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양원 목사님 옥중편지와 설교 (6)

2007.05.20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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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 목사님 옥중편지와 설교 (6)
선지자선교회


손양원목사설교/구주의 성탄을 맞이하는 나의 감사

구주의 성탄을 맞이하는 나의 감사
마태복음 2:1-12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심에 훌릉한 역사적 배경으로 탄생케 되심을 나는 진심으로 감사 찬송하여마지않는 바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시다니! 영광의 하나님께서 이 추악한 세상에 오시다니!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처녀의 몸을 통하여서 세상에 오시다니!

1. 시기에 적합하게 오심에 감사
(영웅과 시대 이야기)때는 억천만 만국 만민이 세상의 구주를 고대하여 마지않는 절박한 시기였습니다. 아담 시조로부터 범죄 타락한 이후 인생들의 죄악은 점점 왕성하게 되어 자멸 상태에 빠지는 때였고 인간의 지혜와 능력은 극도에 올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마저 가리우게 되려 하는 때였고 인간의 의와 선은 천국의 가치를 무시하게 되어지는 때 였습니다.
인간의 지혜인 철학과 세상의 모든 종교는 진정한 신을 찾기에 혼란과 곤란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즉, 석가의 대자대비(大慈大悲)는 하나님의 사랑을 대신하려고 하고, 공자의 삼강오륜지도(三綱五倫之道)는 천륜(天倫)을 혼미케 하였고, 소크라테스의 대지(大智)는 하나님의 지혜를 겨루려 하던 때였습니다. 그보다도 소위 아브라함의 신앙세계도 불신과 암흑에 이르게 되니 46년 간이나 공을 드려 지은 성전도 머지 않아 파멸 될 지경에 이르게 되고 거룩하고 신성하다는 율법의 세계도 천국문이 닫혀지게 되는 때이었나니 여호와의 음성이 이미 끊어진지 4백 여 년 이르게 된 때였습니다. 즉 백귀야행(百鬼夜行)에 우주란(宇宙亂)이라고 할 수 있는 때였습니다.
따라서 이방 모든 나라에는 하나님을 떠나게 하려는 인간의 종교가 팽창(澎脹)하여 인간의 교만이 하늘에 사무쳐 하나님을 가리우게 되고 유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하고 큰 소리로 외치던, 여인이 낳은 사람 중에 제일 위대한 사람이요 만국 만민의 대표자인 세례 요한을 선구자로 앞세우고 만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1946년 전 12월 7일 밤 새벽에 유대국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는 진심으로 축하하여 마지않습니다. 만국민이 심령적으로 천만 고대하는 일이 응하시어 때를 맞춰서 오셨으니 이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2. 유대국에서 탄생케 되신 것을 더욱 감사
(허다한 많은 나라 다 버리고 하필 유대국이냐!)지리적으로 적당한 장소인 것은 종교적인 민족이 살고 있는 곳인 까닭입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은 세상 모든 고을 중에도 가장 작지 않았으니 만국 만민의 그리스도께서 나심에 대하여 가장 적당한 곳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여러분! 석가는 어디서 낳는가? 그는 인도에서 태어 났습니다. 그러니 석가가 함의 자손인 인도국에서 낳은 것이 적당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중심계통인 셈의 자손인 유대국에서 나신 것이 옳은 것입니다. 또 공자는 어디서 낳는가? 그는 중국에서 태어 났습니다. 그러니공자가 동양의 종주국(宗主國)으로 자처하는 중국에서 낳은 것이 합당하다면 만민의 구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계적 중심지인 지중해안의 유대국이 합당하셨던 것입니다. 또 소크라테스는 어디서 낳는가? 그는 헬라에서 태어 났습니다. 그러니 그가 인본주의적인 문명의 발원지인 헬라에서 낳은 것이라고 하면 영적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종교국인 유대국에서 탄생하심이 가장 옳을 것입니다. 인걸(人傑)은 지형(地形)에 따른다는 말이 있지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실로 유대국 베들레헴 다윗성에서 탄생하심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섭리인가 합니다. 유대국은 온 세계 만국의 중앙 지대입니다. 동양의 서쪽 끝이고 서양의 동쪽 끝입니다. 중축(中軸)입니다. 이러한 인류의 종가국(宗家國)으로 되어 있는 유대국에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예(後?)로 나시되 더구나 다윗성에 탄생하심은 만왕의 왕 되신 예수님께서 만세 전부터 예정 하신대로 응답하시어서 되심임을 알 수가있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낮고 천한 우리를 구원하시고 말구유에서 탄
생하셨으니 우리의 축하는 진실로 감개무량합니다.

3. 온 우주적 일대 경절(慶節)이 됨을 감사합니다.
(기후가 다른 남?북극7주야가 다른 동서양도 한 날에 된 이야기)
크리스마스는 온 우주가 떠드는 대경축일(大慶祝日 )인 것입니다. 동서양은 물론이고 빈부귀천 대소인을 막론하고 천상천하에 일대 축하의 대절일(大節日)입니다. 한 가정에 귀동자가 탄생된 날이거나 한 가정의 주인의 생신날이 전 가족의 명절이 되겠고 한 국가의 군왕이 탄생한 날은 전국민의 경절이 되겠고 어떤 종교의 교주의 탄일은 그 교도들의 경축날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하신 날은 만국 만민의 구주시요 하나님의 독생자가 지상에 탄생하신 날이니 지상의 만민은 물론이요 하늘의 천천군 천사까지도 찬양하게 됩니다. 보라! 천사의 찬송은 하늘의 천만 성도와 천군 천사를 대신하여 한축하인 것입니다. 동양의 별빛은 하늘 공중에 무수한 일월성신(日月星辰)들의 대표가 됩니다. 시므온과 안나의 찬송은 유대 선민의 대표가 될 것이요, 멀리서 온 동방의 박사들은 이방 민족을 대신하는 것 같습니다.
양을 치던 목자들이 찾아옴은 다윗성을 대표함이 아닐까?
아! 기쁘다 구주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2천년전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오늘에도 온 우주의 경절이 된 것이다.
자! 오늘날 우리도 천사와 함께 찬송하자! 동방 박사와 함께 경배하자!





