. 안될 판이면 가 버리는  것이 좋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교인도 가르치는 대로 바로 배워서 그것이 지금 안돼도 장차라도  될 사람이면 있는 것이 좋고, 끝까지 안될 사람이면 가는 것이 그 교역자에게  심판을 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하는 대로 해서 가는 것은 가니까 좋습니다. 왜? ‘내가 진리대로  법도대로 바로 했는데 가는 것 보니 하나님께서 아마 보내는 것이라.’ 안될  것이니 가니까 좋지. 또 그래도 안 가면 ‘뭐 쓸모가 있기 때문에 안 가지.’ 또  소망을 가지고 갈 때까지는 또 일을 해 보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성도의 생애의 고민은 그렇게 대국적이 아니오. 대국적이 아니고  전체적입니다. 커다란 게 아니오. 있는 존재의 전체를 자기의 국한으로 두고  비판하고 평가해서 사는 것이 성도들입니다.

자유, 또 연단이라는 말씀을 베드로전서 1장 7절 이하에 보면 썼는데 그  연단이라는 것은 ‘금을 불로 연단한 것보다도 더 의롭다 더 유익하다’ 그말은,  금을 불로 연단한 그 연단보다도 이 연단이 더 깨끗하게 되는 연단이다  그말입니다.

금을 불로 연단하면 잡철 이런 것이 남김없이 쏵 다 소멸되지 않습니까? 금을  연단할 때에 거기에 섞인 잡철이 소멸되는 그것보다도 우리의 믿음의 연단은  그것보다도 더 깨끗하게 연단한다 그말인데, 뭘 연단한다 말입니까? 그 연단은  인본을 다 연단합니다. 신본만 남습니다.

또 신본만 남는 것이 아니라 완전성의 것만 남습니다. 영원성의 것만 남습니다.

불변성의 것만 남습니다. 영생성의, 영생의 생명성의 것만 남습니다. 이것을  인간이 많든지 적든지 크든지 작든지 인간의 능으로 이것을 만들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추호라도 만들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말해 보십시오. 녜? 만들 수  있습니까? 목사님들 좀 대답해 보십시오. 만들 수 있습니까? ○○○목사님,  인간이 완전성의 것을 추호라도 만들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요걸 알아야 돼.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만드는고? 생활은 내가 하고 행동은 내가 했는데, 완전성 영원성  그것이라야 영생을 가지는 것인데, 그러면 누가 만들 건가? 하나님이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만든다는 것은 그분이 와서 만들어 주실 수 있도록 간청하는,  젖도 우는 자에게 젖 준다고, 우는 정도지, 우는 정도지 만들기는 그분이 혼자  와서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우리의 생활에서 얼마동안 신앙생활 했는데, 하나님께서 연단하는 것은  내 신앙에 잡것은 타 버리고 영원성 완전성 불변성 영생성만 남을 수 있는 그런  어려운 시험을 갖다 들이대면 고것은 천하가 시험해 봤자 그것이 어데 꿈쩍이나  합니까, 그거 위에 있는데? 꼼짝 안 하는데, 어떤 자에게는 참 천하에 유명하게  잘 믿는데 그 시험을 닥치니까 바싹 타 버리고 하나도 없습니다. 바싹 타 버리고  하나도 없어.

그것이 뭐이냐? 금 연단하는 것보다도 더 깨끗이 연단해서, 세상에 있는 동안에  연단을 받는 것은 그 연단은 뭣 태우는 연단인가? 인간을 근본으로 해서 된 것  다 태우고, 인간 힘으로 한 것 태우고, 불완전성, 변하는 것, 일시성 이런 것 다  태워 버리고, 완전성의 것, 영원성의 것, 불변성의 것,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된  것, 영생할 수 있는 것 요거 외에는 다 불타게 한다 그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시험을 당하는데 불시험을 당하는 그런 어려운 시험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마지막 죽을 때 시험만은 못합니다. 죽을 때에, 죽을 때에  제거될 것도 세상에서 어려운 시험에서는 남아 있는 것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는 그 사람에게 이런 잡된 것, 인간으로만 되어진 거는 다 끊어 내어  버리고 나머지만 갑니다.

가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심판이라 이럽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거될 것은 그때 다 제거돼 버리고, 이제 참 영생을 가진 것, 우리가 오늘 이  시간 살 때에 이 시간 사는 것이 영원 멸망도 되고 영생도 됩니다. 영생이라  말은, 이 시간 살면 영생된다 말은 그것이 성화됐다 말인데, 그건 다 완전성  영원성 불변성의 것들입니다.

