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양원 목사님 옥중편지와 설교 (2)

2007.05.20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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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 목사님 옥중편지와 설교 (2)
선지자선교회

손양원목사 설교/시대에 적합한 일꾼이되라  

시대에 적합한 일꾼이 되라
마10:16-42,9:35-38

구약시대에도 여호와께서 시대 시대를 따라 16선지 13사사를 내시 었습니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와 사사의 교훈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초 림에 관한 중심이었고, 신약 사도의 교훈의 중심은 주의 재림에 관한것이 그 골자이었습니다. 구약 성서 말라기서에는 율법 종교의 타락 상태를 보여 주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적합한 교역자,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교역자는 과연 어떤 인물알까?

1. 사랑의 일꾼(요 21:15∼17) (아가페의 사랑)
목자를 사랑하며 양을 사랑하는 목자가 되라. 주의 일꾼의 첫 자격 은 사랑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나 감언이설이나 육적 사랑, 지상에 인간들의 사랑이 아닙니다.
①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적합한 사랑 ② 인간의 영혼이 영원에 미치는 사랑,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던 사랑, 베드로가 오순절에 외치던 사랑, 주님의 바리새 교인 책망하던 사랑, 이러한 골자적 사랑이 기독교의 사랑입니다. 십계명 총 대지가 사랑입니다.

2. 지혜의 일꾼(마 10:16)
지혜를 말씀하시되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니까 지혜롭게 하라는 것 입니다.
① 이리에게 잡혀먹지 않는 지혜
② 도리어 이리를 잡을 수 있는 지혜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유혹 이야기)
③ 생명을 보호하는 지혜
④성경 교리 진리, 오늘 시대는 하나님의 뜻을 사로 잡으려는 악마 가 대 활동 중입니다.
⑤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지혜, 그렇다고 하여 이중 인격이나 회색 분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다운 진리의 중심을 의미한 것입니다.
진리에 선명한 태도에서 그리스도와 벨리알을 구별하여 양의 선두에 나서서 양을 이끌지니라.

3. 모험적인 희생적 일꾼 (눅 14:26-27)
십자가 지고 나온 자 주님의 제자로써 다 희생하고 나왔으니 ①물 질 ② 육체 ③ 명예 ④ 모든 것, 큰 것 위하여 작은 것, 영원 위하여 잠깐을 희생하는 일꾼이 되라 (계 2:10, (까마귀와 선지자 이야기)

ㅁ결 론ㅁ
1. 그간 3년 간 공적은 수고가 컸습니다. 수고하신 선생님들의 산고의 고통, 학생 자신의 해산의 수고도 말 할 수 없었겠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수고보다 미래가 문제입니다.
2. 이상하게도 두 졸업생, 주 앞에 선 두 종입니다. 옛날에 주께서 12제자,70 문도를 보내시던 때에 둘씩 둘씩 보내셨습니다. 둘의 수는 계시록의 두 증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3. 계시록 중에 두 촛대와 두 감람나무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향기로운 두 감람 기름입니다.
(계 2장,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






공개되지 않은 손양원목사의 글  

십자가 생활에 불충한 나를 향하여 ....

행복하여 지기를 원하면서 의를 위하여 신고(辛苦)당하기를 꺼리는자,땀도
흘리지 않고 눈물도 뿌리지 않고 눈물도 뿌리지 않고 피도 쏟지 않고 그러
나 많은 행복을 절탐(切貪)하는 어리석은 자를 많이 만나는 중 그 중에도
나는 첫째로 꼽히는 자인가 한다.

과거 인류지사를 통하여 땀흘리지 아니한 위인이 어디 있으며,물을 뿌리
지 아니한 영웅이 어디 있으며 피를 쏟지 아니한 성도가 어디 있는가?

자본을 드리지 아니한 상인을 나는 못보았고 씨를 뿌리지 않는 곳에서 걷
으려는 농부도 나는 못 보았으니 행복은 신고(辛苦)의 대가 임에랴

사람이 심는대로 걷우게 될지니 수고 없이 안락을 탐하다가 패망을 거두
지 말고 수고로 씨를 뿌린 곳에서 안락을 얻고저 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겠
노라.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셨나니라.그러나 나는 이
처럼 넓은 거리를 걸어가기를 좋아하니 사망에 문으로 드러 감인가 하노
라.