손양원목사설교/성경대로살자  

성경대로 살자
로마서 2:17-29,빌립보서1:27

기독교인이 란 어떠한 사람인가?
한마디의 말로 답하면 66권 신구약 성경대로 살려는 자입니다. 불교인은 불경(佛經)대로, 유교인은 삼강오륜(三綱五倫)대로, 회교인은(코란)대로 각자 자기네들의 경문을 좇아 살려는 자일 것입니다. 성경의 교훈과 우리 신앙생활은 양궤도(兩軌道)와 같습니다. 성경의 명령한바를 행하고 금하는 바를 하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내가 불교에 관한 책을 보았는데 거기 기독교를 평하기를 기독교는 저급(低級)의 종교입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의 성경은 "하라" "하지말라"는 것을 명하는 것 뿐입니다. 위로 무한히 전개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는 십자가(+)의 종교라 하기 보다는 정자(丁字)종교입니다. '차라리 우리 불교가 사방으로 제한이 없는 십자가의 종교다'라고 하였습니다. 저희들이 기독교를 비평하느라고 이런 말을 하였으나 여기에 예수교의 참됨을 말 한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하나님께서 "하라" "하지말라"고 명령 할 수 있으며 우리는 순종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자율(自律)종교인고로 범신론을 말하고 만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순종의 종교입니다. 순종하려면 그 대상자에게 권위가 있고 믿음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순종하기 전에 그 권위를 알아야 합니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한 법칙이니라'하였습니다 성경을 의심하는 자는 순종하지 못합니다. 나는 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생명을 걸고 증거합니다. 누가 성경을 의심한다면 나는 그와 상종하기도 싫습니다.
① 만물이 성경입니다. (요한 12:25) '우주 만물은 성경이고 신구약 66권은 그 주석이다:라고 루터 선생이 말하였습니다. 다윗도 공중의 일월성신을 보고 찬송하며 푸른초장에서 여호와를 찬양하였습니다.
② 기록된 성경이 있습니다 (딤후 3:16)
③ 예수 자신이 성경 입니다 (요 5:39)
④ 신자의 행위 가 성경 입니다 (고후 3:2~3)
기독자가 보는 성경은 66권이나 불신자가 보는 성경은 신자의 행위입니다. (롬 2:17~29 빌 1:27상) 불신자는 거듭나지 못했으니 66권 성경을 보아도 알지 못하나 오직 신자의 행위로 성경을 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성경대로 살자.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나더러 '너는 성경대로 살 수 있느냐?'하고 반박할런지 모르겠으나 나는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성경대로 살 수 있는 가능성
성경 속에 예수님이 계시고 신자 속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여기 주머니가 있는데 콩을 넣으면 무슨 주머니라고 하는가? 콩주머니라고 합니다. 쌀을 넣었다면 쌀주머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안디옥에서 비로소 사용하였는데 그리스도의 신을 소유한 자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옥토에 뿌린 씨와 같이 30배,60배, 100배의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막 4:8) 베드로 전서 1:16에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할지어다. 하셨느니라'했는데 이 말이 과도한 말이겠는가! 이 말은 불신자를 보고 명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를 보고 한 말씀입니다. 자녀를 보고 너희 부모만치 되라고 하지못하겠는가.초목은 재배하고 가축은 길들이고 인간은 수양을 한다고 하나 그 근본 종자를 변경 할 수는 없습니다. 보리를 아무리 가꾸어도 벼가 되지 못하고, 개를 아무리 길들여도 사람이 못됩니다. 마찬가지로 중생치 않고는 아무리 해도 죄악의 자식입니다. 첫째 아담에게 속한 사람은 아무리 수양하더라도 공자와 석가만치 될는지 모르나, 하나님만큼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생한 사람은 될 수 있습니다. 여기 부모만치 되라고 한 것을 오해하지 말라. 그 지위나 영광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요. 그 부모의 성품과 특성을 닮으라고 말함입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은 하나님의 지위를 빼았으려다가 범죄하였느나, 둘째 아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보라. 그리스도 안에서는 능히 성경대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를 가르칠때 불가능한 일을 가르치지 않으십니다.
결코 부모가 불가능한 일을 그 자녀에게 명하지 않습니다. 어느 아버지가 열 살 된 아들더러 쌀 한 섬을 지고 오라고 하겠는가! 신명(神命)은 성신 받으면 가능하게 명하십니다. 바울, 베드로같은 사도들이 실천하고서 교인들에게 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신이시요 억지의 신이 아니십니다. 어떤 청년이 산상보훈을 다 배우고 말하되 '다른 것은 행해도 우편뺨을 치거든 좌편 뺨을 돌려대라 한 것은 젊은 나로서는 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아야지 편견(偏見)해서는 안됩니다. 이 문구는 여자(如字)적으로 해석 할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의 뜻은 우편 뺨을 맞고 좌편 뺨을 돌려 댈 만한 아량이 아니면 타인에게 맞고 견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매 맞을 때에 '너희가 법 없이 나를 치느냐'고 항의한 것입니 다.
어떤 선교사가 하루 아침에 자고나서 매우 실망한 안색을 띠고 있으니 하녀가 묻기를 '선생님은 매일 쾌활하시며 기쁨이 넘쳤는데 오늘 아침에는 왜 이같이 안색이 변하였습니까'하니 선교사가 대답하기를 '나는 간밤에 성경을 읽는중에 쉬지말고 기도하라 한 것을 보고 이것은 불가능 하다고 생각하여 실망하였는데 어떻게 사람이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쉴사이 없이 기도만 하고 앉았겠는가'고 하였습니다. 하녀가 말하기를 '선생님 그것이 나는 가능할 줄 압니다'했습니다. 선교사는 '네가 어찌 자지 아니하며 먹지 아니하며 다른 사무도 없이 기도만 하겠는가'하니 하녀가 다시 대답하기를 '성경에 어디 자지 말라 먹지 말라 일하지 말라 하였습니까 나는 잘 때마다 일 할 때마다 기도하니까 나는 쉬지않고 기도합니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하루에 숨을 몇번이나 쉽니까? 백번인가, 천번인가,나는 끊지 않고 쉽니다.
이렇게 성경을 편식하는데서 이단이 생깁니다. 성경대로 산다고 해서 오늘 예수 믿고 내일 바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라 점점 자라갑니다. 우리도 날마다 성경을 배워 자라갑니다.기도하며 성경읽고 우리 신앙이 자라 우주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 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창기(娼技)속에서도 진리를발견하고 바리새인들에게서도 외식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시조 아담 하와를 유혹하던 마귀는 오늘도 우리들의 신앙이 자라지 못하게 유혹하고 있습니다.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되지 아니한다고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의 천지 창조도 육일 간에 완성하지 아니하였는가 오순절 성신역사를 오해하지 말라 나는 다음과 같이 봅니다.
'너희가 나를 믿으면 나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한 것은 사도들의 큰 역사를 말함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는 성신으로 하시지 않고 개인 개인 대상으로 일하였으나 성신 시대에는 성신이 오셔서 역사하시나니 하루에 삼천명씩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성경저작 교회설립 등 큰 일을 위하여 성신께서 특별히 역사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신앙도 자라감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처음에는 '나는 사도 중에 작은 자'라고 하더니 다음에는 '신자 중 작은자'라 하고 나중에는 '죄인 중 괴수'라고 하였으니 이는 신앙 장성의 표입니다.
'손목사 너는 잘 믿는가'물음면 나는 '아닙니다. 악한것 뿐이다'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만 여러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은혜를 입혀 주신 것 뿐입니다. 비유컨대 은행원이 매일 돈 취급은 몇 십 몇백 만원 한다해도 자기 소유는 그달 월급 조금 뿐인 것과 같습니다. 나에게도 불결한 것을 많이 발견합니다. 그러나 나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어느 집회 때에 부인이 울면서 내게 말하기를 '그것이 곳 중생된 증거입니다:하였습니다. 나도 나의 중생이 언제 되었는지 분명히 모릅니다.