그것은 죽을 때 죽음도 해하지를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도 제거하지를 못하고,  어데서든지 다 환영하고 자유할 수 있는 그것이 영생하는 것인데, 세상에는  신사참배 뭐 공산주의 시험, 어떤 시험이 있다 할지라도 그 시험에다 비하면  그까짓 것 참 소분지의 시험입니다. 아주 빈약한 시험이오.

그 시험보다 큰 시험이 우리에게 있다는 걸 알아서 거기에 통과 안 되면 안 되기  때문에 바울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들의 폄론을 아주 내가 적은 것으로 여긴다.

또 내 양심에 가책이라는 그 양심을 아주 허무한 당달봉사와 같은 것으로 내가  안다.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 앞에 가서 시험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항상  걱정이고 떨린다’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기에 세상에서 시험받아 가지고 제가 예수 배반치 아니하고 갔으니까 된  줄로 알지만 세상을 떠나기 전에 예수를 부인하고 ‘나는 예수 안 믿습니다’  이렇게 하고 간 사람이 복있습니다. 왜? 그렇게 한 사람은 죽기 전에 ‘아! 나는  이렇게 허무하구나!’ 허무한 줄을 알고 안심하지 않으니까, 못 믿으면 못 믿은  줄 알고 이래 믿으면 안된다고 새로 믿으려고 노력이라도 하고 하지만 그런 시험  당하지 않은 것은 헛되이 위로받고 안심하고 지나가요. 이것이 오늘의  교파입니다. 오늘의 교회들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안심이지.

도야지가 저를 지금 잡아 먹으려고 흥정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좋다고 터벌  터벌 거리면서 좋은 사료 주니까 맛있게 먹지 만일 그걸 우리 사람만치 지식  있어 ‘나를 잡아 죽이려고 지금 흥정하고 있구나!’ 하는 그것을 알았다면 어떤  좋은 고량진미를 준다 할지라도 그것이 맛이 있겠습니까?  인간의 지식의 범위에 따라서 안심하고 사는 그것은 주관적 평안이라는  말입니다. 주관적 평강이라 말이오. 주관적 평강은 가치가 없어. 객관적 평강,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에서 인정받는 그 평강이라야 되어지지, 그걸 향하여 가는  것은 항상 울고 나니까 그 평강이 오고, 그 평강이 와서 안심하고 나니까 또  한번 오니까 그 평강에도 또 흠점 있어 또 불안하고, 울고 웃고 울고 웃고,  불안하고 안심하고, 낙망하고 소망 가지고 이렇게 나가는 것이 기독자인 것인데  이것 공작이 아무것도 없어.

이번에 양성원 학생들 보니까, 어데 그런 생각이 있을 수가 없어. 그런 기회가  없어. 그런 시간을 가질 수가 없어. 마구 떠들고 노라리만 힘쓰고, 순전히  육덩이들만 힘 써 가지고 육덩이들만 자라고 있으니까 기가 차고, 잘나기는 저  혼자 잘났고, 모두 다 위대한 사람이 됐는데 비참하다 그말이오.

수많은 명상 가운데서 안되니까, 세상살이 있으면 안되니까 가정도 떠나고 모든  것 의식주 다 떠나 가지고 깊은 그 무인지경에 가 가지고 자기를 고독하게  역부러 만들어 가지고 자기의 생각을 한군데다 집중시켜 촛점이 되도록 하려고  이렇게 명상에 들어가고 이래 가지고 이제 거의 알고,-사람들이 깨달은 것을  책으로 나온 것을 들여다 보고 말을 듣고 이것을 쉽게 그렇게 받아 가지고  앵무새 모양으로 전하기만 전하면 저는 교역자로 실력있는 자인 줄 알지,  비참하고 가련합니다.

언제 그 공부를 한 사람이 그 공부로 살아 왔다는 걸 느끼면 무슨 탁구를 칠  것이며, 그때 무슨 거기에 너털웃음을 웃고 그렇게 저 잘났다고 떠들고 나  들으니 이거 한마디 자랑하고, 또 내가 들으니 내 말 들으라 하고, 들어 줬으니  또 저 사람 말 들어야 되지, 저 사람 말 들을 때는 듣기 싫고 제 말 들으면 좋고  이래 가지고 저거 말만, 전부 썩은 것, 허탄한 이야기 신화 그런 걸 버리라  했는데,

이러니까 연단이라는 이 말은 우리가 조성해 놓은 구원에 대해서 인적 요소의  것은 다 없애 버리고 전적 신적 요소의 것을 인적 요소가 구속으로 인해서 받아  가지고 있는 것, 그러면 나는 인적 요소이지만 내게 이루어진 구원은 순전히  신적 요소를 내가 받아 가지고 있는 것 이것이 성화입니다. 이것이 죽은 자에게  온 영생입니다.