공로 없는 행복을 구하고저 하는자 안일에서 평화를 누리는 자의 그 눈앞
이 위험하리라.

천국은 힘슴으로 빼앗는다는데 나의 용력은 왜 이럴까?예수께서는 십자가
를 유업으로 받은 우리 여러 신자에게 "겟세마네"의 땀이 피방울이 되는
십자가의 고배가 최험 되기를 원하시나니 예수 가라사대"누구든지 나를 따
라 오려거든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않는 자는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하
셨읍이다.세인이 체험치 못하는 진정한 부귀영화의 안락은 고난역경에서
기쁜 찬송을 부르는 자가 아니겠느냐

희노애락애오욕(喜努哀樂愛惡慾) 인간 칠정은 거문고의 칠음율이 되리로
다.빈(貧)은 애처로 삼고 고(苦)를 선생으로 삼고 비천을 궁전으로 삼고 자
연은 친구로 삼는 생활에 진정 미(味)의 쾌락을 직감하리라.

양원아........너는 무겁고 괴로운 십자가를 지고 좁고도 험한 갈보리 형곡
을 향하는 로선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느냐?밭 갈기를 예비한 암소가 어찌
멍에를 꺼리 겠으며,전쟁에 나간 군인이 어찌 죽음을 무서워 하겠느냐.내
몫에 태인 십자가 내 어이 하리있까?기쁘게 지고 나아가리라 너는 십자가
지기를 꺼리지 마라 다시 지상에 돌아오지 못할지니라

1934년 1월4일





손양원목사설교/성전을 더럽히지 말라

성전을 더럽히지 말라
마 24:27-25:2

오늘날 교회가 부패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이는 사실상으로 성전을 함부로 쓴 까닭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성전으로 알지 않습니다. 그 예를 들면

(1) 공회당처럼 아는 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나 회합하면  누구나 다 모여서 할 수 있는 줄 압니다.
(2) 학교같이 압니다. 그래서 무슨 학습 강연이나 교육적인 것은 해도 좋은 줄 압니다.
(3)구락부처럼 압니다. 청년 남녀가 모여서 희희락락하는 일도 있고
(4) 극장같이 압니다. 그래서 성극(聖劇)이란 이름을 붙여놓고 함부로 강단을 더럽힙니다. 신자가 예배당을 지어 놓으면 신께 바치는 거룩하게 구별하는 의미에서 헌당식(獻堂式)예배를 보는 법입니다.

성전이란 무슨 집이냐
집이 크다고 성전이 아니고 화려하다고 성전이 아닙니다. 성전이란 옛날 이름이고 오늘날은 예배당이라고 하는데 성전이라고 하거나 예배당이라고 하거나 그 뜻은 무엇인가?

예배당이란 하나님 중심의 회합처(會合處)입니다. 즉 ① 하나님을 모시는 집이요 ② 하나님을 경배하는 곳이요 ③ 하나님의 자녀들이 서로 사랑으로 시제(試製)하는 곳이요 ④ 영원한 영의 양식을 먹는 곳이요 ⑤ 성도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그런고로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더럽히지 않아야 합니다. 솔로 몬의 성전이 더렵혀 질 때에 느브갓네살왕을 통하여 불살라 버리셨고 스룹바벨이나 대 헤롯이 지은 성전도 더러워 질 때에 로마군대를 통해서 헐어 버리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계실 수 없을만큼 더러워진까닭입니다. 그런고로 오늘날에 이 교회들이 부패해 진 것은 어떤 까닭이냐 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노회나 총회가 이처럼 혼란해지는 것도 까닭없는 일이 아닙니다. 마태 24:2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이거나 계시록 2:5에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하신 말씀들은 모두가 이런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강단을 남용하지 말라

오늘날 부르는 예배당이 옛날 성전이듯이 오늘날에 부르는 강단이란 옛날 성전 안에 있는 지성소를 가르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지성소가 성전 안에서 중요한 곳이었던 것처럼 강단도 예배당 안에서 가장중요한 곳인 것입니다. 그것은 지성소가 하나님께 바로 제사를 드리는 곳이었던 것인데 똑같이 강단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곳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강단에서 전해지는 말씀은 성경 말씀 그대로 전해지지 않는 듯 싶습니다. 강단 위에 성경은 공연히 펴놓고 복음을 전한다는 미명(美名)을 걸어 놓고 성경에 있는 복음의 말씀은 전하지 않고 사이비(似而非)한 학술 강연으로 사람의 귀만 즐겁게 하거나 자기의 주의와 사상과 경륜과 포부(抱負)를 선전하려고 하며 또한 자기의 구변이나 재주를 나타내려고 하며 강단을 남용하니 어찌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는가. 따라서 믿는 마음은 독초로 병들게 하고, 영혼은 기갈로 인하여 메말라 가니, 어찌 자멸이 안 되겠는가?