본성 문제(각 사람 본성에 대하여)
본성은 못 고친다고 하여 방종하는 이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는 이도 고칠 수 있다고 봅니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셨을 때에는 육신의 병을 고치셨고 성신으로 오신 주님은 우리 마음을 고칩니다.이적이란 무엇인가? 자연 법칙을 초월하여 인간 지식으로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하심이 이적입니다.
어떤 청년이 내게 말하기를 '내가 예배당에 가서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니 새빨간 거짓말만 합디다. 5병 2어 (五餠二魚)로 5천명이나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니 이런 거짓말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내가 대답하기를 '이 사람아, 조(晁)밭에 조 이삭이 몇 알이나 되는지 아는가'하니 '수천개 일 것입니다'하기로 '그러면 처음 한 알이 수천개가 되었는데 그 수천개가 되게 한 이는 누구인가, 농부가 하였는가, 어떤 과학자가 하였는가, 이 일이 되게 하신 이가 곧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러면 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5병 2어로 5천명을 먹일수 없겠는가 어떤 개미가 지렁이를 끌고 갈려고 애를 쓰는데 한 아이가 지나가다가 발로 차버리면 개미에게는 아이고 이는 이적이라고 하겠으나 아이에게는 보통인 것이 아니겠는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이적이라 하겠으나 예수에게는 보통인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에게는 이적같으나 하나님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다'했습니다. 일본에 있는 어떤 도서관에 가보니 약 이십만권의 책들이 있는데 그중에 철학사가 대부분인데 우주가 어떻게 생겼으며 인생은 어떻게 낳으며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결론은 다 의심뿐이라고 의문부(疑問府)를 붙일것 뿐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자이면 누구나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고 압니다. 가장 무식한 할머니들에게 '천지를 누가 지었는지요'하고 물으면 '하나님이 창조하셨지요' 라고 대답합니다. 무식한 할머니라도 철학박사보다 유식합니다. 이는 마치 농부들이 일년에 수고하여 쌀을 산출하지만 나는 수고없이 밥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같이 믿으니 학박사(學博士)들이 평생 연구했어도 모르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천성(天性)문제도 갑자기 고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죄 짓는 천성을 못 고칠리는 없습니다. 혈기 많던 자가 예수 믿고 온유해지고, 악질의 사람이 예수 믿고서 선량해집니다. 성질의 늦고 급한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숯은 아무리 비누로 씻어도 그래도 검지마는 불 가운데 넣으면 불꽃과 같이 변합니다. 우리 한국에 김익두 목사같은 이는 불량꾼으로 유명하던 이 아닌가. 그가 예수를 믿고 목사가 된 것이 아닌가.그러나 그 본성 즉, 죄의 뿌리는 쑥 빠지지 않는 법입니다. 이것으로 해서 날마다 싸우면 하늘에 가서 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일제 시대 신사 참배 문제가 일어날 때 어느날 아침에 형사들이 평양 신학교 기숙사에 와서 재학중인 이상업(李相業)목사의 방을 수색 하면서 묻기를 '당신이 가진 것이 이것뿐인가?'하였습니다. 사실은 다른 중요한 것을 상자 밑에 감추어두고 있었는데 없다고 할려니 하나님이 두려워서 거짓말은 할 수 없고 있다고 하자니 형편이 딱하고 해서 얼핏 나온 말이, 내가 있다고 하면 믿으며, 없다고 하면 믿겠는가,있는대로 찾아보시오'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 형사 말이 '당신은 작은 예수인데 내가 당신을 못믿으면 누구의 말을 믿겠는가'했다고 합니다. '불신자도 우리를 믿는다고 신용해 주는데 또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는데 어떻게 우리의 생활이 이같이 거짓인가? 나는 때마다 눈물을 흘립니다. 나는 작은 예수니 성경대로 살지 않고 되겠는가,옛 성도들은 충성하였건만 우리는 왜 이런가? 나는 '죽을지언정 주께서 금하신 것은 행하지 말게 하시고, 하라고 명하신 것은 행하게 해주소서'하고 기도합니다. 오늘이란 오늘이 과거의 마지막 날이 되고 미래의 신출발(新出發)의 날이 되도록 힘쓰자.
순천에 있는 선교사들이 자기들 부흥회 때에 어떤 여선교사가 인도하였는데 그 방식은 각각 성경을 읽게 하고 '당신은 이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또 남에게도 가르치는데 당신은 이대로 하는가?'하고 책망 할 때에 거기서 회개하고 큰 부흥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불순종이라는 것은 하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요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교훈과 우리의 신앙 생활을 조화하는 방법
성경은 성신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주의 제자들도 기도함으로 성신을 받았습니다. 기독자는 성신을 받아야 기독자가 됩니다. 성경속의 성신과 내 속의 성신은 동일한 신입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아라 만날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리리라: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신을 주시지 않겠는가! 오직, 기도함으로 성경 교훈과 내 신앙생활이 조화가 됩니다
오늘 우리 신앙 생활이라 하는 것은 도덕적 행위만 말함이 아니고 기도하는 생활도 말함인줄 압니다. 일 중의 일이요 생활 중의 생활이 이 기도입니다. 일 중에 가장 어려운 일은 기도이니 이 기도가 유일의 생활 원칙입니다. 앉고 서고 할 때마다 기도하자. 기도하지 않고 우선 보기에 얌전하고 점잖한 것은 공자 맹자를 따르는 도덕가들이 훨씬 낫지 않을까? 기독교는 기도의 종교요 기독자는 기도의 사람입니다.
왜 그런고하면 예수님 자신이 기도의 사람인 까닭입니다. 그의 생활 전부가 기도였습니다. 그런고로 기독교를 이해하려면 기도없이 할 수없고 기도하지 않고는 기독자의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얼마나 좋은가! 육체와 마귀와 세상을 이기는 힘은 기도뿐입니다.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고, 성경대로 전하여야 합니다. 기도는 일대 전쟁입니다. 전쟁은 저가 안 죽으면 내가 죽는 것입니다. 육체와 나, 세상과 마귀와 내가 전쟁함입니다. 오직 우리의 신앙 생활이 성경 교훈에 부합되게 하는 것은 기도의 전쟁 승패 여부에 있습니다. 때는 말세지 말입니다.
기도하다가 죽자,
성경대로 살기 위해서!