이러니까 연단이라는 단어, 시험이라는 단어, 연습이라는 단어 이런 단어들의  뜻을 바로 알아야 되겠는데, 오늘 아침에 시간 지나갔으니까 그만두고,  여러분들이 성경에 있는 단어를 세상 어학 단어와 같이 그렇게 어학 사전 다  통달했으니까 된다고 생각지를 말아요.

제가 진주 성경학원에 공부하러 가니까 모든 사람이 쑤군쑤군하면서 손가락질을  하는데, ‘저 사람은 어학 사전, 사전을 다 외운 사람이라. 영어 사전을 다  외우는 사람이라. 뭐 어째라’ 이랬는데, 유명하다고 모두 그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 앞에 벌벌 떨고 이럽니다.

이러는데 그 사람이 언제 강연한다고 한번 갔기 때문에 소망을 가지고 갔다  말이오. 가 보니까 성경에 있는 성경 뜻을 해석을 하는데 이거는 순전히 세상  사람들이 해석하듯이 참 세상 지식의 해석으로, 뜻으로 해석하지, 성경이  가르치는 특수한 단어의 뜻은 하나도 모르고 엉뚱한 소리만 하고 있어.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그 사람을 불쌍하게 봤습니다. ‘저 사람이 유명하기는  유명한데 교회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지.’ 왜?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거든.

목자의 음성이라 말은 영감 듣는다 그말이오. 목자는 예수님인데 예수님 음성  듣는다 말은 영감 들을 줄 안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그거 아니면 듣습니까? 그래  내가 살살 뒤를 파서 물었소. 이러니까 교회서는 환영을 받지 않는데, 그 사람이  유명한 학자라고는 아주 명성이 높았어.

그런고로 우리가 얼마나 깨야 될런지 모릅니다. 엊저녁에도 열한시가 될 때까지  양성원 때문에 의논을 했었는데, 앞으로는 그것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짐을 지우자는 말이 아니오. 여기에서 나간 사람들이 양성원에,  ‘참 양성원에 공부하는 것이 세계 목회자 양성하는 데는 거기에만치 알뜰받게  실질 실속있게 그렇게 가르치고 공부하는 곳이 없다. 거기에 가면 고만 한달동안  공부하면 뼈와 살이 녹아서 빠짝 말라서 쪽 빠져 가지고 녹아 가지고 간다.’ 나는 녹았고, 거기에서 가르치는 진리는 커져 가지고 있고, 이러니까 힘이 쭉쭉  빠져도 뭐 있어. 이리 되면 ‘거기에는 암만 백목사 죽어도 그 기관에서 하는 것  보면 그래 하면 어데 가서 어느 신학교를 보고 어느 무엇을 봐도 거기에만치  그렇게 알뜰히 공부하는 곳이 없으니 그렇게 하면,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제일  열심히 참 진실되게 하고 있으니까 그 결과의 목회자들도 진실한 목회자들이  나오리라.’ 이렇게 여기에 떠난 사람들도 미련이 있을 터인데, 이제까지는  초창기라서 그런 자도 주 모으지 않으면 안되겠다 그거요. 아무나따나 주 모으지  않으면, 내가 목사 안수 받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모릅니다.

왜? 내가 그것을 처음에는 무시했지만 일을 하려고 보니까 안 받으면 안되어서  받으려고 애쓸 때에 나를 목사 안수 안 주려고 전국 교회가 반대했습니다.

환영을 해서, 그렇게 환영을 해도 들어가 가지고 안수 받으려 하면 엉뚱한 짓을  합니다.

내가 경기노회에 들어가 가지고 안수를, 거기에서 이 경기노회 오라고,  경기노회에 오면 안수하고 환영한다고, 경기노회에서 환영했는데, 가니까  경기노회에서 I.C.C.C 문제로, 경기노회가 I.C.C.C에 가입하기로 결정되는 것을  보고 나는 그 자리에서 탈퇴했소. ‘나는 I.C.C.C에 가입하는 노회에서 나는  안수를 받지 않겠다.’ 다시, 가입 신청서를 냈던 것을 그 자리에서 써 가지고,  철회 청원서를 그 자리에서 내 가지고,  내면서 그때에 노회에서 말하기를 노회 그 회의록에 누구 누구가 언제  가입했다가 I.C.C.C에 노회가 가입하려 하는 이 문제를 반대해서 다시 가입  청원한 그것을 철회하는 그 청원을 해 가지고 철회하고 다시 취소했다 하는  고것을 노회 명록에 적어 주면 내가 그대로 나는 지금 시비하지 아니하고  나가겠다.’ ‘적어 주겠다.’ 적었는데, 지금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 왜 적으라  하느냐? 이 다음에 나면 귓속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 외쳐지고 숨어 있는  것이 다 드러나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증거하고  말았습니다.