거룩했어야 할 강단이 더렵혀졌기 때문에 나타난 그 벌은 과거 환 난 시대에서도 맛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일제 말엽에 더렵혀진 삼천 강단은 오늘날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일본정신이니 종교 보국이니 혹은 종교의 의식이니 해서 남용하 던 당시의 강단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 무슨 영향을 주고 있는가, 또 강단은 하나님의 뜻, 성경의 진리, 신앙의 체험 등으로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마음에 평안을 받도록 하는 강단이 되어야 할텐데, 어떤이는 자기의 평소에 가졌던 감정풀이로 듣는 이를 공격하여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니 강단 남용도 분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강단에서는 무엇을 전해서 하나님께 옳은 제사가 되고 형제 에게 기쁜 복음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여 남용을 절대 금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나의 설교 원리를 간증합니다.
(1) 나의 설교란 강도학(講道學)원리에 꼭 「성경 말씀에만 터를 닦고」한대로 66권이 본문이요 제목이요 대지(大旨)도 소지(小旨)도 이를 기초로 합니다. 성경에서 성경으로 전부를 삼고, 성경으로 성경을 풀고 싶습니다. 성경에 묻고 성경에서 대답하고 싶습니다. 서론도 성경이요

내용도 성경이요 결론도 성경이 되게 하고져 합니다. 즉 성경으로 시작하여 성경으로 마치고 싶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대도(大道)와 기독교의 교회를 분명히 전하고 싶습니다.

(2)그런고로 나의 설교의 내용은
① 학술적이기보다는 도리적(道理的)으로 ②도덕적 행위 교훈보다 는 생명적인 복음으로 ③사상보다도 교리적인 것을 가르치고져 하며 ④ 이론보다도 실제적으로 ⑤ 일시 귀를 즐겁게 하는 감정보다도 의지적인 진리의 내용을 밝히고 싶숩니다.
그것은 본래부터 기독교의 본질이 그렇고 성경 내용의 진리가 그렇고 나의 받은 사명이 그런줄 아는 까닭입니다.
(3)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평이(平易)하게 명확하게 증거해서 유식 무식간에 노인도 젊은이도 남자도 여자도 알기 쉽게 하고져 합 니다.
쉽게 쓴 것을 왜 어렵게 하겠는가?

ㅁ결론ㅁ
이렇게 성경만을 중심으로해서 복음을 전하면 전해지는 말씀 여하는 말 할 필요도 없고 말씀이 전해지는 강단도 거룩해져서 강단이 순수한 하나님의 제단이 될 것입니다. 성전을 더럽히지 않으려면 강단을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손양원목사 설교/나의 감사  

나의 감사
시편 100편 1~5

년년이 한번씩은 닥치는 감사일을 당하여 금년에는 시편 제100편을 가지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여호와가 나의 하나님이 되심을 감사 (3)
세상에는 신도 많고 주도 많으나 오직 내게는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는 어느 아무 것도 없음을 감사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모든 것의 모든 것입니다.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은 모두가 그에게 있어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1) 감사하기는 내 모든 실정에 즉, 굶주릴 때, 슬플 때, 억울할 때,고난당할 때, 병날 때에, 애원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데 하물며 불신자는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답답함으로 해서 그대로 쓰러지지 않을런지 모릅니다. 불쌍한 일입니다.
(2)또 다른 종교가 있다고 하나 이 역시 별별 헛된 신이 많아서 어 디를 향해서 찾는 것이 옳은지 모르고 있을 것이니 이런 것을 볼 때에 참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나의 감사를 비할 데가 없습니다.
(3) 그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주를 창조하신 대주재(大主 宰)이시요, 인생의 생사 화복을 주관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신 까닭입니다.