손양원목사설교/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전서6:1-20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인생의 본분이요 목적입니다.
요리문답에 가르쳤고 성경 66권에 밝히 가르친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입니다. 온 우주에 충만한 피조물이 다 하나님의 창조하신 바이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자연 이치입니다. 만물만인의 목적 입니다.
하늘의 세 빛과 사시의 만물은 다 자연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건만 오직 인생 만이 영광 돌리는데 등한합니다. 보라, 작은 방안에 모든 물건이 다 주인을 위해서 둔 것이지 어찌 물건 그 자체를 위해서 있겠는가!
바울 선생도 빌 1:20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나니'한 말씀으로 보아 그의 생활 목적이 무엇 이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져 하는 정신은 그 첫째요,행실은 그 결과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광 돌리는 일에 손해 되는 일이라면 다 내려야 할 것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신 일이라면 나의 생명까지도 바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음 받은 이 몸이니 주 위해 살다가 주 위해 죽는다면 이 이상 더 성공이 있겠는가. 이것이 인생의 고귀한 생활이라 할 수 있는 것 입니다.
(바울 선생이 왜 신영(新營)생활이 당연하다 하였는가,본문중 3개 이유)

몸을 하나님께 받은 연고(고전 6:19)
이 몸은 단순하게 부모에게 받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부모가 맘대로 낳을 수 있다면 적당한 수대로 낳았을 것이고 자녀 못 낳는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 낳되 성격도 알맞게 체격도 알맞게 낳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을 보면 인간이 인간을 맘대로 못 낳는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실은 이 몸 전체가 하나님의 것 아닌 것이 없습니다. (시 100:3)사지백체 중에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세포(細朧)하나 하나가,모발(毛髮)한개까지도 하나님께 안 받은 것이 없습니다. 날마다 먹고 마시고 입고 가지고 하는 것 중에 위에서 주시지 않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런고로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얼마나 할까 신 한켤레 주는 자에게 감사하거든 발을 주신 주께에야 더 말할 것 있겠는가. 만년필 주는 자에게 감사하다고 하겠거든 하물며 손을 주신 하나님께는 어떠하겠는가. 우리 동양에서는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 받았다고 하여서 부모에게 효를 하는 이는 있으나 영과 육을 주신 하나님은 생각지 않으니 가소롭다. (사 46:3,4) 이와 같은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다른 이에게 돌리는 것은 큰 죄입니다. 사신 우상을 섬기는 것이 그래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만 영광을 돌리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가 됩니다. 국가나 사회나 어떤 단체제 돌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자기 자신만 위하는 것도 죄입니다. 자신의 명예나 지위나 세력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고전 10:31). 자기의 몸으로,의식주(衣食住)로,기술로,재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몸은 성신의 전이 된다고
집은 집주인을 보호하며 편안케 하며 즐겁게 합니다. 그 집을 보아서 그 주인의 인격 위신을 알게 됩니다. 성경 중에는 네가지 종류의성전이 있습니다.
① 건물인 성전(마 24:1)
②주님의 몸된 성전(요 2:21)
③성도의 모임(엡 2:21~22)
④ 개인의 몸(고전 6:15, 19)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솔로몬의 성전,스룹바벨의 성전,대 헤롯의 성전이 섰고, 신약시대에는 주님의 몸된 성전, 신자 자신의 성전,교회집단의 성전이 있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 취급된 성전은 크리스찬 자신의 성전을 가리킵니다. 이 몸을 깨끗이 하여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 죄인된 몸이 한번 중생되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고 악마의 소굴이였던 몸이 바꿔어 성신의 전이 되었으니 진실하고 깨끗하고 거룩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지 않겠는가. 얼마나 감사한 일이며 얼마나 조심스러운 일이냐. 따라서 우리 몸이 거룩하면 주께서 계실 것이요 만약에 불결하면 멸하실 것입니다. (고전 3:16, 17)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계실 전도 거룩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에서 집 짓는데도 그 살 사람의 계급 따라서 짓는데 하물며 성신이 계실 집이랴!