이러니까 아무나따나 목사가 다섯은 되어야 노회도 되고, 또 다섯은 되어야  안수도 하고, 이러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저 지저분하게 자격 없어도 이래 했지만  앞으로는 강도사 시취도 우리 한국 교회서 어느 진영에 시취하는 시취의  문제보다도 어려운 문제를 내 가지고 합격을 하도록, 안되면 2년 10년, 평생  시험쳐서 합격 안되면 합격 안되어서 목사 되지 못해도 그것을 좀 실력으로  다루려고 생각을 합니다.

또 양성원에 입학하는 사람들도 그 학생들 가운데 그 수준을 최하에 있는 사람을  기준해 가지고 가르쳤고, 또 출석 위주로 이렇게 했었는데,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제일 공부 잘하는 그 우수한 그분을 표준해 가지고 그분이 있는  힘을 다 쓰지 않으면 제가 따라오지 못할 그런 과정으로 공부를 시키고,  이러니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할 것이고, 못 알아듣는 사람은 2년 오니 두  번 들으니까 알아듣고, 열 번 들으니 알아듣고, 스무 번 들으니까 알아들어서  합격되면 아마 졸업하려 하면 20년 걸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30년 걸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공연히 어렵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에도  그렇고 신앙에 그 목회자 실력에 대해서도 그렇게 할 것이오. 그렇게 할  것입니다.

천주교 모양으로 이제 천주교의 가치를 높이고, 또 천주교 그 교파에서 탈선되지  못하도록 그 순서를 마흔 두 가지인가? 그때 헤아려 보니까 마흔 두 가지인가  됩니다. 마흔 두 가지 순서를 밟아야 신부가 됩니다.

이렇게 해 가지고, 그만치 하면 그만 세뇌가 되고 완전히 그화되어졌기 때문에  뒤에는 탈선될 만한 그런 무슨 아무 사상이 없도록 그렇게 만들려 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영감과 진리대로의 것을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그것을 지난밤에  의논했었습니다.

이러니까 이번에 교학실장도 그렇게 감독하지 못하고, 참 뭐고? 실감이라 하나?  이래 가지고 하면 이걸 교학실장을 갈아야 되겠다. 바꿔야 되겠다. 왜?  학생들에게 대해서 그렇게 인화주의 하지 말아요. 좋게 하는 말은, 좋게 할 때는  좋게 하지만 주님이 진노해서 말할 때에는 진노해서 말해야 주님하고 한덩어리로  말하는 것이지요.

이제까지는 그래 됐지만 앞으로는 좀 그저 질을 향상시켜서, 질을 향상시킨다는  것이 일반 신학교에서 그 신학의 질을 향상시킨다 하는 그 질들은, 그들은 세상  질을 말하고 있지만 우리가 말하는 것은 세상 질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질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그런 지식은 보지만 그것은 별로 없어도 주님이  원하시는 그 질은 향상을 시키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몇 가지 듣지 않았지만 이제 이것으로써 여러분들이 가 가지고  성경에 있는 그 단어를 ‘이 단어는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가?’ 세상적 단어의  뜻을 가지고 있는 그런 것을 가지면 안됩니다. 그 단어 하나가 잘못되면 설교가  전부 잘못됩니다.

이러니까 성경에서 이 단어는 어떻게 쓰였는가? 그 단어를 성경에서 쓸 때마다  죽 찾아서 보면 다 ‘이 단어는 여기에 쓰였고, 여기에 쓰였고 여기에 쓰였으니,  여기에 쓰일 때는 이런 뜻으로 쓰였고 저기 쓰일 때는 저런 뜻으로 쓰였으니까  이 단어는 이런 뜻을 가지고 있구나’그렇게 해서 알아야 된다 그말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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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9 타락의 요소/ 히브리 12장 1절∼2절/ 1981. 2. 24. 화새벽 선지자 2015.12.30
738 탐심/ 누가복음 12장 13절-21절/ 1976년 45공과 선지자 2015.12.30
737 탐심(사욕)이 원수/ 누가복음 12장 13절∼21절/ 1987. 12. 4. 금저녁 선지자 2015.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