그런즉 하나님 한 분을 찾게 되는 것은 온 우주 만유를 얻게 되는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이는 부자와 혼인하면 그 주인의 전 소유를 차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2. 이러한 여호와가 나의 아버지가 되어주심을 감사(3)
(1)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지어주신 내 아버지이십니다. 창세기에 보면, '우리의 형상대로 만들자' 하시었으니 즉, 영혼은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육체는 우리 구주 예수님의 육체와 같이 만드시었으니 이 어찌 감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육체는 얼마나 잘 만드셨는지 모릅니다. 세브란스 박사는 말하기를 미국의 유전(油田)에서 쓰는 기계 공장보다 이 육체는 더 이상하게 만들어졌다고 하였습니다. 이 구조야말로 오묘 막칙(寞則)합니다. (예화‥
‥‥① 소와 다른 짐승과 비교 ② 이 육체와 만유 관계 )
(2)더구나 한센병을 가지신 여러분이라도 이러한 하나님이 아버지 되신 것을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은가요?
시편 27:10에 보면, 래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 시리이다' 하셨습니다.

(3) 이러한 하나님이 내 부모가 되시었으니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우월감 만족감으로 꽉 차서 불행과 불만이 없습니다.
(걸인 아기와 부자집 이야기)
3.여호와께서 나의 왕이 되어주심을 감사(3)
세계 각 민족마다 민족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그것을 자랑합니다. 나는 여호와를 왕으로 모시고 있는 천국의 백성된 것이 감사합니다. 나는 남북빙양(南北沐洋) 극한지대(極寒地帶)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도 감사하고, 적도직하(赤道直下) 열대지방(熱帶地方) 나라에 낳지 않은 것도 감사합니다. 얼굴이 새까만 흑국민(黑國民)이 되지 않고 또 얼굴에 아무 빛이 없는 백인도 되지않고 노아의 장손이요 지구의 원색인 황인종으로 난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동방의 오랑캐 국민으로 나지 아니하였고 북방의 뙤사람으로 태어 나지 아니하고 동방 예의지국(東邦 禮義之國)한국인으로 태어나게 된것도 여호와께 감사한 조건입니다. 더구나 여호와 통치하에 있는 천국 백성이 된 것은 무엇에 비할 수 없는 감사의 조건입니다.
세레노스라는 신 앞에 씌어져 있다는 3대 감사를 들어보면 ① 야수(野獸)가 되지않게 하시고 사람이 된 것이요 ②사람이 되되 여자가 되지않게 하시고 남자가 된 것이요 ③ 사람이라 하되 야만인 이 되지 않게 하시고 헬라인으로 낳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상 세가지 감사에는 ②는 여자에게는 섭섭한 말이요 ③은 야만인들이 듣기에는 거슬리는 말입니다. 헬라인에게 만은 제 일 좋겠으나 그러나 나는 그 헬라인보다도 천국 민족으로 중생한 것 이 나의 제일 자랑하고 싶은 감사한 마음입니다. 또 지혜와 웅장함을 자랑하던 큰 나라도 망한지 벌써 오래었으나 여호와의 천국 왕권은 영원무궁하여 영세 불망할 나라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란 진실로 감사한 일입니다.
고대에 유명하던 큰 나라 애굽이나 앗수리아나 바벨론이나 헬라나 로마나 동양의 요(堯) 임금 순(舜) 임금 때 나라들은 그림자도 찾아보기 어려우나 오늘의 우리 천국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 같은 나라 이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까요. 한국의 독립도 귀하나 우리가 얻은 천국은 더 귀합니다. '야마도 다마시(大知魂)를 자랑하던 일본국도 패망 했고 세계를 대상으로 하고 호령하던 독일도 넘어졌으나 오직 우리 민족만은 영원히 망하지 않는 나라 백성이 됩시다. 영국은 국토를 자랑하고 미국은 그 부(富)를 목적으로 하고 서서(瑞西)는 자유와 정치를 자랑하나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자랑하고 목적하고 나아갑시다.