하나님이 계신 곳은 바로 천당인데 신자의 몸이 천당처럼 밝고 깨끗하고 거룩하여 우리 몸을 볼 때에 바로 천당을 보는 것처럼 보여져야 하지 않겠는가, 옛날 성전 안에는 항상 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우리 마음의 등불도 꺼지지 않아야 되지 않겠는가. 마태복음에는 세상의 빛으로 말씀이 되었고, 계시록에는 별과 촛대로 비유했습니다.
그러나 두렵건대 옛날 솔로몬의 성전이 죄악으로 더러워 질 때에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왕을 통하여 불태워 버리셨습니다. 음란과 우상으로 더러워진 스룹바벨의 성전을 허시고 돼지 피로 더렵혀진 헤롯의 성전을 깨트리신 하나님께서는 주의 성전인 우리 몸을 더럽히면 멸하시겠다고 하시었습니다. 성결한 몸으로 영광을 돌리자.

주님에게 팔린 몸인고로
오늘의 우리 몸은 우리 주께서 은금보화 이상으로 귀한 십자가와 보혈로 사신 몸이니 이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림이 당연하지 않을까? 보라 이런 천하게 가치 없는 냄새나는 더러운 몸이 하나님이 계시는 전으로 변하다니! 지옥에서 멸망 받을 몸이 영생을 얻을 존귀한 몸으로 바뀌다니 !
마귀의 자식으로 보낼 수 밖에 없는 몸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몸으로 팔리우다니! 어찌 영광을 안 돌리고 지내랴!
하나님께 받은 몸이란 성부의 소유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요 성전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성신의 소유가 되었다는 뜻이요. 피로 사셨다는 것은 성자 예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뜻인 것입니다. 이처럼 성부 성자 성신의 소유가 된 이 몸이라면 어찌 하나님께 영광을 안 돌릴 수있으랴!

「샀다」는 것은 「얻었다」 「되었다」 「만들었다」 보다는 공로와 댓가(代價)가 든 것을 의미합니다. 과연 그리스도교가 은혜의 종교라는 것은 우리 편에서 하는 말이지 성부 성자 성신께서는 무한하신 노력과 공적이 많은 것입니다. 성부는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셨고 성자 예수는 33년 간의 눈물, 땀, 피를 쏟으셨고 성신은 우리 일생을 보호 지도 완성하시기에 무한한 탄식을 하시니 어찌 샀다고 안하겠는가. 이처럼 고귀하게 사게 된 우리이니 하나님께 영광을 안 돌리겠는가.
자! 이제는 빌립보 1장 20절을 생각하자.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하려하나니」한대로 생사고락 간 하나님께 영광만 돌리는 생활을 하도록 목표를 세우자. 이런 이치를 참으로 알게된 바울이 일생동안 주의 종이 되었고, 베드로 요한 등 열 한 제자가 순교의 제물이 되면서까지 사도 노룻을 했고, 옛날 모든 성도가 다 그같은 성결 생활 축복 생활을 달게 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참으로 진리를 아는 진정한 기독자냐? 그렇다면 우리도 죽도록 충성하자 우리를 사게 된 주인에게 죽도록 충성하자!
롬 14:7-8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가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한대로 우리는 일분간도 자기를 위하거나 인간을 위해서 살지말고오직 우리 위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우리를 사(買)신 이를 위해서 살자! 그리고 그 주님을 위해서 죽기까지 하자!
그래서 영광을 돌리기로 결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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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목사설교/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전서6:1-20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인생의 본분이요 목적입니다.
요리문답에 가르쳤고 성경 66권에 밝히 가르친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입니다. 온 우주에 충만한 피조물이 다 하나님의 창조하신 바이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자연 이치입니다. 만물만인의 목적 입니다.
하늘의 세 빛과 사시의 만물은 다 자연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건만 오직 인생 만이 영광 돌리는데 등한합니다. 보라, 작은 방안에 모든 물건이 다 주인을 위해서 둔 것이지 어찌 물건 그 자체를 위해서 있겠는가!
바울 선생도 빌 1:20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나니'한 말씀으로 보아 그의 생활 목적이 무엇 이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져 하는 정신은 그 첫째요,행실은 그 결과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광 돌리는 일에 손해 되는 일이라면 다 내려야 할 것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신 일이라면 나의 생명까지도 바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음 받은 이 몸이니 주 위해 살다가 주 위해 죽는다면 이 이상 더 성공이 있겠는가. 이것이 인생의 고귀한 생활이라 할 수 있는 것 입니다.
(바울 선생이 왜 신영(新營)생활이 당연하다 하였는가,본문중 3개 이유)