동양 상고시대에는 요순(堯舜)의 통치로 만족했고 유대 민족은 아 브라함의 자손된 것을 우세하게 여겼으나 나는 오직 만왕의 왕 되시 는 예수 그리스도 세계에서 그 통치를 받는 천국 백성됨을 자랑하고 감사합니다.
4.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 되어주심에 대한 감사(3)
여호와는 나의 영육과 금생과 내세의 목자이십니다. 나는 이러한 여호와가 '나의 목자되시어 푸른 풀밭과 잔잔한 시냇가로 인도하여 주 심을 감사합니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 목자가 되시 어 나를 안위하시고 보호하시고 권고하시며 지도하여 주십니다. 그런 고로 이 시편 23편은 옥중 6년 간에 기도의 소원이었으며 만족한 감사였습니다. 내가 아무 염려 안한 이유도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이 무엇이랴'는 말씀에서 였습니다. 과연 여호와께서는 지혜시요, 능력이시요, 대 보호이시니 무엇이 부족하겠느냐 함입니다. 금년 같은 대 풍년이 든 것도 농부가 잘 심고 잘 매고 잘 가꾼 까닭이냐? 아닙니다. 그보다도 여호와께서 햇빛으로 애호 육성하심입니다. 농부들이 비료를 잘 해주어서 그렇게 되었을까인 그보다도 비 거름이 더 힘이었던 것입니다. 과연 억조창생이 제 지혜와 제 힘으로 사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상 네가지 큰 감사를 잊지 맙시다. 그는 우리들의 하나님이시요, 우리 아버지시요, 왕이시요, 또 목자이시니 이런 것을 깨달을 때에 어찌 감사하지 않으랴!





손양원목사설교/어린이를 영접하자

어린이를 영접하자.
- 주님의 대명이 라 -
(마 18:1∼74)

1년 중에 한번씩은 제5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5월에는 어머니 주일이 있게 되고 복음서 중의 주의 대 명령을 순종하기 위해서 6월에는 꽃 주일로 지키게 된다.
물론어머니 주일이니 어린이 주일이니 한다고해서 하나님의 날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부모에게 효도하는 길과 자녀들을 사랑하는 법도 우리 기독자는 알아야 하는고로 특별히 이름을 붙였을 뿐인 것이다.
특히 유대인과 한국인은 아이들을 무시하는 일이 많다. 하나님 앞에서 대단히 부끄러운 일인 것이다. 이것은 특히 유교에서 아이들을 경시한 까닭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아이들을 영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문명국이라면 노인을 존중함과 청년들을 지도함과 아이를 사랑함을 장려하는데 이런 정신의 근원을 찾아보면 결국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그 근본이되어 오는 것 이다.

1 보통으로 아이들을 무시한다.
아이들을 무시하는 것은 그릇됨 이 큰 것이다. 아이들은 힘이 없다고, 철 없다고 어리석다고 세상 정세에 무식하다
고 아무런 소유권이 없다고 해서 무시한다. 그러나 아니다. 아이들은 천진 그대로이니 모든 세정에서 멀리 떠난 인생의 본질 그대로이니 위대 하지 않은가? 잡철이 섞인 금과순금과 어느 것이 더 귀중할까? 아이는 무엇 보다도 존중히 여겨야 할 것이 아닌가? 아이들은 약한듯 하나 강한자요 세정에 어두운듯하나 명민(明敏)한 자이다. 그 아이의 또렷 또렷한 눈방울을 보라. 그 총명을 말하지 않는가? 살진 고사리 같은 두 주먹에서 용기를 보라. 철 없다기 보다도 그 깨끗한 순진미 얼마나 좋으냐!
과연 이런 아이들은 날개 없는 천사들이요 천국 갈자의 모형이 아니겠는가.
어떤이는 어른 보고는 예사이나 아이들 보고는 공손히 절하는 이가 있는데 참잘 하는 일이다. 나도오늘의 한국의 어른들 볼 때에는 실망 낙담 하다가도 아이들에게 소망을 가지게 된다. 과연 무시는 큰 죄이다. 아이들을 애호하고 영접하라.

2. 성경에는 어린이를 존중하라 하셨다.
예수께서는 아이를 영접하라고 하시었다.
'소자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리라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고 하시었다.
바울 선생은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라'고 하였다. 이는 왜 그런가 하면 어린 아이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자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자이요 천국에 들어갈 자의 모형이 될 만한 자인 까닭이다. 그들에게서는 우리가 배을 점이 많은 자이요 또한 우리의 뒤를이어 일을 할 자들인 까닭이다.
바울 선생이 특히 자녀들을 노엽게 말라고 한 것은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제 어른들에게라도존중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어린 아이들에게서 배을 점을 들어본다면 다음과 같다.