몸을 하나님께 받은 연고(고전 6:19)
이 몸은 단순하게 부모에게 받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부모가 맘대로 낳을 수 있다면 적당한 수대로 낳았을 것이고 자녀 못 낳는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 낳되 성격도 알맞게 체격도 알맞게 낳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을 보면 인간이 인간을 맘대로 못 낳는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실은 이 몸 전체가 하나님의 것 아닌 것이 없습니다. (시 100:3)사지백체 중에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세포(細朧)하나 하나가,모발(毛髮)한개까지도 하나님께 안 받은 것이 없습니다. 날마다 먹고 마시고 입고 가지고 하는 것 중에 위에서 주시지 않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런고로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얼마나 할까 신 한켤레 주는 자에게 감사하거든 발을 주신 주께에야 더 말할 것 있겠는가. 만년필 주는 자에게 감사하다고 하겠거든 하물며 손을 주신 하나님께는 어떠하겠는가. 우리 동양에서는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 받았다고 하여서 부모에게 효를 하는 이는 있으나 영과 육을 주신 하나님은 생각지 않으니 가소롭다. (사 46:3,4) 이와 같은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다른 이에게 돌리는 것은 큰 죄입니다. 사신 우상을 섬기는 것이 그래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만 영광을 돌리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가 됩니다. 국가나 사회나 어떤 단체제 돌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자기 자신만 위하는 것도 죄입니다. 자신의 명예나 지위나 세력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고전 10:31). 자기의 몸으로,의식주(衣食住)로,기술로,재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몸은 성신의 전이 된다고
집은 집주인을 보호하며 편안케 하며 즐겁게 합니다. 그 집을 보아서 그 주인의 인격 위신을 알게 됩니다. 성경 중에는 네가지 종류의성전이 있습니다.
① 건물인 성전(마 24:1)
②주님의 몸된 성전(요 2:21)
③성도의 모임(엡 2:21~22)
④ 개인의 몸(고전 6:15, 19)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솔로몬의 성전,스룹바벨의 성전,대 헤롯의 성전이 섰고, 신약시대에는 주님의 몸된 성전, 신자 자신의 성전,교회집단의 성전이 있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 취급된 성전은 크리스찬 자신의 성전을 가리킵니다. 이 몸을 깨끗이 하여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 죄인된 몸이 한번 중생되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고 악마의 소굴이였던 몸이 바꿔어 성신의 전이 되었으니 진실하고 깨끗하고 거룩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지 않겠는가. 얼마나 감사한 일이며 얼마나 조심스러운 일이냐. 따라서 우리 몸이 거룩하면 주께서 계실 것이요 만약에 불결하면 멸하실 것입니다. (고전 3:16, 17)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계실 전도 거룩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에서 집 짓는데도 그 살 사람의 계급 따라서 짓는데 하물며 성신이 계실 집이랴!
하나님이 계신 곳은 바로 천당인데 신자의 몸이 천당처럼 밝고 깨끗하고 거룩하여 우리 몸을 볼 때에 바로 천당을 보는 것처럼 보여져야 하지 않겠는가, 옛날 성전 안에는 항상 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우리 마음의 등불도 꺼지지 않아야 되지 않겠는가. 마태복음에는 세상의 빛으로 말씀이 되었고, 계시록에는 별과 촛대로 비유했습니다.
그러나 두렵건대 옛날 솔로몬의 성전이 죄악으로 더러워 질 때에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왕을 통하여 불태워 버리셨습니다. 음란과 우상으로 더러워진 스룹바벨의 성전을 허시고 돼지 피로 더렵혀진 헤롯의 성전을 깨트리신 하나님께서는 주의 성전인 우리 몸을 더럽히면 멸하시겠다고 하시었습니다. 성결한 몸으로 영광을 돌리자.

주님에게 팔린 몸인고로
오늘의 우리 몸은 우리 주께서 은금보화 이상으로 귀한 십자가와 보혈로 사신 몸이니 이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림이 당연하지 않을까? 보라 이런 천하게 가치 없는 냄새나는 더러운 몸이 하나님이 계시는 전으로 변하다니! 지옥에서 멸망 받을 몸이 영생을 얻을 존귀한 몸으로 바뀌다니 !
마귀의 자식으로 보낼 수 밖에 없는 몸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몸으로 팔리우다니! 어찌 영광을 안 돌리고 지내랴!
하나님께 받은 몸이란 성부의 소유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요 성전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성신의 소유가 되었다는 뜻이요. 피로 사셨다는 것은 성자 예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뜻인 것입니다. 이처럼 성부 성자 성신의 소유가 된 이 몸이라면 어찌 하나님께 영광을 안 돌릴 수있으랴!

「샀다」는 것은 「얻었다」 「되었다」 「만들었다」 보다는 공로와 댓가(代價)가 든 것을 의미합니다. 과연 그리스도교가 은혜의 종교라는 것은 우리 편에서 하는 말이지 성부 성자 성신께서는 무한하신 노력과 공적이 많은 것입니다. 성부는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셨고 성자 예수는 33년 간의 눈물, 땀, 피를 쏟으셨고 성신은 우리 일생을 보호 지도 완성하시기에 무한한 탄식을 하시니 어찌 샀다고 안하겠는가. 이처럼 고귀하게 사게 된 우리이니 하나님께 영광을 안 돌리겠는가.
자! 이제는 빌립보 1장 20절을 생각하자.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하려하나니」한대로 생사고락 간 하나님께 영광만 돌리는 생활을 하도록 목표를 세우자. 이런 이치를 참으로 알게된 바울이 일생동안 주의 종이 되었고, 베드로 요한 등 열 한 제자가 순교의 제물이 되면서까지 사도 노룻을 했고, 옛날 모든 성도가 다 그같은 성결 생활 축복 생활을 달게 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참으로 진리를 아는 진정한 기독자냐? 그렇다면 우리도 죽도록 충성하자 우리를 사게 된 주인에게 죽도록 충성하자!
롬 14:7-8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가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한대로 우리는 일분간도 자기를 위하거나 인간을 위해서 살지말고오직 우리 위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우리를 사(買)신 이를 위해서 살자! 그리고 그 주님을 위해서 죽기까지 하자!
그래서 영광을 돌리기로 결심하자!





손양원목사설교/예수를 아는 중에 자라가라  

예수를 아는 중에서 자라가라
에베소서3:14-19,고로새서1:9-11.베드로전서3:18

생명을 가진 자는 반드시 성장합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로 기독자는 중생한채 생명으로 30배 60배 100배로 자라야 합니다. 그러자면 예수를 잘 옳게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많은 기독자가 있습니다. 하나참 예수를 옳게 아는 자 얼마나 되는지?
예수에 대하여 설명하는 자는 많으되 예수를 아는 자 적고 예수를 몇 10년 믿었다고 자랑하는 자는 많으나 예수의 생명 성장의 진보를 보이는 자는 드뭅니다. 성경 책 속에 기록된 예수를 설명하는 자 많으되 자기 속에 계신 주와 같이 자라는 자가 희귀합니다. 예수를 두뇌(頭腦)속에 지식적으로만 알지 말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탕 맛을 알자면 먹어 보아야 합니다. 「네가 미국에 있는 월슨 대통령을 아느냐」 하고 물을 때 「네!」하고 대답했다면 그 의미는 무엇인가 사진으로 보아서 아는 수가 있고 신문 지상에 발표된 것을 보고 알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아는 것은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안다는 것은 그의 마음 까지 그의 행동까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알자면 사귀어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귀어야 참으로 깊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친구를 사귀면 처음에는 얼굴, 다음에는 체격과 그의 언행(言行),나중에는 그의 성격까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만큼 되어야 참으로 그를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누구로 알았으며 얼마나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을 생각 할 때에 우리는 예수를 아는데 힘써야 하겠습니다. 예수의 생명을 가진 기독자라면 그리스도를 아는데 성장해야 합니다.
베드로 후서 1장 속에는 예수를 안다는 말이 4차례나 있습니다.(2,3,8,12) 2장20절에도 있습니다.
예수를 앎으로 해서 5대 소득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예수를 아는 자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습니다.
예수를 안다면서 예수를 믿는다면서 근심과 걱정을 하는 자는 아직도 예수를 모르는 자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고 하고도, 나는 나대로 걱정과 근심에 잠겨 있다면, 이는 안 믿는다는 말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맡겨 놓고도 걱정 할 바에야 믿으나 마나 한 일이 아닌가. 입으로는 예수를 믿어 복 받겠다고 하면서 내심으로는 그대로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밤낮 2중 3중의 근심 고통만 하고 있는 셈 입니다.
사죄 받은 자리에 앉아서 죄의 고통을 하고 있고, 영광의 면류관을 쓰고 앉아서, 세상의 썩은 면류관이 부러워 한탄하고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서 마귀의 신세를 그리워하고 있으며, 영원 축복을 얻은 자가 잠간 세상의 것에 취하고져 하니, 이 이찌 참으로 예수를 알았다고 할 수 있으랴. 그러니까 참으로 예수를 아는 자리에 들어 섰다면 그러한 모순된 일은 하지 않게 되고, 필연적으로 은혜와 평강을 맛보게 되는 법입니다.

2. 예수를 알아야 예수의 것을 내게 채을 수 있습니다.(엡 3 19)
예수의 것이 내것 되게 하기 위하여 예수를 알아야 하겠습니다.요 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한대로 예수께서는 은혜와 진리를 가지시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다 받게 하고져 하심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 한가지가 있습니다. 오직 예수에게 한하여서는 예수의 가지신 것을 내가 알아가는 대로 다 낱낱히 내 것이 되는 일입니다. 예수의 사랑, 인간 지혜에 넘치는 예수의 사랑의 그 넓이, 길이, 높이, 깊이의 모든 충만한 것을 내게 충만하게 하십니다. 아! 위대하다. 아무리 히말라야 산봉이 높다 해도 인지(仁智)로 측량할 수 있고, 태평양 같은 대양도 그한도가 있어서 그 넓이를 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충만한 은혜와 진리는 무한대로 영원무궁합니다.
그런데 요한같은 사도도 은혜와 진리의 충만을 알았고, 바울도 삼층천까지 올라가 보았는데, 이같이 얼마나 예수를 알기 위하여 노력을 하고 있는지! 오늘날 신자들 중에는 예수를 믿는지 안 믿는지 모를 정도로 지내는 이가 많습니다. 우리는 결코 그렇게 되어서는 참 신자가 못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지신 것은 모두가 우리가 이해하고 또 믿는대로 우리 것이 되는 법입니다. 예수님의 성결함, 선(善)함, 거룩함, 지혜,능력 등 다 내 것이 됩니다. 무엇이 있는것 같으나 실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예수의 곤고,천대, 십자가의 죽음 같은 것은 우주에 충만한 은혜와 진리가 되는 것이니,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것으로 삼도록 합시다.