(1) 겸손한 마음이다. 그들은 항상 우리는 아이다 하여서 모르는 줄 약한 줄 알기 때문에 어른 앞에서 큰 소리를 안한다.
(2)순종심이 있다. 그들은 의례히 어른들의 심부름꾼으로 생각하고 어른에게 순종 할 줄 안다.
(3) 순진한 마음이다. 아이들은 꼭 본대로 들은대로 한대로 말한다 그래서 형사들이 무슨 조사를 하게 될 때에는 아이들에게 잘 묻는다고 한다.
(4) 부모를 신뢰하는 마음이 있다. 아이들은 부모 없으면 아주 못 살 줄 알고 부모를 전적으로 의지 한다.
(5)성장한다. 그들은 나날이 달라져 가면서 자라난다
한참자랄 때는 하루의 차이가 큰것 같이 느껴질 때가있다. 육체만이 아니라 심령도 자란다
이 외에도 다른 여러가지 점이 있겠으나 이만한 것만 그들에게서 배운다면 얼마나 놀라운 교훈을 받아 깊은 신앙자리에 들어가겠는가.
어른들은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을 가르치려고만 하지말고 아이들에게서 배우도록힘쓰는 것이 옳은 줄 안다.

3. 영접하여 지도하자.
어린 아이들은 장래 국가의 지도자이니 우리가 잘 지도해야 하겠고 장래 교회를 인도할 사람들이니 우리가 잘 지도해야 하겠다. 장래 국가에서 좋은 인물을 요구 하거든 이 아이들을 영접하고 앞날에 우리 교회가 잘 되기를 바라거든 어린 아이들을 잘 돌보아 주라.
좋은 과실을 먹고 싶으면 과수를 잘 가꿀 것이요 가을에 거두기를 바라거든 봄에 심기와 여름에 수고하기를 아끼지 말라.
장래의 선생도 오늘께는 학생이며 앞날의 위인 역사도 오늘에는 얘들이니 장래의 인물은 오늘부터인 것이다.
장래의 성인(聖人)을 만들고 싶으면 오늘부터 잘 수양시켜야 한다.
백지 같은 아이들이니 물들이기 따라서 여러가지 인물이 될 것이요
속 빈 것 같은 아이들이니 안에 넣는것 따라서 이름이 될 것이다.
삼 사십년 전 아이들이 오늘날의 목사 장로 집사 선생이 되었고 또다시 삼사십년 후이면 오늘의 아이들이 선생도 장로도 목사도 위인도 실 인도 될 것이 아닌가.
이것은 이들을 지도하는 오늘날 우리들의 책임과 수양 지도를 받는 아이들 자신의 노력여하에 달린 것이다. 피차 오늘의 각오하는 바가 커야 한다.

ㅁ결 론
그러니 잘 양육하자.오늘의 우리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아이들을 그 실력대로 발휘 시켜서 지도해야 하겠다. 예수님의 총애를 받는 자이니 삼가 조심하여서 기르자. 인물 양싱은 예수의 명령이라 예수의이름으로 어린 아이들을 영접하기를 가르치셨으니 누가 이를 마다 하리요 즉 주님의 진리와 주의 경계와 법도대로 길러야 한다.
아이들을 사랑하라, 영접하라, 노엾게 말라는 것은 오직 성경에서만 가르친 말씀이니 꼭 성경 진리와 원리대로 교양시킬 필요가 있지 않은가. 이제 어런아이 영접함이 곧 예수님을 영접함이라 하셨으니 예수님의 것을영접하는 몇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체육 보건에도 잘 도와 주어서 위생상 유익하도록해야 한다.
(2) 지식 교육 방면에도 적극적으로 받들어 쿠어야 한다.
(3) 도덕과 선행과 예의 방면에도 빠지지 않도록 유의해 주어야 한다.
(4)신앙 방면에도 진리의 참 도리를 가르쳐 이단이나 불신앙에 떨어지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아이들은 꼭 어른들 하는대로 본받는 모방의 그릇이요 거울 같은 그림자니 조심하고 주의하라.
특히 부탁할 것은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아이나를 불구하고 한센병들었다고 자포 자기하지 말라. 이는 대 금물이다.
장인(區人)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요긴한 돌이 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있으니 그 사명 완수하면 그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