3. 예수를 알면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마 11:29)
신자의 큰 복은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되려면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옳게 아는데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 중에는 기독교를 졸업한 듯한 사람이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어떤 직분이나 맡으면 어지간히 된 줄로 압니다. 그래서는 예수에 대해서 더 알아 보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신앙의 장성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죽어서 천당에 가고져 하는 소망 정도로 만족합니다. 예수의 길이, 넓이, 높이,깊이를 알아 나도 겸손 충만한 알곡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참으로 아는 자가 겸손해 지는 것이 마치 잘 익은 알곡이 고개를 숙임 같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의 명령에 순종하여 나중에 고기 많이 잡게 되고 나서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했습니다. (푸랜시쓰의 기도 이야기, 어거스틴의 최후에는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야기) 바울도 「나는 죄인중에 괴수로다」하지 않았는가. 일본의 유명한 아오기(淸水)선생도 「나는 벌레이지 인간이 아닙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를 알아 갈수록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발견하게되고 따라서 겸손해지는 법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나는 점점 작아져가는 나요,천한 나요, 약한 나요, 껍데기 뿐인 나요,공허한 나인 것을 알게 됩니다. 신자 중에 아는 체 하는자,강한 체 하는자,된 체 하는자는 아직도 예수를 옳게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차라리 모르거든 가만히 눈 감고 있기 바랍니다. 시험 중에 제일 큰 시험은 자기에게 자기가 당하는 시험인 것입니다.
인간들이 자기를 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죄인됨을 알고 부족을 알고, 무능력을 알고, 인간 자체를 깨닫는 것은 예수를 알아가는 자 만이 취할 수 있는 태도인 것입니다. 예수를 알아가는 겸손한 자에게는 예수의 충만이 그의 충만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어지간하다」하고 자족을 느낄 때가 오히려 위험천만한 때입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취했던 태도와 나는 죽을지언정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하던 베드로를 비교해 보라.

4. 예수를 앎으로 죄악과 환난과 시험을 이기게 됩니다.
예수를 잘 알게 될 때에 세상을 알고, 인간도 알고, 악마도 알고, 죄도, 의도, 선도, 악도, 구별해서 알게 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범죄케 하는 모든 사물이 있는 것을 알게 될 때에, 나도 싸울 계책(計策)이 나오게 되고 힘도 나게 됩니다. 오늘날 세상 보고 인심을 보니 어찌나 악한지 모르겠습니다. 천만가지 계교로 우리를 범죄하게 하는 것입니다. 밖으로는 대적(大敵)이 안으로 원수가 대활동을 하는 지금 세상입니다. 세상은 말세로서 가을 바람에 나무 잎 떨어지듯이 요란합니다.
그러나 이 바람에도 안 떨어지는 자는 주님을 잘 아는 자인 것입니다.왜 아직도 죄악을 못 버릴까,왜 독초를 즐길까,세상 육욕에 취할까,그것은 아직도 주님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옥수수 대를 빠는 아이들같이 세상 허영 육적인 향락에 취하지 말라, 왜 아직도 담배를 피울까,그것은 아직도 담배 맛을 예수 맛보다 더 잘 아는 까닭입니다.
빌립보 3장4~8보면,바을 사도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성 푸랜씨스도 '돈 전대를 말똥 위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어거스틴 선생도 '옛날 좋다던 것이 오늘에는 눈물로 변합니다' 고 했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를 참으로 알게 되면 반드시 이러한 체험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죄악과 시험과 환난과 고통을 이길 자도 오직 예수를 아는 자 뿐입니다.
무엇보다 더 좋은 예수를 알게 될 때에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아직도 죄를 짓고 시기와 원망과 불행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예수를 잘 알지 못하는 데서 그럴 것입니다.

5. 예수를 참으로 아는 자라야 낙심하지 않습니다. (요6:66-69)
오늘날 여러분이여! 예수의 참 맛, 참 예수를 알기 전에는 섰다고 생각하지 말라! 3년이나 따르던 가룟 유다가 오늘의 우리들보다 예수를 몰라서 팔았겠으며 세상을 사랑하던 데마는 우리보다 예수를 몰라서 세상 영광에 취하였겠는가? 과거에 믿다가 낙심한 모든 성도가 우리보다 성경을 몰라서 그렇게 되었겠는가. 오늘날 조선에 목사장로가 쓰러지고 넘어지는 것이 우리보다 못해서 그렇게 되는 줄 아는가, 예수를 알아가자. 오늘날 우리들도 참 예수를 아는 일에 일로(一路) 매진합시다. (폴리갑 이야기, 요 6:66~69 이야기) 예수를 따르던 가룟 유다도 떨어지고 말았다. 돈 몇 푼에 주일을 팔고 월급 몇푼에 성경을 파니 예수를 어찌 안다고 할 것인가?
알곡만 남으라. 욥 같이 하나님을 잘 알자. 요한이나 바울이나 베드로 같이 알아야 합니다.

ㅁ결 론ㅁ
그러자면 예수를 아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면
① 기도로 ② 성경으로 ③ 체험으로 ④ 명상으로 ⑤ 만물,만사 만행중에서 ⑥ 평범한 생활 중에서도 예수와 사귀면 예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알려고 일생을 산곡이나 암혈에서 지낸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나를 배우라고 하셨으니 더 말 할 것이 무엇이랴! 예수를 알면 예수의 것이 아는 사람의 것이 되는 것이니 이 어찌 복되지않으랴!